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불교학자 39. 임계유(任繼愈, 1916~2009) / 김방룡
1. 서언
임계유(任繼愈, 1916~2009)는 현대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의 철학 및 종교학계를 대표하는 학자이다.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을 거쳐 1949년 개국한 중국은 75년의 기간을 거치는 동안 미국과 더불어 세계를 지배하는 강대국이 되었다. 이 기간 모택동의 문화대혁명과 등소평의 개혁 개방 등을 거치면서 중국의 종교인과 지식인들은 크나큰 시련을 겪었다. 이러한 시기 중국 민족의 정신문화를 계승 보존하면서도 사회주의 체제에 맞는 철학과 사상을 정립하는 것은 지식인에게 부여된 시대적 과제라 할 수 있다. 철학과 종교학의 분야에서 이러한 시대적 사명을 감당했던 지식인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임계유(런지유)이다.
임계유는 민족주의자이자 마르크시스트이며, 철저한 고증과 합리적 해석을 기본으로 하는 비판철학자이다. 그는 중국 고대 정신 유산을 총결산하는 것을 평생의 사명으로 여겼다. 중화민족의 인식사(認識史)가 바로 ‘중국철학사’라고 이해하였으며, 중국철학은 종교와의 투쟁 속에서 변증법적으로 발전해 왔다고 주장하였다. ‘철학이란 유물주의와 유심주의 사이 투쟁의 역사이다’라는 역사유물주의 관점을 가지고 중국 철학사를 기술하였다. 봉건시대 중국의 대표적인 철학은 유·불·도이다. 임계유는 유·불·도 삼교에 대하여 많은 연구 업적을 남겼는데, 특히 불교에 관한 연구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임계유는 《한위양진남북조 불교사》를 저술한 탕용동(湯用彤, 1893~1964)의 제자이다. 그는 스승인 탕용동의 업적을 이어 《한당불교사상논집》을 저술하였다. 임계유가 주편한 《중국철학사》(총 3권)의 2책 ‘위진남북조 편’ 중에서 〈위진남북조의 불교경학〉을 직접 저술하였으며, 《중국불교사》(총 3권)를 주편하였다. 임계유의 대표적인 제자는 남경대의 뢰영해(賴永海) 교수이다. 그의 《중국 불성론》은 법지에 의하여 번역되어 국내의 불교학계에도 잘 알려져 있다. 2010년 뢰영해가 주편한 《중국불교 통사》(총 15권)가 발간되었는데, 이 책의 총 서문에서 “이러한 중국불교 통사 작업이 임계유의 《중국불교사》(총 4권)와 일본의 겸전무웅(鎌田茂雄)이 지은 《중국불교 통사》를 계승하고 있다”라고 밝히고 있다.
중국 불교학계에서 임계유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과 그 영향력은 지대하다. 그의 《한당불교사상논집》을 보고서 모택동은 그를 “봉황의 털이자 기린의 뿔(鳳毛麒角)”이라고 찬양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는 임계유의 생애와 철학 및 불교사상을 국내에 출판된 저술과의 관련 속에서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2. 임계유의 생애
임계유는 1916년 중국 산동성(山東省) 평원현(平原縣) 출신으로 부유한 집안의 4남 가운데 2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이 넉넉했던 임계유는 여섯 살 때 산동성립 제1모범소학교(지금의 지난대명호소학교)로 보내졌는데, ‘계유(繼愈)’라는 이름은 ‘한유(韓愈)를 계승하라’는 뜻으로 입학할 때 선생님이 지어준 것이다. 어릴 적부터 사색을 좋아했고, 초등학교 시절 《논어》와 《맹자》 등 유교 경전을 공부했다. 어려서 부모님을 따라 노남(鲁南) 일대에서 생활하였다가, 1928년 일본이 제남(濟南)을 점령하자 고향인 평원현으로 돌아와 북평대학교 부속중학교를 다녔다. 이때 북경대 출신 선생님들의 영향 속에서 호적(胡適), 양계초(梁啓超), 풍우란(馮友蘭) 등의 저서를 통하여 서양철학과 계몽사상에 심취되었다.
1934년 북경대 철학과에 입학하였는데, 처음에는 서양철학에 관심이 많았다. 대학교 1학년 때 탕용동 교수에게서 철학개론 수업을 받았는데, 스피노자에 관심이 있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북경대학과 청화대학 및 남개대학 등 3개 대학이 호남성 장사로 피난하여 ‘국립장사임시대학’을 설립하였다. 이듬해 남경이 일본군에 점령되어 운남성 곤명(昆明)으로 이전하여 ‘서남연합대학(西南联合大学)’이라 이름하였다. 이때 임계유는 장사에서 곤명까지 걸어가는 여행단에 등록하여 60여 일 동안 1,400리의 대장정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경험 속에서 임계유는 농민들의 고통을 직접 목도하였고, ‘자신 삶의 이상이 지금의 농촌 현실과 어떻게 관계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깊이 고민하였다. 이러한 고민 속에서 마르크스 철학에 관심을 가지는 한편, 중국의 전통문화와 철학을 통하여 고난에 시달리는 중화민족을 되살려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지니게 되었다.
임계유는 1939년 서남연합대학 북경대학 문과연구소의 대학원생에 합격하여 탕용동 교수와 하린(賀鱗) 교수의 지도 아래 중국철학과 불교사를 전공하였다. 이 시기 탕용동이 《한위양진남북조 불교사》를 완성한 직후여서 불교학 연구에 큰 영향을 받았다. 1941년 임계유는 대학원 과정을 수료하고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1942년부터 1964년까지 북경대학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강사, 부교수, 교수 등을 역임하였는데, 1946년 서남연합대학이 해체되면서 북경대학으로 돌아갔다. 북경대학에서 임계유는 중국철학사, 송명리학, 중국철학 문제, 주자철학, 화엄종 연구, 불교저서 선독, 수당불교, 논리학 등을 강의하였다.
임계유는 청화대학 중문과 출신의 풍종운(馮鍾雲)과 결혼하였는데, 부인은 10년간 교사를 하였고 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다. 부인 풍종운의 아버지 풍경란(馮景蘭)은 청화대학 지질광학과 교수를 역임했고, 큰아버지가 바로 풍우란(馮友蘭)이다. 풍우란은 당시 청화대학에서 문과대학 학장을 역임하였다. 이렇게 임계유는 스승인 탕용동과 더불어 부인의 큰아버지였던 풍우란과 인연을 맺음으로써 이들의 학문적 영향을 받게 되었다.
임계유는 자신의 서재를 ‘잠재(潛齋)’라 이름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였는데, ‘잠재’란 지구전을 치르는 항전의 정신으로 공부와 학문에 전념하기 위함이었다. 신중국의 건설 초기에 북경대와 청화대 철학과 교수와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들이 2주에 한 번씩 모여 세미나를 개최하였는데, 임계유는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세미나에서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토론이 이루어졌는데, 여기에서 마르크스 철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더불어 역사유물주의 관점으로 중국의 전통문화를 연구하는 자신의 학문적 입장을 정초하였다.
1956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으며, 중국과학원 철학연구소의 연구원을 겸임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제1기 박사과정 연구생을 양성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임계유는 이때부터 역사유물주의에 입각하여 일련의 불교 분야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남조 진송 간 불교의 ‘반야’와 ‘열반’ 학설의 정치적 역할〉(1956), 〈선종 철학 사상 약론〉(1957), 〈천태종 철학 사상 약론〉(1960), 〈화엄종 철학 사상 약론〉(1961), 〈한당시대 불교 철학 사상의 중국 전파와 발전〉(1963) 등이 그것이다.
1959년 10월 13일 늦은 밤에 임계유는 모택동의 초청으로 중남해의 봉택원에 들어가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택동은 역사유물주의에 입각한 임계유의 불교 연구에 대해 공감하면서 불교와 도교뿐만 아니라 기독교까지 연구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1964년에 중국과학원 세계종교연구소가 설립되자 임계유는 초대 소장으로 취임하였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임계유 또한 고초를 피할 수는 없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하남성의 신양간학교에 보내져 교육받아야 했다.
문화대혁명이 끝나자 임계유는 북경으로 돌아왔다. 1978년에 중국사회과학원 세계종교연구소 소장으로 부임하여 세계 종교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총지휘하는 한편, 사회과학원 대학원 교수와 박사과정 지도교수를 맡아서 종교학 석사와 박사과정의 학생을 지도하였다. 이때 임계유가 지도했던 학생들이 이후 중국 각 대학의 철학과 교수로 임용되었고, 이들에 의하여 현대 중국철학, 중국불교의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임계유는 개인적으로 큰 박해를 피할 수 있었지만, 주변의 비극을 목격하면서 이에 대해 깊이 반성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임계유는 단순한 종교·철학을 연구하는 학자에 국한되지 않고, 국가 차원에서 종교·철학에 관한 교육과 연구를 지휘하는 지도자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1978년 말 중국무신론학회가 창립되었는데, 창립총회에서 임계유는 유교의 성격을 종교로 보아야 한다는 ‘이학종교론(理學宗敎論)’을 주장했다. 물론 ‘유교가 종교인가, 아닌가?’ 하는 유교의 성격 문제는 임계유 이전부터 제기되었던 문제이지만, 이러한 주장을 기점으로 이후 1980년대 지속적으로 임계유가 이에 관한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지금까지도 중국 유학계의 주요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서울대 금장태 교수와 안유경이 공역하여 임계유의 글들을 모아 《유교는 종교인가》(총 2권, 지식과 교양, 2011)를 발간하였다.
1980년대 들어 임계유는 대규모 전통문화 자료 수집을 주도했다. 1982년부터 중화대장경(中華大藏經)(한문 부분) 편찬을 주관하여 1994년에 편찬하게 되었다. 이러한 국가 차원의 대불사를 주도한 사실만으로도 그가 중국 불교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알 수 있다. 1985년에는 북경대학과 협력하여 종교학 학부생을 양성하고 국가를 위해 많은 종교학 연구 인재를 양성하였다. 1987년부터 2005년까지 중국 국가도서관 관장을 역임하였는데, 이는 전국 국가도서관을 총관할하는 직책이다. 이후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제4, 5, 6, 7차 대표를 역임하였으며, 서장(西藏)불교연구회 회장, 중국종교학회 고문, 중국철학사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2009년 7월 11일 93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3. 임계유의 불교사상 연구 관점
임계유가 직접 저술한 내용을 가지고 임계유의 불교사상에 관한 연구를 살펴보고자 하면 그 대표적인 것이 《한당불교사상논집》이다. 이 책은 1963년 삼련서점(三聯書店)에서 출간되었는데, 1973년과 북경 인민출판사(人民出版社)에서 다시 출간되었다. 1980년에는 동경 동방서점(東方書店)에서 일본어로 《중국불교사상논집》으로 출간되었으며, 1989년 일본어판을 가지고 추만호·안영길 역의 《중국중세불교사상비판》이 민족사에서 출간되었다. 임계유의 불교사상이 이같이 주목받았던 배경에는 이 시기 한국사회에서 마르크스 철학과 민중불교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1990년에는 임계유의 《중국철학사》가 전원택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임계유의 《한당불교사상논집》은 탕용동의 《한위양진남북조 불교사》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하여 그 외연을 당나라까지 확대하여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민족사에서 출간된 《중국중세불교사상비판》에서는 총 8장으로 번역하고 있다. ① 서론, ② 남조 진송시대 반야 및 열반학설의 정치적 역할, ③ 천태종 철학사상 비판, ④ 법상종 철학사상 비판, ⑤ 화엄종 철학사상 비판, ⑥ 선종 철학사상 비판, ⑦ 선종사 연구에서의 호적의 오류, ⑧ 불전 번역을 통해 본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관계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목차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남북조 시기와 수당 시기의 중국불교 종파의 사상이 당시 지배계급의 이익에 어떻게 부합되고, 그러한 사상이 당시 피지배계급의 입장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지를 논리적으로 해명하는 것이 주요한 논지이다.
《자본론》을 통하여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로 이행 과정에 대한 마르크스의 견해에 동조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필연적으로 이행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역사적 유물주의가 일반적으로 타당하다고 믿더라도 이를 특수한 역사 상황에 적용하면 그 타당성을 유지하기는 어렵기 마련이다. 그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였다는 점에서 임계유의 학문적 능력이 대단히 탁월함을 알 수 있다. 임계유의 불교사상에 대한 이해가 탁월하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연구방법론은 필연적으로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추만호는 이 책의 〈옮기는 글〉에서 이러한 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임계유)의 논지가 지닌 뛰어난 철학 방법론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변명하듯이 역사 방법론과의 변증법적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은 점이 지적된다. 두 가지만 지적하자. 첫째, 토대에 뿌리 둔 상부구조로서의 불교를 다루면서도 실제로 토대의 본질에 관한 과학적 접근이 이루어지지 않아, 전근대에 현상으로 드러난 정치 제도적 경제용어만을 그대로 사용하는 점이다. 둘째, 중세 봉건사회의 법칙과 현대자본주의 사회의 법칙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당대 불교와 현대 관념철학의 동질성을 강조함으로써 객관적 역사 발전이라는 큰 명제가 실종된 점이다.
위의 인용문을 통하여 볼 수 있듯이 임계유의 저술은 불교를 신앙하는 사람들이나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임계유는 불교가 상부구조에 속하더라도 무조건 지배자의 입장에 서지는 않았고, 각 사회구성체의 토대에 따라 새로운 종파가 창종되었다는 점을 주장하였다. 물론 각 종파의 불교사상은 피지배자의 소망을 반영하긴 하였지만, 결국은 지배자의 입장에 서서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반작용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4. 임계유의 불교사상 연구 내용
저서 《중국중세불교사상비판》을 통해 임계유가 밝히고 있는 불교사상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간략하게나마 소개하고자 한다. 물론 ‘이러한 임계유의 주장을 어떻게 이해하고 판단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독자의 몫이다. 아래의 내용들은 임계유의 주장을 압축한 것이다.
● 남조 진송 시대의 대표적인 불교사상으로 반야사상과 열반사상이 있다. 위진 시기 지배적인 사상은 현학(玄學)이었는데, 이는 객관적 유심론이라 말할 수 있으며 당시 지배계급의 이익에 봉사하였다. 현학의 사상적 특징은 정신과 물질의 문제를 본(本)과 말(末)로 규정하여 정신을 귀하게 여기고 물질을 천하게 여겼다. 반야사상은 바로 이러한 현학의 풍조 속에서 생겨났는데, 승조가 《조론(肇論)》에서 밝힌 공(空)사상이 대표적이다.
● 열반 사상은 남조의 문벌제도가 지니는 정치·사회적으로 불평등한 현실 속에서 ‘누구에게나 불성이 있다’라는 주장을 편 것인데, 이는 계급적인 모순을 완화시켜 인민의 투쟁 의지를 약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대표적인 사상은 축도생의 ‘돈오성불론(頓悟成佛論)’이다.
● 수·당 시대 대표적인 불교 종파는 천태종이다. 지의가 유심론적 세계관으로써 사유와 존재의 문제, 주체와 객체의 문제에 대해 밝힌 설이 일념삼천설(一念三千說)이며, 또한 삼제원융설(三諦圓融說)이다. 지의는 남북조의 사상을 융합하고 지관(止觀)사상을 주장하였는데, 이를 통해 지배계급에 봉사하였다. 그러나 당시 화엄과 유식과 선종 등의 경쟁자가 출현함으로써 곤란한 처지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때 등장한 것이 담연의 ‘무정유성설(無情有性說)’이다.
● 법상종은 대승공종이 온갖 힘을 기울여 현실 세계를 진실하지 않은 존재라고 배제한 그 기초 위에 세워진 철학 체계이다. 반야공종의 사상은 법상종 학설의 저급한 단계이고, 최고의 진리는 대승유종의 이론으로 보았다. 법상종은 중국불교 가운데 인도의 대승유종에 가장 충실한 철학 체계였다고 할 수 있다. 당나라 초기 불교의 종파들이 중시했던 것은 성불의 문제와 불성의 유무 문제였는데, 현장은 당시 8식설과 9식설의 대립으로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인도로 떠난 것이었다. 현장이 귀국하여 법상종을 세워 한동안 유행한 것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며, 현장의 유식사상은 그 성격이 복고적인 유심론에 불과하다.
● 화엄종의 철학은 ‘일진법계(一眞法界)’로써 세계의 근원을 삼았다. 여기에서 말하는 ‘법계’는 유심론과 유물론의 경계를 무너뜨린 후에 다시 유심론의 입장을 주장하는 것이다. 화엄종의 이러한 유심론적 이론은 종교철학에 입각하여 유심론을 선전하고 유물론을 말살한다. 그들은 개념을 통해 객관 사물을 인식하여 그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사물의 부분과 전체라는 한 쌍의 개념을 혼란시켜 사물의 객관적 존재를 말살하는 것이다. 화엄종은 있는 힘을 다 쏟아 변화의 원인을 설명하지만, 의식적으로 그것이 어떠한 변화인지와 무엇과의 연관인지를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물질을 무시하고 가공으로 변화와의 연관을 논하여 신비화함으로써 종교 신학과 유신론에 빠져들게 된다. 화엄종은 일진법계의 항구불변하는 숭고한 지위를 부정할 수가 없었고, 또한 부정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결코 당시의 사회적 모순과 부조화를 바로 보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변증법은 유심론의 체계 안에서 그 생명력이 있는 핵심 부분을 거세당하게 되는 것이다.
● 선종의 사상적 특징은 객관적 유심론에서 주관적 유심론으로 변화한 것이다. 선종이 본격적으로 형성된 것은 혜능이다. 선종은 ‘철학의 근본 문제가 주관적 사유와 객관적 현실과의 모순을 어떻게 통일하는가?’라는 데 문제가 있음을 인식했다. 선종은 주관해 의해 객관을 창조하고 마음을 물질에 대치시켰다. 또한 불성을 피안의 세계로부터 각각의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되돌리려 했다. 종래의 불교가 경전에 의존하는 방향을 바꾸어 스스로 단숨에 깨달을 수 있는 길이 있음을 믿게끔 했다. 선종은 주관적 유심론과 신비주의에 의해 물질세계를 삼키려 한다. 그러나 물질세계는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기에 제멋대로 말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종은 혜능 이래 불교를 파멸시키기 위해 종교철학을 세우려 했던 의도는 결코 없었다. 그러나 피안의 세계와 현실사회와의 울타리를 제거하도록 하는 종교철학을 세운 것이, 도리어 이론적으로는 불교의 위기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4. 결어
임계유의 생애와 사상을 살피면서 필자의 머릿속에 떠오른 인물은 박종홍이다. 박종홍이 민족적 민주주의자라면 임계유는 민족적 사회주의자라 말할 수 있다. ‘동북아시아의 민족주의가 서구의 민주주의나 사회주의와 과연 결합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점에 대하여 박종홍과 임계유가 구축한 놀라운 철학 체계는 많은 사람에게 긍정의 대답으로 유도한다. 전통 민족사상에 대한 발굴과 연구 업적은 이 분야 연구자들에게 지속적인 영향력을 미치겠지만 이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해석은 시간이 경과할수록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한국 철학계에서 박종홍의 영향력이 그의 사후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중국 철학계에서 임계유의 영향력 또한 변화될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그런데 중국 불교학계에서 그의 영향력은 더 강화될 수도 있다.
임계유는 역사유물주의(사적유물론)의 입장에서 중국불교의 대표적인 종파인 천태, 법상, 화엄, 선 등에 대한 비판을 가하는 연구 업적을 남겼다. ‘상부구조는 하부구조(토대)를 반영하기 마련이고, 사회구성체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의하여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계급이 존재한다. 그리고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생산관계의 모순이 발생하여 새로운 사회구성체로 변증적으로 발전해 나간다’라는 것이 마르크스의 역사유물주의의 핵심 내용이다. 임계유는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중국불교의 구체적인 종파인 천태, 법상, 화엄, 선 등에 적용하여 그 사상이 지배자의 계급의 이익에 복무한다는 점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불교의 사상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절대적으로 믿고 실천하는 불교인들에 의하여 구축된 것이다. 불교를 신앙하지 않는 사람이 불교의 교리를 살핀다고 할 때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 경지를 결코 이해할 수 없고 같은 교리를 읽으면서도 전혀 다르게 이해하게 된다. 불교의 교설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이해관계에 따라 나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신봉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나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불심이 강한 불자들에게 이 같은 임계유의 주장들이 다가오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임계유는 다른 여러 종파 가운데에서 법상종에 대하여 오로지 지배계급의 이익에만 복무한 복고주의적 사상이라고 비판하였다. 호적의 선종 연구에 대해서는 따로 장을 만들어 그 이론의 부당함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비판은 합리적인 근거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신중국 건설 이후 대만 정부에 합류하였던 철학자들에 대한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1992년 한중수교가 맺어진 이후 한국과 중국의 불교계와 불교학계 또한 교류가 확대되어 가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불교는 여전히 국가 통제를 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교계 사이의 교류는 이루어지고 있다.
유심론에 속하는 불교가 문화대혁명의 기간을 거치면서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임계유의 연구 성과에 의하여 불교사상이 가지고 있었던 진보적인 측면을 밝힌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인의 대표적인 정신문화로 불교사상과 불교문화가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임계유를 비롯한 불교학자들의 불교에 대한 연구 성과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러한 점에서 현대 중국불교와 불교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임계유와 그의 불교사상이 반드시 넘어야 할 관문이라 할 수 있다. ■
김방룡 brkim108@hanmail.net
전북대학교 철학과에서 학부와 석사를 졸업하고, 원광대학교에서 불교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 북경대·절강대·연변대 방문학자를 지냈으며, 한국선학회 회장과 보조사상연구원 원장을 역임했다. 《보조 지눌의 사상과 영향》과 〈보조지눌과 태고보우의 선사상 비교〉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현재 충남대학교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