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하는 불교평론의 다짐 / 홍사성

2025-05-19     홍사성

‘한국불교 지성을 대표하는 계간지’를 기치로 1999년 창간한 불교평론이 지난 겨울호로 지령100호를 돌파했다. 계간 잡지가 지령 100호를 발행하자면 4반세기를 넘어야 가능하다. 우리나라에 많은 잡지가 있지만 25년을 속간해 온 잡지는 흔하지 않다는 점에서 이는 자랑할 만한 기록이다. 

불교평론은 그동안 ‘불교사상을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현대사회의 문제를 불교적으로 비평한다’는 편집 방침에 따라 매호 새로운 특집을 기획하고 의견을 피력해 왔다. 특집 주제가 정해지면 보통 5~7가지 소주제의 글이 실린다. 어림잡아 600여 편 이상의 논문으로 100회의 지상 세미나를 개최했다는 의미다. 특집으로 다룬 주제를 살펴보면 기복불교 문제, 대승경전 찬술 문제 등 교리와 관련된 것을 비롯해 인공지능, 서양철학과의 관계, 도교와 유교 등과의 교섭, 과학과 불교, 여성과 젠더 문제 등 실로 광범하다. 물론 이러한 특집들이 모두 만족할 만한 성과가 있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고백하자면 어떤 것은 주제만 거창했지 내용이 부실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런 기획들이 평가받는 것은 최소한 우리가 무엇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의제를 설정했다는 것이다. 많은 연구자가 새로운 주제에 도전할 때는 불교평론의 기사를 참고하고 인용한다는 사실은 이를 반증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2009년 1월부터 시작한 불교계 최초의 토론마당 열린논단, 창간 10주년을 기념해 매년 가을에 개최를 해온 대형 학술심포지엄도 기억할 만한 사업이었다. 열린논단은 매월 1회씩 불교평론 필자와 독자가 직접 만나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한 발제를 듣고 토론하는 자리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3년을 빼고 개최해 왔는데 지난 2월까지 127회를 열었다. 이 모임은 불교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공론의 장으로 유명하다. 매년 가을 열리는 심포지엄은 기후환경 문제, 사회적 갈등 해소 문제 등을 주제로 선정해 전문가들의 발표와 토론을 해왔다. 지난해까지 15회를 계속해 온 이 행사는 온라인 중계와 동시에 잡지 지면에 반영되고 있어서 다른 학술세미나와는 크게 차별된다.

2019년, 창간 20년을 맞아 개편한 지면 혁신은 새로운 시도였다. 잡지가 지나치게 고답적이고 전문적이라는 지적을 받아들여 편집 방향을 대중 지향적으로 개편한 것이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불교 소재의 단편소설 청탁과 일반 시집에 불교적 주제의 시를 골라 게재한 것이다. 특히 단편소설의 탑재는 불교문학의 활성화라는 측면에서 획기적인 것이었다. 지성적 독자를 위한 세계의 불교학자, 불교로 읽는 고전 등도 호평을 받았다. 가장 열독률이 높은 ‘나의 삶 나의 불교’도 이때 시작한 기획이다. 이런 일련의 변화는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의 중간을 지향한다는 목표에 집중한 결과다.     

그러나 100호를 넘어 새로운 200호를 향하는 이 시점에서 과거의 성과를 들먹이고 계량화된 수치로 자기도취에 빠지는 것은 겸손한 태도가 아니다. 그보다는 지난 25년 동안 미진했던 것은 무엇인지 반성하고 어떻게 해야 더 큰 성과를 낼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많은 과제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불교의 정체성 회복을 위한 목표에 얼마나 진지하게 복무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불교는 2천6백 년의 역사 동안 광범한 지역에 전파되면서 수많은 변화를 겪은 종교다. 이 과정에서 때로는 사상적 진보와 발전을 이룩했고 때로는 왜곡과 변질을 면치 못했다. 이는 불교가 역사와 사회현상에 조응할 때 감당해야 할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예를 들어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 그 가르침을 확인하기 위해 교단은 경전을 결집해 정법의 전승을 도모했다. 그렇지만 인간 기억의 한계, 같은 말을 두고 자의적인 해석에 따른 시비 등은 늘 과제로 남았다. 그때마다 불교 교단이 취해온 것은 경전결집을 통한 정법의 기준을 세우는 것이었다. 더 뒷날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결사(結社)를 통해 정법으로 회귀를 지향했다. 그러나 근래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노력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그 결과 현실은 매우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다. 냉소적으로 말하면 어떤 사찰에 걸려 있는 ㅇㅇ사라는 현판을 ㅇㅇ교회로 바꾼다 한들 그 안에서 행해지는 종교 활동에 과연 차이가 있을지 의문이다.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것은 이슬람의 공격에 의한 승원의 파괴와 승려의 살상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불교 자체가 힌두교에 동화되어 스스로 소멸의 길을 걸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힌두교적 불교든 도교나 기독교적 불교든 간판만 불교를 걸어놓으면 된다는 무책임의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지금도 그 길을 가고 있다. 요즘도 어떤 사찰에서는 정초가 되면 신수 풀이와 부적 소지를 부추기고, 기도발이니 영험이니 하는 천박한 방편주의에 영합한 설법이 판을 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종단의 고승이나 불교학자 누구도 이에 대해 제동을 걸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러다가는 인도불교처럼 형해화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보다 냉정하고 엄격한 반성과 비판이 필요한 시점이다.

둘째는 오늘의 불교는 스스로 자기 정체성 확립을 위해 얼마나 진지한 토론과 논쟁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불교학을 소박하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공부’라고 정의한다면 오늘의 불교학은 그 본연의 역할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불교는 워낙 교학적 스펙트럼이 넓어서 웬만한 것은 불교학의 범주 안에서 논의가 가능한 종교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 논의는 어디까지나 정법과 비법을 결택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삼십칠조도품의 칠각지(七覺支)는 택법각지(擇法覺支)를 매우 중요한 항목으로 내세운다. 이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불교의 가르침은 다른 종교와 비슷하거나 같은 면도 있지만 판이하게 다른 면도 있다. 예를 들어 살생과 도둑질 사음과 거짓말 같은 계율은 다른 종교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와는 달리 기복주의나 주술주의, 제사주의에 대해서는 엄격한 비판과 함께 극복의 대상으로 간주한다. 요즘 우리는 이런 측면을 도외하고 신(神) 중심의 재래종교가 구축해 온 ‘종교적 기준’에 맞추려고 한다. 불교학이 아니라 불교신학(佛敎神學)에 빠지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십만 팔천 리 멀어진 이상한 불교가 횡행하는 이유다. 불교학의 임무는 이런 문제의 시비를 가려 정오(正誤)를 결택하는 것이다. 결코 현실을 방관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오늘 우리는 재창간의 첫발을 내디디며 부처님이 앙굿따라 니까야 《깔라마 경》(3.65)과 《밧디야 경》(4.193)에서 했던 다음의 말씀을 상기하고자 한다.

“깔라마인들이여, 소문으로 들었다 해서, 대대로 전승되어 온다고 해서, ‘그렇게 하더라’고 해서, 성전에 써 있다고 해서, 논리적이라고 해서, 추론에 의해서, 이유가 적절하다고 해서, 우리가 사색해 얻은 견해와 일치한다고 해서, 유력한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해서, 혹은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대로 따르지 말라. 스스로 탐친지는 해로운 것이고, 비난받아 마땅하고, 지자(知者)들의 비난을 받을 것이고, 이러한 법들을 받들어 행하면 손해와 괴로움이 있게 된다고 알게 되면 그때 그것들을 버리도록 하라.”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은 어떤 전통이나 권위에도 가위눌리지 말고 오직 지혜롭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라는 경문(經文)이다. 그래야 삼독과 무명으로부터 해탈의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귀가 얇고 어리석은 범부로서는 넘기 어려운 높은 산이요 건너기 힘든 넓은 강이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지 않고는 불교의 미래는 없다. 

이즈음 우리는 《본생경》 322번째 우화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타라 열매가 떨어진 소리를 듣고 지구가 무너졌다고 착각해 우왕좌왕하는 짐승들 이야기다. 이를 진정시킨 것은 지혜와 용기를 가진 사자였다. 이 우화에 불교평론의 길이 있다. 우리는 어렵더라도 사자의 역할을 하고자 한다. 많은 분들의 동참과 격려를 바란다.

 

2025년 3월

홍사성(본지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