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좌불교, 무시할 것인가 포용할 것인가

1. 머리말

이도흠 교수

틱낫한(Thích Nhất Hạnh) 스님! 1926년 10월 11일 작은 나라 베트남에서 태어나 달라이 라마와 함께 세계 2대 생불로 추앙받는 이, 베트남전 반대와 평화운동을 주도하여 1967년 노벨상 후보로도 오른 이, 베트남의 임제종을 대표하는 스님이자, 상즉종(相卽宗, Order of Inter-being)의 창시자, 100권에 이르는 저서를 지은 시인이자 사상가로 그 저서 가운데 상당수가 미국과 유럽을 비롯하여 전 세계에서 읽히고, 프랑스의 자두마을(Plum Village), 미국의 단풍림승원(Maple Forest Mo-nastery)과 청산법원(Green Mountain Dharma Center), 녹야원 승원(Deer Park Monastery)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음은 물론, 틱낫한센터가 다른 종교에는 철옹성인 이스라엘에도 있는 사상가이자 명상운동가이다.

2010년 5월 28일 현재 틱낫한으로 구글에 검색하면 10,800,000건이 뜬다. 그의 책은 적지 않은 종이 미국과 서양에서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고 또 스테디셀러다. 그의 음성과 노래와 법문이 담긴 오디오와 시디도 만만치 않게 팔리며, 그의 글은 서양의 대안문명, 명상, 평화를 추구하는 잡지에 즐겨 인용된다. 심지어 증권투자를 설명하는 글에도 그의 글이 인용되고 응용되기도 한다.

그는 달라이 라마와 함께 서양의 대중과 지식인이 가장 존경하는 동양인이다. 자두마을과 승원엔 연일 수백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방문객과 수행자가 찾아들고, 여기서 명상과 수행을 접한 이들, 그의 글을 읽은 이들은 물질보다 마음의 평안을 추구하는 삶으로, 욕망을 증대하는 것보다 자발적으로 절제하는 삶으로, 갈등과 싸움보다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삶으로 바꾸고 있다. 소국의 틱낫한 스님이 서양인에게 이리 깊은 감동을 주고 영향력을 미치는 비결은 무엇일까? 특히 그는 임제종의 법맥을 계승한 자이면서 초기경전에 근거한 마음챙김 수행을 추구하는 자다. 이런 그에게서 한국 불교가 배울 점은 무엇인가.


2. 틱낫한의 사상과 수행법

1) 서로 존재(inter-being)의 연기론과 보살행

스님의 사상을 대표하는 핵심 개념은 스님이 창시하여 이끄는 불교를 상즉종(相卽宗, Order of Inter-being)이라 할 정도로 ‘서로 존재(inter-being)’라는 것이다. 이는 간단히 말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상호 침투하면서 다른 것들과 공생을 바탕으로 한다는 의미다.

지금 한 탯줄은 당신을 태양과 연결해 주고, 다른 탯줄은 하늘의 구름과 맺어주고 있죠. 구름이 거기 존재하지 않는다면, 비도, 마실 물도 없죠. 구름이 없다면, 우유도, 차도, 커피도, 아이스크림도,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못하죠. 탯줄은 당신을 강과 맺어 주고, 다시 숲과도 이어 줍니다. 계속 명상한다면, 당신이 이 모든 사람들, 그리고 우주의 삼라만상과 관계를 맺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당신의 삶은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뿐만 아니라 식물과 광물과 공기와 물과 대지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틱낫한 스님은 연기론을 삼라만상의 상생(相生)과 연결시켜 설명한다. 우주의 삼라만상은 서로 관련을 맺고 있으면서 서로 조건이 된다. 햇빛, 태양, 토양, 씨앗, 비료, 농부 등 모든 것이 꽃의 개화에 관계한다. 어느 하나라도 없거나 부족하면 꽃은 피지 않는다. 세상에 별개의 사물이란 없다. 모든 것은 우주의 상호의존적인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는 것이다. 우주의 삼라만상은 서로 관련을 맺고 있고 서로 조건이 된다. 이렇듯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른 것들과의 상생을 바탕으로 한다. 우리는 주변의 모든 생명체뿐만 아니라 식물과 광물과 공기와 물과 지구에 의존하면서 서로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틱낫한은 화엄 연기론을 바탕으로 연기의 진리를 좀 더 역동적으로 전개한다.

자, 옥수수 낟알을 심읍시다. 일곱 날이 지나면 싹이 트고 옥수숫대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옥수숫대가 우리의 키만큼 높이 자란 후 심었던 낟알을 볼 수 없죠. 하지만, 낟알이 죽었다고 말하지는 마세요.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눈으로 보면, 옥수숫대에서 아직 옥수수 씨를 볼 수 있습니다. 옥수숫대는 미래를 지향하는 낟알의 이어진 몸이며, 낟알은 과거를 지향하는 옥수숫대의 이어진 몸입니다. 낟알이 미래를 향해 자신을 던지면 낟알이 사라지면서 그 몸에서 옥수숫대가 자라고, 옥수숫대는 낟알에 담긴 유전자 정보대로 키가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당분이 십 퍼센트 담겨 있다면 그 성분대로 자라고 있으니 옥수숫대에 낟알이 담겨 있습니다. 둘은 같은 사물이 아니지만, 서로 완전히 다르다며 떨어트려 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옥수숫대와 씨의 관계처럼, 당신과 엄마 또한 완전히 같은 사람은 아니지만, 서로 전혀 다른 인간 또한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서로 의존하고 조건이 되면서 관계를 맺는 연기의 진리입니다. 어떤 사람도 홀로 존재하지 못합니다. 존재하려면, 우리는 서로 깊은 관계를 맺고 서로 보듬어 주는 ‘서로 존재’이어야 합니다.

이 대목을 보면 원효가 《금강삼매경론》에서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연기론을 씨와 열매의 비유로 설명한 것과 유사하다. 낟알과 옥수숫대는 하나가 아니라 별개의 사물이다[不一]. 하지만, 낟알이 찰옥수수면 찰옥수수가 열리는 옥수숫대가 자라고, 옥수숫대가 메옥수수이면 그 유전자를 가진 낟알이 나온다. 그러니, 둘도 아니다[不二]. 낟알은 옥수숫대 없이 존재하지 못하고, 옥수숫대 또한 낟알 없이 존재하지 못하니 공(空)하다. 하지만, 낟알이 땅에 떨어져 자신을 소멸시키고자 하면, 거기서 싹이 나고 옥수숫대가 자란다. 겉으로 보면 옥수숫대에 낟알이 없는 것 같지만 낟알에 담긴 유전자 정보는 그대로 존재하여 옥수숫대를 형성하니, 옥수숫대 안에 옥수수 씨가 담겨 있는 것이다. 옥수숫대는 미래를 지향하는 낟알의 연속체이며, 낟알은 과거를 지향하는 옥수숫대의 연속체이다. 둘은 같은 사물이 아니지만, 서로 완전히 다르다고 분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존재는 상즉상입(相卽相入)한다.

우리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뭇생명, 사람과 우주 삼라만상의 관계가 이와 같다. 이것이 바로 서로 의존하고 조건이 되면서 관계를 맺고 상즉상입하는 연기의 진리다. 어떤 사람도 홀로 존재하지 못한다. 존재하려면, 우리는 ‘서로 존재(inter-being)’이어야 한다. 이 사람도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나도 저 사람에 영향을 미친다. 서로가 서로 안에 들어와 있다. 저 사람이 웃으면 나의 근육도 긴장을 푼다. 내가 미소를 지으면 저 사람의 근육도 긴장을 풀며 엔돌핀이 몸 안에 돈다. 이처럼 인간은 다른 사람들, 우주 삼라만상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으면서 서로가 상즉상입하는 ‘서로 존재’다. 이처럼 서양의 현상학이나 실존주의 철학에서 말하는 존재와 차이를 갖는, 다른 존재들과 인드라망처럼 관련을 맺고 또 서로 조건이 되는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존재가 바로 ‘서로 존재’이다.

모든 것이 연기되어 있고 무상하므로 무아(無我)다. 하지만, 씨가 자신을 소멸시켜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 것에서 보듯, 자신을 부정하여 다른 것을 존재하게 한다. 이런 상호 관련과 조건 속에서 가유(假有)로서 찰나의 순간 존재하는 것은 있다. 이처럼 연기와 무상을 인정하면서도, 가유로서 존재하며 다른 존재와 연관을 맺고 스스로는 공하지만 다른 것과 상생, 상즉상입의 관계 속에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을 틱낫한은 ‘서로 존재’로 명명한다.

서로 존재는 스스로는 공하지만, 다른 것과 관련 속에서만 존재를 드러내기에 다른 것과 상생과 상즉상입을 전제로 한다. 싸우는 두 사람이 서로 이복형제라는 사실을 알면 싸움을 중지할 것이다. 서로 미소 짓는 일이 서로의 몸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면 미소를 짓게 된다. 그러기에 연기론은 보살행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서로 존재이기에 나의 미소는 상대방을 미소 짓게 하고, 나는 다시 그 미소를 보면서 행복해진다. 내가 선의 씨앗에 물을 가려 주어 이를 꽃으로 피어나게 하면, 그도 또한 선의 씨앗에 물을 주어 꽃으로 피우고 어느새 세상은 평화와 자비, 형제애, 사랑, 비폭력의 아름다운 꽃이 흐드러진 꽃밭이 된다.

2) 불성의 꽃밭론

틱낫한 스님은 인간의 마음을 밭에 비유한 불교식 비유와 일체 중생에 불성(佛性)이 있다는 대승의 불교관에 따라 불성론을 설명한다. 그는 역사상의 부처님과 살아 있는 부처님, 곧 궁극적인 부처님을 구분한다.

역사상의 부처님은 오늘날 인도와 네팔 국경에서 가까운 카필라 성에서 태어났다. 결혼을 했고 아이도 하나 두었다. 출가해 여러 가지 명상을 수행하다가 득도했다. 80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가르침을 전했다.

살아 있는 부처님은 궁극적인 실재의 부처님으로서 모든 사상이나 관념을 넘어서는 분이다. 우리가 언제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분이다. 살아 있는 부처님은 카필라 성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쿠시나가르에서 죽지도 않았다.

역사상의 부처님은 역사적으로 실재한 고타마 싯다르타이며, 살아있는 부처님은 궁극적인 실재이자, 살아서 우리 안에 늘 내재한 분이라 우리가 언제나 가까이 다가가서 만날 수 있다고 보았다. 틱낫한은 이를 《법화경》 〈신해품〉의 우화를 통해 설명한다. 집을 떠나 50년이나 가난하게 살던 아들이 어느 날 막일꾼 자리를 얻기 위해 왕실 가족까지 찾을 정도로 부유한 상인의 집에 간다. 그 상인이 바로 그의 아버지였는데 아들은 몰라보지만 아버지는 한눈에 알아본다. 아버지는 아들이 충격을 받을까 봐 아들에게 모른 체하고 낮은 일자리에서 서서히 높은 일자리를 주며 돌본다. 죽을 때가 돼서야 그는 그가 친아들임을 밝힌다. 이를 두고 틱낫한은 “이 대목은 부처가 《법화경》을 통해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으므로 누구나 부처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가르쳐주는 순간과 같다. 그리고 빈궁한 아들의 마음 상태는 부처의 경지에 이르는 길에서 자신도 부처의 자식이며 보살이라는 가르침을 듣고, 이를 인정하는 성문의 마음 상태와 흡사하다.”고 지적한다.   

틱낫한은 철저하게 ‘본래성불(本來成佛)’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깨달음에 이르렀느냐고, 부처에 오른 것이 아니냐고 묻는 사람에게 “당신은 부처가 아닙니까?”라고 되묻는다고 한다.  

그럼 모든 인간에게 불성이 있는데 왜 악이 행해지는가. 그는 이 문제를 선과 악의 씨앗과 꽃밭의 비유로 설명한다. 인간이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지만 악이 행해지는 것은 인간의 마음밭에 선의 씨앗도 있고 악의 씨앗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존재는 어떤 때 선의 씨앗이 싹을 틔우게 하지만, 어떤 때는 탐욕과 어리석음과 분노로 악의 씨앗을 싹트게도 한다. 행복, 사랑, 자비, 평화, 형제애, 평등, 비폭력의 씨앗에 물을 주고 폭력, 두려움, 증오의 나쁜 씨앗에는 물을 주지 않으면, 선의 씨앗이 싹을 틔워 꽃으로 피어나 행복과 평화의 꽃밭을 만든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가려서 물 주기 수행이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밭에 행복, 사랑, 자비, 평화, 형제애, 평등, 비폭력 등의 긍정의 씨앗도 있고 증오, 폭력, 두려움, 화, 집착 등의 악의 씨앗도 있으므로 긍정의 씨앗에 물을 주어 싹을 틔우고 꽃으로 피어나게 하고 악의 씨앗엔 물을 주지 않아 자라지 못하게 하는 수행을 뜻한다.

꽃밭에 어떤 식물이 잘 자라지 못할 때 그 식물을 나무라는 이들은 없다. 물이나 영양, 햇빛이 부족한가, 땅이 좋지 않은가 살핀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나쁜 일을 행하거나 쉽게 화를 내는 것은 선의 씨앗에 물을 주는 것을 게을리하였기 때문이지, 그 사람의 탓이 아니다. 어떤 악한 사람이라도 선의 씨앗에 물을 주고 악의 씨앗엔 물을 주지 않는, 가려서 물 주기 수행을 하면 좋은 사람으로 거듭난다. 하지만 사람들은 물 주기를 곧잘 잊어버리거나, 생각이 나도 잘 실천하지 않는다. 때로는 악의 씨앗에 물을 주어 분노와 증오와 화를 키운다. 

이처럼 틱낫한은 본래성불의 입장에서 수행과 선을 결합시켜 불성의 꽃밭론을 전개한다. 누구나 불성이 내재되어 있으며, 수행을 통해 그를 만날 수 있으며 선이라는 것은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 모든 현상을 깊은 지혜로써 깨달아 바로 불성을 보는 것이다. 그 순간 그곳은 선과 깨달음의 꽃밭이 된다. 그에게 부처와 깨달음과 선은 하나다.
 
3) 지금 이 순간의 깨달음

틱낫한 스님의 사상은 ‘지금 여기에서’ 출발한다. 스님은 과거와 미래에 얽매이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여 이 순간의 경이에 만족하며 마음의 평화를 찾으라고 말한다.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몸과 삶에 대해 마음을 가다듬어 깨닫는 순간, 우리는 ‘진정한 우리 집’에 있는 것입니다. 몇몇 사람은 부모님의 집에 살면서 집처럼 편안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집 밖의 세상에서 편안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에게는 엄마 뱃속에 있는 ‘자식들의 궁궐’처럼 진실하고 청정한 집이 있습니다. 비록 당신이 어떤 지역, 어떤 나라, 어떤 지정학적 지점, 어떤 문화적 집단, 어떤 인종 집단에 속하지 않는다고 느낄지라도, 우리에게는 진정한 집이 있습니다. 엄마의 몸속에 있을 때 집과 같은 평안함을 느꼈죠. 아마 당신은 평화롭고 안전한 그곳으로 돌아가기를 열망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의 몸 안에도 그 집이 있으며, 그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당신의 진정한 집은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그 집은 시간이나 공간, 국적이나 인종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당신의 진정한 집은 추상적인 이데아가 아니라 당신이 언제든 만질 수 있고 매 순간 살 수 있는 곳입니다. 당신이 마음챙김 수행과 참선을 하여 붓다의 가피를 받으면, 바로 그 순간 당신의 몸과 마음은 완벽한 평안함으로 충만해져 진정한 집에 이르는 것입니다. 누구도 당신에게서 그 집을 앗아갈 수 없습니다. 나라를 점령하고 당신을 감옥에 가둘 수는 있지만, 당신의 진정한 집과 자유를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과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우리 앞에 닥치지 않았다. 우리는 오직 현재를 살아간다.” 과거가 이미 없는데, 과거에 얽매인 이들은 현재의 경이와 즐거움을 모른다. 그들에게 과거는 감옥이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는데, 미래에 사로잡힌 이들은 미래의 승진과 출세, 혹은 내일에 대한 두려움에 포로가 되어 지금 이 순간의 아름다움을 즐기지 못한다.

우리가 찾고 있는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에 있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우리는 이런 경이를 만날 수 없다. 내일로 미루는 자, 과거에 묶여있는 이들은 지금 내 앞에 펼쳐지는 현재의 아름다움과 경이를 만나지 못한 채 지나친다. 오직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최고의 경이로움과 행복과 만날 수 있다.

집에 가서 깨달음의 숨을 쉬면, 몸과 마음은 아주 빠르게 함께 하나가 됩니다. 자, 들숨을 쉬면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들숨에만 정신을 집중합니다. 들숨에 자신의 백 퍼센트를 투여하여 집중합니다. 당신은 곧 들숨이 됩니다. 들숨에 집중하며 참선을 하면 어느 순간에 몸과 마음은 하나가 됩니다. 바로 그 순간 당신은 완전히 살아 있고 전적으로 참여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완벽한 극락인 엄마의 자궁 속으로 돌아가려고 더 이상 열망하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은 이미 바로 거기, 당신의 집에 다다른 것입니다.

숨을 들이쉬면서 마음에는 평화를 담는다. 숨을 내쉬면서, 얼굴에 미소를 짓는다. 그러면  나는 내가 살아 숨 쉬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경이로운 순간임을 느낀다. 숨을 쉬면서 능선 위로 이어진 푸른 하늘, 초록빛으로 반짝이는 봄날의 숲, 비 내린 뒤 물안개에 잠긴 시냇가, 단풍이 곱게 든 사이로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가을 저녁의 오솔길, 눈이 내려 온 들판이 은세계로 변한 위로 불쑥 솟아 있는 두 그루 소나무, 그리고 계절에 관계없이 동네 마당이나 아파트의 놀이터에서 해맑게 웃으며 뛰어노는 아이들을 떠올린다. 멈춰 서서 조금 깊게만 바라보면 그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에 절로 숨을 깊이 쉬게 되고, 절로 얼굴 가득 미소가 번지는 이 순간이다. 미소를 짓는 순간 온 얼굴의 힘살들은 긴장을 풀고 엔돌핀이 돌며, 온몸에 따스한 에너지가 감돈다. 이 순간 나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남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불성이다. 우리 얼굴을 본 이들 또한 미소를 짓는다. 그 순간 그의 마음밭에 있는 선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으로 피어난다. 이것이 보살행이다.

틱낫한 스님이 깨달은 화두는 “나는 도착하였다. 나는 집에 있다.(I have arrived. I am home.)”이다. ‘집’의 의미는 ‘깨달음, 열반, 극락’ 등과 통하며 ‘자궁’과도 통한다. 숨쉬기 명상, 걷기 명상, 품어 안아 주기 명상 등 마음챙김 수행의 궁극 목적은 자궁이나 집과 같이 모든 고통을 없애고 ‘지금 여기에서’ 마음이 지극히 평안한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그의 글을 읽노라면, “고향의 집안일 날로 황량해 가고/ 나그네 속세에서 갈 길 멀어라/ 마음 따라 눈 돌려 사알짝 보면/ 그 발밑 서 있는 곳 바로 내 고향(古園家業日荒凉/ 遊子迷津去路長/ 若向箇中廻眼覰/ 元來脚下是吾鄕”이란 고려 말 선승 충지(冲止, 1226~1292)의 선시가 떠오른다.

유리창의 티끌만 지우면 청정한 하늘이 드러나듯, 내 안에 불성이 있으니 마음의 티끌만 없애 버리고 미소를 지으면, 내 안의 부처가 드러난다. 그러니 내 몸이 곧 부처요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는 이곳이 바로 집이요, 극락이다.

4) 위빠사나와 선을 결합한 수행법

틱낫한 스님은 우리나라에 왔을 때 “우리 승가는 임제종의 법맥을 잇고 있고, 저는 임제종 41대이며, 제자들은 42대로 선불교 전통과 맞닿아 있다.”고 하였다. 그가 가장 애독하는 경전은 《법화경》이다. 하지만, 그의 수행법은 철저히 빠알리 경전에 입각한 것이다. 그의 수행법은 팔리정전(巴利正典) 중부(中部 Majjhima Nikaya) 부단품(不斷品 Anupada-Vagga)의 한 경전으로 몸에 관한 명상과 수련에 대한 경전인 《신행념경(身行念經, Kayagatasati Sutta)》, 네 가지 거대한 명상에 관한 법문, 즉 몸(身)·느낌(受)·마음(心)·대상(法)에 대한 마음챙김 명상을 다룬 장부(長部 Digha Nikaya), 《대품(大品 Maha-Vagga)》 《대념처경(大念處經, Mahasatipatthana Sutta)》에 바탕을 두고 있다.

‘몸 속의 몸에 대한 명상’인 《신행념경(身行念經 Kayagatasati Sutta)》에서 붓다는 몸의 각 부분과 전신에 담겨 있는 긴장을 푸는 수련 방법을 얘기합니다. 편안하게 몸을 눕히고 엑스레이 촬영기가 지나가듯 전신을 죽 훑어본 다음 신체의 각 부분에 집중하세요. 머리에서 시작하여 발끝에서 마치세요. “숨을 들이쉬면서 내 머리를 생각합니다. 숨을 내쉬면서 머리를 향해 미소를 보냅니다.”라고 말해 보세요. 계속해서 나머지 몸도 그리 해 보세요. 봄날에 농부가 가을의 풍요로운 수확을 꿈꾸며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종자를 바라보듯, 엑스선이 아니라 마음챙김 수행의 빛으로 몸을 바라보세요. 더도 말고 십오 분만 마음챙김 수행을 하여 그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로 몸을 천천히 바라보세요.

충분히 깨달은 마음으로 몸의 각 부분을 인식하고서 마음챙김 수행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로 몸을 살며시 얼싸안으세요. 그러면 몸의 각 부분은 긴장을 풀고 평안해집니다.

미소야말로 몸을 가장 평안하게 하는 방편입니다. 엄마의 뱃속에서 지은 첫 미소는 완벽하게 평안한 미소였습니다. 얼굴엔 수많은 힘살이 있습니다. 화를 내거나 두려워하면 힘살이 긴장을 합니다. 하지만 들숨을 쉬며 얼굴의 힘살들을 생각하고 날숨을 쉬며 그 힘살들에게 미소를 짓는다면, 얼굴의 힘살들은 긴장을 풀어버릴 것입니다. 들숨과 날숨과 더불어 얼굴이 바뀝니다. 한 번 짓는 미소가 기적을 불러옵니다.

《신행념경》에서 붓다는 몸 안에 있는 자연의 네 원소를 깨달으라고 하였습니다. 자궁 속에서 물, 불, 공기, 흙은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태아가 자궁의 양수 속에서 쉴 때 엄마는 산소와 영양분을 보내 자궁의 균형을 유지합니다. 태어난 후에 네 원소 사이의 균형이 잘 이루어지면 건강하죠. 하지만 이 균형을 잃으면, 우리의 몸은 온기를 잃고 제대로 숨을 쉬는 데도 지장을 받습니다. 때때로 명상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어 숨을 쉬면, 네 원소가 자연스럽게 다시 균형을 되찾습니다. 

붓다는 몸의 위치와 행위도 깨달으라고 하였습니다. 좌선을 할 때, 무엇보다 먼저 자신이 ‘앉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고요함과 굳셈과 평안함을 이루고 유지할 수 있는 방식으로 앉습니다. 앉건, 걷건, 서건, 눕건, 매 순간 우리는 몸의 위치를 인지할 수 있습니다. 일어나건, 몸을 숙이건, 웃옷을 입건,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인식합니다. 이런 인식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몸과 삶에 대해 마음을 가다듬어 깨닫는 순간, 우리는 ‘진정한 우리 집’에 있는 것입니다.

틱낫한의 입장에서 볼 때 수행이란 현재를 충만히 사는 것이다. 마음챙김(mindfulness)은 온전히 깨어 있으면서 삶의 매 순간을 깊이 있게 사는 것이다. 마음챙김 수행은 밥을 먹든, 걸어가든, 참선을 하든 마음을 집중하여 숨을 쉬면서 깨어 있는 마음으로 지금 이 순간의 즐거움과 기쁨을 자각하며 그를 행하는 수행법이다. ‘지금 여기에서’ 현재의 순간에 자신의 모든 것을 투여하여, 하나하나에 대해 깊이 음미하여 내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타인, 또는 세계와 조화와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한 잔의 물을 마실 때도 우리는 깨어 있는 마음으로 마시거나 다른 생각을 하며 마실 수 있다. 깨어 있는 마음으로 물을 마실 때, 나는 진정한 존재가 된다. 명상은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일을 자각하는 것이다. 자신의 몸 안에서, 느낌 안에서, 마음 안에서, 그리고 이 세계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깨닫는 것이다.

그의 수행법은 몸과 마음 자체, 또 그 변화와 움직임을 관찰한다는 점에서는 위빠사나 수행과 같지만, 지금 여기에서 자연이든, 사람이든 모든 대상과 철저히 하나가 된다는 점은 선과 같다. 초기경전에 입각했지만 임제종의 생활선풍이 섞여 있는 것이 그의 수행법의 요체다. 예를 들어, 위빠사나가 발을 옮길 때마다 하나하나의 동작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데 반하여, 틱낫한의 걷기 명상은 걸으면서 꽃과 나무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그를 가슴에 품으면서 마음에 평안함을 갖는 데 더 초점을 둔다.

일상이 바로 도(道)다. 앉고, 걷고, 먹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이 앉고, 걷고, 먹지 않는가?”라고 묻는다. 깨달음이란 앉아 있을 때 앉아 있음을, 걸을 때 걷고 있음을, 먹을 때 먹고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앉아 있으며 앉아 있음의 즐거움을 알고, 걸을 때 걷는다는 것에 기뻐하고, 먹을 때 먹음의 행복에 환희심을 내는 것이다. 한 잔의 물을 마실 때도 저 구름이 비를 내리고 냇물이 되어 흐르고 어느 나무가 품어 땅에 스미어 있다가 샘으로 솟아 내 몸으로 들어옴을 안다. 저 구름이 없었다면, 냇물이 없고 숲이 없고 땅이 없었다면 저 물이 없음을 인식한다. 그 물이 내 몸으로 들어가 마른 몸을 적시고, 물에 담긴 미네랄과 산소가 온몸의 세포에 얼마나 강한 활력을 줄 것인가 생각하며 기뻐한다. 그리 에너지를 되찾은 몸이 저 땅과 사람을 위하여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더욱 환희심에 잠긴다. 그 순간 물은 내 몸이 된다. 물과 내 몸과 마음은 100퍼센트 하나가 된다. 내가 100퍼센트 나 자신이기 때문에 물 또한 내게 스스로의 모습을 100퍼센트 드러낸다. 따라서 나와 물이 둘 다 진정한 존재가 되고, 물을 마시는 순간 삶이 그곳에 참으로 존재하게 된다.

걷든, 앉든 숨을 쉬면서 명상에 잠기고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경지, 지금 여기 이 순간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숨을 들이쉬면서 내 몸을 바라보며 마음에 평화를 담는다. 숨을 내쉬면서 온몸의 힘살들의 긴장을 풀며 얼굴에 미소를 짓는다. 이 순간 우리는 느낀다.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됨을, 내가 살아 숨 쉬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경이로운 순간임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깨어 있는 마음으로 걸으면,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이 곧 극락이 된다. 숨을 들이쉬면서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낀다. 내 조상들과 부모님과 세상의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걷고 있음을 실제 현실처럼 자각한다. 자각하는 순간 진리의 비가 우리 잠재의식의 깊은 곳에 있는 선의 씨앗을 흠뻑 적신다. 그리하여 내일 다시 걷거나 숲의 아름다움에 취해 있거나, 출근을 하여 잠시 창밖으로 하늘을 쳐다보는 순간, 그 씨앗에 싹이 돋아날 것이다. 타인을 사랑하고 배려하고 그와 공존하려는 마음이 꽃처럼 피어날 것이다. 이 순간이 깨닫는 바로 그 순간이며 발을 디디고 있는 그곳이 바로 정토다. 틱낫한에게 명상과 선과 정토는 하나다.


3. 틱낫한이 서양에 영향을 미친 까닭

틱낫한에 대해 비판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는 서양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으며, 다른 스님들이 소신공양을 하고 처형되거나 수용소에 갇힐 때 홀로 프랑스로 갔다. 그의 사상도 쉽고 명료하지만, 심오함은 조금 떨어지며 그만의 독창적인 점은 부족하다. 책도 내용이 많이 겹친다. 하지만, 그의 불교사상이 서양인에게 가장 많은 공감을 주고, 또 서양인의 일상에 명상과 수행을 가져다주고, 그들이 마음의 평안과 자비를 추구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데 가장 깊은 영향을 미친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족적이다. 그의 책은 쉽고 평이하게 읽히지만, 마치 잘 쓴 선시처럼 진여에 다가간 자만이 낼 수 있는 내공이 느껴져 곱씹으면 씹을수록 깊이 있는 울림이 있다. 《법화경》이든 《금강경》이든 핵심을 간파하여 이를 쉽게 전달하는 것이 그의 특징이기도 한다.

틱낫한이 서양인에게 깊은 감동을 준 까닭은 개인의 능력과 함께 시대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이 작용하였다. 무명의 승려를 전 세계적인 인물로 만든 것은 스승 틱꽝득(Thích Quảng Đức, 釋廣德, 1897∼1963) 스님의 소신공양이다. 그는 종교의 자유와 후에시에서 학살당한 가족에게 정당한 보상을 해 줄 것을 요구하면서 1963년 6월 11일 사이공의 미국대사관 앞에서 소신공양하였다. 이것이 나중에 퓰리처상을 받은 말콤 브라운의 사진을 통해 서양에 알려졌다. 화염 속에서도 전혀 표정의 일그러짐 없이 결가부좌를 흩트리지 않은 채 조용히 죽음에 이르는 의젓한 모습은 많은 충격을 주었다. 서양인이 이를 자살과 유사한 것으로 생각하자 틱낫한 스님은 마틴 루서 킹 목사에게 편지를 쓴다.

편지 속에서 틱낫한은 “1963년 베트남 스님들의 소신공양은 서구 기독교의 도덕 관념이 이해하는 것과는 아무래도 좀 다릅니다. 언론들은 그때 자살이라고 했지만 그러나 그 본질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저항 행위도 아닙니다. 분신 전에 남긴 유서에서 그 스님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압제자들의 마음에 경종을 울리고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베트남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하여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틱낫한은 ‘현실참여불교재단’을 설립해 베트남 청년불자들을 모으는 한편 불교의 자비정신을 통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베트남 농촌사회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후 틱낫한은 불교평화연맹(Buddhist Peace Fellowship, 美)을 방문해 베트남 평화운동을 국제적인 운동으로 발전시켰고, 이를 계기로 1967년 노벨평화상 후보자로 추천됐다.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는 1967년도 노벨평화상 후보자로 틱낫한을 추천하며 “베트남의 역사는 외세와 타락한 부자들의 착취로 가득하며, 지금도 베트남인은 전쟁과 압제로 인하여 가혹하게 억압받고 헐벗고 굶주리고 있습니다. 틱낫한 스님은 베트남인들에게 이 같은 악몽에서 벗어나 합리적으로 통치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는 전 세계 이곳저곳을 다니며 정치가, 종교지도자, 학자와 작가들을 만나 평화사상을 전파하고 지지를 끌어냈습니다. 그의 평화사상은 모든 종교가 서로 대화하고 세계인이 형제애와 인류애를 가지고 만나는 데 중요한 기념비를 세울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후 틱낫한은 반전평화운동을 전개하는 지도자로 나서고, 미국의 히피와 68혁명세대가 이에 동참하며, 이들 중 상당수가 불교에 심취하게 된다. 이들에게 명상과 마음챙김 수행과 평화의 메시지는 아주 밝고도 분명한 빛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틱낫한은 서양인에게 불교의 자비와 사랑을 바탕으로 한 반전평화운동의 현자로 부각된다.

또 하나는 대안의 삶의 추구 경향이다. 서양은 근대화와 산업화로 물질문명의 풍요를 이루었으나 소외의 심화, 불안과 고독의 일상화 등 내면의 빈곤을 겪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 소외와 고독, 불안을 극복하고 마음의 평안을 이루는 삶, 빠르고 충만한 삶에서 느리고 여백이 많은 삶을 지향하게 되었다. 이런 삶을 지향하는 이들 중 상당수가 서양의 명상과 수행에서 부족함을 느끼고, 불교의 명상과 수행에서 답을 찾게 되었다. 이런 붐이 불교, 그중에서도 달라이 라마와 틱낫한을 중심으로 한 명상과 수행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특히, 패럴랙스 출판사는 그런 운동과 삶의 구심점이 된다. 이 출판사는 1986년에 틱낫한 스님의 책을 전담하여 발행하는 출판사로 출발하여 100권에 가까운 틱낫한 스님의 책과 시디, 오디오를 발행하고 있다. 그중 채 열 권에 이르지 않는 책이 틱 스님 이외의 저자인데, 그는 아난, 달라이 라마, 그리고 고은이다. 고은은 《무엇? 108선시집》을 이 출판사에서 발행하였다.

이런 두 가지 맥락이 작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틱낫한 개인의 역량도 무시하지 못한다. 틱낫한이 서양에 영향을 끼친 제일 요인은 불교 사상과 수행을 현대화, 대중화, 서양화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불교철학을 서양의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개념인 행복, 평화, 사랑, 공존과 결합시켰다. 그는 서양인에게 만물이 무상(impermanence)한 것이니 그를 통해 현실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찰나의 순간에 만족하고 기뻐하라고 권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 안의 모든 것과 서로 관련을 맺고 있어 무아(non-self)한 것이니, 모든 것과 공존하는 평화의 길을 걸으라고 가르친다. 모든 것은 고통이고 고통은 집착과 무지에서 오는 것이니, 욕심과 증오와 화에서 벗어나 열반(nirvana)에 이르라고 말한다.

만일 당신이 시인이라면 이 한 장의 종이 안에서 구름이 흐른다는 것을 분명히 볼 것입니다. 구름이 없다면 비는 내릴 수 없고,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나무는 자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면 종이를 얻을 수 없습니다. 종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구름이 필수입니다. 만일 구름이 이곳에 없다면 종이도 여기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름과 종이는 서로 공존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종이 안을 더욱 더 깊이 들여다보면 햇빛을 볼 수 있습니다. 햇빛이 없다면 숲이 성장할 수 없고 아무것도 자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들조차 생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햇빛 또한 이 한 장의 종이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종이와 햇빛은 서로 공존합니다.
 
틱낫한은 종이와 구름의 비유를 통해 연기론에 대해 쉽고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고, 이를 공존과 연결시키고 있다. 연기론에서 상호 관련성에 대해 말하지만, 가장 핵심인 시간에 따른 인과관계나 서로 조건이 되는 상호 의존성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중중무진의 화엄의 연기론과 같은 단계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의 사상이 쉽고 명료하지만 심오함은 덜하다고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틱낫한의 선택이다. 하나는 실체론에 젖어 있는 서양인에게 관계성의 사유로 전환하여 구체적으로 세계를 이해시키려는 뜻이고, 연기론을 서양의 공존과 평화의 철학과 관련시키면서 새롭게 해석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수행도 마찬가지다. 그가 포옹하기 명상에 대해 서술한 것을 먼저 들어보자.

저는 가족의 누구에겐가 화가 났을 때, 또 화가 나지 않았을 때도 마찬가지로 품어 안는 명상을 할 것을 권합니다.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우리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금으로부터 삼백 년 동안 존재하리라고 마음으로 생생하게 그려보세요. 그러고 나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하게 의미 있는 일은 팔을 벌리고 그를 껴안는 것입니다. ……숨을 들이쉬면서 나는 지금 이 순간의 삶이 너무도 진귀함을 압니다. 숨을 내쉬면서 삶의 이 순간을 소중히 품습니다. 그를 품어서 안아 주기를 간절히 열망한다고 말하면서 당신 앞의 사람에게 미소를 보냅니다. ……상대방을 따뜻하게 품어 안아서 당신의 몸과 마음이 함께 절대 현존과 삶의 충만함을 창조하는 이 순간, 이것은 의식입니다. ……당신 또한 세 단계의 마음챙김 숨쉬기 수행을 실행해 보세요. 첫 들숨과 날숨을 쉬는 동안에 당신과 사랑하는 사람이 모두 살아 있음을 의식하세요. 둘째 들숨과 날숨을 쉴 때는 당신과 사랑하는 사람 모두 지금으로부터 삼백 년 동안 이곳에 존재하리라고 생각하세요. 셋째 들숨과 날숨을 쉴 때 당신과 그가 모두 살아 있다는 깨달음으로 다시 돌아가세요. 당신의 포옹은 점점 깊어질 것이고, 그래서 당신은 더욱 행복할 것입니다.

위의 수행을 어렵다고 하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쉽고 누구나 일상에서 할 수 있으면서도 반복하는 사이에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포옹하면서 상대방에 숨겨진 불성을 드러내고 나도 그에 감화를 받아 불성을 드러내는 방법이다. 그는 2,600년 만에 처음으로 계율을 현대화한 스님이기도 하다. 2003년 3월 31일 서울에 있는 중앙승가대학교에서 컴퓨터와 자동차, 인터넷 사용에 맞도록 개정된 계율을 발표한 바 있다. 
둘째, 틱낫한은 대승과 상좌불교를 유연하게 넘나들면서 회통(會通)하고 있다. 그는 임제종의 41대로 가장 애독하는 경전은 《법화경》이지만, 《법화경》과 《금강경》 같은 대승경전을 해석할 때 상좌불교식 해석과 대승불교식 해석을 겸한다. 그의 수행법은 팔리정전인 《신행념경(身行念經》 과 《대념처경》에 바탕을 둔 것이지만, 지금 여기에서 마음의 평안과 깨달음에 이르려는 것은 임제종의 생활선과 맥을 닿고 있다.

《틱낫한 스님이 읽어주는 법화경》을 보면, 《법화경》을 역사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기(1장~10장, 12~14장), 궁극의 차원으로 들어가기(《법화경》 11장, 15-19장, 22장), 실천의 문을 열기(20장, 23~28장), 깨달음에 이르는 길로 육바라밀, 보시, 지계, 포용성, 정진, 선정, 지혜로 나누어 분석하고 있다.

역사적인 차원은 우리를 기원전 5세기경 인도에서 가르침을 펼쳤던 부처와 만나게 해 준다. 우리는 그 역시 인간이었음을 깨닫고, 진리를 향한 그의 열망과 수행, 그가 걸었던 길을 열심히 쫓아가게 된다. 궁극의 차원은 부처의 가르침이 갖는 영원한 의미, 시공간을 초월한 법의 본질을 보여 준다. 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누구나 이 영원한 의미를 발견할 것이므로, 궁극의 차원과 만나기 위해 다른 어딘가를 헤맬 필요는 없다. 부처가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우리도 역사적 차원의 일상 속에서 궁극의 삶이 주는 기쁨과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법화경을 공부할 때는 경이 어느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시선을 지상에 고정시키고 있을 때-나무와 풀, 언덕과 산, 혹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을 때-우리가 서 있는 곳은 역사적인 차원, 삶과 죽음의 세계이다. 그러나 허공을 응시할 때는 태어남도 죽음도 없는 궁극의 차원 속으로 들어간다.
 
마명(馬鳴)이 생멸문(生滅門)과 진여문(眞如門)으로 나누었듯, 틱낫한은 역사적인 부처와 살아 있는 부처, 역사와 삶 차원의 불교와 궁극의 깨달음으로서 불교를 나눈다. 전자가 상좌불교와 가깝다면 후자는 대승과 가깝다. 그는 “《법화경》의 문을 열어 놀라운 법을 만나려면, 이처럼 역사적인 차원과 궁극의 차원을 모두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마명이 진속불이(眞俗不二)를 설파하였듯, 비록 대승경전이라도 두 가지 차원에서 보아야 불교의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지적하듯, 그래야만이 역사적 부처를 따라 진리를 향한 그의 열망과 수행의 길을 지극하게 추구하게 되며, 궁극의 차원으로서 시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궁극적인 실체로서의 진여실체에 이른다. 

셋째, 틱낫한은 시인이기도 하지만, 능란하고 정확하게 은유(meta-phor)를 사용하여 이해를 쉽게 하면서도 감성에 호소하는 시적인 문장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은유란 한 개념이나 대상을 다른 개념이나 대상과 견주어 양자 사이의 유사성(likeliness)을 발견하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를 유추(類推, analogy)하여 한 대상이나 개념을 다른 무엇으로 전이하여 비유하는 것이자, 담론 안에서 작동 시 수용자가 주어진 세계관과 문화 안에서 형성된 개념 체계와 상상력에 따라 원관념과 매체관념 사이의 관계를 유추하여 의미작용을 일으키는 방식이자 행동하는 양식이다. 창조의 장에서 보면 은유는 두 개념이나 대상 사이의 유사성을 유추하는 것이다. 수사의 장에서는 은유는 전이다. 해석의 장에서 보면 이는 원관념과 매체관념 사이의 동일화이다. 소통의 장에서 보면 발신자가 보낸 코드에 대하여 수신자가 유사성의 유추에 의하여 해석한 의미작용을 일으키고 이에 따라 실천하는 양식이다.

철학의 생성의 면에서 보면, 반달에서 색즉시공이나 화엄의 은밀현료구성문을 떠올리듯 사물의 어떤 속성이나 실체를 발견하는 자체가 은유다. 철학의 이해와 수용의 측면에서 보면, 인언견언(因言遣言)의 진리를 달과 손가락의 비유를 통하면 이해가 쉽듯, 추상적인 무엇을 사물로 전이하여 유사성의 유추에 의해 의미작용을 일으켜 의미를 해석하는 매개로 작용하는 것이 은유다. 틱낫한 스님은 불성을 꽃으로, 연기를 구름과 종이의 관계로 비유하듯, 어렵고 추상적인 불교 개념을 일상의 사물의 은유로 대체하여 쉽게, 핵심을 파악하게 하는 한편, 은유의 시적 표현을 통해 논리적 이해와 함께 감성의 설득도 꾀하고 있다. 그의 글이 쉬우면서도 생각할수록 감동과 울림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넷째, 틱낫한은 환유를 즐겨 사용하여 구체성을 갖는 해석과 감동을 유도한다. 환유란 한 개념이나 대상을 다른 개념이나 대상과 견주어 양자 사이의 인접성(contiguity)을 발견하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를 연합적으로 연결하여 한 대상이나 개념을 경험적 기호로 대체하여 비유하는 것이자, 담론 안에서 작동 시 수용자가 주어진 세계관과 문화 안에서 형성된 경험과 기억에 따라 원 대상과 비유 대상 사이의 연합적 연상을 하여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차이를 유추하여 의미작용을 일으키는 방식이자 행동하는 양식이다. 창조의 장에서 보면 환유는 두 개념이나 대상 사이의 인접성을 유추하는 것이다. 수사의 장에서는 환유는 경험적 대체다. 해석의 장에서 보면 이는 원래 대상과 비유 대상 사이의 연합적 연상을 통한 구체적 해석이다. 소통의 장에서 보면 발신자가 보낸 코드에 대하여 수신자가 자신의 맥락에서 인접성의 유추에 의하여 해석한 의미작용을 일으키고 이에 따라 실천하는 양식이다. 간단히 말하여 환유는 칠판−지우개, 학자−먹물, 촌놈−핫바지처럼 인접성에 따른 유추다. 이 때문에 은유가 동일성을 강화하는 측면이 있는 반면에, 환유는 이를 깨는 구체성과 관련이 된다. 틱낫한은 나무와 꽃, 대지, 차, 쌀 등 아름다운 자연의 대상과 우리 주변의 일상의 사물을 수시로 등장시켜 삶과 일상의 구체성 속에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불교 세계를 느끼도록 한다. 예를 들어 그는 어머니의 사랑을 “최상품의 바나나, 벌꿀, 달콤한 쌀, 사탕수수”에 비유한다. 이를 한국식으로 바꾸어 “우리 어머니의 사랑은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밥, 붉게 잘 익은 사과, 달콤한 벌꿀, 쫄깃쫄깃한 인절미와 같습니다.”라고 말해 보자. 추상적인 사랑이 구체적인 사물로 전환되고, 그 구체적인 사물과 연관된 유년의 기억과 추억이 떠오르며 어머니의 사랑을 깊으면서도 가깝게, 바로 옆에서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다섯째, 교리와 사상과 수행과 삶이 일치하였다. 틱낫한은 16세에 출가한 이후 60여 년을 쉼 없이 경전을 읽고 수행을 하고 시를 짓고 글을 썼다. 개인의 고통만이 아니라 사회의 고통, 나만의 평안과 행복이 아니라 타인의 평안과 행복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 세계를 순회하며 반전 평화운동을 전개하였고 불교평화대표단 의장으로 파리평화회의를 이끌었다. 그는 지금도 자두마을에서 찾아오는 사람들과 함께 걸으며 명상을 하고 책을 읽고 평화의 메시지를 전한다. 달라이 라마와 함께 세계 종교계에 핀 두 송이 꽃, 살아 있는 부처라 불리고 노벨상 후보로 추천될 정도로 높은 자리에 이르렀지만, 지금도 몸소 채소밭을 가꾸며 소박하게 살고 있다. ‘지금 여기에서’ 푸른 하늘과 아름다운 꽃들이 흐드러진 숲에 감동하면서 숨을 쉬고 내쉬면서 모든 것에 감사하고 내 몸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사랑하며 자신이 서 있는 곳을 극락으로 삼아 매 순간 환희심에 충만하여 살아간다. 이처럼 교리와 사상과 수행이 일치하는 삶이 서양인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여섯째, 명상 및 승가 공동체의 설립과 운영이다. 그는 자두마을을 비롯하여 미국의 단풍림승원, 청산법원, 녹야원 승원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그는 공동체의 눈은 공동체 몸의 응집된 통찰력이자 지혜라고 단정한다. 그곳에서 그는 승려는 물론, 탐방객과 함께 수행을 하고 가르침을 전한다. 그들은 명상과 수행을 하면서 스스로 깨닫는 한편, 그들만의 계율을 지키며 더불어 살면서 공존과 평화의 지혜를 터득한다. 이곳에 며칠만 들른 사람도 깊이 감동을 하고 생활 방식과 세계관을 바꾸게 된다. 더구나 걷기 명상, 포옹하기 명상, 설거지 명상 등 모든 생활 자체가 명상이고 수행이며, 어린이와 가족이 함께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틱낫한 작곡의 노래를 부르며 수행하기에 참가자는 거의 대부분이 매료될 뿐만 아니라 불교와 틱낫한의 사상과 수행법과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게 된다.

일곱째, 그는 온화한 평화주의자로 비폭력 평화운동을 전개한다는 점이다. 그는 과거의 이력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평화와 행복과 자비를 역설하고 실천한다. 자두마을뿐만 아니라 단풍숲 승원(Maple Forest Monastery) 등에서 이곳에 오는 이들을 따스하게 품어 안아 준 다음 함께 숨을 쉬고 명상을 하고 걷는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서로가 마음밭에 있는 평화와 자비, 공존의 씨앗에 물을 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의 씨앗은 꽃으로 피어나 흐드러진 꽃밭을 이룬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온화하고 평안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 그일 것이다. 늘 마음이 평화로운 분이며 다른 이들을 평안하게 하고 미소 짓게 하는 데도 탁월한 능력을 가진 이다. 그의 미소를 대하면, 그의 환한 얼굴을 마주하면, 그의 지혜로운 말씀을 들으면, 그의 너른 가슴에 안기면 방금까지 화를 내고 싸웠던 이들도 엄마 품에 안긴 아가처럼 평안함과 행복함을 느낀다.


4. 한국 불교가 배울 점

한국불교에서도 틱낫한과 비슷한 승려를 찾으라면 단연 도법 스님이 떠오른다. 한국이라는 지역적 특성과 언어의 한계 때문에 세계적인 명성까지는 얻고 있지 못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틱낫한을 능가하는 점도 있다. 온몸을 던져 사회적 실천을 하는 점, 도법 스님이나 불교를 따르는 이들뿐만 아니라 산내면의 주민과 더불어 공존하는 공동체를 추구한다는 점, 지리산의 자연과 절과 사람과 하나가 되는 삶을 추구한다는 점, 절과 대안학교와 한생명, 인드라망공동체와 같은 조직, 귀농학교 등이 한데 어우러진 지역공동체를 꾸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틱낫한보다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주류 불교는 아직 고식과 아집과 아만에 휩싸여 있다.

송의 《석자비탁집(釋子非濁集)》 에 보면 신라 사람 승유(僧兪)가 아함경을 공부하는 이를 보고 나무라자 꿈에 천동자(天童子)들이 나타나서 승유를 때리며 “소승으로서 사다리를 삼아 대승에 이르는 것이 그대 나라 법식이다.”라고 말한다. 《삼국유사》 〈흥법〉 편 ‘원종흥법 염촉멸신(原宗興法 厭髑滅身)’ 조에서도 “대, 소승의 불법이 서울의 인자한 구름이 되어 여러 곳의 보살이 세상에 나타나기도 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원효의 저서에도 대승과 소승의 경전, 대승적 해석과 상좌불교적 해석이 회통하고 있다. 이제 한국불교도 틱낫한 스님이 행한 것처럼, 간화선을 종지로 하되, 상좌불교의 교리, 계율, 위빠사나의 수행법을 과감하게 수용하여 양자를 종합한 것을 21세기 한국불교의 지향점으로 삼아야 한다.

21세기 대중은 경전에는 없는 고통과 욕망에 휘둘리고 있다. 지금 대중은 미디어의 조작에 따른 고통, 정치적 억압과 폭력에 따른 고통, 환경파괴에 따른 고통, 상대적 박탈감에 따른 고통, 공동체의 해체에 따른 고독과 고통, 자본주의 체제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물화(物化)와 소외에 따른 고통, 해마다 수십 억 개체의 인간과 생명이 죽어가는 고통, 디지털 시대에 와서 가상과 시뮬라시옹에 현혹되는 고통 등 중세와 분명히 다른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에게 중세적 고통을 멸하라고 한다면 대중은 고승의 설법일지라도 공허할 수밖에 없다. 이제 스님들은 한국 대중들이 발을 디디고 있는 현실에 함께 서서 그들이 실제로 겪고 있는 고통이 무엇인가 성찰하고, 더 나아가 이에 공감하면서 그들의 고통이 치유될 수 있는 길을 제시해야 한다. 그리하려면 달라진 사회와 대중을 알아야 하고, 이를 잘 분석하고 종합한 서양의 인문학과 사회과학도 공부해야 한다. 아울러, 대안은 보수적인 것에서 진보적인 것까지 여러 차원이 있겠지만,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고통이 해소될 수 있는 사회개혁과 가난하고 소외된 중생의 구제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승려대회에 대중들이 외면한 가장 큰 이유는 그동안 한국불교가 보살행을 관념으로만 외쳤지 실천행을 별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출가한 자를 승려라 할진대 온라인으로는 세속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승려 가운데 육식을 하거나 생명을 해하는 일을 다반사로 하는 이들도 많다. 서양의 스님이나 불교도들에게 한국 불교의 인상을 말하라고 하면 부정적인 인상 가운데 첫째로 등장하는 것이 스님의 육식과 쥐와 같은 동물의 살생이다. 한마디로 진리와 계율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승려가 너무도 많다. 염불보다 잿밥, 곧 돈과 권력에 더 이끌리는 승려도 비일비재하다. 일부지만, 이들로 인하여 대중들은 승가뿐만이 아니라 불교 자체에 대해 회의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큰스님들은 권위를 버리고 누구든 아랫사람을 대하면 미소를 짓고 따스하게 포옹해 주는 삶의 자세와 넉넉함이 필요하다. 종단도 관료화에서 벗어나고 권력에서 독립해야 한다. 계율을 현대에 맞게 수정하되, 계율과 더불어 자유로운 승가공동체를 추구해야 한다.

경전의 한글화와 대중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지만, 아직 한문투의 문장, 현학적인 개념어와 기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다. 틱낫한스님이 이룩한 것처럼 경전을 아름다운 우리말로 문장화하고, 불교사상서들은 좀 더 정확하고 명료한 은유와 환유를 사용하여 쉬우면서도 핵심의 진리에 다가가게 해야 한다. 

21세기 오늘, 대중들 또한 화폐증식, 재현의 위기, 가상성 등 경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욕망을 과잉발산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당위적으로 욕망의 소멸을 말한다면, 경전상의 계율만을 고집한다면, 스님 독단의 모노드라마와 같은 수행법과 의례만을 강요한다면, 종단이 관료들의 성으로 남는다면, 한국 불교는 차츰 소수 종교로 전락할 것이다. ■

 

이도흠 /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양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의상·만해연구원 연학실장, 한국학연구소 소장, 《문학과 경계》 주간 등 역임. 현재 실상사 화엄학림 외래강사, 대한불교 조계종 포교원 통일법요집편찬 연구위원. 저서로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 등 다수. 본지 편집위원.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