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없이 불교 믿는 행복

영어권에서 시작해 어느덧 세계 주류 철학이 된 분석철학을 이끄는 철학자들 가운데 불교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서양철학계에 소개해 온 학자들은 몇 되지 않는다. 이들 가운데서는 듀크대학의 오웬 플래나간(Owen Flanagan) 교수가 그 대표적 학자인데, 그의 최근 저서 《보살의 뇌: 자연화된 불교》가 박병기 교수와 이슬비 선생의 번역으로 한국에서 출판되었다.

필자는 2년 전 브라운대학에서 연구년을 보낼 때 김재권 교수의 제안으로 이 책을 5주에 걸쳐 함께 읽으며 토론한 경험이 있다. 형이상학과 심리철학계 최고 권위자인 김재권 교수는 오래전부터 불교철학에 관심을 가져왔는데, 플래나간 교수가 불교와 관련된 책을 낸 것을 알고는 필자와 토론 모임을 제안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불교 및 불교철학 입문서들이 쓰여 왔지만, 서양의 주류 철학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단지 불교철학 입문서가 아니라 불교철학으로 분석철학의 문제들을 서양철학계에서 인정되는 방식으로 논의한 몇 안 되는 서적 중의 하나이다.

이 책의 제목 《보살의 뇌: 자연화된 불교》를 보면 독자들은 이 책이 마치 심리철학 및 인지과학의 주제들을 불교철학으로 논의하고 있을 것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역자들이 적절하게 새로 붙여 놓은 부제 “불교도가 되지 않고도 불교적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가 보여 주듯이, 이 책의 반 이상은 실은 윤리학의 주제들을 진지하게 논의하고 있다. 세계와 그 안에서의 우리 삶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불교의 궁극적 목표라고 할 때 마음과 몸(뇌)의 관계를 연구하는 심리철학과 인지과학의 성과들을 행복한 삶에 이르는 도구로 사용함이 마땅하겠듯이, 이 책의 1부에서는 먼저 비교신경철학을 논의하고 곧 2부에서 윤리학의 주제들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런데 불교를 철학적으로 진지하게 공부해 본 사람들에게는 ‘자연화된 불교’라는 표현이 다소 어색하게 다가올 수도 있겠다. 그 이유는 불교가 자연화되어 있지 않은 적이 없는데 굳이 자연화된 불교를 논의한다는 것이 좀 생뚱맞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서구의 종교와 철학이 절대적 신과 영혼이라는 형이상학적으로 큰 부담을 가져야만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자들을 상정하고서야 그들의 윤리적 가르침을 말할 수 있어 왔음에 비해, 불교는 이런 절대적 신과 자아 또는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서도 잘살 수 있는 행복의 윤리를 가르쳐 왔다. 석가모니 부처 생존 당시의 인도 또한 자아 혹은 영혼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가르침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나 불교는 이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무아론(無我論)을 바탕으로 그 체계를 이루어 갔다. 그래서 불교는 처음부터 무척 자연주의적인 가르침이었다.

대다수 서양인들은 불교도 종교이니 비자연주의적 또는 초자연주의적 요소를 머금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서양식 종교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운 우리에게는 불교가 처음부터 자연주의적이라는 것이 전혀 새로울 이유가 없다. 한편 우리가 플래나간이 여러 번 언급하고 있는 스티븐 배츨러의 주장처럼 불교가 윤회나 업 같은 자연주의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요소들을 제외하고도 가능한 철학 및 윤리의 체계라는 점에 주목해 볼 수도 있겠다. 그러면 플래나간의 ‘자연화된 불교’라는 것을 윤회나 업같이 원래 불교 고유의 가르침은 아니지만 당시 인도 문화와 함께 섞여 들어온 비자연주의적 요소들을 제외한 불교로 받아들여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이렇다면 ‘자연화된 불교’라는 말이 우리에게도 조금은 새로울 수 있겠다.

분석철학과 불교철학 두 전통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무리 없이 읽을 수 있게 하려고 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이 책의 논의는 비슷한 내용을 다른 각도에서 반복하면서 설명하고 기술하여 독자들이 어렵지 않게 책을 읽어 나갈 수 있다. 플래나간은 분석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 대다수에게 잘 알려진 유명한 논제와 주장들 몇 개 그리고 한국의 불교도들 대부분에게 익숙할 불교의 교리와 가르침 몇몇만을 가지고 마치 학생들을 상대로 강연하듯이 쉽게 에세이들을 썼다. 제1부 신경철학에 대한 에세이는 보통사람들에게는 상식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는 심리철학 연구가들에게는 상식적이 아닐 수도 있는 논의들을 전개하고 있다. 플래나간의 결론은 보살의 뇌를 아무리 깊이 연구해도 깨달음이 무엇인가를 알 수는 없다는 우리의 상식이다.

명상에 깊이 빠져 평온함을 얻은 승려의 뇌에서 활성화되는 부분은 사람들이 기분이 좋을 때 활성화되는 부분과 그 부위가 같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좋다는 것이 깨달았거나 행복하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덕과 계율, 지혜와 자비로 평생을 사는 보살의 뇌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과 권력을 움켜쥔 사람의 뇌가 그들이 만족감을 느낄 때 같은 부위가 활성화된다고 해서 그들이 같은 깨달음과 같은 행복을 이룬 것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하며, 따라서 뇌신경과학으로는 깨달음과 행복의 본성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심리철학 연구가들 가운데 심신(心身) 동일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실에 좌절감을 느끼겠지만, 행복은 뇌의 상태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수행자가 처한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성취되고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라는 점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상식이다. 뇌의 상태로만 볼 때 위의 두 사람이 질적으로 전적으로 동일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는 보살의 행복감과 연결되고 또 다른 하나는 건강치 못한 만족감만을 나타내 줄 뿐이다.

위에서 본 것처럼 플래나간은 환원주의적 물리주의의 화신인 심신(心身) 동일성 이론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달라이 라마처럼 과학과 물리 세계의 영역을 초월해 있는 어떤 신비한 의식의 상태를 인정하려는 입장을 옹호하지도 않는다. 그는 의식적인 마음이 지금까지 연구된 것들을 넘어서는 ‘가장 복잡한 생물학적 현상’이라고 보아야 한다며 제1부를 다음과 같은 자연주의적 결론으로 마무리한다: “의식적인 마음은 우주의 자연적 일부로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의 모든 경험이 오직 여기에 존재하는 이 자연적 세상 속에 있는 체화된 우리의 신경 체계 안에서 일어난다는 저항할 수 없는 증거에 직면하여 불교나 어떤 다른 영적 전통으로부터 황홀경, 혼란스러움 또는 신비주의와 같은 것을 더 이상 요구할 필요가 없다.”

제2부의 제목은 ‘자연철학으로서 불교(Buddhism as a Na-tural Philosophy)’인데, 플래나간이 이 제목으로 의도한 바는 ‘자연주의 철학으로서 불교’다. 플래나간은 불교의 가르침에 동의하며 ‘덕(그리고 이성, 수행과 마음챙김)은 일반적으로 신뢰할 만한 행복의 원인이다’라고 주장한다. 상식적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는 이 주장을 위해서도 플래나간은 성실한 분석철학자답게 서양의 여러 윤리학 이론과 불교의 가르침을 설명 비교 대조시키며 차례차례 그의 결론으로 이끌어 간다. 여기서 그의 논증을 모두 살펴볼 수는 없겠지만, 필자가 이 책을 읽을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두 문제를 간단히 다루어 보겠다: 덕(德)과 무아(無我).

플래나간은 덕이 어떤 형이상학적 실체가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질 또는 성향이라고 강조한다. 서양에서는 희랍 시대부터 플라톤의 영향으로 정의 평등 정직 등의 덕이 어떤 형이상학적 세계에 완벽한 상태로 존재하고 우리 세계에는 마치 그것들의 불완전한 모사품들만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되곤 했다. 그러나 불교에는 이렇게 형이상학적으로 부담스러운 존재자들이 없다. 덕이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기질 또는 성향(disposition)이다.

지난 20년 가까이 분석철학계에서는 성향(disposition)이 어떤 독립적 실체로서 물질세계와 동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물질세계에서 일어나는 일군(一群)의 현상들에 대한 ‘편리한 지칭’에 불과하다는 지극히 불교적인 견해가 논의되어 왔다. 김재권 교수는 수면제의 수면성이 각각의 수면제가 다른 화학물질로 만들어져 있어서 그것들이 같은 화학물질은 아니지만, 이들이 모두 사람들을 잠들게 하는 인과력이 있다는 우연성으로 인해 통틀어 수면제가 ‘수면성’을 가지고 있다고 불릴 뿐이라고 한다.

그래서 ‘수면성’이란 우리가 이렇게 다른 화학물질로 된 약들의 어떤 작용을 뭉뚱그려 부르기에 편리한 지칭어일 뿐 수면성이 어떤 형이상학적 세계에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단지 화학물질들뿐이지 ‘수면성’이라는 형이상학적 존재는 없다는 것이다. 덕을 말하는 윤리학에서, 플래나간이 말하는 것처럼 덕이 형이상학적 실체가 아니라 인격체가 가지고 있는 기질 또는 성향이라고 보는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수면제마다 다른 화학물질로 인해 체질이 다른 사람에게 다르게 작용하고 또 다른 동물에게는 다른 수면제를 써야 하듯이, 덕 또한 사람에 따라 또 상황에 따라 다르게 작용하고 드러나게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덕이란 어떤 형이상학적 존재자가 아니라 사람에 따라 또 그때그때 상황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덕스러운) 행동들을 뭉뚱그려 쉽게 지칭하려고 가정한 기질 또는 성향일 뿐이다. 말하자면 덕을 자연주의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심리철학에서는 수면성에 대한 위의 논의가 수면성을 물리 세계로 환원시킨다고 보겠지만, 인간세계의 덕을 말하는 윤리학에서 덕을 기질 및 성향으로 보는 것을 ‘덕의 자연화’라고 부르는 것이 더 무리가 없겠다.

그런데 무아를 가르치는 불교에서 어떻게 성향으로서 덕의 존재를 말할 수 있을까? ‘나’가 없다면 성향으로서 덕은 어디에 실현될 수 있는가? 이에 답하고자 플래나간은 인격(person, pudgala)의 개념을 도입한다. 비록 자아 또는 영혼은 없지만 우리가 편의상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 인격체(person)가 덕을 담지하고 있는 주체로 보면 된다는 일종의 ‘철학적 타협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플래나간과 가까운 사이인 마크 시더리츠 교수는 이미 2003년부터 자아가 없는 인격체라는 의미를 가진 ‘empty person’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또 같은 제목의 저술로 이런 견해를 상세히 전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플래나간은 인격체에 대한 논의보다는 오히려 불교의 무아(無我)의 가르침이 어떻게 이타주의와 자비심과 연관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진지하게 던진다. 무아(無我)라면 우리가 왜 그리고 어떻게 이타적이 되어 자비심에 충만하게 될까?

플래나간은 불교가 아쉽게도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의 결론이 성급하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이에 대한 설득력 있는 답변을 불교철학 저술들 몇몇 곳에서 읽어 왔기 때문이다. 시더리츠 교수는 무아의 깨달음이 이제 자신을 넘어서서 다른 인격체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에도 관심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여유를 주게 된다며 무아와 이타주의의 인과적 연관성을 주장해 왔다. 한편 조계종 교육원의 현응 스님은 공(空)이란 존재의 변화와 관계의 양상에 대한 지칭이라면서 이런 공의 진리에 대한 이해가 깨달음의 내용이라고 한다.

우리가 고정불변한 자신이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존재자가 다른 존재자와 관련되어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 존재세계임을 깨닫는다면 지금까지 자신만을 위해 투자해 온 노력과 관심을 다른 연관된 모든 존재자에게 돌려 사용하게 됨이 자연스럽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무아와 공에 대한 이해가 이타주의와 자비연민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플래나간의 문제는 그가 인도 및 티베트 불교와 일본의 선불교만을 주로 연구하고중국과 한국의 화엄종과 그 법계연기론을 많이 연구해 보지 않아서 그의 공에 대한 이해가 ‘본질이 없음’ 쪽으로 집중되어 있기에 그것의 이유인 ‘변화와 관계’ 쪽에는 초점을 맞추지 못해서 비롯된 것 같다. 그래서 불교의 이타주의와 자비심을 무아 및 공과 직접 연결시켜 보고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어 보인다.

이제 이미 허락된 지면을 초과했으니 마지막으로 번역에 대해 간단히 코멘트하겠다. 이 책은 무척 정성스럽고 겸손하게 번역되었다. 책의 첫 장부터 번역되는 모든 문장, 단어, 표현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였음이 확연히 드러난다. 그래서 대부분의 번역이 직역으로서 원문에 무척 충실하게 번역되었다. 그러나 가끔은 좀 과감하게 의역을 했으면 뜻을 더 쉽게 전달할 수 있었을 것 같은 부분도 있다. 번역함도 학문함이니 다른 학문함과 마찬가지로 조금은 과감할 때 더 좋을 수도 있다고 본다. ■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 철학과 교수(Minnesota State University Moorhead). 서울대학 철학과, 동 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미국철학회 아시아철학위원회장 역임(2005~2008). 저술로 “Natural Kinds and the Identity of Pro-perty,” “Jaegwon Kim: Conscience of Physicalism,” 〈유형물리주의와 기능주의 환원론의 만남〉 〈깨달음의 패러독스와 사적언어논증: 성철과 비트겐슈타인을 중심으로〉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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