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에 무슨 복을 지었기에 / 최정희

나의 삶 나의 불교

2025-09-13     최정희

 

한 장의 불교신문 한 사람의 포교사

나는 중학교 3학년때 교목의 성경 강의가 마음에 안들어 옆 반에 가서 수학 공부를 하기도 했다. 내가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스물두세 살 무렵에 〈대한불교〉(불교신문)를 만나면서부터였다. 내가 다니던 첫 직장의 전무께서 등산 도중 만난 대학생 불자들의 단체 사진을 찍었는데 그 사진을 인원수대로 뽑아서 보내 주라고 내게 필름과 주소를 맡겼다. 그 후 사진을 받은 인솔자가 매주 〈대한불교〉 신문을 회사로 보내왔다. 그 인연으로 나는 〈대한불교〉 독자가 되었다. 보내는 사람은 ‘목정배’라고 쓰여 있었다. 회사를 그만두면서 나는 우리 집 주소로 구독 신청을 했다. 훗날 나는 ‘한 장의 불교신문 한 사람의 포교사’라는 슬로건에 공감했다. 

내가 20대 중반에 다닌 상공부 산하 국영기업 회사가 민영화되면서 많은 직원이 퇴사하게 됐다. 술렁이는 분위기 속에 총무과장이 나에게 퇴직자 명단에 든 A씨의 딱한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했다. 나는 난색을 표했으나 회사를 사직하게 됐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힘들어하는 나를 위해 친구 송화숙은 자기 고향 풍기에 다녀오자고 했다. 여행을 다녀왔지만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급기야 안면마비가 왔다. 실업자가 된 나는 이원섭 선생이 일본 책을 번역한 《현대인의 불교》(전 6권)을 탐독했다. 내가 만약 직장을 계속 다녔다면 불교언론인으로 가는 길의 디딤돌이 되어준 이 소중한 책을 만날 수 있었을까.

 

《영혼의 모음》과 다래헌

그 후 나는 법정 스님의 책 《영혼의 모음》(1973, 동서출판사)을 만났다. 친구 화숙에게 빌려 읽었는데 나는 그 책에 빠졌다. 영혼을 맑히는 그 모음을 나의 노트에 옮겨 적었다. 매일 밤 손을 깨끗이 씻고 정성을 다한 그 필사는 사경이며 기도였다. 어느 토요일, 책을 빌려준 친구와 다래헌에 가서 법정 스님을 뵙고 녹차를 처음 마셨다. 다래헌은 정결하고 청결했다. 옹달샘과 수련이 핀 연못과 후박나무가 서 있었다. 여름에는 패랭이꽃이 화단 주변에 피었다.

《영혼의 모음》 필사를 마친 나는 그 노트를 스님께 보여 드렸다. 스님은 그 노트에 “허허 참 별일도 다 있네. 극성쟁이 만세. 법정 합장”이라고 쓴 후 노트 앞에 즐겨 사용하시는 낙관을 여러 개 찍으셨다. 그리고는 《영혼의 모음》 평화당 인쇄소 교정쇄를 내게 선물로 주셨다. 가슴 벅차오르는 반백 년 전 회상이다. 《영혼의 모음》은 우리 사회에 《어린 왕자》 바람을 일으켰다. 나도 《어린 왕자》를 만났고, 동화책 1백 권 읽기를 시도했다. 스님은 와타나베 쇼코의 《부처님 일생》을 번역한 문고본과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을 내게 주셨다. 나는 《불교성전》과 함께 이 책들을 읽었다.

 

〈불교신문〉 독자에서 기자로

백수(白手) 생활이 계속되니 여기저기서 맞선 자리가 들어왔으나 인연은 없었다. 1975년 여름에 나는 친구 2명과 여행을 떠났다. 법주사를 거쳐 인홍 스님이 계신 석남사 그리고 동화사에서 이틀 동안 절 분위기에 젖었다.

집에 돌아온 후 〈불교신문〉을 보니 기자 모집 사고(社告)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기자가 되겠다는 생각보다 나의 불교 공부를 점검해 보고 싶어 공개채용 시험에 응시했다. 1명을 뽑는데 그 영광을 내가 안았다. 

1975년 11월에 총무원은 동국대박물관 건물에서 조계사 경내에 새로 건립한 불교회관에 입주했다. 〈불교신문〉은 2층에 자리했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 나는 조계사 부처님께 인사드리면서 ‘기사 잘 쓰기’를 발원했다. 

초짜 기자 시절인 1975년 12월 23일 밤, 총무원 새 청사에 폭력배가 난입한 ‘김대심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에 신문사가 연루됐으며 최 기자가 밥을 해서 날랐다는 헛소문이 퍼졌다. 듣기 거북한 욕설을 퍼붓는 스님도 있었다. 편집부 기자들은 조계종 규정부와 검찰 조사를 받았다. 나는 그 부담스러운 시선에서 벗어났으나 신문사를 떠나고 싶었다. 그때 선원빈 부장의 도움말에 힘입어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쓴 기사들

〈불교잡지 70년사〉 1979년 추석 연휴에 송편을 빚으며 연휴 끝나면 쓸 기사를 궁리했다. 월간 《불광》 창간 5주년이 떠올랐다. 《법륜》에 게재되었던 불교잡지 관련 자료를 챙겨 보았다. 1910년에 발행된 《원종》이 한국 최초의 불교잡지였다. 나는 불교잡지 70년사를 기획하고 취재에 나섰다. 중앙대학교 한국학연구소장 김근수 교수를 찾아갔다. 그의 연구실은 한국잡지도서관이었다. 동국대학교 도서관에도 가서 자료를 찾았다. 연도별로 도표를 만들고 기사를 썼다. 2회로 나누어 보도했다. 윤여덕 편집국장대우는 선원빈 부장에게 “발품 팔아가며 애써 쓴 기사인데 지면을 키우지 그랬냐”고 말했다. 동양통신과 합동통신이 ‘불교잡지 70년사’를 기사화하면서 나를 불교잡지 연구가로 칭했다. 〈일간스포츠〉와 〈한국경제〉는 내 얼굴 사진과 함께 보도했다. 

〈타종 멈춘 상원사 동종〉 1980년 여름이었다. 학술지 《범종》에서 국보 36호 상원사 동종 균열에 대한 글을 읽었다. 나는 서울대학교 염영하 교수팀의 보존 작업과 화학반응으로 인한 녹조현상 등을 취재하고, 새벽 범종 소리의 울림에 대한 마을 주민들의 목소리도 들었다. ‘잃어버린 천년 범음 상원사 범종’이라는 기사를 썼다. ‘국보는 앓고 있다’는 속보가 나가고 일간지들이 기사화하면서 상원사 범종은 타종을 멈추었다. 

〈우리 불교에 남은 일제의 흔적〉 일본 장군의 무운을 비는 축원문이 새겨진 범종을 한국 사찰에서 조석으로 타종하고 있다는 기사를 썼다. 학술지 《범종》에서 본 자료를 토대로 현장 취재를 했다. 결국 그 사찰은 범종을 새로 주조했다. 

〈백담사에서 본 겨울나비〉 1988년 12월이었다. 당시 문화공보부에서 불교신문사 대표를 점심 식사에 초대했다. 정휴 스님이 참석했는데 나는 수행기자로 동참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백담사에 머무는 전두환 전 대통령 내외 취재를 〈불교신문〉이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건의했다. 그 무렵 백담사는 출입 금지 구역이었다. 각 매체는 호시탐탐 취재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희망 사항이었던 나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1989년 1월 백담사에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 은거 49일을 맞아 5·18 희생자 천혼재를 지냈다. 

전 국민의 이목이 집중된 그 현장을 〈불교신문〉이 단독 취재했다. 양범수 편집국장과 취재부장인 내가 동행했다. 나는 천혼재를 취재한 후 이순자 여사를 인터뷰했다. 이순자 여사는 ‘모든 것이 업보’라며 붓글씨로 사경한 ‘무상게’를 내게 주었다. 〈불교신문〉에 천혼재 기사와 이 여사 인터뷰가 보도되자 여성지는 물론 주간지에서 원고 청탁이 쏟아졌다. 〈불교신문〉 특종을 실감하며 나는 〈주간조선〉을 선택했다. 월간 《우먼센스》는 재탕도 좋다며 졸랐다. 마지못해 원고를 다시 썼다. 36년이 지난 지금도 천혼재를 마칠 무렵 그 추운 겨울 강원도 산중에 흰나비 한 마리가 어디선가 날아와 야외 제단 주위를 잠시 나풀거리다 날아가던 모습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오른다. 

 

언론통폐합과 〈불교신문〉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대한불교〉는 11월 30일 자 856호를 끝으로 강제 폐간되었다. 신문사는 초상집 같았다. 불자들의 아우성은 대단했다. 12월 6일 〈대한불교〉는 폐간 1주일 만에 새 이름 ‘불교신문’으로 등록을 마쳤다. 편집국은 바로 〈불교신문〉 창간호 작업에 들어갔다. 나는 여초 김응현 거사를 찾아가 ‘불교신문(佛敎新聞)’ 제자(題字)를 받아 왔다. 1980년 12월 21일 자로 되살아난 〈불교신문〉 창간 특집(8면)에는 〈대한불교〉 폐간 경위 설명이 한 줄도 없다. 윤여덕 국장대우가 제2호(12월 28일 자) ‘1980년 결산’에서 1단짜리 기사를 써넣었다. 

1981년 봄, 총무원은 경우 스님에게 넘겼던 신문사 경영권을 되찾으면서 전 직원 11명의 일괄 사표를 받았다. 퇴직금을 정산한 후 최정희 취재기자, 이영규 업무사원을 새로 임명했다. 나는 그 무렵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연구과정에 등록한 상태였다. 편집국장 정휴 스님이 떠나면서 내가 다시 근무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셨다. 나는 지금도 그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다. 김인수 부장이 입사하면서 기자 둘이서 신문 4면을 제작했다. 

 

내 마음에 찍힌 법인(法印)

지금은 세상에 안 계셔서 뵐 수 없지만 내 마음에 법인(法印)을 찍어주신 스님들의 가르침은 늘 나를 경책한다.

구산(九山) 스님
:
1977년 비가 내리는 봄날이었다. 신문사(대한불교)에서 준비하는 고승 선묵전에 전시할 선묵을 청하러 송광사 구산 방장스님을 뵈러 갔다. 삼일암에서 외출하시려던 스님은 시자에게 지필묵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일원상에 ‘시심마(是心麽)’를 쓰셨고, 난초도 몇 점 치셨다. 스님은 난초 그림 한 장을 버리려고 하셨다. 순간 “스님 제가 갖겠습니다.” 했더니 “네 법명이 무엇이냐?”고 물으셨다. “없습니다.” “그럼 이참에 짓자.” 스님은 “애란자(愛蘭子)라고 하자.”며 그 난초 그림에 청신녀 최애란자라고 써서 내게 주셨다.

‘계첩은 서울 법련사에 가서 주겠다’며 서둘러 외출하셨다. 그 후 나는 구산 스님을 계사로 10중대계를 수지했다. 방장스님은 계첩 봉투에 ‘타우가풍(打牛家風)’이라고 써 주셨다. 보조국사의 목우 가풍을 잇는 구산 가풍이다. 

어느 날 법련사에서 방장스님을 뵙고 선묵 1점을 청했으나 응하지 않으셨다. 쉽게 물러나지 않는 나에게 스님은 말씀하셨다. 

“네가 왜 내 마음을 네 마음처럼 쓰려 하느냐?” 

이 한 말씀은 지금도 내 마음에 찍혀 있다.

 

숭산(崇山) 스님
: 세계적인 젠 마스터로 알려진 숭산 스님은 지구촌 곳곳에서 전법하시며 그 소식을 가끔 나에게 보내셨다.

1989년 어느 날 스님은 귀국 선물로 초콜릿을 가지고 불교신문사를 방문하셨다. 그 무렵 〈불교신문〉 기자들은 법회 현장을 찾아 다니며 독자배가 운동을 했는데 승용차의 필요성을 느꼈다. 자동차 화주에 나선 나는 스님을 뵙는 순간 불교신문 초대 사장직을 역임하셨던 인연이 떠올라 도움을 청했다. 스님은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 자리에서 “마침 신도가 약값으로 준 돈이 있다.”며 1백만 원 봉투를 내놓으셨다. 훗날 이 일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몹시 부끄럽고 스님께 죄송했다. 외국인 제자들과 해외 포교를 하시는 스님을 돕지는 못할망정 약값으로 쓰실 돈을 넙죽 받다니 후회막급이었다. 아낌없이, 망설임 없이 불교신문 승용차 구입 화주에 동참하신 스님의 모습은 자비희사 사무량심을 일러주신 법문이었다.

 

법정(法頂) 스님
: 법정 스님의 일상은 책 속의 법문과 다르지 않았다. 어느 날 다래헌 뜰에 핀 꽃에 가까이 다가가 꽃향기를 맡는 나에게 스님은 말씀하셨다. “주지 않는 것을 탐하는 것도 도둑의 마음이다.” 내가 불교신문 기자 채용에 응시했다고 말씀드렸더니 합격해도 가지 말라고 하셨다. 훗날 스님은 ‘힘든 곳에서 잘 견딘다’며 대견해하셨다.

스님께서 불일암에 계실 때였다. 취재가 있어 송광사에 갔다. 큰절 대웅전 앞마당에서 일간지 기자들과 담소를 나누시던 스님은 저만큼 오고 있는 나를 향해 큰 소리로 “어이 비구니 종정 오는가.” 농담으로 반갑게 맞아 주셨다.

이제 스님은 뵐 수 없지만 나는 매월 소책자 《맑고 향기롭게》를 맞으며 스님의 가르침을 되새긴다.

 

〈불교신문〉 30주년 문화행사

1990년 〈불교신문〉 창간 30주년을 맞아 출판·문화 전담기자였던 나는 4건의 행사를 기획 진행했다.

① ‘1990 불서대전’을 기획하면서 삼성출판사 김종규 대표를 찾아갔다. 김 대표는 “포스터를 멋지게 만들어 줄 테니 전국 사찰을 비롯 곳곳에 홍보하라”며 격려와 관심을 보였다. 단독 진행이 어려워 도서출판 운주사에 전시와 판매를 의뢰했다. 해방 이후 출간된 불서 1,500여 종 3만여 권을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아 조계종 총무원 1층 불교회관에서 열었다. 불자들은 물론 일반 시민들의 시선을 끌었다.

② ‘사찰음식 잔치’는 장안의 화제를 모았다. 사찰음식이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이라 매체마다 크게 보도했다. 팸플릿 600부가 모자랐다. 불자로서 사찰음식에 관심을 가졌던 한국식생활개발연구회 왕준연 회장에게 강연과 조리 시연을 부탁했다. 전국비구니회도 적극 동참했다. 각 지역에서 선정된 비구니 사찰은 산사의 별미 20여 점을 선보였다. 12월 20일 오후 2시 서울 강남의 리베라호텔 백제홀. 참석 대중은 전시된 음식을 줄 서서 시식했다. 이듬해 비구니회는 제2회 사찰음식잔치를 유료 행사로 단독 진행할 뜻을 보였다. 〈불교신문〉은 비구니회로부터 불교출판문화상 후원금으로 2백만 원을 받고 사찰음식 잔치 행사권을 넘겼다. 그 후 조계종 총무원은 문화포교 사업으로 전국 사찰음식 자료집을 발간하고 전문식당을 운영했다.

③ ‘일본 속의 한국불교 역사 탐방’은 이선행 법사가 운영하는 수미산여행사와 함께 진행했다. 한일 불교사를 공부하고 한국 불교문화의 우수성을 확인하는 기획이었다. 법륭사, 광륭사, 동대사, 사천왕사 등을 참배했다. 불교신문사 전 직원은 무료로 다녀왔다. 30주년 보너스였다. 나는 〈불교방송〉 ‘자비의 전화’ 생방송을 진행하고 있어서 가지 못했다.

④ ‘불교출판문화상 올해의 불서’는 불교계에 처음 제정되어 출판계의 주목을 끌었다. 1990년 올해의 불서(최우수상)는 강건기 교수의 《마음 닦는 길》이 영예를 안았다. 참여 열기가 뜨거워 계획에 없던 기획상과 특별상을 추가했다. 1994년 봄 조계종에 개혁종단이 들어서면서 나는 불교신문사를 떠났고, 불교출판문화상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다행히 불교출판협회가 같은 이름의 상을 제정했고, 요즘은 조계종 총무원과 공동으로 매년 시상하고 있다.

 

BBS 라디오 진행

불자들의 염원이었던 BBS 불교방송이 1990년 부처님오신날 개국되었다. 나는 그해 가을에 신설된 신행상담 프로그램 ‘자비의 전화’ 첫 진행자가 되었다. 매일 오전 10시부터 1시간 동안 청취자들이 전화와 엽서로 질문을 하고 상담을 맡은 스님들이 궁금증을 풀어주는 생방송이었다. 성열 스님, 혜창 스님, 혜주 스님이 1주일에 이틀씩 상담을 했다. 초보 진행자인 나는 담당 작가 없이 오프닝과 클로징 멘트를 직접 썼다. ‘자비의 전화’는 날로 인기를 더했다. 백일 맞이 공개방송을 불교방송 3층 법당에서 했는데 지하에서 3층 계단까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내 동생의 부축을 받아 참석하신 우리 어머니는 허리가 몹시 불편하셨는데도 어느 스님에게 의자를 양보하고 바닥에 앉으셔서 딸의 방송을 지켜보셨다.

1991년 봄이었다. 미국 LA 라디오코리아에서 ‘자비의 전화’를 생방송으로 진행했다. LA 관음사 도안 스님과 법타 스님, 평화사 신성도 스님이 전화 상담을 했다. LA 불자들은 기다렸다는 듯 방송에 참여했다. 불서를 보내달라는 요청도 있었다. 나는 서울에 와서 방송과 신문을 통해 LA 불자들의 소식을 전하고 불서 모으기에 나섰다. 도안 스님이 불서를 가져갔는데 너무 많아서 운송을 고민할 정도였다. 나는 그해 부처님오신날 LA 특집 녹음방송을 끝으로 불교신문사 뜻에 따라 ‘자비의 전화’ 진행을 내려놓았다. 오전 근무를 방송국에서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얼마쯤 지나서 ‘피안을 향하여’라는 프로그램 진행을 맡았다. 녹음방송이라 수월했다. 바라밀 수행을 잘하고 있는 사부대중의 이야기를 듣는 프로그램이었다.

2000년 10월부터 불교 종합 매거진이라 할 수 있는 새 프로그램 ‘지금은 불교시대’를 진행했다. ‘무명을 밝히고’를 확대 개편한 생방송으로 매일 오후 4시 30분부터 6시까지 불교계 주요 소식과 현장 이야기 신행의 방향, 인물 인터뷰 등을 깊이 있게 다뤘다. 이 프로그램은 1년 후 다시 ‘무명을 밝히고’로 돌아갔다.

2006년부터 2015년 봄까지 진행한 ‘BBS 초대석’은 각계각층의 사부대중과 이야기를 나누며 신행의 향기를 전한 주말 프로그램이었다. 그 많은 초대 손님 중에서 외국인 노동자들과 함께한 김광화 대표와 탈북민을 돕는 여성 포교사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다.

방송 포교에 동참하도록 기회를 준 불교방송에 감사한다.

 

〈현대불교신문〉 창간 편집국장

1994년 봄, 조계종 개혁종단 출범과 함께 나는 불교신문사를 떠나야 했다. 4월 27일 자 제작을 끝으로 영문도 모르는 권고사직을 당했다. 집에서 쉬고 있는데 어느 날 안면 있는 분의 연락을 받고 조계사 인근 찻집에 갔다. 그때 맞은편에서 나를 선보러 온 2명의 거사는 한마음선원에서 〈현대불교신문〉 창간을 준비하고 있다며 사옥 2층 사장실로 안내했다. 김광삼 사장과의 대화는 자연스러웠지만 실은 면접이었다. 김 사장은 대화 끝에 “함께 일합시다”라고 말하고는 텅 빈 3층에 있는 편집국장실을 보여줬다. “여기가 국장실입니다.” 그 방 창가에는 5월의 연둣빛 잎들이 바람에 살랑이고 있었다.

나는 한 달 남짓 쉬고서 1994년 7월 1일부터 현대불교신문사로 출근했다. 김사장은 “불교언론뿐 아니라 언론계 최초의 여성 편집국장입니다.”라며 내게 힘을 실어 주었다. 이경숙 기자를 비롯하여 경력기자와 수습기자 5명을 공채로 뽑고 고은 선생님을 고문으로 모셨다. 창간 준비호를 2회 만들고 1994년 10월 15일 자 24면 창간호를 발행했다.

창간호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세연을 다하셨다. 아버지 입관 모습을 보면서 나는 엉엉 울었다. 삼선포교원 원장 지광 스님이 문상 오셔서 나를 보고는 좀 이상하다고 우리 어머니께 귀띔하셨다. 나는 바로 응급실에 가서 주사를 맞고 쉬었다. 아버지 49재를 정성껏 모셔주신 지광 스님과 묘순 스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지금도 지니고 있다.

창간호가 나오던 날 밤, 인쇄소에서 현장을 지키고 있던 나는 필름이 최종 오케이 대장이 아님을 발견했다. 이미 퇴근한 여직원을 불러내서 필름을 다시 뜨고 새벽에서야 창간호를 손에 들었다. 

1996년 어느 날 조계사 입구에 있는 범종사에 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 모조본이 시선을 끌었다. 순간 서양화가 하인두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왜 학생들이 아그리파나 비너스상으로 데생 공부를 해야 합니까.” 나는 바로 김광삼 사장에게 반가사유상을 데생용으로 축소하여 중고교에 무료 보급하면 좋겠다고 건의했다. “합시다.” 김 사장은 그 자리에서 구두 결재를 했다. 반가사유상 축소 제작은 범종사가 맡았다. 데생용 반가사유상 모금 동참금은 1구좌당 10만 원이었는데 스님들과 불자들이 적극 동참했다. 주요 일간지와 매체들은 비중 있게 기사화했다. 각급 학교에서 주문이 줄을 이었다. 천주교 재단 학교의 신부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신바람 나는 불사였다. 

1993년 불교신문사에 근무할 때였다. 첫 번째 ‘책의 해’에 ‘불서를 읽읍시다’ 캠페인을 전개하면서 ‘부처님 일대기 독후감 공모’를 했다. 그 기억을 떠올려 1997년 ‘문화유산의 해’에 ‘불교문화기행’을 진행했다. 독자들의 요청에 힘입어 1998년에는 ‘불교문화 체험기행’ 1999년에는 ‘구산선문 참선기행’으로 이어졌다. 

1999년 2월은 문화관광부가 지정한 ‘이달의 문화 인물 혜초’의 달이었다. 1998년 가을 나는 선음악 ‘혜초’ 오카리나 음반을 발매한 유승엽 작곡가에게 불교연합합창단과 함께 공연하면 어떻겠냐고 제의했다. 유승엽 선생의 일정이 여의찮아 그 계획은 무산됐다. 국악교성곡을 떠올렸으나 경비 마련이 쉽지 않아 망설였다. 우선 김회경 작곡가에게 작곡을 청탁했다. 고은 선생에게 작사를 의뢰하려 했으나 해외에 계셨다. 어느 날 시인인 진각종 지현 정사가 혜초 스님에 관한 자료 수집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교성곡 작사를 부탁했다. 진각종 통리원장 혜정 정사에게 행사 취지를 설명하고 〈현대불교신문〉과 진각종이 함께 혜초 음악회를 열기로 했다. 모든 경비는 진각종이 전담했다. 정옥녀 청룡사합창단 단장 겸 지휘자가 불교연합합창단을 구성하여 중앙국악관현악단과 연습을 했다. 반영규 선생이 무대감독을 맡았다. 1999년 2월 마지막 날,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3백여 명이 무대에 오르는 ‘창작 국악교성곡 혜초’가 막을 올렸다. 객석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교계 인사들은 물론 신낙균 문화관광부 장관, 박철언 국회의원 등 정관계 인사들이 자리를 빛냈다. 버스를 대절해서 온 진각종 신도들은 아쉽게도 돌아갔다. 연주가 끝나자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조계종 총무원장 고산 스님은 “조계종은 이런 행사를 왜 못했느냐”며 아쉬워했다.

나는 그해 11월, 현대불교신문 편집국장직을 내려놓았다. 김 사장은 “6개월만 쉬세요.”라고 말했다. 어느 날 한마음선원에서 연락이 왔다. 대행 스님은 “방송은 하면서 왜 신문사에는 안 나오느냐”고 물으셨다. “방송은 입만 갖고 가면 되지만 신문은 24시간 풀가동해야 합니다.” 스님은 불쑥 “삐졌냐?”고 물으셨다. “아닙니다. 스님께서 제 마음을 다 보시지 않습니까?” 스님은 아무 말씀 안 하시고 내게 봉투를 주셨다. 그 따스함을 어찌 잊겠는가.

 

헛소문에 다친 마음

현대불교신문사를 퇴직한 후 ‘최 국장이 쫓겨났다’는 소문은 한동안 나를 괴롭혔다. 그보다 더 심한 헛소문에 마음을 다치기도 했다. 

1980년쯤으로 기억한다. “최 기자 결혼 했다며……” “재혼 안 하세요?”

어처구니없는 헛소문에 나는 몹시 힘들었다. 아니라고 해도 믿지 않았다. 이런 말이 어디서 왜 나왔을까. 퍼뜩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대한불교〉 조판을 하는 공화출판사 사무실에서 어떤 여자가 나를 쳐다보기에 나도 쳐다보면서 그냥 지나쳤다. 어디서 본 듯했던 그녀가 헛소문과 함께 떠올랐다. 내가 첫 직장을 사직할 때 사무 인수인계를 받은 후임자라는 기억과 함께 그 회사에서 그런 루머가 만들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느 날 현장 자문을 맡고 있는 기술상무가 을지로에 있는 판매회사에서 경리사원을 찾고 있는데 옮기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월급이 2배로 많은 조건이었다. 나는 회사에 어떻게 사의를 표해야 할지 고민했다. 전무께 도리가 아닌 것 같았다. 기술상무는 나를 빼냈다는 말을 들을까 염려하여 비밀로 해 줄 것을 당부했다. 나는 몸이 아파서 쉬겠다며 사표를 냈다. 멀쩡하게 일하던 직원이 갑자기 아프다며 사표를 냈으니 별별 억측이 돌았나 보다. 나는 기술상무와의 약속을 지키느라 회사를 그만둔 사연을 입 밖에 낸 일이 없다. 그런데 그런 해괴한 헛소문이 나돌았으니……. 어느 해 불교신문 송년회 자리에서 한 남자 후배가 불쑥 “애들은 어디 있어요?”라고 물었다. 몹시 불쾌했지만 유쾌한 자리의 흥을 깰 수 없어 나는 침묵했다. 헛소문은 미국까지 건너갔고, 내가 사는 흑석동으로도 들어왔다. 대담하지 못한 나는 헛소문에 신경과민증을 보이기도 했다. 입안의 도끼를 실감했다.

 

어머니의 와선

퇴직 후 내 건강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했는데 어머니께서 크게 다치셨다. 그리고 중풍 가족력을 피하지 못하셨다. 몹시 어지러워하셨고 연하 곤란으로 식사를 제대로 못 하셨다. 나는 여러 가지 죽을 만들어 아주 곱게 갈아서 드렸다. 물도 넘길 수 없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콧줄을 끼셨다. 노환인 줄 알면서도 꼭 쾌차하실 수 있다는 신념으로 간병했다. 어느 때는 《반야심경》을 사경하고 발원문을 쓰며 기도했다. 새벽 3시 이전에는 잠을 안 자고 어머니의 호흡을 확인했다. 어머니는 어눌한 목소리로 “고맙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엄마가 우리를 키우느라 애쓰시고 고생하셨으니 빚 받는다고 생각하세요.”라고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누워서 참선하시듯 얼굴이 평온하셨다. 무슨 생각 하시느냐고 여쭈어보면 “아무 생각 안 한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와선 중이셨다. 내가 방송국에 가는 날은 동생이 돌봐드렸다. 그렇게 10년이 지나면서 나는 힘겨워했다. 동국대학교 일산병원에서 퇴원하시는 날 동생이 어머니를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갔다. 나는 우리 제부에게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2011년 현대불교신문사에서 연락이 왔다. 편집이사로 1주일에 2~3일 출근하여 제작을 도와달라고 했다. 나는 다시 신문사 일에 몰두했다. 2013년 11월 늦가을 맑은 날 아침 어머니는 생신을 3일 앞두고 영면에 드셨다. 입관하신 어머니의 얼굴을 어루만져 보았다. 나와 어머니의 마지막 스킨십이었다. 어머니께서 꽃향기 속에 가시도록 꽃길을 열어주신 여러분께 감사하는 마음을 지금도 갖고 있다. 삼천사 성운 대종사님과 동출 스님 등 대중 여러분의 여법한 49재 의식 속에 어머니는 94년 세연을 마치셨다.

 

결실의 기쁨 그리고 발원

세 권의 책 출간: 《한국불교전설 99》는 1986년에 펴낸 나의 첫 저서이다. 1984년 1월부터 2년간 〈불교신문〉에 연재한 ‘내 고장 불교전설’을 우리출판사에서 출간했다. 이 책은 최초의 불교 지명 연기 설화집으로 주목을 끌었다. 신문, 방송, 통신 등 매체마다 신간 소개를 했다. 스님들은 법문 자료로 선호했고, 여러 사찰에서 사보에 게재했다. 2004년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은 이 책의 내용을 창작 및 시각 자료 개발 소재로 선정하고 《문화원형백과》 불교설화 편에 실었다. 우리출판사는 표지를 여러 번 바꾸면서 10쇄를 펴냈고, 2020년 봄에 현장 사진과 주소를 첨부하여 개정판을 출간했다. 

갑년을 맞던 해 두 번째 책 《잘사는 법 99》를 출간했다. 부처님은 이럴 때 어떻게 하라고 일러 주셨을까. 이 책은 이 질문에서 시작됐다. 2,600여 년 전 제자들에게 그때그때 하신 말씀을 오늘 우리 삶의 고민을 푸는 해법으로 삼았다. 우리출판사에서 펴냈다.

세 번째 책 《부처님 법대로 살아라》는 비구니 원로 광우 스님(1925~2019)과의 대담집이다. 출가 70년, 정각사 창건 50년을 맞은 스님의 수행과 포교 이야기는 ‘불교의 핵심 가르침은 무엇이며 어떻게 믿고 공부해야 하는가’를 일러주는 법담이다. 평생 법화행자로 수행하며 대중을 교화하신 스님의 법담은 걸림이 없었다. 이 책은 근현대 한국 불교사 연구, 특히 최초의 비구니 강원 개설을 비롯해서 비구니 스님들이 어떻게 수행, 정진했고 어떻게 불교 발전에 기여했는가를 알려주는 사료적 가치도 지녔다. 2008년 조계종출판사에서 펴냈다.

수상의 기쁨: 제20회(2012년) 불교언론문화상 시상식에서 불교언론인상을 받았다. “우리 집에는 2명의 불교언론인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뒷바라지가 없었다면 오늘 저는 이 상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는 수상의 기쁨을 누워 계신 어머니에게 돌렸다. 불교언론인상에 앞서 조계종 포교원에서 주는 포교대상 원력상을 수상했고, 문화관광부 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 한국여성불교연합회는 여성불자상 첫 수상자로 나를 선정했다. 김묘주 회장은 내 목에 금메달을 걸어 주었다. 불교신문 30주년과 현대불교신문 30주년에 공로패를 받았다. 상을 받을 때마다 나의 삶을 인정받는 것 같아 기뻤다.

발원: 2015년 12월 30일 나는 현대불교신문 편집이사직을 사직하면서 내 삶의 바깥 활동을 끝냈다. 늘 조용하고 따뜻한 한마음선원 이사장 혜수 스님을 비롯 혜솔 스님, 혜월 스님, 혜근 스님과 박계성 대표가 전별의 자리를 마련했다. ‘내가 쓴 기사, 내가 만든 신문이 전법에 얼마나 기여했을까’ 자문하면서 그 길에 힘이 되어주고 울타리가 되어 준 여러 인연에 감사한다. 부모님 떠나신 후 나의 보호자로 나선 동생 내외와 조카들에게 고맙고 또 고맙다. 

“어떻게 살았길래 보는 사람마다 최 기자가 다시 불교신문에 와야 한다고 합니까?” 불교신문사 퇴직 무렵 효림 스님의 말과, 5년여간 〈현대불교〉 1면에 무기명으로 쓴 칼럼 ‘목어’는 나의 값진 퇴직 자산이다. 

아! 나는 전생에 무슨 복을 지었기에 부처님 시봉하는 삶을 살아왔을까. 이제 여생을 집착 없이 물 흐르듯이 살고 싶다. 어디에도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덕이 있는 사람의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사방에 풍긴다”는 《법구경》 〈화향품〉의 말씀처럼 나의 말년이 그러하길 발원한다. ■

 

최정희
불교신문 공채기자, 현대불교신문 창간편집국장, 편집이사 역임. 불교방송 ‘자비의 전화’ ‘피안을 향하여’ ‘지금은 불교시대’ ‘BBS 초대석’ 진행. 불교언론인상, 조계종 포교대상 원력상, 문화관광부장관 표창, 한국여성불자상 등 수상. 저서로 《한국불교전설 99》 《잘사는 법 99》 비구니 원로 광우 스님 대담집 《부처님 법대로 살아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