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

편집자
 * 본 원고는 국내 서양철학 연구 1세대이자 불교 선(禪)철학 연구의 발판을 마련한 故 청송(聽松) 고형곤(1906~2004) 교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청송학술상의 제1회 수상자로 선정된 권오민 교수의 기념강연 원고를 전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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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 고형곤 선생님과는 별다른 인연이 없는 저로서는 수상 소식이 너무나 뜻밖이었고, 당황스럽기까지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학계의 형편으로 볼 때 재야라면 재야라고 할 수 있는 지방의 무명서생이 이런 고덕(高德)을 기리는 학술상을 받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도 판단이 잘 서지 않았습니다. 뒤를 돌아보더라도 분수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였고, 앞을 내다보더라도 감당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최근 저는 한 잡지에 외국의 새로운 학설에 무방비로 노출된 우리 불교학계의 허약함을 지적하면서 제 자신의 학문적 고백을 토로한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당시(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 시대적 상황도 하나의 핑계가 되겠지만, 불교학을 공부하는 이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어학적 소양도, 세계를 이해하는 인간 사유의 기본형식도 논리도, 더욱이 불교의 제경론에 대한 이해도 갖추지 못한 명색만의 학생이었고, 오늘의 후학들에게는 참으로 미안한 말이지만, 학생이 늙으면 선생이 된다는 어느 선배의 말처럼 어느 날 문득 교수의 명색을 갖게 되었으나 새로운 학설은커녕 주류(?)의 논의에서조차 한발 비켜 서 있기에, 오늘의 수상이 청송 선생님의 고명에 누가 되지 않을까 적이 불안한 것이 지금의 심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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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자료를 제외한다면, 제가 주로 보는 문헌은 이른바 소승(小乘) 삼장교(三藏敎)라 일컬어지는 아비달마불교 계통의 논서들입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서양 중세의 스콜라철학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불교 전통에서 보자면, 소승 삼장교는 하잘 것 없는, 혹은 초입자들이 익히는 저열한 경지의 불교입니다. 반야경 계통에서는 대개 불법을 훼손시키기 위해 마구니(魔)가 성문(聲聞)의 복색을 하고 와 내뱉은 망언 따위로 취급하지요. 어떤 불교문헌(예컨대 대당서역기)에서는 대승과 소승의 공주(共住)를 전하기도 하지만, 어떤 문헌(예컨대 삼론현의)에서는 물조차 다른 강에서 길어 먹었다고 전합니다.

아무튼 동아시아의 불교 전통에서 보자면 하나의 이단인 셈입니다. 이단의 불교를 공부하는 자가 불교학계 외부에서 주는 상을 받게 되니, 정말이지 이단이 된 듯합니다. 해서 오늘의 수상강연도 철저하게 이단적 발언으로 일관할까 합니다. 혹 귀에 많이 거슬린다면 이단자의 망언으로 여겨도 무방하겠습니다.

저는 불교(철)학에 관한 우리의 담론이 과연 외부와 소통이 가능한지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불교학이 심오하다거나 궁극적인 깨달음은 불가언설(不可言說)적이기 때문에, 혹은 불교학의 술어가 늦은 것은 당초(唐初, 현장시대), 대개는 위진(魏晉)남북조 시대의 한자어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대중화가 되지 못해 그러하다는 것도 아닙니다.

불교는 필경 천상의 계시종교가 아님에도 우리는 대개 ‘전통’이라는 권위와 ‘진리’라는 미명에 기대어 우리에게 주어진 불교를 주어진 방식대로 해석하고 나열합니다. 그것은 ‘교시’와도 같습니다. 그것은 이미 절대적인 것이기에 우리의 의심과 문제제기 혹은 비판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다만 이해와 추종만을 요구할 뿐, 오늘의 우리의 사유가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외부와의 소통 가능성의 의문을 제기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 역사의 현장에서는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거의 모든 사유가 동원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나간 불교사상사는 불타의 깨달음에 대한 해석의 역사이자 해석의 과정에서 야기된 온갖 문제들에 대한 비판적 탐구의 역사였습니다.

저는 불교학이 결코 단일한 체계가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불타의 깨달음으로부터 비롯된 불교는 결국 인간이성의 역사와 함께 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 대립하기도 하였고 지양하기도 하였으며, 종합하기도 하였습니다. 최초로 선교일치를 주장한 규봉종밀(圭峰宗密)의 《도서(都序)》 서문에서 배휴(裴休)는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있습니다.

“어떻게 한 분의 부처님으로부터 비롯된 불교의 종의를 용수는 공으로, 마명은 진여일심으로 이해하였으며, 용수의 공관을 어떠한 까닭에서 천태지의는 일심삼관(一心三觀)으로, 법융은 일체의 공적(空寂)으로 이해하였던가? 또한 보리달마로부터 비롯된 선법을 어떠한 근거에서 혜능은 돈오로, 신수는 점수로 받아들였으며, 혜능에서 비롯된 남종선을 어째서 마조의 홍주종에서는 망념이 바로 청정한 자성이라 하였고, 신회의 하택종에서는 망념은 본래 존재하지 않으며 무념무심의 영지가 청정한 자성〔空寂靈知〕이라고 하였던 것인가?”

불교가 단일하지 않은 것은 본질적으로 불타의 말씀이 그의 깨달음을 근거로 한 가설적 성격을 띠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바로 깨달음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깨달았던 것인가? 2500년에 걸친 불교사상사는 바로 무엇을,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에 대한 탐구와 해석의 도정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탐구와 해석의 도정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혹은 사상적으로 실로 광대하였으며, 그것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늘의 우리는 이 같은 도정을 무시하고 불교를 ‘하나’로 묶어서 바라보려고 합니다. ‘하나’에는 항상 ‘절대’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야흐로 만병을 통치할 수 있다는 절대적 이념으로 제시됩니다. 오늘의 우리는 ‘마음’ ‘연기’ ‘중도’ 혹은 ‘참선’ 등의 말 한 마디로 수미산보다 더한 볼륨의 지식의 곳간인 팔만대장경(고려대장경)을 우리 스스로 방기(放棄)해 버립니다. 다만 유형의 문화재로서만 귀하다 여길 따름입니다.

‘불교’라는 말은 하나이지만, 그것은 시대나 지역에 따라 전개된 온갖 상이한 학적 체계가 모여 이루어진 매우 복합적이고 유기적인 체계입니다. 불교를 ‘하나’의 체계로 바라보려 한 것은 교상판석(敎相判釋)에 근거한 동아시아불교의 또 다른 해석 체계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하나’라는 해석 체계 또한 한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예컨대 화엄종에서는 화엄경이 원교(圓敎)이지만, 천태종에서는 법화경이 원교였습니다. 법상종(해심밀경)에서는 삼승이 진실이며 일승은 방편이기에 오성(五性)의 각별(各別)을 주장하지만, 천태종(법화경)에서는 일승이 진실이며 삼승은 방편이기에 일성개성(一性皆成)을 주장합니다.

어느 편이 진실입니까? 세계는 유자성(有自性)인가, 무자성(無自性)인가? 만약 무자성이라면, 이는 그 자체로서 진실인가, 다만 방편일 뿐인가? 이러한 물음은, 앞서 배휴의 물음처럼 장구한 불교사상의 역사만큼이나 길게 이어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한 대로 불교사상사는 ‘진실’ 즉 불타 깨달음에 대한 탐구와 해석의 도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하나의 불교학 체계를 자신의 종교적 신념으로 채택하는 경우, 우리는 그것을 종학(宗學)이라 합니다. 종학은 필경 자유로운 탐구의 결과였겠지만, 그것이 이념화되는 순간 또 다른 탐구를 거부하며, 그러다 충돌합니다. 나아가 못내 그 충돌을 감당할 수 없을 경우, 언어적 폭력을 수반하기도 합니다.(우리는 너무나 이에 익숙하여 그것이 언어적 폭력이라는 것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순간 치열하였을 탐구의 결과는 앞뒤가 없는 ‘구호’로 등장하고, 하나의 독립된 사유형식으로 고착되어 호교적인 찬사와 추종만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사실상 교시이며, 전통이라는 권위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외부와의 소통도 쉽지 않을 것이지만, 불교(철)학에 관한 오늘의 우리의 담론 역시 이러한 현실불교(종학)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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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불타 깨달음에 대한 해석은 실로 광대하였다고 하였지만, 불교학의 정초를 놓은 위대한 논사들이 활약하였던 시기는 대체로 인도의 굽타 왕조 전후입니다. 인도의 사가(史家)들은 이구동성으로 AD. 320년 찬드라굽타 1세의 즉위로부터 시작하여 6세기 중엽 흉노(에프탈리트)의 침입 등의 원인으로 종언을 고한 굽타시대를 인도의 문예부흥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도의 고전인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 《푸라나》가 오늘날의 형태를 갖춘 것도 이 때였으며, 인도 정통 6파철학의 수트라와 이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주석서도 이 시기 제작되었습니다.

불교도 예외는 아니어서 인도불교사 연표에 따르면, 무착(310~390)과 세친(400~480무렵)이 유가행파(瑜伽行派)의 체계를 세우고, 안혜(500~550무렵) 무성(530무렵) 호법(530~561) 등이 이를 계승 발전시키고 있으며, 불호(470~540)와 청변(500~570)은 각기 귀류논증과 자립논증의 중관(中觀)을 확립합니다. 뿐만 아니라 불교논리학의 초석을 세운 진나(480~540)와 법칭(600~650)도 이 시기에 활동하였으며, 당시 유력한 소승 부파였던 설일체유부의 경우도 법승 법구(4C초, 파사(婆沙)의 법구가 아니라 《잡아비담심론》의 저자)를 거쳐 세친과 중현(5C후반)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게 됩니다.

그러나 법구와 세친 등은 비록 유부에 몸담았다고 할지라도 유부 내의 이단자 그룹이었던 서방사(西方師)나 경량부(經量部)에 가까운 인물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생소한 이름이지만, 경량부라고 자처한 일단의 비유자(譬喩者)나 하리발마(250~350무렵), 슈리라타도 비록 연대기상으로는 세친에 앞서지만 동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왕조시기에 이처럼 가지각색의 다양한 사상가들이 활동하였던 일은 세계사상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것인데, 이 같은 시대적 사정으로 볼 때 이들이 오로지 자신의 학문적 영역 속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중국에 이르러 교상판석이라는 문헌비평에 따라 여러 종파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당시 인도철학 총서에서는 불교를 비바사사(毘婆沙師, Vaibh칊s.ika, 유부)·경량부(Sautr칊ntika)·중관파(Madhyamika)·유가행파(Yag칊c칊ra)로 분류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당시 가장 유력하였거나 혹은 가장 분명한 교학(철학)적 특성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필경 불타(혹은 초기불교) 시대에는 없었을 이들 불교 제파는 어디서 유래한 것이며, 서로간에 어떠한 연관을 지니며, 어떻게 변모 발전하였는가? 무릇 학문의 변모 발전은 내부적 모순에 기인하기도 하며, 당시 시대적 상황, 예컨대 외도나 이파(異派)의 도전이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인데, 그렇다면 내부적 모순은 무엇이며, 외부의 도전이나 영향은 무엇인가? 도대체 20여 부파를 비롯한 불교 제파는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고, 그들 사이에 무엇이 문제였던가? 무엇이 문제였기에 그 오랜 세월 동안, 그토록 많은 학파들이 나타나고 사라졌던가?

문제를 갖지 않은 해답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비판적 해석이 부재하는 철학사는 진정한 철학사가 아닙니다. 철학사는 비판의 산물입니다. 불교사상(철학)사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도의 현대철학자 라다크리슈난은 말합니다.

“창조적인 정신이 철학을 떠났을 때, 철학은 철학사와 혼동되었다.”

대개의 역사적 사건이 그러하듯이 어떤 한 사상이 발생하고 전개하는 데는 항상 계기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계기가 간과되고 무시될 때 역사적 사건은 절대적 운명처럼 여겨지듯이, 사상의 경우도 절대적 이념으로 과장되기도 하고 호도되기도 합니다. 화엄의 ‘사사무애법계’가 아무리 절대적 이념이라 할지라도 ‘이사무애법계’의 기신론과 ‘이법계’의 중관과 유식, ‘사법계’의 아비달마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성립할 수 없는 교설이었습니다.

인연 없이 생겨난 것은 없습니다. 유식의 용어로 말하면 의타기(依他起)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불교담론은 각기 개별적인 교설로서만 나열되며, 항상 역사와 전통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대소(大小) 승열(勝劣)이나 권실(權實)로 판가름 짓고 있습니다. 인연은 사라지고 결과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문제는 사라지고 해답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학술논문에서조차 그러한 해답만이 열거되기도 합니다. 공허하지요. 그러나 그러한 일련의 사상들을 각기 개별적인 독립된 교설로 여기는 것은, 그리하여 대소 승렬로 규정짓는 것은 다시 유식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변계소집(遍計所執)의 허망분별일 뿐입니다.

불교학의 온갖 개념들이 천상의 계시가 아니라면, 무슨 문제로 인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으며, 그것들이 기왕의 불교학 체계에 적용될 때 야기되는 문제는 또한 무엇이고, 그러한 개념들을 생산해낸 이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해명하였으며, 이에 따라 불교학의 체계는 다시 어떤 변모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던가? 이러한 제 문제가 밝혀지지 않는 한 그러한 개념들은 원천적으로 공허하거나 절대(신비)주의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소승교학을 공리공론이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따라서 저는 소승 제파도, 대승도, 중관도, 유식도, 여래장도 결국은 동일한 문제로 인해 파생되어 전개한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해서 문제중심으로 본다면 소승 부파불교와 대승은 칼로 무 자르듯이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고 여기고 있습니다.(현장이 전한 대소승의 共住가 이를 뒷받침합니다) 그것이 소승인가 대승인가, 불설(佛說)인가 비불설(非佛說)인가, 불교인가 불교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불교학에 있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 “혹 우리는 불교학을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의 불교와 동일시하여 오로지 신념의 체계로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혹은 사실 체계로 받아들일 여유가 없거나, 신념체계를 사실의 체계로 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혹은 같은 말이지만, 텍스트의 엄숙함에 갇혀 그 행간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혹은 소승이니 대승이니 하는 개별적인 텍스트에 갇혀 텍스트들 사이의 행간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 때(예컨대 굽타시대) 그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무엇이 문제였으며, 무엇을 추구하였던가? 불교학을 오로지 신념 체계로 받아들일 경우, 우리는 ‘사실’로 포장된 ‘진리’만을 알 수 있을 뿐이며, 우리에게는 그 진리의 주인공인 각각의 위대한 논사와 다만 개별적인 텍스트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여기에는 문제가 있을 리 만무하며, 오늘의 ‘내’가 개입할 여지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합니다.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하라고. 불교철학이란 여러 경론(經論)에서 설해지고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한 세계와 인간에 대한 모색으로,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철저하게 개인의 주관적 행위입니다. 괴로움은 주체적인 것이며, 깨달음을 통한 그것의 극복 역시 주체적인 것이다. 진리를 승인하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것으로서, 불타의 깨달음을 자증(自證) 혹은 자내증(自內證, praty칊tma adhigama)이라 표현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불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부처님이 경에서 그렇게 설하였고, 위대한 논사들이 논에서 그렇게 해석하였으니, 당연한 것으로 여겨야 할 것인가? 그리하여 경론의 글귀들을 읊조리는 것으로 족해야 할 것인가? 불교는 ‘있어라 하니 있었더라’고 하는 계시종교가 아닙니다.

그것은 어느 날 홀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어떤 한 경론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무엇보다 먼저 불교 제경론이 너무나도 다양하고 상이하며, 학문의 수단이나 연구의 공구가 진보 발전하였으며, 세상이 좁아졌으며, 불타로부터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습니다. 이른바 교상판석으로 일컬어진 문헌 비평은 수당시대는 물론이고 위진시대에도 존재하였거늘 하물며 오늘날에야 어떠해야 할 것인가?

저는 그 때의 문제를 찾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내(혹은 우리)’ 문제일 수 있기 때문이며, 그래야 오늘의 ‘내’가 그들의 대론(對論)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불교학의 제 문제는 근본적으로 아비달마논서에서 잉태되고 제기된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으며, 또한 믿고 있습니다. 유부의 유자성론은 물론이고, 중관의 무자성론, ‘종자’로도 일컬어지는 제8 아뢰야식, 혹은 심성본정(心性本淨, 자성청정심), 나아가 돈점(頓漸)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 단초를 《비바사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각기 불타 교법을 해석해내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이론적 귀결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도출의 과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인간사유가 제기하는 모든 가능성에 대해 검토 논의합니다. 따라서 굳이 신삼론(新三論)의 승랑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불교학은 거대한 하나의 가설체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들은 각기 자신들이 설정한 개념(眞實義, bh칤t칊rtha)들을 선정수행이라는 체험적 방법론을 통해 직시(adhyavas칊ya, 확인)함으로써 비로소 그것들을 ‘진실(혹은 진리)’로 승인(확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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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고 산만하였지만, 이 정도만으로 아마도 불교의 진리성과 전통을 훼손하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질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불교해석에 관한 한 전통주의자이고 보수주의자라고 여깁니다. 다만 인간과 세계에 관한 온갖 다양한 사색을 드러낼 때, 다시 말해 구체적인 사사(事事)와 물물(物物)을 드러낼 때, 비로소 화엄의 사사무애(事事無碍)도, 선종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도 의미 있고 현실을 지도하는 강력한 이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외부와의 소통도 가능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필경 천상의 메아리가 아닙니다. 그것에 이르기 위해서는 온갖 형태의 사유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는 불교학을 ‘알음알이’ 운운하며 불교의 아류쯤으로 치부하는, 그리고 불교학자마저 그러한 불교인식에 순응하는 것을 보며 이제 바야흐로 팔만대장경의 그것과는 다른 새로운 불교가 펼쳐질 것이라는 우려를 갖고 있습니다. 이른바 선의 황금시대라고 하는 당송시대에도 여전히 화엄이 성행하였고 한켠에서는 천태가 부흥하였으며, 인류문화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장경이 간행되었습니다.

인간사에서는 항상 닭과 달걀의 선후가 문제되지만, 저는 우리가 접하는 불교는 그것이 어떤 불교든 불교학의 산물이며, 우리의 ‘믿음’ 또한 그것에 대한 것이거나 혹은 그것과 관련된 상징체계에 대한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굳이 라다크리슈난의 연설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다들 잘 알고 있습니다.

불교에서의 믿음이 기독교에서의 믿음과 같지 않다는 것을. ‘있어라’ 해서 있는 것도, ‘믿어라’ 해서 믿는 것도 아님을. “불교(인도사유)에 있어 믿음이란 존재본성(진실)에 대한 통찰의 결과로서 드러난 내적 직관적 경험에 기초한 것으로, 그것은 분명 절대적 권위에 의탁하여 어떠한 주체적 노력 없이 종교적 위안을 얻으려는 맹목적이고 기계적인 믿음과는 다르다.”

불교 전통에 따르는 한 ‘믿음(큦raddha)’이란 외적 대상에 의한 동요(尋伺)를 떠난, 제2선에서 두드러진 심리현상으로, 마치 흐린 물을 맑게 하는 구슬처럼 맑고 청정함을 특질로 합니다. 물론 모든 이의 믿음이 이 같은 개념적 정의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불교에서의 믿음이 이와 같은 연원에서 출발하였다는 사실을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타자로부터 부여된 것이 아니라 ‘진실에 대한 자기확신(adhimukti, 信解 혹은 勝解)’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그러한 확신은 내적 직관적 경험의 소산입니다.

‘내적 직관적 경험(bh칊van칊, 修習)’, 이는 통상 우리가 ‘수행(修行)’이라 일컫는 선정(禪定, dhy칊na와 sam칊patti)을 통해 “‘진실의 대상(bh칤t칊rtha)’을 반복적으로 사유 통찰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수행의 의미를 보다 광의로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불교학자임을 자처하는 저를 포함한 후학들은 ‘수행해 본적도 없는 것들이…’라는 말에 주눅들고 휘둘립니다.

대저 무엇이 수행입니까? 우리는 대개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 수행 아닌 것이 없다)’는 선종적인 수행관을 듣게 되지만, 이는 정직한 대답이 아닙니다. ‘행주좌와’는 일상이며, 도대체 일상에서 어떻게 수행하라는 말인지가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간경·참선·염불·주력 등이 불교수행이라 하지만, 이 또한 굴절된 우리의 불교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직하게 말해 불교의 수행은 계(戒)·정(定)·혜(慧) 3학(學)이며, 지계와 선정은 본질적으로 지혜를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이 밖에 별도의 수행이 있다면 그것은 사설(邪說)입니다. 밀교 탄트라에서는 성적인 행법조차 반야지혜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지혜의 발단은 주지하는 대로 청문(聽聞, 聞所成慧)이고 사택(思擇, 思所成慧)이며, 궁극적으로 심일경성(心一境性)의 선정을 통한 반복적 사택을 통해 성취(修所成慧)됩니다. 그러니 누가 뭐래도 경론을 읽고 주체적으로 반성 사유하고 통찰하는 것이야말로 수행의 첫걸음이자 완성입니다. 경론에서 설해진 내용(眞實義)을 모른다면 무엇을 사유수(思惟修, 心一境性에 의한 반복적 통찰)한다고 해야 하겠습니까?

또 하나, 불교학자로서 자주 듣게 되고 귀에 거슬리는 말이 “불교학을 통해 어찌 일대사 생사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힐난자는 이에 대해 책임질(감당할) 수 있어야 할 것이며, 그러한 확신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도 밝혀야 할 것입니다. 제 말이 대단히 불손한 것이라 여겼다면, 이미 외부와의 소통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전통이라는 권위에 기대어 신심과 맹종만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관해 제경론에서는 3아승지겁 100겁으로도 모자란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보조지눌 스님은 그러한 성교(聖敎)의 법상(法相)은 모두 방편설이라고 하였지만.저는 불교학자로서 이 모두에 관여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혹자는 “현대불교학이 성하면 불교가 쇠퇴한다”고도 하였으며, “현대불교학은 훼불(毁佛)의 불교학을 지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우려하기도 하였지만, 이에 대해서도 관여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지방의 무명서생으로서 ‘현대’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할 뿐더러 지극히 고전적인 불교학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 6년 간 만사 폐하고 오로지 《순정리론(順正理論)》이라는 텍스트 하나만을 쥐고 살았습니다. 중현(衆賢, Samghabhadra)은 이 논을 짓는 데 12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감히 말하건대, 오늘 이 세상에서 어떠한 이도 이를 완독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저의 발언을 오만하다고 여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서양의 신학대전에 비견된다는 세친의 《구사론》을 비판한 것으로, 카슈미르 정통 유부(有部)와, 비유부나 이 부파의 상좌 슈리라타, 세친에 이르는 일련의 경량부(經量部) 계통 사이의 논쟁, 이를테면 아비달마의 본질 문제를 비롯하여 존재와 지식--예컨대 마음과 온갖 다양한 심리현상, 물질, 힘 등과 이들 사이의 인과관계, 행위의 본질과 인과상속, 인식과 논리 언어-- 나아가 깨달음의 절차와 상태 등에 대한 논쟁이 전개되고 있지만, 여기에는 대중부나 화지부·법장부 등의 제부파는 물론이고, 부분적으로 상캬(數論)와 바이세시카(勝論), 문법학파(語典家), 혹은 베단타(一因論)나 미맘사학파(聲常住論), 혹은 대승의 상의상대(相依相待)의 공관(空觀)이나 유식설(唯識說)도 공화론자(空花論者)나 도무론자(都無論者)라는 이름으로 개입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불교 내부에서 이같이 방대하고도 전면적인 논쟁이 벌어진 일은 일찍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 두 문헌을 대충 글자만 헤아려 읽는 데 꼬박 만 10년이 걸렸습니다.

두 문헌의 모본(母本)이 된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도 처음부터 읽고 싶지만, 아마도 제 생에 주어진 시간상 불가능할 것입니다. 옛날 인도의 논사들은 이러한 불전을 수도 없이 산출하였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바탕으로 하여 오늘의 불교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고려대장경에 입장(入藏)되어 있습니다.

외람되게도 감히 이러한 말씀을 드리게 된 이유는 우리나라의 불교(철)학이 현실을 지도하기는커녕 현실불교에 휘둘림으로써 건강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불교가 현실의 살아 있는 종교이고, 우리나라만의 전통이 유지되고 있기에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여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에서의 불교학이 현실종교의 일부로서 의심과 비판이 결여된 독단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독서(聞慧)과 사유(思慧)에 근거하였을 뿐이면서도 ‘진리’라는 거대한 주박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독단과 주박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세계와 소통할 수 있으며, 우리의 사유를 보다 풍요롭게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귀에 많이 거슬렸더라도 한 불교학자의 소회로 여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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