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래도, 아직 불자인가 / 이민용

2025-05-19     이민용

강보불자(襁褓佛子)

나의 불교와의 첫 경험은 늙은 어머니와의 동반으로 시작된다. 평생 한글도 떼지 못한 어머님 손에 끌려 서대문의 어느 ‘선(仙)바 위’ 사암(寺庵)을 오른 일이 기억에 떠오를 뿐이다. 어머님은 나를 깨워 이른 새벽 암자를 찾아 기도드리러 갔다. 이때마다 며칠 전부 터 집안을 ‘깨끗이 소쇄(掃灑)’한 기억이 난다. 어머니는 7남매의 막 내인 내 손목을 이끌고 이 절, 저 절로 치성을 드리러 다녔다. 이러 면 나는 소위 기독교식으로 말해 ‘강보(襁褓) 불자’이지 않을까 강변 해 본다.

그러나 이 기억만을 두고 나의 정체성을 불자라고 밝혀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내 어머님의 마지막 병환은 불행히도 봉은사 새벽 기 도를 다녀오시다 발병하였고, 긴 간병으로 집안의 재산이 거의 소 진되었다. 내 대학 생활은 장학금과 가정교사 아르바이트 일 없이 는 불가능했다. 이쯤 되면 분명 우리 집안은 불교와 밀착되었고, 나의 종교적 고백이나 종교적 정체 성과는 상관없이 나는 ‘불교도’라 해도 무방할 듯하다. 그럼에도 내 집안의 불자성(佛子性)과 나의 선택의지와는 상관없는 일들이었 으니 요즘 유행하듯 나는 ‘우연한 불자(Accidental Buddhist)’일지 도 모른다. 그런데 이 ‘어쩌다’의 사 연들이 결국 내 삶을 온통 지배해 왔고, 그것이 내가 즐겨 인용하는 ‘내 탓’ 업론(業論)이다.

강보 불자인 내가 정작 내 의지로 종교적인 장소에 발을 디딘 곳 은 엉뚱하게 교회였다. 가장 지적 활동이 왕성하고 호기심 많던 고 등학생 시절, 나는 이웃에 있는 강원용 목사의 경동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다. 그곳에서는 주말마다 교양강좌가 개설되었다. 캐나다에 서 갓 귀국한 강원용 목사는 젊은 층을 상대로 교양강의를 베풀었다. 이분에게 참신함을 느꼈다.

또 나는 종로의 YMCA회관을 찾기도 했다. 그곳에서도 교수들이며 사회 명사들의 대중을 상대로 한 교양강좌들이 펼쳐지고 있었 다. 6·25 전란 이후 회복기에 들어선 1960년대는 서구적 문화 소개 와 민족적 주제의 강좌들이 대세를 이루었다. ‘안창호 사상의 무실 역행(務實力行)’에 관한 것이 강의 되는가 하면 슈펭글러의 《서구 의 몰락》이거나 슈바이처 사상에 대해서도 강의가 행해졌다. 초년 의 소위 ‘노도 질풍(Strum und Drang)’이 발동되는 시기였다. 그때 의 우리는 읽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집어삼키듯 빨아 들였다.

그때의 나는 백면서생의 교수가 되는 꿈을 꾸고 있었다. 나는 왜 초년 시절 밖으로 향한 입신양명의 세속적 성공을 접고 안으로 접 어드는 문헌이나 뒤적거리는 내면의 세계를 추구했던가? 더욱이 종교를 학문의 대상으로 선택한 까닭은? 초세속의 종교적 영역을 선택한 나의 감추어진 의도는 무엇이었나? 나의 내면에 대해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자기 위장’을 시도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나의 이런 감춤과 위장의 시도는 아마 우리 세대가 겪은 남북 분단과 얽 힌 결과라 생각된다.

나는 전형적인 ‘이산가족’이었다. 일곱 형제와 자매는 정확히 반 반씩 남북으로 갈라져 살았다. 가족의 절반은 북에 거주하며 그 체 제 속에 살고 있었고, 반은 무학의 어머님과 어렵게 남쪽에 살고 있 었다. 소위 6·25 전쟁 이후 경찰은 수시로 집안을 들이닥쳐 무학의 어머니를 몰아세웠고, 월북한 자식들의 행방을 추궁하는 장면을 어 린 나는 목도해야 했다. 나는 아직도 경찰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린 다. 6·25는 나에게 전쟁의 파괴적 장면뿐 아니라 이념적 분열이 얼 마나 무섭고 집요하게 한 개인에게 각인되는 것인지를 실감케 했 다. 그것은 떨칠 수 없는 질병이고 트라우마로 유전된다.

나의 ‘감춤’의 시도는 이중적이었다. 내면으로 도피이거나 초세속 으로 비약이라는 현실 일탈 시도로 이어졌다고 생각된다. 나는 정 치학이나 법학 전공이 아니라 종교학이나 철학이라는 엉뚱한 방향 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나는 서울대 종교학과를 선택하였다. 나의 종교학 선택은 담임선생을 비롯한 주변을 당황케 했고 집안을 뒤집 어 놓았다. 나의 최초의 ‘던짐’이었다. 그러나 나 자신을 던져 갈등 을 빚으며 어렵게 선택한 종교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내 내면의 질 문이나 갈등을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문제를 해결해 주기는커녕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정작 서울대학교 종교학과의 담당 교수에게 낙담하고 말았다. 기독교의 교조성과 배타성, 그리고 독선성 을 몸으로 체현한 듯한 주임교수를 보면서, 그나마 새롭고 참신하 게 느껴지던 기독교에서 멀어져 갔다. 나는 종교학이란 기독교학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고 기독교를 인문적 내용으로 표백시킨 것이라 고 단정했다. 당시 서울대학 문리대에서는 유승국(柳承國) 교수가 유교 개론이나 주역(周易) 강의를 했고, 이기영(李箕永) 교수는 불 교 개론을 강의했다.

이 시기 이기영 교수와의 만남은 나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당시 서울대 문리대 개설 강좌 가운데에 가장 인기 있는 강의는 세 가지였다. 한태연 교수의 법학통론, 박종홍 교수의 철학 개론 그리 고 이기영 교수의 불교 개론이었다. 나는 이기영 교수의 강의를 통 해 불교란 서구 동양학의 뛰어난 소재이고 근대적 동서 문명론의 뚜렷한 주제임을 실감했다. 나는 비로소 왜 종교학을 나의 전공으 로 선택했는지 미처 몰랐던 내 학문의 근거를 찾은 셈이었다. 그리 고 이 현상은 자연히 이기영이라는 인물과 직결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신학에 대한 실망, 그리고 기독교의 폐쇄성에 대한 반감 속에 서, 동양적 전통이 지닌 가능성과 그것이 서구적 지식체계와도 연 결됨을 알고 전율했다. 나는 이기영 교수의 모든 강좌를 수강하였 고 다른 대학들까지 쫓아다니며 그의 강좌들을 청강했다.

나는 불교를 미르체아 엘리아데(1907~1986)와 연관시켜 이해하 였다. 그의 인문적 해석으로 이끈 종교학적 오리엔테이션에 매료 되었다. 이기영 교수는 불교 강의 사이사이에 엘리아데의 이야기 를 삽입했다. 《영겁회귀(永劫回歸)의 신화》나 《성(聖)과 속(俗)》 또 는 《이미지와 상징》을 통해 전통적인 교리들이 어떻게 교조적인 종 교의 고식적 틀을 벗어나 인문적 이해로 탈바꿈하는지 강의하였다. 나는 불교에 대한 엘리아데의 인문학적 해석에 빠져들었다. 엉뚱하

게 엘리아데적 종교 해석을 불교를 이해하는 단초로 삼은 셈이다. 이렇게 종교학에서 결정적 영향력을 끼친 엘리아데를 이기영 교수 는 불교 이해의 도구로 삼은 것이다. 연세대 신학부 교수는 신학을 확대하기 위해 엘리아데를 활용했겠지만, 이기영 교수는 불교를 확 대하기 위해 엘리아데를 활용한 셈이었다. 나는 아직도 불교 연구 에서 이런 엘리아데적 해석은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만난 사람들과 헤어진 사람들(愛別離苦)

나는 한문 불전에 친숙해지려고 노력했다. 이기영 교수의 불전 강독을 통해 원효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며 그의 박사학 위 논문인 〈참회(懺悔)에 관한 연구〉(최근에 그의 불어로 된 학위 논문을 완역했다)를 통해 한문 구절을 독해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종교학에서 불교학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기독교에 식 상했으니 종교를 바꿔 불교로 전향한다는 ‘개종’이란 도식은 아니었다. 그리고 대개는 개별 종교 연구에서 종교학으로 옮겨가는 것이 상례인데, 거꾸로 종교학에서 불교학으로 접근한 꼴이 됐다.

나는 서울대학교 대학원으로 진학하지 않고 곧바로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의 인도 사상 전공으로 학교와 전공을 바꾸었다. 고등학 교에서 대학 전공을 엉뚱하게 선택하며 주변을 놀라게 했듯이, 또 한 번 주변을 놀라게 했다. 당연히 지도교수는 이기영 교수였다. 나 는 그의 밑에서 불교 고전어를 익히기 시작했다. 산스끄리뜨어, 빨 리어, 티베트어를 하나씩 연마했다. 그는 고전어를 숙지해야 하며 적어도 한문 경전과의 대조적 판독은 꼭 필요하다는 주장을 강조하 곤 했다.

동국대 대학원에서 나는 서경수(徐景洙, 1925~1986) 교수를 만 났다. 긴 수염에 짧은 키, 거의 도사풍의 풍모를 지닌 서 교수는, 불 교를 공부하러 동국대학교까지 온 나를 색다르게 환영해 주었다. 이분은 기독교와 불교를 넘나들며 내가 겪은 기독교 혐오증을 미리 겪고 기독교는 물론 불교까지 포함해서 모든 종교 전통을 거침없이 비판하는 선배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부친은 기독교 목사였는데, 그는 모든 기존의 ‘틀’을 조소하며 비틀어 해학적으로 말했다. 이후 서경수 교수에게서 전수한 불교적 사고와 행위는 평생 나를 긴장하 게 만들었고, 일면 선가적(禪家的) 언행이란 일상에서 표출되는 것 임을 터득하게 되었다. 이런 인연으로 나는 뒷날 그의 평전을 쓰기 도 했다.

동시에 나는 뉴욕주립대학교 스토니브룩 캠퍼스의 교수가 된 박 성배 선배도 동국대 캠퍼스에서 만났다. 이분을 통해 불교적 신행 이 어떤 것인지를 깊은 관심과 의아심을 지니고 바라보게 되었다. 그는 돈오(頓悟)와 점수(漸修)의 논리적 구조와 수행에 천착하고 있었으며, 성철 스님의 삼천 배 신행의 의미를 대학생 불교학생회를 중심으로 펼치고 있었다. 결국 이 돈오점수의 이슈는 한국불교 의 핵심으로 떠올랐으며, 박 교수는 이를 평생 불교학의 주제로 삼 아 미국 학계에도 적극적으로 소개하였다. 그의 책 《깨침과 깨달음 (Buddhist Faith and Sudden Enlightenment)》(SUNY Press, 1983) 은 그의 평생 학문의 결실이라 할 만큼 특징적인 저서였다.

내가 불교에서 영향을 받은 이 세 분, 이기영·서경수·박성배는 한결같이 불교학자이면서도 기독교를 배경으로 삼고 있었다. 따라 서 기독교와 불교를 넘나드는 혼성적인 자세를 취하기 쉬운 일인 데, 그들은 철저하게 불교적인 입장에서 기독교를 수용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완전히 기독교적 틀을 벗어날 수 없었고 오히려 그 틀을 활용하여 불교적 개념을 풀이하고 해석해 갔다. 따라서 기독 교를 배척하거나 비교론적인 객관성만을 표방하는 것은 아니었다. 박성배 교수의 치열한 불교적 신행이나 이기영 교수, 서경수 교수 의 불교적 합리성 추구를 바라볼 때, 나는 종교 간의 갈등이나 논리 적 상충보다는 오히려 종교 간의 넘나듦을 체감했다.

유일한 기독교적인 감화는 안병무 교수를 통해서였다. 대학원에 서 유일하게 수강했던 신학 강의인 안병무 교수의 ‘불트만 강독’을 들으며 비로소 신학의 개방성에 대해서 배운 것이다. 동양 전통, 곧 유교, 불교의 ‘말씀’과 그리스도교의 ‘말씀’이 달라야 할 이유가 없다 고 안병무 교수는 주장했다. 나는 이 ‘말씀’의 다양한 표출과 다의적 의미는 계속 천착될 수밖에 없고 그것이 불교학과 종교학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삼천 배의 수업료

한편 스님들을 친견할 기회가 많았고 이분들의 소박함과 진솔함 에 대해 감명받았다. 그것이 오히려 나를 움직였다. 나는 이분들에게 뒤따르는 신화적 행적은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 더욱 남들이 말 하는 기행과 전설이 뒤따르는 ‘큰스님’들의 행위는 관건이 아닐 수 없었다. 성철 스님을 찾아 수업료로 삼천 배를 지불해야 했다. 아직 도 잊지 못한다. 새로 신고 간 양말이 ‘빵꾸’가 났으니 말이다. 나는 대학생불교연합회 자칭 회원이기도 했다. 정규회합에 거의 참석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위 삼천 배 선두 그룹의 전창열, 김규칠, 이용 부 법우들은 아직도 잊지 못하는 나의 불교 수행 도반들이었다. 성 철 스님과의 인연과 동시에 일타 스님을 만나 전혀 다른 불법 체현 을 경험했다. 불교의 자비행과 질박함의 순수함을 맛보았다. 이 스 님이 써주신 “관수난야(觀水蘭若, 물을 바라보는 수행처)”란 당호 (堂號)는 나의 주 거처인 뉴햄프셔의 시골집에 아직도 걸려 있다.

불교의 고도의 이론적인 실천행이 이분의 질박함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체감했다. 그리고 평범한 일상을 통해 남을 접하는 일 이 불법의 실천이지, 유별난 행위나 이론의 과시가 아님을 배웠다. 결국 여러 종교인과의 만남 가운데 마지막 상봉에 스님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얻을 수 없다는 고통(求不得苦)

불교학을 시작하던 그 당시 나는 불교의 모든 표준과 가치는 책 (경전)에 있고 책을 떠난 현장의 불교는 무엇인가 ‘잘못된 것, 어긋 난 것, 타락된 것’으로 생각했다. 현장에서 우리 불교를 접할 때마 다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고 변형되었는가’만을 찾았고, 경전에 서 술된 것과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여겨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 대표적인 것이 우리 사찰 경내에 빠지지 않고 자리 잡은 삼성각(三 聖閣)의 철폐 운동이다. 텍스트의 원형 불교에서는 일탈된 것이라 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니 소위 책 중심으로 불교를 이해한 결정적 결함이었다. 먼 훗날 G. 쇼펜의 글을 읽고 그런 태도는 서구의 문헌 중심, 기독교적 접근을 빼닮은 편견의 소산이었다는 점을 자 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대학원에 들어간 나는 불어나 영어로 된 불교 관계 서적 들을 읽을 수 있었고, 이기영 교수는 자신의 개인 서가를 무제한 개 방해 주었다. 제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불어를 읽을 수 있는 제자였 기 때문일까? 그때 불어로 된 《불교의 현재》(1959)와 《인도 고전》 (1953)을 사전을 찾아가며 부분부분 뜯어 읽었다. 불교를 인도 사 상 전체에서 조망하는 서구적 방법은 사상사, 종교사의 객관적 흐 름 속에서 불교를 파악하게끔 했다. 결국 이 두 책은 아직도 돌려주 지 못했고 지금도 내 서가에 꽂혀 있다. 낡은 헌책 표지와 그의 유 학 시절의 메모와 밑줄 친 흔적으로 보아 아마도 이 책들이 이기영 교수가 역사학에서 불교학으로 넘어가는 교과서 역할과 불교 입문 서 역할을 했던 듯하다.

지도교수인 이기영은 자신의 스승인 라모트의 신간 《유마(維摩) 의 교설》(1962)의 첫 해설 부분을 번역하는 과제를 나에게 주었다. 그것은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학술지 《불교학보》에 실렸다. 그러나 번역자의 이름은 이기영으로 나왔다. 대학원생의 글은 학술지에 실 을 수 없는 규정 때문이었다. 이 번역을 통해 소위 서구의 불교학 연구가 어느 단계에 이르렀으며 무엇을 시도하는지를 뼈저리게 느 꼈다. 심지어 번역된 한문 경전 구절을 이미 일실된 원전을 추적하 여 산스끄리뜨어, 빨리어 혹은 티베트어로의 복원을 시도하고 있 었다. 그러나 나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이 못 되 었고 기껏 《번역명의대집(翻譯名義大集)》에서 해당 어구를 찾으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이 저술은 일종의 불교 전문 어휘 사전으로 후 대에 일본에서 편찬된 것이지만, 최초로 불전 어휘를 티베트, 산스끄리뜨어에서 수집 취록한 것은 헝가리의 학자였다.

이 시대 최고의 불교 역사서인 에티엔느 라모뜨의 《인도불교사 개론》(1976)이 이 시기에 출간되었다(호진 스님이 얼마 전 우리말 로 완역을 하였다). 실로 역사적인 작업으로 평가될 만한 서구 불교 학의 총체적인 개론서이다. 이 책은 영미권 학계에서는 불어본을 영어본으로 번역하기 위한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몇 년에 걸친 작업 끝에 영어본이 출간되었다. 그만큼 중요한 책이다. 이기영 교수는 서양 불교학 연구의 결실과 그 성과를 한국 학계에 알리고 싶었던 것 같다. 나에게 라모뜨의 저술을 번역하게 한 의도도 그 일환이었 음이 틀림없었다. 결국 이런 연구 문헌을 번역하고 나서야 그런 생 각을 할 수 있었으며 그때의 흥분은 아직도 가시지 않는다. 내가 라 모뜨의 연구논문 몇 편을 번역할 기회를 가졌다는 것은 분명 젊은 시절 나의 행운이었다.

이때 이기영 교수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따내어 동아시아 전통에 관한 것을 수립하려 했다. 대정신수대장경의 목록과 우리 고려대장 경에 수록된 경전을 대조하는 작업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서사 (書寫) 공덕과 경전 숭배라는 신앙에 머물렀던 고려대장경을 학문 적으로 활용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나는 목록 하나하나를 대조하며 우리 고려대장경을 K(Koryo, 고려)로 표시하고 경전에 일련번호 를 부여하여 그것을 대정신수대장경의 목록에 삽입 기록했다. 결국 이 작업은 후에 버클리대학의 루이스 랭카스터 교수와 박성배 교수 의 합작(박 교수의 학위논문의 부작업이기도 했다)인 《통합 고려/ 신수대장경 목록》으로 출판되었다. 《한국불교경전 목록》은 그렇게 국제 학술자료로 진화되었다. 랭카스터 교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한문 대장경뿐 아니라, 빨리어로 된 남전대장경(南傳大藏經), 산스끄리뜨어 경전까지 망라된 종합 대장경 편찬 사업에 몰입해, 그것들을 전산화하여 동서를 막론하고 누구나 쉽게 대장경을 접할 수 있게 했다.

이 사이에 이기영과 랭카스터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 었다 랭카스터 교수는 이기영 10주기 학술대회(2006)에서 〈이기영 의 학문과 인간〉을 말하는 동안 몇 번이나 말을 끊고 눈물을 지었 다. 이기영이 벨기에에서 귀국한 후 최초의 제자였던 나는 사회와 통역을 담당하였기 때문에, 랭카스터 교수 옆에 앉아 이기영 교수 에 대한 그의 진실한 우정을 절감할 수 있었다.

학문에서의 일탈

1976년 강사 생활 10년째에 나에게 모처럼 신분 상승의 기회가 생겼다.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은 오랫동안 적체되었던 젊은 강사들 을 대거 전임교수로 임명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민족중흥이라는 표제 아래 우리 문화를 재흥하는 시책을 폈고, 이에 걸맞게 이선근 총장이 부임한 동국대에서도 젊은 층을 포용하며 불교학 중흥에 힘썼다. 약 10명의 강사가 대거 전임교수로 발탁 임명되었다. 나에게 도 결정적 순간이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나만 탈락하였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겨우 나에게 돌아온 것은 동국대 개교 70주년 기념 불교국제학술회의를 조직하는 간사장의 소임이었다. 적지 않은 준 비비와 외국 학자를 초청하는 권한(?)이 나에게 주어졌다. 12개국 에서 200명의 학자를 초청해 놓았다. 그러나 나는 말 그대로 지쳐 있었다. 집사람은 아이 셋을 돌보느라 자신의 희망을 접고 중고등 학교 양호교사로 전업하였다. 온통 생활을 도맡았던 집사람은 해외 이민 수속을 밟기 시작했다. “그 학문이란 직업을 버리고 떠나 살 자.”는 것이었다. 나는 떠나기로 작정했다. 이 떠남은 단순히 미주 로 옮겨 가는 일이 아니라 이제까지의 삶의 방식과 생활을 떠나는 일이었다.

6·25로 파괴된 이산가족사의 은폐와 사회로부터의 기피, 그리고 불교라는 학문의 세계로 감추기와 또 다른 승화된 세계로의 꿈을 접어야만 했다. 아직도 나를 캐나다에서 공부한 것으로 아는 동학 들이 적지 않다. 정작 내가 간 곳은 미국 남부 조지아주의 애틀랜타 였다. 내 이민 가방에는 책이라고는 한 권도 들어 있지 않았고 금생 에 다시는 공부를 못하리라 예감했다. 종교학으로 시작된 나의 불 교학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마감된 것이었다. 그때가 1976년 8월 이었고 내 나이 36세의 늦은 여름이었다. 학문을 통한 불교로의 진 입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불교학은 이렇게 끝났지만 나는 내 선택 에 의한 불자인 것만을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어느 서양 불교학자 의 책 제목처럼 “부처님이 없는 땅” 미주로 유배된 것뿐이었다.

다른삶살기

학문에서 일탈된 나는 비교적 안정된 이민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속된 말로 “이민을 잘 왔고, 잘살게 되어 축복된 삶”이었다. 그러나 잘 먹고 잘사는 일은 생존의 현상,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돼 지의 삶일 뿐이다. 무엇보다 주변에 절도 없었고 스님도 안 계셨다. 초기에 나를 도와준 교회 목사님들과의 종교 담론을 펼치며 내가 ‘기독교인이 아님’을 확인할 뿐이었다. 이웃을 따라 가끔 이런저런 교회 행사에 참여하며 다른 이민자들과 어울렸다. 이제 나는 이민 자로서 한국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생각했다. 그리고 이미 내 의식에 정신적 뿌리를 내린 불교를 일상에서 어떻게 체현해야 하는 지를 화두처럼 곱씹었다. 이즈음 나는 우연히 나이폴을 발견했다. 나이폴은 인도에 뿌리를 둔 트리니다드 출신의 영국 작가였다. 그 의 작품으로 카리브해 자그마한 섬의 이민자들로 구성된 작은 사회 에서 생긴 에피소드를 소설화한 《모사인(模寫人)》이 있다. 그 모습 들이 나의 이민 생활의 단면을 여실히 재현시켜 주었다. 자신의 생 활을 객관화하는 일은 쉽지 않다. 과장하거나 허구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민자의 삶을 희화화하며 거울 속의 자화상처럼 분해하고 있었다.

미주 한인 이민자들은 한결같이 개신교 신자가 된다. 아니 이민 초기 일정 기간은 교회를 다녀야 한다. 그래야 실생활에 필요한 정 보나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를 바꾸는 일은 전혀 심각 하지 않다. 이런 경험을 겪는 나에게 나이폴의 작품은 나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 읽혔다. 미주의 한인사회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민자들의 하이테크 비즈니스는 세탁업이고 가장 번창하는 사업은 한국식당과 식료품상, 잡화상이며, 이 모든 한인 업종을 합쳐 놓은 수와 맞먹는 수의 교회 비즈니스가 제일의 사업이다.

이민 3세대인 나이폴은 자신의 고국 인도를 성찰하며 애정과 경 탄을 지니고 자신의 조국을 써 내려갔다. 그러나 그의 시각에 비친 인도의 모습은 그를 혼란에 빠뜨렸다. 제삼세계인 인도의 혼란은 모순덩어리였다. 가난과 질병, 민주주의와 행정 체제의 혼란, 식민 주의와 자본주의 혼성 등을 보고 느낀 대로 가감 없이 까발렸다. 그 의 이 기행문은 인도 정부에 의해 판금까지 당했다. 정부 비판과 감 추지 않고 드러낸 인도의 모습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종의 문명 비 교론에 가까운 글들이었다. 나는 그의 관찰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 었다. 이런 제삼세계에 대한 세밀하고 구체적인 서술을 통해 그는 노벨문학상까지 탄 것이 아닌가?

나는 비로소 한국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에 문제가 있음을 느꼈 다. 나는 무엇을 보고 있으며 무엇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 소위 오온(五蘊)을 통한 나의 인식 내용은 무엇이었던가? 나는 ‘다른 것 은 틀린 것이 아니다’라는 시각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나이폴도 부 지런히 이런 차이를 부각하고 있었다. 그는 현장을 관찰하고 사건 과 사실의 추이를 끈질기게 추적했다. 결국 그런 현상, 그런 사실에 대한 통찰로 현실의 모순을 드러나게 했다. 결국 자신의 뿌리인 인 도의 미래를 위한 냉정한 기록을 남긴 것이 그의 저술들이었다. 그 에게 공감하며 이때부터 나는 미주 한인 신문에 칼럼을 쓰기 시작 했다.

떠나온 내 조국 한국은 얼마나 달랐으며 이곳에 이주한 미주 한 인들의 행태는 무엇이었던가? 무엇보다 나는 기독교 천국인 한인 사회에서 불자인 것이 곤혹스러웠다. 그래서 오히려 서양 불자 혹 은 불교학자들과 가깝게 지냈다. 그들의 불교 신행 행태는 새롭게 비쳤고 한국 불자/학자들에게도 참고할 만한 불자상(佛子像)이 될 것 같아 ‘재가 불자’의 입장에서 불교적 논평을 썼다. 불교를 달리 접근하고 싶어 소개한 글들이었다. 귀국 후에 동국대 불교학술대회 에서 〈서구 불교 신행의 양태와 서구적 불교의 탄생〉이란 글을 발 표했다. 서양에서 새로운 형태의 불교가 출현하는 것을 관찰한 기 록인 셈이다.

하나의 전업

애틀랜타에서 10년을 지낸 후 나는 이민자로서 자신의 정체성과 나의 종교적 오리엔테이션을 재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불교 전문 서적을 들지 않겠다는 초지(初志)는 꺾였다. 집사람에게 1년간 허 락을 얻어 본격적으로 동양학 강의를 청강하기로 했다. 1년간만 강 의를 들으면 내 영어 실력도 키워질 테고 서구의 동양학 귀추도 얼 마간 알 수 있을 터이니 평생 이와 관계된 독서를 즐기며 사업을 할 것이라 예상했다. 다시 미국의 학위를 취득하여 학계로 복귀하겠다 는 의도는 거의 없었다. 한국에서 학계에 적을 둔다는, 소위 전임교 수가 된다는 일이 얼마나 처참한 과정인지를 일찍이 체험하고 미주 로 이민을 떠나야 했던 나였다. 그 일을 금생에 다시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서구에서의 불교학 연구가 어떻게 전개되 고 있는지에 더 관심이 있었다. 불교의 학문으로서 위상과 그 미래 적 가능성은 흥미로웠다.

나는 하버드 대학의 동아시아 언어문화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하 였다. 이때 와그너 교수를 만났다. 그는 이미 40대 후반인 나를 미 소 지으며 받아주었고, 이후 ‘늙은 학생’으로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선발위원의 한 사람인 와그너 교수에게 내 속의 심정을 토로한 것 이 적중했는지 그는 나를 뽑아 주었다. 결과적으로 그때 말한 계획 대로 내 재수(再修)의 학문적 진로는 의도대로 진행된 셈이다.

나는 남들처럼 유학을 오거나 연구원 혹은 방문교수로 미주로 옮 겨와 대학 캠퍼스에 머문 것이 아니었다. 나는 다시 가족을 위해 생 업에 매달려야 했다. 그리고 생업의 틀을 짜야 했다. 생활을 안정시 켜야 하고 동시에 박사과정의 이수 과목을 충족시켜야 하는 나로서 는 이중의 고행이었다. 당시 나의 지도교수였던 한 분은 새 학기가 되면 웃으며 나에게 농담을 건넸다. “지난 학기 자네의 사업은 어땠 지?(How was your business last semester?)” 나의 사업을 박사과 정 공부와 절묘하게 섞은 표현이었다. 내 두꺼운 가방의 앞칸은 책 과 논문들의 페이퍼가 들어 있었고 뒷부분에는 항상 물품 청구서와 상품 카탈로그가 들어 있었다. 일주일 중 3, 4일은 5시에 사업을 마 치고 다시 6시에 도서관으로 출근했다. 다행히 도서관은 새벽 2시 까지 여는 곳이 있었다.

환귀본처(還歸本處)

박사학위나 직책을 얻기 위한 쫓기는 공부가 아니었기에 나는 오 히려 자유스러웠다. 동국대와 강남대에서 교수를 역임한 황필호 선 배와는 평생을 무척 가깝게 지냈다. 자신이 사업과 학문의 두 세계를 오락가락한 경력을 지니고 있어 누구보다 내 처지를 잘 이해하 였다. 미국에서 사업을 정리하고 은퇴를 결심한 즈음 황필호 교수 는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해 자필로 쓴 편지(!)를 두 번이 나 보내 귀국할 것을 강력히 권유했다. 어쨌든 황필호 선배의 강력 한 권유에 이끌려 아무 예정 없이 귀국하였다. 이후 나는 황필호 교 수의 가이드를 따라 종교학회에서 발표도 하고 몇몇 대학에서 강 의를 했다. 귀국 후 처음으로 〈불교학 연구의 문화 배경에 대한 성 찰-구미 불교학 연구 동향〉이란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한국종교 학회 2000년 춘계학술대회의 주제이기도 했다. 내가 이민한 후 다 시 터득한 서구 불교학을 소화한 내용을 그대로 기술했다. 일종의 미주 불교학 유학기인 셈이었다.

이렇게 사업에서 은퇴하면서 다시 학계로 복귀한 나는 미친놈 널 뛰기의 또 다른 진자(振子) 운동의 한쪽으로 옮겨 앉게 된 것이다. 이후 동국대와 영남대의 초빙/방문 교수로, 또는 한국불교연구원과 한국종교문화연구소의 연구원·원장·이사·이사장직을 수행했 다. 흔히 말하듯 나이와 경력을 따라 자리를 바꾸어 간 늙은 학자들 의 그런 소행들은 아니라고 변명한다. 그간 비웠던 내 나름의 위치, 또는 주변과의 얽힘에서 응당 봉헌했어야 할 학문 활동을 그렇게 ‘추구’했을 뿐이다.

언제인가 내 삶의 우여곡절을 말하며 내 이웃인 외국인 교수에게 이렇게 농담했다. “나는 금강경을 읽고 연구하는 일을 전공으로 택 했지만 금강석 다루는 일로 내 전공을 끝마쳤다(I am supposed to study the Diamond Sutra as my profession but I ended up to deal with the Diamond business).”고. 이 농담이 결국 내 이중적 삶의 단면을 적중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이 글의 시작을 업(業)의 소산 이라고 단순화시킬 수밖에 없다. 나의 다중적 삶의 얽힘을 무어라 세세히 설명할 수 있겠으며 어떤 자기 합리화를 시도하겠는가?

아직도 나는 내가 어느 지점까지 불교학을 추구했고 어느 지점에 서 신행을 추구했는지 되물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 요즘 유행어로 떠오른 말대로 계속 실패를 거듭하지만 끊임없이 시도하 는 ‘추구자(Seeker)’였고, ‘어쩌다 보니 불자(Accidental Buddhist)’ 가 되어 있는 자신을 자각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이래도 나는 불자인가”를 되묻고 싶은 것이다. ■

 

이민용 minyonglee@gmail.com
동국대, 하버드대 박사과정 수료(인도불교 사상, 동아시아지성사 전공). 영남대 교수, 한국불교연구원장,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장 등 역임. 주요 논저로 《학 문의 이종교배-왜 불교신학인가?》 《서구불교학의 창안과 오리엔탈리즘》 《미 국의 일본 불교 수용의 굴절-헨리 올콧트, 폴 카루스, 釋宗演, D.T 스즈키의 경 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