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흠 한양대 교수

편집자
 * 이 논문은 2007년 8월 2~3일 고려대에서 “Celibacy and Enlightenment/Salvation”라는 주제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서 “Desire and Enlightenment in Korean Buddhist Folk Tales, and its Meaning in Our Times(한국불교설화에서 욕망과 깨달음의 문제와 현재적 의미)”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영문논문을 필자가 1/2로 축약 번역하여 게재하는 것이다.

1. 머리말

《삼국유사》는 삼국시대에 불교가 이 땅에 들어와 수용되고 신앙에서 문화로 정착되는 과정을 기록하고 형상화한 역사 설화집이다. 여기에는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광덕과 엄장 등 금욕과 깨달음에 관련된 많은 이야기가 전한다. 금욕과 깨달음의 문제와 마주쳤을 때 당시 신라 민중들은 이에 어떻게 대응하여 설화로 형상화였으며 그에 담긴 의미가 21세기 오늘에 비추는 지혜의 빛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가늠해 보고자 한다.

2. 욕망의 완전한 소멸 통한 깨달음 - 광덕·박박·의상의 길

《삼국유사》 〈광덕과 엄장〉 조를 보면, 욕망의 완전한 소멸을 통해 깨달음에 이른 이야기가 전한다.

① 문무왕(661~681) 때에 사문이 있었는데 이름이 광덕(廣德)과 엄장(嚴莊)이다. 두 사람은 좋은 벗으로 밤낮으로 약속하기를 “먼저 안양(安養)으로 돌아가는 자는 모름지기 서로 알리자.”라 하였다.
② 광덕이 먼저 왕생하였다.
③ 엄장은 광덕의 처와 같이 살다가 어느 날 밤 정을 통하려 하였다.
④ 부인은 “자신의 남편이 십여 년을 같이 살았지만 일찍이 하룻밤도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고 16관을 닦았다.”라며 거절하였다.
④ 엄장은 몸을 깨끗이 하고 뉘우쳐 한 마음으로 쟁관법을 닦아서 또한 서방정토로 왕생하였다.

인간 삶의 모든 고통의 근원이 바로 불타는 욕망에 있다고 한 것은 인간 삶의 본질을 통찰한 붓다의 말씀이다. 광덕은 아내와 함께 10년을 살면서도 어떻게 단 한 번도 아내와 함께 잠자리에 들지조차 않았을까?
칠고(七苦)는 오온(五蘊)의 고통으로 귀결된다〔五取蘊苦〕. 칠고가 날마다 우리의 감각과 정신을 공격해오기에 인간의 몸과 마음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대상에 대한 즐거움은 집착을 낳고 이것은 고통을 야기한다. 광덕처럼 욕망과 집착의 완전한 소멸 없이는 고의 소멸도, 깨달음도 없다.

욕망의 소멸은 연기에 대한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모든 것이 서로 관련을 맺고 있고 인과관계에 의한 것이기에 공한 것을 알면 자성을 부정하게 된다. 자성을 부정하면 자성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다. 광덕은 아내조차 실상이 아니라 인연에 의해 빚어진 허상임을 자각하고 아내라는 존재, 아내에 대한 사랑과 욕망, 가족에 대한 생각조차 모두가 공(空)임을 깨닫고 오직 수행에만 정진하여 마침내 왕생한다.

광덕의 아내는 자신을 범하려는 엄장에게 “다만 밤마다 몸을 단정히 하고 반듯이 앉아서 한 소리로 아미타불을 불렀습니다. 또 혹은 십육관(十六觀)을 만들어 달관하여 밝은 달이 창에 비치면 때로는 그 빛에 올라 가부좌하였습니다. 정성을 기울임이 이와 같았는데 서방정토로 가지 않는다 할지라도 어디로 가겠습니까.”라며 광덕이 철저히 금욕을 하고 오로지 수행정진에만 힘을 써서 마침내 왕생을 한 연유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광덕의 사례를 요약하면 “고통의 원인이 집착과 무명에 있으니 이를 버리고 애써 수행 정진하면 누구나 왕생을 이룬다.”이다.

이는 바로 사성제이니, 광덕의 이야기는 사성제가 바로 해탈의 요체임을 말하고 있다. 욕망은 그 대상에 대한 집착을 낳고 고통을 야기한다. 연기와 무아를 알고 나면 그 대상과 그를 추구하는 주체가 모두 공이란 지혜를 깨우친다. 하지만, 욕망은 감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며, 이는 이성과 이해의 통제를 벗어난다. 때문에 지혜만으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욕망을 소멸시키려면, 이를 억누를 수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금욕에 부단한 선정이 따라야 하는 이유다.

반면에 엄장은 왕생을 갈망만 하였지 모든 것이 공이라는 지혜와 욕망의 소멸을 실천할 믿음과 선정의 실천이 없었다. 그는 광덕과 더불어 왕생을 염원하여 정진하였으나 광덕의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하고자 한다. 그가 여인의 실재와 욕망이 모두 허상이며 여인과 잠자리를 하는 것이 오히려 고통임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지혜가 따르지 않는 믿음은 맹목적이며 정신적 토대가 약하기에 언젠가는 파계할 수 있는 것이다. 엄장은 광덕의 아내와 관계를 가지려다 책망을 들은 후 깨닫고 그 후 쟁관법을 통해 정진하여 왕생한다. 이는 연기를 깨달아 모든 것이 자성이 없이 공함을 알고 나면 집착과 욕망이 사라짐을, 이를 통하여 철저히 금욕을 하고 정진하면 누구나 왕생할 수 있음을 뜻한다.

엄장의 예는 다른 의미도 전한다. 그는 광덕의 처와 자려다 꾸지람을 들은 경험, 광덕 아내의 뼈에 사무치는 말을 듣고 깊이 깨닫고 그도 수행정진에 힘써 왕생한다.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으니, 깨달음은 본래 엄장 속에 내재되었다가 이 일을 계기로 드러난 것이다.

이렇듯 무명만 없애면 본각이 드러난다. 경험을 통해서든, 정신적 자각을 하든, 아니면 양자가 종합적으로 작용하든, 무명을 소멸시키는 계기만 마련되면 깨달음은 저절로, 안으로부터 생긴다. 마치 임계치 이상의 물리적 충격을 받은 물질이 배열구조가 바뀌어 화학변화를 일으키는 것처럼, 깨달음이란 원래 깨달을 수 있는 바탕을 지니고 있는 인간이 어떤 계기를 통하여 연기와 무아에 대하여 새롭게 인식하고 자신의 정신과 몸 안에 간직된 온갖 경험과 기억과 의식을 찰나적으로 재배열하여 자신의 존재를 전혀 다른 존재로 거듭나게 하고 이 존재가 새로운 지평에서 진여실체에 다가가는 것으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자유롭고 평안한 상태에 이른 경지다. 이때 금욕은 깨달음의 지붕에 이르는 사다리다.

3. 회통의 깨달음 - 부득·원효·정수의 길

《삼국유사》에는 광덕의 길만 설화로 제시한 것이 아니다. 이와 반대편에 서는 설화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남백월의 두 성인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조이다.

① 백월산(白月山) 동남쪽 3,000보 쯤 되는 선천촌(仙川村)에 노힐부득(努?夫得)과 달달박박(흈흈朴朴)은 각각 암자에 살면서 부득은 부지런히 미륵불을 찾고, 박박은 미타불을 예배하고 염송(念誦)했다.
② 성덕왕(聖德王) 8년(709) 해질 무렵 나이는 20세쯤 되고 용모가 유난히 아름다운 낭자가 난초의 향기와 사향 냄새를 풍기면서 갑자기 북암에 와서 자고 가기를 청하였다.
③ 박박은 단호히 거절하였으나 부득은 “이곳은 부녀자가 더럽힐 곳은 아니지만 중생을 따르는 것도 역시 보살행의 하나일 것인데 하물며 깊은 산골짜기에 날이 어두웠으니 어찌 괄시할 수야 있겠소.”라며 맞아들였다.
④ 낭자는 해산을 하고 목욕하기를 청하였다. 부득은 불쌍히 여겨 여인의 목욕을 시켜 주었다.
⑤ 통 속 물이 향기를 자욱하게 풍기면서 금빛 물로 바뀌었고, 부득이 그 물로 목욕을 하자 미륵불로 변하였다.
⑥ 박박은 부득이 파계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왔다가 남은 물에 목욕을 하고 아미타불이 된다. 목욕통에 남은 물이 모자라 골고루 바르지 못했기 때문에 아미타불상에는 얼룩진 흔적이 있었다.
⑦ 경덕왕(景德王)이 즉위하여 백월산(白月山) 남사(南寺)를 세우고 미륵존상(彌勒尊像)을 금당에, 아미타불상을 강당에 모셨다.

백월산은 경남 창원시 북면 월백리의 뒷산이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은 성덕왕 8년(709년)에 이 산에서 수행하여 마침내 부처가 되었다. 이 이야기를 보면 철저히 금욕을 하며 수행 정진한 박박보다 여인을 받아들인 부득이 먼저 부처가 된다. 광덕과 엄장 설화에서는 계율을 엄격하게 지킨 광덕이 먼저 해탈을 이루었는데 부득과 박박의 설화에서는 이것이 뒤바뀐다.

이와 유사한 설화가 신라 땅, 경상남도 양산시 원효산에 전한다.1) 이 설화는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설화와 거의 같은 구성을 이루고 있다. 달달박박과 노힐부득 대신 의상과 원효, 낭자 대신 묘령의 부인이 등장하는 정도가 다를 뿐이다. 두 설화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통의 구조가 있다.

그것은 두 주인공의 욕망 극복 방법이다. 달달박박과 의상은 세속적 욕망을 철저히 소멸시켜버리고 엄정하게 계율을 지켜 깨달음을 얻는다. 반면에 노힐부득과 원효는 세속적 욕망 속에서 중생과 한데 어울려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 설화가 아니라 실제도 이와 유사하다. 의상은 자신을 지극히 사랑하는 선묘에게 눈길조차 돌리지 않고 불법으로 인도하였다. 반면에 원효는 요석 공주와 결혼하여 아이, 설총까지 낳는다. 그럼 왜 신라의 민중들은 의상이나 박박보다 파계를 한 원효와 부득을 먼저 깨달음에 이른 것으로, 더 큰 깨달음에 이른 것으로 묘사하였을까.

답의 실마리는 위 설화에서 부득이 여인을 받아들이며 한 이야기에 있다. 부득은 날이 저물어 찾아온 여인에게 “중생을 따르는 것도 역시 보살행의 하나일 것인데 하물며 깊은 산골짜기에 날이 어두웠으니 어찌 괄시할 수야 있겠소.”라고 말한다.

나 혼자만을 생각한다면 여인을 단호히 쫓아내고 철저히 금욕을 하면서 정진하는 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다. 하지만, 이 행위 때문에 여인은 밤중에 산중에서 고통을 당할 것이요 짐승에게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앞 장의 광덕의 아내의 어법을 빌어 “지금 여기에서 바로 내 앞의 가련한 중생을 구제하지 못하고서 어찌 부처가 되기를 꿈이라도 꾸십니까. 이는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라며 광덕의 처의 논리-금욕을 통한 깨달음의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할 수 있다.

단독자로서 나는 욕망을 증대하는 것이 나를 확대하는 길이다. 인간은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다. 조금 더 많은 소유를 하기 위하여, 자신의 결핍을 채워 만족의 상태에 이르기 위하여, 자신의 존재의 확대를 위하여 타자를 침해하고 약탈하고 폭력을 가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그럼에도 세상이 지옥으로 전락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는 인간이 선한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욕망 가운에서도 k칊ma, raga, tan.h칊 등은 버려야 할 욕망들이다. 하지만, 욕망은 사랑과 예술을 생산하고 영원한 것과 완성을 지향하려는 역동적인 힘이기도 하다. 우리 인간은 타인과 관계하여 공존하려는 욕망, 소유에서 존재로 다시 생성과 차이로, 일상에서 영원, 불완전에서 완전을 지향하려는 욕망 또한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들 욕망이 바로 실존과 자비행의 바탕이다.2) 극도의 고행과 극단의 쾌락을 모두 지양하고 중도에 서려 한 것이 붓다의 태도다.

다음은 연기와 무아에 대한 대승적 깨달음 때문이다. 보살행은 윤리적 당위일 뿐 아니라 연기의 지혜에서 비롯된다. 앞 장에서 연기의 소승적 깨달음이 철저한 금욕으로 귀결되었다면, 대승적 깨달음은 보살행을 낳는다. 나는 타자, 뭇 생명체들과 관련을 맺고 있다.

예를 들어, 수억 원에 이르는 환경비용을 지출하지 않고 비오는 날 폐수를 몰래 버리는 것이 자기 회사의 이익이라고 생각한 자본가가 있다고 치자. 그가 어느 날 윤리적이거나 종교적인 생각에서 이를 악으로 규정하고 중지할 수 있다. 그러나 선악의 문제나 판단과 관계없이, 그가 어느 날 자신이 버린 폐수를 먹고 자란 물고기를 자신이나 자신의 자식이 식용하면 병에 걸림은 물론 기형아도 낳을 수 있음을 알고 나면 폐수를 더 이상 버리지 못할 것이다.

 이처럼 지혜란 우주 삼라만상이 모두 원인과 결과로 맺어지고,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 아(我)란 없으며 공(空)임을 깨닫는 것이다.
우주 삼라만상이 모두 나와 관계를 맺는다. 가까이 주변의 사람, 내 얼굴에 비치는 햇살, 코를 드나드는 맑은 공기와 볼을 스치는 바람에서 멀리 한 점으로 빛나는 별들과 그 사이로 떠다니는 우주 먼지에 이르기까지 전 우주가 오늘 나라는 존재를 나로 존재하게 하는 데 관여한다.

연기를 깨닫고 나면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뿐만 아니라 모든 타자들, 지구의 모든 생명체들, 우주의 구성 성분들 모두가 ‘우리’의 범주에 들어온다. 길거리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던 두 사람이 제3자로부터 실은 두 사람이 이복형제라는 소리를 들으면 싸움을 중지하고 포옹할 것이다.

 이처럼 연기는 각 존재자를 우리의 범주에 속하게 한다. 이때 우리는 각 존재자들이 서로 소통하고 상호작용을 하면서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독립투사가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까지 희생하는 것에서 보듯, 각 존재자는 우리의 범주에 들어온 타자를 위해 자신의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거나 포기한다. 이처럼 연기에 대한 대승적 깨달음은 ‘욕망의 자발적 절제’를 낳는다.

욕망을 지향하는 존재인 인간이 욕망의 자발적 절제를 할 수 있는 셋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논리가 진속불이이다.

“또한 공하다”란 곧 진제를 융합하여 속제로 삼은 “공공(空空)”의 의미이니, 순금을 녹여 장엄구를 만드는 것과 같다. …… “또한 공한 것으로 되돌린다.”라 한 것은 이 속제를 다시 융합하여 진제로 삼은 것이니, 이것은 장엄구를 녹여 다시 금덩이로 환원시키는 것과 같다. …… 또 처음의 문(門)에서 “속제를 버려서 나타낸 진제”와 제2의 공 가운데 ‘속제를 융합하여 나타낸 진제’인 이 2문의 진제는 오직 하나요 둘이 아니며, 진제의 오직 한 가지로 원성실성(圓成實性)이다. 그러므로 버리고 융합하여 나타낸 진제는 오직 하나이다.3)

금을 녹여 금부처를 만들듯 진제를 녹여 속제를 만들며, 다시 금부처를 녹여 금덩이로 환원시키듯 속제를 녹여 진제로 만든다. 중생의 입장에서 보아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하는 것은 대승철학의 요체이다. 그러니 중생이 곧 부처요, 중생의 마음은 부처의 마음으로 본래 청정하다. 그런데 청정한 하늘에 티끌이 끼어 그 하늘을 가리듯, 일체의 중생이 무명으로 인하여 미혹에 휩싸이고 망령된 마음〔妄心〕을 품어 진여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세계를 분별하여 보려 한다.

그러니 유리창의 먼지만 닦아내면 맑고 푸른 하늘이 드러나듯, 모든 사람의 미혹하고 망령된 마음만 닦아내면 그들 마음속에 있는 부처가 저절로 드러난다. 깨달음과 해탈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 미천한 중생들이 연기와 무아를 깨달아 무명과 망심에서 벗어나 관행(觀行)으로서 끊임없이 수행 정진하면 누구나 진정한 깨달음에 도달한다.

하지만, 그리 마음 속 부처를 드러내는 것으로 완전히 해탈하는 것은 아니다. 이에 이른 사람은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들을 이끌어야 비로소 깨달음이 완성될 수 있다. 저 아름다운 연꽃이 높은 언덕에 피지 않는 것과 같이 반야의 바다를 완전히 갖추었어도 열반의 성에 머무르지 않으며,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과 같이 모든 부처님 무량한 겁 동안 온갖 번뇌를 버리지 않고 세간을 구제한 뒤에 열반을 얻는다.4) 이것이 진속일여이다. 속에서 진으로 나아가는 것이 상구보리, 즉 자리(自利)라면 진에서 속으로 나아가는 것은 하화중생(下化衆生), 즉 이타(利他)이다.

일심의 체(體)가 본각(本覺)이지만 무명에 따라 움직여 생멸을 일으키기 때문에 이 문에서 여래의 본성이 숨어 있어 나타나지 않는 것을 여래장(如來藏)이라 이른다.5) 여래장은 각(覺)과 불각(不覺)을 모두 지니고 있는데 불각에 해당하는 업상(業相), 전상(轉相), 현상(現相)을 없애버리면 바로 그곳이 나지도 사라지지도 않으며 자성(自性)이 청정(淸淨)한 깨달음의 세계이다. 그러니 지혜란 곧 본(本)과 시(始)의 두 가지 깨달음이요,6) 불각이 바로 본각과 같은 것이다.7)

이와 같이 중생과 깨달은 자가 별개의 존재가 아니고 본각과 시각, 불각과 각이 둘이 아니니, 먼저 깨달은 자는 항상 큰 자비로서 중생들의 고통을 없애주며 생사의 바다에 빠져 있는 중생들의 의혹(疑惑)을 제거하고 사집(邪執)을 버리게 하여 중생들이 열반의 언덕으로 나아가도록 하여야 한다.8) 그럴 때 그 또한 진정한 깨달음의 세계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9)

원효는 불일불이(不一不二)의 논리 또한 편다. 씨와 열매는 스스로는 공(空)하지만, 씨가 죽어 자신을 썩히면 싹이 나고 꽃이 피며 열매를 맺는다. 열매 또한 자신을 소멸시키면 씨를 낳는다. 공이 생멸변화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나 스스로는 공하지만 나와 너의 관계성에 대한 통찰을 하고 나의 욕망을 소멸시키면 타인을 존재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이 행위가 윤리적인 당위를 넘어서려면 중생들의 삶에 참여해야 한다. 그들과 뒹굴며 그들과 함께 슬퍼하고 기뻐해야 한다. 그러려면 오로지 너를 위해 자기를 버리고 비울 줄 아는 ‘자기비하의 비움’과 타인의 삶에 전적으로 동화하고 상호교감하는 ‘사귐’이 필요하다. 이 비움과 사귐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아직 욕망의 추구를 행복으로 알고 있는 중생들의 욕망 추구 행위에 동참해야 한다.

이를 실천하려는 보살의 경우 자신만을 생각한다면 욕망을 완전히 소멸시켜야 하지만, 중생들과 동참하여 그들의 고통을 없애주려면 그들의 욕망을 수용해야 하는 딜레마에 매 순간 빠질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필요한 것이 중도(中道)의 지혜와 실천, 차이의 사유다.

4. ‘지금 여기에서’금욕과 깨달음의 문제

지금 21세기는 욕망의 과잉 발산과 욕망의 과잉 억압이 상존하는 시대다. 욕망을 너무도 발산하여 사회가 해체될 지경인데 내면을 들여다보면 욕망이 과도하게 억압되어 진정 자유로운 주체는 없다. 한 사람으로 국한시켜 보더라도 수많은 이성들과 사랑 없는 성행위를 하는 것을 보면 욕망의 과잉발산인데, 그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이것이 실은 자본주의 체제, 국가, 이데올로기, 대중문화 상품의 조작에 의해 욕망이 과도하게 억압되어 생긴 일탈행위다.

의상식 수행을 지지하는 이들은 고통의 근원이 갈애와 집착에 있다며 선정삼매에 들어 욕망을 완전히 소멸시키려 한다. 이 경우 금욕이 깨달음의 길이다. 한 사람의 욕망과 고통은 이런 방식에 의해 승화될 수 있다. 이 시점에서 상기해야 할 것은 들뢰즈의 말대로 자본주의 체제에서 욕망은 하나의 흐름이라는 사실이다. 누구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속세와 완전히 인연을 끊은 소수의 승려나 자각한 이들은 암자에서 욕망을 완전히 금하고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승려조차도 자본주의 체제의 욕망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시장 속에서 그 원리대로 살고 있는 대중들은 불난 집에서도 또 불난 집에서 고통을 하고 있는 중생들이다.

정수 스님이 얼어 죽어가는 여인을 못 본 채 지나치고서 계율을 지키고 지혜를 가지고 선정을 하였다고 해서 부처가 될 수 있었을까. 고통 받는 중생을 외면하고서 부처가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연기는 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중생들을 위해 나의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는 것이 깨달음의 길이라는 지혜를 가져다준다. 진속불이는 설사 내가 깨달아 부처가 되었더라도 중생을 깨닫게 하지 않는 한 아직 부처가 아니라고 말해준다.

앞 장에서 말한 대로, 깨달음이란 어떤 계기를 통하여 온갖 경험과 기억과 의식을 찰나적으로 재배열하는 것이자 존재의 거듭남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깨달음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가 나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지혜이고 그를 위하여 그리로 가 그들과 함께 하며 그들의 고통을 없애 주는 것이 바로 자비행이다.

깨달음이란, 연기와 무아에 대하여 전혀 다른 차원으로 새롭게 깨달아 거듭난 존재가 세상과 자연과 뭇 생명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인식하고 그들의 고통을 덜기 위하여 자신의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고 제도와 자본, 미디어 등 선한 욕망과 자유의지, 깨달음의 지향성 등을 억압하거나 왜곡하는 것에 대해서는 저항하여 선한 욕망이 그들 마음과 몸 속에서 꽃을 피우게 하여 그들을 부처로 만들고 그로 인해 내가 부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깨달음이다.

의상식 수행은 절대 금욕을 통해서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계율이 몸이 되어 오히려 계율을 지키는 것이 자유라는 경지다. 하지만 이 방식의 수행으로 나는 깨달음에 이를지 모르지만,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고통하고 있는 중생, 환경파괴로 죽어가는 생명들을 깨달음에 이르게 할 수 없다.

반면에 원효식 수행은 인간의 얼굴을 하였다. 범인들과 한데 뒹굴며 그 속에서 욕망도 즐기고 생활도 하면서 깨달음을 얻는 방식이다. 완전하지 못하여 죄와 실수, 욕망 추구가 오히려 깨달음의 길이다. 그러나 거룩하지 못한 만큼 도를 훼손시킬 수 있다. 지표가 분명하지 않아 자칫 도의 길을 잃을 수도 있다.10)

21세기의 맥락에서 보면, 의상식 수행과 원효식 수행이 모두 하나다. 양자는 눈부처처럼 서로를 차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서로 닮으려 해야 한다. 전자는 나만의 금욕은 소극적 깨달음의 길이고 고통하고 있는 타자를 깨닫게 해야 내가 부처가 되고 진정한 깨달음에 이름을 알아야 한다. 후자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그들의 눈높이에서 그들과 어울리다 자칫 욕망의 늪에 빠져 깨달음의 근처에도 가지 못할 수 있음을 자각하여 깨달음이 곧 집착이란 자세로 끊임없이 부수고 또 부수면서 욕망을 더욱 소멸시키면서 진여실체를 향한 길로 정진해야 한다.

이처럼 지혜로서 모든 경계를 파악하여 온갖 사념과 망상을 떨쳐버리고 금욕을 하고 지행(止行)과 관행(觀行)을 쌍으로 부려 깨달음에 이르고, 먼저 깨달은 자는 항상 큰 자비로서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중생들의 의혹을 제거하고 사집을 버리게 하고 그들을 억압하고 있는 것들에 저항하여 그들이 모두 깨달음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 그럴 때 그 또한 진정한 깨달음의 세계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이럴 때 필요한 인식이 차이의 사유, 눈부처의 주체성이다. 원효는 변동어이(辨同於異)의 논리를 편다. “같다는 것은 다름에서 같음을 분별한 것이요, 다르다는 것은 같음에서 다름을 밝힌 것이다.”11) 원효는 동일성은 타자성에서 같음을 분별한 것이요, 타자성은 동일성에서 다름을 밝힌 것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당장 옆에 있는 사람과 마주 보고 눈을 맞추라. 똑바로 상대방의 눈동자를 바라보면 상대방의 눈동자 안에서 내 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이를 한국어로 ‘눈부처’라 한다.

내 모습 속에 숨어있는 부처, 곧 타자와 자연, 약자들을 사랑하고 포용하고 희생하면서 그들과 공존하려는 마음이 상대방의 눈동자를 거울로 삼아 비추어진 것이다. 그 눈부처를 바라보는 순간 상대방과 나의 구분이 사라진다. 상대방을 살해하려 간 자라 할지라도 눈부처를 발견하는 순간 상대방에게 폭력을 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변동어이의 차이는 두 사상(事象)이 서로 차이를 긍정하고 상대방을 수용하고 섞이면서 생성된다. 차이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다른 것을 만나서 그것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킨다.12)

나와 타자 사이의 진정한 차이와 내 안의 타자를 발견하고서 자신의 동일성을 버리고 타자 안에서 눈부처를 발견하고서 내가 타자가 되는 것이 변동어이의 차이다. 변동어이의 차이의 사유로 바라보면, 이것과 저것의 구분이 무너지며 그 사이에 내재하는 권력,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의 담론은 서서히 힘을 상실한다.13) 20세기가 전쟁과 학살의 세기가 되고 부시와 라덴이 철저히 대립하는 근저에는 동일성의 사유가 자리한다. 하지만 변동어이의 사유는 나와 타자, 내 안의 타자와 타자 안의 나를 차이로 포용하는 것이자 그 타자가 자신의 친구든 원수든, 기독교도든 이슬람이든, 자연이든 인간이든 그를 부처로 만들어 내가 부처가 되는 사유다.

5. 맺음말

라깡이 지적한 대로, 욕망은 신기루이다.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욕망인데 만족하는 순간 욕망은 사라지기에 아무도 그에 이른 사람은 없다. 욕망의 대상을 향해 고단한 길을 가지만, 갈 때는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추구할 유일한 대상이라고 생각하지만, 도달해 보면 그것은 그것이 아니다.

그에 이르고 나서야, 때로는 죽는 순간에서나 자신이 그토록 추구한 대상이 한갓 허상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 인간 삶의 속성이다.  욕망이란 나를 채우려는 것인데 욕망할수록 나에게서 멀어지며 욕망은 만족인데 만족을 느끼는 순간 사라져버리는 역설을 자각하는 것, 나의 삶이 다른 타자들, 나아가 모든 생명들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고 그를 위하여 나의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는 것, 욕망을 과잉 억압하는 것에 저항하여 서로가 선한 욕망이 샘솟도록 하는 것 - 이것은 선이 아니라 지혜다.

이제 인류가 사는 길은 단 한 가지 선택밖에 남지 않았다. 더 이상 욕망을 확대한다면 지구사회는 멸망을 맞는다. 욕망을 수용할 여분이 지구에는 더 이상 없다. 전화 다이얼에 빈 번호가 있어야 수 억 개의 번호 조합을 만들 수 있고, 예전엔 폐수의 양과 강물이 스스로 정화할 수 있는 양 사이에 격차가 있어 폐수를 버리더라도 늘 강물이 맑게 유지된 것에서 보듯, 무위(無爲)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빈틈〔虛〕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지구촌 사회는 그 빈틈이 사라졌다.

이제 욕망을 확대하는 것보다 자발적으로 절제하는 데서 행복을 더 느끼는 것으로, 나만의 깨달음이 아니라 과잉억압당하고 있는 중생들의 고통을 덜기 위하여 그들의 자유의지, 선한 욕망, 깨달음의 지향성 등을 억압하는 것들에 저항하여 그들을 자유롭게 하고 그를 통하여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 삶의 방식을, 패러다임을, 사회체제와 제도를 전적으로 전환하여야 한다.

붓다는 중생을 구제하고자 남김 없는 열반〔無餘涅槃〕에 들지 않았다. 보살은 모든 중생들이 부처가 될 때까지 자신의 부처됨을 미루었다. 자연이든, 인간이든, 진정 사랑하는 이는 상대방에게서 부처를 발견한다. 그 부처를 발견하는 순간 그 또한 부처가 된다. ■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본지 편집위원. 저서로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 등과 다수의 논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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