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를 세 번이나 했었다. 무명초를 자르지는 않은 사이비였지만 산사의 팽팽함과 느슨함을 체험해 보는 쿨한 시간이었다. 1990년대 중반 송광사에서 개최하는 출가 3박 4일에 처음 참가했으니 꽤 오래된 일이 되었다. 참가를 희망하는 구체적 사유를 적어 내면 심사를 통과하는 이들만이 입학이 허용되는 엄선 과정을 거쳤었다. 그렇게 세 해를 연달아 각기 다른 산사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삼천배와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의 삼보일배를 경험했다. 물론 나는 이 용맹정진에 대오를 이탈하지는 않았지만 불성실한 탈락자였다. 부처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빌빌대는 나를 측은해하셨으리라. 덕분에 아무도 나에게 시비를 걸지는 않았다.

출가 선언을 한 나를 둘러싼 반응은 대체로 왜 그러느냐는 것이었다. 수상한 혐의를 염두에 두는 심문 형국이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지 몇 해 되지 않는 브랜드 뉴 닥터였고, 대학에 전임으로 자리 잡은 행운아가 연구실로 가지 않고 산사로 가겠다는 것에 대한 과학적인 반응일 수도 있었겠지만 왜 생뚱맞은 짓거리를 하느냐가 주조였다. 구체적으로는 무슨 말 못할 남녀상열지사나 새삼스럽게 드러난 가족사가 있는가와 같은 의문을 포함하였다. 요체는 비정상적, 비표준적, 비일상적, 비현실적, 도피적 행위로서 취급이었다. 템플스테이 등의 이름으로 다양한 산사 프로그램이 대대적으로 시행되고, 도시인들도 편리하게 참여할 수 있는 형편이 된 근래에는 이런 무지한 인상도 많이 바뀌었으리라. 이런 인상을 산출하는 일단을 제공한 우리 불교와 사회도 변했으리라.

그때 프로그램은 참선, 강의, 포교와 같은 것도 물론이지만 계곡을 흘러 어디론가 떠나며 청천벽력의 아우성을 질러서 나를 잠들지 못하고 깨어 있게 하던 물소리도 유난한 콘텐츠였다. ‘떠날 때는 말없이’라는 노래처럼 냉정하고 법조문처럼 엄혹했던 공양, 15명쯤 넘는 인원이 공양한 후에 밥그릇(?)을 씻은 물을 모은 천수통에 미세한 찌꺼기라도 있으면 함께 나누어 다시 마셔야 하던 굴욕감과 서스펜스, 깊이와 냄새를 보존하면서 먹으면 배설해야 하는 인간임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면서도 점잖던 해우소도 참신한 콘텐츠였다. 9시에 잠자리에 들고 3시에 일어나는 일상의 파괴도 도전적이었다. 참선에서 저려오는 다리를 꼬던 도반(?)들의 인내와 일탈, 화장을 하지 못함으로써 드러나던 누렇게 뜬 얼굴색의 어색함은 남녀불문이었다. 그러나 화장을 하지 않은 채 한 사흘쯤 지나니깐 오히려 자연스러워지던 얼굴에 놀라워했다. 프로그램의 진행 내내 대부분의 시간은 묵언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말없는 말(言無言)의 위력과 말의 소중함을 동시에 느끼는 경험이었다.

하산한 후에 금단의(?) 지역을 다녀온 나의 변화를 탐지하려는 지인들에게는 틀림없이 실망을 안겨 드렸겠지만 앞에서 언급한 콘텐츠를 비롯하여 몇 가지 얘기들을 했더랬다. 용맹정진의 3천 배를 인도한 우리 팀의 반장(?)이었던 스님은 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더라는 것, 모두 땀으로 범벅이 되었는데 그 이름 모를 스님은 목탁을 두드리고 염불도 하면서 삼천 배를 하였건만 자태의 시작과 끝이 동일하여 깊은 열등감을 안겨 주었다는 따위. 나중에 알게 된 것이었지만 참여한 사람들의 다양한 직업군도 이채로웠다. 양의 동서는 물론이고 끊임없이 말썽을 부리는 지연 학연 금권 권력이 그곳에선 평화롭게 공존하였다.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고 존중되어 공동체를 이루었던 셈이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스님들이 무문관의 기도로 인한 진물로 방석과 들러붙었다는 얘기는 세상에 이어지는 비밀이 풀리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온갖 황진이 자욱한 이 저잣거리가 그래도 꾸역꾸역 잘 살아가는 기운의 원천은 그런 사즉생의 기도로 인한 것이라는 것. 불교와 부처와 스님이 우리 사회를 구제하는 것이었다.

내가 좋아했던 불교 가치를 담은 글을 쓰는 어느 작가는 여러 글에서 자신이 먼저 성불한 다음에 엄마를 눈물처럼 구제하겠다고 했다. 젊을 적에 울고 싶을 때 찾아보곤 하던 글이었다. 나는 불교가 자신이든 엄마이든 사회이든 그 무엇을 구제하는 과정에서 말(言語)을 좀 더 많이 했으면 한다. 묵언의 전통을 닮아 아끼는 것은 좋지만 언어를 통해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 강조하지 않았으면 싶다. 스님들이 간화선을 통해 돈오점수든 돈오돈수든 부처가 된다는 믿음을 신뢰한다. 스님들의 치열한 올인을 이해한다. 그러나 일반 대중에게는 언어를 통해서 더 자꾸 다가가야 한다. 설사 사진의부진(辭眞意不盡)의 한계가 있더라도 그때, 그 순간, 그 조건, 그 상황, 그 맥락에서 최선으로 의미를 전달하고 공유해야 한다. 개인 자신의 구제도 축복이지만 타인과 공동체의 구제를 도모하고 맑은 지혜를 주어야 참종교로서 마땅할 것이다.

희랍을 기점으로 하는 서양학문은 말(언어)에 대해 큰 비중을 두었다. 인간의 말이 혼돈과 무질서한 카오스의 세계를 정돈과 질서의 코스모스 세계로 옮겨놓는다고 믿었다. 그래서 말은 교육의 핵심이었다. 서로 다른 다양한 사상이나 의견들이 말을 통해 공정한 경쟁을 하고 타당성과 신뢰성을 획득하고 설득력을 높임으로써 사회발전의 동력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서구 민주주의사회의  발전을 떠받쳐 온 토대이다.   

말이 소통을 통한 공동체감이 아니라 편 가르기의 분열을 가져오는 것을 보아온 우리는 말에 대한 불신이 있다. 말로 인해 멸문지화를 당하는 역사를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말의 정파적 오용과 남용이 극심한 것이다.

대조적인 말에 대한 대접과 이용을 보면서 개인과 중생을 제도하려는 불교가 평화로운 말을 통한 교류와 공감에 보다 적극적이기를 바란다. 죽은 부처가 슬피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발을 내밀어 보였듯이 불교도 부처를 닮아가는 세계를 저잣거리의 방황하는 중생들에게 말로 내밀어 보여 주는 노력을 보다 구체화했으면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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