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은(吳承恩) 《서유기(西遊記)》 / 유응오

불교로 읽는 고전 / 공(空)을 깨달아가는 팔푼이들의 구법

2024-11-11     유응오

보살이나 요괴나 결국 일념(一念)에서 나온 것일 뿐, 근본을 따지자면 모두 무(無)에 속한 게 아니더냐?

— 《서유기》 제17회

 

모든 부처님과 일체중생은 한마음일 뿐, 거기에 어떤 법도 없다. 이 마음은 본래부터 생기거나 없어진 적이 없으며 푸르거나 누렇지도 않다. 정해진 모양이 없으며 있고 없음에 속하지 않으므로 새롭거나 낡음을 따질 수도 없다. 길거나 짧지 않고, 크거나 작지 않으니 모든 상대성을 뛰어넘어 그대로 있을 뿐이다. 이는 마치 허공과 같아서 끝이 없으니 재어 볼 수도 없다. 이 한마음 그대로가 부처일 뿐이니 부처와 중생이 새삼스레 다를 바가 없다.

— 황벽 스님 《전심법요(傳心法要)》

 

필자의 아들은 다섯 살 때부터 《삼국지(三國志)》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의 이름들을 알고 있었다. 한글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나이에 어떻게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알았던 것일까? EBS에 방영된 〈레전드 히어로 삼국전〉을 봤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필자 역시 책을 읽기 전부터 일본 만화인 〈드래곤볼〉 한국 만화인 〈날아라 슈퍼보드〉 홍콩 영화인 〈서유기 1: 월광보합〉 〈서유기 2: 선리기연〉을 통해서 삼장법사,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등 《서유기(西遊記)》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알고 있었다.

2003년 임홍빈이 《서유기》(문학과지성사)를 최초로 완역했고, 이듬해 서울대 서유기 번역연구회가 판타지 소설의 특성을 살려서 《서유기》(솔출판사)를 옮긴 사실을 고려한다면, 한국 독자들은 2000년대 초반이 돼서야 제대로 된 완역본을 읽을 수 있었다. 필자도 예외는 아니어서 2000년대 초반에 두 출판사에서 출간한 완역본을 읽었는데, 한문에 정통한 역자답게 임홍빈은 원작에 깃든 중국의 심원한 유불선(儒彿仙) 사상을 각주를 통해 독자들이 알기 쉽게 풀어 쓴 반면, 서울대 서유기 번역연구회는 구어체를 활용해 판타지 소설의 특성을 살리고 있었다.

돌이켜보건대 필자는 청년기가 지난 뒤 《서유기》 완역본을 읽은 것이 아쉽기보다는 외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30대 중반에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필자의 식견으로는 《서유기》가 중국의 4대 기서(奇書) 중 가장 깊이 없는 작품으로 보였다. 목숨 걸고 자신의 운명과 싸우는 영웅들의 영고성패(榮枯成敗)를 그린 《삼국지(三國志)》는 비장미의 극치였고, 부패한 권력에 맞서 법질서를 유린하는 산적들의 활극인 《수호전(水滸傳)》은 피카레스크의 표본이었고, 당대 성의 풍속도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금병매(金甁梅)》는 에로티시즘의 미장센이었다. 반면 《서유기》는 의인화된 동물들이 등장하고 이분법적 선악 구도를 통해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주제를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고 그런 우화(寓話)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20여 년이 지나서 다시 보니 《서유기》가 중국의 4대 기서 중 문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가장 심원한 작품으로 느껴졌다. 

《서유기》는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 삼장법사를 모시고 장안에서 10만 8천 리 떨어진 서역에 불경을 얻으러 가는 여정에서 81가지 고난을 겪는다는 게 서사의 골자이다. 동일한 서사인데도 예전에는 다소 유치한 우화로 보였던 것이 지금은 영적인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의 알레고리(allegory)이자 부조리한 사회에 일침을 가하는 패러독스(paradox)로 보이는 것은 왜일까? 그건 아마도 작가가 독자들을 위해 작품 곳곳에 숨겨둔 화소(話素)라는 보물들을 백분의 일이나마 찾았기 때문일 것이다. 

 

진정한 고문관 삼장법사의 리더십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을 제자로 받아들인 후 서역에 불경을 구하기 위해 떠나는 현장법사는 부처님의 제자인 금선존자(金禪尊者)의 화신으로 묘사돼 있다. 당 태종이 내려준 법호인 삼장(三藏)은 대승삼장(大乘三藏)의 줄임말이니 대승불교의 경전을 구하는 구도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삼장법사는 온갖 역경을 겪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부처님을 친견한 뒤 경전을 구해서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원력을 굽히지 않는다. 삼장법사가 구도의 길에 오르는 이유는 관음보살이 당 태종을 비롯한 수많은 대중 앞에 현현(顯現)하여서 “자네의 그 소승 교법으로는 죽은 자를 구제하여 승천시킬 수 없고, 그저 그럭저럭 속세와 어울려 지낼 수 있을 뿐일세. 내가 가진 대승 불법 삼장은 죽은 자를 구제하여 승천시키고, 고통에 빠진 사람을 괴로움에 벗어나게 하며, 끝없는 수명을 누리는 몸을 만들도록 수양하여 영원히 존재하는 여래(如來)가 될 수 있지.”라고 설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대승불교는 개인의 해탈에 목적을 두고 있는 소승불교와 달리 모든 중생의 구제에 목적을 두고 있다. 대승(大乘)은 ‘큰 수레’, 대형 버스여서 수많은 사람을 태울 수 있고, 소승(小乘)은 ‘작은 수레’, 고작해야 자신만 탈 수 있는 경차이다. 대승과 소승의 구분은 중국, 한국, 일본 등 동북아에서 꽃핀 삼론종(三論宗), 화엄종(華嚴宗), 천태종(天台宗), 법상종(法相宗), 진언종(眞言宗), 율종(律宗), 선종(禪宗) 등 종파들이 초기불교의 종파를 폄훼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 사실이나, 이 지면에서는 삼장법사가 왜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등 제자들과 함께 구도 여정을 떠났는지에 대해서만 살펴보고자 한다. 

삼장법사가 10만 8천 리에 달하는 길을 떠나는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일체중생을 태우고 피안(彼岸)에 다다를 수 있는 큰 수레의 경전을 얻기 위해서일 것이다. 작가는 삼장법사 일행의 여정을 일체중생이 타고 가는 피안의 큰 수레로 묘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생이 처한 환경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동사섭(同事攝)을 지속적으로 실천함으로써 고난의 여정 끝에 대승적인 차원의 깨달음을 얻는 것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삼장법사의 가르침이 큰 역할을 했다. 작품 속에서 삼장법사는 요즘 말로 하면 ‘고문관’이라고 할 수 있다. 삼장법사는 전생부터 많은 선업을 쌓은 고승 대덕임에 불구하고 험난한 여정 내내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물론이고, 시시때때로 장광설(長廣舌)을 늘어놓는다. 오죽하면 영화 《서유기》에서 주인공으로 분한 주성치가 “시도 때도 없이 주절대는 그의 수다와 주접에 심지어 관음보살까지 평정심을 잃었다.”라고 말했겠는가?

게다가 삼장법사는 여정 내내 산이나 강에 가로막힐 때마다 겁에 질려서 안절부절못하고 요괴에게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등 수행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모습을 보인다. 

물리적 능력만 보면 삼장법사는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은 물론이고 심지어 일행들이 타고 가는 백마보다도 뒤떨어진다. 하지만 손오공은 과거에 많은 살생을 저질렀고, 저팔계는 천상에서 항아를 희롱하여 징계를 받았고, 사오정은 옥황상제의 권렴대장임에도 불구하고 술자리에서 보물 잔을 깨뜨렸고, 백마 역시 조상의 사당에 불을 지른 죄를 지었다. 여기서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의 이름은 모두 불교 용어에서 비롯된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 오공(悟空)은 공의 이치를 깨닫는다는 것이고, 팔계(八戒)는 여덟 가지 계율을 지킨다는 것이고, 오정(悟淨)은 마음을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서천행이라 해 봐야 구름 타면 금방 아니냐?”라는 대사에서 알 수 있듯 기실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의 처지에서는 서천에 가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루에도 네댓 번은 족히 구름을 타고 오갈 수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진경은 고난 끝에 얻는 것이라는 이유로 삼장법사를 호위하면서 고난의 여정에 오르는 것이다. 

이력을 보면 삼장법사의 제자들이 상당한 지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손오공은 제천대성(齊天大聖)으로서 원숭이 나라의 왕이었고, 저팔계는 천봉원수(天蓬元帥)로서 은하수를 지키는 수군 사령관이었고, 사오정은 권렴대장(卷簾大將)으로서 옥황상제의 궁전을 지키는 경비 책임자였고, 심지어 백마조차도 서해 용왕의 셋째 아들이었다. 삼장법사가 일행을 이끄는 리더십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자비의 호소 말고는 달리 특별한 것은 없다.

삼장법사는 만나는 상대가 요괴든 인간이든 맞닥뜨리기만 하면 인질로 잡혀가는데, 잡혀가는 원인 또한 자신이 제공하기 일쑤이다.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의 목적은 서천으로 가는 게 아니라 삼장법사를 서천까지 모셔다드리는 것이다. 하지만 삼장법사를 서천까지 모시는 일은 순탄치 않은데, 그 ‘81가지 고난’이라는 굴곡의 여정을 만드는 것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도 아니고, 이 주인공들이 맞서 싸우는 요괴도 아니고 삼장법사이다. 81가지 고난에는 일정한 유형이 반복된다. 변신한 요괴가 일행을 유인하면 손오공은 대번에 요괴의 작란(作亂)임을 간파하지만, 삼장법사는 자비심을 운운하면서 요괴를 도와주라고 하고 일행은 요괴가 미리 놓은 덫에 걸려 위기에 빠지는 식이다.     

도대체 왜 삼장법사는 제자들을 위기의 덫에 빠뜨리는 것일까?

 

과유불급(過猶不及) 아이 원숭이의 뺄셈 놀이

《서유기》의 원탑 주연을 꼽으라면 단연코 손오공일 것이다. 손오공은 돌에서 태어나서 ‘돌 원숭이’라고 불리다가 화과산에서 원숭이들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며 스스로를 미후왕(美猴王)이라고 칭한다. 손오공이라는 이름은 스승인 수보리 조사에게서 받은 법명이다. 수보리(須菩提)는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 한 사람으로서 공(空)에 대해 깊이 이해하였다고 하여 해공제일(解空第一)이라 불렸다. 물론 작품에 등장하는 수보리 조사는 부처님의 제자는 아니지만 오공(悟空), 즉, ‘공을 깨닫다’는 의미의 법명을 제자에게 지어준 것에서 알 수 있듯, 실존 인물인 수보리를 모티브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 

300여 년 동안 화과산을 다스리던 미후왕은 문득 자신도 언젠가는 늙고 죽을 것이라는 고뇌에 빠진다. 불로불사(不老不死)의 도술을 배우기 위해 동승신주에서 바다를 건너 남섬부주로 향한다. 미후왕은 남섬부주에서 인간의 문명 생활을 배우지만 불로불사의 도술을 얻지 못해 다시 배를 타고 서우하주로 향하고, 이곳에서 수보리 조사를 은사로 모시고 돌 원숭이는 미후왕에서 손오공으로 거듭나게 된다. 

원숭이를 닮았다고 해서 지은 성씨인 손은 아이(子)와 계(系)가 합쳐진 글자로 영세(嬰細)의 의미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겸손함을 뜻하는 손(遜)과 동음이다. 손오공이 72가지의 도술을 익힌 단계에서 천계에서 추방당하는 것이나, 서역으로 가는 여정에서 81가지 고난을 겪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분명하다. 9×9=81이고, 8×9=72이다. 81은 수행의 완성을, 72는 수행의 완성에서 한 단계 모자람을 의미한다. 손오공의 수행이 미완성에 그친 까닭은 겸손함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삼장법사는 은연중에 손오공에게 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삼장법사는 손오공에게 아래로 내려감으로써 외려 위로 오를 수 있는, 뺄셈을 통해서 덧셈을 할 수 있는 자비의 지혜를 일깨워 주는 것이다.

손오공은 천계의 최고 지위인 옥황상제에게 “황제는 돌아가며 하는 법, 내년에 우리 집 차례”라고 말하면서 도전장을 던졌다. 그야말로 ‘천방지축(天方地軸) 기고만장(氣高萬丈) 허장성세(虛張聲勢)로 살다 보니 온몸에 털이 난’ 모양새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손오공의 쿠데타를 잠재운 것은 옥황상제나 다른 벼슬아치들이 아닌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이라는 점이다. 

손오공의 특징 중 하나는 불사신 즉,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것이다. 게다가 태상노군의 선약까지 훔쳐 먹은 까닭에 손오공의 신체는 돌처럼 단단해졌다. 옥황상제는 손오공을 토벌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손오공을 죽이는 데는 실패한다. 손오공은 칼이나 창에 찔리거나 베여도 상처가 생기지 않는다. 심지어 번개를 내리치고 불로 태워도 죽지 않는다. 태상노군이 팔괘로에 넣어서 태워 죽이자고 건의한다. 49일간 불을 지피지만, 팔괘의 원리를 잘 알던 손오공은 여덟 방위 중 바람을 의미하는 손(巽) 방으로 가서 살아남는다. 49일 후 팔괘로의 뚜껑이 열리자, 손오공은 뛰쳐나와서 천계의 황궁에서 난동을 부렸다. 천계에서는 손오공에 맞서 싸울 상대가 아무도 없었으니, 명색이 최고 지위인 옥황상제마저 피신할 정도였다. 때마침 천계에 와 있던 부처님이 직접 나서 손오공에게 “내 손바닥을 벗어난다면 옥황상제 자리를 넘겨주겠다”고 제안한다. 손오공은 주특기인 단숨에 10만 8천 리를 뛰어넘는 도술 근두운을 써서 하늘을 날아간다. 다섯 개의 기둥이 보이자 세상의 끝에 왔다고 생각하여 오줌까지 싸놓고는 되돌아온다. 그런데 이 다섯 개의 기둥은 실은 부처님의 손가락이었다.

오행산에 봉인된 지 500년이 지나서 손오공은 삼장법사에게 구출됨으로써 14년간의 여정에 오르게 된다.

고단한 여정을 마치고 서천에 도착한 뒤 손오공은 석가여래로부터 투전승불(鬪戰勝佛)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서유기》는 ‘돌 원숭이’에 지나지 않은 손오공이 ‘전투에서 이긴 부처님’으로 거듭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손오공이 이긴 전투는 무엇일까? 언뜻 보면 요괴들과의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삼장법사는 요괴에게 인질로 끌려가고, 저팔계는 요괴들과 싸우다가 붙잡히고, 사오정은 있으나 마나 한 병력이니, 요괴와의 전투는 최대 중량 1만 3천5백 근(8.1톤)의 병기인 여의봉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손오공의 몫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숙고해 보면 손오공이 이긴 전투는 자신과의 전투, 보다 구체적으로는 자신의 욕망과의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부처님이 마왕(魔王) 파순(波旬)의 유혹을 물리친 수하항마(樹下降魔)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이 동쪽에 솟아오르는 샛별을 보고서 무상정등각의 문을 열었듯이, 손오공은 보살이나 요괴나 결국 일념(一念)에서 나온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투전승불이 된 뒤 손오공을 괴롭히던 긴고아(緊箍兒)가 절로 사라졌다는 것은 긴고아가 실은 마음이 빚은 망령(妄靈)에 지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기실 애초부터 손오공은 불성(佛性)의 씨앗을 지닌 미완(未完)의 부처였다. 이는 빨리 서천에 당도하고 싶어 하는 삼장법사에게 손오공이 “견성하는 마음으로 묵묵히 여행하다 보면 발걸음이 닿는 곳이 바로 서천”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천축국에 도착할 무렵 손오공은 이미 성불의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삼장법사가 손오공이 하는 설법은 무언어(無言語) 무문자(無文字), 즉, 말과 글로는 전할 수 없는 진정한 설법이라고 설명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손오공이 지옥에 도착하자 칼산이 무너지고 고혼(孤魂)들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장면은 손오공이 불보살의 지위에 오르게 됐음을 직접적으로 묘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에 젖은 불경을 말리다가 《불본행경(佛本行俓)》의 일부분이 바위에 들러붙어 찢겨나가자, 자신의 탓이라고 자책하는 삼장법사에게 손오공은 “하늘과 땅이 온전하지 않은데 이 경전은 원래 온전했기 때문에 이제 바위에 붙어 찢긴 것입니다. 바로 불완전한 것에 대응하는 오묘한 뜻이 깃든 일이니 어찌 사람의 힘으로 관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위로한다. 마지막 고난 장면을 통해서 작가는 독자들에게 완전함은 불완전함에 있고, 서방정토는 사바세계에 있음을 넌지시 역설하는 것이다. 

간단히 도식화하면 《서유기》는 천계에서 추방당한 주인공들이 81가지 고난을 겪으면서 불보살의 지위에 오르는 수행기라고 할 수 있다.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은 반인반수(半人半獸)의 외모를 지니고 있고,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하다는 점에서 요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손오공은 원숭이처럼 생긴 데다가 성질머리가 괴팍한 것으로 묘사돼 있다. 손오공이라는 캐릭터가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회수(淮水)에 사는 거대한 원숭이인 무지기이고, 다른 하나는 인도의 서사시 《라마야나》에 등장하는 하누만이다. 저팔계는 “몸을 잃고 머물 태를 찾다가 뜻밖에 길을 잘못 들어 어미돼지의 태에 들어가는 바람에 돼지의 몰골이 되었고”, 여색과 식탐을 절제할 줄 모르는 것으로 묘사돼 있다. 사오정은 “머리는 온통 화염처럼 시뻘건 털로 더부룩하고 방울 같은 두 눈은 등잔처럼 번쩍거리고 검지고 푸르지도 않은 푸르딩딩 칙칙한 얼굴”의 몰골을 하고 있다. 이러한 끔찍한 몰골의 요괴들이 다른 요괴들과의 숱한 싸움을 통해서 성자(聖者)로 거듭난다는 점에서 《서유기》는 성장소설 내지는 명상소설의 요소를 십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관시하인(觀是何人) 심시하물(心是何物)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불(成佛)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성불을 바라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성불을 바란다는 것이다.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 이르길, ‘일체중생(一切衆生) 실유불성(悉有佛性)’이라고 했다.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이다. 

《서유기》는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삼장법사 일행의 구법 여정은 《화엄경(華嚴經)》 〈입법계품(立法界品)〉에 등장하는 선재 동자의 구법 여정과 상당히 유사하다.

《화엄경》 〈입법계품〉은 신분의 높고 낮음을 떠나서, 귀하고 천하고를 떠나서 누구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선재 동자가 찾아뵙는 53 선지식의 직업을 살펴보면 도량신, 주야신, 천(天) 등 신의 지위에 놓인 이들이 있는가 하면 바라문, 선인, 비구, 비구니 등 수행자들도 있고 왕, 부자, 현자 등 사회 지도층들도 있다. 심지어 선지식에는 뱃사공, 매춘부 등 사회 밑바닥들도 포함돼 있다.

바수밀다 여인은 선재 동자가 찾아왔을 때 “어떤 중생이 애욕에 얽매어 내게 오면, 나는 그에게 법을 말해 탐욕이 사라지고 보살의 집착 없는 경계의 삼매를 얻게 한다. 어떤 중생이고 잠깐만 나를 보아도 탐욕이 사라지고 보살의 환희삼매를 얻는다. 어떤 중생이고 잠깐만 나와 이야기해도 탐욕이 사라지고 보살의 걸림 없는 음성삼매를 얻는다. 어떤 중생이고 잠깐만 내 손목을 잡아도 탐욕이 사라지고 보살의 모든 부처 세계에 두루 가는 삼매를 얻는다.”라고 말했다. 바수밀다 여인의 해탈 법문은 중생 세계에 들어가지 않고는 중생을 교화할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청정한 마음을 지닌 바수밀다 여인이기에 오탁악세(五濁惡世)의 법으로써도 능히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처염상정(處染常淨)의 의미와도 일맥상통한다. 연꽃은 진흙밭에서 피어나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항상 청정한 본성을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맑고 향기롭게 세상을 정화한다. 

선재 동자가 그랬듯이 삼장법사 일행은 구법 여정 끝에 보융무애문(普融無碍門)에 이르러 전체와 개체가, 주관과 객관이 서로 원융(圓融)하는 무애자재의 화엄법계(華嚴法界)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삼장법사 일행을 보융무애문에 인도한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의 마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서유기》에 등장하는 요괴들은 삼장법사 일행의 수행을 방해하는 심마(心魔)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홍상훈은 《그래서 그들은 서천으로 갔다》에서 “후자에 해당하는 요괴들 가운데 상당수는 관음보살이 의도적으로 안배해 놓은 경우가 많다. 관음보살은 직접 다른 세 보살과 함께 미녀로 변신하여 삼장법사 일행을 시험하기도 하고(제23회), 태상노군의 동자들을 빌려 요괴 노릇을 하며 삼장법사 일행에게 시련을 주기도 한다(제33~35회). 심지어 관음보살은 9×9=81이라는 수를 채우기 위해, 팔대금강을 시켜서 경전을 얻어 돌아가는 삼장법사 일행에게 최후의 고난을 안배하라고 지시하기도 한다”고 해설했다. 다시 말해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요괴는 삼장법사 일행을 성불에 이르게 하는 조력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도와 덕이 높으면 마귀의 시험도 높으니

참선의 비결은 본래 고요한 것이나 고요함 속에서 요마가 생겨난다네.

손오공은 바르고 곧아 중도를 행하고 

저팔계는 어리석고 고집 있어 잘못된 길을 가는구나.

백마는 말없이 애욕을 품고 있고

사오정은 묵묵히 혼자서 근심하여 속을 태우네.

지나가던 요괴는 뜻을 이뤄 쓸데없이 기뻐하나

결국에는 또한 올바름을 따라 사라지게 되리라.

 

《서유기》 제40회에 인용된 위 구절에서 알 수 있듯 삼장법사 일행은 81가지 고난 끝에 요망한 마귀들이 실은 자신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는다.

달마대사는 “마음, 마음 참으로 알 수 없구나.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다 받아들이다가도 한번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자리도 없다.”고 말했다.

달마의 법을 네 번째로 이어받는 도신 스님은 우두산(牛頭山)에서 토굴을 짓고 정진하는 우두법융 스님을 만나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법융 스님은 “마음을 찾는다”고 대답했고, 이에 도신 선사는 “관시하인(觀是何人) 심시하물(心是何物)이냐?”고 반문했다. 마음을 찾고 보려는 자는 누구이고, 그 마음은 어떤 물건인가, 하고 물은 것이다. 

도신 스님의 질문에 법융 스님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다름 아닌 자기 마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삼장법사 일행이 81가지 고난 끝에 얻은 진리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찌 보면 삼장법사 일행의 여정은 본능적 욕망과 참된 진리를 얻기 위한 욕망이라는 갈림길에서 고뇌하는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손오공이 삼장법사의 제자가 되는 양계산(兩界山)은 두 가지 경계가 있는 산이다. 즉, 참된 진리와 본능적 욕구에서 참된 진리를 찾음으로써 새로운 자아를 완성하는 것이다. 

수보리 조사에게서 도술을 배울 무렵 손오공은 배운 도술을 사형들을 앞에서 자랑하다가 파문당한 이력이 있었다. 심지어 수보리 조사는 인연을 끊으면서 “절대로 어디 가서 자신에게 도술을 배웠다고 소문내지 말라”고 당부하기까지 했다. 작가가 “여러분에게 솔직히 말씀드리겠소만, 이 손 선생이 만약 황제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온 천하만국 구주의 황제 노릇을 다 해보았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기고만장한 손오공이 싸움꾼에서 구도자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여섯 도적(六賊)을 물리쳤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기서 여섯 도적은 다름 아닌 모든 죄업의 근원이 되는 눈으로 보는 색경(色境), 귀로 듣는 성경(聲境), 코로 냄새를 맡는 향경(香境), 입으로 맛보는 미경(味境), 몸으로 느끼는 촉경(觸境), 마음으로 아는 법경(法境) 등 육경을 일컫는다. 육경이 육근과 중층적으로 합해져 인식 체계를 갖는 것을 일컬어 십이처설(十二處說)이라고 하는데, 이 십이처설은 불교의 기본교리인 연기설의 기초가 되고 있다. 

《서유기》 제34회에서 금각대왕과 은각대왕이 ‘손오공’과 ‘공오손’과 ‘오공손’을 전혀 다른 인물로 인식하는 것이나, 제56~58회에서 가짜 손오공이 등장하는 것은 진정한 자아 찾기의 메타포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자아 찾기의 의미에 대해 “요괴를 항복시키고 다시 모여 깨달음의 몸으로 합쳤구나. 신(神)은 되돌아오고 마음은 버렸으니 수행은 비로소 안정되고 육식(六識)이 제거되니 단(丹)의 수련이 이루어지는구나.”라고 친절하게 부연 설명하고 있다.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은 삼장법사의 제자가 되면서부터 반인반수의 죄수에서 구도의 길에 오르는 행자가 될 수 있었고, 14년 동안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반야바라밀(般若) 등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실천하는 구도 여정 끝에 서천에 당도하여서 마음 이외에는 특별한 법이 없다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었다. 

《서유기》가 고금(古今)을 막론하고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외피는 읽기 쉬운 우화이지만 그 내용은 심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서유기》를 하나의 장르로 정의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서유기》는 어린이를 위한 동화인 동시에 성인을 위한 알레고리 소설이고, 부조리한 사회의 세태를 비판한 리얼리즘 문학인 동시에 마법적 세계를 형상화한 판타지 문학이다. 손오공이 휘두르는 여의봉처럼 자유자재로 해석이 가능한 동양 고전이다. 

《반지의 제왕》이 서양사상과 신화를 바탕으로 쓰였다면, 《서유기》는 동양사상과 신화를 바탕으로 쓰인 대표적인 명작이라고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미 고전이 된 만큼 《서유기》를 1차 텍스트로 한 제2의 창작물들이 많이 창작되어서 대중에게 사랑받길 기대해 본다. ■

 

유응오 arche442@hanmail.net

2001년 〈불교신문〉 200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집 《검은 입 흰 귀》 장편소설 《하루코의 봄》 《염주(念珠)》 영화평론집 《영화, 불교와 만나다》 등 출간. 현재 〈한국불교신문〉에 장편소설 《태고(太古)》 연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