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소리”로 시작하는 이은상 시, 홍난파 작곡의 가곡 〈성불사의 밤〉.

 어느 해 늦가을 나는 북한 문화재를 조사할 기회가 있어서 황해도 정방산 성불사에 간 적이 있다. 유서 깊은 이 절에 고려시대 건축한 응진전이 아직 남아 있어서였다. 그러나 나는 성불사 응진전보다 그곳으로 가는 길에서 보고 겪었던 씁쓸한 광경들을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지워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탄 승용차가 평양―개성 간 고속도로를 벗어나 사리원 시 경계로 들어섰을 때였다. 눈앞으로 재령평야를 이루는 넓은 들판이 들어왔다. 가을걷이를 막 끝내는 시점인 듯 높이 쌓인 볏단을 헐어내며 탈곡을 하는 장면도 심심찮게 보였다.

아무리 경제가 어렵다 한들 북한 최대 곡창 지대인 이곳만은 그래도 풍요로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수레를 끌거나 배낭을 맨, 어둔 색조의 인민복을 입은 사람들이 이따금씩 갓길을 지나갔다. 길은 국도일 텐데도 중앙분리선이 없는 것이 어딘지 어색했지만, 나머지는 우리의 시골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금 더 가자 고장 난 버스나 트럭이 길가에 정차한 모습도 눈에 뜨였다. 검게 녹슨 속살을 드러낸 고물차들이었다. 사리원 시내로 진입하는 짧은 거리에 그런 고장 차가 서너 대나 있었다. 고장 차에서 내린 승객들이 도로 안쪽으로 얼굴을 내밀고 우리 차를 세우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중에는 정복을 차려입은 군인도 보였다. 길이 막히자 북한 사람인 우리 안내원이 창문을 열고 그들에게 비키라며 욕설을 내뱉었다. 국가 대변인이라도 되는 듯 어깨에 힘을 넣고 종일 나라 자랑을 입에 달고 사는 그로서는 체면을 구긴 셈이었다. 그러나 사는 형편이 좀 어려운 사회에서는 능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나는 애써 치부했다.

우리가 탄 차는 잠시 신천에 들릴 일이 있어 사리원 시내의 중앙로로 접어들었다. 큰 도시의 시가지인데도 도로는 심하게 패였고, 통행 차량도, 행인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괴이한 적막감만 감돌았다. 어느 곳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양지바른 인도  위로 몰려나와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박고 쪼그려앉거나 아예 웅크리고 누웠다. 초점을 잃은 멀건 눈동자들이 우리를 하염없이 응시했다. 섬뜩할 지경이었다. 그들 사이로 느릿느릿 거니는 몇몇 사람들조차 보이지 않았다면, 혹 주검들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었을 것이다. 까닭 모를 죄책감이 일어 그들과 눈을 마주치기가 어려웠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 나는 조총련에서 발행하는 〈조선신보〉를 보고 나서야 그날 그 인도의 군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 1990년대 말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에 식량난으로 굶어 죽은 사람들은 대부분 자강도, 양강도, 함경도 등 곡물 생산이 적은 산악 지대에 집중 분포한 것으로 알려졌었다.

하지만 〈조선신보〉는 이 시기에 황해북도에서도 많은 아사자가 발생했다고 보도하고 있었다. 실례로 사리원의 정방협동농장은 비료 공급 중단과 전력난에 따른 양수 부족으로 수확량이 현저히 줄어들어, 1998년 6월부터는 모두 굶주리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했다. 거기에다가 사리원은 내륙 지방이어서 수산자원도 없고 대용식으로 쓸 산나물조차 궁했다. 결국 굶주림 속에 계속된 육체노동으로 아사자가 속출했다.

북한 대변지 〈조선신보〉가 이렇게 전했으니 실상은 이보다 더 심했으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으리라. 더듬어 보니 내가 사리원에 갔던 것이 아사자가 속출했다는 바로 그해 가을이었다. 그렇다면 인도에 누워 있던 사람들은 아사 직전의 주민들이었단 말인가?

그날, 사리원 시내를 벗어난 우리는 최종 목적지인 정방산 성불사로 향했다. 안내원이나 운전기사 모두 여기부터는 초행길인 모양이어서 행인의 길 안내를 받았지만, 차는 대로를 벗어나 비포장도로로 접어들었으며, 급기야는 농촌 마을의 골목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우리는 이때다 하고 왕방울 눈을 해서 호기심을 채우고자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들판의 농가에서는 별로 볼 게 없었다. 싸리나무 울타리 안에 들어앉은 집들, 박들이 주렁주렁 매달리거나 빨간 고추가 널린 슬레이트 지붕들이 손에 잡힐 듯한 위치에서 보였을 뿐이다. 우리의 농촌 그대로였다. 그러나 여기까지 온 것만은 그들의 실수가 분명했다. 평양의 뒷골목도 데려가서는 안 되는 사람들을 농촌마을까지 데리고 왔으니 실수치고는 큰 실수였을 것이다.

마침내 안내원이 길을 잘못 들었음을 알아차렸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그는 기사에게, “야, 간나 새끼! 빨리 차 돌려!” 하고 다급히 소리를 내질렀다. 좁은 골목길이라 차를 돌릴 수 없으니 수렁에 빠진 듯 그냥 전진할 수밖에 없는 기사 곁으로 다가가 “빨리 돌리라니까!” 하면서 뺨까지 냅다 갈겼다.

곡절 끝에 찾아간 성불사 앞엔 거대한 폭포가 물줄기를 힘차게 내뿜고 있었다. 폭포는 산 정상에서 떨어져 내렸는데, 그 길이가 무려 84미터나 된다고 했다. 안내원이 드디어 기지개를 켰다. 비로소 자신의 임무에 충실할, 국가 대변인답게 반쪽 조국을 자랑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우리도 비로소 차에서 내려 폭포를 감상했다. 안내원의 심기를 펴 줄 겸 입에 발린 말일망정 감탄사를 연발하여 그의 귀를 부드럽게 녹여 주었다. 그는 심기일전하여 얼굴을 쫙 폈다. 그러고는 ‘인민들의 휴식처를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서 위대한 장군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이라며 본분을 망각하지 않고 폭포를 설명했다.

만들어진 폭포? 그러고 보니 이 폭포가 아무래도 범상치 않았다. 저 꼭대기 어디에 이 많은 수량이 감춰져 있단 말인가. 우리의 의심을 알아채지 못한 안내원은 폭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자고 우리를 불러모았으나, 어리둥절한 우리는 폭포의 비밀을 풀려고 주변을 기웃거렸다. 비밀은 곧 밝혀졌다. 낙하한 폭포수가 흘러 들어가는 계곡에 그 열쇠가 숨어 있었다. 폭포수가 이제 막 마른 계곡을 적시며 달려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폭포가 이제 막 물줄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아, 얼마나 허망한 순간이었던가. 전기가 없어 양수를 못해 농사를 망친 사람들의 고장에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 특별히 가동시킨 인공폭포를 구경하다니. 구경할 인민이 없는 빈 산에서 쏟아지는 폭포가 그날만은 막대한 전력을 소비하며 84미터 높이까지 물을 끌어올려 불과 너덧 명에 불과한 남쪽 사람들에게 말 그대로 하해와 같은 ‘장군님의 은덕’을 베풀고 있었던 것이다.

〈성불사의 밤〉에 나오는 한 구절을 차용하면 “주인은 어디 가고 객이 홀로 구경하는” 셈이었다. “황공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구먼.” 일행 중 누군가 이렇게 말했는데, 비아냥인지 모르는 안내원은 뿌듯한 자부심에 젖어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그날 나는 성불사 대웅전에 엎드려 가슴을 저미는 이 허망함을 메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 달라고 부처님께 빌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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