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인의 열광주의 심리현상과 진정제로서의 불교

 

김형효 교수

한국인의 종교적 열광성은 사유의 논리성이 결여된 상태에서 감정적 맹목적 신앙에 기인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한국인의 맹목적 신앙의 열도는 기독교의 광란적 신앙 형태와 밀접한 연관성을 띠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최근에 몇몇 회교국들에 파견된 한국 기독교 선교사들이 회교국가의 법을 위반하여 문제를 야기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미 회교를 종교로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기독교로 개종하라는 것은 회교를 국교로 채택하고 있는 나라들에서는 엄청난 일로 여겨지겠다. 이것은 과거 한국에 기독교가 전파됐을 때에 과거의 모든 종교를 다 부정하고 오직 기독교만을 유일신앙으로 여겨야 한다는 19세기식의 선교활동을 연상시킨다. 그때에 한국은 과거의 전통문화가 지니고 있었던 취약한 과학기술문명에 대한 열등감으로 그런 기독교식의 유일신앙의 배타주의가 불행히도 먹혀들었다. 동양 삼국 가운에 한국이 가장 열성적으로 기독교화된 현실적 배경을 지녔다.

 

또 천주교의 이입 역사를 보아도, 한국은 세계 천주교 선교사에서 아주 특이한 성격을 노출한다. 프랑스 선교사가 국법으로 금지된 포교 활동을 하기 전에 이미 한국인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천주교를 새 시대의 구원으로 여겨 프랑스적 천주교가 한국에 착근(着根)하기를 갈망했었다. 그리하여 스스로 순교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 당시 조선시대에 한국의 국교였던 유교가 일반 백성의 열망을 담아내지 못했다는 유교의 한계와 깊은 연관성이 있을 것이다.

한국은 종교적 선택의 차원에서 아주 특이한 요인을 안고 있다. 삼국시대의 원시적 신도(神道)인 샤머니즘이 그 당시에 유입된 불교로 나라의 정신문화가 일시에 변경되었고, 그것이 고려시대까지 연장되었었다. 고려시대는 유불(儒佛)의 혼재 시대였다. 그 다음에 불교를 배척함으로써 조선 국기의 터전으로 삼았던 조선 역사는 오로지 유교만을 숭상하던 그런 시대였다. 불교가 연명되었지만, 그것은 겨우 명맥만 간신히 유지하던 그런 빈곤의 시대였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천주교가 유교를 대신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천주교도인 황사영(黃嗣永)의 백서(帛書)에서 주장되기도 하였다. 여기서 프랑스군의 내정간섭을 그 백서가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일본에 의한 을사늑약에 의한 강점과 프랑스의 세력 약화와 미국의 압도적 영향으로 프랑스적 천주교가 미국의 기독교로 대체되었었다. 이런 사실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이것은 한국인이 일반적으로 지니고 있는 감정적 호오(好惡)의 단순성과 논리적 사유의 부재와 흑백적 감정의 선명성과 도덕적 순수성에 대한 열망으로 치닫는 종합적 열광의식과 유관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이런 감정적 단순성과 논리성에 대한 부재가 초래하는 열광의식(fanaticism)이 한국적 감정의 쏠림현상과 동시적이겠다. 그런데 이런 한국인의 열광적 쏠림현상은 한국인의 집단적 무의식으로서의 무교적(巫敎的) 신바람(神明) 현상과 직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의 신바람 기질은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에 기록된 동이인(東夷人)이 가무음주(歌舞飮酒)를 유달리 좋아한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지금도 도처에 있는 술집과 노래방의 성업(盛業)과, 한국인의 정치사회적 데모의 과격한 빈도는 이 신바람 현상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한국인의 열광의식은 대단히 격정적이다. 무교적 신바람이 광란과 격정으로 치닫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광란과 격정이 때로는 엄청난 에너지의 고양을 폭발시키기도 한다. 예컨대 천주교의 순교행위, 가열찬 독립운동과 노동운동과 뒤이은 민주화운동, 그런가 하면 “잘살아 보세”의 새마을운동, 월드컵의 열광적 응원 열기(어떤 불상사도 발생하지 않았음), 기독교의 맹렬한 전교 활동과 목사의 열렬한 설교와 신도들의 “할렐루야”라고 외쳐대는 “얼씨구”와 같은 맞장구, 그리고 싸구려 연애 연속극에서도 악쓰는 TV드라마의 빈번한 등장 등이 다 일관된 상관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바람 현상의 급격한 감정고양 상승과 감정수축 하강 현상은 또 역사적으로 몽골제국의 급속한 팽창과 순식간의 수축 현상과 상관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현상은 몽골제국뿐만 아니라, 거란제국과 여진제국의 부침 현상과도 다 긴밀한 역사적 맥락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것은 한국인의 냄비기질을 연상시킨다.

격정적인 신바람 현상은 20세기 프랑스의 가톨릭 철학자인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이 경고한 ‘추상의 정신(l’esprit d’abstraction)’과 유관하다. ‘추상의 정신’은 과격한 단순 판단에 의한 이데올로기적 사고방식의 극성을 뜻한다. 지금도 딴 나라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한국 사회의 특이한 좌우의 이데올로기의 극렬한 대립, 민주화 이데올로기 운동(‘민주산악회’와 ‘민주구두병원’ 등의 명칭을 상기하기 바람)= 이분법적 사고방식의 극성(흑백적 사고방식)=기독교인들이 자주 되뇌이는 ‘우리’ 크리스찬 의식 등은 다 한국인의 격정적 감정의 흐름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한국적 쏠림현상과 흑백논리의 종교적 정치적 단순성이 몰고 오는 이데올로기의 광란에 대응하는 불교문화의 처방약은 무엇일까? 최근에 불교계가 역시 쏠림현상의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오히려 더 들뜬 격정과 격양의 감정을 나타내고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불교계를 위하여 매우 우려스럽다고 아니할 수 없다. 격정적이고 격앙된 한국인의 생활감정의 진정제로서의 역할과 변덕이 죽 끓듯 하는 냄비기질의 흥분을 가라앉히는 역할을 불교가 담당해야 한다. 우리는 늘 유교적 명분주의의 문화적 잔재로 격정과 격앙의 일상적 감정놀이를 도덕적 명분의 자각으로 대응하려 하는 그런 경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런 도덕적 명분의 주장도 또 하나의 쏠림현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감정의 집단적 격정과 격앙의 현상과 거기에 대응하는 도덕적 명분의 자각은 서로 섞이지 않는 두 개의 평행선으로 달리다가 그 명분은 언젠가는 사라지거나 꺼지고 만다. 왜냐하면 무의식적 감정의 극렬한 흐름이 긴장된 목적의식을 지니는 도덕적 명분의 주장으로 궤도수정을 한다는 것은 심리현상의 세계에 잘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노자가 일찌기 《도덕경》에서 암시했듯이, 까치발로 하루 종일 서 있을 수 없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투쟁의 자세를 하루 종일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런 자세를 취하는 것은 일시적 긴장을 요구하는 일이므로 하루 종일 지속하는 일상적 일로서는 적합하지 않기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명분에 의한 일시적 도덕적 긴장의 강화가 실로 현실적 일의 수정과 개혁에는 지극히 미약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국인들은 유교적 이데올로기에 의하여 너무 피상적이고 이념적인 명분 잡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런 명분론은 지극히 표피적이다. 조선시대의 정치적 명분은 언제니 유교적 이상사회인 요순지도(堯舜之道)의 실천이었다. 그러나 조선조 선비들이 쉽게 요순지도라고 하여도, 무엇이 정녕코 요순지치(堯舜之治)인지 정확히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모든 것이 막연한 관념의 안개에 불과하였다. 조선조의 유교적 현신(賢臣)인 정암(靜巖) 조광조(趙匡祖)의 이른바 ‘순일지도(純一之道)’가 무엇을 말하는지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과 유사하다. 그가 말한 ‘순일지도’는 철학적으로 대단히 고결해보이나, 실질적으로 공허한 정치적 슬로건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순일지도’는 명분상 순수하고 정결한 이념의 깃발로서의 가치 이상을 지시하지 못한다. 대한민국의 역사에서도 통일과 민주주의의 명분도 이름만 그러할 뿐, 실질적으로 나라를 통일의 길로 접어들게 한다든지, 민주주의에로 구체적인 진일보를 향해 걷는다든지 하는 실질적 효험에는 늘 둔감한 면을 지녔왔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조선조가 늘 친중화주의(親中華主義)의 이념을 내걸었던 유교적 명분의 고집 뒤에는 한 번도 중국 대륙의 실질적 힘의 지배자였던 만주족의 여진 세력인 청을 배척하고 경원시했던 사대주의의 명분적 행각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과 상통한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이들은 사라진 명나라에 충성을 바치고, 현존하는 힘의 국가인 청나라를 배척하는 자세는 큰 나라를 숭상하는 사대주의가 아니라고 말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유교적 사고방식을 무조건 옹호하려는 착각의 소산이다. 유교적 정통성에서 청나라를 보면 정통적인 중화족이 아닌 야만족인 만주 여진족이 힘을 앞세운 정권의 탈취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사라진 명나라에 대한 충성은, 사육신이 쫓겨난 단종의 복위를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이른바 거룩한(?) 충성을 바쳤듯이 그런 심정으로 친명배청(親明背淸)의 사대주의를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조선조의 이데올로기였다. 조선조는 한국인과 혈연적으로 더 가까운 여진족을 마다하고 중화족을 섬겼다는 것은 조선조가 섬긴 사대주의의 본질이 오로지 유교 원리주의 추구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님을 웅변으로 입증하는 것이다. 유교 원리주의가 곧 유교 명분주의고, 관념상 유교 순수주의의 허상을 쫓는 이념의 길과 다른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조광조가 부르짖은 ‘순일주의’의 이념은 바로 순수하게 한마음, 한뜻으로 유교의 이상을 정치의 현장에 구현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당위의 논리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2. 명분도덕주의를 벗은 불교의 사실주의적 인식

이제 우리는 당위적 명분주의의 허상을 과감히 버려야 할 때에 이르렀다고 주장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명분주의의 허상은 그 명분이 강조되는 동안 의식과 의지의 측면에서 힘을 주는 일시적 현상에 유사하다. 그러나 그 강조하는 시간이 지나가면 오래지 않아 그 명분적 실질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노자의 말처럼 “회오리바람도 아침나절 내내 불지 않고, 소나기가 하루 종일 올 수 없듯이” 의식이 의지적으로 강조하는 일도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한국문화는 오랜 세월 유교적 도덕주의의 압도적 영향으로 도덕적 의식의 무장으로 사회적 문화의 틀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도덕주의가 바로 당위주의이다. 당위의 교설이 지금 도처에 범람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당위주의의 범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 사회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다 한때의 강조 기간으로 끝나고 만다. 그것이 지나면, 다시 사회는 오랜 무의식적 인습의 관행에 의하여 지배되어서, 그 인습의 관행의 두터운 업(業)의 고리는 더욱 무거워져 갔지, 한 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불교가 한국의 정신문화에서 기여할 수 있는 일은 당위의 의무로서 파괴되지 않는 그 업의 테두리를 무력화시켜 나가는 일이겠다. 그 업을 우리는 열광주의(熱狂主義)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그 업을 우리의 역사적 공업(共業)이라 명명한다. 불교는 한국인이 무의식적 공업으로서 쉽게 빠져드는 공동적 열광주의를 진정시킬 수 있어야 한다. 달마 대사가 말한 가르침이 열광주의를 치유하는 가장 유익한 약이 될 것 같다. 달마 대사가 9년간 면벽의 수행을 하면서 안심법문으로 사람들을 가르쳤다. ‘바깥으로 인연을 떠벌리면서 자랑하는 것을 쉬고, 안으로 마음이 천식처럼 헐떡거리는 것이 없이 마음이 마치 장벽을 대하는 상태(外止誇緣 內心無喘 心如牆壁)’가 곧 안심법문의 요체라고 화엄종의 종밀(宗密) 대사가 그의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에서 달마 대사의 벽관(壁觀) 수행을 요약해서 말했다. 

심리적 열광주의가 우리를 심리적으로 열광케 하여 우리의 마음을 헉헉거리게 하는 것은 마치 천식증 환자가 외부의 공기와의 접촉에서 헉헉거리는 증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닮았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불교적 호흡법과 참선의 방식을 생활 속에 응용할 필요를 느낀다. 한국인의 집단적 심리의 쏠림현상은 감정적 우뇌의 기능만을 더 자극하는 애증의 분위기를 짙게 뿌린다. 애증의 우뇌적 감정문화는 우리의 문화에서 너무도 쉽게 흑백논리나 피아의 적대감정을 잉태하여 날카롭게 대결하여 싸우는 투쟁의 전투장을 방불케 한다.

정치는 현실적으로 나라와 그 백성의 실제적 이익을 겨냥하는 방편의 문제를 다루는 일인데, 한국의 정치문화는 생사를 걸고 진리와 비진리의 투쟁장으로 변하여서 그 사이에 어떤 중간지대의 애매모호한 영역이 사라진다. 조선조 건국을 그토록 반대했던 성리학자 정몽주의 어머니가 남긴 시라고 하는 이른바 “까마귀 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낸 까마귀 흰 빛을 새오나니, 창파에 조히 씻은 몸 더럽힐까 하노라”라는 시구절은 이미 까마귀의 악과 백로의 선으로 양립적으로 갈라서 있다. 도덕군자로서 백로의 편에 마땅히 서야 하는 선의 대리인들은 절대로 까마귀의 악에 의하여 오염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정치가 이(利)/불리(不利)의 방편관(方便觀)이 되지 못하고, 오로지 선/악의 원리관(原理觀)으로 정의되고 만다. 선악의 대결은 유교적 명분주의의 철학에서 보면 결코 공존하지 못하는 천사와 악마의 대결이 되고 만다. 조광조가 말한 정치의 순일주의의 이념도 결국 정치의 도덕주의의 지향을 의미하는 것이겠다. 정치의 도덕화는 언뜻 보면, 정치의 타락을 막을 수 있는 길인 것처럼 보인댜. 도덕적 타락을 막을 수 있고, 정치가 의(義)/불의(不義)의 갈림길에서 정의의 실천 방안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무엇이 정의인가? 보다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조선조 말기에 천주교를 탄압하던 위정척사파적(衛正斥邪派的)인 정의론과 천주교에 의한 시대 개혁을 열렬히 주장하던 황사영 등의 천주개혁파 등의 정의론과의 충돌은 거의 불가피한 정의론의 갈등이었다. 누가 더 옳은가?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현대판에서 타 종교를 타파의 대상으로 삼고 자기 종교의 확대만을 유일한 신의 사업으로 여기는 개신교적 정의와 그것에 저항하려는 불교적 정의와의 사이에 어느 것이 절대적으로 더 옳은가? 아마도 인류의 역사는 정의론의 개념론적 투쟁으로 일관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그러나 그 투쟁은 지금까지 확정적으로 정의된 바가 없고, 늘 갈등과 불만을 야기할 뿐이었다. 정의론은 동시에 전쟁론을 이끌어 왔다. 정의를 위한 투쟁은 정의를 위한 전쟁을 동반하였다. 투쟁이 곧 전쟁을 유발하였다. 도덕적이고 의식적 투쟁이 인류사에서 문제를 해결할 날이 요원하다.

불교는 그런 완결된 정의의 정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불교는 명분적인 도덕의 명분을 강조하지 않는 길을 추구한다. 이것이 불교적 생활철학이라고 여겨진다. 불교는 중생계가 이익의 터전이지, 정의의 확답이 결론 내려진 세계가 아님을 설파한다. 중생이 무엇을 단정적으로 결론 내리면 안 된다. 중생이 결론을 내려 보았자, 그 결론은 늘 편파적이고 부분적인 이익의 요인을 피할 길이 없다. 중생의 결론은 늘 편파심과 부분심의 강화로만 나아간다. 개념적인 의미에서 정의는 온전한 무편파심과 완전성이 이루어졌을 때에 가능하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중생들은 늘 어떤 이상주의의 투사에 의하여 정의가 실현되어야 하고 또 실현가능하다고 착각한다. 그런 이상의 결의가 굳건할수록 이 세상에는 더 편파적이고 부분적 고집이 생겨서 많은 중생들을 다치게 하고 어렵게 한다. 나치즘은 역사적 우환으로서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유대인들을 인위적으로 청소하면, 인류사는 고결한 아리아인들의 지배사회가 이루어지리라는 망상적인 착각에 빠졌다. 나치즘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마르크시즘도 그러하다.

사람들은 마르크시즘은 고결한 인류의 이념이고 나치즘은 사악한 악의 무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착각은 나치즘의 피해를 직접 겪은 서구인들의 통곡이 낳은 비명 소리에 우리가 감정이입이 되었기 때문이고, 또 미국을 중심으로 새롭게 일어난 유대인들의 선전 활동에 우리가 감명되었기 때문이겠다. 마르크시즘의 한 표상으로서 스탈리니즘의 포학성을 직접 경험한 동구인들과 소비에트인들은 서구인들이 나치즘을 고발한 것과 같은 심정으로 마르크시즘에 대하여 진절머리를 칠 것이리라. 나치즘과 마르크시즘은 다 함께 정의를 부르짖었다.

부처님은 정의의 실현을 강력히 주장하지 않았다. 나는 불교가 기독교에 비하여 역사의 정의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은 것을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와 유교와 같은 도덕의식에 침몰한 사상은 늘 정의의 성스러움을 추구할 것을 제의해 왔다. 그러나 불행히도 역사에서 정의의 성스러움이라고 여길 만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역사에서 인간이 사실적으로 관심을 같는 것은 이익이다. 인간은 무수한 이익의 쟁탈을 위해 피를 흘렸고, 목숨을 바쳤다. 현실적으로 인간들이 정의하고 부르는 것은 자기의 이익을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이든지, 아니면 이익 때문에 서로 다투는 현실의 꼬락서니가 너무 추해서 마치 이상적인 정의의 모습의 존재가 가능한 것처럼 이상의 망상을 그려본 것에 불과한 것이겠다. 그래서 의(義)와 이(利)를 대비해서 이(利)를 멀리하고 의(義)를 가까이할 것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은 의와 대비되는 이는 존재하지 않고, 흔히 사람들이 의라고 부르는 것은 이와 별개의 것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존재자)이 아니라, 실상 그것은 이기심의 다른 측면이라는 것이다. 즉 그 다른 측면이 바로 이타심이다. 정의나 의로움은 이익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다만 이익을 좋아하는 마음의 이타적 측면을 일컬을 뿐이다.

삼라만상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양식은 다 이익을 좋아한다. 이것은 다 자연의 존재양식의 선천성인 본능에 해당한다. 자연의 본능을 도덕의식은 다 나쁜 것으로 규정하려 한다. 마치 도덕의식은 반자연적 당위인 것처럼 간주한다.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은 그런 반자연적 반본능의 당위가 선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자연의 본능은 이기적이 아니다. 이기심은 인간의 사회생활의 지능 경쟁에서 생긴 산물이다. 대자연의 생명의 존재방식은 다 자기 생명의 확장에 이로움을 주는 것을 즐겨 찾는다. 이것은 본능적 행동이다. 당위적 사회도덕이 본능을 다만 나쁘다고 주장한다. 자연의 본능은 자기이익을 쟁취하기 위하여 타자를 해악으로 몰지 않는다. 오직 인간의 사회의식만이 이기심과 동시에 배타심을 추구한다.

이기배타심은 자연적 본능심이 아니라, 오직 인간만이 지닌 사회적 마음으로서의 사회의식일 뿐이다. 삼라만상이 지닌 자연의 본능적 마음은 이기배타적이 아니고, 자리이타적이다. 중생의 생물심은 의도적이거나 의식적으로 자리이타적 도덕적 선행을 하지 않는다. 동식물에게 도덕적 의식이 전혀 없다. 다만 자연의 무의식적 본능의 요구에 충실히 따를 뿐이다. 동식물은 도덕을 모른다. 선악이 그것들에게는 없다. 예컨대 동물이 먹이사냥을 하는 것은 인간의 도덕심에서는 잔인하고 끔찍한 일이지만, 그 사냥은 다만 먹고살기 위한 자기 이익의 실현 방편에 그칠 뿐이다. 타 생명을 빼앗는 일이 어째서 이타적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의도적으로 하는 의식적 이타 행위가 아니다. 타 생명을 빼앗지 않을 수 없는 자연의 필연성은 역설적으로 자연의 먹이사슬의 적절한 질서를 유지시키고, 동시에 타 생명의 건강증진을 촉진시키는 묘한 이타적 기능을 유지시키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의식이 배제된 무의식의 역할인데 결과적으로 이타행이 이루어질 뿐이다.

이익심이 자연적인 것은 자리이타적이고, 사회적인 것은 이기배타적으로 변한다. 불교가 가르치는 교설은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을 사회적 이기배타심보다는 자연적 자리이타심으로 나아갈 것을 속삭인다. 인간의 사회의식이 이기배타적이기에, 인간은 도저히 평온한 사회생활을 유지할 수 없으므로 강제적 도덕심이나 법의식을 앙양하여 사회질서를 유지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도덕의식의 앙양은 별로 효과가 없다. 왜냐하면 도덕의식은 당위적인 의무감으로 인간의 이기심을 억제하고 이타심을 발양할 것을 제고하지만, 당위적인 의무감은 우리가 앞에서 성찰한 바와 같이 일시적 긴장감을 요구하기에 피로와 스트레스를 초래하므로 오래 지속하지 못한다. 그래서 가장 실효가 있는 것은 강제적인 처벌 규정을 동반하는 법밖에 없다. 법을 무시하고 법을 위반하는 것을 취미로 여기는 사회는 결국 역설적으로 무법의 활약으로 그 사회가 붕괴되는 인과응보의 벌을 받는다. 자연적 본능과 사회의 인위적 법, 이 두 가지가 인간에게 마지막 남은 힘이다.

인간을 제외한 중생들은 지연적 본능의 힘으로 생존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이 본능의 힘이 너무 취약해서 본능적 생존의 기술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그 본능의 힘이 없는 대신에 지능의 작용이 본능을 대신해서 사회생활을 이루게 하였다. 지능은 인위적으로 기술을 터득하고 꾸미는 역할을 함으로써 생존의 기술을 만들어 낸다. 그중에 괄목할 만한 것이 있다면, 과학과 그 과학이 낳는 기술이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발명은 은근히 사회적 의식 속에 속임수와 이기심을 필연적으로 심어 넣음으로써 이기배타심을 만든다. 이익을 좋아하는 자연적 마음이 사회적으로 이기심을 낳고, 이것이 남몰래 자기 이익을 위하여 배타심을 짓는다. 불교는 법으로 이기배타심을 억제하고 준법하도록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본능이 자아내는 자리이타심을 발양하도록 귄장한다.

흔히 말하는 정의나 의(義)는 어떤 선의 가치로서 존재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익을 좋아하는 자연적 마음이 자리이타적으로 마음의 방향을 돌리는 태도에 다름 아니다. 정의는 이익의 개념과 별도의 고상한 존재자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연적 이익의 성향이 더불어 함께 존재하는 생명의 일반적 현상과 일치한다. 나에게 이롭다는 것은 남을 배척해서 나 홀로 이익을 챙기겠다는 이기심일 수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 이로 인하여 모두가 다 이익의 즐거움을 함께 누리는 이타적인 태도일 수 있다. 오직 이 후자의 경우에만 인간이 정의나 의라고 부를 수 있겠다. 정의나 의는 자연의 근원적 본능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불교는 결국 자연의 본능적 길을 배우도록 설법한다. 인간은 그동안 사회적 의식의 무의식에 의하여 자연적 본능을 아주 고약한 몰도덕적 작태라고 오해하도록 하였다. 본능은 비도덕적이지만, 결코 반도덕적인 것은 아니다.

그런데 자연은 인간으로 하여금 본능의 힘이 아주 미약하게 작용하게 함으로써 인간을 자유스럽게 활동하도록 하였다. 다른 동식물들은 본능의 제한 작용으로 일정한 성품을 띠도록 규정되었다. 동물들이 본능의 작용으로 일정한 규정의 궤도를 달리고 있으나, 인간은 부재에 가까운 본능의 희미한 자리에 지능의 힘을 대신 키워 왔다. 그와 동시에 베르그송(Bergson)의 표현처럼 인간은 공작인(工作人, Homo faber)이 되었고, 과학기술의 장인 자격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장인 자격은 인간의 두뇌를 지배하였지만, 그것이 인간의 마음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아니다. 본능의 부재에 가까운 인간의 마음은 규정성이 없고 무규정적 공(空)이나 무(無)로 그려진다. 바로 이 공이나 무의 자리가 곧 인간성을 본질적으로 특징화한다. 불성은 이 인간성의 본질인 무나 공의 절대적 무규정성과 같다. 맹자적 성선설이나 순자적 성악설과 같은 규정성은 다 실상을 제대로 알리지 못한다. 인간성의 본질은 공이나 무일 뿐이다. 이 공이나 무가 곧 여래장이고 불성이다. 공이나 무의 불성이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대변한다.  

도덕적 정의나 인의의 개념은 불교의 눈에서 보면, 가장 자연스러운 인간의 원초적 모습이 아니다. 그 개념은 이미 사회적 가치로 변색이 된 의미일 뿐이다. 부처는 인간이 아주 원초적 상태로 아무 내용과 의미가 그려져 있지 않은 자연적 모습으로서 텅 빈 허공과 같다. 이것이 인간의 자유다. 문자 그대로 무애자재하다. 공성(空性)으로 비치는 인간으로서의 부처는 무엇을 강력히 주장하지 않는다. 부처가 주먹을 불끈 쥐고 허공에 흔들면서 머리띠를 두르면서, 한국의 열사나 지사 또는 투사처럼 고함을 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한국은 너무 지사와 투사가 넘쳐난다. 이것이 한국병의 하나겠다. 여기에는 부처가 미소 짓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부처는 존재론적 사유를 생활화하는 인간이다. 존재론적 사유는 공이나 무처럼 모든 존재자들을 다 그대로 여여하게 존재케 하는 사유를 말한다. 선종의 3조 승찬 대사의 〈신심명(信心銘)〉의 한 구절처럼, “유즉시무(有卽是無)하고 무즉시유(無卽是有)하다(존재가 無이고 無가 존재이다).”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존재를 존재자처럼 오독하는 습관에 젖었었다. 존재는 무엇이라 규정되지 않고 개념화가 안 되므로, 존재(Sein=Being)를 존재자(Seiendes=entities)로 생각하는 인습에 빠졌었다. 이런 존재 망각의 폐단을 가장 먼저 깨달은 철학자가 독일의 하이데거다. 구름, 별, 시냇물, 조약돌, 산과 사람들은 다 존재자이지, ‘구름과 별과 시냇물과 조약돌과 산과 사람들이 존재한다’라고 말할 때의 그런 ‘존재하다’의 동사적 현상을 지칭하지 않는다. 너무도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은 존재와 존재자를 혼동해서 존재현상을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어떤 명사적 개념거리를 말하는 것으로 착각해 왔었다. 그러나 ‘존재하다’는 동사적 현상은 결코 개념으로 포착되거나 손가락으로 지칭할 수 있는 어떤 개체적 실체가 아니다. ‘존재하다’라는 현상은 모든 존재자들을 시간적으로 다 나타나게 하고 장소를 빌려주는 빈 허공과 유사한 것으로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승찬 대사가 언급한 ‘유즉시무 무즉시유’의 언명은 바로 이런 현상을 알기 쉽게 표현한 것이리라. 존재자가 아닌 존재의 현상은 공이나 무의 현상과 근원적으로 유사한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존재는 모든 존재자들을 다 무슨 형태나 방식으로든지  존재하게 하는 터전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존재의 공은 무엇을 강조하거나 의도하는 긴장감을 넘어서 모든 것을 다 용인하는 무위의 허공과 다를 바가 없다. 한국인의 쏠림현상은 이미 감정상 어떤 경향에 맹목적으로 쏠리는 어떤 업의 경향을 지니고 있기에 가능하다. 그 업이 한국인을 편협하게 만들고, 미치게 하고 어떤 것을 지독히 사랑하게 하고 또 반면에 그 어떤 것을 지독히 미워하게 만드는 성향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한국인은 이미 규정된 부자유의 화신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불행한 한국인이다. 한국인은 자기들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측면을 옹호하고 몰아내려는 결의로 늘 주먹 쥐고 머리띠 두르고 투쟁한다. 한국인은 미친 듯이 놀고, 술 마시고 불구대천의 원수를 만난 듯이 악쓰고 욕하고, 또 정반대로 기분이 좋으면 서로 껴안고 얼싸안는다. 한국인들은 무슨 일을 하려는 결의로 너무 꽉 차 있다. 매양 무슨 결의대회가 열린다. 그 결의대회의 효력이 며칠 가지 않는다. 그래서 냄비기질이라고 스스로 평가하기도 한다. 신묘한 이성주의가 우리를 이성적인 한국인으로 만들까 하고 시도하지만, 그것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불교가 한국인에게 주는 빛은 한국인들을 무심한 마음, 비어 있는 마음으로 가까이 인도하는 길이겠다. 잔뜩 긴장되어 있는 한국인들을 모두 편안하게, 쉬게 해 주는 방하착(放下着)의 가르침이 가장 하기 쉬운 길이리라.

우리는 선한 일을 하기 위한 결의대회를 자주 연다. 악을 추방하기 결의대회, 선을 실천하기 결의대회 등과 이런 모임이 인기가 있다. 그러나 세상의 구조는 선과 동떨어진 악을 오리기가 불가능하고, 선만을 살리는 선행의 행동이 가능하지 않다. 한국에 유난히 위선적인 정치인이나, 도덕군자가 많은 까닭은 이 선의 도덕을 유난히 숭상하기 때문이다. 정치하면서 자기는 돈에 전혀 손때를 묻히지 않았던 고결한 인사인 양 그런 모습으로 대중에게 비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정치의 생리상 돈과 인연이 없는 그런 무결한 정치인이 되기란 아예 불가능하다. 그러나 일반 국민의 눈에 그런 이가 오히려 더 절대청렴한 인간으로 등장한다. 위선이다. 그런 위선적 정치인과 도덕군자가 너무 흔하다. 그렇다고 한국이 도덕적으로 청렴한 국가인 것은 아니다. 사리사욕을 떠나서 돈을 개방적으로, 아니면 공익의 실천을 위하여 공개적으로 만졌느냐 하는 행위가 아주 중요하다. 절대로 선하고 절대로 거짓이 없고 절대로 악을 모르는 그런 사회인은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사회적 행위는 다 양면적이고 양가적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이 이중적이다. 돈 때문에 사람들이 아옹다옹하기에 돈을 저주하면서 아예 돈을 추방한 사회가 아주 이상적이고 불국토의 길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경제적으로 빈곤한 불국토는 불국토가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절대적으로 무소유의 길이 아니다. 그런 길은 인간에게 실천 불가능하다. 병이 들어도 약값도 없고, 영양실조인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사회는 부처님이 권장하는 사회기 아니다. 우리는 왜 《법화경》에 부처님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부자의 비유를 그토록 많이 들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불교는 가난한 이들에게 위안을 주기 위한 가르침이 아니다. 불교는 가난한 이들이 부자로 살기 위한 복락의 길을 가르친다. 이 세상이 근원적으로 풍성하고 가멸하다. 이것은 사실이다. 불교는 사실을 설파하는 가르침이지, 도덕적 당위를 사실의 진리인 양 추구하는 도덕윤리가 아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실이 다 양가적이고 이중적이다. 선이 오로지 선으로서만 새겨지는 것도 아니고, 악도 영원히 악으로서만 저주받은 것도 아니다. 선악이 서로 한 사실의 양면성으로서 이중적으로 존재하고, 그래서 외곬의 단가치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약과 독이 따로 실존하지 않고 같이 공존하는 존재방식을 지니고 있듯이, 세상만사가 다 선악의 이중성을 하나의 양면성으로 안고 살아간다. 그래서 불교는 오로지 선만을 강조하는 도덕윤리학적 교설이 아니다. 물론 불교도 방편적으로 선을 위하고, 악을 위하지 말라고 설교한다. 악은 나와 남들을 해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악은 자리이타의 행을 못한다. 그러나 불교의 궁극적 가르침이 선만으로 이루어진 왕국의 건립을 이상적으로 겨냥하지 않는다. 그런 이상은 망상이고 공상이기 때문이다. 불교는 불가능한 이상적 도덕윤리의 건설을 신봉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세상의 사실이 근본적으로 선악의 이중성을 한 단위로 짜여 있음을 인식하라는 것이다. 불교는 따라서 이상주의의 법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모든 사실의 본질을 알아서 미망에 빠지지 말라는 가르침을 중요시한다. 불법의 공부는 이상적 의무감을 지칭하지 않고, 사실적 바탕을 인식할 것을 더 귀하게 여긴다. 세상에 반드시 선악이 함께 병행한다는 것을 알고,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선만 쫓지 않고, 악에 젖게 되는 것을 늘 인식하고 알아차리는 것을 헤아리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선을 지금 행한다고 나의 행위가 선의 진군에 이바지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런 확신보다 오히려 나의 모든 행위를 세심하게 이중적으로 인식하는 마음의 행로가 더 중요하다. 불교는 한국인이 부르짖기 좋아하는 선의 전도사가 되기보다, 공심(空心)의 허한 바탕에서 온갖 것들이 다 일어나는 만사에 대한 세심한 관찰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런 마음의 공심에서 한국병이 치유될 수 있겠다. 

이런 이중적 존재방식의 법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방식이다. 원효 대사가 일찌기 설파한 이중성의 논리가 곧 동이론(同異論)의 사유다. 이 동이론의 사유 방식은 단가적인 동일론(同一論)의 사유를 대신하는 사상과 다르지 않다. 기독교의 동일론에 대하여 우리는 불교의 동이론의 사유를 매우 강조할 필요가 있다.

3. 서양의 지능적 논리에 대한 불교의 본능적 논리

흔히 불교는 논리적 사유를 초탈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논리를 초탈한 사유는 철학적으로 불가능하다. 논리를 초탈한 것이라고 해서 논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 서양의 논리가 개념적이고 원자론적이며 지능적인 일직선의 사유임에 반하여, 불교의 논리는 반개념적이고 卍처럼 쌍방의 얽힘을 동시에 바라보는 야생적 사유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야생적 사유(la pensée sauvage=savage mind)는 인류학적 용어로서 레비스트로스(Lévi-Strauss)가 말한 신석기 시대 인간의 기본적 사유에 해당한다. 즉 대대법적(待對法的) 사유로서 인류가 모든 것을 대칭적 관계로서 보았던 사고방식을 일컫는다. 이 대대법적 사유는 심리학자 융(Jung)이 말한 대극적 사유(Enantiodronie) 즉 음양적 사유와 같다. 이것은 서양의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단가적 사유인 원자론적 진리와 그 의미와 방향성이 전혀 다르다. 인류 역사의 진행은 지능의 논리로 흘러왔다. 즉 본능이 지워지고 지능이 승승장구하는 그런 방향으로 추진되어 왔다. 지성은 모든 점에서 소유의 향상을 꾀하는 방향과 같다. 인류사는 곧 지능사나 소유사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소유사라는 것은 물질적 경제적 소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정신적 지배를 말하는 도덕주의적 역사의식도 포함된다. 사회를 지배하고 정돈하기 위한 도덕적 노력도 정신적 소유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서양의 신학과 동양의 유학의 사고방식은 일종의 정신적 소유를 의미한다. 인류사는 경제와 도덕의 두 측면에서 소유의 발전을 기약하는 진행으로 추진되어 왔다. 

불교의 사유 논리는 이 지성(지능)의 진행 방향과는 정반대로 역추진한 논리를 지니고 있다. 석가모니가 살던 시대는 다신론에서 일신론으로 지향하던 그런 문명사를 대변한다고 한다. 다신론에서 일신론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은 소유의 철학에서 필연적 과정이겠다. 왜냐하면 일신론은 다신론보다 정신적 지배주의의 철학에서 볼 때에 더 유효한 소유론을 전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는 이런 역사의 추진현상과 달리 오히려 신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측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일본의 인류학자인 나카자와 신이치(中澤新一)의 소론이라고 한다. 이 인류학자는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에 근원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불교에서 가르치는 연성(緣生)이라는 것 자체가 바로 신석기 시대의 야생인들의 사고방식과 다르지 않고, 지능의 논리와 다른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지능의 사고논리와 다르다고 해서 논리가 없다고 봐서는 안 된다. 선가(禪家)의 반논리적 언어는 지능의 사유방식을 부정하고 해체하기 위함이지, 무논리성을 지향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지능의 논리는 개별적 존재를 단가적으로 먼저 사유하고 이어서 그 개별적 존재자들을 모아서 다시 상호 연결 부위를 추후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본능의 논리는 다양한 것들을 동시적으로 연계시켜 입체적으로 구성하는 논리이다. 제비는 집을 짓기 위하여 흙과 지푸라기와 자기의 침을 원융하게 두루두루 연결시켜 나가는 구조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흙을 지푸라기와 별도로 따로 떼어서 보지 않고, 자기의 입 속의 침과 다른 별개의 존재자로 읽지 않는다. 제비가 보는 흙은 이미 지푸라기와 침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사고방식을 해체철학자 데리다(Derrida)와 하이데거(Heidegger)는 차연(差延, différance/ Unter-Schied)이라고 불렀다. 세상의 사실적 사유는 곧 차연적 사유이고 이 차연적 사유는 연기적 사유의 다른 이름이다.

인류학적으로 야생적 사유는 하이데거에 의하여 본질적 사유(Wesen-tliches Denken)로 명명되었다. 하이데거가 말한 본질(Wesen)은 어떤 물체의 객관적 본성(Essenz=essence)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본질적 사유를 존재론적 사유라 보고, 이 때의 본질은 물질의 객관적 본성인 Essenz가 아니고, Wesen이라고 명명하였다. 하이데거는 이 Wesen은 ‘존재하다’의 동사인 ‘sein(to be)’의 과거분사인 ‘ge-wesen(having been)’과 상관적이라고 지적하였다. 즉 Wesen으로서의 본질은 ‘sein’ 동사의 과거분사인 ‘ge-wesen’의 의미와 유관한 것으로 현재완료형으로서 존재해 왔던 것으로 여겨진다. 즉 아득한 옛날부터 우리의 존재에 늘 존재해 왔던 본성(본질)과 다르지 않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류사가 존재 망각의 역사가 되어 왔었다는 것은 곧 본질 망각 즉 본성 망각이 되어 왔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즉 지능의 역사는 바로 본성의 은폐를 기도한 역사와 같다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야생적 사유와 하이데거가 언명한 존재론적 사유(본질적 사유)는 같은 것을 다르게 언급한 사상이라고 여겨진다. 우리는 ‘야생적 사유=존재론적 사유=음양적 사유=본능적 사유=본성적 사유’라고 읽어야 한다. 우리는 불행히도 본능을 너무 평가절하하는 사고방식에 습관화되었다. 본능은 우리가 짐작하듯이 충동적인 것이 절대로 아니다. 본능은 자연적 생존의 지혜로서 정확하게 자기의 영역을 고수한다. 본능은 너무 질서정연해서 인간의 소유적 욕심인 충동처럼 반질서를 낳는 그런 힘이 아니다. 동식물에게 각각 생존의 무기가 다양해서 특이한 차이를 이루고 있다. 동식물의 본능은 다 전문화되어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 인간의 본능은 어떤 주어진 전문성이 없이 막연하다. 즉 이미 앞에서 언명되었듯이 인간은 동물적 본능이 없이 거의 무본능적 존재양식을 띠고 있다. 이런 무본능적 사고방식을 우리가 본성이라고 부른다면, 그 본성은 공(空)이고 무이다. 이미 앞에서 언급되었듯이, 공은 무한한 자유의 가능성을 말한다. 불교가 말하는 불성은 곧 무한한 자유의 상징인 공의 본질을 뜻한다. 조주 대선사가 ‘개에게 불성이 있느냐’는 문도들의 물음에 양가적으로 ‘있다/없다’라고 진술한 데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고 보인다. 본능의 차원에서 개에게도 불성(충직성)이 있으나, 무한한 자유인 공의 차원에서 개에게 불성이 없다.

서양적인 신(神)의 개념에는 신은 절대자이고 불변자로서 자기동일성을 함의하고 있다. 신은 불(佛)과 달리 자기동일성의 실체로서 자기 확신에 가득 차 있다. 신은 자기 것으로 온통 가득 차 있기에 자기 것을 제외하고 다른 것을 수용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신이 이래서 자기 것만 알고 다른 것을 이단으로 배격한다. 그러나 불은 전혀 자기 것이 없다. 불은 공이고 무이므로 자기 고집이 없다. 불은 자기동일성을 강요하지 않고, 다양하게 얽혀 있는 색세계(色世界)의 존재방식을 가능케 하는 허여(許與)의 원천이다.

지능의 논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일률, 모순률, 배중률 그리고 라이프니츠(Leibniz)의 자기충족률로 대변되는 단일성과 선명성의 진리라면, 본능의 논리는 모든 것이 애매모호성의 현상으로 얽혀 있다. 선명성의 진리는 칼날처럼 쪼개져 있지만, 애매모호성의 진리는 선/악과 진/위가 차이가 나 있지만, 동시에 동거해 있는 차연의 도와 다르지 않다. 선악과 진위와 동이가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애매모호성은 프랑스의 현상학자인 메를로퐁티(Merleau-Ponty)의 철학 사상과 서로 만난다. 이것은 또한 원효 대사가 일찌기 강조한 동이론의 논리이기도 하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칼처럼 쪼개지고 갈라져 있는 것이 아니고, 서로 원융하여 왕래하면서 오가는 현상으로 보는 것은 모든 색세계가 공의 ‘살(la chair=flesh)’로 여기는 사고방식과 같다. ‘살’이라는 용어는 역시 메를로퐁티가 사용한 말인데, 일체가 살처럼 서로 함께 공감한다는 것을 말한다. 의상 대사가 말한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이라는 〈법성게〉의 어구도 이 살의 현상을 가리키는 것과 다르지 않겠다.

불교는 지능의 철학을 멀리하고 본능의 철학을 가까이한다. 선명한 지능의 논리와 달리, 애매모호한 본능의 논리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지능의 논리는 단세포적이고 개념적이지만, 본능의 논리는 모든 것의 읽힘장식을 동시에 보는 기호의 논리다. 노자가 《도덕경》 2장에서 밝힌 것도 장/단과 고/저와 유/무와 전/후를 상징하는 것은 개념의 논리가 아니고, 기호의 논리다. 기호의 논리는 개념의 논리와 달라서 독립적이지 않고, 철두철미 상관적이고 일의적인 개념과 달라서 이중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 석가모니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문득 새벽의 샛별을 보고 깨달았다고 하는 일화도 ‘빤/짝’ ‘빤/짝’ 하는 별빛의 상관성을 인식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개념은 고유한 의미를 띠고 있으나, 기호는 그런 고유성이 없다. 기호는 자기정체성이 없고, 다 ‘타자의 타자’에 불과하다.

실상은 모든 것이 애매모호하게 얽혀 있는 존재양식이므로 판단이 진리의 장소가 아니고, 사실의 정견(正見)이 진리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서산 대사의 가르침처럼 “불용구진(不用求眞, 진리를 애써 구하지 마라), 불용사중생심(不用捨衆生心, 중생심을 애써 버리지 마라)”이라는 말이 철학의 진실한 면모이다. 흥분을 잘하고 쉽게 결의를 잘하는 한국인은 명경지수와 같은 마음으로 실상을 관조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지사와 열사의 기분으로 너무 쉽게 현실에 뛰어들지 마라. 그것이 세상을 흐려 놓고, 우리의 공심과 허심을 망가뜨려 놓을까 두렵다. 우리처럼 이데올로기로 분열된 니라에서 통합을 가능케 하는 첩경은 자기주장의 강도를 더 높이는 것보다 오히려 각자의 마음을 비워 현실의 사실을 사실대로 읽을 수 있는 그런 마음의 평정심이 아니겠는가? ■

 

김형효 / 한국학 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서강대학교 석좌교수.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 졸업, 벨지움 루벵대학교 철학최고연구원 졸업(석·박사).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부원장, 대학원장 역임. 최근 저술로 《하이데거와 화엄적 사유》 《사유하는 도덕경》 《마음혁명》 《원효의 대승철학》 《나그네 3부작》 등이 있음. 열암학술상, 율곡학술상, 사우철학상, 원효학술상 등 수상.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