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독심과 상담 관계의 치료적 특징

1. 들어가며

……노크 소리가 들린다. 평일 이른 아침에 첫 회 내담자가 방문하였다. 깔끔한 젊은 내담자를 자세히 보니 눈알이 빨갛고 약간은 상기된 채였는데, 그에게서는 술 냄새가 났다. 지난밤에도 잠을 이루기 위해 술을 마셨다고 좀 계면쩍어 하면서 왜 상담을 시작하게 됐는지 떠듬거리며 얘기를 시작했다. 얼마나 불안하고 희망이 없는지를 정말 조심스럽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필자의 상담노트 중에서

지금 이 순간, 많은 상담자들에게 이러한 내담자들이 줄을 잇고 있다. 부적응, 실직, 갈등, 외로움, 불안, 우울, 무가치감, 무의미 등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부딪치고 있는 문제들이다. 예전에 비하면 삶의 조건들은 훨씬 풍요롭고 질적으로 향상되었지만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삶의 여러 지표들은 사람들의 고통이 커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의 국내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1위라고 한다.  1)  

이들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상담심리학자와 상담자의 숙제이다.

내담자의 당면 문제의 해결과 정신적 고통의 극복 더 나아가 인간적인 성장을 돕는 것이 상담이다. 종교 또한 존재의 의미를 찾고 영혼의 구원을 위한 끊임없는 탐구를 했다. 그중 불교는 한 인간이 인간존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에서 발생했으며 불교의 궁극적 목표 또한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2) 

불교와 상담 3) 이 인간의 정신적 성숙과 심리적 문제 해결이라는 측면에서 공통적인 관심사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3)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불교와 상담의 관계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상담심리학과 불교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상호 관련성 및 응용을 위한 연구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관심의 영역이 불교와 심리학, 불교와 상담 이론의 비교, 불교 수행 방법의 상담 장면에서의 활용 등 다양한 주제로 확장되고 있는 중이다.

본고에서는 불교에서의 삼독심과 인간중심 상담에서의 상담 관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상담에서는 상담자와 내담자가 맺는 상담 관계가 내담자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는데, 여러 이론 중에서 특히 인간중심 상담이 상담 관계를 치료의 핵심 요소로 본다. 공감, 존중, 일치성이라고 하는 조건이 상담 관계의 핵심 조건이라고 보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탐’ ‘진’ ‘치’로 알려진 세 가지 ‘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감정들’을 우리의 내적인 불성을 흐리게 하는 것이라고 본다. 공감, 존중, 일치성이라는 치료 관계의 핵심 조건을 중요하게 만드는 인간의 조건이 과연 무엇인지 불교적 관점과 연결해서 이해해 보고, 이 삼독심과 상담 관계 간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위와 같은 내용을 잘 다룬 퍼튼 4) 의 관점을 중심으로 전개하기로 한다. 4)   

2. 인간중심 상담 5)의 과정

인간중심 상담에서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자기 개념, 기본적인 태도, 자기 주도적인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대한 자원을 자기 안에 갖고 있으며, 어떤 토양이 주어지기만 하면 그 자원을 일깨울 수 있다” 6) 라는 핵심 가설을 전제한다. 6) 

내담자의 성장을 촉진하는 토양을 위해 필요한 조건으로 일치성,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 공감적 이해를 말한다. 이것은 상담 관계에서 경험되는 것이다.

상담에 오는 내담자들은 대부분 혼란스럽고, 우울하고, 불안하고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즉, 깊은 불만족감 때문에 상담에 온다. 인간중심 이론에서는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적절하게 표상하지 못하는 자아 개념의 발달을 거쳐 가면서 진정한 자신과의 접촉을 잃는 경향이 있고, 이는 중요한 타인에 의해 부과되는 가치의 조건화와 응집력 있는 자아감에 대한 욕구 때문에 일어난다.

내담자의 자아 개념이 점점 더 그의 경험과 불일치하게 되며, 이러한 불일치의 상태가 바로 내담자의 불편한 상태 또는 내담자가 느끼는 불만족 상태의 뿌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자신으로부터의 소외감을 낳는 것이 바로 불일치이고 그것은 진정한 자아 존중과 자아 이해의 가능성을 파괴하며 또한 그것은 우리가 타인을 존중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로막는다. 7) 

여기에서 성공적인 치료란 내담자가 보다 만족스러운 존재 상태로 나아가도록 돕는 것이며, 이 상태에선 명료함이 혼란을 대체하고, 우울함에서 벗어나며, 불안이 경감되고, 자아와 타인에 대한 존중과 이해가 향상된다고 한다. 8)

이때 치료자의 목표는 내담자가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도록 돕는 것이다. 9)

인간중심 상담에서는 자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진정한 우리 자신과의 접촉을 잃어버렸다는 걸 감안하면, 우리가 다시 우리의 능력을 되찾고자 한다면, 우리의 본성이 반드시 변화에 열려 있어야 한다. 만약 환영적인 자아 혹은 자아 개념이 어떤 고정된 사물의 본성을 띤다면, 변화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자아가 유동적이고, 하나의 과정이라면, 이러한 과정은 우리의 본성으로 다시 되돌려질 수도 있을 것이다.

로저스는 “모든 개인은 자신이 그 중심이 되는, 계속해서 달라지는 경험세계 속에 존재한다”라고 10) 말한다. 10)

자신의 유기체적 경험에 개방적이고 믿음을 개발하며 유동적이고 계속적인 변화 과정으로서 삶에 참여해서 사는 법을 배우고 자기 경험의 흐름에서 늘 새로운 자기를 발견하고 되어 가는 사람에 관여하는 것이 참된 자기에 닿은 사람이 보여 주는 특성이라는 것이다. 11)

내담자는 이렇게 반응한다.

“저를 통합하고 재구조화하는 작업을 끝내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혼란스럽기는 해도 낙심되지는 않아요. 이게 끝없는 과정이라는 것을 아니까요…… 재미있어요, 때로 불안하기도 하지만 어디로 가는 건지가 항상 분명하지는 않더라도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는 것,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건 큰 힘이 되요.”  12)   

이에 대해서 로저스는 이렇게 본다. 내담자들은 과정, 흐름, 변화를 향해 보다 개방적으로 움직여 나가는 듯 보인다. 그들은 그들이 나날이 같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고도 동요하지 않으며, 그들이 언제나 주어진 경험이나 사람에게 동일한 느낌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서도 흔들리지 않으며 그들이 언제나 일관되진 않는다는 점에도 동요치 않는다. 그들은 흐름 속에 있으며, 이러한 흐름의 조류 속에서 계속 만족하는 듯 보인다. 결론과 끝을 향한 갈망이 감소한 듯 보인다. 13)

즉, 자아를 고정된 상태가 아닌 유동적인 과정으로 보고 있다.

로저스에게 있어 자기 개념의 용해는 우리를 경험하는 자아로 돌려놓는다. 그렇지만 이 ‘자아’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또한 그것은 다른 고정된 자아들로부터 고립된 것도 아니다. ……중략…… 자아 개념과 모순된 경험에 대한 부정이 방어와 타인에 대한 왜곡된 지각 방식을 낳는다고 주장하였다. 역으로, 자아−개념의 제거와 더불어 우리는 보다 더 우리의 경험을 수용(존중)하게 되고 타인이 우리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우리 자신을 방어할 필요성을 덜 느낀다. “방어할 필요가 없을 때, 공격할 필요도 없다.”  14)

인간중심 상담 치료자들이 치료 관계에서 시도한 것들을 어떤 기법이나 수단이라고 보기 보다는 오히려 내재적으로 가치 있는 태도들을 구현하는 특정한 방식들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세 가지 태도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5)

① 일치성이란 치료자가 내담자를 대할 때 직업적인 모습이나 개인적 가면을 벗고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수록 내담자는 건설적인 모습으로 변하고 성장한다고 보는 것이다. 치료자가 순간마다 마음속에 흐르는 감정들과 태도에 대해 개방적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 순간 경험하는 것이 인식될 수 있고, 내담자와의 관계에서 그대로 경험할 수 있으며, 표현해도 좋은 것이라면 전달할 수도 있는 상태이다. 일치성의 상태에 있는 사람은 따라서 진실한 또는 진솔하며, 그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자기 자신이 되고, 그 어떤 자기−기만으로부터 행동하지 않는다.

② 존중 : 무조건적인 긍정적 관심은 내담자가 그 순간 어떻게 하든지 치료자가 내담자에 대하여 긍정적이고 수용적인 태도를 경험할 때 치료적 발달과 변화가 더 잘 일어난다는 것이다. 치료자는 내담자가 혼란, 적대감, 두려움, 분노, 용기, 사랑, 자부심 등 어떤 감정이라도 느낄 수 있도록 허용하는데 이때의 존중은 조건적인 것이 아니고 전체적인 것을 말한다.존중은 보통 그 단어가 담고 있는 어떤 개인적인 친밀함 또는 따뜻함을 반드시 포함하고 있진 않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고 또는 우리가 그들과 많은 공통점이 있다고 느낄 수 있긴 하지만, 이것은 중요치 않다. 왜냐하면 이러한 존중에선 우리가 고려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와 상관없이 그들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다.

③ 공감적 이해는 내담자가 경험하고 있는 감정과 개인적인 의미들을 치료자가 정확히 감지하고, 자신이 이해한 것을 내담자에게 전달해 주는 것. 최상의 공감 상태가 되면, 치료자는 내담자의 사적 경험 세계 깊은 곳으로 들어가서 내담자가 인식하고 있는 것뿐 아니라 인식 저변에 깊이 숨어 있는 것까지 명료화 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누군가와 가깝다고 느낄 때, 우리가 그들의 세계를 공유하는 순간, ‘두 개의 가슴이 하나로 뛸 때’, 그때 우리는 우리의 개인성의 부재를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 사이의 경계선이 일시적으로 사라진 것과도 같다. 이것은 공감을 받는 이가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돌봄을 받았다고, 그 혹은 그녀라는 인간 자체로 받아들여졌다고 느낀다는 점이다. 우리가 그 사람과 그 혹은 그녀의 세계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한―어떤 의미에선, 돌보지 않는 한― 타인이 지각한 세계를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세 가지 조건이 건설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이유는 사람은 누군가 자신을 받아 주고 소중히 여김을 받을수록 자기 스스로를 돌보는 태도를 더욱더 발달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공감하며 들어줄 때, 자신의 내면에서 경험하고 있는 흐름에 좀 더 정확하게 귀 기울여 들을 수 있게 된다.

사람이 자기(self)를 이해하고 소중히 여길 때, 그 사람의 자기는 그가 경험하고 있는 것과 더욱 일치된다. 그렇게 해서 그는 더 진실하게 되고 더 진짜가 된다. 이러한 성향들, 즉 치료자의 태도의 호혜성은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효과적으로 자기 자신의 성장을 촉진시킬 수 있게 해 준다. 참되고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자유가 더욱 커지는 것이다. 내담자가 치료자의 촉진과 더불어 하고 있는 일은 자신에 대한 존중, 공감, 일치성의 결여를 극복하는 것이다.

3. 고통의 이해

석가세존의 출가 동기는 모든 중생의 근원적인 괴로움을 해결하고자 함이었다.  16)  

중아함(i. 130)에서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오늘도 이전에도, 나는 오로지 두 가지만 설하였도다―괴로움(苦)과 괴로움으로부터의 해방”. 17) 

여기에서 ‘괴로움’은 말하자면 사물에 대한 ’불만족’이며 불교는 이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즉 괴로움을 깨닫고, 괴로움의 원인을 발견하여 이것을 없앰으로써 생사의 우물을 벗어나는 것이다.

괴로움의 보편성은 불교의 기본 교리인 사성제 중 첫 번째이다. 나머지 사성제들은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을 더는 법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괴로움이 본질적으로 ‘갈애’와 ‘무지’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18) 

 ‘갈애’가 종종 괴로움의 원인으로 표현되긴 하지만, 갈애 그 자체가 그 자신과 세계의 본성에 대한 깊은 오해에 뿌리내리고 있음(misperception)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자아가 어떤 고정된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여기는 우리의 정서적인 오해에서 기인한다. 19)

우리는 우리 자신이 본질적으로 이런 저런 존재라고 경험하며, 그러면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그림과 진정한 우리 자신과의 불일치 때문에 괴로움을 경험하게 되는데, 윤호균은 이를 이렇게 지적한다. “결국, 苦는 자기와 세계의 실상(공, 무상, 무아)에 대한 무지(무명)로 인하여, 자기라는 개념을 설정(오온을 자기로 봄)하고, 이 자기의 유지, 확장, 안락을 추구하는 이기적 생각, 감정, 욕망(갈애와 집취)을 내기 때문” 20) 에 생긴다. 20)

시간적으로 잠시도 머물지 않고 변화하는 것을 무상하다고 한다. 괴로움은 실체가 없이 연기하는 무상한 것을 ‘자아’로 집착함으로써 나타난 것이다. 부처님은 《쌍윳다니카야》(35, 43)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모든 것이 무상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무상한가? 눈도 무상하고, 형상도 무상하다…… 마음도 무상하고, 마음의 대상도 그러하며, 의식도 그러하고, 느껴지는 모든 것이…… 무상하도다.” 그리고 《방광대장엄경》에, “삼계가 마치 가을 구름처럼 무상하구나: 살아있는 존재들의 삶과 죽음이 마치 하나의 춤사위를 보는 듯하도다; 삶은 하늘의 번개처럼 사라지고, 산의 폭포처럼 빠르게 흘러간다.”(Batchelor, 1987, p.219)  21)

궁극적으로 불교에서 성취하려고 하는 것은 고통을 벗어나는 것이다. 이는 곧 열반을 의미하는데 열반은 오온, 즉 중생의 몸을 떠나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바로보고 살아가는 삶을 의미한다. 22)

이 진실을 바로보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이 탐, 진, 치이다.

불교에서 극복하고자 하는 세 가지 번뇌, 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감정들 곧 탐, 진, 치는 석가의 가르침이 담긴 아비담바 23) 에서는 해로운 마음의 가장 강력한 뿌리로 분류하고 있다. 23)

아비담마에 따르면 탐욕과 성냄은 서로 배타적이다. 그들은 한순간의 마음에 같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① ‘탐’은 ‘집착’ ‘욕망’ ‘달라붙음’ 등의 해석이 가능하다. 탐욕에 사로잡힘, 사물 또는 사람을 소유하려 들고, 세계를 삼키려들어 모든 것을 내 안에 가지려하는 것을 뜻한다. 독립 또는 분리, 나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는 무언가 또는 누군가를 용납하지 못한다.

② ‘진’은 ‘혐오’라고 볼 수 있다. 증오 뿐 아니라 두려움도 포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은 탐과 어떤 면에서 보면 반대이고 또 다르게 보면 매우 비슷하기도 하다. 어쨌든 탐이 무언가를 ‘갖고’ ‘꽉 쥐는’ 것이라면, 진은 무언가를 ‘없애려는 것’ 또는 자신으로부터 쫓아내는 것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것들의 공통점은 바로 집착, 갖거나 없애야만 한다는 것, 바로 ‘~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보통 괴로움을 낳는 갈애의 두 가지 측면들로 간주된다.

③ ‘치’는 ‘망상’ 또는 ‘무지’로 해석된다. 특정한 형태의 무지, 동기가 부여된 무지이다. 치는 명확하게 보지 않으려는 갈애이며, 따라서 서구 심리학자들의 억압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그것은 또한 ‘관성’과 ‘어리석음’의 측면을 지니고 있으며, 자신이나 타인을 보는 고착된 또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방식에 집착하는 것이다. ‘치’는 자신의 ‘자아’를 실재하는, 독립해서 존재하는, ‘단단한’ 실체로 여기는 것으로 본질적으로 환영과도 같은 자아지각과 연관이 있다고 본다.

대승불교에서도 탐, 진 , 치 셋을 독이라고 하여 삼독이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듯이 초기 경에서도 해로움의 뿌리는 바로 이 세 가지라고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다. 이에 반대되는 불탐, 부진, 불치를 유익함의 뿌리라 하여 강조하고 이 탐·진·치가 모두 다 소멸된 경지가 바로 열반이라 설하고 있다.

이를 위한 방법으로 불교에선 다양한 종류의 명상이 존재한다. 두 가지 핵심적인 수행이 존재하며 그것들은 사마타 수행과 비파사나(통찰) 명상, 또는 지(止) 와 관(觀)으로 알려져 있다. 사마타 명상은 단순히 특정한 경험에 개인의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을 뜻하며, 여기엔 호흡에 포함된 감각에 대한 것도 포함된다.

 이러한 종류의 명상에서 수련자는 자신의 경험에 대해 어떠한 판단도 내리지 않는다. 판단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알아차린다. 핵심은 경험과 머물면서 마음이 고요해지게 놔두는 것이다. 통찰 명상은 보통 사마타 명상이 약간 능숙해진 뒤에 도입되며 명상 수행자가 경험과 ‘머물 수’ 있게 될 때, 경험은 있는 그대로 비추이고 이해된다.

4. 세 가지 괴로움과 세 가지 핵심 조건의 연관성

퍼튼은 세 가지 ‘괴로움들’과 세 가지 핵심 조건들 사이의 유사성이 다음과 같음을 주장한다. 25)

“나는 불교의 ‘치’를 ‘불일치’와 연관 짓고 있으며 불교의 ‘탐’은 존중의 결여와, ‘진’은 공감의 결여와 연관 짓고 있다. 두 가지 사상 체계 모두 셋 중 하나를 다른 둘 보다 더 어떤 면에서 근원적인 것으로 집중하는 경향이 있음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인간중심 상담에서 괴로움의 밑에 놓여 있는 것은 바로 불일치이며, 불교에서는 환영(illusion)이다.”

이에 따라서 내담자의 문제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환영/불일치라고 볼 수 있으며, 목표는 깨달음/일치성으로 요약된다. 불교에서 깨달음은 탐욕과 혐오라는 갈애의 소멸을 통해서이고, 내담자-중심 치료에서 자아실현 또는 일치는 존중과 공감이라는 수용을 거쳐 가는 길이라고 보는 것이다.  26)

둘 간의 관계를 좀 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7)

① ‘치’는 ‘망상’ 또는 ‘무지’로 번역되기도 한다. 무지라고 볼 때 그것은 분명히 특정한 형태의 무지, 동기가 부여된 무지이다. 치는 명확하게 보지 않으려는 갈애이며, 따라서 서구 심리학자들의 억압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그것은 또한 ‘관성’과 ‘어리석음’의 측면을 지니고 있으며, 자신이나 타인을 보는 고착된 또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방식에 집착하는 것이다. ‘치’는 자신의 ‘자아’를 실재하는, 독립해서 존재하는, ‘단단한’ 실체로 여기는 것이다. ‘치’는 불일치와 연관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불일치는 본질적으로 진짜로 경험한 무언가의 어떤 측면들에 대한 부인 또는 왜곡을 포함하는 자아−오인(self-misperception)이다. 일치성은, 치와 마찬가지로 동기가 부여되는 것이며, 자아−지각의 영역에서의 환영을 가지고 이뤄지는 것이다.

② ‘탐’은 ‘집착’ ‘욕망’ ‘달라붙음’ 등으로 해석 가능하다. 탐욕에 사로잡힘, 사물 또는 사람을 소유하려 들고, 세계를 삼키려들어 모든 것을 내 안에 가지려하는 것을 뜻한다. 탐은 독립 또는 분리, 나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는 무언가 또는 누군가를 용납하지 못한다. ‘탐’의 극복은 사물, 사람, 생각에 대한 집착을 극복하는 것이며, 무언가를 가져야 한다는, 소유해야 한다는, 지녀야 한다는 느낌을 극복하는 것이다. 삶을 있는 그대로, 상황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서 그것들을 마땅히 누려야 할 무언가로 바꾸려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다른 이들이 나와 달리 사물을 바라봄을 수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탐을 약화시키는 것은 바로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다. 이것은 로저스가 ‘무조건적인 긍정적 존중’이라 부른 것과 유사하다.

③ ‘진’은 무언가를 ‘없애려는 것’ 또는 자신으로부터 쫓아내는 것에 집착하는 것이다. ‘진’의 극복은 혐오를 극복하는 것인데, ‘진’의 느낌은 단절, 도려냄, ~로부터의 달아남의 느낌이다. 진의 극복은 ‘한데 모으기’ ‘나누기’ ‘무언가를 가깝게 느끼기’를 의미한다. 그것은 연결성과 관계에 대한 수용이며, ‘인간은 섬이 아니다’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나는 당신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지 않았음을, 우리가 각각의 세계 안팎으로 드나들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이것은 로저스의 ‘공감’ 개념과 상당히 연관이 있다.

탐과 진의 공통점은 바로 집착, 갖거나 없애야만 한다는 것, 바로 ‘~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보통 괴로움을 낳는 갈애의 두 가지 측면들로 간주된다.

갈애는 필요하다는 느낌, 무언가를 해야만/혹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느낌에 해당한다. 괴로움은 갈애로부터 일어나며, 갈애는 나라는 고정된 자아가 존재한다는, 자아가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미망으로부터 나온다. 부처님의 말씀에 따르면(Nanamoli 1972, p.132), “인간이 덧없음을 지각할 때, 무아의 지각이 그 안에 자리 잡는다; 그리고 인간이 무아를 지각할 때, 그에겐 ‘내가 있다’라는 사견이 사라진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여기에서의 열반이다.”  28)

자아라는 느낌의 제거는 내가 반드시 어떤 식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느낌의 제거를 낳고 결과적으로 고정된 자아라는 느낌의 감소는 관계의 향상을 가져온다.

관계의 관점에서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인간은 불만족스러운 가까움의 형태(즉, 탐욕, 소유욕, 집착)에서 보다 만족스러운 가까움의 형태(즉 공감적인 교류)로 나아간다. 초기의 가까움은 그 속에 거리감이나 존중의 요인을 담고 있지 않은 불만족스러운 것이었다.

② 인간은 불만족스러운 형태의 분리(즉, 혐오, 두려움, 증오)에서 보다 만족스러운 형태의 분리(즉, 존중)으로 나아간다. 분리에서 불만족스러웠던 것은 바로 거기에 어떠한 함께함과 친교의 요인도 담겨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에 휘말린 인간은 그 혹은 그녀가 타인과 공유하는 공통된 인간성을 인정하거나 경험할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③ 환영으로부터 일치성으로 나아가는 경우는 관계의 관점에서 보자면 어떤 이가 관계 속에서 고통스러운 혼란의 상태에 처해있는 불만족스러운 무지의 상태에서 아무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경계선이 어디인지를 정확히 알 수 없을 테지만, 그 어떤 ‘함께’ 또는 ‘분리’의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 심오한 관계인 만족스러운 무지의 상태로 나아감을 의미한다.

이것에 대한 일별이 로저스의 워크숍에 참석한 한 참가자의 발언에서도 보이는 듯하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자신을 의식의 중심, 마치 보다 넓은 우주적 의식의 일부인 것처럼 느끼는 명상적 체험과도 같았어요. 그리고 또한 그러한 비범한 합일감과 더불어, 사람들 각각이 더 이상 명확하게 분리될 수 없는 듯 했어요.” 29)

여기에서 기본 개념은 12세기 티베트 불교의 스승이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우리가 우리의 가장 강력한 감정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반드시 그 치유법도 구해야 한다. 이것은 각각의 경우에 있어 그 반대되는 특성들에 대한 명상을 통해 이뤄진다”  30)

5. 두 개념의 연관성에 대한 치료적 함의

탐, 진, 치를 녹이는 방법으로 존중, 공감, 일치를 제안하는 것은 상당히 흥미롭다. 상담자의 입장에서 몇 가지 의미 있는 시사점이 있다.

첫째, 불교와 상담에 대해 하부구조에서의 연결성을 찾은 면이다. 그간 두 체계에 대한 연구들은 본고에서도 언급했지만, 동기나 목표, 지향점을 두고 공통점이나 유사점을 찾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구체적인 방법론에서의 연결은 앞으로 좀 더 구체화된 경험적 연구가 요구되며, 이는 불교와 상담에 관한 미시적인 측면의 연구 필요성을 의미한다.

둘째, 탐, 진, 치의 개념을 상담 장면에서의 정서적 문제로 구체화하고 그 해결 방법을 찾은 면이다. 탐, 진, 치는 감정의 문제이고 감정의 문제는 상담에서 내담자 문제의 핵심적인 주제와 연결된다. 두 개념의 핵심적 연결고리를 정서라는 측면에서 접근했다.

셋째, 탐, 진, 치를 유형화해서 각각을 치유하는 방식을 취했다. 상담에서는 보통 내담자의 주요 문제, 핵심 문제를 진단하는데 탐, 진, 치를 하나의 진단 준거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또한, 증상에 맞는 치유의 방법을 제시했다는 측면에서 심리치료의 전통과도 일치한다.

넷째, 탐, 진, 치의 극복을 관계 구도 안에서 시도하였다. 불교의 명상에서는 명상가가 스스로 자기 존중과 자기 공감을 보다 직접적인 방식으로 기르는데, 이에 반해 상담은 관계 안에서 구현된 공감과 존중에 의해 문제를 치유해 가는 과정이다.

나가는 말

본고에서는 동양의 불교와 서양의 인간중심 상담의 몇 가지 유사한 면과 핵심 개념에서의 연결점을 살펴보았다. 불교와 상담은 삶의 불만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그 기본 목표가 같다. 또한, 우리의 본성이 본질적으로 신뢰할 만하다는 것을 공리로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의 왜곡의 상당 부분은 우리가 평가의 외부적 중심축, 타인의 관점과 태도라는 외부적인 의지처를 채택하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간주하고, 이것이 치유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자기를 고정된 상태가 아닌 유동적인 흐름, 과정으로 본다. 자기의 해체, 자기 개념의 해체 또는 약화가 치료의 과정이고 그 방법에 있어서도 비슷하나 다만, 관계를 추구한다는 면에서 차이가 있다. 물론 종교에서의 자기의 해체는 상담에서 자기 개념의 약화 및 해소를 넘어서는 문제이다. ■

 

성승연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상담심리학과 교수. 가톨릭대 심리학 박사(상담심리). 가톨릭대학교 강사, 서울가정법원 상담위원 등 역임. 주요 논문으로 〈상담 장면에서의 탈동일시 현상〉 〈자기−초점적 주의와 심리적 안녕감 간의 관계에서 마음챙김의 조절 효과〉 등이 있음. 현재 불교상담개발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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