특집 | 현대 한국불교 10대 논쟁

1. 논쟁의 시작

황순일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많은 중요한 교리적 논쟁들이 단순한 오해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초기불교의 시원론(始原論) 논쟁 또한 일종의 오해에서 시작되었다. 2009년 권오민 교수는 《문학/사학/철학》(제17호)에 게재된 〈불설(佛說)과 비불설(非佛說)〉이란 논문에서 불설·비불설 논쟁이 부파와 대승 사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부파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있었던 논쟁이었다는 점을 다양한 예를 통해서 밝혀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부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는 친설을 기준으로 대승경전을 불설이 아니라고 한다면 아함경과 니까야(nikāya) 또한 불설일 수 없다는 어떻게 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주장을 했다.

빠알리 니까야를 예로 들어보자. 빠알리 삼장은 오랜 구전 기간을 거친 후 기원 전후에 스리랑카에서 문자화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비록 빠알리 삼장이 남아 있는 초기경전들 중에서 유일하게 경·율·논의 완전한 체계를 갖추고 있고 붓다의 가르침을 가장 충실하게 대변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빠알리 삼장이 부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친설을 가감 없이 기록하여 보존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AD 4~5세기경으로 추정되는 붓다고사(Buddhaghosa)의 활동 시기까지도 새로운 자료들이 계속해서 첨가되었고, 끊임없이 수정되고 보완된 흔적들이 빠알리 삼장의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현존하는 빠알리 경전은 300~400여 년간의 구전 시기를 거치고 400여 년간의 문자화 및 수정 시기를 거친 800여 년이란 장구한 역사의 산물인 것이다. 따라서 빠알리 경전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존하고 있는 친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초기경전을 대승경전과 동일선상에서 비교했다는 점에서 초기불교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해온 초기불교 중심주의자들을 충격에 빠뜨렸고 빠알리 경전을 중심으로 초기불교를 연구해온 많은 학자를 치열한 토론의 장으로 이끌었다. 이 논쟁은 교계 신문인 〈법보신문〉의 지면을 통해 대론(對論)의 형식으로 오랫동안 진행되었으며, 치열하고 치밀한 학문적 토론이 단순히 학자들 사이의 사변적 토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반 불자들에게까지 광범위하게 퍼져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상 불설·비불설 논쟁은 불교 토론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초기불교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2. 논쟁의 쟁점

불자라면 누구나 부처님의 원음을 한번 들어보고 싶다는 아련한 희망을 가지고 있다. 1990년대 이래 많은 불자들이 이러한 희망 속에서 남방불교의 빠알리 경전들을 접하게 되었고 남방 위빠사나(vippasana) 명상을 접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영국의 빠알리경전협회(Pali Text Society)에서 출판된 빠알리 삼장(Pali tipitaka)의 권위는 절대적이었으며 빠알리 삼장을 유지하고 보존해온 남방 테라와다(Theravāda) 불교는 초기불교의 연장선 위에서 받아들여졌다. 당시 불교학자들 사이에서도 인도어 원전을 중심으로 초기불교의 연구를 중시하는 태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붓다의 가르침이 담겨 있는 초기불교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의 반대급부로 대승불교의 경전들은 불설이 아니라고 하는 대승비불설이 폭넓게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도도한 초기불교 중심주의적 흐름 앞에서 대승불교와 선불교에 기초한 한국불교는 점차 초라해져 가고 있었다.  

사실상 권오민 교수는 설일체유부와 경량부라는 인도 북서부의 부파불교 논서들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초기불교 중심주의적 흐름에 반격을 가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권오민 교수 또한 넓은 의미에서 초기불교 전공자에 포함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몇몇 사람들로부터 왜 초기불교를 공부한 이가 대승불설론을 옹호하느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대승불교에 의해 혹독하게 비판되었던 설일체유부의 아비달마 문헌을 연구하면서 오히려 대승불교의 입장을 더욱더 잘 이해하게 되었고, 대승비불설이란 것은 불교사상사에 대한 무지와 폐쇄적 신념에 기초한 것일 뿐이며 교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진실일 수 없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그는 북서인도의 설일체유부나 경량부의 실례를 보여주면서 초기경전이 각 부파의 교학적 견해에 따라 취사선택되고 때론 불설의 내용까지 바꾸면서까지 새롭게 편찬된 경전들로 대승경전의 편찬방식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부처님이 친히 말씀하셨다는 친설을 잣대로 한다면 대승경전뿐만 아니라 초기경전도 동일하게 비불설일 수밖에 없다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여기에 대해서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과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전재성 회장이 대승경전과 다른 초기경전의 특성을 바탕으로 신문지면을 통해 반박했다. 스리랑카에서 공부했던 마성 스님은 대승경전을 후대에 불교도들이 붓다의 가르침을 재해석해 불설로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붓다의 친설이 담긴 빠알리 니까야와 다르며, 초기경전이 가감과 변화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불설이 아니라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원래 가짜가 진짜 혹은 원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진짜는 자기가 진짜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그냥 무시하면 된다.’는 원조 논쟁을 통해서 대승경전이 부파불교를 ‘비구의 복색을 한 악마’라고 비난하고 있음에도 남방 테라와다 교단을 비롯한 부파불교 쪽에서 전혀 반응이 없다는 것은 붓다의 가르침을 계승한 전통의 입장에서 대승경전의 주장에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판단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빠알리 삼장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은 남방 테라와다 불교의 전통성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이며, 빠알리 경전은 지난 2,500년간 단일 부파에서 계승해 온 정통성이 있는 경전이란 점을 강조했다. 그는 남방 테라와다 교단을 ‘장로들의 정교(正敎)’라는 뜻으로 해석하면서 불멸 직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근본결집의 직접적인 결과물로 보고 있다. 사실상 남방불교 교단은 스스로를 ‘붓다의 적자’로 생각하고 있고, 2,500년 동안 단절 없이 전통을 계승해왔으며, 파승으로 떨어져 나간 다른 부파를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를 다른 부파들과 결코 동일한 선상에서 보지 않았다. 바로 이러한 긍지와 자부심으로 남방 테라와다의 전통이 고수되었으며 빠알리 삼장의 권위가 유지될 수 있었다고 반박했다.

마성 스님의 반론에 대해 권오민 교수는 특정한 부파에 의해 승인된 경전은 특정한 부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경전일 뿐이며 붓다의 친설이 담겨 있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고 했다. 그는 남방 테라와다 교단이 그토록 자랑하는 근본결집에 대해서 북서인도의 유명한 논사인 세친, 청변, 중현 등이 이미 산실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근본결집에서 송출된 내용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경로를 거쳐 현존의 아함과 니까야로 발전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문자로 작성되기까지 300여 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우리는 모르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또한 남방 테라와다 불교에서 전승한 빠알리 삼장만이 불설이고 정법이라는 것은 맹목적이고 폐쇄적 신념에 기초한 것일 뿐으로, 객관적이고 타당한 증거를 결여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편 전재성 회장은 마성 스님이 대승경전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부처님의 친설이 아님은 명백하다고 주장한 것에 지나친 표현이 있지만, 형이상학적인 논쟁으로 해결되지 않는 논쟁의 핵심에 역사성을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탁월한 반론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논지를 펼치고 있다. 그는 인도 마우리아 왕조 아쇼까 왕의 깔껏따 바이랏(Calcutta-Bairāṭ) 비문에 나타난 몇몇 경전의 명칭들과 빠알리 삼장의 연관관계를 살펴보면서 남방 테라와다 교단의 정통성에 관련된 까타왓투(Kathāvatthu)의 제3결집과 관련된 언급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빠알리 경전의 완성은 일종의 국가적인 사업으로서 존재하지도 않거나 역사적으로 단명했던 다른 부파의 사적인 소의경전들과 수평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반박했다. 그리고 초기경전은 고층, 대승경전은 신층에 속하는 것으로 구분하고, 고층에는 역사적 부처님의 친설이 담겨 있고 신층에는 역사적 부처님의 친설과 깨달은 여러 후대 부처님들의 가르침이 담겨 있다고 결론지었다.

권오민 교수는 여기에 대해서 인도불교의 다양성을 언급하면서 남방 테라와다 불교의 전승만이 불설 또는 친설이라는 것은 맹목적인 주장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경전의 성립과 관련해서 불멸 직후 마하가섭 주도의 제1결집, 밧지 족 비구들의 10사 비법(非法)에 따른 제2결집, 아쇼까 왕 시대 목갈리뿟따 띳사 주도의 제3결집으로 정리하고 있다. 하지만 남방과 북방의 분파에 대한 전승들을 자세히 비교해보면 이 문제가 이렇게 단순한 도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특히 그는 제3결집과 관련해서 아쇼까 왕의 권위를 내세우는 부분에 대해서 남방 테라와다 불교의 역사서에 나타난 내용이 학계에서 실제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필자 또한 이 논쟁에 끼어들어서 초기경전과 대승경전 사이에는 전승의 방식에서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외형적으로 보았을 때 빠알리 니까야도 한역 아함경도 현재의 형태로서는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부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달하고 있는 문헌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을 친설이란 잣대를 통해 동일선상에 놓고 보기는 어렵다는 점을, 구전 전통이 강한 초기경전과 문자 전통이 강한 대승경전의 성립과 전승이란 측면에서 지적했다. 초기경전이 일정한 기간 동안 합송을 통해 개인적 견해가 들어가기 어렵고 변형이 쉽지 않은 구조를 지니면서 전승되었다면, 후자는 개개인이 홀로 사경하는 것으로서 사경자의 의도에 따라 다양한 오기와 은밀한 가감이 이루어질 수 있는 구조를 지녔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따라서 오랜 세월 점차 변형되고 다양한 사회적, 경제적, 사상적 배경에 노출되면서 번잡해져 버렸지만, 초기경전의 어디엔가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붓다의 친설이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권오민 교수는 전승한 교법에 따라 서로의 경을 부정하게 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는 설일체유부의 논사 중현의 언급을 인용하면서, 여러 부파들 사이에서 각자가 전승한 경이 다를 경우 어떻게 진짜 불설을 판단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통해서 불설·비불설 논쟁이 부파불교 교단들 사이에서 일어났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때 마련된 것이 불설에 대한 새로운 정의로서 대승·소승 모두에서 암묵적으로 승인되었는데 그것은 붓다의 교법을 관통하는 정신으로서 법성이 불설의 판단 기준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초기불교, 부파불교, 대승불교의 시대적 도식화를 비판하면서 부파불교와 구분되는 독립된 실체로서 대승불교를 보기 어렵다는 점을 일본과 서구의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제시하며 날카롭게 지적했다. 이어서 다양성의 시대에 하나의 진리에 매달려서는 안 되며 구호와 선전의 불교학을 또한 넘어서야 한다는 이야기로 논쟁을 마무리했다.

 3. 논쟁의 결과

한국에서 초기불교 시원론 논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서구에서는 오랜 기간에 걸친 문헌학적 분석과 인도 대륙의 북서부 산악지역에서 새로 발견된 불교 문헌들의 영향으로 남방 테라와다 불교의 빠알리 삼장이 그동안 누려왔던 독점적인 지위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남방불교권에서 빠알리어는 마가다어(Magadhi)로서 붓다의 말씀(Buddhavacana)이자 친설로 간주되어 왔다. 하지만 아쇼까 비문·석주와 빠알리어의 문헌학적 비교연구를 통해서 빠알리어는 붓다가 활동했던 인도 동부지역의 동부방언(Eastern Prakrit)이 가지는 언어적 특징보다 인도 중서부 지역의 서부방언(Western Prakrit)적 요소들을 더욱 많이 지니고 있음이 드러났다. 또한 네팔과 인도 중남부 지역에 발견된 몇 장의 패엽경과 금석문들을 제외하고 현존하는 대부분의 빠알리어 경전들은 17세기 이후에 동남아시아 불교의 영향하에 새롭게 필사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았을 때 기원전 2세기까지 연대가 거슬러 올라가는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카로슈티 문자로 기록된 간다라 불교문헌들의 발견은 초기불교 학자들에게 충격적인 것이었다. 비록 북서인도에서 발견되는 불교문헌들은 빠알리 삼장과 같이 단일하고 완전한 체계를 갖추고 있지는 않지만, 코탄 간다리 《담마빠다(Dhammapada)》나 아프가니스탄에서 발견된 근본설일체유부(Mūlasarvāstivāda) 장아함경(Dīrgha āgama) 등과 같이 거의 완전한 형태를 보여주는 것도 있다. 사실상 이러한 일련의 흐름의 통해서 남방 테라와다 불교의 빠알리 삼장이 현존하는 경전들 중에서 가장 고층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면서 누려왔던 독점적인 지위가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사실상 국내에서 벌어진 불설·비불설 논쟁은 한국적인 형태로 테라와다 불교의 빠알리 삼장이 가지는 권위가 사라져 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대승경전이 붓다의 친설로 간주될 수 없다면 동일한 논리로 남방 초기경전도 또한 붓다의 친설로 간주될 수 없다는 언급을 통해서 대승경전과 빠알리 경전이 동일선상에서 비교되었다. 그리고 몇몇 초기불교 학자들의 반박에도 불구하고 남방 테라와다 불교의 빠알리 삼장이 다른 경전들에 비해서 더 높은 권위와 정통성을 가진다는 결정적인 논거는 도출되지 못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방대하고 번잡한 초기경전에서 붓다의 가르침 즉 친설을 가려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남방 테라와다 전통의 빠알리 삼장은 많은 장점과 함께 많은 약점을 가지고 있다. 빠알리 삼장은 구전 기간 동안 합송이라는 자체적인 정화장치를 통해서 오류와 변형이 최소화되었다고는 하지만, 문자화 이래 붓다고사가 현재의 형태로 빠알리 삼장을 가다듬고 주석서를 번역하는 5세기까지 끊임없이 수정되고 보완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수정되고 보완된 빠알리 삼장이 단계적으로 미얀마와 태국과 같은 동남아시아로 전해졌고 그곳에서 또다시 심각한 형태적 변형을 거치게 된다. 그 이후 스리랑카의 빠알리 삼장이 1500년경부터 시작된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식민지 지배를 거치면서 불교전통의 쇠약과 함께 거의 사라지게 되자, 1750년경 태국으로부터 빠알리 삼장이 스리랑카로 역수입된다. 현존하는 스리랑카의 가장 오래된 필사본들은 이렇게 역수입된 태국과 미얀마의 빠알리 경전을 다시 필사한 것으로서 스리랑카의 단일한 전통에서 중단 없이 보존해온 경전이라고 이야기하기도 어렵다.

따라서 현존하는 빠알리 삼장이 수천 년에 걸친 남방 테라와다 전통의 붓다의 가르침을 보존하려는 처절한 노력의 결과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단계적인 가감과 변형 그리고 일정한 단절을 겪었던 빠알리 경전에서 붓다의 직접적인 가르침인 친설을 찾아낸다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반성이 이 논쟁을 통해서 확인된 것이다.  

4. 논쟁의 추가적 해명

불설·비불설 논쟁의 한가운데 있었던 권오민 교수, 마성 스님, 전재성 회장이 가지는 입장의 차이는 이들의 주장에 바탕이 되는 각각의 부파들이 초기경전에 관해 가지는 태도를 통해서도 확실하게 구분된다.
전자의 경우 설일체유부와 경량부로 대표되는 북서인도 부파들의 초기경전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와수반두(Vasubandhu)는 자신의 성업론(Karmasiddhiprakaraṇa)에서 석궤론(Vyākhyāyukti)를 언급하며 근본결집이 이미 파괴되었다(mūlasaṃgītibhraṃśa)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이는 북서인도의 부파불교 전통에서 경·율·논의 형성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근본결집(mūlasaṃgīti)의 내용이 더 이상 고스란히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북서인도의 몇몇 부파들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자의 경우 스리랑카의 불교교단들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이었던 마하위하라(Mahāvihāra)의 빠알리 삼장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마하위하라는 스스로를 테라와다로 칭하면서 자신들은 거대한 니그로다나무와 같고 나머지 부파들은 니그로다나무에 생겨난 가시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붓다의 가르침이자 친설을 오직 자신들만이 빠알리 삼장의 형태로 보존하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다. 따라서 마하위하라 전통에 있어서 근본결집은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으며, 빠알리 삼장이 바로 근본결집이고 근본결집이 바로 빠알리 삼장이 된다. 사실상 마하위하라의 존재 이유가 자신들이 보존하고 유지하고 있는 빠알리 삼장에 있는 것이다.

붓다고사가 스리랑카를 방문한 5세기, 마하위하라는 아와야기리(Abhayagiri)와 제타와나(Jetavana)라는 부파들과 수도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었다. 마하위하라는 이들과의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자신들이 유지하고 있는 빠알리 경전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자신들의 아비담마(abhi-dhamma) 교리체계를 재정비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사실상 붓다고사는 마하위하라의 빠알리 아비담마 논서들을 붓다의 가르침에 포함시켜 다른 부파들의 논서에 대해 비교우위를 점할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붓다고사가 오늘날 남방 테라와다 불교의 교리적 토대를 확립했다는 점에서 그에 의해 경·율·논의 체계가 갖추어진 빠알리 삼장을 중심으로 초기불교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붓다고사의 깊은 영향을 받게 된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는 스리랑카의 가장 보수적인 교단이었던 마하위하라의 수계전통과 이들에 의해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에서 보존되어온 빠알리 삼장의 권위를 절대시하는 랑카중심주의적 태도(Lanka Centric attitude)를 키우게 된다. 이들에게 남방 테라와다 불교는 초기불교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붓다 당시의 불교가 거의 변하지 않고 옛 모습을 그대로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초기불교 시원론 논쟁의 진정한 의의는 마하위하라로 알려진 스리랑카의 가장 보수적인 교단이 1,500년에 걸친 장기간의 노력을 통해 치밀하게 만들어온 빠알리 삼장의 권위와 정통성이란 체면으로부터 한국불교가 깨어나는 계기를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 논쟁의 의의

초기불교 시원론 논쟁은 〈법보신문〉의 지면을 통해서 두 달 넘게 흥미롭게 진행되었다. 이 논쟁은 단순히 사변적인 담론의 수준에 머무르지 않았으며 다양한 문헌들과 역사적 사료들을 바탕으로 풍부한 학술적 성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상 분량이 제한된 신문의 지면을 통해 논쟁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논쟁에 참여한 논자들에 의해서 효과적으로 다루어졌다. 또한 서로가 상대방의 주장을 정면을 반박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고 주제에 대한 논박은 논자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신문의 댓글을 통해서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사실상 이러한 측면은 불교학이 새로운 모습으로 대중들에게 다가가는 모습으로 비쳤으며 불교계에는 신선한 충격으로 학계에는 새로운 바람으로 전해졌다.

특히 이 논쟁은 당시 학계와 불교계에 남방 테라와다(Theravāda) 불교의 빠알리 삼장(Pali tipiṭaka)의 대한 연구와 위빠사나 수행이 널리 확산되는 시점에서 한국불교의 정체성과 시대적 당면과제를 재검토할 수 있는 단초를 흥미진진하게 제공했다는 점에서 매우 시의적절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실상 이 논쟁은 난해하고 방대하며 접근이 어려웠던 중현의 《순정리론》을 오랜 시간에 걸쳐 연구하고 번역한 권오민 교수의 학문적인 열정과 끊임없는 노력 없이 설명하기 어렵다. 그의 치밀하고 학문적인 태도는 불설의 기준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이 가진 함의를 이해하기 쉬운 용어들로 풀어내고 있으며 풍부한 원전자료의 인용과 날카로운 비판적 논의를 통해 한국불교학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고 볼 수 있다. ■

 

황순일 / 동국대학교 불교학부 교수. 동국대 인도철학과, 동 대학원 철학과, 영국 옥스포드대 졸업(박사). 태국 출라롱콘대, 카자흐스탄 알파라비 국립대학 교환교수와 일본 사이타마대학 객원교수 역임. 주요 논문으로 〈무기설을 통해본 무여열반의 의미〉 〈설일체유부(Sarvāstivāda)에서 개념과 명칭〉 등이 있고, 저서로 Metaphor and Literalism in Buddhism, The Doctrinal History of nirvana, Sermon of One Hundred Days: Part On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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