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프의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

어떤 사람이 공식 석상에서 필자에게, “파블로프의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요?” 하고 화두(話頭)와 비슷한 질문을 해 온 적이 있었다. 필자가 ‘선과 파블로프의 개’라는 제목으로 쓴 책이 있는데, 아마 선을 특히 개나 쥐와 같은 동물을 실험 대상으로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려는 학습 및 행동주의 심리학과 비교하려고 한 것이 못마땅했던 모양이었다. 만일 그런 질문을 필자가 아닌 개에게 직접 했다면 개는 무엇이라 대답하였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아마 개는 “멍!”이라 하였을 것이다.

파블로프(Pavlov, 1849~1936)는 러시아의 생리학자이며 심리학자로서 개가 종소리만 듣고도 침을 흘리게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개는 본래 종소리에 침을 흘리지 않는다. 종소리가 나면 개는 보통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귀를 쫑긋하거나 꼬리를 조금 흔드는 정도의 방향반응(orientation response)을 보일 뿐이다.

이런 개에게 파블로프는 종소리와 먹이를 시공간적으로 근접시켜 제공한 결과로, 개가 종소리만 들어도 음식물이 입에 들어갔을 때와 비슷하게 타액을 분비하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이런 현상을 고전적(古典的) 조건형성(條件形成)이라 부른다. 우리가 “김치!”라는 말만 들어도 입안에 침이 고이는 것도 고전적 조건형성의 예가 된다. 우리의 안이비설신의가 모두 그렇게 조건화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모양을 모양으로, 소리를 소리로, 냄새를 냄새로, 맛을 맛으로, 있는 그대로 경험하지 못하고 온갖 망상을 일으키게 된다.     

한편, 미국 하버드대학의 스키너 박사(Skinner, 1950)는 ‘스키너 박스(Skinner box)’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쥐나 비둘기가 그 속에서 시행착오적인 행동을 하다가 우연히 먹이와 연관되어 있는 레버(lever)나 디스크(disk)를 건드려 먹이를 얻게 되면서, 배가 고프기만 하면 레버를 반복해서 누르는 행동 결과로 먹이를 얻는 학습 과정을 볼 수 있었다. 즉 쥐는 레버와 먹이 사이의 인과관계를 발견한 것이다. 스키너는 그런 실험의 결과로, A−B−C라는 공식을 만들었는데, A는 행동의 선행조건, B는 행동, 그리고 C는 행동의 결과를 표시한다.

이 공식에 의하면, 어떤 행동이라도 우연히 일어나는 법은 없으며, 행동은 일어날 만한 조건과 원인이 되는 선행조건 아래서만 일어난다. 또한, 행동은 행동의 결과로 무엇을 얻게 되었는가의 결과에 의하여 유지 또는 증가될 수도 있고, 감소되거나 없어지게 된다. 스키너가 말한 학습의 원리를 도구적(道具的) 조건형성이라 부른다. 도구적 조건형성의 예로는, 우리가 교통신호에 따라 차를 멈추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우리가 외국어를 배우거나 글을 읽거나 규칙을 따르거나, 그 반대로 욕을 배우거나 도적질을 배우거나 하는 것에도 그런 도구적 조건형성의 원리가 작용한다.

고전적 조건형성과 도구적 조건형성 또한 서로 결합되어 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놀다가 수업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나면 교실로 뛰어 들어가는 행동에는, 종소리를 경고로 반응하는 감정적 측면이 있고, 교실로 빨리 뛰어 들어감으로써 늦지 않으려는 도구적 측면이 있다. 우리의 행동에도 이 두 가지 요소가 언제나 함께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파블로프나 스키너의 연구 결과는, 인간의 사물·사건에 대한 감정적 반응이나 행동은 인과의 법칙을 따른다는 것을 말해 준다.

파블로프의 고전적 조건형성이나 스키너로 대표되는 도구적 조건형성 이외에, 인간은 또 한 가지 다른 통로를 통하여 학습한다. 그것을 모방 학습, 대리(代理) 학습 또는 사회적 학습이라 부른다(Bandura, 1962). 다른 사람의 행동을 모방하는 것으로도 학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영화나 비디오에 시청불가 등급을 매겨 연소자들이 보지 못하게 하는 것도 그러한 모방 학습의 가능성 때문이다.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파블로프나 스키너의 조건형성의 원리는 불교에서 왜 우리의 육처(六處)나 육경(六境) 또는 육식(六識)을 모두 ‘도적(盜賊)’으로 표현하는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학습의 원리는, 불교가 십이연기(十二緣起)로 생로병사와 우비고뇌가 어떻게 생기게 되는가를 설명하고 또한 마음을 왜 습(習)이나 업(業)의 결과로 보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행동주의 심리학의 철학적 배경은 연합주의(聯合主義, associati-onism)이다. 연합주의자들의 주장은, 첫째 인간의 마음은 미리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둘째 인간의 마음은 경험에 의하여 형성되는 것으로, 마치 벽돌이 쌓여 집이 되는 것처럼 단순한 개념들이 모여 복잡한 개념들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고 본다.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행동 역시 활을 떠난 화살이 공중으로 날아가다가 땅에 떨어지게 될 때 작용하는 물리학적 법칙이나 산소와 수소가 연합되어 물이 되는 것과 같은 화학적 법칙으로 설명한다. 그래서 행동주의 심리학을 심리−화학(psycho-chemistry)이라 부르기도 한다. 행동주의 심리학은 무엇과 무엇이 연합된 결과로 형성된 행동을, 무엇을 무엇으로 바꿈으로써 새로운 행동이 일어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앞에서 언급한 A−B−C 공식이 바로 그런 것이다.

즉, 행동 변화를 위해서는 선행조건으로 작용하는 상황 또는 자극, A를 통제하거나 적절하지 못한 행동 B를 새로운 행동으로 바꾸게 하거나 또는 행동 결과로 따라오는 C를 통제하는 방법으로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주의 심리학에서 행동수정(行動修正)의 방법으로 적용하는 대치(代置)나 대치(對治)는 불교에서 욕정을 통제하는 방법으로 부정관(不淨觀)을 하게 하거나 또는 분노를 통제하는 방법으로 자비관(慈悲觀)을 하게 하는 것과 일치한다. 불교와 행동주의 심리학이 모두 인과의 법칙을 따른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러한 일치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불교의 핵심적 철학 사상은 연기(緣起)다. 연기는 법(Dharma)으로서, “연기를 보는 자는 부처를 보고, 부처를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고 할 만큼 연기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불교를 알 수 없다. 연기란, 모든 것이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것, 또는 모든 것은 서로 인과관계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연기는 행동주의 심리학의 연합주의와 병행한다. 또한 인간의 마음이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이전 경험에 의하여 형성된다고 하는 행동주의 심리학의 견해와 불교의 인간의 마음에 대한 견해도 일치한다. 또한 불교가 인간의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도 행동주의 심리학과 같다. 그렇게 보면, 불교와 행동주의 심리학은, 인간을 육체와 정신 또는 몸과 마음의 이원론적 사고로 보아 왔던 전통적 사고방식에 대한 엄청난 도전이다.

그리고 불교는 놀랍게도, 자연 사물에 작용하는 인과의 법칙이 인간의 마음이나 행동에도 그대로 작용된다고 본다. 전자를 외연기(外緣起)라 부르고, 후자의 경우를 내연기(內緣起)라 부른다. 이것은 행동주의 심리학이 물리학적 그리고 화학적 인과의 법칙을 인간 행동을 설명할 때 그대로 적용하는 있는 것과 같다. 그뿐 아니라 불교에서 유전연기(流轉緣起)와 환멸연기(還滅緣起)라는 말로 걱정 근심을 일으키는 원인으로서 연기를 지목하고 또한 그러한 걱정 근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방법도 동일한 연기법에 의한다고 하는 것이나, 행동주의 심리학에서 부적응행동이나 적응행동이 모두 학습의 원리를 따른다고 하는 것과도 일치된다.

불교와 행동주의 심리학 간에 발견되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몇몇 불교학자들은 행동주의 심리학이 오히려 불교를 방해하는 것으로 보았다. 예를 들어, 선을 서양에 소개한 사람으로 유명한 스즈키(Suzuki, 1960) 박사는 말하기를, 행동주의 심리학은 ‘기계적인 인과(因果)의 법칙’으로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려고 한다고 하면서 행동주의 심리학을 불교를 방해하는 ‘훼방꾼’이라 했고, 명상가로 유명한 인도의 라즈니쉬(Laznish, 1987)는 행동주의 심리학은 인간의 마음 중 하위층에 속하는 측면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평한 바 있다. 행동주의 심리학이 이렇게 불교에서 환영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불교의 훼방꾼으로까지 몰리게 된 이유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불교학자들이 행동주의 심리학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 행동주의 심리학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과 함께, 행동주의 심리학을 단지 보상이나 벌로 타인을 통제하려는 학문이라고 생각하는 왜곡된 신념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행동주의 심리학을 뒤집어 놓고 보면, 역설적으로 왜 불교가 인간의 마음을 망상(妄想)이라 부르며, 왜 불교가 인간의 본심을 회복하게 하는지를 행동주의 심리학을 통하여 쉽게 이해할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행동주의 심리학에 대한 부정적 태도는 불교의 가르침은 어떤 ‘거룩한 가르침’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장하면 먹고, 피곤하면 잔다.”는 평상심이 바로 불교에서 추구하는 도(道)라거나 “마음이란 본래 없는 것”이라는 불교의 가르침에서 행동주의 심리학을 보면 불교와 행동주의 심리학은 병행한다는 것을 곧 발견하게 될 것이다.

불교와 행동주의 심리학 간의 유사성은, 예를 들어 달마 대사가 “인간은 본래 무아(無我)로 인연(因緣)의 힘에 의하여 움직일 뿐”이라고 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정의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소극적’ 정의가 불교에서 내려지고 있다는 사실은, 불교 수행을 통하여 초인간이 되거나 무슨 기적을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이 수용하기는 극히 어려울 것이다.

사실, 달마 대사가 내린 인간에 대한 그러한 정의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과의 기계적인 원리’로 인간을 설명하려는 극단적 행동주의자들이 내리고 있는 인간에 대한 정의로 착각하게 할 것이다.

불교에서는 ‘마음이란 본래 없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마음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황벽 선사는 우리가 본심(本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견문각지(見聞覺知)라고 했다. 우리가 육처를 통하여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견문각지가 본심이 아니라면 그것은 개인이 이전 행동경험을 통하여 학습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 훈습(薰習)에 의한 마음을 제거하고 본심을 보게 하는 것이라면, 불교의 유전연기와 환멸연기를 학습과 탈학습이란 관점에서 설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연기의 이법과 상호제지의 원리

불교학자로도 유명한 일본의 미즈노(水野, 1988) 스님은 연기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연기란 ‘반연하여 일어나는 것’ ‘다른 것과 관계해서 일어나는 현상계의 존재’다. 사회 인생의 모든 현상은 반드시 그가 일어나게 될 조건과 원인 아래서 연기의 법칙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어서 이단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최고신이 현상의 생멸 변화를 맡는다든가, 숙업(宿業)이나 그 밖의 원인으로서 현상의 움직임은 숙명적으로 미리 결정되어 있다든가, 현상의 변화에는 어떠한 원인도 조건도 없고 모두가 무궤도적으로 돌발하는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든가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원인과 조건에서 어떠한 현상이 생기고 또 멸하는가 하는 현상의 움직임에 관해 올바른 지식을 얻는다면 우리에게는 그 현상이 움직이는 법칙에 따라 우리가 욕심내지 않고, 좋지 않은 현상을 제거하고, 바라고자 하는 좋은 현상을 우리의 손으로 실현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즉 연기의 이법(理法)에 관하여 본다면 우리의 생사윤회의 괴로움을 벗어나 해탈열반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석존에 의해서 발견된 연기의 이법은 이러한 것이었고, 거기에 의해 석존은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된 것이다.       

연기는 객관적 법칙이다. 미즈노가 지적하는 것은, 물리학자들이나 화학자들이 어떤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조건과 원인을 알고 그것을 이용하여 좋지 않은 현상을 제거하고 바라고자 하는 좋은 현상을 실현시키는 것과 같이 우리의 행동이나 마음에 일어나는 현상에 관련되어 있는 인과의 법칙을 이용하여 괴로움을 벗어나 해탈열반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초기불교의 위빠사나 수행이나 간화선(看話禪) 수행에도 연기의 이법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위빠사나 수행에서 육체적 욕정을 부정관으로 대치하는 방법도, 어떤 행동도 우연히 일어나는 법은 없다는 인과의 법칙을 따른 것이다. 즉 육체적 쾌감과 결부되어 있는 욕정이 일어날 때, 욕정으로 기대되는 쾌감과는 반대되는, 육체가 죽어 썩어가는 불쾌한 심상을 대신 떠올리게 하여 욕정을 끊어 버리도록 하는 것이다. 분노를 자비관으로 대치하게 하거나 그 외 조사선(祖師禪)이나 간화선에 들어와서도, 선으로 산란한 마음을 다스리게 하며 할(喝)이나 방(棒)으로 시비 분별하는 말이나 생각을 처벌한다. 또는 화두(話頭)로 ‘말의 길과 생각의 길을 끊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 모든 것이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연기의 이법 또는 인과의 법칙을 그 바탕에 두고 있다.

연기법을 따르는 불교의 다양한 대치법은 학습 원리에 바탕을 둔 행동치료에서 그 모습을 그대로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 고른 숨으로 고른 숨을 방해하는 모든 병을 고친다는 수식관(數息觀)은 심신의 이완(弛緩)으로 이완을 방해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불안감이나 두려움을 치료하는 행동치료의 사례가 된다. 또한, 욕정을 부정관으로 대치하게 하는 방법 역시, 담배 중독자에게 담배를 피우는 자신을 심상(心想)으로 떠올리면서 자신이 폐암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자신을 역시 심상으로 바라보게 하는 예와 같은 내면적 역조건화(逆條件化)를 적용한 치료법과 일치한다.

불교에서 삼독(三毒)에 속하는 탐진치를 계정혜 삼학(三學)으로 대치하게 하는 방법 역시 과제 중심적 접근법으로 인지−행동치료에 속한다. 불교나 행동주의 심리학이 모두 인간의 마음을 이전 행동 경험의 결과 또는 쌓임으로 본다. 그렇기 때문에, 이전에 학습한 올바르지 못한 행동을 소거(消去) 또는 탈학습(脫學習)시키거나 새로운 경험으로 재학습(再學習)시키는 것이 불교 수행이나 행동치료의 특징이 될 수밖에 없다.  

불교에서 인간의 마음을 ‘물과 파도’의 관계로 본다는 것도 행동주의 심리학의 마음에 대한 관점과 일치한다. 불교의 수행법이나 행동치료의 특징이 모두 마음을 물과 파도의 관계로 보는 데서 얻게 되는 기법(技法)이다. 부정관으로 욕정을 대치하거나 분노를 자비관으로 대치하는 방법 등과 《육조단경》에서 다양한 대법(對法)으로 제도하게 하는 방법 역시 물과 파도의 관계로 인간의 마음을 보지 않는 한 그러한 방법은 성립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파도는 동일한 물이기 때문에 파도란 물이 동요하는 것이고, 물이 잠잠하다는 것은 파도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명경지수(明鏡止水)와 파도는 동시에 일어날 수 없는 상반관계(相反關係)에 있다. 이것이 암시하는 것은, 몸과 마음 역시 언제나 병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잠잠하면 몸도 잠잠하게 되고, 몸이 잠잠하지 않으면 마음도 잠잠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몸을 조용하게 하는 방법은 곧 마음을 조용하게 하는 방법이 된다. 수식관으로 고른 숨을 쉬게 하는 방법으로 고른 숨을 방해하는 모든 병을 고친다는 원리도 마음을 파도와 물의 관계로 보기 때문이다. 연기법에 따르면, 모든 것이 서로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 행동주의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관계를, 상반행동 차별강화라 부르기도 하고, 상호제지(相互制止)의 원리라 부른다.

불교가 탐진치를 대치하는 방법에도 그런 원리가 적용되고 있다. 또한 선에서 달마의 벽관(壁觀)에서처럼 마음을 긴장하게 하는 방법으로 밖으로부터 어떤 오염된 생각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거나, 평상심을 도라고 하는 것에도 상호제지의 원리가 그 속에 들어 있다.

심신을 교란하게 하는 심리적 요인들은 다양하다. 또 그러한 요인들을 하나하나 찾아 해결하기는 너무나 어렵다. 그러나 벽관에서처럼, 옹벽이 외부로부터의 객루풍진을 막는 것처럼 마음의 ‘내면적 긴장’으로 어떤 생각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지하는 방법은 모든 종류의 정신적 고통을 한 가지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전략이다. 간화선에서 말과 생각의 길을 끊는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떤 종류의 번뇌라도 말과 생각에 따라 일어난다. 말과 생각의 길을 끊는다고 하는 것은 모든 번뇌의 근원을 차단한다는 것과 같다. 불교에서 번뇌가 곧 보리라고 하거나, 중생이 곧 부처라고 하거나, 부처와 중생 그리고 마음을 하나라고 하는 것도 물과 파도의 관계에서 마음을 보기 때문이다.

만약 몸과 마음이나 선악이나 성범(聖凡)이나 미추가 인간이 오랫동안 그렇게 믿어 온 것처럼 각각 분리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숨을 고르게 함으로써 고른 숨을 방해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병을 고친다고 하는 것과 같은 대치법 또는 상호제지의 원리로 해결할 수는 없다. 불교나 행동주의 심리학은 그런 면에서 또한 일치한다.

일체유심조와 조건형성

원효 대사가 젊었을 때 당나라에 가다가 밤에 들에서 찾아 마신 물이 다음 날 아침 해골바가지에 담겼던 빗물이었음을 알게 되자 밤에 마신 물조차 토하면서 문득 깨닫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외쳤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젊은 원효가 경험했다는 또 한 가지 이야기는, 어느 날 밤 그가 수행하고 있는 작은 암자에 여인이 찾아와서 하룻밤만 묶게 해 달라고 간청하여 좁은 방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는데 아침 일찍 그가 밖으로 나와 개울에서 목욕을 하려는 순간 그 여인도 따라 나와서 옷을 벗으려고 했다. 그러자 원효는 화가 나서, “당신은 어제도 나를 괴롭히더니 지금까지도 나를 괴롭히려고 하지 않는가!” 하고 화를 냈다고 한다.

그 여인은 자기도 목욕하려고 하는 것일 뿐이라는 말과 함께 폭포 위로 올라가 버렸다고 한다.
밤에는 시원하게 마신 물이 아침에는 토하게 하는 물로 둔갑을 했다는 이야기나 원효가 목욕하려는 여인을 꾸짖었다는 이야기는 모두 객관적 사실과는 관계없이, 그의 마음이 그렇게 토하게 하고 또한 화를 내게 한 것이다. 원효는 이렇게 미추나 귀천이나 성범이라는 사물·사건에 대한 지각과 판단이 사물의 진실한 모습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마음이 그러한 망상을 일으킨다면 우리가 자타나 내외를 분별하고 서로 밉다든가 싫다든가 더럽거나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 모두 마음에서 생긴 허상에 불과하다. 따라서 참모습의 세계는 서로 무아나 공으로 조화와 평화를 이루게 되어 있다는 것을 원효는 깨달아 원융회통(圓隆會通) 사상을 발전시켰을 것이다.

원효 대사에 관한 그러한 에피소드나 그가 왜 일체유심조라고 말했는가를 심리학적 측면에서 가장 정확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이 조건형성의 원리다. 원효가 간밤에 마신 물까지도 토하게 한 것은 물 자체가 더러워서가 아니라, 그 물이 그가 싫어하도록 학습한 해골바가지에 담겨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해골바가지는 피하고 싶은 죽음을 뜻하고, 시체가 썩을 때의 더러움으로 조건화된 사물이다. 해골과 시공간적으로 근접해 있는 사물은 어떤 것이라도 싫어지게 된다. 또 다른 예로, 금방 옹기를 굽는 가마에서 나온 그릇이라도 그것이 ‘요강’이면 거기에 음식을 담아 먹기는 어렵다. 이러한 사물에 대한 감정은 파블로프식 조건형성의 원리로 쉽게 설명된다.

우리는 반드시 어떤 것이 더럽기 때문에 더러운 것이 아니라 마음이 더럽게 보기 때문에 더러운 것이고, 어떤 것이 반드시 아름답고 귀하기 때문에 아름답고 귀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그렇게 아름답다거나 귀한 것으로 보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사물·사건에 대한 지각이나 반응은 모두 학습의 결과다. 타인에 대한 편견이나 집착이나 성도착증과 같은 것도 모두 조건화된 결과다. 우리는 이전 경험 또는 학습의 그림자에 의하여 아무것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여인을 보고 화를 낸 원효의 행동 역시 자신의 욕망이나 소원이나 갈등을 반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릴 때 학대를 받고 자란 사람은 성인이 된 이후라도 다른 사람을 신뢰하기 어렵다. 원효 역시 그 여인의 행동을 자신의 주관적 눈으로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 사람은 자기가 보려고 하는 것만 본다.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지구물리학자의 관점에서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망상적인 것인가를 아래와 같이 지적하면서, 진실한 모습의 참나를 회복하도록 촉구하고 있다(Peper와 Holt, 1993에서 재인용).

인간은 우리가 소위 우주라고 부르는 전체의 일부로서 시공간적 제한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을 전체로부터 분리된 것과 같은 의식상의 시각적 망상을 경험하고 또한 그것이 사실인 양 생각하고 느끼고 있다. 이러한 망상은 일종의 감옥과 같은 것으로 우리로 하여금 주위에 가까이 있는 몇 사람들에게만 개인적 관심을 가지거나 애정을 느끼도록 제한한다. 우리의 과제는 살아 숨 쉬는 모든 창조물과 아름다운 자연 전체를 포옹할 수 있도록 열정의 폭을 넓힘으로써 그러한 감옥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나 아인슈타인이 보는 것처럼 인간을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유정물이나 무정물 할 것 없이 우주에 속한 모든 것은 무아로 인과의 법칙을 따를 뿐이다. 태양도 그렇고 달도 그렇고 지구도 그렇다. 모두가 서로 의지하여 움직이고 변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주는 겹겹의 꽃잎들이 모여 한 송이의 아름다운 꽃이 되는 것처럼, 우주에 속한 크고 작은 사물들이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관계로 서로 의존하는 것이다. 거기에 무슨 자기라는 것이 따로 있을 수 없다.

즉, 무아나 공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 의지하는 사물이 가지고 있게 되는 본성이며 이 본성은 서로 조화와 평화를 이루에 하는 지혜가 된다. 이 공의 지혜가 바로 팔정도가 되고 육바라밀이 된다. 그것을 또한 자연지(自然智) 또는 근본지(根本智)라 할 것이다. 깨닫게 되면 이 지혜가 본성으로 나타나게 되고,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수행이나 훈련 또는 학습의 대상이 될 것이다.

깨달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의 차이는 ‘여실지견(如實之見)’ 즉 사물이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느냐’, 그렇지 않고 스스로 만든 허상으로 보고 헤매고 있느냐에 있다고 한다. 여실지견은 불교 수행의 목적이면서도 행동주의 심리학의 목표가 되기도 한다. 행동수정이라는 것도 개인이 환경에 바로 적응할 수 있도록 타당자극(妥當刺戟)을 타당치 않은 자극으로부터 변별(辨別)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그 목표이기 때문이다.

중도와 사성제

사람들은 사물을 각각 분리된 형태로 지각한다. 사물을 분리된 것으로 지각하게 되면 사물의 움직임이나 사물이 보이는 현상을 사물 자체가 가진 어떤 기능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는 분리된 사물이 어떻게 움직이며 변하게 되는가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신을 우주로부터 분리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내면에 자기의 행동을 통제하는 또 하나의 자기라는 것이 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과 같다. 이것이 모든 것을 이원론적 사고방식으로 지각하고 판단하게 되는 이유다.

물론 이러한 사고방식은 실제와는 다른 것이기 때문에 미신(迷信)을 낳게 된다. 예를 들어, 해가 뜨고 지는 현상을 사람들은 해 속에 스스로 뜨고 지게 하는 어떤 자기 또는 정신과 같은 형이상학적 존재가 그 안에 있으리라고 믿게 된다. 이것이 오랫동안 인간이 태양을 신(神)으로 섬기면서 산 사람의 심장까지도 제물로 바치게 한 이유다. 사람들은 그러한 미신으로 달에도 자기라는 것이 있고, 바다에도 자기라는 것이 있고, 산에도 자기라는 것이 있고, 큰 바위나 강에도 자기라는 것이 있다고 믿게 된다.

그러나 모든 것은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연기를 깨닫게 되면 그러한 미신은 모두 사라지게 된다. 과학자들이 태양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천체에 속한 다른 별들과의 의존적 관계에서 움직이는 것을 발견하게 됨으로써, 우리는 오랫동안의 미신과 미신으로 인한 어리석은 행동이나 두려움을 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구도 그렇게 무아로 자전하면서 태양의 주위를 돌고, 달도 지구의 주위를 무아로 돈다. 모든 것이 서로 의존하며 인과관계에 있다는 자연법칙의 발견은 미신과 무지에서 오는 걱정 근심을 버리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인과의 법칙을 이용하여 개인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까지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연기법을 ‘북경에 있는 나비 한 마리가 날개를 한 번 퍼덕인 것을 인연(因緣)으로 뉴욕 맨해튼에 폭풍우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카오스(Chaos) 이론과도 비교해 볼 수도 있다. 우주에 속한 크고 작은 모든 사물은 하나의 그물[網]로 사방팔방으로 무궁무진 연결되어 있어서 한쪽에서 일어난 어떤 작은 현상이나 변화도 우주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날개를 퍼덕인 북경의 나비 역시 우연히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그렇게 날개를 퍼덕이게 될 만한 원인과 조건하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인간의 육체를 이루고 있는 지수화풍 역시 자연의 아주 적은 변화에도 영향을 받게 되어 있고, 인간의 마음 역시 자연조건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다.

인간은 자연의 물리적 화학적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우리가 걷거나 뛰는 일거일동에도 지구의 인력이나 바람에 영향을 받으므로, 잘 걷고 잘 뛰기 위해서는 지구의 물리적 조건과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그뿐 아니라 옷을 입거나 화롯불에 몸을 녹이는 것이나 숨을 쉬거나 물을 마시고 밥을 먹는 것도 자연의 물리적 화학적 조건과 상황에 따라야 한다.

우리의 삶이란 한순간도 그러한 자연의 물리적 화학적 인과관계에서 떠날 수 없다. 우리의 몸을 지탱하게 하는 뼈대나 근육도 물리적 환경에 적응하도록 구조화되어 있고,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하여 전달되는 자극을 인식하고 반응하는 중추신경 역시 전기·화학적 작용이다. 육처를 통한 육경과의 접촉은 모두 물리·화학적 작용이다. 마음이 몸과 행동을 통제하게 되어 있다면, 마음 역시 사물에 작용하는 인과의 법칙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자연과학자들은 자연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변화에서 인과의 법칙을 발견한다. 과학기술이란 그러한 자연에서 발견한 법칙을 이용하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그러한 원리로 자동차나 비행기를 만들기도 하고 컴퓨터를 만들기도 한다. 또한 인간의 병을 고치는 약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러한 과학기술은 모두 인간의 주관적 판단이나 생각을 배제하고 얼마나 정확하게 자연의 법칙에 일치하느냐에 따라 가능하게 된다.

석가모니는 과학자들이 인과의 법칙으로 자연현상을 설명하고, 동일한 인과의 법칙을 적용하여 인간에게 편리한 물건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연기의 이법으로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고 또한 연기의 이법으로 인간이 당하는 고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 방법을 발견했다. 그 예가 바로 중도(中道)와 사성제(四聖諦)다.

모든 것은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연기법에 따른다면 인간의 몸과 마음 역시 둘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오랫동안 몸과 마음을 서로 분리된 것으로 보아 왔기 때문에, 몸을 괴롭힘으로써 정신적 구원을 추구하는 고행(苦行)과 같은 수행법도 생겨났다. 석가모니 역시 처음에는 고행에 전념하였지만 연기에 대한 깨달음을 얻어 중간에서 그만둔 것이다.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라면, 몸을 괴롭힘으로써 정신적 구원을 얻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는 그가 고행을 중간에서 그만두었다고 그를 타락한 수행자로 생각하고 있었던 이전의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水野, 1988에서 재인용).

“비구들이여, 고행에 의해 깨달음을 연다(開悟)고 그대들은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나, 몸을 괴롭히고 고행에 전념하는 것은 육락의 생활에 탐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된 수행과 깨달음에 대하여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무익한 행위다. 올바른 깨달음의 도는 고행이나 욕락과 같은 극단을 떠나 몸과 마음의 조화를 얻는 중도(中道)의 방법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무익한 고행을 버리고 합리적인 중도의 수행법에 의해 올바른 세계관과 인생관을 확립하고 참으로 흔들림이 없는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여 부처가 된 것이다.”

중도란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라는 법칙에 따를 때 취하게 되는 행동이다. 중도란 마치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이 나침반 하나로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것과 같다. 참된 수행과 깨달음이란 것은 사물이나 자신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 실체란 바로 모든 것이 서로 의존한다는 것이고 무아라는 것이다. 그것이 석존이 발견한 세계관이며 인간관이다.

중도로 사는 방법이 사성제에 나타난다. 사성제는 고제(苦諦)로서의 팔고(八苦)와, 팔고의 원인이 되는 집제(集諦)로서 갈애(渴愛), 고통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으로 멸제(滅諦), 그리고 팔고를 해결하는 구체적 방법인 도제(道諦)로서의 팔정도(八正道)가 그 내용이다.

사성제는 지금의 의사들이나 심리치료자들이 환자가 가지고 있는 고통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진단하고, 그 원인을 파악하고, 예진하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제시하는 것과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사성제 역시 인간의 고통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원인과 조건하에서 일어나며, 조건을 변화시킴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인과의 법칙에 바탕을 둔 것이다.

사성제를 고제 대 집제, 그리고 멸제 대 도제, 두 쌍으로 나누어 보면, 고제와 집제는 팔고가 어떻게 일어나게 되는가를 설명하는 유전연기가 되고, 멸제와 도제는 팔고를 해결하는 방법으로서 환멸연기가 된다. 유전연기로서의 고제와 집제, 즉 팔고와 갈애가 어떤 경로를 통하여 일어나게 되는지는 십이연기(十二緣起)가 설명해 주고 있다.

십이연기는 무명에 반연하여 일어나는 행을 시작으로, 식→명색→ 육처→촉→수→애→취→유→생→노사 우비고뇌라는 12가지 인연으로 분별의식이 발달된다는 학습론이다. 십이연기는 마치 캄캄한 굴속에서 태어난 사람이 굴속에서 자라면서 이고득락이라는 육체적 요구에 의하여, 시행착오적으로 행동한 결과로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수상행식을 발달시켜 가는 모습을 묘사하는 것과 같다.

십이연기를 학습이란 측면에서 설명한다면, 무명에 반연하여 일어나는 행동의 결과가 쌓이면서 사물을 가상적으로 인식하는 식이 생기게 되고, 식은 사물의 모양이나 명칭에 따라 육처가 반응하도록 하며, 그러한 육처의 사물에 대한 반응은 어떤 것은 좋고, 어떤 것은 싫다는 사물·사건에 대한 감정을 일으키게 된다.

또 그런 감정에 의하여 사물에 대한 애착이 생기게 되며, 그러한 애착에 의하여 취하고자 하는 갈구가 생기게 되며, 그러한 갈구는 유무에 대한 분별의식을 낳는다. 또한 유무에 대한 의식은 자신의 생사에 대한 불안감을 낳고, 생사에 대한 불안은 생로병사와 우비고뇌를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십이연기는 어린아이의 단순개념들이 모여 성인들이 보이는 것과 같은 복합개념을 형성하게 된다고 주장하는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멸제와 도제를 탈학습(脫學習)이란 측면에서 살펴보자. 어떻게 갈애와 팔고를 해결할 수 있게 되는가? 사성제는 팔정도를 팔고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제시한다. 팔정도의 내용은 정견(바른 견해), 정사유(바른 판단), 정어(바른 말), 정업(바른 습관), 정명(바른 생활), 정정진(바른 노력), 정념(바른 기억), 정정(바른 선정)이다. 팔정도는 다시 삼학, 즉 계정혜로 정리할 수 있다. 계정혜는 갈애가 일으키는 탐진치를 대치하는 구체적 방법이 된다. 유전연기의 결과인 탐진치를 삼학, 즉 계정혜로 바꾸어 멸하는 것이다.

몸과 마음이 서로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탐진치도 서로 의존하고 있고 계정혜 역시 서로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색수상행식의 통합적 관계는 탐진치에서 오는 성격상의 문제나 정신적 스트레스가 신체적 질병의 원인이 될 수 있으며, 신체적 질병을 치유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계정혜를 적용할 수 있다.

특히 계정혜를 인간의 성품에 일치되는 내면적 요인으로 보았을 때, 공에 의존하게 하는 불교의 이러한 총체적 접근법은 곧 정신적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방법일 뿐만 아니라, 육체적 질환까지도 스스로 치유하는 방법이 된다. 현재, 좌선이나 명상에서 힌트를 얻은 자기치유법(Jaffe, 1980) 등은 마음의 변화를 통해 신체적 질병을 치유하는 방법이다. 연기와 무아관에 바탕을 둔 불교 사상과 수행법을 자기치유법으로 응용하면 현재의 자기치유법보다는 훨씬 강력한 치유 기능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의 자기치유법에서 적용하는 이완 훈련이나 치유심상(治癒心想)의 한계점에 비하여, 불교의 수식관이나 사념처 또는 면벽좌선을 통하여 체득하게 되는 심신의 고요함은 자성으로서의 고요함이며 또한 탐진치를 대치할 계정혜 역시 자신의 본성인 무아를 실천하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치유를 위하여 일시적으로 적용하는 이완이나 행동이나 생각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내적 치유력을 발휘하게 하는 동시에, 그러한 계정혜는 개인의 생활 자세를 통해 정신적 육체적 질병을 예방하는 방법으로 계속 유지될 것이다.

팔정도나 삼학 또는 육바라밀은 학습과 훈련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모두 무아로 자연과 조화와 평화를 이루게 되어 있는 본심의 속성이 되기도 한다. 불교의 근간(根幹)이라고 하는 중도와 사성제는 그것을 학습론에서 보았을 때, 그 모습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망심이란 생각이 어디엔가 ‘엉기거나 굳어진 것’

유전연기나 환멸연기를 조건화 또는 학습이란 측면에서 보면, 유전연기는 경험을 통하여 생각이나 행동이 무엇에 엉기거나 굳어져 버린 결과다. 한편, 환멸연기는 유전연기로 엉기거나 굳어져 자유롭지 못하는 생각이나 행동을 용해(溶解)하거나 소거하는 과정이다. 가마타(鎌田, 1987)는 타쿠안 소호(澤庵宗彭: 1573~1645)가 본심과 망심 그리고 유심과 무심의 불가분의 관계에 대하여 말한 바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본심(本心)이란 둘로 분열됨이 없이 전신전체(全身全體)로 펴 나가는 마음을 말한다. 망심(妄心)은 생각이 어딘가에 붙들려 한곳에 고착된 상태를 가리킨다. 본심이 굳어져 엉기면 망심이 되어 버린다.

유심은 망심과 같다. 글자 그대로 ‘있는 마음’ 즉 어디엔가 한곳에 ‘생각이 묶여 있는 곳’이 있음을 나타낸다. 마음에 생각이 있으면 분별사안(分別思案)이 잇따르게 되므로 유심이라 한다. 무심은 앞에서 말한 본심처럼 굳어지고 고정되는 일이 없이 분별도 사안도 없는 마음이다. 온전히 전체로 뻗어나가는 마음을 무심이라 한다.

생각이 어떻게 어디엔가 붙들려 한곳에 고착되는지를 우리는 파블로프의 실험에서 다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개가 종소리와 음식물이 병행되는 경우에 종소리에 타액을 분비하는 것은 종소리에 곧 따라 나올 음식물을 빨리 먹고 소화하는 데 필요한 적응 반응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종소리에 따라 나왔던 음식물이 그 이상 따라 나오지 않게 되면, 개는 종소리에 따라 음식물이 나오리라고 예상했던 기대를 버려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고, 종소리와 음식물이 병행하지 않는 데도 계속 종소리에 침을 흘리게 된다면, 개는 그러한 헛된 기대 때문에 좌절하고 마침내 병이 들어 죽게 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생각이 어딘가에 붙들려 한곳에 고착된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고통은 대부분 이전 경험의 흔적이 없어지지 않고 어떤 기대나 집착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업장(業障)이라 할 것이다. 습(習)이나 훈습(薰習)이라는 말도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향을 담았던 용기에는 향의 냄새가 남아 있고, 생선을 담았던 그릇에는 생선 냄새가 남아 있게 되는 것과 같다.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비록 향을 담았던 그릇의 경우라도 그 냄새가 빨리 제거되어야 할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마음 역시 그렇다. 이전 경험이 고착이나 집착의 상태로 남아 있으면 그것 때문에 어떤 것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고, 바로 반응할 수 없게 된다.

파블로프의 개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을 좀 더 확장시켜 보자. 개에게 종소리와 음식물을 짝지어 제공하면 개는 종소리에 따라 음식물이 나 올 것이라는 기대로 침을 흘리게 된다. 개에게 종소리와 전기충격을 짝지어 제공하면 개는 종소리에 공포증을 일으키게 된다. 개에게 어떤 때는 종소리와 음식물을, 어떤 때는 종소리와 전기충격을 불규칙적으로 섞어 짝지어 주면 개는 동일한 종소리에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 신경증을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현상을 ‘생각이 어딘가에 붙들려 한 곳에 고착된 상태’라 할 것이다.

인간도 개인이 어떤 경험을 하게 되었는가에 따라 생각이나 행동이 그렇게 고착된다. 어릴 때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다면, 그 결과로 생각이 불안과 두려움으로 엉기거나 고착된다. 어릴 때 학대를 받은 사람의 마음 역시 그렇게 유심이 되고 망심이 된다.

우리의 성격이란 그렇게 ‘엉기고 굳어진’ 대로 형성된다. 우리가 경험하는 갈등이나 좌절감 역시 이전 경험으로 엉기거나 굳어진 마음에서 온다. 섹스에 생각이 엉기거나 고착되기도 하고, 마약에 엉기거나 고착되기도 하고, 명예나 권력에 엉기거나 고착되기도 한다. 갈애나 걱정 근심이 모두 엉기고 굳어진 마음으로, ‘평상시의 일을 잠자코’ 할 수 없게 만든다. 팔고 역시 그렇게 생각이 엉기고 고착된 결과다.

중도와 사성제를 심리치료라는 측면에서 보면 총체적 접근법이다. 몸과 마음은 언제나 병행한다는 중도를 바탕으로, 정정(正定)은 몸과 마음을 동요하게 하는 감정을 통제할 수 있도록 하며, 올바르지 않은 행동이 일으키는 문제를 정어(正語)와 정업(正業) 그리고 정명(正命)으로 대신하여 해결할 수 있도록 하며, 올바르지 않은 생각이 일으킬 수 있는 문제를 정견(正見)과 정사유(正思惟) 그리고 정념(正念)으로 해결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중도와 팔정도 그리고 무아관이 결합된 사성제는 인지적 측면, 감정적 측면, 행동적 측면 그리고 자신의 신체적 질병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포함한 철학적 의식까지도 확장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완벽한 형태의 총체적 심리치료법이 된다. 불교 상담이나 불교 심리치료를 개발하기 위한 노력이 따로 필요 없다. 중도와 사성제를 그대로 응용하면, 이론적 구조에 있어서나 치료 과정에 있어서 가장 현대적인 그리고 가장 과학적인 심리치료법으로 어디에서든지 적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명경(明鏡)의 비유

《육조단경》에는 본심(本心)을 거울에 비유하기도 한다. 거울의 특징은 자기라는 것이 없다. 거울에는 자기라는 어떤 고집도 없기 때문에 어떤 편견이나 집착도 없이 사물의 진실한 모습을 있는 그대도 비추게 된다. 그것이 거울의 지혜이며 공의 지혜가 된다. 거울에는 학습의 그림자가 따르지 않는다. 거울에 비유되는 본심에 비추어 본다면, 우리가 현재 본심이라고 믿고 있는 마음은, 본심이 아닌 이전 행동 경험으로 오염되고 얼룩진 마음이다.

명경과 같은 본심이 다시 기능을 발휘하도록 하기 위한 방법으로 두 가지가 있다. 첫째의 방법은 거울에 먼지나 때가 끼지 않도록 조심하며 조금이라도 낄 것 같으면 곧 닦아 내는 것이다. 둘째는 본심에 관한 확신을 가지고 자유롭게 사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방법은 초기불교의 위빠사나 수행과 간화선 수행의 특징으로 각각 나타난다. 위빠사나 수행은 사념처(四念處)에서처럼, 자기의 마음으로 자신의 몸, 감정, 마음, 그리고 주위환경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항상 주의하며 스스로를 통제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조사선이나 간화선 수행에서는 무아로 중도를 따르도록 말이나 생각을 끊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방법은 모두 마음을 물과 파도의 관계로 볼 때 가능하게 된다. 파도가 일어나면 물의 잠잠함은 곧 깨어지고, 물이 잠잠함을 유지하고 있을 때는 파도가 일어날 수 없다. 

본심 또는 무아로 사는 일상적 생활이란 인간이 연기의 이법에 자기를 일치시킨 삶이다. 거기에 머물고 있을 때 불가능한 신통기적(神通奇蹟)이 일어난다. 예를 들어 올림픽 선수들이 보통 사람들보다 잘 달리고, 물에서 헤엄을 잘 치고, 빙판 위에서도 넘어지지 않는 것은 무아로 자신을 자연의 물리적 법칙에 자신을 일치시킬 수 있는 기술을 체득한 결과이다. 자전거를 타거나 공중에서 밧줄을 탈 수 있는 것도 바람의 저항이나 지구 인력에 균형을 맞춘 결과다.

불교에서 수행의 결과로 삼명육통(三明六通)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은 말 그대로의 신통기적이 아니라, 연기의 이법을 알게 된 사람이 무아로 자신을 법에 일치시킬 때 나타나게 되는 능력이다. 삼명육통은 모두 육처, 즉 안이비설신의에 연관되어 있다.

우리가 명경과 같은 밝고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을 때는 불안감이나 걱정근심이나 미움이나 조바심을 가지고 있을 때보다 잘 달릴 수도 있고, 잘 들을 수도 있고, 또한 남의 마음도 잘 이해할 수도 있으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지혜도 얻게 될 것이다. 삼명육통이란 그렇게 계정혜로 명경지수와 같은 마음을 유지하고 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육체적 능력이며 정신적 지혜다.

인간의 뇌를 수술하는 의사들은 수술할 때 자기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자기가 지금 하는 일과 완전히 하나가 된다. 암벽을 타는 사람들도 자기를 잊어버리고 암벽과 하나가 된다.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도 그렇고, 공중에서 그네를 타는 곡예사도 그렇다. 우리가 어떤 일에 달인이 되고자 하면 무아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평상심 역시 무아로 아침에 일어나 옷을 입고, 무아로 밥을 먹고, 무아로 똥 누고 오줌 누는 것이다. 평상심이란 환경/자극에 무아로 반응하는 것이다. 생각이 어딘가에 엉기고 고착되지 않아 전신전체로 뻗어가는 정심이다. 요즘은 운동선수들도 명상을 통해 무념을 배우고 있다. 달리다가도 망심이 작용하면 넘어지거나 주춤하여 속도가 늦어진다. 마음이 자신이 지금 하는 일에 머무는 것이다. 

혜능 선사는 《단경》에서 설하기를 ‘무념삼매(無念三昧)는 육적(六賊)을 여섯 문으로 달려 나가게 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육적을 조건화된 안이비설신의로 본다면, 무념으로 사물을 바로 보지 못하게 방해하는 육적을 제거하고, 무념으로 평상시의 일을 잠자코 할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은 예측하기 어렵지 않다.

선은 부엌에서 밥을 짓거나 밥을 먹거나 뒷간에 가거나 공부를 하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남과 대화를 하거나 병을 고치거나 정원을 가꾸는 일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지혜다. 무아란 본심으로 망상의 방해를 받지 않고 법에 일치시키는 방법이다. 과학자, 기술자들이 하는 일이나 의사, 심리치료자들이 하는 일이 모두 법에 일치시키는 방법이다. 인간은 자연을 모방할 뿐, 스스로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달마의 《이입사행론》에서 보는 불교의 점진적 수행

달마 대사가 도(道)에 들어가는 두 방법으로 설한 것이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이다. 《이입사행론》의 내용은 행입(行入)으로서 보원행(報怨行), 수연행(隨緣行), 무구소행(無求所行) 그리고 칭법행(稱法行)으로 되어 있고, 이입(理入)으로서 벽관(壁觀)을 들고 있다. 달마의 이입사행을 보면, 먼저 보원행→수연행→무구소행→칭법행은 자신의 생각으로 자신을 통제하는 방법이다. 실행하기 쉬운 단계에서부터 점차 어려운 단계로 진행되다가, 최종적으로는 경전의 대본을 알고 벽관에 머물러 어떤 생각도 들어오거나 일어나지 못하도록 ‘내적(內的) 마음의 긴장(緊張)’으로 차단하는 점진적 과정으로 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달마의 《이입사행론》은 초기불교나 지금의 남방불교의 위빠사나 수행과 중국의 조사선/간화선 수행의 양면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사행은 마음으로 마음을 통제하는 인지적 방법, 즉 사념처에 비교되고, 벽관은 밖으로나 안으로 어떤 생각도 일으키지 않게 하는 조사선/간화선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위빠사나 수행과 간화선 수행을 달마의 《이입사행론》에서 보면, 양자가 연속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불교는 자력(自力)으로 수행하고 깨닫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비록 나중에는 버려야 할 마음이지만 마음이라는 인지 기능이 수행 과정에서 완전히 배제될 수는 없다.

유식삼성(唯識三性)도 인지에서 행동으로 변하는 점진적 과정으로 되어 있다.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은 자신의 생각이 마치 ‘새끼줄을 보고 뱀을 보았다고 고집하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것임을 인식하는 단계다. 의타기성(依他起性)에서는 모든 사물은 서로 의존해서 생긴다는 인과의 원리를 발견한다. 그리고 최종적인 원성실성(圓成實性)의 단계에서는 자신 역시 법에 일치되도록 공을 체득하게 된다. 

불교에서는 변계소집성에 속하는 마음을 어떻게 대치할 수 있는가에 대한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위빠사나 수행에 있어서의 지관(止觀)이나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 것이 곧 부처[一念不生是佛]라고 가르치고 있는 조사선/간화선 수행은 모두 새끼줄을 보고 놀라는 현상과 같은 조건화된 감정이나 행동을 소거시키는 치료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지관으로 사물·사건에 조건화된 감정에 어떤 반응도 일으키지 않고 정관(靜觀)할 수 있게 되면 조건화된 감정은 소거될 수밖에 없고, 사물·사건을 보면서도 어떤 생각도 일으키지 않게 되면 육경과 육처 간에 조건화되었던 육식(六識)이 그 세력을 잃게 될 수밖에 없다. 행동치료에서 심신의 이완으로 스트레스나 긴장감이나 불안감이나 공포증을 관리하게 하거나 치료하는 상호제지의 원리와 같다. 모두 ‘물과 파도’처럼,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라는 중도에 따른 것이다.

무아 또는 공에 의존하게 하는 불교의 수행법은, 공성의 느낌으로 조건화된 감정을 소거시키고, 모든 것이 공무로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바로 보게 하고, 최종적으로 자신을 팔정도와 육바라밀로 공무아의 지혜를 실천하게 하는 다면적(多面的)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결론

불교는 인간이 본래 무아로 법에 일치된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스스로 만든 망심을 본심으로 믿고 고통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 본심과 망심의 관계를 ‘물과 파도’의 관계로 본다. 불교는 이렇게 정심과 망심의 관계를 물과 파도의 관계로 보고 있기 때문에 정심을 유지하고 있으면 망심은 자연히 통제된다고 보며, 그 반대로 망심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통제하면 정심은 그대로 보존된다고 본다.

위빠사나 수행과 간화선 수행을 이 두 가지 방법에 적용해 본다면, 위빠사나 수행은 망심이 일어나 정심을 더럽히지 않도록 닦고 ‘노력’하도록 하는 데 비하여, 간화선은 누구나 본래 부처라는 것을 굳게 믿도록 하면서 정심 그대로 평상심의 삶을 살도록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망심은 정심이 ‘엉기거나 굳어진 것’이다. 정심이 어떻게 망심으로 굳어지게 되는가는 십이연기가 설명하고 있으며, 십이연기는 무명에 반연하여 일어나는 행동을 시작으로 사물·사건에 대한 분별의식이 어떻게 형성되어 가는지를 설명하는 학습론이다. 불교의 핵심이 인과설이기 때문에 본래 무아로 태어나는 인간이 어떻게 개인마다 다른 성격이나 마음을 가지게 되는지는 학습론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불교에서도 인간의 성격이나 인격을 이전 행동 경험의 총화(總和)로 본다. 심리학에서도 학습을 ‘경험을 통한 행동의 변화’로 정의하면서, 인간들 대부분의 행동은 학습된 것으로 본다.

불교에서 무심, 본심, 정심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공간적으로 ‘텅 빈’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과의 법칙에 따라 인간이 우주와 통합된 관계에서 조화와 평화를 이룰 수 있는 지혜, 즉 공의 지혜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을 자연지 또는 근본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즉, 원성실성으로서의 인간의 본성을 의미한다. 그러한 공의 지혜 또는 대승(大乘)의 지혜가 계정혜, 삼학으로 구체화된다.

아직 공을 체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삼학이 공부와 훈련의 대상이 되고, 공을 체득한 사람에게는 삼학이 본심으로 나타나게 된다. 삼학은 권위적 윤리나 도덕이 아니다. 이것은 누구나 인간 본성으로 갖추고 있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삶의 조건으로서의 자성이다.

불교는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수천 년 동안 인간이 망심을 본심으로 믿고 소위 문명이란 이름으로 만들어 놓은 계급적 사회제도나 권위적 도덕이나 윤리 그리고 이원론적 사고방식에 기초한 종교나 전통에 대한 도전자(挑戰者)다.

행동주의 심리학과 불교의 인간관·세계관은 서로 많이 닮아 있다. 불교의 연기관과 행동주의 심리학의 연합설이 서로 닮아 있고, 인간의 마음이나 성격이 훈습(薰習)의 결과라고 보는 점도 닮아 있다. 또 인간의 마음을 물과 파도의 관계로 보는 점도 닮아 있고, 고통의 문제를 대치로 해결하는 방법도 서로 닮아 있다.

불교가 그간 행동주의 심리학에서 발달시킨 원리와 기술을 응용할 때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영역에서 불교의 대중화나 생활화에 큰 도움을 얻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새끼줄을 보고 뱀을 보았다’고 고집하는 것과 같은, 허상에 의한 분별심을 제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즉 사물·사건에 조건화된 감정이나 생각을 고전적 조건형성이나 도구적 조건형성을 원리를 이용하여 소거 또는 탈학습 또는 재학습시킬 수 있다. 이것은 상호제지의 원리를 이용하고 있는 스트레스의 통제나 관리, 불안감이나 공포증의 치료, 자기치유법의 개발 등을 포함한다. 둘째, 의타기성이란 법에 일치하도록 삼학을 친사회 행동 기술이나 감성지능(EQ)의 개발을 위한 인지→행동적 접근법으로 프로그램화할 수 있다.

이것은 극단적인 이기심 때문에 병들어 가는 사회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다. 셋째, 무심으로 자기 내면의 자연적 지혜를 개발하고 철학적 의식을 확장시킬 수 있다. 이것은 그간 모든 것을 분리된 형태로 보아 왔던 미신적 사고방식을 버리고 인간 자신을 우주와 통합된 부분으로, 학습된 말이나 생각에 방해를 받지 않는 자연지를 내면에서 발견하고 개아(個我)를 초월할 수 있는 철학적 의식을 확장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과학이 극도로 발달한 21세기에 살고 있다. 그러나 막상 인간에 대한 이해는 태양을 신으로 섬기고 있었던 암흑시대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그리고 과학기술이 인간의 망상과 결합될 때 세상은 더욱 위험하게 된다. 비록 불교는 2,500여 년 전에 시작된 것이지만 그 혜안(慧眼)은 지금의 과학문명을 포용하면서도 인간의 마음을 무지에서 구할 힘과 지혜를 갖추고 있다.

비록 불교와 행동주의 심리학이 시공간적으로 다른 조건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양자 모두 인간의 본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점과, 인간의 몸과 마음 역시 자연 사물의 현상이나 변화에 적용되는 인과의 법칙을 그대로 따른다고 말하는 점에서 동일하다. 양자가 모두 객관적 진리에 속한 것이라면 그것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서로 일치될 수 있다.

“파블로프의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 그러한 질문에 조사는 ‘할’을 하거나 ‘무!’라고 할 것이다. ‘말을 하면 이미 틀린 것’이다. 우리의 생각이나 말은 이미 이원론적 사고방식으로 왜곡된 것이어서 그런 말이나 생각을 통해서는 어떤 것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인간이 자유니 권위니 이상이니 하는 것도 모두 마음에서 만들어진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의 참모습은 ‘시장하면 먹고, 피곤하면 자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이미 모자라는 것이 없다. 조건화되고 학습된 마음이나 행동을 어떻게 소거하며 탈학습시킬 수 있는가에 대하여 가장 큰 관심을 가진 행동주의 심리학이 평상심이 도라는 불교에 가장 가까운 심리학이 아닐까. ■

 

김보경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교육심리학 석사).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에서 박사학위 취득(특수교육, 정신의학). 캐나다 Penatang 정신건강센터 선임심리학자, 한국과학기술원 초빙교수, 경북대학교 교육학과 교수(정년퇴임) 등 역임. 저서로 《禪과 파블로프의 개》 《禪-행동치료(공저)》 등이 있음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