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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법, 그 아름다운 승화 / 김석준
[43호] 2010년 06월 25일 (금) 김석준 문학평론가

깃털처럼 가벼운 듯하지만, 너무도 무거운 생에의 형식. 한 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우리는 늘 삶이 만들어내는 운명의 차크라를 아름답게 승화시킬 의무를 걸머진 채 한 세계를 건너도록 예정되어 있다. 불안불안하고 불완전한 생. 앞으로도 질주할 수 없고 뒤로도 물러설 수 없는 낭패(狼狽). 모든 문제는 욕망의 함수에서 비롯한다.

대저 우리는 어떤 문양을 간직한 채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가. 아니 생이 그 자체로 무명(無明)의 덫에 빠져 고(苦)의 늪 속을 헤매는 것으로 판명 날 때, 우리는 어떤 혜안을 간직한 채 삶−시간−세계를 살아가는가. 역시 문제는 분별지(分別智)에서 비롯한다.

우리는 인연을 맺고 풀어내는 그 사이에 존재한다. 인연에는 상생의 선연도 있고 상극의 악연도 있다. 그런데 그 인연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마음자리에 있는 것이 아닌가. 똥막대기에서 부처님의 형상을 읽어내듯, 모든 인연은 스승이다. 아니 우리 앞에 전개되는 그 수많은 인연은 그 자체로 필연이다. 따라서 이 세계의 운동은 결코 우연일 수 없다. 생도 필연이고 사도 필연이다.

우리는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필연을 사는 역동적인 운동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이, 생은 선연(善緣)을 만들어 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악연 속에 새겨진 생 자체의 의미 깨달음이거나 악연의 선연으로의 승화 과정이다. 우리는 그렇게 생의 바다를 건너 피안의 세계에 이른다.

한데 진짜 중요한 것은 천변만화경처럼 변화하는 마음의 정체이다. 우리는 각자 처한 자신의 현재의 초상을 마음자리에서 찾아야만 한다. 하여 생도 마음이고 죽음도 마음이다. 우리는 마음먹기에 따라 전혀 다른 삶−시간−세계를 살아가게 된다. 하나 밀어닥치는 시련, 하나 점점 더 죽음 쪽으로 휘돌아가는 생에의 구조. 바로 이때 마음의 눈이 트인다.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에서 치앙 갈매기가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에게 말한 금언이 떠오른다. 공간 이동 혹은 마음의 진법. 우리는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는다. 삼매에 이른 듯,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는 듯, 가장 빨리 나는 법을 생각하게 된다. 마음이 거기에 가 있는 순간, 몸 또한 거기에 가 있다. 몸과 마음은 하나다. 몸과 마음은 결코 둘일 수 없다.

한데 여기에는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다. 우공이산(愚公移山). 맞다. 물론 마음이 첫 번째로 중요하다. 그다음은 실천이다. 우리는 소승적 태도에서 대승적 실천으로 넘어가야만 한다. 우리는 자기만의 깨달음이 아니라, 그것을 타자에게 이르게 만들어야만 한다.

설령 그것이 야차에게 이를지라도, 나의 깨달음이 너에게 이르러 너를 감화시킬 수 있다면, 야차면 어떻고 히틀러면 어떤가. 우리는 그렇게 모든 것에서 깨달음을 얻어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자크 라캉이 “나는 타자다.”라거나, “나는 내가 아닌 곳에서 말한다.”라고 언명한 테제는 불교적 인연법의 서구적 사유이다.

우리는 타자가 되는 과정이다. 우리는 타자를 알지 못하고 나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자에로 이르는 인연, 즉 타자(너−타자 혹은 나−타자)이다. 그것은 역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들이 깨달음의 대상인 동시에 깨달음의 실체이다. 우리에게 허여된 인연에 악연이란 존재할 수 없다.

아니 설령 그것이 악연으로 풀려 삶−시간−세계를 고통의 함수로 수렴시키더라도,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한 그것은 선연이다. 왜냐하면 삶−시간−세계란 그 자체로 마음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하여 푸시킨이 〈삶〉이라는 시에서 말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마라”는 금언을 우리는 명심해야만 한다. 이 땅 위의 삶이란 그저 한낱 환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생이 주어졌기에 그냥 온 것이고, 생이 다하면 그냥 가면 그만이다. 인연법이란 오고 가는 이치에 대한 깨달음이다.

어쩌면 깨달음의 진리란 것도 따지고 보면 그리 높은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진리란 푸코 식의 앎에의 의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空)의 공 됨을 아는 것도 아니다. 알면 어떻고 모르면 또 어떤가. 알고 모름 사이에 절대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앎도 넘어서고 모름도 넘어서는 그 순간이 깨달음의 진리가 현현되는 순간이다. 우리는 ‘바로 지금 여기’를 살면서 ‘너머’를 사유하는 자이다.

그리고 그 역 또한 성립시켜 우리는 ‘너머’를 추상하면서 첨예한 ‘여기 이 순간’을 산다. 우리는 ‘너머’이면서 ‘현재’이고, ‘현재’이면서 ‘너머’이다. 하여 우리는 중음신이다. 우리는 살아 있되 죽어 있고, 죽어 있으면서 살아간다. 그것은 우리가 삶도 모르고 죽음도 모른다는 사실을 성립시키지만, 역으로 그것은 삶도 알고 죽음도 안다는 역설의 성립이다.

깨달음의 진리란 역설이다. 가장 완벽한 깨달음의 진리란 삶도 알고 죽음도 아는 역설의 지대에서 용솟음치는 그 무엇으로 표상된다. 하나 말할 수 없다. 하나 진리란 말의 지대에서 용솟음치는 그 무엇으로 표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깨달음의 진리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그 무엇으로 인지 통찰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생도 별것이 아니고 죽음도 별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오고 가는 인연법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저 거대한 자연의 법리(法理) 안에 안겨 있기 때문이다. 하여 우주적 구조 속에 편입된 인간의 삶−시간−세계란 ‘그저 단지’로만 존재한다. 우리는 ‘그저 단지’ 이 세계를 살아간다.

 인연이 다하면 소멸에 이를 것이다. 이제 편안해졌다. 오는 것도 이와 같고, 가는 것 또한 저와 같음을 안 이 순간, 진짜 마음이 편안해졌다. 오고 가는 정리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저 하늘의 이치에 달려 있는데, 무엇을 탓하고 무엇을 한으로 남기겠는가. 단지 그저 주어진 성정대로 풀려가는 인연법에 맞추어 차근차근 인연의 실타래를 풀어 가면 그만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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