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지속가능발전에 대한 불교의 지혜

1. 들어가는 말

인류가 고통을 겪는 다양한 문제 중 기아란 식량의 부족 상태, 즉 굶주림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본다면 어느 개인의 영양섭취가 매우 부족하여 건강한 생존에 필요한 최소 에너지를 얻지 못하고 심각한 영양실조를 겪는 상황을 의미한다. 오늘날 지구상의 많은 사람이 굶주리고 있다. 극심한 기아는 면역력 저하로 인한 전염병이나 영양실조로 인한 장애를 유발하고 심지어는 사망의 직간접적 원인이 된다.

인류 탄생과 함께 발생하고 지속해온 기아문제는 식량생산을 돕는 다양한 과학기술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심화되고 있다. 그런데 과거에 남북문제라고 불리던 지구적 차원의 빈부격차는 아프리카, 중남미, 아시아 대륙 등 남반구의 기아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선진국으로 분류된 북반구 내부의 빈부격차와 기아현상 또한 점점 더 심화하고 있어 이 실상에 대한 관찰 역시 기아문제 연구의 큰 축을 형성하게 되었다.

또한 기아를 유발하는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도, 과거에는 지역적이고 지엽적인 설명이 일반적이었다. 반면, 이제는 거시적이고 총체적인 분석이 중시되어, 세계화로 지칭되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이루어지는 불평등한 식량 분배가 기아의 주요한 원인으로 주목받는다.

그 관찰 범위를 지역적으로 국한하든 세계적으로 확장하든, 기아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빈부격차이다. 어느 지역, 혹은 어느 개인에게는 과잉소비와 비만이 문제가 되는 한편, 어느 곳에서는 기본 끼니도 해결하지 못해서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한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해마다 70억 명이 넘는 인류가 먹고 남을 만한 식량이 생산됨에도 불구하고, 식량 가격 조절이라는 미명하에 채 소비되지도 않은 식량이 폐기처분된다는 어이없는 현실이다. 또한 더 놀라운 점은, 기아에 시달리는 8억 4천만 명을 먹일 수 있는 양의 남은 음식물이 쓰레기로 버려지는 가슴 아픈 실정이다.

인간은 땅과 바다, 하늘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생명체들을 식량원으로 한다. 인류는 수천 년 전부터 이들 식량자원을 확보하고 기르는 과정에서 농업, 목축업, 수산업 등의 식량산업을 발전시켰다. 특히 농업은 인간 생존의 근간이 되는 행위로서 우리 조상들도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하여 농사와 농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 글에서는 농업을 중심으로 기아의 원인과 실상을 살펴보고, 이를 지양하기 위한 식량 증진 및 분배 방안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거대 식량 기업의 행태, 그릇된 식량생산 방식과 불평등한 분배체계, 환경파괴 등 제반 문제와 이에 대한 지속가능한 해결방안 및 그 시도를 살펴보겠다. 더불어 식량 문제 전반을 포용하는 불교적 관점도 다루어 보겠다.

2. 기아는 생산이 아닌 분배의 문제이다

기아란 식량의 부족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기아 상태에 놓인 개인 입장에서는 식량이 부족하지만, 전 지구적 차원에서 식량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현재 전 인류가 생산하는 식량의 약 3분의 1은 버려진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본다면 식량은 더 이상 ‘유용한 자원’이 아니라 오히려 환경오염과 그 처리비용을 유발하는 ‘유해한 쓰레기’의 처지로 전락하였다.

아프리카 등 일부 지역에서는 식사 한 끼도 해결 못 한 채 많은 이들이 굶어 죽어간다. 더 참담한 사실은 기아로 인한 사망자 대부분이 보다 우선적으로 대접받아야 할 사회적 약자인 아이와 환자라는 점이다. 반면 경제 선진국에서는 비만 치유와 예방에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고 비상시를 대비해서 많은 양의 식량을 비축하고 있다.

현재 지구 전체 인류를 부양할 정도의 식량 수요를 충족시키기에는 식량생산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주장은 대중에게 보편적 진실로 받아들여져 왔다. 하지만 식량 부족이란 개념은 허구일 뿐, 기아의 가장 직접적이고 중대한 원인은 잘못된 분배에 있다.

이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특성과 관련된다. 라페(Lappe)는 30년 전에도, 지금도 세계 식량 생산량은 인류 전체를 부양하기에 충분하며, 기아는 생산부족이 아니라 그릇된 분배로 인해 발생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한 식량이 부족하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그에 대한 우려를 확산하는 주체는 바로 유전자변형 식품의 필요성을 설파하는 다국적 거대 식량기업이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따라서 이처럼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설령 잉여식량이 있더라도 그 식량이 기아자에게 도달할 수 없다. 대부분의 기아자들은 빈곤으로 인해 굶주리고 있기 때문에 식량에 대한 구매력이 결여되어 있다. 이들에게 식량은 너무도 절실한 자원이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상품가치를 유지하지 못하는 재고일 뿐이다. 또한 판매되지 않은 잉여식량을 자선이나 원조 형태로 공급할 경우, 자본주의의 근간인 시장이 무너지므로 식량 무상기부 등 인도주의적인 활동은 기업으로부터 진정 어린 협조를 받기 힘들다.

3. 식량을 증산하자는 주장은 반생태적이다

미래의 인구 증가를 감안하여 식량증산을 하지 않으면 인류가 생존할 수 없다는 주장들이 있다. FAO 조사결과에 따르면 2050년까지 인류는 약 91억 명으로 불어날 전망이며 이로 인하여 곡물 생산은 50%, 육류생산은 80% 이상 증가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단선적인 시각에는 과연 지구가 그 정도 양의 식량을 생태적으로 건전하고 지속가능하게 생산해낼 수 있는지에 대한 당연한 검토가 결여되었다.

위와 같은 양의 식량증산을 주장하는 것은, 인류 전체가 현재 선진국 중산층이 누리고 있는 삶의 수준을 누려야 하고 또한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모든 사람이 현재 선진국 국민이 평균적으로 소비하는 만큼의 연료와 물을 사용하게 된다면, 지구는 그 총량을 감당할 수 없다. 사실 모순적이게도 인류의 기존 의식주 시스템은 지금과 같은 극심한 빈부격차가 존재하기 때문에 유지된다.

무분별한 식량증산을 선(善), 또는 당연한 과제로 간주하는 이데올로기 배후에는 농업 관련 기업의 프로파간다가 자리 잡고 있다. 이들은 생태계의 건전성에는 관심이 없으며, 사업에서 외부성(externality)을 고려하지 않는다. 식량증산의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이윤 극대화가 기업의 존재 이유이자 목표이기 때문이다.
만일 인류가 지구와 공생하기를 원한다면 인구 증가를 어떻게 뒷받침할지 고민하기보다는 이를 어떻게 억제할지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인구 증가는 거대 기업의 이익 증대와 쉽게 연결되는 반면에, 인구 억제는 기업의 고질적인 불황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시스템과 생태 시스템 사이의 근원적 갈등이 존재한다.

4. 농업이 자연 파괴 및 인간 수탈의 도구가 되다

인류는 약 일만 년 동안 농업을 영위해왔다. 그런데 200년 전에는 기계를 도입한 산업화, 100년 전에는 화학물질을 도입한 녹색혁명, 최근에는 유전자조작을 도입한 생명공학 등을 통해 농업의 양상이 다음과 같이 본질적으로 바뀌고 있다.

첫째, 일반화시켜 말하긴 어렵지만, 농업 발생 초기에는 식량생산의 목적이 소비에 있었다. 즉, 먹기 위해 생산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식량생산은 자본, 화학물질, 유전공학 지식 등을 소유한 기업이 담당하고, 식량생산 목적은 판매이다. 즉, 팔기 위해 생산한다. 과소 소비로 인한 기아문제나 과잉 소비로 인한 음식쓰레기 문제 등은 전혀 기업의 고려 요인이 될 수 없다. 애초에 자체 소비를 위한 생산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둘째, 인류가 손에 쥔 기술력은 생태계를 파괴하고 남을 만큼 강해졌다. 옛사람들이 모두 자연을 사랑하는 선량한 자연인들이었다는 생각은 과도한 낭만주의다. 과거에도 이윤을 위해서라면 자연 파괴를 서슴지 않을 부류가 있었겠지만, 당시에는 기술력 자체가 미약하여 인간의 힘으로 자연의 위력에 감히 도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 인간이 보유하게 된 위력은 과거의 순박한 기술력과 질적으로 상이하며, 기술 발전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는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산업의 발전이 야기한 기상 이변은 농작물 생산 감소와 농지 황폐화라는 유감스러운 결과를 낳는다. 전통적 곡창지역뿐 아니라 네팔같이 소규모 영농이 지속되어 온 지역에서도 생산량 증대에 초점을 둔 생산 방식, 과잉생산, 삼림 파괴 등이 토양 파괴를 일으키고 홍수 피해를 심화시킨다.

5. 식량생산 방식이 지속가능성을 잃다

인류 문명 중 일부가 수백 년, 수천 년을 존속한 이유는 그 문명의 작동 방식이 지구상에서 지속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문명의 존속을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가 식량생산 시스템의 지속가능성 여부이다. 식량생산이 지속가능하지 않으면 해당 문명은 황폐화와 기아로 점철된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이제 현대식 농업 형태의 비(非)지속가능성에 대해 두 가지 중대한 요소를 알아보자.

첫째, 화학비료의 폐해를 살펴보자. 식물은 흙에서 양분을 섭취하여 유기물을 만들어낸다. 동물은 식물을 먹거나, 식물을 먹은 다른 동물을 먹고 흙에 배설하며, 결국에는 사체가 되어 흙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지구적 차원에서 지속가능한 양분의 순환이다. 땅으로부터 식물이 뽑아 올린 양분이 생태적인 순환 고리 속에서 최종 포식자의 먹이가 된 뒤에 배설물 또는 사체의 형태로 다시 그 땅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그 흙에서는 양분의 탈출이 발생한다.

우리 선조들이 왜 그토록 똥오줌을 신성시하며 한 줌의 유실도 없이 농토로 환원시켰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배설물이야말로 흙에서 뽑아낸 양분의 변형태이며, 그것을 흙으로 돌려주지 않으면 흙은 점점 양분을 잃는다. 이는 식량생산을 지속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흙이 죽으면 결과적으로 문명이 죽는다. 식량증산이 최우선 목표였던 과거에는 화학비료에 의한 부작용이 깊이 논의되지 않았으나, 요즘은 이로 인한 염류 집적 문제, 산성화 등의 심각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인공 화학비료의 약점은 흙에서 유실된 양분과 동일한 양분을 흙에 공급해줄 수 없다는 점이다. 화학비료는 N, P, K, Ca, Mg 등 식물 성장에 중요한 요소들을 분석하고 그 정량을 배합하여 만든다. 그러나 아무리 정밀한 측정을 해도 유실된 양분을 그대로 계산하여 만드는 일은 극히 어렵다. 나아가 황폐해진 땅에 인공적 양분을 공급해서 건강한 흙을 되살리는 일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요즘은 한 지역에서 생산된 식량이 그 지역에서만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곳으로 흩어져 무작위로 분배된다. 따라서 농업이 계속 화학비료에 의존한다면 머지않은 미래에 농토에서 일어날 미네랄 결핍 및 불균형으로 인한 파국을 피할 수 없다. 농업의 지속가능성이라는 시각에서 볼 때 바람직한 순환은 해당 땅에서 나온 양분을 섭취한 후 만들어진 배설물을 그 땅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만일 국제무역과 식량 거래로 인해 이 순환이 불가능하다면 차선책으로, 어디에서 생산된 양분이건 그 배설물은 무조건 흙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이런 노력이 지속가능하게 식량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길이다.

둘째, 종자의 문제를 살펴보겠다. 클로펜버그(Kloppenburg)에 의하면 1930년대까지는 전 지구상에 걸쳐 농민들이 씨앗, 즉 재배품종에 대한 주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1930년대 이후부터는 소위 생명과학 산업이 생산품종을 결정하는 체제가 확립되었다. 게다가 최근에는 굴지의 농업생명공학, 유전공학, 농화학, 종자, 제약 등 식량 관련 분야의 회사들 간에 합병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곧 만들어질 한 초거대기업의 경우 전 세계 종자 수요의 4분의 1 및 농약 수요의 3분의 1을 생산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런 추세대로라면 각 지역의 역사적인 음식 문화를 간직한 귀한 토종 종자들은 말살되거나 사라질 것이다. 그리하여 세계 식량의 대부분이 소수 초거대기업이 특허를 가지고 독점 생산하는 개량종자들에 의존하여 생산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점차 토종 종자가 사라지면 농부가 기업에 더욱 의존하게 될 것이다. 기업이 터미네이터 종자를 생산하여 자가 채종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특허권을 이용하여 자가 채종 자체를 불법화하면, 전 세계의 농부들은 파종 때마다 매번 종자를 구입하는 충실한 고객이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판매하는 종자가 자기 회사가 개발한 특정 제초제에 내성을 가진 유전자조작 식물이라면 기업 입장에서는 금상첨화이다. 특허 종자도 팔고 동시에 특정 제초제도 팔게 되니 기업 내부적으로는 윈-윈 게임이다. 한데 이 게임의 승자는 오직 기업일 뿐, 농부와 소비자, 그리고 자연은 모두 패자의 입장에 서게 된다.

6. 지속가능하지 않아야 수탈이 가능하다

우리에게는 ‘지속가능함이 무엇이고 왜 그것이 필수적인가?’를 아는 지성이 있다. 그리고 ‘어떻게 지속가능함을 달성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상상력과 기획력이 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며 우리는 다시 ‘무엇이 지속가능성을 불가능하게 하는가?’라는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현대 농업 방식에서 당위와 현실은 평행선을 그으며 서로 만나지 못한다. 현실을 구성하고 운영하는 힘은 결코 지속가능성의 편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백성이 굶주리는 까닭은 위에서 세금을 많이 걷기 때문이다(民之饑以其上食稅之多).

나는 노자의 이 통찰을 좋아한다. 노자 시대에도, 노자 이전과 이후에도 한 사람이 굶주리는 주된 원인은 그 사람이 게으르고 우매하거나, 그 지역 토지의 생산성이 낮고 자연환경이 열악해서가 아니다. 가진 자들이 더 많이 소유하고자 없는 자들을 착취하고, 그 소유가 가져다준 보다 강력한 힘으로 지속적 착취 시스템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이는 특정 이념에 경도된 선동가의 주장이 아니라 어떤 이론이나 이상으로도 포장할 수 없는 불편한 진실이다.

식량문제와 관련한 참혹한 상황을 완화시키거나 전복시키려는 다양한 노력이 각 지역마다 눈물겹게 진행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다국적기업의 식량 시스템 역시, 자연 착취 및 약자 수탈을 동력으로 삼는다. 법치와 정의를 내세우는 국가 및 정부가 어느 편에 서는지 새삼 부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꿈꾸고 수탈이 사라진 세상을 희망한다 해도, 그 마음이 꿈과 희망으로 남아 있는 한 기아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인류 역사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수탈이 증대되는 역사였으며, 착취가 사라진 세상은 관념 속에 존재하는 유토피아다. 심하고 덜하고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인간사회는 늘 착취를 동반했고 평등하고 정의로운 제도는 존재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금강경》의 가르침을 보면 유토피아는 하나의 상(相)이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도, 새로운 세상을 바라는 마음이나 그 마음을 실현하기 위한 행위 자체도 모두 하나의 상(相)이다. 하지만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수탈로부터 파생된 흐름은, 자본주의의 구조적 병폐를 개정하지 않는 이상 무자비하게 생태계를 파괴할 것이다. 따라서 극히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이해를 토대로 무언가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인류를 포함한 전 생태계의 공멸밖에는 길이 없다. 그렇다면 필자는 불제자를 자처하는 이들에게 다음 두 가지를 질문하고 싶다.
이런 시점에 지구에서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난 존재로서 ‘세상 만물이 모두 하나의 상(相)’이라는 생각에 머물러 움직이지 않으면서 불자로서 승이나 속이 자족할 수 있는가?

지금이 바로 더 늦기 전에 질주하는 눈먼 자본주의 체제의 수레바퀴를 들어 올려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뭇 생명을 구해야 할 때는 아닌가?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시달리고 죽어가는 인간, 동물, 식물을 비롯한 유정 무정의 중생들을 구하고자 하는 의지와 행위가 자비심의 실천이라고 인정한다면 답은 명확할 수밖에 없다. 요즘엔 한 줌의 흙도, 한 방울의 물도, 한 호흡의 공기도 거대자본의 촉수로부터 자유롭지 않을 정도로, 만물과 만사에 대한 상품화가 진행되고 있다. 수탈의 체제에 동참하지 않거나 동참할 능력이 없는 국가, 사회, 개인은 저개발국, 미개사회, 무능한 인간으로 간주되고, 피착취 집단으로 전락한다. 이들은 식량생산이 지속가능하지 않아야 대기업의 생존과 번영이 가능한 비틀린 현실을 감수하며 연명하다가, 심지어는 지도에서 없어지는 지역이 되고 굶어 죽어가는 생명이 된다.

다음은 목축업 및 수산업의 비(非)지속가능성을 개괄해 보겠다. 우선 동물성 단백질의 주요 공급원인 가축 사육을 살펴보자. FAO 자료에 따르면 현재 인류는 연간 약 3억 톤의 육류를 생산 및 소비하며 전 세계 경작지의 3분의 1을 동물 사료 생산에 이용한다. 현대 목축업은 물, 사료, 에너지 등을 집약적으로 소비하면서 동시에 막대한 양의 오 · 폐수 및 온실가스를 배출한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면적의 땅을 동물 거주 및 사료 재배에 할애한다는 점에서 야생 동식물 서식지를 침해하는 주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런 실정을 감안하면 일부 채식주의자나 환경주의자가 육류와 어류 생산 및 소비에 거세게 반대하면서 경작지에서 식물을 생산하여 동물에게 먹이고 그 동물을 인간이 먹는 대신, 그 땅에 인간이 직접 먹을 식물을 생산하면 훨씬 많은 사람을 부양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이는 육류 수요를 도덕적 이유로 억제하기 어렵다는 점과, 또한 분배의 기제가 이미 불평등하고 비효율적인 상황에서 육류 대신 곡류를 더 생산한다 하더라도 과연 분배의 정의를 달성할 수 있겠느냐는 점에서, 그 근본적 한계를 대하게 된다.

다음으로 수산업을 살펴보자. 인류는 수산업을 통해 연간 거의 2억 톤의 식량을 생산하고 있다. 야생에서 포획되는 어류 및 해조류의 양은 1990년대 이래로 정체된 양상을 보이지만, 양식업과 그 생산량은 가파른 증가세를 유지하고 있다. 현재 양식업에서 발생한 생산량은 총 수산업 생산량의 절반에 이른다.

인구가 증가하고 구매력이 증대되고 동물성 단백질의 수요가 존재하는 한, 육류와 어류의 생산 및 소비가 계속 증가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문제는 이 생산 및 소비가 지속가능한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과거 동물 사육과 어류 양식은 농업과 시너지를 이루는 행위였다. 인간이 먹을 수 없는 농사 부산물은 가축을 먹이고 그 유기물을 분해시켜 땅에 소중한 거름을 제공해주었다. 오늘날에는 기아자들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상당량의 음식과 땅과 물을 식용으로 기르는 동물과 어류에 우선 공급하고 있고, 이들의 배설물, 특히 동물 분뇨는 큰 처리비용을 요하는 오염물질 및 폐수로 전락하였다. 이중 삼중으로 낭비와 영양분 유실이 발생하고 있는 셈이다.

현대식 육류와 어류 생산 및 소비 시스템은 머지않아 되돌릴 수 없는 규모의 토지 황폐화와 수자원 오염이라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동물의 분뇨가 양분이 되어 흙으로 돌아오지 않는 구조를 만들어냈다는 사실 자체가 어리석음의 극치이자 재앙의 전조라 할 수 있다. 그나마 흙으로 돌아가는 동물 분뇨도 요즘은 가축에 대한 항생제 오남용으로 인해 오염되어서 흙을 살리기는커녕 토양 미생물을 말살하고 있다. 어류와 해조류 양식에서 물에 쏟아 부어지는 화학물질은 전 세계 수자원을 위협한다.

7. 지속가능한 식량생산 방식을 실현할 수 있다.

이 장에서는 식량문제 두 개의 축 중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문제, 즉 공정한 분배는 별론으로 하고, 인간의 자연에 대한 착취문제, 즉 지속가능한 환경유지에 대해 살펴보겠다. 식량생산과 관련하여 자연에 대한 인간의 착취가 사라져 환경이 지속가능한 상태를 유지한다는 말은, 건강한 자연으로부터 인류가 필요한 만큼의 식량을 지속적으로 생산한다는 말이다.

특정 식량생산 방식이 백 년, 천 년 반복되어도 생태계가 건강하게 유지된다면 지속가능한 생산 방식이다. 우리 민족은 한반도에서 오천 년 동안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으며, 이 땅의 흙은 비옥함을 유지하며 긴 세월 동안 한민족을 먹여왔다. 이는 우리 선조들이 흙이 곧 식량이고 흙이 곧 생명이라는 사실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비단 우리 민족뿐 아니라 지구상 어떤 민족이든 수백 년, 수천 년씩 땅의 황폐화 없이 성공적으로 농사를 지어왔다면 아마 그러한 지혜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구’ ‘현대’ ‘과학’ 등의 개념과 함께 한반도를 잠식한 약탈적인 농업 생산 방식이 주류가 되면서 그런 지혜는 무참히 파괴되었고, 흙도 같이 썩어가고 있다. 흙이 썩자, 물과 공기가 썩고 그 속에 안겨서 살아가는 생명체들이 모두 함께 병들어간다. 이제 잃었던 지혜를 되살리고 창의성을 더하여 지속가능한 농업 방식을 찾아내고 우리 땅, 나아가 지구를 건강하게 만드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할 시점이다. 그렇다면 지속가능한 농업의 주된 특성은 무엇인가?

첫째, 농사지을 땅의 흙이 갈수록 비옥해져야 한다. 혹은 적어도 같은 정도의 비옥도를 지속해야 한다. 이를 위한 대원칙은 ‘땅에서 빠져나간 양분은 땅으로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음식의 형태로 유실된 미네랄이 흙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물질순환은 끊어지고 땅은 외부로부터의 비료 투입을 요하게 된다. 하지만 화학비료 투입은 곧 과한 비용 투자를 의미하며, 앞장에서 살펴보았듯 비효율적 행위이다. 과거 최고 자원으로 대접받던 분뇨가 오늘날에는 불결, 공해, 비위생의 대명사가 된 현상 자체가 우리 식량문화의 암울한 현실을 시사한다. 이제는 한 번 더 인식을 전환하여 동물 배설물과 농사 잔류물을 적극적으로 농사에 재사용하여야 한다.

둘째, 공장에서 생산된 유독성 화학물질의 사용을 멈춰야 한다. 살충제, 살균제, 제초제 등은 우리 땅의 흙과 물 그리고 우리 몸 안으로 밀려들어 오고 있다. 그런데 이런 신생 물질들이 생태 시스템과 인체 시스템에 일으키는 해악에 관한 정확한 분석결과와 그 결과에 기초한 제대로 된 규제 정책은 마련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극도의 유독물질이라 하더라도 기업의 이익이 되어주는 한 무해하다는 사용설명서를 붙여서 버젓이 판매하고, 매수된 과학자들과 정치가들은 자본의 편에 서서 이를 지원하고 옹호한다. 이제 이 난장판을 수습하고 친환경적이고 친인간적인 비료와 농업 자재의 생산과 소비를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셋째, 식량의 생산량 및 품질이 확보되어야 한다. 한데 기업의 논리가 이미 무수한 사람들의 가치관에 내재화되었다. 농부들은 당장 이렇게 묻는다. “화학비료와 화학농약을 쓰지 않으면 생산량이 뚝 떨어지는데 어떡하란 말인가?” 그러나 최선(지속가능한 농법)이 없으니 차선(화학물질)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믿는 대중의 오해와 달리, 식량문제 해결의 최선은 이미 발견되고 있고 그중 일부는 실험을 거쳐 상용화되었다. 미생물과 식물의 생리, 물질의 순환과정을 정확히 이해하면 유기농으로도 다수확과 고품질 생산이 가능하다. 단지 이 방법들은 대개 자본의 관심과 후원을 받지 못하는 지식, 오히려 자본의 공격 대상이 되는 지식으로 사라져간다. 떳떳하게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지속가능한 환경을 원한다면 이런 선구적 지식에 눈을 돌리고 그 지식들을 확산하고 실천하는 데 힘써야 한다.

넷째, 농민의 주권이 회복되어야 한다. 농민은 식량의 생산자이자 동시에 흙의 관리자이다. 수탈적 농업이 주류가 되는 과정은 농민으로부터 지식, 기술, 자신감을 약탈하는 과정이다. 기업가-과학자 복합집단은 친환경적 전통 농업에 비과학과 비위생이라는 낙인을 찍고, 기업이윤에 복무하는 지식만 인정한다. ‘무식하고, 더럽고, 천한’ 농민이 자괴감에 빠져들수록 기업가와 과학자는 기고만장해졌고, 농민의 주권을 약탈해왔다. 그런데 빼앗긴 주권은 농민 스스로 찾아와야 한다.

 농민이 각성하고 움직이지 않는 한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전 세계 농민이 건강한 농사 기술과 지식을 살리고, 생태계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되찾아 흙과 물의 수호자로 거듭나야 한다. 국가나 지역 정부는 자본의 시중을 든 부끄러운 구태를 반성하고 농민들이 자연과 인간의 건강성을 회복하는 일에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소비자는 자신의 복지뿐 아니라 농민의 주권 회복을 돕는 일환으로 화학물질에 범벅된 거대 식량기업의 상품 구입을 자제하고 참된 농민이 참된 농법으로 일군 참된 식량을 선호하는 소비문화 풍토를 정착시켜야 한다.

8. 의식이 깨어 있는 개인들의 연대에서 희망을 보다

빛의 속도로 발전하는, 실은 빛보다 빠른 속도로 몰락하는 현대문명과 그 체제로부터 빠져나가는 길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하면 지구는 전체로서 인류가 향유하는 기존 삶의 방식을 지탱하지 못할 것이다. 농토 황폐화와 종자의 유실, 수자원 고갈 및 환경오염 등이 임계점을 넘는 순간, 토지가 식량을 생산해내지 못하는 날이 오고 우리 문명의 파국이 시작될 것이다. 그 와중에서도 가진 자들은 좀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고, 못 가진 자들은 먼저 희생될 것이다.

세계화란 미명하에 개개인은 방대한 자본주의 체제의 부속품이 되어 가고 있다. 부속품이 되는 순간 좋든 싫든, 알든 모르든, 수탈적 농업 시스템에 동참하는 것이고, 지구 생태계의 파괴에 기여하는 것이고, 에티오피아의 사막에서 굶어 죽어가는 중생에 대한 일정한 책임을 나누어 갖는 것이다.

‘이것이 있어서 저것이 있다.’는 생각은 연기법의 사고방식이다. 오늘 내가 먹는 밥이 있기 위해 얼마나 많은 조건이 선행되었을지 상상해보고, 그 하나하나가 선법인지 불선법인지 돌이켜보자. 화학비료, 농약, 중장비, 석유, 전기, 무역, 노동 등 다양한 요소가 있을 것이고, 각 요소마다 또한 연기법에 따라 무수한 조건들이 있었을 것이다.

수탈적인 체제는 이렇게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얽혀 있어서 빠져나오기 어렵다. 필자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 이 체제에 대한 자립성과 면역성을 조금씩 키우자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먹는 음식은 일부나마 내가 생산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시골뿐 아니라 도시에 사는 주민들도 텃밭, 주말농장, 베란다 및 옥상정원 등을 가꾸어 나와 내 가족의 음식을 자가 생산하는 일로 그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 화학물질을 사용하지 않는 참된 농업을 소박하게나마 경험하고 잔여물을 흙으로 되돌리는 일을 실천하며 지속가능한 농사를 시작해보자.

현존하는 체제는 다른 체제를 대안으로 내세워서 공격하기에는 너무 압도적이고 견고하다. 그 폭주를 막을 힘은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게다가 우리는 과거 이러저러한 시도들이 다 실패하지 않았느냐면서 몸을 사린다. 상상력을 압류당한 어린아이처럼 더 이상은 위험한 도주를 꿈꾸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국가냐 시장이냐의 이분법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 채 국가도 시장도 답을 제공하지 못하는 문제 앞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무력한 상태이다.

이제 의식화된 개인으로서 식량생산과 소비에 대한 자세를 바꿀 때이다. 개화된 개인들이 모이면 깨어 있는 의식을 공유하는 ‘우리’가 형성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개인을 끌어모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자본이 야합하여 견인하고 있는 체제로부터 제공되는 편리를, 때로는 특혜를,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자립 및 친환경의 연대를 선택하는 개인에게, 많은 문제들에 대한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9. 지속가능성을 불교 전통에서 배우다

불자에게는 음식을 먹는 행위도 수행이다. 음식이 되어 밥상에 나타난 중생들이 모두 나와 평등한 생명체요, 곧 부처인데 어떻게 가볍게 먹을 수 있겠는가? 이 몸 또한 언젠가는 어느 중생의 먹이가 되어 생태계를 지탱하는 양분으로 순환할 것이다. 발우공양이라는 모습으로 하나의 문화가 되어 전승되어온 불교적인 식사 행위는 과소비와 굶주림으로 범벅된 혼탁한 현대문명에 던지는 감동적 반어이다. 또한 대승불교 문화권을 중심으로 이어온 채식 전통은 지속가능성을 실현할 대안으로서만이 아니라 영양학적 관점에서도 점점 더 주목받고 있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깨달음에 이르는 데는 인간이라는 조건이 가장 좋다고 하면서도, 그것은 조건이 좋을 때 열심히 수행하라는 의미이지, 축생이나 지옥의 중생에 비해 인간이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다. 인과의 법칙에 따라 인간의 몸을 받았을 뿐이니 그 생에서 수행 정진하라는 가르침이다.

불경 구석구석에서 절대 평등과 자비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불교 경전에는 성인이 자기 몸을 던져 배고픈 맹수의 밥이 되어주는 이야기가 나오며, 티베트 불교도는 시체를 독수리들에게 희사한다. 불자에게 자연은 지배와 정복의 대상이 아니며, 나와 동등한 온갖 중생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세상, 신들부터 미물들에 이르기까지 인연 아님이 없는 그러한 세상이다.

자연계에서 인간의 특수한 위치를 주장하지 않는 것은 인간계 내에서 개인의 특별한 지위를 주장하지 않는 것과 같다. 중생 간 평등이 전제되면 인간 간 평등은 논리적 귀결이다. 이런 불교적 태도에서 자연에 대한 수탈과 인간에 대한 착취를 제어할 사고의 단초가 발견된다.

발우공양을 하면 잔반을 남기지 않는다거나 설거지물이 거의 들지 않는 점을 들어, 이야말로 불교가 보여주는 진정한 친환경적 음식문화의 가장 좋은 예라는 찬사를 쏟아내는 주장들이 있다. 일리 있는 관점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불교에서 음식을 대하는 태도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가르침은 소박하고 따뜻하게 다른 생명을 대하는 자세, 인간을 대하는 자세, 세상을 살아가는 자세에 관한 것이다.

자연 앞에 겸허하고 타인에게 따스한, 온몸에 흙을 묻히고 흙냄새를 풍기며 흙에서 사는 농자가 천하의 큰 근본인 법이다. 자연 앞에 교만하고 타인을 착취하는, 돈 냄새를 풍기며 돈더미 위에서 뒹구는 자본가가 그 대역이 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런 대전제가 전도되지 않도록 해주는 의식화된 개인이나 기술 체계는 존재한다. 사실, 사물의 이치를 생각해보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생명이고 지식이다. ■

이승숙 / 미르문화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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