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식학과 분석심리학을 비교해 보는 까닭

유식학은 붓다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성립된 학문으로 무착과 세친1) 에 의해 《유식삼십송》으로 압축되어 있다. 분석심리학은 융(C.G. Jung, 1875~1961)이 창시한 학문이다 .   

붓다의 생몰연대는 기원전 600~50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므로 두 학문의 성립 시기를 비교하면 대략 2,500여 년 정도의 시간 차이가 있다. 유식학은 불교의 심리학 또는 심층심리학으로도 불린다. 보통 사람들의 마음은 어떻게 되어 있으며, 어떤 번뇌를 겪으며,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분석심리학은 정신과 의사이며 심리학자인 융이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발견한 것들과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심리학으로 인간정신의 병리적인 부분과 보편적인 현상들을 정리한 가설이다. 유식학과 분석심리학은 모두 인간의 마음(정신)을 대상으로 한 것이 공통점이다.

붓다는 ‘6년 고행’이라고 불리는 오랜 수행 과정을 거쳐서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성취한, 깨달은 사람이다. 고통의 근원인 무명을 타파하고 일체의 고통에서 벗어나 대자유인이 되었으며, 개인의 완성에 머물지 않고 우주의 생멸 현상을 연기의 법칙으로 명쾌하게 밝히고, 존재의 근원이 공(空)임을 설파하였다.

융은 1900년부터 취리히대학에서 정신의학도로서의 정신치료를 시작하였다. 정신의 병은 왜 생기며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탐구 정신에서 출발하게 된다. 그는 1907년에 오스트리아 빈에서 프로이트(Freud)를 처음 만나 인간정신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면서, 견해를 같이하는 부분도 있지만 다른 부분도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융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에 따르는 것이 쉽고 편한 길이었지만 그 길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무의식과의 대면을 통한 분석 작업에 돌입하게 된다.

 “심사숙고한 끝에 나는 나의 학문적 출세의 길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왜냐하면 나의 무의식과의 실험이 끝나기까지는 공중 앞에 나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2)

융은 1913년부터 약 6년 동안을 자신의 무의식을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을 하게 되는데 이 기간을 자신의 생애에서 내향기(內向期)라고 부르기도 한다. 붓다의 6년 고행과 융의 6년 내향기는 모두 자신의 정신세계를 낱낱이 분석하고 직접 체험하면서 경험적으로 살핀 기간이다.

붓다와 융의 삶의 자세를 비교해 보면 철저하게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체득하고자 한 점이 유사하다. 기존의 어떠한 가르침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지 않고 직접 겪어 보고 확인하고자 했다. 그리고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풍요와 안락을 멀리하고 마음이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매달린 것이다.

 붓다는 고통의 근원이 무명과 무명에서 비롯되는 집착임을 깨닫고 마음의 움직임을 12연기로 파악하여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하였고, 융은 정신과 의사로서 환자는 물론 자신의 무의식을 살펴봄으로써 정신의 작용을 밝히고 정신적으로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 길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붓다는 정각(正覺)을 이룬 완전하고 완벽한 존재로서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라면 융은 온전함과 성숙함을 추구한 위대한 정신치료자이다. 

 붓다는 동양의 문화와 종교의 토양에서 수행을 하였고 융은 서양 문명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였다. 서로 다른 사상적 배경과 엄청난 시간의 간격을 두고 성립된 학문이지만 인간의 내면을 탐구했다는 점에서 양자를 비교해 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2. 유식학과 분석심리학의 태동

유식(唯識)은 오직 마음이란 뜻이다. 현상에 대한 인식이나 인간 내면의 반응을 마음의 작용으로 설명한다. 행불행이나 희로애락의 감정 발현이나 좋고 싫음의 감정도 오직 마음의 작용으로 설명한다. 마음의 작용에 따라 동일한 대상이나 사건이라도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배우자의 사망이라는 충격적 상황을 당해서도 오히려 더욱 헌신적으로 자식을 키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식들을 남겨 두고 삶을 포기해 버리는 사람도 있다. 상황을 인식하는 마음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일들이다. 따라서 마음의 실체를 규명하면 모든 정신현상을 규명할 수 있게 되고 갈등과 고통이 왜 생기는지를 통찰할 수 있으며 결국은 갈등과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식학은 공(空)사상의 부작용을 극복하고 불법의 참된 이치를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타난 사상이다. 초기불교 시대를 지나서 대승불교가 꽃을 피우게 되었다는 것은 공사상이 불교사상의 핵심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공사상은 만물의 본질은 공이며 나타난 현상은 연기의 법칙에 의한 것으로 본다. 즉, 결과는 어떤 원인에 의해 나타난 것으로 원인적 요소가 사라지면 언제든지 다시 공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사상은 염세주의나 허무주의로 왜곡될 우려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조선시대에 불교가 유학자들의 탄압을 받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공의 이치가 절대 진리라 하더라도 중생들의 마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므로 오해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타난 사상이 유식사상이다. 유식은 반야(공)와 더불어 대승불교의 양대 기축을 이루게 된다.

반야의 근본이 진공(眞空)이라면 유식의 근본은 묘유(妙有)가 된다. 합하면 진공묘유(眞空妙有)가 되는데 대승불교의 사상을 함축하는 의미가 있다. 진공과 묘유는 상호 모순 같지만 진공은 묘유를 통해 분명해지고, 묘유는 진공을 통해 실상을 인식하게 되므로 양극단이 서로 충돌없이 존립하게 된다.  

분석심리학은 마음을 분석하는 학문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마음의 실체를 규명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잠을 자는 동안에는 마음(의식)은 작용하지 않다가 잠에서 깨어나면 잠들기 이전의 마음으로 되돌아오는 것도 원시인들에게는 신기했을 것이다.

그런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무의식, 즉 모르는 마음이다. 인간의 정신 속에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발표한 사람이 프로이트(S. Freud, 1856~1939)이다. 그는 노이로제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의식과 분리된 정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것을 무의식이란 개념으로 상정한 것이다.

융과 프로이트는 인간정신에 대한 경험적 접근이라는 방법론상의 공통점은 있었으나 인식 내용에는 차이가 있었다. 프로이트가 정신의 작용을 성욕 중심으로만 설명하는 데 융은 동의할 수가 없었다. 융은 자신의 경험으로 볼 때에 성욕만이 아니라 다른 요인도 작용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근원을 어머니의 자궁에서, 즉 생명체가 잉태되는 순간부터 시작한다고 보았지만 융은 어머니의 자궁 이전의 것을 가지고 있다고 본 것도 큰 차이였다. 《티벳 사자의 서》 해설에서 융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아는 한, 탄생 이전이나 자궁 이전의 개인적인 기억들이 유전되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의심할 여지없이 유전되는 원형들은 있다. 그것들은 처음에는 개인적인 경험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내용물이 없다. 오직 삶을 통해서 개인적인 경험들이 진행될 때만 그것들은 모습을 드러낸다.”  3)

이 부분은 후일 융의 집단무의식 개념으로 정리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집단무의식은 곧 신들과 영들의 세계이다. 거기에는 어떤 지적인 곡예도 필요하지 않다. 다만 인간의 전생애(全生涯), 어쩌면 완성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는 무수히 많은 생이 있을 뿐이다.”  4)

융은 프로이트와 인간정신에 대한 견해의 차이로 결국은 결별하게 되고 분석심리학은 융이 자신의 무의식과의 대면 과정을 거친 후에 비로소 태동하게 된다.

3. 마음의 구조에 관한 입장

마음의 구조라는 것이 건축물의 구조처럼 물리적인 형태로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과학의 발달로 인체의 유전적 요인은 밝혀졌지만 마음에 관한 분석은 여전히 미흡할 뿐이다. 마음으로 마음을 들여다보기 때문에 더욱 난해한 일인지도 모른다. 마음의 구조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이해를 돕기 위한 부득이한 방편이다.   

유식학은 마음을 8가지로 구분해서 각각의 특징을 설명한다. 전오식(前五識)은 의식에 선행해서 움직이는 5가지의 마음으로, 의식에 앞선 작용이므로 전(前)이라고 하였다.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의 5가지 감각을 마음의 영역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그것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영역으로 제6식, 의식을 설정하였으며 제6식은 현재의 내가 인식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제7식을 말라식(末那識)이라고 하였으며, 말라식은 의식의 뒤편, 또는 아래에 존재하는 마음으로 의식과 연결되어서 상호작용을 하게 된다. 그리고 가장 밑바닥에서 모든 경험을 가감 없이 저장하는 마음으로 제8식, 아뢰야식을 설정한 것이다.

표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의식은 전오식에 근거해서 객관세계를 인식하는 오구의식(五俱意識)과 의식 자체만으로 내면세계를 인식하는 독두의식(獨頭意識)의 둘로 구분한다. 회상하고, 공상하고, 꿈을 의식하는 것은 모두 독두의식의 작용이다.

말라식은 청정하고 변함이 없는 진여(참된 성품)를 망각하고 중생심을 발동시켜서 집착하고 분별하고 갈등과 다툼을 일으키는 마음이다. 항상 두리번거리고 살펴서 계산하므로 잠시도 멈춤이 없고 편안하지 않은 마음이다. 번뇌에 물든 마음이므로 염오식(染汚識), 염오의(染汚意)라고도 한다. 

아뢰야식은 마음의 근본이며 보관 창고와 같다고 해서 장식(藏識), 또는 종자식(種子識)이라고도 한다. 종자는 선천적으로 존재하는 본유종자(本有種子)와 후천적으로 생성되는 신훈종자(新薰種子)로 구분하며 조건이 형성되면 언제든지 발현하게 되는 씨앗과 같다.

분석심리학은 마음을 크게 의식, 개인무의식, 집단무의식의 3가지로 구분한다. 융은 프로이트가 설정한 무의식의 개념을 확장하였으며 개념에 대한 설명에도 차이가 있다. 자아, 페르소나, 그림자,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 자기 등의 개념으로 마음의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

의식은 물체의 표면에 비유될 수 있는 것으로 전체 정신 가운데서 자신이 아는 정신으로서 아주 작은 부분에 해당한다. 의식의 중심에는 자아가 존재하는 데 흔히 ‘나’라고 하는 것은 자아에 해당한다. 자아가 인식할 수 있는 정신의 영역이 의식인 것이다.

무의식은 전체 정신에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알 수 없는 부분이므로 명쾌하게 설명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그러나 무의식의 존재를 확인한 이상은 최대한 근접하게 설명하려고 시도할 뿐이다. 융은 사람이 자라면서 겪은 체험 중에서 잊어버린 것이나, 억압된 것들이 모여 있는 부분을 개인무의식이라고 했다. 즉, 출생 이후의 경험 가운데서 의식으로 떠올릴 수 없는 부분을 뜻한다. 반면에 집단무의식은 태어날 때 이미 가지고 나오는 것으로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보편적 존재라 함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존재하는 어떤 내용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원초적인 유형을 말한다.

그것은 출생 이후에 배운 행동 양식이 아니라 출생 시에 이미 지니고 온 것들이다. 집단무의식의 개념을 어떤 실체를 지닌 것으로 파악한다면 오해가 생긴다. 오히려 시원적(始原的), 태고적(太古的), 원초적(原初的), 선험적(先驗的)인 의미에 가깝다. 유전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인간 인식의 보편적 조형(祖型)의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

유식학의 말라식과 아뢰야식의 개념이 분석심리학의 개인무의식과 집단무의식의 개념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정신을 이해하는 데는 양자 모두 중요한 의미가 있다.

4. 마음의 기능과 작용

마음의 작용을 유식학의 입장에서는 51가지 심소(心所)로 설명할 수 있다. 마음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무수한 작용을 하지만 유식학은 51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5변행, 5별경, 11선, 6번뇌, 20수번뇌, 4부정이 그것이다. 5변행이라 하면 마음의 인식 작용을 5가지의 순서에 의해 설명해 놓은 것이다. 촉(觸)은 대상과의 접촉으로서 마음이 움직이는 동기이다. 작의(作意)는 접촉한 대상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다.

수(受)는 대상을 판단하여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상(想)은 받아들인 것에 이름이나 개념을 붙이는 마음이고, 사(思)는 상(想)에 대해 삿되다, 바르다, 좋다, 나쁘다 등의 생각을 짓는 것을 말한다. 5별경은 관심의 대상에 따라 마음이 작용하는 것을 말한다.

욕(慾)은 바람으로, 대상에 대해 선행을 하거나 악행을 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승해(勝解)는 뛰어난 이해 능력으로서 옳고 그름을 이해하는 마음이다. 염(念)은 경험했던 것을 기억하는 마음의 작용이다. 정(定)은 번뇌가 사라지고 지혜롭게 인식하는 마음이다. 11선은 착한 마음이 일어나는 심리적 작용 11가지를 말한다.

신(信), 참(慙), 괴(愧), 무탐(無貪), 무진(無瞋), 무치(無痴), 근(根), 안(安), 불방일(不放逸), 행사(行捨), 불해(不害) 등이다. 6번뇌는 마음을 혼탁하게 하고 고통과 갈등을 주는 6가지 근본 번뇌로서 탐(貪), 진(瞋), 치(痴), 만(慢), 의(疑), 악견(惡見) 등이다. 20수번뇌는 6근본번뇌에서 파생되는 20가지의 번뇌로서 다음과 같다. 분(忿), 한(恨), 뇌(惱), 부(覆), 질(嫉), 간(慳), 광(誑), 첨(諂), 해(害), 교(憍), 무참(無慙), 무괴(無愧), 도거(悼擧), 혼침(昏沈), 불신(不信), 해태(懈怠), 방일(放逸), 실념(失念), 산란(散亂), 부정지(不正知) 등이다. 4부정심소는 선악이 아직 결정되지 않는 마음의 상태로서 회(悔), 면(眠), 심(尋), 사(伺)의 네 가지가 있다.(지면 관계상 11선, 6번뇌, 20수번뇌, 4부정심소에 대한 내용 설명은 생략한다.)

분석심리학은 유식학처럼 마음이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작용들에 대한 설명은 없다. 특히 선심소나 번뇌심소의 개념과 비교할 수 있는 마음의 작용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마음의 작용을 선악과 같은 가치 기준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마음의 현상을 두고 그것을 분석하여 원인과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유식학은 마음이 발현되는 상태를 설명한다면, 분석심리학은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그 까닭을 설명한다. 즉, 현상 그 자체를 분석하고 설명하는 것이 유식학과의 차이이다. 그래서 분석심리학은 경험적이고 현상학적인 특징을 지닌다. 즉, 선심소나 번뇌심소가 일어나는 원인으로서 마음의 기능들을 설명하고 있다. 대표적인 개념들이 콤플렉스, 그림자, 페르소나,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 등이다.

 ‘콤플렉스’는 프로이트의 견해에 따르면 주로 부정적인 성격을 띠지만 융의 입장에서는 긍정적인 부분도 포함하고 있다. 열등한 인격으로만 규정하지 않고 전체 정신에 통합되지 않는 것, 양립할 수 없는 것, 동화되지 않음으로써 갈등을 일으키는 존재를 지칭한다. 심리적인 증상을 일으키는 원인들을 콤플렉스의 작용으로 설명한다.

콤플렉스는 마음의 일부분이지만 조각난 마음으로서 자아의식에 의해 쫓겨나고 버림받은 마음이다. 예를 들어, 인정하기 싫고 수용할 수 없는 자식이 있다면 부모는 자식을 외면하고 밀어낼 것이다. 부모 입장에서 보면 자식은 애물단지이고 갈등을 일으키는 근원이 된다. 잊힐 만하면 나타나서 부모를 괴롭힌다. 그러나 자식의 입장에서 보면 분통 터지고 억울하기 때문에 틈만 나면 자식으로 인정해 달라고 애원하기도 하고 행패를 부리기도 한다.

애물단지 자식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하나의 가족이 될 수 있고 평화를 누릴 수가 있지만 자식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고 모험이 따른다. 콤플렉스는 그와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콤플렉스의 통합이야말로 온전한 자기로 나아가는 첩경이다. 꿈을 통해서도 무의식을 분석하지만 콤플렉스를 통해서도 무의식을 분석하게 된다.

‘그림자’는 물체의 뒷면에 생기는 어두운 부분이다. 융은 인간정신의 열등한 기능에 대해 그림자라는 이름을 붙였다. 의식으로서 주의 깊게 찾으면 찾아낼 수 있는 자신의 열등한 인격이다. 타인이 그것을 지적하면 불쾌하지만 시인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서 무의식의 아주 얕은 표피 부분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자기주장을 잘 못하는 어머니가 자신의 자녀에게서 그런 행동을 보게 될 때에 더욱 심하게 화를 내는 것은 자신의 그림자를 자녀의 행동에서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림자는 의식에 동화되지 못하기 때문에 미숙한 인격으로 존재하고 그것이 움직일 때는 분노와 극언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림자를 의식 속으로 받아들여서 통합시켜 나갈 때 그림자는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다. 열등한 인격인 그림자를 통합하는 작업은 인격의 완성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된다.

‘페르소나’는 가면이란 뜻이지만 꼭 벗어야만 하는 위선적인 것은 아니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체면에 해당할 수 있다. 체면은 내면의 참된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외부로 드러난 자기의 모습이다. 참된 자기가 아니므로 외적 인격이라고 부른다. 만약에 페르소나를 진정한 자기로 받아들이고 집착을 하게 되면 내적 인격과의 단절이 생기고 그로 인해 심리적 증상을 겪을 수 있다.

마치 군인이 군대에서는 엄격한 언행을 취하지만 자녀들에게는 자상한 모습을 보일 수 있고, 또 초등학교 동창회에 가서는 장난꾸러기의 모습을 보일 수도 있는데 그렇지 못하고 항상 엄격한 군인의 모습으로만 존재한다면 내적 인격과 단절될 수가 있다. 사회적 관계 안에서 상황에 맞게 처신하는 것이 페르소나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극복되어야 할 가면적 자기이다.

‘아니마’ ‘아니무스’는 인간의 무의식에 있는 내적 인격의 특성으로서 남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여성적 요소를 아니마라 하고 여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남성적 요소를 아니무스라 한다. 이 개념은 융심리학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나 유식학에서는 특별히 남녀의 마음의 특징을 다루는 개념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융은 정신을 분석하면서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언급하고 있다. 남성의 특징이 힘(logos)이라면 여성의 특징은 감성(pathos)이라고 할 수 있다.

남성이 강하고 지혜롭다고 하면 여성은 자애롭고 예민하다고 할 수 있다. 흔히 고구려 문화가 남성적이고 백제 문화가 여성적이라고 한다면 바로 그런 특성에 해당하는 것이다. 아니마는 남성의 무의식 속의 미숙한 부분으로, 아니무스는 여성의 무의식 속의 미숙한 부분으로 남아 있는 정신의 침전물들이다. 

‘원형(archetype)’은 융심리학에서 가장 난해한 부분이다. 원형의 내용이 무엇이라고 분석하기보다 원형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올바른 접근이다. ‘아르케(arche)’는 시원, 기원, 시초, 시작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인간정신의 시작에서부터 모든 경험의 침전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마음속에 원형이란 틀은 공통적으로 존재하지만 그 내용물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원형에 대한 획일적인 설명은 불가능한 것이다. 마치 씨앗 속에는 장차 식물이 자라면서 발현될 모든 비밀이 들어 있지만 씨앗을 분해해서 식물의 요소들을 밝혀낼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원형은 융에게는 정신의 시초에 해당하는 것으로 유식학의 본유종자의 개념과 대비해 볼 수 있다.

5. 심리적 증상의 원인과 극복

심리적 증상은 경계(대상)를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착각하고 왜곡해서 인식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거울처럼 맑게 본다는 것은 깨끗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뜻한다. 깨달은 이를 여래(如來)라고도 한다. 이는 착각과 투사와 왜곡된 인식에서 벗어난 사람이다. 

유식학은 인식 과정의 순서를 5변행심소와 5심설로 정치(精緻)하게 설명하고 있다. 인식 과정을 통해서 왜곡의 과정을 알 수 있으며 왜곡의 과정을 알게 되면 심리적 증상의 원인도 파악할 수가 있게 된다. 

오심설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오심설은 제6식에서 일어나는 인식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다.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으로서 다섯 가지 마음을 설명하고 있는데 솔이심(率爾心), 심구심(尋求心), 결정심(決定心), 염정심(染淨心), 등류심(等流心) 등이다. 솔이심은 외부의 대상에 대해 처음으로 지각하는 마음이고, 심구심은 대상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는 마음이며, 결정심은 대상이 어떤 것이라고 결정하는 마음이고, 염정심은 대상을 결정한 후에 그것의 의미를 떠올리는 마음이고, 등류심은 그 의미가 계속 이어지는 마음을 말한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깜깜한 밤에 어떤 짐승을 만났다고 할 때 ‘저기에 무엇이 있구나.’ 하는 마음이 솔이심이며, ‘저것이 무엇일까?’ 하고 알고자 하는 마음이 심구심이고, ‘아, 호랑이구나’ 하고 결정하는 마음이 결정심이고, ‘정말 무서운 짐승이니 도망가야지.’ 하고 자신의 경험이 개입되어 인식하는 마음이 염정심이며, 등류심은 호랑이에 대한 평소의 무서워하는 마음이 앞으로도 그대로 이어지고 지속되는 마음을 말한다.

심리적 증상을 이해하는 측면에서 오심설의 작용을 살펴보면 문제가 되는 것은 염정심이다. 이것이 착각과 왜곡을 일으키고 심리적 증상을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염정심은 경험에 물든 마음이므로 오염된 마음이다.

염정심으로 인해 11선심소가 발현되기도 하고, 6번뇌, 20수번뇌가 발현되기도 한다. 따라서 염정심을 살피는 것이 증상의 원인을 살피는 것이며, 그것은 무의식을 분석하는 작업에 비견할 수 있다. 유식학에서는 염정심을 살피고 정화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유식수행으로서 5단계 수행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융은 정신병리 현상이 신체나 기질적 특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뇌 속에 정신병을 일으키는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 증상, 즉 나타난 현상에 대해 병명을 갖다 붙인 것이다.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으므로 보통 사람들의 심리를 바탕으로 설명하였으며 상대적이라고 하였다. 유식학 역시 보통사람들의 마음을 대상으로 설명하고 있다. 특별히 병리적인 부분을 따로 설명하는 것은 없다.

그러면 심리적 증상은 왜 생기느냐가 설명되어야 한다. 불교에서는 집착이 고통의 원인이라고 설명하면서 집착을 멸하면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심리적 문제의 발생 원인은 원초아, 자아, 초자아의 갈등에서 비롯되며 방어기제의 작동으로도 갈등이 해소되지 못하면 심리적 증상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그래서 자아를 강화하여 원초아와 초자아를 통제하고 균형을 잡아야 한다고 했다. 

융은 정신의 병은 자신의 마음을 모르는 데서 비롯된다고 한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마음이 정신적 고통을 초래하므로 모르는 마음을 통찰하여 전체 정신 속으로 통합하는 것이 정신을 건강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적 고통은 그 자체가 병이라기보다는 정신적 통합을 요구하는 모르는 마음이 보내는 신호로 받아들여야 한다. 정신적 고통은 온전한 정신의 통합을 이루고자 하는 무의식의 반응이다.

정신적 고통을 외면하거나 억압하면 증상은 지속되거나 더욱 심화될 수 있으므로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융은 말한다. 모르는 마음의 신호는 꿈으로도 나타난다. 반복되는 꿈이 있으면 반복해서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런 꿈을 꾸었을까?’ ‘왜 그런 꿈이 반복해서 나타날까?’하고 꿈의 의미를 진지하게 살피는 것이 무의식의 신호를 알아차리는 작업이다. 불안이나 강박증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모르는 마음이 지속적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는데 상태가 아주 급하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불안이나 강박증을 의식적으로 피하려고 한다고 해서 사라지거나 극복되는 것은 아니다. 억압하고 회피하는 것은 정신의 통합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 불안한지를 살펴서 그 이유를 자각하고 그것을 수용하는 것이 정신의 통합을 이루어가는 과정이며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콤플렉스나 그림자 등은 자기 내부에서 통합되지 못한 정신의 주요한 요소들이다. 그것이 의식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증상은 더욱 심각하게 나타난다. 자기소외, 자기기만은 모르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자기소외가 심해지면 극단적으로 인격의 해리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융의 관점에서 보면 심리적 증상은 사전 경고이므로 마치 사고를 예방하려는 자동차의 경적과 같은 것이다. 

심리적 증상을 유식학의 입장에서 보면 6대 근본번뇌와 20수번뇌가 일어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번뇌의 발현이 인간을 고통으로 몰고 가기 때문이다. 번뇌가 발현하는 근본 원인은 ‘내’가 항구적으로 존재한다는 유아론적(唯我論的)사고에서 비롯된다. 유아론적 사고에서 파생되는 근원적인 번뇌가 아치(我癡),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이다.

아치는 무명과 무아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이고, 아견은 자신의 주관적 견해에 집착하는 것을 말하며, 아만은 타인과 비교해서 교만하거나 우쭐해지는 마음을 말하고, 아애는 자기에 대한 사랑으로서 애착이나 집착, 고집 등이 포함된다. 4가지 근본번뇌를 극복하는 것은 무아에 이르는 것이다. 무아를 깨닫지 못하는 유아의 상태에서는 집착은 필연적인 현상이다.

유식학은 심리적 증상의 근원적 극복은 무아에 이르는 것이라고 하고, 분석심리학은 전체 정신의 통합이라고 한다. 이 양자는 어떻게 다르며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6. 수행과 자기실현

《유식삼십송》의 마지막 부분(제26송~제30송)은 수행 5위에 대한 설명이다. 번뇌를 극복하고 집착을 끊고 무아에 이르는 길을 5가지 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자량위(資糧位), 가행위(加行位), 통달위(通達位), 수습위(修習位), 구경위(究竟位) 등의 다섯 가지이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자량위는 수행을 위한 준비 단계이며, 가행위는 실제 수행을 닦아 가는 단계이며, 통달위는 깨달음의 입구에 도달한 단계이며, 수습위는 깨달은 것들을 몸에 익히는 단계이며, 구경위는 마지막으로 완성에 이르는 단계이다. 이러한 설명은 구체적인 방법이 아니어서 막연하게 들릴 것이다. 좀 더 보충하면 다음과 같다.

자량위는 능소이취(能所二取)의 번뇌가 단멸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능소이취란 능취(我)와 소치(法)의 두 가지를 말하는 것으로 나와 대상에 대한 번뇌가 끊어지지 않고 아직은 따라다니는 상태를 말한다. 깨달음이 무엇인지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고, 그 경지로 나아가야겠다는 생각도 있으며, 육바라밀이나 팔정도를 통해 나아가는 길도 알고 있으나 아직은 나와 대상이 모두 공[我空, 法空]이라는 도리를 체득하지는 못한 상태이다.

가행위는 유식의 실성에 머물려고 간절히 바라고 있었으므로 여기서는 더욱 정진하여 수행하는 단계이다. 자량위에서 깨닫지 못한 아공과, 법공을 체득하게 된다. 소지장 5)이 없어지고 아공과 법공에 의해 현현된 진여, 즉 진리의 본성을 요해한다는 뜻이다.

수습위는 번뇌를 끊고 단계적으로 진여를 증득하여 고유의 무명을 철저히 소탕해야만 비로소 본래 면목을 보게 되는 단계이다. 수습위에서 증득하게 되는 무분별지는 부사의(不思議)한 것으로 출세간의 지혜이다. 번뇌장과 소지장이라는 두 가지의 조중(粗重)한 종자를 버릴 수 있기 때문에 보리와 열반이라는 두 가지의 전의과(轉依果)를 증득할 수 있다. 무분별지는 번뇌장과 소지장을 끊어야 얻을 수 있으며 이 지혜는 나와 대상을 멀리 여의었으므로 무득(無得)이라 하고, 묘한 운용을 헤아리기 어려우므로 부사의라 한다. 조중이란 번뇌장과 소지장의 종자가 거칠고도 무겁다는 뜻이다.

구경위는 마지막 단계, 즉 지극(至極)이라는 의미이다. 이 단계에 이르면 정각을 이루고 부처가 되는 경지이다. 번뇌가 모두 사라졌으므로 무루의 경계이며 해탈이고 법신이 되는 것이다. 번뇌를 지닌 채 쌓은 지혜를 유루지라 하고 번뇌가 사라진 곳에서 얻은 지혜를 무루지라 한다. 구경위는 번뇌가 흘러내리지 않는 무루의 세계이며, 헤아릴 수 없고 지고지선한 선이며, 영원불멸이며, 고통이 없는 안락이며, 탐진치에 얽매이지 않으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경지이다. 이것은 유식 수행자가 추구하는 마지막 목적지이다. 이 단계에서 전식득지(轉識得智)가 완성되는 것이다.

분석심리학에서는 인간정신의 궁극의 지향점을 자기실현이라고 한다. 자기를 실현한다는 것인데 자기란 무엇을 뜻하는가? 자기는 자아와는 구별되는 개념이다. 자아는 의식의 중심으로서 지금 여기의 나를 주재하는 정신이라면 자기는 전체 정신의 중심을 말한다. 의식과 무의식을 통틀어 온전한 ‘나’를 지칭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본래의 나(本性), 주인공, 법신(法身), 일심(一心), 진여(眞如), 불성(佛性) 등의 의미에 비길 수 있다.

자기를 실현한다는 것은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과정으로서 전체 정신을 통합하는 전일성을 실현하는 것이다. 무의식의 단계별 의식화 과정이 자기실현의 과정이다.

융은 자아를 실현하는 첫 번째 작업은 외적 인격인 페르소나를 통합시키는 일이라고 했다. 앞서 언급했지만 페르소나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형성된 것으로 진정한 자기는 아니다. 체면이란 가면을 벗어던지듯이 페르소나를 벗겨내야 한다. 페르소나를 너무 오랫동안 쓰고 지내다 보면 그것을 진정한 자기로 착각하는 수가 있으며 그런 경우는 페르소나를 자각하고 벗는 것이 더욱 어렵게 된다. 페르소나는 가족이나 친구처럼 가까운 사이의 타인이 더 잘 볼 수 있으므로 그들의 조언을 듣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는 그림자를 의식화하는 과정이다. 그림자는 미숙하고 열등한 인격이다.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니지만 나에게는 두려운 존재이고 불편한 존재이다. 그래서 내 안으로 영입되지 못하고 의식 가까이서 서성이는 또 다른 나의 분신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그림자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림자는 대부분 외계의 대상에 투사되어 나타난다. 투사란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을 바깥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현상이다.

 타인들 앞에 잘 나서지 못하는 사람이 잘 나서는 사람들을 보고 뽐낸다고 비난하거나, 실속을 챙기지 못하는 사람이 실속을 챙기는 사람들을 보고 이기주의자라고 비난하는 경우를 투사라고 할 수 있다. 그림자를 찾는 방법은 자신의 대인관계를 분석해 보는 것이 좋다. 그림자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주로 투사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림자를 의식화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평소에 하지 못하던 행동을 과감하게 ‘저지르는’ 모험을 해야 한다.

자기실현의 과정, 즉 무의식의 의식화 과정은 일정한 순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아에 가까이 있는 것부터 의식화하는 것이 쉬운 일이다. 아니마, 아니무스는 무의식의 좀 더 깊은 곳에 위치한 것이다. 아니마의 의식화는 남성 무의식 속에 있는 열등한 여성성을 회복하고 통합하는 작업이다. 남자들에게 남자다워야 한다고 강조하게 되면 부드럽고 자애로운 여성성은 점점 발달하지 못하고 무의식 속으로 가라앉게 된다.

그래서 지나치게 남성적인 면만 구비하고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전체 정신의 통합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게 되고 마침내 심리적 증상을 겪게 된다. 그것은 통합을 요구하는 아니마의 욕구이다. 아니무스의 의식화는 여성 무의식 속에 있는 열등한 남성성을 회복하는 작업이다. 남성성이 억압되고 지나치게 여성성만이 강요될 때는 역시 심리적 증상이 일어나게 된다.

융은 모든 무의식을 의식화할 수는 없다고 했다. 원형 안에 존재하는 원초적인 인간 정신의 모든 침전물까지 의식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융의 자기실현은 완전이 아니라 온전을 추구한 것이다.

자기실현을 이룬 사람의 모습은 정형화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농부는 농부답게 상인은 상인답게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마치 십우도의 입전수수 단계에 나타나는 남과 어울리고 서로 나누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의 모습일 수 있다.

7. 맺는 말

유식학과 분석심리학을 비교해 보는 것은 학문의 우열을 가르기 위한 것도 아니고 무리하게 유사점을 찾아내기 위한 것도 아니다. 인간정신을 탐구하기 위해 각고의 세월을 보내면서 자신이 직접 경험한 내용을 진솔하게 정리한 위대한 인간의 기록이므로 편견 없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양자의 가르침을 살핀다고는 하지만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내용은 다를 수밖에 없다.

 마음에 관한 문제는 지식이나 이론으로 해결될 성질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경험과 통찰로서만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것이 지적 이해로서 가능하다면 자기실현은 쉬운 일이며 아집과 법집을 끊고 무아의 경지를 증득하는 것도 간단한 일이 되고 만다. 따라서 필자의 견해 역시 필자가 이해한 정도만을 기록했을 뿐이다. 오해한 부분도 있을 수 있고 이해가 미흡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경험적 통찰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유식학은 마음의 고통을 극복하고 부처가 되고자 했던 수행자들에 의해 성립된 것이고, 분석심리학은 환자를 치료하던 정신과 의사에 의해 창시된 학문이다. 그 점이 두 학문의 출발과 전개 그리고 종착지의 차이를 설명할 수가 있을 것이다. 완전한 마음과 건강한 마음의 차이로 볼 수도 있다.

수행을 통해 완전한 정각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융을 거치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고, 융을 통해 자기실현에 이른 사람은 유식학을 통해 자기실현과 무아의 의미를 살피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완전함은 온전함을 지나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


김경일
안동교대, 대구대, 영남대교육대학원, 경성대대학원 졸. 〈유식학의 상담심리학적 이해와 적용〉으로 박사학위 취득. 경성대대학원, 위덕대대학원 출강.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문화대학원 불교상담학과 겸임·책임교수. 행복심리상담연구소 소장. 상담슈퍼바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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