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불교학자 35. 가마타 시게오(鎌田茂雄, 1927~2001) / 선림

동아시아 불교학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다

2024-09-06     선림

서언

제2차 세계대전과 국가의 침체기, 부흥기를 함께 겪었던 상황 속에서 일본 불교계도 시대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였다. 1900년대부터 일본 불교학은 교리적인 흐름에 입각한 사상사를 정리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로 불교의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는 기초가 세워졌다. 패전 이후에는 패러다임의 변화로 불교학계도 새로운 방법론, 새로운 불교학을 암중모색하는 시기가 도래했다. 혼란한 시대 속, 한국불교와 중국불교의 양 영역에서 고군분투했던 학자가 바로 가마타 시게오(鎌田茂雄, 1927~2001)이다.

기존의 안목에서 벗어난 새로운 불교 연구를 시작한 가마타는 중국불교사를 다양한 각도에서 재조명했다. 또한 한국불교에 대한 직접적인 조사와 더불어 문헌 고증을 통해 한국 불교학의 기준점을 제시하였다. 학자로서 역할뿐만 아니라 교육자로서 어떻게 민중들에게 불교를 알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고심했던 가마타는 무도, 일상생활 등 다양한 분야에 불교를 접목하고자 노력했다. 가마타는 언제나 기존의 연구와는 다른 새로운 시각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중국불교와 화엄학을 전공하여 다양한 연구를 남김과 동시에, 한국불교사 연구의 시금석 같은 존재였고, 현재도 가마타의 연구는 한국과 일본의 많은 학자들에게 귀중한 양분이 되고 있다.

혼탁한 시대 속에서 발견한 불교

가마타 시게오는 1927년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에서 출생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었던 1942년에 중학교를 중퇴하고 도쿄육군유년학교에 입학하였다. 가마타는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당시에는 나름 숭고한 이념을 가졌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믿고 있었던 가치관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으로 인해 송두리째 뒤바뀌었다. 선과 악의 판단을 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에 군국주의 황국사관에 의하여 교육받았던 그의 사상은, 이제까지 선으로 알았던 것이 악이 되고, 일본군은 더 이상 자랑스러운 집단이 아니게 되었다. 그는 삶의 방향성을 잃었다. 그러던 중,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어머니의 묘소에 참배를 갔다가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원각사의 주지 스님인 아사히나 소겐(朝比奈 宗源)의 법문을 듣고 참선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승려가 아니었어도 함께 좌선당에서 참선할 수 있었던 듯하다. 부처님의 성도재일인 음력 12월 8일을 기념하여, 1일부터 8일까지 밤낮으로 자지 않고 정진하는 납팔접심(臘八接心)을 함께했던 가마타는 단기간 참선 흉내만 낸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그의 실참 경험은 훗날 그가 불교학자로 대성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아사히나에게 《무문관》 《벽암록》 《괴안국어(槐安國語)》 등을 배우면서 선어록에 대한 기틀을 다졌고, 그곳에서 전 도쿄대학교 교수 다마무라 다케지(玉村竹二), 니혼대학교의 후루타 쇼킨(古田紹欽)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석학들과 인연을 맺으면서 불학의 길로 접어들었다.

원각사와의 인연으로 그는 고마자와(駒澤)대학교에 전입하여 불교와 철학 관련 서적을 탐독하게 되었다. 당시 스무 살의 가마타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은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였다. 니시다의 일기를 본 가마타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던 개인의 분노, 이를 좌선으로 승화시키는 니시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최고의 가치라고 여겼던 소년 시절의 가마타는 니시다의 글을 통해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했던 자신을 반성했고, 자신의 무력감과 나태함에 채찍질을 가하는 계기로 삼았다.

스즈키 다이세츠 역시 가마타에게 영향을 준 학자였다. 도케이지(東慶寺)에서 열린 강의에서 화엄의 사사무애법계에 감명받은 가마타는 훗날 화엄교학을 전공하고자 결심하게 되었다. 당시 스즈키는 ‘군국주의에 선(禪)이 이용되어, 잘못된 무인선(武人禪)이 일본을 망치고 있고 결국 패배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는데, 군국주의에 배신감을 느꼈던 가마타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또한 고마자와대학교의 좌선 교수였던 사와키 코도(澤木興道)에게 좌선을 배운 가마타는 혼란스러웠던 청년기에 한 줄기 빛을 찾은 것 같았다. 이와 같은 영향으로 가마타는 군국주의를 부정하고, 불교를 통해 자신을 규명하는 데에 생명을 걸기로 다짐했다.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가마타가 본 니시다의 글은 1905년에 쓰인 그의 일기였고, 스즈키의 글은 패전 전후로 쓰인 저서였다. 한때 니시다는 군국주의에 분개하는 철학자였지만,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일본 군부로부터 요구받은 《세계 신질서의 원리》라는 글을 통해서 대승불교와 군국주의를 결부시켜서 제국주의를 긍정하게 되었다. 스즈키도 마찬가지로 군국주의를 옹호한 과거가 있다. 그는 선(禪)을 전투 정신과 결부시킨 글을 쓰는 등 대중들에게 불교의 정신을 왜곡시켰다. 가마타가 매료된 화엄사상도 천황주의를 옹호한 과오가 있다. 그들은 모두 전쟁의 광기에 사로잡혔거나, 혹은 사로잡힌 자들에게 펜을 짓눌렸으리라. 그 소용돌이 속에서 올곧은 정신을 가지고 과연 누가 살아남았을지 생각하게 되었다. 분명한 점은, 그들의 글이 패전 이후 이념과 사상의 붕괴 속에서 방황하던 한 청년을 구원했다는 사실이다.

1953년, 만 26세에 도쿄대학 대학원의 인도철학 전문과정에 진학한 가마타는 1962년에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3년 후, 가마타는 도쿄대학의 동양문화연구소 강사로서 학자의 길을 걸음과 동시에, 《중국화엄사상사 연구》를 출판했다. 이후 도쿄대학교 교수로 취임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직책을 맡았다. 바쁜 와중에도 그는 조교수로 취임한 뒤 거의 매년 책을 발간하였으며, 60세에 도쿄대학교에서 정년 퇴임을 한 후에 아이치대학교로 부임하면서 73세로 천화할 때까지 저술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수상 이력도 놓칠 수 없는 부분 중 하나이다.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1962년에는 일본인도학불교학회상을, 1965년에는 《중국화엄사상사 연구》로 일본종교학회상을 수상했다. 1976년에는 《종밀교학의 사상사적 연구》로 제66회 일본학사원상을 수상했고, 1981년에 다수의 불교 입문서 집필로 불교전도문화상을 수상했다. 72세에는 훈삼등욱일중수장(勲三等旭日中綬章)을 받았다. 이는 국가나 공공에 대해 현저한 공적을 올린 사람에게 수여하는 일본의 훈장이었다.

새로운 시각의 불교 연구를 제시하다

기존의 연구와 대비되는 가마타의 연구의 가장 큰 특징은 현 상황과 문헌과의 비교 고찰, 그리고 그를 위한 실태 조사이다. 그는 1970년에 오부치 닌지(大淵忍爾), 쿠보 노리타다(窪徳忠), 나오에 히로지(直江広治)를 단장으로 출범된 해외학술조사단의 단원으로서 십수 년간 홍콩, 대만, 동남아시아 화교 사회의 불교의례를 조사할 수 있었다. 이후, 1980년에는 가마타가 단장이 되어 ‘일중우호 중국문화연구자 방중단’을 조직하여 2주간 상하이, 장시성, 저장성, 장쑤성 등지를 답사했다. 또한 개인 자격으로 한국, 중국, 대만의 사찰을 방문하여 조사하고 직접 의식에 참가하는 등 시간과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연구는 크게 한국 불교학과 중국 불교학으로 요약할 수 있다. 고마자와대학교의 강좌 중에는 ‘한국불교사’가 있는데, 1990년대 즈음에 가마타에 의해 최초로 개설된 이 강의는 현재까지도 고마자와대학교에서 열리고 있다. 이 강의는 이시이 고세이(石井公成)를 거쳐서 현재 사토 아츠시(佐藤厚)가 맡고 있다. 또한 일본에서 한국불교사 연구는 누카리야 가이텐(忽滑谷快天)의 《조선선교사(朝鮮禪敎史)》(1930), 에다 도시오(江田俊雄)의 《조선의 불교》(1936) 등 고마자와대학교와 관련이 깊다. 이후 이렇다 할 연구가 없었으나, 가마타의 연구에 의해 한국불교 연구는 큰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가마타가 1987년에 《조선불교사》(국내 출판명 《한국불교사》)를 출간하였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한국불교 개설서로 사용되고 있는 대표적인 저술이다. 이처럼 일본 불교계에서 한국 불교학의 개척자로 불리는 가마타는 어떠한 계기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을까.

그는 당말(唐末)부터 북송(北宋)까지의 불교의례가 한국의 사찰 등에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이 외에도 가마타는 당대(唐代)의 불교는 일본 고야산, 비소산에서 전승되었고, 명대(明代) 이후의 의례는 중국 본토를 비롯한 대만, 홍콩, 동남아시아 등지의 화교 사회에 보존되었다는 점을 실태 조사를 통하여 확인했다. 중국불교 전공자였던 가마타는 중국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 일본의 불교에 대해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중국불교를 알기 위해서는 한국불교를 알아야 하고, 한국불교를 알기 위해서 중국불교를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불교 전공인 그가 한국불교의 대가가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가마타는 한국불교사에 대하여 남다른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과 일본은 한줄기 흐르는 물과 같은 나라로서 고대의 일본문화는 고구려 · 백제 · 신라문화의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일본 고대문화는 주로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근대에 와서 한일 양국은 불행한 관계에 처하게 되어 일본 사람들은 한국의 문화를 바르게 인식할 수 없게 되었다. 불교에 관해서도 한국불교는 중국불교의 아류(亞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그릇된 인식이 학계에도 통용하게 되었다. 일본 학계에서는 한국불교를 가볍게 보는 경향이 나타나, 그 그릇된 견해를 정정하기 위한 뜻에서 이 책을 집필하게 되었다.

가마타는 자신의 저서에서 기존 불교학자들과는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바로 일본의 불교가 한반도를 거쳐서 유입되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연구자들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내용이지만, 이전까지의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중국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불교를 수입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불교의 사찰과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가마쿠라 시대의 불교학자 교넨(凝然)은 《삼국불법전통연기(三國佛法傳通緣起)》를 저술했는데, 불교의 전래를 인도, 중국, 일본의 삼국으로 보았다. 이 전통은 이때부터 일본 불교학계를 오랫동안 지배했고, 조선불교는 독립된 존재로 인정되지 않았다. ……일본의 고대 불교는 직접 중국에서 전래한 것이 아니라, 조선반도를 경유해서 들어왔다. 일본의 고대 불교와 조선불교의 관계는 너무나도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조선불교의 성격을 알지 않고는 일본의 고대 불교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교넨에 의한 불교사학은 오랜 기간 일본 불교계를 지배하고 있었고, 조선불교의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가마타는 철저하게 문헌에 의한 고증을 거쳐서 역사적 진실을 밝힌 것이다. 가마타는 이 책에서, 《일본사기》에 따르면 흠명(欽明) 천황 7년(538), 백제 성명왕이 불상과 경전을 보내온 것이 일본불교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또한 《서기(書記)》 등을 인용하며 백제 승려들의 도래와 활약 등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승강(僧綱)의 시작, 계율의 확립 등 일본 초기 불교의 개척을 담당했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가마타는 이러한 문헌 연구에 기반한 실태 조사도 실행에 옮겼다. 그는 연구 대상을 정하면 그 지역의 문화와 유적을 먼저 자신의 다리로 답파하고, 그 이후에 문헌 연구를 진행했으며, 실태 조사와 문헌 연구를 병행하여 진행했다고 밝혔다. 그가 이런 방식의 연구 방법을 진행했던 목적은 문헌에 전해지는 역사와 실제 현상과의 차이점을 발견하고자 한 것이다. 실제로 교넨의 기준에 의해 진행되었던 일본 불교사학은 한국불교에 관해 무지해도 된다는 근거를 제시했고, 그로 인해 가마타 이전의 일본 불교계는 한국불교는 독립적인 사상이 없다는, 한국불교의 근간부터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이러한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가마타는 한국의 사찰들을 직접 답사하여 그 나라의 문화를 알고 과거와 현재를 공부하여 자신의 저술에 녹여내고자 했다. 그의 저술 중 《조선불교사》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현대 한국불교의 다양한 양상을 조명한 것이다. 특히, 한국의 불교미술과 불교의례, 그리고 사찰들과 그 특징들에 대한 내용은 국내의 한국불교사 개론서 중 대체될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연구 방법은 한국불교만이 아니라 전공인 중국불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가마타는 중국불교사 중에서도 화엄사상을 전공했다. 그는 중국불교 연구의 동향에 대해 언급하며 불교 연구방법론에 대한 새로운 방법을 제기했다. 1910년에 《불교사림(佛敎史林)》이 간행되어 불교를 역사적으로 연구하는 풍조가 생겼으나, 교리의 발달과 변천에 대한 연구에 지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1937년 지나불교사학회(支那佛敎史學會)의 설립과 함께 중국불교를 중국 문화사나 사회사에 결부시켜 파악하려는 움직임이 이루어졌다. 또한 실태 조사에 기반을 둔 유적 조사연구를 통해 둔황, 룽먼 등의 석굴에서 경전들이 발견되었고, 이 판본들을 바탕으로 선종사를 비롯한 사회경제사, 문학사의 해명에도 큰 진전이 있었다. 이처럼 불교학은 역사적인 문헌에 의한 연구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실태 조사들을 통해 이전까지의 연구가 마치 천지가 개벽하듯 뒤집히는 상황도 발생하는 것이다. 가마타가 실태 조사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게 된 것은 아마도 이러한 사건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볼 수 있다.

가마타의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이로부터 40여 년 후로, 당시에도 그때까지 미개척된 영역이 많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중국불교의 통사적인 연구를 진행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불교는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면서 불교의 새로운 진화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냈고, 이는 한국, 일본, 베트남 등에 전파되었다. 중국불교는 인도불교의 미래이자 한국 · 일본불교의 과거이고, 독자적으로 발전한 중국불교를 이해해야만 불교 역사의 전체적인 틀을 파악할 수 있기에 가마타는 중국불교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교리사나 교단사에 편중되지 않고, 중국사회에 맞춰 변용되는 불교의 양상과 더불어 불교가 중국 민중들의 사상에 끼친 영향을 알아보고자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인 시선에서 불교를 바라볼 수 있도록 저술에 힘썼다. 가마타와 선배 학자들의 노력 덕분에 중국불교사를 비롯한 다양한 불교 관련 서적에서 이러한 경향이 나타났고, 불교사와 다른 사학의 비교 연구를 통해 당시 역사적 사건들이나 교리의 탄생, 종파의 발생에 대하여 심도 있는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가마타는 화엄종의 특성과 지리적인 특성을 결합하여 발생 과정을 유추하고 있다. 당(唐)의 수도 장안(長安)은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동쪽에서 가장 융성했던 도시로서, 실크로드와 연결되는 모든 나라의 문화, 종교, 예술 등이 홍수처럼 유입되어 국제도시로 발전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화엄종은 사물 개개의 절대성과 독립 자존성을 인정함과 동시에 사물과 사물 간의 상호 매개를 의미하는 사사무애법계의 원융무진한 사상체계를 설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특정 사건과 정치적 상황을 결부시키기도 했다. 가마타는 측천무후는 당 태종, 고종 등 이전까지 패러다임을 주도했던 법상종의 학문을 뛰어넘는 학문이 필요했고, 법상종을 배척하지 않으면서도 포용할 수 있는 사상을 전파하고자 법장을 등용하여 궁중에서 《화엄경》을 강의하도록 하는 등 화엄종에 힘을 실어 주었다고 해석했다.

이러한 관점으로 중국불교사의 통합적인 연구를 진행한 가마타는 《중국불교사》를 저술했다. 그러나 고지마 다이잔이 언급했듯이 가마타의 연구에는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인 검증과 기존 학설의 반복만이 있을 뿐, 철학적인 측면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있다. 정치적, 사회적인 상황에 맞춰서 연구를 진행하는 것은 좋은 시도이지만, 사상사적인 고찰이 없다면 불교사의 핵심이 빠졌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마타의 연구가 없었다면 이러한 비판을 통해 새로운 연구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가마타는 교리사에 편중되어 있던 중국불교 연구 방법을 바꾸고자 철저한 실태 조사와 문헌 고증을 통해 기존의 학설들을 재검증하여 나갔다. 또한 사상을 중심으로 하지 않았다는 말은, 사상적 면모를 포함하여 다양한 각도에서 불교사를 재조명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현대에 와서 본다면 그의 업적이 미약해 보일 수도 있겠으나, 시대적 상황과 제반을 고려해 본다면 미진했던 중국불교 연구를 암중모색하는 과정에 있었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오히려 고지마의 비판은 가마타의 중국불교사를 총체적으로 정리한 학문적 성과를 드러내 주는 것 같기도 하다.

의례에 대한 연구도 가마타의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한 국가의 불교에 대해서 완벽하게 알기 위하여 가마타는 다음의 세 가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첫째는 해당 국가의 불교 교리, 둘째는 교단, 셋째는 의례이다. 그가 특히 의례에 방점을 둔 이유는, 의례 자체가 가지고 있는 보수적인 성격 때문이다. 말투, 의복들이 문화와 상황에 맞춰서 쉽게 변하는 것에 비해 의례의 형식은 바뀌는 일이 적어서 비교적 오래된 원형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의례에 대한 기존의 연구 방법으로는 문화사(文化史), 사회사(社會史), 교리사(敎理史)를 중심으로 한 고찰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가마타는 의례의 성격을 통해 중국불교의 특질을 이해하는 방법론은 없었다고 지적했으며, 참회 등의 의례에 대한 문헌적, 역사적 연구에 더해서 문헌의 계통적인 연구와 실태 조사도 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례에 대한 실태 조사는 결국 승려들과 함께 직접 조석예불을 참석해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가마타는 현지 사원에서 승려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숙박까지도 함께했다고 회고했다. 그 결과 홍콩, 대만,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의 화교 사회에서 행해지는 의례들에 대하여 정리했다.

가마타는 위와 같은 다양한 관점으로 초전기의 불교부터 시작하여 남북조 불교를 거쳐서 청대(清代)에 이르는 불교의 역사를 조망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가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가 저술해 오던 《중국불교사》는 총 8권으로 기획되어 있었으나, 6권인 수(隨) · 당(唐) 불교의 상 · 하권을 마지막으로 송 · 원 · 명 · 청을 아우르고자 했던 대작은 아쉽게도 결실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선무합일(禪武合一)의 실천자

일본의 불교학자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한 부류는 불교와 무도를 함께 익히는 사람, 다른 쪽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다. 가마타는 전자에 속했으며, 현대인의 일상생활 속 선의 적용, 즉 선 수행에 주목했던 학자 중 하나였다. 그는 특히 무도와 선의 합일에 관심을 가졌다. 가마타는 50세부터 집 근처의 아이키도장(合氣道場)인 천도관에서 수련을 시작했고, 6단이 될 때까지 정진했다고 한다. NHK에서 방송했던 〈생명의 탐구〉와 그가 남겼던 저술들에서 가마타는 선 수행과 무도는 하나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정진했던 무도는 합기도였으며, 지인들도 가마타가 합기도를 수련하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합기도의 철학은 원(円), 무(無), 화(和), 기(氣)라고 말한다. 그리고 가마타는 이를 선(禪)과 연결하고 있다. 합기도에서 무(無)는 적을 공격하지 않고 피하면서 오히려 자신을 무(無)로 만들어서 몸을 버리는 위대한 도의 체현이라고 보는데, 가마타는 선가(禪家)의 대사일번(大死一番)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여기서 죽음은 ‘망상을 가진 나’의 죽음, ‘망상을 일으키는 자기’의 죽음을 의미한다. ‘나를 죽이는 것’은 ‘나를 무로 만드는 것’과 같으며, 이것이 선과 무도의 합일점이라고 보았다. 선(禪)과 무(武)의 합일은 무(無)에 대한 유사한 인식에 기초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번뇌의 완벽한 소멸은 내가 없음이며, 이는 모든 반연을 쉬어서 ‘한 물건도 없음’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나’라는 존재가 있으면 반드시 ‘내가 아닌 존재’를 상정하게 되는데, ‘상대가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도 있게 된다. 합기도는 본래 상대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기(氣)와 하나가 되기 위함인데 이는 상대에 집착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므로 대자연의 기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나’의 제거가 우선시되어야 한다.

가마타는 이러한 선무합일에 대한 근거를 다쿠앙(澤庵)에게서 찾고 있다. 다쿠앙의 《부동지신묘록(不動地神妙錄)》은 집착하는 마음, 머무르는 마음을 없애고 자유로운 마음, 무심한 마음을 깨닫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사상을 검도에 적용한 다쿠앙은 찰나 간에 승패가 결정되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지 못하고 과거에 집착하거나 정체되어 있는 마음은 용납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러한 집착심을 제거하는 것이 바로 ‘마음을 두어야 할 곳’을 아는 것이다. 가령, 결투에서 적의 몸, 움직임, 검, 베고 싶다는 생각 등에 마음을 두게 된다. 그러나 이는 마음을 대상에 빼앗겨 버리기 때문에 수를 읽히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마음을 두어야 할 곳은 어디에도 없다. 불교 수행에서도 배꼽이나 단전에 마음을 두는 것도 결국은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에 높은 경지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마음을 어디에도 두지 않고 천지에 가득 채우라는 다쿠앙의 말은 무심(無心)의 극치이다. 이처럼 가마타는 다쿠앙의 말을 빌려서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마음을 불교 수행과 무도 수행에서 적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가마타의 선적(禪的)인 사고방식은 아마도 젊은 시절 원각사와 고마자와대학교에서 좌선을 실참했던 경험 때문일 것이다. 제자들이 말하기를 그는 사람들을 움츠리게 할 정도로 매서운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고 회고하는데, 이는 실제 수행이 뒷받침된 학자만이 가질 수 있는 진리를 꿰뚫어 보는 안광이라고 할 수 있다.

민중에게 다가간 교육자

불교학자로서 가마타는 연구자로서 자신뿐만 아니라, 교육자로서 입장을 견지했다. 전후 서양사회의 물질문명으로 피폐해진 일본의 사상을 바로잡기 위하여 가마타는 시대적 요구에 발맞춰서 다양한 저작들을 내놓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이야기 시리즈이다. 국내에 ‘이야기’로 번역된 책의 원문은 ‘강화(講話)’이다. 예를 들어, 《대승기신론 강화(이야기)》 《화엄경 강화(이야기)》 등이 있다. 그는 자신의 전공인 중국불교를 대중들에게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서 책을 작성했다.

대중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가마타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NHK 등에서 방영하는 TV나 라디오 프로그램 등에 출연하곤 했는데, 당시의 내용을 책으로 만들어서 NHK 방송국에서 출판하기도 했다. 《생명의 탐구(いのちの探究)》 《마음을 읽다(こころをよむ)》, NHK 취재반과 오무라 지로의 사진과 함께한 《한국고사순례: 신라편》 《한국고사순례: 백제편》 등의 방송과 저술이 그 결과물이다. 평소에도 가마타는 불교를 엘리트 불교와 민중불교의 두 부류로 나눠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민중불교에서 멀어지는 순간 불교의 생명력이 사라진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한다고 믿었기에 민중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수단으로 불교 서적을 제작한 것이 아닐까 유추해 본다.

가마타는 불교와 선의 현대적인 적용에서도 많은 해답을 내놓았다. 특히 가마타는 물욕 지상주의를 타파하기 위하여 무상(無相)의 가치관을 제시하기도 했다. 내가 이룬 공덕(功德)이 얼마만큼 된다는 유상(有相) 가치관은 그 옛날 양무제가 가지고 있던 그릇된 가치관이라고 주장했다. 가마타는 유공덕, 유상의 가치관을 버리고 무상의 가치관으로 나아가야 현대의 물욕주의가 해소될 수 있음을 설파했다.

 

결어

일본 불교학계에서 가마타는 한국불교에 대한 오해를 풀고 현 상태를 정확하게 고증한 연구로 이후 연구들의 척도를 제시했고, 양국 간의 불교 연구 교류에 물꼬를 튼 연구자였다. 이시이 슈도(石井修道)가 언급한 것처럼 한국불교 연구에 대하여 이 정도로 상세한 통사(通史)를 찾을 수 없었으며, 일본 불교학계에 이바지한 유일무이한 연구라고 볼 수 있다. 한국 불교학계에서 그의 저술들은 중국불교와 한국불교를 공부한다면 한 번쯤은 읽어야 하는 개론서로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한국불교를 기존의 연구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안목으로 재정립했고, 그 과정에서 현장을 직접 보고 문헌과 비교하는 연구를 실행했다. 그 결과, 그의 연구는 신뢰도가 높은 연구로 인정받아 많은 학자들이 가마타의 연구를 기반으로 한국불교 연구를 이어 나가고 있다. 마찬가지로 중국불교 연구에서도 그의 연구는 사상사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이해하는 관점을 제공하기 때문에 많은 연구자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그는 불교와 현대의 소통 및 적용에 대한 꾸준한 모색을 다양한 저술과 활동으로 풀어냈고, 중국 불교학과 화엄학 연구자로서 중국불교사를 다양한 관점에서 통합하는 과제를 수행했다. 만년까지도 학술 활동에 매진했던 그는 2001년 5월 12일에 생을 마감했다. 그가 쓴 논문만 241편, 책은 단독 저자인 것만 94권, 공저나 편저는 30권에 달한다. 가마타는 해마다 저술을 발간했으며, 한국불교사와 중국불교사 연구의 기틀을 다져놓았다. 그 덕분에 후학들은 그의 연구를 바탕으로 더욱 깊은 불학의 세계에 매진할 수 있었다. ■

 

선림 seonlim1466@gmail.com

충남대학교 불어불문학과, 철학과 졸업. 동국대학교 선학과 석사. 석사 논문은 〈감산덕청의 선사상 연구〉이다. 현재 동국대학교 선학과 선학전공 박사과정 재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