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방에만 있던 어린 새색시 근심일랑 모르다가
봄날에 몸단장 예쁘게 하고 누대에 올라보았네.
문득 저기 밭이랑 시작되는 곳에 물오른 수양버들 보더니
낭군님 부디 높은 벼슬해 오시라 떠나보낸 일을 뉘우치네.

(閨中少婦不知愁, 春日凝妝上翠樓, 忽見陌頭楊柳色, 悔敎夫婿覓封候)

이 시는 당대(唐代) 시인 왕창령(王昌齡, 698~757)의 것이다. 때는 화창한 어느 봄날, 혼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린 신부가 봄의 흥취에 못 이겨 꽃단장을 하고 누대에 올라 풍광을 감상하고 있다.

먼 들판의 물오른 풀밭이며 나무들을 더없이 싱그러운 기분에 젖어 바라보는데, 문득 벼슬하여 돌아오라며 서울(장안)로 떠나보낸 낭군이 떠오른다. 바보다, 바보다. 출세라 한들 기약 없는 일이고 보면 당장 눈앞에 없으니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른 봄날에 그 모든 것이 허망하게 느껴지는 어린 신부가 눈뜨는 때늦은 깨달음이 퍽이나 익살스럽다. 예부터 버드나무는 이별하는 사람에게 꺾어 주었다.

이는 나무의 강한 생명력만큼이나 장도에 무탈하기를 바라는 마음 한편, ‘류(柳)’가 ‘머무르다’는 의미의 ‘류(留)’와 발음이 비슷하기도 하고 부드러운 가지로 묶어두고 싶은 마음의 상징이다. 인간은 하나의 상징을 통해서 정서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전통이 있다. 그리고 그 심리 일반을 통하여 삶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무유정법(無有定法)’이라 하여 ‘본래 정해진 법이 없다’는 관점을 보인다. 정해진 것이 없다는 말은 고정된 법이 없어 사물도 사람의 관점도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이다. 불교 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사상의 하나는 일체 모든 것을 하나의 흐름으로 보는 지혜이다. 그래서 무엇에도 집착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가 서게 된다. 무상하고 덧없다 하여 기피하려 말고 이 의미를 잘 살펴서 자신의 일상에 대입하는 습관을 들인다면 보다 유연한 자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지난 겨울, 나에게는 문중의 어른이신 법정 스님이 가셨다. 생전에 자주 뵙지 못한 아쉬움이 적지 않았는데, 추모의 열기 못지않게 그 무렵의 봉은사를 둘러싼 잡음들이 더욱 스님을 생각나게 하였다. 나는 인간세를 이해하는 단초의 하나로 《논어》 〈팔일〉 편의 다음 이야기를 좋아한다. 노나라 군주인 애공이 공자의 제자 재아에게 사직의 위패로 쓰이는 나무에 대해 물었다. 재아가 이에 대해 “하나라는 소나무로 하였고 은나라는 잣나무로 하였으며 주나라는 밤나무로 하였는데, 이는 백성들로 하여금 두려워 떨게 하기 위해서이다.”라고 했다. 이를 듣고 공자가 말하였다. “오래전의 일이라 다시 말할 필요가 없으며, 이미 실행된 일이라 만회할 수 없으며, 이미 지나간 일이라 더 이상 추궁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잊어야 할 건 잊고 포기할 건 포기해야지 이미 바뀐 상황이라면 좀 더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낫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때늦은 회한일지라도 다시 일어서서 다음을 기약하며 살아가야 하는 정신, 이 유장한 삶의 호흡이 동아시아권의 심리 일반이다.

내가 유학하여 학교를 다닌 광주의 원각사 포교당은 송광사를 들고 나는 스님들의 정거장과 같아서 구산 큰스님부터 많은 스님들을 가까이서 뵙고 지낼 수 있었다. 특히 법정 스님은 출가 전에도 강연회와 책을 통해 흠모하기도 했었고, 입산하고 나서는 한 산중에서 모시고 살아간다는 것이 참 뿌듯했었다. 당시 행자실에는 우리가 배우는 《초발심자경문》과 《사미율의》 그리고 경전과 선어록들이 있었다.

하지만 후원 소임을 봐야 하는 행자들에게는 한가하게 책을 들여다볼 시간이 나지 않았다. 편하게 읽을 만한 책들은 찾아볼 수 없었고, 다만 법정 스님의 수상집들이 유일하게 행자실에 들여져 있었다. 보통 때는 시간도 없거니와 위 행자들의 눈치에 책을 손에 들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하루는, 아마 비가 왔을까…… 《무소유》를 들고 얼마나 빠져들었던지 누군가 옆에서 “행자님은 법정 스님처럼 되고 싶은가 보다.” 했던 말이 지금도 무슨 계시처럼 마음에 살아 있다.

스님의 49재 중 2재를 모시고 난 직후의 어느 새벽에 난 스님을 뵈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는 큰절을 떠나 계셨기 때문에 자주 뵙기가 어려웠는데, 생시보다 뚜렷하게 우리에게 강의를 하셨다. 난 꿈에서도 ‘와, 스님이 많이 좋아지셨다’ 하다가 깨었다. 명료한 의식이 흘러내려 어느 사이 베갯잇을 적시고 있었다. 이렇게 쉬운 이별인 것을……, 일찍 깨닫지 못했던 어리석음이 한없이 자책되었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버릇처럼 일의 ‘잘잘못’을 따지는 종단의 소란이 가슴 아팠고, 남도 아닌 한 몸 한 공동체에서 벌어지는 작금의 일들이 마치 스님께 저지른 큰 불경(不敬)처럼 느껴져서 더욱 그랬다.

스님은 당신의 오두막 한쪽 벽에 다음과 같은 《숫타니파타》의 경구를 붙여 놓으셨다 했다.

홀로 행하고 게으르지 말며/ 비난과 칭찬에도 흔들리지 말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스님은 이 경구를 외울 때마다 등 뒤에서 누군가 당신을 지켜보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 스님에 대한 그리움과 아픔에 사무쳐 미뤄 뒀던 집필 하나를 단기간에 마치고 나서도 이상하게 스님만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 왔다. 일반 대중에게 쉽고 아름다운 글로써 불교를 알리는 일에 스님만큼 능력과 열정을 보인 분이 다시 있을지 모르겠다.

스님은 그 많은 당신의 글과 말을 아낌없이 우주의 ‘공(空)’의 세계로 넘기셨다. 무소유! 우리가 삶을 소유할 수 있으랴. 생각해 보면 스님은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인간세는 모여들면 권력 관계를 형성하는 숙명을 스님은 알고 계셨던 거다. 장미나 풀꽃의 아름다움은 그들 자신에 있다. 자신이 가장 잘 갈 수 있는 길을 가는 것, 이것은 우주적으로 큰 공덕의 길이다.

누구든 고독한 자신의 길을 갈수록 등 뒤에서 응원하는 스님을 만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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