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오천축국전》을 넘긴 왕 도사의 자전적 고백

중국 호북성(湖北省) 마성현(麻城縣) 출신 왕원록(王圓籙)이올시다. 팔자에 역마살이 끼었는지 몰라도 숙주(潚州) 순방군 병졸을 지내다가 어느 날 자리를 박차고, 나앉은 데가 바로 감숙성(甘肅省) 끝자락의 돈황(敦煌)이었습지요. 요샛말로 가방끈은 그리 길지 않았으나, 까막눈은 면했던 탓에 도교(道敎) 경전 몇 줄은 흥얼대는 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한족과 변방 이민족이 어울려 사는 이른바 화이잡거(華夷雜居)의 오아시스 돈황 바깥 동북간의 천불동 바위굴 하나를 거처로 삼게 되었고, 모두가 날더러 왕 도사(道師)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돈황으로 흘러들어온 때가 서기 1900년이었으니, 청조(淸朝) 연호로는 광서(光緖) 26년쯤의 일입니다. 서양의 여러 제국주의와 아시아의 후발 제국주의 일본 등과 맞선 의화단사건(義和團事件)이 불거져 중원이 온통 요동을 친다는 풍문이 변방까지 들리는 어수선한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천불동으로 불어닥치는 모래바람만큼이나 한 치 앞을 분간하기 난감한 시절이었지만, 나 왕원록이 천불동에 자리 잡기는 안성맞춤이나 다름없는 호기가 분명했습니다. 더구나 중국말로 도교의 교리를 지껄이고, 도장(道藏)을 읽을 줄 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번지더군요. 그래서 돈황에 사는 중국인들이 찾아와 부처님께 올리는 기도를 간청할 정도로 명성을 날리는 세월을 만났던 것입니다.

첫머리가 좀 장황했나 봅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면, 내 거처였던 바위굴이 뒷날 비밀 곳간으로 유명세를 물었던 장경동(藏經洞)과는 벽 하나 사이였다는 사실입니다. 벽이라야 바위굴 들머리를 대강 막아 임시변통으로 진흙을 바른 허술하기 이를 데 없는 가림막에 지나지 않았지요. 당대에 전하는 소문에 따르면, 11세기 무렵 하서 동쪽에서 발흥(勃興)한 탕구트 족의 서하(西夏)가 두려워 미리 굴 들머리를 틀어막은 것이 가림막 벽체였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이 벽체를 내가 고용한 아무개가 먼저 찾아냈다고 말하지만, 어디까지나 내가 부리는 사람이었던 까닭에 모든 공을 그에게 다 돌리기는 찜찜한 데가 있습니다. 어떻든 벽체를 뜯어냈을 때, 열 자가 실한 높이의 바위굴에 엄청나게 많은 경전과 고문서 더미가 얼핏 눈에 들어옵니다.
나 혼자 감당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에서, 경전 몇 권을 꾸려 돈황 현장(縣長) 왕종한(王宗瀚)에게 디밀었지요. 그로부터 세 해가 훌쩍 흐른 광서 28년인 1902년, 감숙 학태(學台)를 지낸 다음 소주(蘇州)에 눌러 사는 엽창치(葉昌熾)가 크게 관심을 두는 통에 왕종한이 움직여 장경동을 샅샅이 조사합니다. 흥분한 엽창치는 감숙  번태아문(藩台衙門)에다 장경동 문서의 가치를 알리고, 관가에서 반드시 갈무리하기를 청하기에 이릅니다. 청조의 재정이 이미 거덜난 난세였는지라, 5~6,000량이나 족히 드는 비용을 댈 재간이 없는 감숙성은 이내 포기하고 맙니다. 다만 장경동을 다시 막으라는 분부가 내려와 내가 벽돌을 다시 쌓았을 뿐입니다.
날더러 나중에 거간(巨姦)이라는 말로 매도하는 이도 더러 있었지만, 관가에서 직함도 주지 않은 고지기 노릇을 얼마큼은 해냈다고 자부합니다. 몇몇 경권(經卷)을 들고, 어렵사리 주천(酒泉)까지 달려가 안숙도(安肅道) 도태(道台)에게 보여 준 일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사냥감을 노린 승냥이 떼 모양으로 서역의 사막을 어슬렁대던 서양의 탐험대가 들이닥치면서, 탈이 나더군요.

첫 번에 맞은 양이(佯夷) 길손은 오아시스 돈황에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 1905년 10월, 고비사막을 거쳐 천불동을 들어온 아라사 지질학자 오브르체프였습지요. 이때 오브르체프가 여섯 덩이의 짐꾸러미를 라마승 혜산에게 선물하고, 경전 사본과 두루마리 그림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입소문으로 전하는 모양입니다. 이 라마승을 나 왕원록으로 지목하는 모양이지만, 오브르체프를 바위굴로 들여놓지 않은 채 장경동 비밀을 지키는 데 온갖 경계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장경동 진보(珍宝)가 그의 손에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독일인 알베르트 폰 르콕이 1905년 카슈카르에서 돈황 여행을 접었다는 후문이 들리더군요. 그가 길을 재촉했더라면, 아라사의 오브르체프보다 한 달은 더 먼저 돈황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두 해가 흘러간 1907년 3월, 돈황을 찾은 영국인 고고학자 오렐 스타인이 두 번째 방문객이 되었지요. 내가 잠시 천불동을 비웠던 터라, 안내인이 내 거처에 든 고문서 한 권을 꺼내 그에게 보여 주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를 정작 만나고는 내가 마음을 빼앗겼는데, 그 까닭은 천축(天竺)을 여행한 당나라 현장삼장(玄奘三藏)을 우러른다는 말 때문이었지요. 엄청 감동한 나머지 내가 주머닛돈을 털어 돈황의 어떤 환쟁이를 시켜 그린 《서유기》의 사오정과 손오공 그림을 스타인에게 보일 정도였으니까요.

그와의 줄다리기는 계속되었지만, 스타인에게 매료되어 책 한 권을 먼저 건넨 적도 있습니다. 우연하게도 《대당삼장현장봉소역(大唐三藏玄奘奉韶譯》이어서, 둘 사이의 신뢰는 더욱 깊어졌지요. 이런저런 인연에 따라 한문 경전 50포대와 티베트 경전 5포대를 말발굽처럼 생긴 마제은(馬蹄銀)과 바꿉니다. 그리고 신중하고도 잔잔한 스타인의 인품이 마음에 들어 고문서 20포대를 덤으로 더 건네어, 그가 중국을 떠날 때는 고사본 24개 상자와 미술품 5개 상자에 이르는 짐을 영국으로 보냅니다.

그러나 1908년 2월에 들어 뒤늦게 천불동을 찾은 불란서 중앙아시아 조사단의 폴 펠리오와 견주면, 스타인은 한 수 아래였습니다. 그는 카슈카르 주변과 신강(新疆) 우루무치에서 돈황의 고문서 소식을 들었고, 천불동에서 나온 당나라의 《법화경》 사본 한 권을 벌써 손에 넣었더군요. 그래서 돈황 사정에 비교적 정통했던 것 같습니다. 더구나 중국말이 능통할 뿐 아니라 글을 읽을 정도여서 바위굴에 직접 들어와 조사하도록 특권을 베풀었습니다. 아라사의 오브르체프에게는 바위굴을 아예 가르쳐 주지 않았고, 안으로 들여놓지도 않았던 영국의 스타인과는 사뭇 다른 융숭한 대접을 내가 자청했던 것입니다.

그는 희미한 촛불 한 가닥에 매달렸지만, 눈은 아주 밝은 사람이었습니다. 미동의 자세로 꼬박 하루를 조사하고, 산더미처럼 쌓인 문서의 가치를 알아차릴 만큼 혜안(慧眼)을 지닌 학자가 분명했습니다. 대강 6~10세기에 이르는 시절의 문서라는 사실과 함께 서하의 침입으로부터 이를 지키기 위해 한자리에 넣어, 들머리를 틀어막은 것으로 추측한 이도 펠리오였던 것입니다. 모든 자료를 한꺼번에 다 보겠다는 요량을 댄 그는 20여 일 만에 훑어보았던 모양입니다. 서역 여러 지역과 중국의 불전(佛典) 모두를 따로 나눈 다음 알짜 5,000여 점을 다시 간추린 펠리오는 5월 30일 돈황을 떠납니다. 그가 떠난 뒤 켕기는 구석이 있던 나는 돈황을 한 바퀴 돌아보았습지요. 그런데 내가 여태껏 벌인 일을 아무도 모르더란 말입니다. 신해혁명(辛亥革命)을 태동하는 폭풍전야의 청조에게 그런 여력이 없었던지라, 그냥 어영부영 넘어가게 되었지요.

이들 진보의 고문서 속에 《왕오천축국전》이 끼었다는 소문은 펠리오가 돈황을 떠난 다음해에 어렴풋 들었습니다. 장경동 전적(典籍)을 가져간 펠리오가 이 해 중국을 다시 들렀다지만,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내가 그에게 500냥을 받았다는 소문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여섯 해 전 감숙성이 떠안기 어렵다던 금액과 맞먹는 돈입니다. 이렇듯 큰 돈이 오갔으니, 나 왕원록은 돈황 명사산(鳴沙山) 모래톱에 목이 묻혀야 마땅했을 위인이었나 봅니다. 언제 적 왕원록이 제 주제도 모르고,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이느냐고 따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가르치는 환생(還生)을 상기하면, 보리심에 따라 성불한다는 이치와 조금은 맞물리지 않을까요.

어떻든 올해 경인년, 한국이 불란서로부터 잠시 빌린 《왕오천축국전》의 귀환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옛날 신라의 혜초(惠超)가 머나먼 서역의 천축국 구도여행을 마치고, 서기 727년 중국에서 쓴 저술이 1,287년 만에 고국으로 온다는 사실에 가슴이 뿌듯합니다. 더구나 이 저술은 내가 우러르는 당나라 현장삼장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와 버금한다니, 더욱 그렇습니다. 바로 나무 관세음보살이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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