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양명 《전습록》 / 이우진
스승의 가르침을 삶에서 실천하라
1. 성인을 향한 불굴의 여정, 왕양명의 생애
15~16세기 중국 사상계는 주자학(朱子學)이라는 거대한 산맥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 깊고도 단단한 주자학의 골격을 흔들기란 누구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 속에서 과감히 도전장을 던진 인물이 있었다. 바로 《전습록(傳習錄)》의 주인공이자 양명학(陽明學)의 창시자 왕양명(王陽明, 1472~1529)이었다. 그의 본명은 ‘수인(守仁)’이지만, ‘빛나는 태양’을 뜻하는 ‘양명(陽明)’이라는 호(號)에 어울리는 인생을 살아간 인물이었다. ‘마음에 자리한 꺼지지 않는 태양(陽明)’을 믿고 ‘백 번의 죽을 고비와 천 번의 난관’으로 가득 찬 삶을 견뎌냈다.
왕양명의 삶을 보면, 한 사람이 이토록 다양한 분야에서 눈부신 성취를 이룰 수 있을까 하는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는 탁월한 문장가이자 서예가였고 정치가였으며, 또한 영왕(寧王) 주신호(朱宸濠)의 모반을 비롯하여 수많은 반란을 제압한 장수이기도 했다. 더불어 심즉리(心卽理), 지행합일(知行合一), 치양지(致良知) 등과 같은 혁신적인 이론을 주창한 사상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왕양명의 가장 본질적인 정체성은 ‘성인이 되고자 하는 미친 듯한 열정을 보여준 인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의 삶이 보여준 메시지는 이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내 마음의 빛나는 태양을 믿고, 성인(聖人)의 길로 나아가라.”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되는 것을 인생의 궁극적 목표로 삼았던 왕양명은 15~16세 무렵, 주희의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실천하기 위해 정원의 대나무를 대상으로 무려 7일간이나 격물에 몰두했다. 끝내 그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병을 얻고 말았지만, 이는 단순한 학문적 탐구를 넘어 성인이 되고자 자신의 육체마저 초월하려는 집념의 발현이었다. 이후 그는 과거 공부와 문장 학습에 전념했으나, 성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는 ‘가족애를 인간 본성의 근본’으로 삼는 유학(儒學)의 가르침이야말로 참된 진리라고 확신하게 되지만, ‘어떻게 하면 성인이 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그 답은 ‘용장(龍場) 유배’라는 엄청난 시련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주어졌다.
왕양명이 34세에 황제에게 간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태형 30대를 맞고 귀주(貴州) 용장(龍場)으로 유배되었다. 용장은 맹수와 독충이 가득한 오지였고, 환관 유근(劉瑾)이 보낸 암살자들의 위협도 있었다. 그는 돌로 단을 만들고 ‘나는 오직 운명을 기다릴 뿐’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문득 ‘성인이 이러한 상황에 처하면 어떻게 할까?’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고, 그 순간 바로 ‘격물치지’의 참뜻을 깨닫게 되었다. 이는 “성인의 도는 나의 본성 속에 스스로 갖추어져 있다.” 즉, 외부 사물에서 이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서 이치를 찾아야 한다는 ‘심즉리(心卽理)’ 사상의 탄생이었다. 이 순간을 기점으로 왕양명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전환되었다.
관직에 복귀해 북경에서 근무하게 된 왕양명은 주자학과 육학(陸學)의 논쟁에 휘말렸다. 당시 주자학은 절대적 권위를 지녔고, 육학은 ‘불교와 유사하다’는 이유로 배척당했다. 처음에 왕양명은 양측의 입장을 조정하는 모호한 태도를 취했으나, 결국 “세상의 비난을 감수하고라도 육학을 드러내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육구연(陸九淵, 1139~1192)의 사상이 부당하게 배척되어서는 안 되며, 그 학문적 가치가 올바르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왕양명의 사상이 육구연의 심학(心學)으로 기울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40세에 남경의 관리로 부임하면서 제자 수가 급격히 늘어난 왕양명은 용장에서 깨달은 바를 가르쳤다. 특히, 주희의 《대학장구(大學章句)》가 잘못되었으며, 《예기(禮記)》에 포함된 본래의 《대학》 즉 《고본대학(古本大學)》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학문이 과연 주자학과 근본적으로 다른지 성찰하기 위해 주희의 저작을 다시 검토하였다. 그 결과, 46세에 주희의 만년 서신을 모아 《주자만년정론(朱子晩年定論)》을 편찬하고, 《고본대학방석(古本大學旁釋)》을 함께 출간하였다. 왕양명은 《주자만년정론》에서 자신의 학문이 주자학과 본질적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희의 만년 사상과 일맥상통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으로 인해 그는 ‘괴이한 이론을 내세우면서 주자학의 가면을 쓰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비판에 왕양명은 “주희에 대한 존경심은 진실이나, 진리를 위해서라면 주희의 견해와 달라도 상관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듬해, 왕양명은 영왕 주신호의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는 뛰어난 전략을 구사하여 출병한 지 단 14일 만에 승리를 거두고 주신호를 생포하였다. 반란 평정 이후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지만, 역설적으로 정치적 음해와 모함에 휘말리며 반역자로 몰리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담금질이 순금을 정제하듯, 이러한 시련은 왕양명의 사상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49세 되던 해, 마침내 ‘치양지(致良知)’에 대한 깨달음에 이르렀다. 왕양명은 “이제 나는 ‘양지(良知)’를 확신하였고, 무엇이 참된 것인지 믿고 따르고 있을 뿐이다. ‘양지’라는 두 글자는 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진정한 혈맥과 같다.”라고 고백했다. 그에게 양지는 ‘선과 악을 즉각 밝혀주는, 마음속 꺼지지 않는 빛나는 태양’이었다. 이후 왕양명은 ‘양지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그것을 현실에서 실천하고 확장하는 공부’ 즉 ‘치양지’를 스스로 실천하며 살아갔다.
왕양명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도 흔들림 없이 이렇게 말했다. “이 마음이 환하게 빛나고 있는데, 다시 무엇을 말하겠는가?” 이는 그의 철학과 삶이 완벽하게 일치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마음속 ‘양지’를 신뢰하며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했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가르친 대로 살았다. 그의 모든 학문적 탐구, 정치적 실천, 군사적 활동의 근저에는 성인이 되고자 하는 한결같은 열망이 있었으며, 그 열망은 마침내 ‘양지’라는 개념으로 결실을 보았다. 이처럼 왕양명의 삶은 곧 마음속 빛나는 태양을 발견하고, 그 빛을 따라 성인의 길을 걸어간 여정 그 자체였다.
2. 《전습록》과 왕양명의 주요 사상
《전습록(傳習錄)》은 왕양명의 사상을 집약적으로 담고 있는 핵심 문헌으로, 양명학파의 《논어》라고 불릴 정도로 높은 권위를 지닌 책이다. 《전습록》이란 책 제목은 왕양명의 수제자이자 매제였던 서애(徐愛, 1487~1517)가 지은 것으로, 《논어》에 실린 증자(曾子)의 말에서 영감을 받았다. 증자는 하루를 반성하며 “스승에게서 전수한 가르침을 삶에서 실천하지 않았는가?”(傳不習乎)라고 자문하였다. 서애는 여기에서 착안하여, ‘스승 왕양명에게서 전수한 가르침을 삶에서 실천하라’(傳習)는 의미로 《전습록》이라고 명명하였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전습록》은 《왕문성공전서(王文成公全書)》에 수록된 것으로 ‘상권, 중권, 하권’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전습록》은 처음부터 이러한 형태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었다. 이 책은 다양한 시기에 걸쳐 편집과 간행이 이루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증보와 삭제를 거치고, 최종적으로 왕양명의 제자인 전덕홍(錢德洪, 1497~1574)에 의해 정리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확정된 것이다. 현행 《전습록》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상권: 제자 서애(徐愛), 육징(陸澄), 설간(薛侃)이 기록한 문답 130조
●중권: 왕양명의 편지 8편, 논설 2편
●하권: 제자 진구천(陳九川), 황직(黃直), 황수이(黃修易), 황성증(黃省曾) 등이 기록한 문답 143조
가) 상권
왕양명의 초기 사상을 확인해 볼 수 있는 자료로, 용장대오(龍場大悟) 이후로부터 치양지(致良知)를 제창하기 이전까지의 문답이 담겨 있다. 특히 서애가 기록한 14조는 왕양명의 ‘심즉리(心卽理)’ ‘격물(格物)’ ‘지행합일(知行合一)’에 관한 핵심 사상을 확인할 수 있는 주요 자료이다. 이를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심즉리(心卽理): ‘마음이 곧 이치’라는 뜻으로, ‘도덕의 원칙과 선(善)은 외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래 마음속에 내재해 있다’는 사상이다. 즉, 도덕적 기준은 외부에서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므로, 중요한 것은 ‘마음을 바르게 하여 도덕적 앎과 실천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왕양명은 이를 바탕으로 “도덕의 원리는 마음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心外無理)며 외부 탐구보다 내면 성찰과 실천을 중시하는 심학(心學)을 확립하였다.
●격물(格物): 왕양명은 주자와 달리 격물을 ‘자기 마음을 바로잡는 과정’(格心)으로 해석하였다. 그는 도덕적 앎(知)은 외부 사물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내면 성찰과 실천을 통해 길러진다고 보았다. 즉, 학문의 핵심은 외부 탐구가 아니라 내면 수양에 있다는 것이다.
●지행합일(知行合一): 주자학에서는 지(知)와 행(行)이 상호보완적인 관계임을 인정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앎(知)이 먼저이고 실천(行)이 뒤따른다고 보았다. 왕양명은 이를 부정하며 ‘참된 앎은 실천을 내포하며, 실천 없는 앎은 진정한 앎이 아니다’라고 주장하였다. 예를 들어, 어려운 사람을 돕는 모습을 보면 자연스럽게 감동을 느끼고 선행을 실천하고 싶어진다. 이는 도덕 책을 읽고 분석한 뒤 결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마음속에 자리한 도덕적 본성이 즉각 반응하는 것이다. 즉, 도덕적 행위는 외부에서 강요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왕양명은 ‘이치를 깨닫는 것’(知)과 ‘그것을 실천하는 것’(行)은 원래 하나이며,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지행합일은 단순히 ‘앎 다음에 실천이 따라야 한다’는 순차적 관계가 아니라, ‘진정한 앎은 이미 실천을 내포하고 있으며, 실천이 없는 앎은 참된 앎이 아니다’라는 본질적 일치를 강조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세 가지 개념은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철학 체계를 이루고 있다. 왕양명은 ‘심즉리’를 통해 도덕적 원리가 인간 내면에 존재함을 강조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학문의 방향을 ‘외부 탐구에서 내면 수양으로 전환’하는 ‘격물’로 발전시켰으며, 최종적으로 ‘지행합일’을 통해 앎과 실천의 불가분성을 주장하였다. 이는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도덕적 본성에서 출발하여 자기 수양을 거쳐 실천으로 나아가는 철학적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나) 중권
다음으로 중권은, 왕양명이 치양지(致良知)를 선포한 49세 이후부터 50대에 걸쳐 작성한 8편의 편지와 2편의 논설로 구성되어 있다. 즉흥적인 문답의 상권과 달리, 중권에서는 정교하고 체계적인 왕양명의 사유와 논리를 살펴볼 수 있다.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답고동교서(答顧東橋書)〉 1편: 심즉리, 지행합일, 치양지, 《대학고본》 발본색원론(拔本塞源論) 등
● 〈답주도통서(答周道通書)〉 1편: 입지(立志), 격물, 치양지 등
● 〈답육원정서(答陸原靜書)〉 2편: 치양지, 지행합일 등
● 〈답구양숭일서(答歐陽崇一書)〉 1편: 치양지 등
● 〈답나정암소재서(答羅整庵少宰書)〉 1편: 《대학고본》 격물, 《주자만년정론》 등
● 〈답섭문울(答聶文蔚)〉 2편: 도통(道統), 만물일체(萬物一體), 치양지 등
● 〈훈몽대의교독유백송(訓蒙大意示敎讀劉伯頌)〉 : 아동 교육의 원칙
● 〈교약(敎約)〉 : 아동 교육의 구체적 방법과 운영 지침
중권에 실린 편지 8편은 전덕홍이 스승 왕양명의 핵심 사상이 가장 잘 나타난 것들만 가려 뽑은 것이다. 그 점에서 모두가 중요한 자료지만, 특히 주목할 만한 두 편지는 〈답고동교서〉와 〈답나정암소재서〉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왕양명이 《주자만년정론》과 《고본대학방석》을 출간했을 때 여러 학자들이 비판을 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고린(顧璘, 1476~1545)과 나흠순(羅欽順, 1465~1547)이었다. 〈답고동교서〉와 〈답나정암소재서〉는 이러한 비판에 대한 왕양명의 응답으로, 단순한 논쟁적 대응을 넘어서고 있다. 즉 왕양명이 자기 사상의 이론적 기반과 주자학과의 관계를 명확히 정립하고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예를 들어, 고린은 왕양명의 학문이 지나치게 직관적이고 실천 중심적이며, 내면적 탐구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이러한 경향이 학문의 균형을 해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현실적 문제 해결에 기여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였다.
이에 대해 왕양명은 유명한 ‘발본색원론(拔本塞源論)’을 주장하며 반박하였다. ‘발본색원’이란 ‘뿌리를 뽑고(拔本), 근원을 막는다(塞源)’는 뜻으로, 학문과 사회가 타락한 근본 원인을 제거하자는 것이다. 왕양명은 발본색원론에서 주자학의 형식주의와 공허한 이론화가 오히려 학문의 본질을 훼손한다고 비판하며, 본래 학문의 목적은 실천적 도덕성의 회복에 있다고 강조하였다.
또 하나 중권에는 왕양명의 핵심 사상인 치양지(致良知)가 본격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는 “내 평생의 학문은 단지 ‘치양지’ 세 글자에 불과하다.”라고 하며, 이를 자신의 사상적 중심 이론으로 삼았다. 이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치양지(致良知): 이는 《맹자》의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아는 것이 곧 양지”와 《대학》의 “치지(致知)”를 결합한 개념이다. 왕양명은 《맹자》의 ‘양지’ 개념을 더욱 발전시켜, 이를 ‘모든 인간이 태어나면서 지닌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도덕적 앎’으로 규정하였다. 나아가 양지를 ‘천리(天理)’이며, ‘지극한 선(至善)’이고, ‘마음의 본체’로 보고, ‘치지’를 ‘이 양지를 실현하는 것’ 즉 ‘치양지’로 규정하였다. 이는 주희가 ‘치지’를 ‘사물의 이치 탐구의 완성’으로 본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을 취한 것이었다. 이처럼 치양지는 탐구를 통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내면의 도덕적 앎을 직접 실천하는 과정이었다. 또한, 왕양명은 치양지를 ‘지행합일’과 동일한 개념으로 보아, 본체(本體)와 공부(功夫), 이론과 실천이 서로 융합되어 하나로 통합된 사상으로 정립하였다.
정리하자면, 치양지는 ‘인간의 내면에 이미 갖추어진 도덕적 인식 능력인 양지(良知)를 믿고, 이를 실생활에서 적극적으로, 그리고 끊임없이 실현해 나가라’는 가르침이다. 이는 왕양명의 전기(前期) 사상이 하나로 통합된 핵심 개념이었다.
다. 하권
마지막으로 《전습록》 하권에 대해 살펴보자. 이 책은 왕양명 사후 28년 후 전덕홍이 간행한 문헌으로, 그의 만년 어록을 집대성한 중요한 저작이다. 이 시기 왕양명은 ‘치양지’를 제창하며 사상을 완성했고, 영왕 주신호의 반란을 평정하며 명성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이에 많은 학자들이 그의 문하로 모여들었고, 제자들이 기록한 가르침이 하권의 핵심을 이루었다. 명성이 높아질수록 비판도 거세졌지만, 그는 오히려 철학적 신념을 더욱 굳건히 하며 스스로 “광자(狂者)의 심경을 얻었다”고 표현했다. 이는 치양지 사상의 완성과 함께 내적 자유와 확신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만년의 대표적 사상으로는 치양지를 비롯하여, ‘성인만가론(聖人滿街論)’과 ‘사구교(四句敎)’가 있다. 먼저, 성인만가론은 ‘거리에 가득한 사람들이 모두 성인이다’라는 개념으로, 모든 인간이 양지를 내재하고 있어 성인이 될 잠재력을 지닌다는 믿음에 기초한다. 이는 당대 지식인 엘리트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도덕적 실천이 소수 지식인의 전유물이 아니라 누구나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임을 강조하였다.
‘사구교(四句敎)’에 대해 살펴보면, 이는 왕양명 철학의 핵심을 다음과 같은 네 문장으로 압축한 표현이다.
有善有惡心之體 마음의 본체는 선도 악도 없으나,
有善有惡意之動 의식이 움직이면 선과 악이 생긴다.
知善知惡是良知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양지’이며,
爲善去惡是格物 선은 실천하고, 악은 제거하는 것이 격물이다.
이는 《대학》의 ‘정심(正心), 성의(誠意), 치지(致知), 격물(格物)’과 연결되며, ‘마음의 본질에서 출발하여 도덕적 실천으로 이어지는 체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제자들 사이에서는 해석 차이가 발생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전덕홍과 왕기(王畿, 1498~1583)의 논쟁이다. 그들의 사구교에 대한 입장은 다음과 같았다.
●전덕홍: ‘마음의 본체(心體)’는 선악이 없으나, 인간은 ‘습심’(習心)을 지녀 의식 활동 속에서 선악이 나타난다. 따라서 악을 제거하고 선을 실천하는 공부가 필수적이다.
●왕기: ‘마음의 본체(心體)’가 선악이 없다면, 의식(意)·지각(知)·외부 대상(物)도 본질적으로 선악이 없으므로, 선악 구분 자체가 인위적 개념이며, 본질적 통찰이 더 중요하다.
이처럼 전덕홍은 실천적 관점에서, 왕기는 존재론적 관점에서 사구교를 해석하였다. 이러한 해석적 대립에 대해 왕양명은 두 입장을 배타적으로 보지 않고 상호보완적 관계로 해석했다. 그는 전덕홍의 해석은 일반인을 위한 실천적 가르침, 왕기의 해석은 철학적 통찰을 위한 것이라며, 상황과 대상에 따라 적절히 적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제까지 살펴보았듯이, 《전습록》 각 권은 왕양명의 사상이 형성되고 성숙해지는 과정을 체계적으로 보여준다. 사실 《전습록》은 명확한 결론보다는 계속되는 질문과 탐구를 촉진하는 텍스트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이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둔 왕양명의 철학적 개방성에 기인한 결과이다. 이러한 개방성은 왕양명 철학이 지역적으로 중국을 넘어 한국과 일본에까지, 시대적으로 명대에서부터 오늘날까지도 그 생명력을 유지하는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3. 왕양명 사상과 불교
유학자들 가운데 왕양명만큼 불교적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은 인물은 드물다. 그는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 학자들에게도 지속적으로 불교적 성향이 강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당대에는 앞서 언급한 고린(顧璘)이 “왕양명의 학문이 논의가 너무 고상하고, 공부가 지나치게 성급하다”며, “그의 사상은 불교의 ‘명심견성(明心見性)’과 ‘정혜돈오(定慧頓悟)’와 유사하다”고 공격하였다. 후대의 왕부지(王夫之, 1619~1692) 또한 왕양명의 사구교가 사실상 북방 선종(禪宗)의 신수(神秀)와 남방 선종의 혜능(惠能) 철학을 그대로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하였다. 심지어 중국을 넘어 우리나라의 이황(李滉, 1501~1570)도 〈전습록논변(傳習錄論辯)〉을 지어, ‘왕양명이 마음만을 내세우는 불교에 빠졌다’고 비난하였다.
왕양명을 비판한 학자들은 많았으나, 특히 진건(陳建, 1497〜1567)은 《학부통변(學蔀通辨)》에서 한 장 전체를 할애하여 왕양명을 맹렬히 공격하였다. 불교와 관련하여 그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지적하였다.
① 유학의 ‘양지(良知)’를 불교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동일하게 보고, 치양지를 불교의 ‘상성성(常惺惺)’과 ‘상제념두(常提念頭)’와 같다고 비판
② 불교처럼 돈오(頓悟)를 추구하고 점진적 공부를 무시한다고 비판
③ 불교를 이기적(自私自利)이라고 비판하면서도, 양지론 역시 개인적 깨달음에 치우쳐 이기적이라고 비판
진건의 첫 번째 비판에서, 그는 왕양명이 유학의 ‘양지’를 불교의 ‘본래면목’과 동일시했다고 주장하였으나, 이는 사실 표현적 차용에 불과했다. 당시 ‘본래면목’은 유학자들에게도 익숙한 개념이었으며, 왕양명은 양지와 본래면목이 인간의 본원적 깨달음과 도덕적 직관을 의미한다는 공통점을 활용하여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그는 심지어 ‘상성성’과 ‘상제념두’ 같은 불교적 표현을 사용하였으며, “양지는 공자 문하의 정법안장(正法眼藏)” “양지는 불가의 심인(心印)과 유사하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들은 어디까지나 이미 친숙한 불교적 개념을 유학적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설명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왕양명의 특징적인 교육 방법으로, 학생들이 익숙한 불교적 표현을 활용하되, 이를 유학적 맥락 속에서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자신의 사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는 전략이었다.
두 번째 비판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왕양명은 점진적 공부를 무시하지 않았으며, 치양지는 단순한 깨달음이 아니라 지속적 실천을 강조하는 개념이었다. 또한 ‘사상마련(事上磨鍊)’을 통해 실제 경험 속에서 배우고 수양하는 과정을 중시하였다. 따라서 진건의 비판은 왕양명의 실천적 수양론을 간과한 측면이 있다.
마지막 세 번째 비판 역시 문제가 있다. 진건은 왕양명이 개인적 수양에 집중하여 인륜과 천하를 다스리는 현실적 측면을 소홀히 했다고 보았으나, 이는 왕양명이 불교를 비판한 논리와 유사하다. 왕양명은 불교가 개인적 깨달음에 치중해 윤리적 실천과 사회적 책임을 등한시한다고 지적하며, “불교는 모든 사물과의 관계를 끊고 허(虛)와 적(寂)으로 빠져 세상과 단절된다”고 비판하였다. 따라서 진건의 비판은 왕양명의 사회적 실천론과 불교 비판 논리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제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왕양명의 불교 비판 역시 학파적 편견의 한계를 지닌다. 그는 불교의 철학적 깊이와 역사적 공헌을 인정하지 않고, 출세간적(出世間的) 측면만을 선별적으로 비판하였다. 또한 불교의 심성론(心性論)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없이 표면적 비교에 그쳐, 그의 논평은 진정한 대화보다는 유가의 교조적 입장을 강화한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양명은 불교의 실천적 수행 방식에서 일정한 가치를 인정하였다. 그는 불교가 내면 수양을 통해 몸과 마음을 실질적으로 단련하는 점에 주목하였으며, 단순한 이론적 탐구만으로는 참된 학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음을 역설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당시 성리학의 공리공론적 한계를 초월하려는 시도였다. 왕양명은 불교의 실천적 요소를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오히려 이러한 접근 방식이 이론에만 집착하는 주자학적 방법론보다 진정한 학문적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단순한 불교 사상의 차용이 아니라, 유학의 본질을 회복하려는 왕양명의 혁신적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 ‘모든 중생이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듯, 왕양명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성인이 될 수 있는 양지가 내재해 있다’고 가르쳤다. 두 사상은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깊은 신뢰를 공유한다. 오늘날 우리는 끊임없는 외적 성취와 인정에 집착하며 자신의 내면을 잃어가고 있다. 《전습록》은 이러한 현대인에게 ‘자기 마음속에 이미 빛나는 태양이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한다. 부처가 되라는 불교의 가르침과 성인이 되라는 양명학의 초대는 결국 같은 곳을 향한다. 즉, 본래 우리 안에 갖추어진 완전한 가능성을 실현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전습록》은 단순한 고전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증언이자, 내 안의 성인을 깨우는 살아 있는 가르침이다. 이 책의 이름대로 “스승의 이러한 가르침을 삶에서 실천해야” 할 것이다. ■
이우진
공주교육대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교육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왕양명의 공부론’을 주제로 박사논문 작성. 주요 논문으로 〈왕양명의 격물공부론〉 〈지행합일, 자연성과 도덕성의 융합〉 〈왕양명의 용장오도 다시 읽기〉 등이 있고, 저서로 Korean Education: Educational Thought, Systems and Content, 《서당, 모든 이의 공부방》 등과, 역서로 《동아시아 양명학의 전개》 등 출간. 현재 공주교육대학교 교육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독일 보훔 루어대학교 방문교수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