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좌불교, 무시할 것인가, 포용할 것인가

1.머리말

마성스님
현재의 한국불교 속에 상좌불교의 전통이 깊숙이 들어와 있다. 그동안 초기불교에 대한 학문적 연구 성과와 아울러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한국의 불교도들이 직접 상좌불교를 접할 기회가 많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불교 속에 상좌불교의 전통이 수용되고 있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과 긍정적인 시각 두 가지가 공존하고 있다. 부정적인 시각은 한국불교와 상좌불교를 적대적인 관계로 보는 것이고, 긍정적인 시각은 한국불교와 상좌불교를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난 2008년 12월 31일 ‘한국테라와다불교’가 사단법인 설립 절차를 마치고 정식으로 출범했다. 이것은 한국에 상좌불교가 공식적으로 도입된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상좌불교 전통의 상가(Saṅgha, 僧伽)가 정식으로 출범하기까지 한국불교와 상좌불교 간에는 어떤 만남의 역사가 있었으며, 앞으로의 과제는 무엇인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다시 말해서 본고의 목적은 한국에 상좌불교가 전래된 과정과 앞으로 서로 다른 전통을 간직해온 두 불교가 한국에서 어떻게 서로 공존할 수 있을까를 모색해 보고자 하는 데 있다.

한국불교와 상좌불교와의 관계, 즉 만남의 역사와 과제에 대한 논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약간 초점은 다르지만, 한국불교와 남방불교의 만남의 역사에 대해서는 허흥식과 고영섭의 선행연구가 있다. 허흥식은 지공선현(指空禪賢, 1235~1361?)이 2년 7개월간 고려에 머문 행적에 주목하여, 인도의 등불이 고려로 전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고영섭은 최치원(857~?)이 쓴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에 나오는 ‘비바사(毗婆娑)’라는 대목을 증거로 ‘부파불교’ 전래설을 주장하고 있다. 한편 임승택은 한국불교와 상좌불교의 현황과 과제에 대한 2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여기서는 이러한 선행연구들을 바탕으로 한국불교와 상좌불교 간의 만남의 역사와 과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한국불교와 상좌불교의 만남의 역사

1) 고·중세 남방불교의 전래설
모든 사상과 지식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동한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 사상도 예외는 아니다. 불교는 육로(陸路)와 해로(海路)를 통해 한반도에까지 전해졌다. 전래(傳來)란 ‘외국에서 전해 들어옴’이라는 뜻이다. 고대 한반도에 남방불교가 전래되었다는 설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가야의 남방불교 전래설이고, 둘째는 비바사(毘婆沙)의 전래설이며, 셋째는 백제의 남방불교 전래설이다.

이러한 전래설을 검토하기에 앞서, 우선 ‘상좌불교’의 개념에 대해 언급해 두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남방불교’와 불교학자들이 말하는 ‘남방불교’의 개념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엄격히 말해서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남방불교’는 지금의 동남아시아에 널리 퍼져 있는 ‘상좌불교(Theravāda Buddhism)’가 아니다. 상좌부(上座部), 즉 테라와다(Theravāda)는 ‘장로들의 교리(the doctrine of the Theras)’ ‘불교의 본래 교리(the original Buddhist doctrine)’ ‘장로들의 전통(the tradition of the Theras)’ 혹은 ‘장로들의 교리(Doctrine of the Elders)’로 알려져 있는 부파를 말한다. 현재 스리랑카·미얀마·태국·캄보디아·라오스 등에서 전승되고 있는 불교를 말한다. 이 부파를 ‘남방불교’ ‘상좌부 불교’ 혹은 ‘상좌불교’라고 부른다. 그런데 ‘한국테라와다불교’ 설립 이후, ‘테라와다불교’로 부르는 사람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

그런데 역사학자들은 육로를 통해 들어온 불교를 ‘북방불교’라고 부르고, 해로를 통해 들어온 불교를 ‘남방불교’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남방불교’는 지금의 ‘상좌불교’가 아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고대와 중세의 불교 전래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가야의 남방불교 전래설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된 경로(經路)는 크게 육로와 해로로 나눌 수 있다. 육로는 고구려 전래를 말하고, 해로는 백제 전래를 말한다. 이것은 모두 중국을 통해서 전해진 것으로서 대승불교에 속한다. 그런데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의하면, 가락불교(駕洛佛敎)는 해로를 통해 인도의 불교가 직접 전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영태는 현존 사료들을 정밀히 검토한 결과, 제8대 질지왕(銍知王) 2년(452)에 최초로 왕후사(王后寺)가 창건되었으며, 왕후사 창건 직전인 질지왕 원년(451)쯤에 불교가 지금의 김해 지방인 가락(駕洛)에 들어왔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는 허왕후(許王后) 도래(渡來) 후 400여 년이 지난 질지왕 때에 어떤 전도승(傳道僧)이 바다를 통해 가락의 해변에 닿아 불교를 전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또한 그는 신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한 묵호자(墨胡子)는 가락에 불교를 전한 인도승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고 있다.

한편 인도 출신 사학자 판카즈 모한(Pankaj Mohan)은 “남방불교 전래설은 가야 출신으로 삼국통일 전쟁을 이끌었던 김유신 세력이 가야 왕실의 위상을 제고하며 부각시키려는 정치적인 의도에 의하여 만든 신화적인 역사(myth-history) 내지 날조된 전통(Invented Tradition)이며, 가야 시조 김수로의 배우자로 알려진 허황옥은 아요다국 공주가 아니라 사실은 2~3세기경 표류해 가야에 도착한 인도 여인”이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는 대가야국 왕자인 ‘월광(月光)’ 태자의 이름을 증거로, ‘가야 지역에 전파된 불교는 중국불교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판카즈 모한의 견해에 대해 고영섭은 “가야불교는 인도 또는 중국 남부 지역을 거쳐 유입해 온 아비달마불교 기반의 소승불교를 수용했을 가능성까지는 부정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고영섭의 주장처럼 그 가능성이야 있지만, 현재로서는 가락에 ‘부파불교’가 들어왔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가락에 불교가 전래되었을 때는 이미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크게 흥기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므로 인도에서 직접 전래되었다고 할지라도 ‘부파불교’가 들어왔다고 단정할 수가 없다.

(2) 비바사(毗婆娑)의 전래설
고영섭은 최치원(857~ ?)이 쓴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에 나오는 “비바사(毗婆娑)가 먼저 이르자 온 고을 사람들이 사제(四諦)의 바퀴를 몰아가고, 마하연(摩訶衍)이 뒤에 이르자 온 나라 사람들이 일승(一乘)의 거울을 비추이네.”라는 대목을 증거로 ‘부파불교’ 전래설을 주장했다. 이 비문에서 말하는 ‘비바사’는 아비달마불교의 율과 논에 대한 주석서를 말한다. 즉 아비달마불교의 주석서들이 대승의 교설보다 먼저 들어왔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다시 말해서 아비달마교학을 중심으로 한 ‘비담종(毘曇宗)’과 같은 ‘부파불교’가 한반도에 먼저 전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영섭도 “비문에 쓰인 ‘비바사(毗婆娑)’는 아비달마교학 전반을 일컫는 ‘부파불교’를 가리킨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실제로 삼국시대 불교 전래 초기에 ‘비담종’이 먼저 들어온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고구려 智晃은 “薩婆多部를 잘하여 法의 성참(城塹)이 되었다” 한다. 살바다부는 인도 소승 20부파 중의 하나인 說一切有部(Sarvāstivādin)를 가리킨다. 그러한 有部의 敎學(abhidharma)은 그 부파의 중심지인 罽賓(Kaśmir)으로부터 僧伽提婆·僧伽跋澄 등이 前秦(建元년중 365~384)에 와서 阿毘曇磨(abhidharma) 문헌을 傳譯한 이래 소위 ‘毘曇宗’이라는 학파를 형성케 된다. 지황은 그러한 소승의 有部敎學에 뛰어났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비담종’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를 가리킨다. 이로 미루어 고구려에 설일체유부 계통의 부파, 즉 ‘비담종’이 들어온 것은 사실로 보인다. 그러나 고구려에서는 ‘비담종’ 외에 ‘삼론학(三論學)’과 같은 대승의 교학도 활발하게 연찬(硏鑽)되었으며, 나중에는 ‘비담종’도 대승에 흡수되고 말았다.

(3)백제의 남방불교 전래설
백제불교(百濟佛敎)는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중국의 동진(東晋)에서 제15대 침류왕(枕流王) 원년(374)에 백제로 들어오면서 전래되었다. 또 다른 경로는 중국의 남제(南齊, 479~502)로부터 백제에 불교가 유입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중국 남제로부터 대가야로 불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는데, 《남제서(南齊書)》에 나오는 대가야의 사신 파견이 그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남제의 소자량(蕭子良, 460~499)은 각종 재회(齋會)와 자선사업을 행하고 사경도 실시했으며, 직접 여러 책도 저술했다. 그러나 그가 지은 책들은 모두 대승불교에 관한 것이었다. 이로 미루어 남제로부터 백제와 대가야에 전해진 불교도 북방불교였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이러한 남제의 전래설보다 백제의 겸익(謙益)이 인도에서 직접 아비담(阿毘曇)과 오부율서(五部律書)를 가지고 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彌勒佛光寺 事蹟에 의하면, 謙益은 제28대 聖王(523~553) 4년(526)에 律을 구하러 海路로 중인도 常伽那大律寺에 이른다. 그곳에서 5년간 梵文을 익힌 뒤 梵僧 倍達多 三藏과 함께 梵本 ‘阿毘曇藏·五部律文’을 갖고 귀국하매(531), 왕은 그들을 맞아 興輪寺에 있게 하고, 국내 名僧 28人을 불러 함께 律部 72卷을 번역게 한다. 이에 曇旭과 惠仁은 ‘律疏’ 36卷을 지어 바치니 王은 ‘毘曇·新律書’를 지어서 台耀殿에 모시고, 剞劂코자 하였으나 얼마 안 있어 王이 훙(薨)하여 실현되지 못하였다.

겸익이 인도에서 가지고 왔다는 아비담장(Abhidharma-piṭaka)은 설일체유부의 논장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소승 20부파가 각자 독자적인 논장을 갖고 있었지만, 당시 중국에서 아비담(阿毘曇)이라고 하면, 으레 설일체유부의 것을 가리켰기 때문이다. 오부율(五部律)은 20부파 중의 ①설일체유부(Sarvāstivada) ②법장부(Dharmaguptaka) ③ 대중부(Mahāsaṅghika) ④화지부(Mahīśasaka) ⑤음광부(Kāśyapīya)의 율장을 말한다. 이러한 오부율의 범본을 당시 백제로 가져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음광부(飮光部)의 율장은 중국에서도 번역되지 않았으며 현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백제불교의 교학은 겸익(謙益)의 ‘비담(毘曇)·율학(律學)’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곧바로 대승경전의 습송(習誦)과 교학(敎學)이 이루어졌다.

한편 허흥식은 인도의 지공 화상이 고려에 머문 것에 주목하여 인도의 불교가 고려에 전해졌다고 말한다. 이른바 ‘지공 화상에 의한 인도불교의 전래설’이다. 그러나 지공이 어떤 형태의 불교를 고려에 전해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지공이 고려에 전해 준 것은 대승불교에 관한 것뿐이다. 현존하는 지공의 저술, 어디에서도 아비달마교학에 관한 흔적은 발견할 수가 없다. 또한 그는 인도의 날란다(Nālandā, 那蘭陀寺)에서 수학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때는 이미 이슬람교도들의 침입으로 날란다가 폐허된 상태였다. 그러므로 지공은 아비달마교학을 접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비록 그가 인도에서 스리랑카와 중국을 거쳐 고려에까지 왔다고 하더라도 ‘남방불교’를 전한 증거는 찾을 수 없다.

이상으로 고대 한반도의 남방불교 전래설을 검토해 보았다. 그 결과 고대의 한반도에 소승 20부파 가운데 설일체유부가 들어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부파불교는 계속 지탱하지 못하고 대승불교 속에 용해되어 버렸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아마 대승의 이론가들이 유부의 교학을 제압했기 때문일 것이다.

2) 근현대 상좌불교와의 만남
교단사적으로 상좌불교의 전래는 두 가지 방법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 하나는 상좌불교 국가의 승려가 직접 내한하여 상좌불교 전통의 구족계를 수여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의 승려가 상좌불교 국가에 가서 구족계를 받고, 그곳의 전통과 교리를 배우고 돌아와 국내에서 상좌불교 전통의 구족계를 수여했을 경우이다. 재가자가 개인적으로 상좌불교 국가에 가서 수학한 것은 승단의 활동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상좌불교의 전래’라고 하기는 어렵다.

(1) 다르마팔라의 내한
근대의 조선총독부 시대에 스리랑카의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Anāga-rika Dharmapāla, 1864~1933)가 1913년 8월 20일 한국을 방문하였다. 그의 방한에 대해 이능화(李能和)는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근대편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大正 2년[1913] 8월 20일 남인도 실론섬[Ceylon]의 고승인 달마파라(達磨婆羅)가 서울에 와서, 21일 밤에 승속 남녀 수십여 명이 남산정의 花月樓에서 환영 연회를 열었다. 달마선사가 [환영] 석상에 나와, 부처님 사리 1과를 모셔 조선불교 대표자에게 전하였다. 이때에 조선불교를 대표하던 이는 바로 금강산 유점사의 사문인 김금담 화상이었다. 이때 김금담 화상은 30본산 회의소 원장이 되어 서울 각황사에 머물고 있었다.

위 인용문은 ‘인도고승금부불골(印度高僧今付佛骨)’이라는 제하의 기사다. 다르마팔라가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불교 대표에게 전해 준 사리는 이듬해 대정 3년(1914) 12월 29일 각황사(지금의 조계사)에 사리탑을 세워 봉안했다. 이 사실은 몇 해 전 조계사 사리탑 해체 이전 과정에서 나온 ‘사리함’에 새겨진 명문에서도 확인되었다. 그러나 이 사리탑은 일식(日式)이라는 비판이 계속되어 2009년 10월 8일 8각 10층의 세존사리탑으로 새로 건립되었다.

다르마팔라가 한국을 방문하여 세존의 사리 1과를 한국불교계에 전달해 준 것이 중요한 사실이 아니라, 그가 역사상 최초로 상좌부 소속의 승려 신분으로 내한(來韓)했다는 사실이다. 그가 한국을 방문하여 어떤 다른 활동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그는 한국불교계의 승려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백용성(白龍城, 1864~1940) 스님은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가 인도불교의 재생을 위해 1891년 대각회(大覺會, Mahābodhi Society)를 창립하여 불적부흥운동(佛蹟復興運動)을 전개한 것과 같이 백용성 스님도 근대 한국불교의 중흥을 위해 1921년 대각교(大覺敎)를 창설하여 새불교운동을 일으켰으며, 불교 성지를 가꾸는 데 주력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백용성 스님은 다르마팔라의 활동을 그대로 모방한 것처럼 보이는 행적을 많이 남겼다. 한국불교가 최초로 상좌불교의 승려를 만남으로써 얻게 된 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

(2)이영재의 스리랑카 유학
한국의 승려로서 상좌불교의 종주국(宗主國)인 스리랑카로 유학을 갔던 최초의 스님은 종원(宗圓) 이영재(李英宰, 1900~1927)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1918년 19세에 출가하여 1920년 일본대학 종교과에 입학하여 불교학을 연구했다. 그때 그는 재일조선청년회의 간사로 일하며 불교청년운동을 주도했다. 또한 그는 1922년 11월 24일부터 12월까지 〈조선일보〉에 모두 27회 동안 〈조선불교혁신론(朝鮮佛敎革新論)〉을 연재했다. 1924년 일본대학을 졸업하고 동경제국대학에 진학한 스님은 1925년 스리랑카를 경유하는 인도 성지순례의 길에 올랐다. 그러나 그가 열망하던 부처님의 땅 인도에는 당도하지 못하고 1927년 10월 12일 스리랑카의 콜롬보에서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입적 소식을 접한 조선의 불교계는 비탄에 빠졌다.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은 물론 국내외 조선불교 청년회들은 고인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추모법회를 잇따라 개최하였으며, 《불교》 《금강저》 《조선불교》 등 불교지에는 그를 추모하는 특집 글들이 게재되었다. 그가 스리랑카에 체류하고 있을 때 당시 한용운이 간행한 월간 《불교》에 상좌불교와 ‘석란불교(錫蘭佛敎)’ 즉 스리랑카의 불교에 대한 글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가 돌아와 상좌불교를 한국에 소개하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쉽다.

3) 한국에서의 상좌불교 도입 시기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전래(傳來)’는 다른 지역의 전도승(傳道僧)이 도래(到來)하여 그곳 사람들을 교화하여 그 가르침을 수용하도록 한 것을 말한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는 이와는 반대로 한국 불교도들의 필요에 의해 자발적으로 상좌불교를 받아들인 것이기 때문에 ‘전래(傳來)’가 아니라 ‘도입(導入)’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원래 ‘전래’라는 말속에는 받아들이는 쪽이 상대적으로 열등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한국불교에서 상좌불교를 받아들이고자 했던 일련의 움직임들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1)태국 고승들의 내한
한국불교는 승단 정화 이후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다. 비구라면 구족계를 받아야 하는데 구족계의 계맥이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태국의 고승을 초청하여 구족계를 받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태국의 고승들이 한국에 와서 남방 전통의 구족계를 수여했다. 이것은 한국불교 교단사에서 크나큰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한국불교 교단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바로 한국의 승려들이 상좌불교 국가인 태국의 고승들을 초청하여 상좌부 전통의 비구계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태국의 장로들은 한국불교의 승단에 태국의 계맥을 전해 준 것에 대해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세계불교에서의 태국불교(Thai Buddhism in the Buddhist World)》라는 책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스님들이 다른 불교국가에서 학업을 추구하도록 파견돼 왔다. 최근 몇 년간 상좌부 불교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한국 승단은 한국 스님들을 상좌불교 국가들로 보낼 뿐만 아니라, 자국 내에서의 상좌부 수계도 환영하고 있다. 1973년(불기 2516년)에 태국 상좌부 스님들이 서울에서 수계식을 열기 위해 초대를 받고 가서 약 마흔 분의 한국 스님들을 상좌부 계단에 맞아들였다.

위의 인용문 내용과 같이 한국불교계에서 태국의 고승들을 초청하여 비구계를 받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도성(道成) 스님(전 해인사·대흥사 주지, 현 부산 태종사 회주·한국테라와다불교 상가라자)의 증언에 따르면, 1973년 3월 말경 양산 통도사에서 남방 구족계 수계식이 거행되었다. 이때의 수계는 계첩을 발부하지 않았으며, 수계식 기념사진도 촬영하지 않았다. 다만 수계의 증표로 남방 가사와 발우를 전해 받았다. 수계를 받은 정확한 숫자는 알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도성 스님은 당시 수계를 받은 스님들의 명단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통도사의 홍법·상우, 부산 선암사의 석암, 쌍계사의 고산, 송광사의 보성·학산, 해인사의 혜암·도견·일타·종진·운산·현우·도성, 대구의 수산, 법주사의 혜정 스님 등이 받은 것은 확실하게 기억하지만, 고암과 경산 스님은 계를 받았다는 말만 들었다고 한다. 이때 천축사의 천장 스님은 한 발은 계단 안에 한 발은 계단 밖에 두고 수계를 받았다는 일화도 전한다.

한편 그 이전에도 개인적으로 남방불교의 비구계를 받은 스님들이 있었다. 일각 스님은 인도에 가서 받았으며, 거해 스님은 태국에 가서 비구계를 받았다. 이때를 상좌불교의 도입 시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상좌부의 장로들로부터 구족계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 한국불교계에서는 이때 받은 수계를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수계 받은 사실 자체를 지금까지 숨기고 있는 실정이다.

(2) 상좌불교에 대한 관심 고조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불교와는 다른 전통의 테라와다불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개인적으로 상좌불교에 대한 관심과 빠알리어(Pāli, 巴利語)를 배우기 위해 유학을 떠나는 스님도 있었는데, 1980년대 초반 송광사의 현음(玄音) 스님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스리랑카에서 빠알리어를 배우면서 느낀 점을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도 이영재 스님과 마찬가지로 귀국하지 못하고 병으로 타계하고 말았다.
그런데 유학을 가지 않고도 국내에서 빠알리어를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 1988년 3월 5일 스리랑카팔리불교대학교 한국분교인 한국불교대학(이사장 석가산)이 개교했기 때문이었다. 이 대학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빠알리어와 테라와다불교를 가르치는 교육기관이었지만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1990년대 초반에 폐교되고 말았다. 이 학교가 한국불교와 상좌불교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일정 부분 담당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한편 이 무렵 태국에서 구족계를 받은 거해(巨海) 스님이 미얀마의 마하시 사야도(Mahasi Sayadaw)의 위빠사나를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했다. 그 후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열풍이 불었다. 이러한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열풍은 한국에 테라와다불교를 받아들일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한국에 테라와다불교를 도입하게 된 직접적인 영향은 1980년대 중반부터 진행된 위빠사나 수행 열풍 때문이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태국의 고승들이 내한하여 한국의 스님들에게 구족계를 수여한 것은 이미 상좌부 전통의 계맥 혹은 율맥을 전수한 것이다. 그러나 수계를 받은 스님들이 그 후 상좌부의 수계 전통을 계속해서 이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단절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상좌불교 국가에서 구족계를 받은 한국의 스님들이 귀국하여 자체적으로 ‘한국테라와다불교’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이것은 한국불교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 단체는 2008년 12월 31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부터 정식으로 ‘사단법인 한국테라와다불교’(허가증 번호: 2008-72호)라는 종교단체 설립 인가를 받았다. 교단사적으로 말하면 이날이 바로 한국에 상좌불교를 공식적으로 도입한 날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국가가 정한 법령에 따라 법인 설립 절차를 거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율장에 의하면 ‘구족계를 받은 비구가 최소한 4명 이상이면 상가가 성립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때 지역적 한계인 시마(sīmā, 界)를 정하고, 포살(布薩) 등 갈마작법(羯磨作法)을 행하면 현전승가(現前僧伽, sammukhībhūta-saṅgha)가 성립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한국테라와다불교’는 상좌불교 국가에서 수계를 받은 사람들이 모여 결성한 단체이기 때문에 율장의 규정에 따라 최소한 구족계를 받은 지 10년이 경과한 비구 5명이 있어야 다른 사람에게 구족계를 수여할 수 있게 된다. 율장에 의하면, 비구를 모으기 어려운 곳에서는 계율에 밝은 비구(持律比丘, vinayadhara)를 더하는 조건으로 5비구승가로도 이것을 행하여도 좋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절차를 거쳐 구족계를 받은 한국의 스님들이 출현하여 상좌불교의 전통을 이어갈 때 비로소 완전히 상좌불교가 정착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현재의 ‘한국테라와다불교’는 도입 단계에서 정착 단계로 진입하고 있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3.한국불교와 상좌불교의 관계 정립과 과제

1)한국불교와 상좌불교의 관계 정립

이제 한국불교와 상좌불교의 관계 정립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머리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불교 속에 상좌불교의 전통이 수용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과 긍정적인 시각 두 가지가 공존하고 있다. 부정적인 시각은 상좌불교를 적대적인 관계로 보는 것이고, 긍정적인 시각은 양자를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보는 것이다. 전자의 부정적인 시각은 상좌불교를 소승이라고 폄하하는 대승불교 우월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가능하면 상좌불교를 무시하려고 한다. 반면 후자의 긍정적인 시각은 상좌불교가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훼손하기보다 오히려 한국불교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보기 때문에 가능하면 상좌불교의 장점을 흡수하거나 포용하려고 한다.

이처럼 극명하게 다른 시각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그러면 양자 간에 어떤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인가. 이에 대해 언급한 학자들의 견해부터 살펴보자.

허흥식은 “지식이란 고유한 창조도 없고 완전한 모방도 존재할 수 없으며, 지속적인 교류와 개선만이 세계문화에 기여하는 적극적 자세일 뿐 아니라 자신을 보전하기 위한 소극적인 방어도 된다.”고 말했다. 또한 고영섭은 “테라와다불교의 수용은 대승불교의 전통을 고수해 온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훼손하기보다는 오히려 한국불교의 외연을 넓히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하고, “고·중세의 전래 이래 다시 전래해 온 부파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대·소승을 아우르는 새로운 한국불교를 만들어 갈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라고 결론을 맺고 있다.

또한 임승택은 “테라와다불교의 간명하면서도 일관된 가르침은 한국불교의 바람직한 미래상을 정립하는 데에 일종의 시금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오늘날은 이전 시대에는 볼 수 없었던 구조적 변화의 와중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상은 테라와다불교 자체에 대해서도 새로운 과제와 개선책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즉 테라와다불교 또한 시대와의 소통을 위해 자기 변화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이 대부분의 학자들은 한국불교가 상좌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기를 권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상좌불교의 승단이 공식적으로 한국에 설립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불교가 상좌불교를 외면한다고 해서 외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형태로든 상좌불교는 그 영향력을 확대해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부정적인 시각에서 상좌불교를 적대시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현재의 한국불교가 상좌불교에서 배울 점은 배우되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잘못된 부분을 개선해 나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한편 임승택이 지적한 바와 같이 상좌불교가 한국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과제와 개선책이 요구된다. 상좌불교를 수용하는 쪽에서도 지나친 우월의식에서 한국불교의 전통을 무시하거나 한국불교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상좌불교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계율을 잘 지키면서 수행과 포교에 전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지나치게 한국불교의 단점을 들추어내는 것도 양자의 관계 정립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불교가 빨리 변화되기를 요구하는 것도 오히려 부작용만 가져올 염려가 있음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한국불교와 상좌불교의 바람직한 관계 정립을 위해서는 우선 양자의 차이점을 서로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불교와 상좌불교는 그 전통이 다를 뿐만 아니라 사상과 그 실천적 특성에 있어서도 많은 차이점이 있는데, 이러한 차이점을 먼저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다른 전통의 두 불교가 마찰 없이 공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2)한국불교가 해결해야 할 과제

이제 상좌불교가 한국에 도입되어 정착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한국불교가 상좌불교를 적대시하거나 외면할 수만은 없는 실정이다. 어차피 이 땅에서 같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상좌불교의 특성과 장점은 수용하되, 단점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현재의 한국불교에는 아직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점들이 노출되고 있는데, 임승택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 정리했다. 즉 “①교리 체계와 수행 체계의 난맥상, ②승단의 세속화와 질적 저하, ③시대와의 소통 부재 등이다. 이들은 한국불교의 고질적인 병폐로서 오래전부터 지적되어 온 것이 사실이며, 다만 최근에 이르러 더욱 악화되는 모습을 보일 뿐이다.”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상좌불교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상좌불교의 기본적 특성과 현재의 양상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임승택이 정리한 상좌불교의 기본적 특성과 현재의 양상은 다음과 같다.

케이트 코스비(Kate Crosby)가 지적하듯이 테라와다불교의 기본 특성은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테라와다불교는 빨리어(Pāli)로 작성된 삼장(三藏) 문헌에 근거한다. 둘째, 테라와다불교는 부파불교의 산물로서 아비달마적 색채를 강하게 지닌다. 셋째, 테라와다불교는 율장(vinaya)에 근거한 독특한 수계 전통을 고수한다. 이들 셋은 테라와다불교가 지닌 본래적인 색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전통을 표방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유념해 두어야 할 필요가 있는 내용들로 판단된다.

이것이 테라와다불교 고유의 특성인 동시에 그들이 지녀온 자존감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테라와다불교에도 다른 부파와 공유해 왔던 전통적인 관행들이 존속하는 것이 사실이다.

한편 현재의 테라와다불교는 위에서 언급한 특성들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멜포드 스피로(Melford Spiro)와 케이트 코스비(Kate Crosby)에 의하면, ①자기 변화(self-transformation)에 초점을 모으는 열반 지향적 테라와다(nibbānic Thera-vāda), ②미래의 삶과 관련한 행위의 공덕과 윤리성을 강조하는 까르마적 종교(Kammatic religion)로서의 테라와다, ③현세의 삶에서 세속적인 복락을 얻기 위해 부적과 의례 따위를 행하는 주술적 불교(apotropaic Buddhism)로서의 테라와다가 그것이다.

테라와다불교의 세 번째 양상은 “원래의 불교적 가르침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으로, 토착 신앙과 습합된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습합은 북방권의 대승불교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되기 쉽지만, 테라와다권에서도 엄연히 발견된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곰브리치(Gombrich)는 테라와다불교의 이러한 현상을 ‘변모한 불교’라고 표현했다. 그는 현재의 상좌불교는 경전의 불교(Textual Buddhism)와 행동의 불교(behavioural Buddhism) 사이에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상좌불교의 병폐까지 한국불교가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상좌불교의 특성 외에도 그들만의 고유한 정신과 전통이 있다. 그러나 현재의 상좌불교도 완벽한 것이 아니다. 앞에서 살펴본 세 번째 양상은 한국불교계에서 행해지고 있는 기복신앙과 다를 바 없다. 특히 현재 상좌불교 국가에서 널리 성행하고 있는 삐릿(pirit, 護呪)은 밀교의 주문과 다를 바 없다. 이 호주도 사실은 대승불교, 특히 밀교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다. 원래의 불교에서 벗어난 것임은 말할 나위 없다. 그 외 스리랑카의 보리수 신앙이나 태국의 호신불 신앙 등도 또 다른 기복신앙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대중적인 신앙까지 한국의 불자들이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3)상좌불교가 해결해야 할 과제

상좌불교가 한국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선결 문제들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임승택이 이미 제시한 바 있기 때문에 생략하고, 그 대신 여기서는 사단법인 ‘한국테라와다불교’가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앞에서 ‘한국테라와다불교’는 율장의 규정에 의해 ‘구족계를 받은 비구가 최소한 4명 이상이면 상가가 성립된다.’고 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4명으로는 완전한 상가라고 할 수 없다. 4명으로는 할 수 없는 갈마가 있기 때문이다. 《빨리율》에 갈마를 할 수 있는 상가의 인원수를 제시하고 있다.

상가에 다섯 가지가 있다. 4人衆 比丘僧伽(catuvaggo bhikhusaṅgho)·5人衆 比丘僧伽(pañcavaggo b.)·10人衆 比丘僧伽(dasavaggo b.)·20人衆比丘僧伽(vīsativaggo b.)·過20人衆 比丘僧伽(atirekavīsativaggo b.)이다.
비구들이여, 이 가운데 4人衆 비구승가는 授具足戒·自恣·出罪의 세 가지 갈마를 제외하고 나머지 일체의 갈마에 있어서 여법화합의 갈마를 할 수 있다.
비구들이여, 이 가운데 5人衆 비구승가는 中國에서는 授具足戒와 出罪를 제외하고 나머지 일체의 갈마에 있어서 여법화합의 갈마를 할 수 있다.
비구들이여, 이 가운데 10人衆 비구승가는 出罪의 한 갈마를 제외하고 나머지 일체의 갈마에 있어서 여법화합의 갈마를 할 수 있다.
비구들이여, 이 가운데 20人衆 비구승가는 일체의 갈마에 있어서 여법화합의 갈마를 할 수 있다.
비구들이여, 이 가운데 過20인衆 비구승가는 일체의 갈마에 있어서 여법화합의 갈마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대부분의 갈마는 4비구승가에서 행할 수 있다. “다만 구족계를 주는 갈마와 자자, 출죄의 세 가지 갈마를 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자자갈마에는 ‘수자자인(受自恣人)’을 세우기 때문에 인원수가 1인(人)을 제외한 계산을 필요로 한다. 그 때문에 5비구승가가 되어야 비로소 자자갈마를 행할 수 있다. 다음으로 구족계를 주는 갈마는 비구가 되는 것을 허가하는 의식이므로 상가로서는 중요한 의식이다. 구족계를 받으면 사방승가 일원이 되기 때문에 그 지역의 현전승가 문제일 뿐만 아니라 바로 상가의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이다. 부적당한 사람이 상가에 들어와서 상가의 평화를 깨뜨리거나 세간의 비난을 받을 만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 때문에 상가는 구족계를 줄 때에 그 사람이 상가의 생활에 적합한지 어떤지를 여러 가지로 심사하는 것이다. 그 심사는 적은 사람의 숫자로 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기 때문에 수구족계갈마는 원칙적으로 10비구승가에서 행하는 것으로 정하고 있다.”

이러한 율장의 규정에 의해 한국에서 새로운 출가자들이 구족계를 받아 상좌불교의 전통을 이어갈 때, 비로소 완전한 상좌불교가 한국에 정착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율장에 의한 상가의 운영 체계를 하나하나 정착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현재의 ‘한국테라와다불교’는 오직 위빠사나 수행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위빠사나 수행은 테라와다불교의 일부분이지 전체가 아니다.
그리고 현재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위빠사나 수행 단체들은 너무나 많아서 파악하기조차 어렵다. 이들 단체의 성격을 임승택은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①한국인 재가자를 중심으로 한 단체, ②한국불교 종단에 소속된 출가자를 중심으로 한 단체, ③테라와다불교 소속의 한국인 출가자를 중심으로 한 단체, ④테라와다불교 종단에 소속된 단체 등이다.

이 중에서 ③과 ④는 테라와다 전통을 한국에서 그대로 실천하려고 한다. 특히 ④의 경우는 미얀마의 포교원 성격을 띠고 있다. 이러한 활동은 분명히 테라와다불교의 전파와 관련이 있다. 이러한 단체들과 ‘한국테라와다불교’가 어떤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는다. 다만 한국인 재가자를 중심으로 한 단체는 상좌불교를 수용한 것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본다.

또 하나 해결해야 할 과제는 테라와다불교에서 행해지고 있는 출가자의 생활 방식을 어떻게 한국에 뿌리내릴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현재 테라와다불교 국가에서 행해지고 있는 출가자의 생활 방식은 붓다 당시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테라와다불교는 율장의 규정에 의해 운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활 방식을 그대로 한국에서 적용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특히 탁발은 출가자의 삶의 방식 가운데 하나일 뿐만 아니라 출가·재가의 관계를 유지해 주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문화권에서는 탁발이 좋은 의미로 전달되지 않는다. 특히 도시의 빌딩 숲에서 탁발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한 인도문화의 한 단면까지 이식할 필요가 있겠는가? 중국 선종의 가풍으로 자리 잡은 자급자족의 정신은 오히려 미래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은 아닐까? 이러한 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4. 맺음말

본고에서는 크게 두 가지 주제를 다루었다. 하나는 한국불교와 상좌불교의 만남의 역사이고, 다른 하나는 양자 간의 관계 정립과 과제에 관한 것이었다. 먼저 만남의 역사에서는 고·중세와 근현대로 구분하여 고찰하였는데, 고대 한반도에 소승 20부파 가운데 설일체유부가 들어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현재의 상좌불교는 아니다.

근대에 이르러 상좌불교와 접촉은 있었지만, 상좌불교가 전래되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현대에 이르러 상좌불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열풍의 영향으로 직접 상좌불교국가에 가서 구족계를 받은 한국의 스님들이 점차 늘어나게 되었고, 그들이 귀국하여 ‘한국테라와다불교’라는 종교단체를 결성하게 되었다. 이것이 최초로 한국에 상좌불교가 도입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외국의 전도승에 의해 전해진 것이 아니라 한국 불교도들의 필요에 의해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것이기 때문에 ‘전래(傳來)’가 아니라 ‘도입(導入)’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한편 양자의 관계 정립과 과제에 대해서는 우선 양자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서로의 다른 전통을 존중하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이제 상좌불교의 승단이 한국에 설립되었다. 뿐만 아니라 수행적인 측면에서는 간화선(看話禪) 전통의 한국불교에 위빠사나(Vipassanā, 觀法) 수행이 깊이 들어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불교가 상좌불교를 외면한다고 해서 외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형태로든 상좌불교는 점차 그 영향력을 확대해 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부정적인 시각에서 상좌불교를 적대시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좌불교에서 배울 점을 배우되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잘못된 부분을 개선해 나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특히 상좌불교의 교리와 교단의 조직과 운영 방식 혹은 체계, 계율 준수 등은 한국불교에 시사(示唆)하는 바가 매우 크다. 한국불교 내부에 스며들어 있는 중국의 도가적 전통과 바라문적 전통 등은 하루빨리 청산되어야 할 유산이다. 그러나 신앙적·실천적 측면에서 보면 무조건 상좌불교를 추종해서는 안 되는 측면도 있음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

 

마성 /  팔리문헌연구소장,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원 겸임교수. 스리랑카팔리불교대학교 불교사회철학과를 졸업, 동 대학원에서 철학석사(M.Phil.) 학위를 받았다. 태국 Mahachulalongkornrajavidyalaya University 박사과정 재학 중. 저서로는 《마음비움에 대한 사색》 등이 있으며, 4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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