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불교학자 38. 냐나띨로까(Nyanatiloka, 1878~1957) / 김재성
유럽의 테라와다불교 개척자
1. 들어가는 말
필자는 2024년 3월10일 《냐나띨로까 스님의 생애》를 번역 출판했다. 2002년에는 냐나띨로까 스님이 1906년 독일어로, 1907년 영어로 저술한 《붓다의 말씀》을 고요한소리 출판사에서 번역 출판한 바가 있다. 이 책은 대학교를 다니던 1980년대 중반부터 조금씩 번역을 했었다. 초기불교에 관한 책이 거의 없었던 당시에 초기불교의 핵심 가르침인 사성제를 빨리 니까야를 중심으로 선별하고, 번역 및 해설을 추가한 책자를 만나 기쁘게 공부하던 때였다.
먼저 냐나띨로까(1878~1957) 스님의 생애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878년 2월 10일, 독일 비스바덴에서 태어났으며, 전문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다가, 25세가 되던 1903년 스리랑카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바로 미얀마로 가서 출가 승려가 된 후 스리랑카에 정착하였고, 1957년 5월 28일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스리랑카 국민으로 입적하였다. 냐나띨로까 스님을 한 줄로 소개하면, ‘20세기 유럽을 대표하는 테라와다불교의 개척자이자 승려학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냐나띨로까 스님은 20세기 서양에서 불교를 연구하고 실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그의 삶과 업적은 불교가 서구 사회에 뿌리내리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의 번역 작업, 저서, 그리고 교육 활동은 불교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많은 제자를 양성했으며, 그의 유산은 오늘날에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의 제자들과 그가 설립한 사원인 섬 암자와 숲 암자는 그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불교를 전파하고 연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번에 번역한 《냐나띨로까 스님의 생애》(이하 ‘생애’)를 기본 자료로 하여 스님의 삶과 업적, 그 유산을 소개하고자 한다.
독일의 불교 수용의 초기 상황을 살펴보자면, 불교가 처음으로 서구에 알려진 것은 19세기 중반이었다. 독일에서도 불교에 대한 관심이 점차 생겨났고, 철학자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는 불교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불교와 힌두교 철학을 언급하며 서구에 불교 사상을 소개했다. 또한 19세기말, 미국에서 설립되어 활발하게 활동했던 신지학회는 불교의 서구 전파에 큰 역할을 하였다.
2. 출생과 성장 그리고 불교 활동
냐나띨로까 장로는 1878년 독일 비스바덴에서 안톤 귀트(Anton Gueth)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그가 음악가가 되기를 바랐고, 그는 젊은 시절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음악보다 철학과 종교에 더 큰 흥미를 느꼈고, 특히 동양철학에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귀트는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면서 동양철학, 특히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불교 경전을 읽으며 불교의 교리와 수행법에 대해 깊이 탐구했다. 이 시기에 그는 불교의 가르침이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칠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불교에 관심이 깊어지면서, 귀트는 자신의 삶을 불교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유럽에서 불교에 대한 충분한 교육을 받을 수 없다고 느꼈고, 직접 동양으로 가서 불교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결심은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1902년, 24세의 나이에 귀트는 독일을 떠나 동양으로 향했다. 1903년에 스리랑카로 갔다가 스코틀랜드 출신이며 1~2년 전에 승려가 된 아난다 멧떼야를 찾아 미얀마로 가서 사미계를 받았고, 4~5개월 후인 1904년 초에 비구계를 받았다.
그의 법명은 ‘냐나띨로까(Nyanatiloka)’로, ‘삼계(三界)의 지혜’라는 의미이다. 출가 후 그는 여러 사원에서 수행하고, 많은 불교 경전을 연구했다. 그의 출가는 독일에서 불교를 연구하고 실천하는 첫 번째 중요한 발걸음이었다. 비구가 된 지 2년 후에 《붓다의 말씀》을 독일어로 먼저 출판했고 이듬해 영어로도 출판했다. 4년 후에는 빨리어를 아주 잘하게 되었다고 한다.(‘생애’ 83쪽). 스님은 정해진 스승 없이 아비담마와 빨리어를 배웠다. 1907년 미얀마의 몰메인 인근의 탑에서 많은 군중에게 빨리어로 사성제에 대한 법문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1904년 말, 인도인 친구인 코삼비 담마난다와 함께 양곤을 떠나 만달레이로 가서 아라한으로 알려진 승려의 지도 아래 테라와다 명상법인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수행하였다. 코삼비는 승복을 벗은 후 하버드대학 교수가 되었고,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빨리 교정본 《청정도론》의 하버드판을 출간하였다. 냐나띨로까는 비구가 된 후 스리랑카로 돌아와 수행과 학문을 이어갔다. 그는 스리랑카의 사원에서 수행하며, 불교 경전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를 통해 서구인들이 불교 경전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왔다. 1907년 앙굿따라 니까야를 독일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냐나띨로까는 1910년 유럽과 튀니지로 돌아가 불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는 강연과 세미나를 통해 많은 사람에게 불교의 가르침을 알렸다. 그의 강연은 독일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불교를 연구하는 학자들과 수행자들이 늘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1900년대 초반, 독일에서는 불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불교협회들이 설립되었는데, 냐나띨로까는 이러한 협회들과 협력하여 불교를 전파하는 데 힘썼다. 그는 불교협회에서 불교 경전을 번역하고, 강연을 통해 불교의 교리를 설명했다.
냐나띨로까는 스리랑카를 주된 활동지로 하여 독일어로 빨리 경전을 번역하여 서구 사람들이 불교의 가르침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그의 번역 작업은 독일에서 불교 연구의 기초를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많은 사람이 불교의 깊은 교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다.
1911년에서 1914년까지 섬 암자(Island Hermitage)를 설립하여 서양인을 중심으로 제자 양성을 하기 시작했다. 1911년, 냐나띨로까는 스리랑카 콜롬보 근처의 폴가스두와에 섬 암자를 설립했다. 이곳은 초기 서양인 불자들이 수행하고 교류하는 중심지가 되었으며, 냐나띨로까는 여기서 많은 서양인 제자를 배출했다. 이들은 냐나띨로까의 가르침을 받아 불교를 연구하고 수행하며, 서구에서 불교를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제자들은 서구 불교의 선구자로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14년, 시킴에서의 짧은 체류 동안 그는 불교 전파와 연구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냐나띨로까는 영국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폴가스두와 섬에 감금되었다. 이후 디야탈라와 수용소로 이송되어 가혹한 환경에서 생활하였다. 이 기간에도 불교 경전 연구를 멈추지 않은 그의 불굴의 노력과 헌신은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1915년에서 1919년에 걸쳐, 냐나띨로까는 호주와 중국을 다니면서 불교를 전파했다. 전쟁 중에는 호주에서 강제수용소에 수감되기도 했지만 불교 연구를 계속했다. 중국에서는 불교 경전 번역과 연구를 통해 많은 불자들과 교류했다. 그의 활동은 서구와 동양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19년, 그는 독일로 돌아가 불교 강연과 세미나를 통해 불교를 소개하고 전파하는 데 집중했다.
1920년대 초반, 냐나띨로까는 일본으로 이동하여 빨리어 강의와 불교 연구를 계속했다. 1921년부터 1926년까지 일본에서 머물며, 불교학자들과 교류하며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의 연구는 일본 불교학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 시절 관동대지진 참사와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의 만행을 직접 목격하였다.
1926년, 그는 다시 스리랑카로 돌아와 섬 암자에서의 생활을 1931년까지 이어 나갔다. 이 시절, 이곳에서 그는 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불교를 전파하는 데 힘썼다. 그의 스리랑카 귀환은 서구 불교의 발전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1932년부터 1939년까지 냐나띨로까는 불교 경전 번역과 연구에 집중했다. 그는 빨리어 경전을 독일어와 영어로 번역하여 서구의 불교 연구자들이 접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그는 불교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설명한 저서를 출간하였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냐나띨로까는 다시 한번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독일 국적을 가진 그는 영국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1946년까지 7년간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그는 인도의 데라 둔 수용소에서 생활하게 되었지만, 이곳에서도 불교 경전 연구와 번역을 멈추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 냐나띨로까는 왓뽀, 냐나뽀니까와 함께 다시 스리랑카로 돌아와 섬 암자에서 활동을 재개했다. 그는 불교 연구와 교육에 헌신하며, 많은 제자에게 불교의 가르침을 전했다. 1949년에 콜롬보의 후원자인 J. K. 페르난도의 도움으로 냐나띨로까는 자신의 저술과 섬 암자에 머물고 있는 다른 승려들의 저술을 출판하기 위해 섬 암자 출판사를 설립했다. 출판된 서적은 그의 《불교사전》과 냐나뽀니까의 《아비담마 연구(Abhidhamma Studies)》였다. 냐나띨로까의 두 번째 법문집인 《해탈에 이르는 길(The Path to Deliverance)》은 1952년에 출판되었다.
1950년 12월에 스님은 제자 냐나뽀니까 스님과 함께 독립된 스리랑카의 시민이 되었다. 1951년에는 노령과 건강 문제로 캔디 불치사 근처에 있는 숲 암자에서 머물며 불교 연구와 번역을 계속했다. 1952년 냐나뽀니까 스님과 미얀마로 가서 빨리 경전 전체를 영어로 번역하려는 우 누 수상의 장대한 계획에 대해 논의했다. 이 계획은 부분적으로 시행되었다. 1954년에는 테라와다 6차 결집에 서양 출신 승려로 참석하였다. 냐나뽀니까 스님이 대독한 스님의 연설문 일부를 보면, 스님이 평생 추구해 왔던 서양에 테라와다불교 전통이 확립되기를 바라는 염원이 분명히 드러난다.
우리는 6차 결집과 같이 불교의 매우 중요한 행사에 참석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우리는 이를 실현하기 위해 쏟은 신앙, 용기 및 희생에 대한 감탄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감사할 이유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준 승가와 정부, 미얀마 연방의 재가 신도에게 감사드립니다. 결집에는 깨달은 분, 붓다의 말씀이 담긴 전통 경전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임무가 있습니다. 우리 전통 문헌의 신뢰성이 그것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확신을 심어주고, 그 문헌이 왜곡, 추가, 오해의 여지를 주지 않도록 하는 것은 참으로 매우 중요한 임무입니다.
그러므로 6차 결집의 이 중요한 임무가 성공적으로 완료되고, 이를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축복을 내려주고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나는 이것이 또한 내가 태어난 나라인 독일 불교도들의 염원일 것이며, 독일과 오스트리아, 스위스에 있는 모든 독일어권 불교도들도 나와 함께 마하 승가에 대한 경의를 표할 것임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마하 승가는 이 행복한 시간에 우리를 가득 채우는 기쁨 속에 여기에 모였습니다.
50년 전 이곳 미얀마에서 계를 받은 최초의 독일인 불교 승려가 된 것은 나의 선업이었습니다. 나는 이 결집이 서양 비구들이 참여하는 최초의 결집이라는 것에 의미와 중요성이 있다고 믿습니다. 이 사실은 세계 사방의 승가인 사방 승가(Catuddisa-Sangha)가 서양에도 확장되어 거기에 굳건히 뿌리내릴 것이라는 희망과 확신을 갖게 합니다. 나는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스리랑카의 불자들이 웨삭 2500년 이전에 독일에 사절단을 파견하고 그곳에 승가를 설립하려는 의도로 ‘스리랑카 전법협회’를 결성했다는 소식을 여러분께 알리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2500년에는 독일 땅에서 최초의 우빠삼빠다(Upasampada, 비구계 득도식)가 열릴 것으로 기대됩니다. 이러한 계획의 실현은 2500년을 향한 우리의 염원인 불법의 확산에 대한 중요한 기여가 될 것입니다. 나의 조국인 독일에서 불법 활동이 이루어지도록 마하 승가에게 축복을 간청합니다.
독일전법협회(German Dharmaduta Society)는 스리랑카 상좌부불교(Sinhalese Theravada)를 독일에 전파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었고, 냐나띨로까는 확고한 독일 전법을 그의 삶의 정점으로 여기며 이 사명을 지지했다.
1956년 봄, 냐나뽀니까는 웨삭 때 열린 6차 결집의 폐회식에 참여하기 위해 냐나띨로까 없이 미얀마로 갔다. 1956년 여름에 돌아온 후, 그는 병약해진 스승을 숲의 암자에서보다 더 잘 돌보기 위해 콜롬보로 모시고 갔다. 7월 22일부터 그들은 콜롬보에 있는 독일전법협회의 새 건물에서 손님으로 왓뽀와 기거했으며, 5명의 승려들과 함께 우안거를 보냈다.
1957년 5월 28일 오후 10시 15분, 냐나띨로까는 고통 없이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14일 동안 그는 몸이 쇠약해졌고 가벼운 열도 나는 상태였다. 전날 그는 폐렴에 걸렸는데, 극도로 약해진 그의 몸은 이를 이겨낼 수 없었다.
화장은 1957년 6월 2일 콜롬보의 독립광장에서 위대한 승려이자 서방의 저명한 담마 옹호자에게 경의를 표하는 스리랑카 공식 국장으로 거행되었다. 많은 군중이 모여들었고, 연사 중에는 스리랑카 세 군데 사원의 승려들이 참여했다. 정기적으로 대중에게 담마 연설을 했던 노련한 연설가 냐나삿따 장로는 큰스님의 제자들을 대표했고, 재가신도 연설자들 중에는 스리랑카의 총리 S.W.D. 반다라나이케와 독일 대사도 있었다. 1957년 6월 9일, 사리는 도단두와의 섬 암자로 옮겨져 냐나띨로까 대장로의 오두막 근처에 안장되었다.
3. 유산과 업적
냐나띨로까 대장로는 독일을 위시한 서구에 불교를 연구하고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번역 작업과 저서는 불교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했으며, 그의 교육 활동은 많은 제자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냐나뽀니까 스님은 스승의 저술 작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영어와 독일어로 된 그의 저술의 분량만으로도 존경받을 수 있으며, 현재처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모든 학습 자료를 갖추고 전혀 방해 없이 보호되는 생활에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주목할 만했을 것입니다. 큰스님의 업적을 충분히 평가하려면 그의 방대한 초기 작품의 상당 부분이 매우 어려운 환경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첫 번째 수용소의 원시적이고 시끄러운 생활 환경에서 지치지 않고 저술을 했고, 다시 스리랑카의 조용한 안식처에 도달하기 전에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여행하거나 강제로 보내질 때, 1차 세계대전 이후 겪었던 고난과 궁핍, 빈번한 질병 속에서도 지치지 않고 작업했습니다. 그의 연구 첫해와 빨리어 문헌의 첫 번째 번역을 수행할 때 큰 사전들과 잘 편집되고 인쇄된 빨리어 텍스트가 존재하지 않았거나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종종 그는 비판적인 주의를 기울여 미얀마어와 싱할라어로 된 야자수잎 필사본을 사용했는데 이 사본은 때때로 오류가 가득하고 읽기 어려웠습니다.
1906년에 나온 그의 첫 번째 출판물은 《붓다의 말씀(The Word of the Buddha)》(Pali 경전의 말씀에 있는 붓다의 가르침 개요, 설명 주석 포함)의 독일어판이었습니다. 얇지만 내용이 풍부한 이 책은 불교문학의 고전이 될 운명이었고, 수년에 걸쳐 13개 언어로 전 세계로 배포되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했거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명확한 이해를 얻었는지는 가늠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그것을 마음으로 배운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명확하게 할 수 있는 이 책의 잠재력은 아직까지 고갈되지 않았으며, 부처님의 말씀을 더욱 광범위하고 체계적으로 유포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가치가 있습니다.(생애, 301-302쪽)
…… 냐나띨로까 스님은 불교 교리에 대한 진지한 연구와 올바른 이해에 큰 도움을 주기 위해 저술과 번역의 주제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높은 예지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책은 테라와다불교 연구에 신뢰할 수 있는 지침을 제공합니다. 큰스님의 《불교사전》을 참고했다면 현대의 저술과 번역에서 많은 오역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글쓰기 방식에는 그의 삶의 방식과 성격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의 문체는 빨리어 경전에 걸맞게 단순하고 품위가 있었고, 그의 삶도 그러했습니다. 그는 글로든 대화로든 장식과 장황함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생각과 언어의 명료함을 소중히 여기고 모호함과 애매함을 싫어했습니다. 책이나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는 항상 “용어를 정의하라.”고 강조했는데, 그는 이것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건전한 지적 훈련이었다고 고마운 마음으로 기억했습니다. 그는 깨달은 분의 말씀에 깊은 존경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 시대의 불교 문헌에서 보이는 주관적인 견해의 과잉을 불신하면서 붓다의 말씀을 ‘해석’하려는 안일한 시도에 대해 매우 신중하고 진정한 학문의 정신으로 경계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는 다른 사람의 생각, 말, 행동을 ‘해석’하거나 가볍게 판단하는 것을 삼갔으며, 결코 전면적으로 비난하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무아(anatta) 교리의 참되고 실천적인 정신에 따라 그는 “나쁜 사람은 없고 나쁜 자질만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모든 자질은 무상하며 바뀔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는 결코 사람을 가혹하게 대하지 않았으며, 글이나 대화에서 논쟁이나 지나친 비판을 싫어했습니다. 그는 무엇이 선하고 진실인지를 말하는 것을 더 선호했으며, 그것이 성숙된 마음에 비록 때로는 느리지만 꾸준하게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두 가지 중요한 불교 교리인 무아(無我)와 연기(緣起)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적 펜을 휘두른 드문 사례는 특별히 강조되며 배우는 이들이 진지하게 고려할 가치가 있습니다. 그는 가능한 한 현대 생활의 ‘내부 및 외부 소음’을 피했으며 자연과 고요함을 사랑하는 성향으로 섬, 언덕, 숲 등 은둔지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대중의 관심을 피하고 공공 활동의 명예와 부담을 기꺼이 포기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폄하하지 않았지만, 그 자신은 초연한 상태를 유지하고 자신과 불교 승려의 이상에 맞는 단순한 생활 방식을 유지하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그는 또한 자신이 일과 담마 대한 외골수적인 헌신이라는 그 외의 동기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의 외골수적인 성실함은 그의 성격의 조화로움과 평온함은 물론 담마에 대한 봉사에 있어서 뛰어난 성취를 이룩했습니다.
그의 삶과 일에 대한 모든 지침은 모든 사람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폭력적일 뿐만 아니라 장황한 갈등이 있는 격동의 시대에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종류의 생산적인 일에 대한 고요함과 외골수적인 헌신은 개인과 사회에 이익을 줍니다.(생애 307-309쪽)
저술 가운데 독일어로 번역한 작품은 다음과 같다. 《인시설론》(1910), 《앙굿따라 니까야》(1907~1922), 《밀린다왕문경》(1913), 《청정도론》(1931~1952), 《법구경》(1992), 《아비담맛타상가하》(1995). 이 가운데 《청정도론》 독일어 번역은 제자 냐나몰리의 영어 번역보다 번역의 완성도가 높다고 한다. 이 외에 《붓다의 말씀》(독일어, 1906; 영어 1907; 한국어 2002)은 십여 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초기불교의 핵심 가르침인 사성제를 중심으로 한 경전 모음과 해설을 담고 있다. 이 외 《불교사전-불교용어 및 교리 편람》(1946, 1950, 독일어 1952; 프랑스어 1961), 《불교의 근본: 4강의》(1949), 《해탈에의 길》(1952), 개정판인 《붓다의 해탈에의 길-경장의 말씀에 보이는 체계적 탐구》(4판 1982), 《불교 원전에서 말하는 해탈에의 길》(독일어, 1956)을 출판했다.
스님의 제자이자 계승자라고 할 수 있는 냐나뽀니까 장로(1901~ 1994)는 《불교명상의 핵심(The heart of Buddhist Meditation)》(1964)을 통해 《대념처경》의 수행법과 미얀마의 마하시 위빠사나 명상을 서양인에게 알렸다. 또한 1958년 설립된 불자출판협회를 통해 끊임없이 서양에 법을 전했다. 냐나뽀니까 스님의 작업은 그의 뒤를 이은 미국 출신 스님인 비구 보디의 번역과 독일 출신 비구 아날라요 등의 연구 및 명상 지도 활동으로 이어져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다.
비구 보디는 ‘생애’의 한국어 번역을 위해 보내온 서문(26~29쪽)에서 이렇게 냐나띨로까 스님을 묘사하고 있다.
냐나띨로까 스님은 테라와다불교 승단에 입문한 최초의 서양인은 아니었지만, 유럽 대륙에서 온 최초의 입문자였을 것입니다. 어쨌든 서양인이 불교 승가 생활을 시작한 첫 번째 물결에서, 그는 아마도 불교가 서양에 전파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일 것입니다. 영어 독자들은 그의 두 선집 《붓다의 말씀》과 《붓다의 해탈의 길》로 그를 잘 알고 있습니다. 독일 독자들은 《앙굿따라 니까야》 《위숫디막가(청정도론)》 《밀린다빵하(밀린다왕문경)》의 독일어 번역본을 통해 그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저술 업적보다 제 마음속에 가장 강하게 남는 것은 그의 모범적인 삶입니다. 오늘날에는 서양인이 불교 승려가 되고자 할 때 서양에 있는 사원을 쉽게 찾아 수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아시아 사원에서 수련하고 싶은 사람은 비행기를 타고 몇 시간 만에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로 갈 수 있습니다. 아시아에서 수계할 수 있는 기회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온라인 간행물도 있습니다. 하지만 20세기 초에는 이러한 편의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안톤 귀트(미래의 냐나띨로까)가 처음 불교 승려가 되겠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따를 만한 선례가 없었습니다. 지적 배경이 탄탄하고 콘서트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유망한 경력을 쌓은 독일 청년이 모든 것을 포기하며 익숙한 세상을 뒤로하고 먼 아시아로 가서 승려가 된다는 것은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젊은 귀트는 수행승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매우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게 했습니다. …… 저에게 냐나띨로까 스님의 이야기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그의 저술보다 그의 인격입니다. 그의 삶은 부처님의 길을 따르고 세상에 담마를 전하고자 하는 강한 믿음, 결단력, 인내심, 용기, 헌신을 가진 한 인간의 삶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1936년 사미계를 받고, 1937년 비구계를 받은 후, 임종 때까지 많은 시간을 함께 지냈던 냐나뽀니까 스님의 스승의 번역과 저술에 대한 소감에서 냐나띨로까 스님이 진솔하면서도 불교 용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중시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없는 글쓰기와 번역은 작품의 가치를 더욱 높여준다. 미국 대학에서 철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72년에 스리랑카에 가서 비구가 된 후 20년 동안 냐나뽀니까 스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번역과 불자출판협회 일을 이어받은 비구 보디는 냐나띨로까 스님의 저술뿐 아니라 불법에 대한 믿음, 결단력, 인내심, 용기, 헌신을 가진 출가자로서의 모범적 삶에 더욱 주목하고 있다.
4. 맺는말
20세기 초, 서양에 불교가 전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영적인 삶에 관심이 많았던 안톤 귀트는 불교를 접하자마자 불교를 자신의 종교로 선택하면서 동양으로 떠나 불교에 귀의하고 불교 승려가 되었다. 스리랑카와 미얀마의 테라와다불교를 중심으로 빨리어 공부와 명상을 접한 냐나띨로까 스님은 스리랑카에 머물며, 빨리 경전과 아비담마 그리고 《청정도론》 등을 독일어로 번역하였고, 《붓다의 말씀》과 《불교사전》 등을 저술하여 초기불교 및 테라와다불교를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저술은 두 번의 세계대전 동안, 독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10년도 넘는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이루어 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또한 단순히 세계적인 학승으로서만이 아니라, 모범적인 출가 수행승의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현대의 출가자나 불교학자들에게 시사하는 점이 많다. 특히 많은 서양인 제자를 양성해서 스리랑카를 불교 연구와 경전 번역의 중심지로 뿌리내리게 한 점도 중요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이루어 놓은 저술과 제자 양성 덕분에 초기불교 및 테라와다불교를 배우고자 하는 현대의 우리는 큰 혜택을 누리고 있다. ■
김재성 metta4u@empas.com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 대학원 석사과정 졸업. 일본의 동경대학교에서 초기불교, 부파불교, 인도 대승불교 및 테라와다불교 연구(석사 및 박사과정 수료). 대표적인 저서로 《알기 쉬운 명상입문(공저)》 《초기불교 산책》과 역서로 《행복을 위한 혁명적 기술, 자애》 《마음챙김과 심리치료》 《명상의 정신의학》 《위빠사나 수행의 길-우 빤디따 사야도 가르침》 《붓다의 말씀》 등이 있다. 현재 능인불교대학원대학교 명상심리학과 교수, 자애통찰명상원(명상의집 자애)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