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 만해사상 실천선양회 Home
불교평론 소개 l 지난호 보기
 
 인기키워드 : 사색과 성찰, 청규, ,
> 뉴스 > 특집 > 한국전쟁과 불교
     
6·25소설 속의 불교 / 유한근
[43호] 2010년 06월 25일 (금) 유한근 yhkpost@scau.ac.kr

1.한국전쟁과 불교소설

   

해방의 감동은 제 문화 현상에 무질서와 혼돈, 그리고 대립의 양상을 낳았고, 이러한 양상이 미해결된 채 한국전쟁(6·25)은 우리 민족에게 또 다른 충격을 주었다. 해방 직후 5년간의 민족사적인 진행에 단절을 준 충격이 그것이다. 예컨대 친일 변별에 대한 논쟁의 단절이 그것인데 소설계뿐만 아니라 제 분야에서 이러한 단절 현상은 기존의 체제에 종속을 거부하는 부정의 논리에 의한 ‘다양성’을 낳게 했다.

다양성은 휴머니즘을 신봉하는 데서 출발한다. 휴머니즘은 자연 외경을 기조로 해야만 가능해진다. 또한 인간은 자연의 산물이라는 발상에서 가능해진다. 생명의 존엄성 또한 자연에 근원을 두었을 때 가능해진다. 이렇듯 휴머니즘은 생명과 자연의 자각에서 출발되는데 이는 ‘다양성’을 조장하는 에너지로 작용한다. 김동리는 〈휴머니즘과 학예(學藝)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휴머니즘의 속성을 자연과 생명 존중, 메커니즘의 거부, 규제로부터의 일탈로 개진한다. 이런 휴머니즘의 이론을 연역적 방법에 의해 전후 상황에 적용할 때 전후문학의 양상은 선명하게 조망된다.

한국전쟁은 서구문학의 전후 현상과 많은 국면에서 일치된다. 기존의 도덕·윤리에 대한 반항의식의 팽배, 실존주의 사상의 난무, 그리고 메커니즘에 대한 강한 거부와 불신, 휴머니즘 정신의 고양화 등이 그것이다. 다만 한국전쟁이 동족상잔의 대치적 상황이라는 점에서 서구 전후문학의 특성은 1950년대부터 이미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첨예화된 이데올로기의 대립 그 극단화가 전쟁을 야기했다는 평면적인 문제보다는 민족 동질성의 추구와 분단 극복 의지라는 민족 통합 원리의 총체적인 암시가 전후문학의 양상으로 나타났다는 의미이다. 이의 구체화가 ‘휴머니즘의 다양성’이다.

한국전쟁 발발에서부터 5·16까지, 이 시기에 주목되는 작가들은 김성한(金聲翰)을 비롯하여 선우휘(鮮干煇), 이범선(李範宣), 오상원(吳尙源), 장용학(張龍鶴), 손창섭(孫昌涉), 오영수(吳永壽), 박연희(朴淵禧), 정한숙(鄭漢淑), 최상규(崔翔圭), 임옥인(林玉仁), 한무숙(韓戊淑), 박경리(朴景利), 손소희(孫素熙), 전광용(全光鏞), 이호철(李浩哲), 유주현(柳周鉉), 서기원(徐基原), 곽학송(郭鶴松), 이문희(李文熙), 하근찬(河瑾燦) 등이다. 편의상 이른바 ‘50년대 작가’라 지칭되는 이들 작가와 황순원(黃順原)과 김동리(金東里) 등 원로 작가들의 작품을 조야하나마 일별할 때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은 보이나, 그 배경의 불교소설은 찾을 수 없었다.

예컨대, 이 시기에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 중에서 간과할 수 없는 소설은 황순원의 《카인의 후예》(1953년)와 《나무들 비탈에 서다》(1960) 그리고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1955~56)이다. 황순원의 《카인의 후예》는 해방 직후의 무질서한 시기를 시간적 배경으로, 공간적 배경은 테러리즘이 만연하는 살벌한 북한 공산주의 치하로 설정되어 있다.

이 소설은 이런 소설 공간적 특성과 해방 직후의 작품적 특성에서 벗어나는 있지는 못하다. 그리고 그의 네 번째 장편소설인 《나무들 비탈에 서다》는 6·25라는 비참한 현실에 외상을 입은 젊은이들의 자의식으로 인한 비극성을 보여 줌으로 해서 현대인의 모럴을 긍정적 논리에 의해서 제시한다. 이 소설의 특성은 우선 소설 공간에 있다. 참혹한 전쟁 현장이나 공포, 죽음 등 한국전쟁이라는 시간적 공간을 차용하고는 있으나 이 소설에서 구조화된 공간은 환상적인 공간이 주를 이루고 있어 주목된다.

환상적인 공간의 처리가 유년의 회상이나 꿈으로 처리되고 있다는 점에서 안일한 구성이라는 지적을 면키 어렵지만, 전쟁으로 인한 외상이 인간의 자의식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 하는 점을 예리하게 포착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관계양식적인 삶의 파악에서 존재 양식의 문제로 전위하여 형상화한 인물 성격 창조의 두드러짐이 특히 주목된다.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는 인본주의의 극대화 현상에서 야기되는 인간의 악마적 속성을 사반이라는 인물로 표상화하는 한편 신본주의적인 내세성과 초월성의 표상으로 예수라는 인물을 설정하여 이 양자의 대립 또는 갈등 구조를 통해 죽음으로부터의 인간구원 문제를 천착한 작품이다. 소설 공간을 2천 년 전으로 소급하여 설정했다는 점과 현실 문제의 구체화를 꾀하지 못한 시대적 오류의 지적을 피할 수는 없지만, 인간존재의 모순 미학과 제3세계관 휴머니즘의 결정체라는 점에서 이 소설의 중요성은 인정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그럼에도 불교문학적인 가치를 논의할 때 제외될 수 없을 것이다.

신동욱은 1950년대의 소설을 개관하는 자리에서 이 시대의 작가들을 몇 가지 성향으로 분류했다.

① 비판 정신과 동시묘사의 소설로서는 김성한을, ② 인간주의적 행동주의의 인물 설정과 시대적 책임 인식의 소설로서는 선우휘, 오상원 등의 작품들을, ③ 실존적 자각과 자유인의 형상의 소설로서는 장용학의 것을, ④ 소외된 인간과 냉소적 삶이 인식된 소설로서는 손창섭, 이범선을, ⑤ 순박한 서민의 삶과 서정적 인간 이해의 소설로는 오영수의 작품을 대표로 꼽고 있다. 또한 ⑥ 자아의 내재적 모순의 발견과 그 초극을 다룬 작가로 유주현을, ⑦ 민족적 기개를 고양시킨 작품은 정한숙의 것을, ⑧ 일상적 세태 속에 묻힌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 쓰인 소설로는 전광용의 것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⑨ 역사적 체험과 여성 수난의 문제를 다룬 작품으로는 여류작가 임옥인, 손소희, 한무숙, 박경리의 작품들을 들어 개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분류는 1950년대에 발표된 이들의 작품에 한정시키지 않고 그 뒤의 작업에서 얻어진 성과까지도 포함해서 분류한 것이다.

그럼에도 1950년대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불교소설은 왜 드문 것일까? 하지만 1950년대 작품 중에서 《불꽃》의 작가로 알려진 선우휘의 〈상원사〉(1969)를 간과할 수는 없다.

선우휘의 〈상원사〉는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사찰이 화마에 소실되지 않은 내력을 소재로 하고 있는 소설이다. 실제로 당시 상원사 주지였던 한암 스님이 절을 태우러 왔던 군인들에게 자기가 법당 안에서 예불을 하고 있는 동안에 자신과 함께 절을 태우라고 했는데, 소대장인 김 소위가 스님의 고고한 불교적 인격과 구도자로서의 품위와 신비에 감화되어 상부의 명령을 어기고 절을 불태우지 않았다는 스토리를 액화로 하고 있는 소설이다. 그리고 후일담으로 한암 스님이 입적할 때, 그 김 소위가 그 당시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절에 기증했다고 내용까지도 소설화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논픽션인 사실의 신뢰성을 바탕으로 하여 소설의 재미를 추구하는 셈이다.

소설 〈상원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얼마 전 오대산을 다녀온 이 형과 어쩌다 난롯가에서 말을 나누게 되었다.
“좋던데요.”
“참, 월정사(月精寺) 들러 봤어요?”
“이제 단청만 남았더군요.”
이제 겨우― 구 년 전 내가 찾았을 때 화재터에서 재목을 이리저리 쌓아놓고 곧 복구에 착수한다고하더니― 왜 그렇게 늦었을까.
하여간 6·25 때 불타버린 월정사가 늦게나마 또다시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니 다행한 일이긴 하다.
신라조(新羅朝) 선덕여왕(善德女王) 14년에 창건된 월정사가 불에 탄 것은 6·25 때가 처음은 아니다. 고려조(高麗朝) 충렬왕(忠烈王) 33년에 한 번, 두 번째는 이조(李朝) 정종(定宗) 원년에, 세 번째는 순조(純祖) 33년에 불탄 뒤 철종(哲宗) 때에 이르러 증축을 보아 내려오던 것이 6·25에 네 번째로 타버린 것이니 불하고는 여간한 인연이 아니다.
그때 예산이 5억 환이라고 들었는데 그 뒤 원으로 고친 5천만 원에 머물렀을 리는 만무하다. 1억 원, 어쩌면 2억 원쯤은 들었는지도 모른다.
이 형과 말을 주고받고 있는 이 이 층 건물에서 치올려 보이는, 지금 한창 올라가고 있는 십오 층 빌딩의 날림 속도에 비기면 과연 대가람(大伽藍)의 재생답다는 생각이 앞선다. 얼마나 정성을 기울였기에 근 십 년이 걸렸을까 한번 가보고 싶어진다.
“상원사(上院寺) 올라가 봤소?”
“그럼요, 적멸궁(寂滅宮) 좋던데요.”
“신라 범종(梵鍾) 소리는 들었소?”
“참, 좋던데요.”
본 것 들은 것― 그저 통틀어 좋다는 것이 이 형의 표현이다. 뭐 다른 표현은 없을가 싶었지만, 어쩌면 연거푸 좋다고만 하는 이 형의 단조로운 표현이 최고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거, 별당에 걸린 흑백 사진 한 장이 들어 있는 액자 못 보았소?”
“글쎄.”
“6·25 때 월정사는 타버렸는데 상원사는 왜 안 탔는지 그 사연 못 들었소?”
“못 들었는데.”
“그럼, 석각(石刻)의 괭이상은 보셨겠지?”
“그야…… 세조(世祖)와의 일화에 얽혀 있다는 괭이상 말이죠?”
“음, 범종에 얽힌 얘기도 들었겠지.”
“함께 수도하다 왕위를 떠맡은 동생인 성덕왕(聖德王)이 형 태자에게 선물로 바쳤다는 얘기 말이죠?” 
그러나 나는 뭐라 얼른 대꾸를 안 했다.
그것은 상원사를 찾고서 법당에 걸렸을 액자에 얽힌 이야기와 월정사는 탔지만 상원사만은 타지 않은 까닭을 모르고 돌아왔다는 것이 멍청하고 맹랑한 것을 지나쳐 괘씸하게까지 여겨진 탓이었는데, 이 형은 그러한 나에게 다그쳐 묻는 것도 아니어서 나는 그만 맥이 풀리고 말았다.

위의 인용문을 길게 한 이유는 월정사와 상원사에 대한 소개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하나의 의도는 메인스토리를 감싸고 있는 액자[프레임] 소설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월정사의 창건과 화재로 인한 증축의 역사와 상원사의 적멸궁과 석각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들어 있는 이 소설은 전형적인 액자 소설이라고는 볼 수 없다. 작자가 내레이터가 되어 자유롭게 서술하고 있는 이 소설의 메인스토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얘기는 먼저 월정사가 내리 세 번은 실화(失火)로 타버린 것이지만 네 번째만은 실화가 아닌 방화로 타버렸다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구 년 전 내가 월정사를 찾았을 때는 승방의 스님들의 한결같이 김 장군을 원망하는 데는 적이 놀랐다.
내가 아는 한 김 장군은 6·25의 명지휘관이다. 키는 육 척 가까워 허우대가 좋고 불그스름한 동안(童顔)에 박힌 눈은 안경알 너머로도 대하는 사람에게 지적이며 부드러운 인상을 주었다. 그의 경력과 전공은 군인으로서 한 점 흠할 데 없이 훌륭했다. 불행히도 그는 6·25 다음 해 겨울, 비행기 사고로 죽었지만 그때 모든 사람들은 참모총장감이었는데 개인을 위해서도 아깝고 나라를 위해서도 아쉽다고들 했다.

그런데 그러한 김 장군을 월정사 스님들은 거의 저주하지 않는가. 불교만 있고 불교를 거쳐야 가는 극락만이 약속된 저승이라면 김 장군은 지금쯤 틀림없이 지옥에 가 있을 것이다. 스님들이 그토록 입을 모아 그를 미워하는 까닭은 그는 월정사를 태운 장본인이라는 데 있었다. “그럴 리가?” 하는 나에게 대개의 스님들은 냉소의 빛을 입가에 띠며 “더 잘 알아보시구려” 하고 말하고는 더 이상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그 뒤 나는 서울에 돌아와 당시 김 장군과 행동을 같이한 군인들 몇을 만나 알아보았는데 종합적인 결론은 월정사 스님들의 원망이 정당하다는 데 낙착되었다. 월정사를 태우도록 명령한 사람은 바로 김 장군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스님이 무거운 입을 열어 뱉듯이 “뭐 초토(焦土) 작전이라든가요” 라고 말한 것처럼 김 장군이 월정사를 태운 것은 그런 단순 무지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나는 그것을 알아낸 것이다.

한국전쟁 때, 김 장군 휘하 군인과 한암 스님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기 위한 도입부라 할 수 있다. 절을 태우라는 상관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선사이신 한암 스님의 감화로 법당을 태우지 않은 김 소위, 그리고 후일담으로 선사의 ‘좌이대사(坐而待死)하는 모습을 그림으로 해서 이 소설은 불교소설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법당 한가운데 앉아 죽음을 기다리는 한암 스님을 지켜보던 김 소위는 한임 스님이 운명하자 좌이왕생(坐而往生)한 그 모습을 자기 카메라에 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뒤 그 필름을 현상해서 액자에 담아 그것을 상원사에 기증했다.”는 후일담 서술로 김동리의 〈등신불〉과 같은 이적(異跡) 현상을 설정하고는 있지 않지만, 선승의 신비로운 열반 모습을 소개함으로써 한국불교의 한 단면을 환기하게 하는 불교소설이라 할 수 있다.

2. 불교소설의 이속성과 초역사성

불교는 현실 초극의 종교이다. 초역사·초시대성을 지닌 영원한 종교라는 측면에 있어서 범속한 문학과는 원초적으로 융합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불교가 인간 자각에 의한 내면적 진리라는 점, 즉 불교적 진리는 역사나 사회 등 범속한 규정으로부터 일탈하여 어느 시대, 어느 인간 무리에도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불변의 내면적 진리라는 점에서 초월적, 초역사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전쟁의 비극적 상황이라는 특수적인 시대적 상황에서 특수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불교소설이 특별한 매력이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불교소설로서 찬반의 담론이 뜨거웠던 김성동의 《만다라》도 이 소설의 주인공인 법운의 아버지가 6·25 때 공산주의자로 처형당하면서 속세에서 비극적 삶을 시작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남편의 비참한 죽음에 충격을 받은 법운의 모친은 녹의홍상을 곱게 차려입고 밤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퉁소 소리를 찾아 헤매다가 가출하게 된다. 모친의 가출 후, 종조모 집에 잠시 의탁하던 중 그는 지암 스님을 만나 입산수도의 길을 택한다. 그리고 파계승인 지산 스님을 만나게 된다. 이렇듯 소설 《만다라》는 ‘한국전쟁’이라는 모티브로 시작되지만, 작가가 쓰려고 하는 메시지가 시대나 역사에 의해서 한 인간의 삶이 어떻게 좌초하는가에 있지 않기 때문에 6·25와는 관계없는 소설이 되어 버렸다.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의 경우, 이 소설은 해방공간의 민족분단 과정과 한국전쟁을 중심으로 하는 분단 고착화 과정을 총체적인 시각으로, 그 시대에 살았던 인물의 삶을 통해서 이념보다는 실존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 주고 있는 소설이다. 이에 따라서 종교적인 국면에서도 편견을 갖지 않고 다루고 있다. 특히 불교의 경우에도 ‘선암사’를 중심으로 하는 절집 이야기와 스님 이야기를 하나의 에피소드로 구성하고 있다. 즉 불교 이야기는 구색을 갖추기 위한, 그리고 지리산을 배경으로 활약한 빨치산 이야기를 하기 위한 배경으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며, 그나마도 한국전쟁 기간에는 뚜렷하지 못하다.

이 또한 불교의 이속성(離俗性) 때문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불교적 인간으로서 자신이 역사와 사회로부터 자유로운, 그것과 인연도 연고도 없는 차원에서 인간의 초월성으로 생활할 수 있다는 따위의 이야기는 도저히 생각될 수 없는 것이다. 요컨대, 인간적인 삶의 전 현실적인 상황에서는 초역사적인 것의 존재 그 자체도 동시적으로 역사적, 사회적 규정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단 하나의 올바른 진실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을 시대적인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소설에서 불교적 인식론과 인간형이 빈번하게 등장하지 못하는 것은 소설적인 역학적인 장치 혹은 구조에 적절하지 못한 경우나 아니면 작가의 불교적인 인식이라 사상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지나칠 수 없는 작가는 박경리와 박완서이다. 박경리의 〈불신시대〉는 《현대문학》 8월호(1957년)에 실린 제3회 현대문학상 신인문학상 수상작이다. 한국전쟁 공간에서 남편과 아들을 잃은 여인의 눈을 통해 당대 사회의 타락과 물신화되어 가는 현실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특히 이 작품은 종교계의 역기능을 비판한 작품이다. 주인공 ‘진영’의 남편은 9·28 서울 수복 전야에 폭사한다.

그리고 혼자서 길러 온 아들마저도 돌팔이 의사에게 뇌수술을 받다가 죽는다. 외동딸인 진영은 홀어머니를 혼자 어렵게 부양한다. 그뿐만 아니라 진영 자신도 폐결핵을 앓고 있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회적인 조건들은 그녀의 슬픔과 외로움을 더해 준다. 빈 병 속에 가짜 약을 넣어 파는 병원과 약국, 독실한 천주교 신자라고 내세우고는 남의 곗돈을 가로채는 당숙모.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인 사찰도 금전의 액수에 따라 재를 지내 주고, 그녀의 눈에 비치는 엄숙한 의식도 배금주의에 물들어 있음을 알고 절망하게 된다. 그러한 모든 사회 현실에 대해 환멸을 그녀는 자신의 내부에 끓어오르는 생명력으로 극복한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에서 보여 주는 서희의 끈질긴 생명력은 이 등단 작품부터 싹이 튼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생명에 대한 외경과 존엄성, 그 사상과 접목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진영의 어머니는 쌀을 팔러 온 중이 가고 난 뒤 백중날을 기다렸다. 백중날은 죽은 사람의 시식(施食)을 하기 때문이다.

백중 전날에 어머니는 문수의 사진과 돈 이천 환을 가지고 절에 가서 미리 연락을 해 두었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에는 날이 원해지자 진영이도 과실 바구니를 들고 어머니를 따라 집을 나섰던 것이다.
B국민학교를 돌아 약간 비탈진 길을 올라서니 이내 절 안마당이 보였다. 백중맞이를 하느라고 한창 바쁜 절에는 동네 아낙네들이 와서 일을 거들고 있었다.
“아이구 정성도 지극해라. 이렇게 일찍부터……”
어머니는 눈에 손수건부터 가져간다.
“스님, 우리 아이 천도 좀 잘 시켜 주세요. 부탁입니다. 너무 가엾어……”
콧물을 짠다. 어제저녁에 실컷 어머니의 설움을 들었을 주지 중은 새삼스럽게 그 말이 탐탁해질 리가 없다. 주지 중은 극히 사무적으로,
“그런데 첫째로 하갔다던 서장 부인이 아직두 안 오시니 어떡허나.”
잠시 생각에 잠긴다.
무슨 서장인지 알 수는 없으나 이 절에 있어서 대단히 소중한 손님인 모양이다. 어머니는 비굴한 웃음을 띠면서 주지 중을 쳐다본다.
“시님, 그만 우리 아일 먼저 해 주세요”
주지는 한동안 어머니를 보고 있더니,
“……그럼 댁부터 해 드릴까……”
주지는 그렇게 작정하고 마침 지나가는 중을 부른다.
“아우님!”
아우님이라고 불린 신중은 돌아본다. 얼굴이 쪼글쪼글 쪼그라진 그 신중은 아직도 팽팽한 주지에 비하여 훨씬 더 늙어 보인다. 게다가 표정마저 앙상하다.
“어제저녁에 이천 환 낸 분인데 아직 서장댁이 안 오시니 우선 하나라도 먼저 끝내지요”
주지의 말투는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었다.
늙은 중은 대답 대신 진영의 모녀를 훑어보더니 돈의 액수가 심에 차지 않아서 무뚝뚝하게 그냥  가 버린다.
—박경리, 〈불신시대〉 중에서

이 부분이 소설 〈불신시대〉의 주인공 진영이 배금사상에 물든 사찰의 모습을 그린 부분이다. 절과 스님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분히 부정적이다. 비뚤어져 있다. 작가의 눈이 부정적이면 모든 현상도 부정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불교는 마음의 종교이다. 마음 다스리기에 생명을 걸고 있는 종교이다. 이 소설 〈불신시대〉에서 작가가 참담한 한국전쟁 공간에서의 비극적 삶을 극복하는 힘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려 했다면 불교의 ‘마음 다스리기’로 그 극복의 모습을 보여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박완서는 끊임없이 우리 민족의 분단 상황을 들추어내 아직도 우리 민족은 분단된 채 살고 있으며 그 상처로 아직도 괴로워하고 있음을 환기시켜주는 작가이다. 그 대표적인 소설이 〈엄마의 말뚝 1〉과 〈엄마의 말뚝 2〉이다. 이 소설에서도 불교소설적 실험을 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러나 소설 〈부처님 근처〉에서는 제목이 그러하듯이 다소의 불교적 색채를 보여 준다. 우선 〈엄마의 말뚝〉부터 살펴보자.

그때의 우리의 곤경은 6·25라는 커다란 민족적 비극 속의 한 작은 단위에 불과했지만 중산층이 모여 사는 점잖은 동네의 인심의 간사함, 표리부동성과도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다. (……) 그만큼 그는 지조를 최고의 이상으로 삼는 선비 기질을 간직하고 있었고, 그런 선비 기질이 목적을 위해 수단을 안 가리는 좌익사상의 본심(本心)을 참을 수 없는 데서 그의 갈등은 불가피했다. (……) 살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변신이란 생각조차 하기 싫은 그의 인품이기에 더욱더 국민을 듣기 좋은 말로 달래 적 치하에 팽개치고 저희끼리 뺑소니친 꼴이 된 정부에 대한 원망도 컸다. 원망과 불신, 불안, 그리고 고독으로 그는 날로 정신이 망가져 갔다.
—〈엄마의 말뚝 2〉 중에서

위의 인용은 한국전쟁 공간에서 중산층 사람의 의식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선비’ 기질과 좌익 사상 간의 갈등, 그리고 생존을 위한 변신, 그리고 그에 대한 자기혐오, 정부에 대한 원망과 불신, 불안과 고독으로 병들어 가는 지식인을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다.

박완서의 대표작 〈엄마의 말뚝〉은 3부작이다. 개풍에 살던 내레이터가 엄마의 손에 이끌려 서울살이를 하는 일제와 6·25의 시대상을 반영한 작품이다. 이 소설들은 연작이면서도 독립된 완결성을 구축하고 있다. 박완서는 이 작품에서 엄마의 삶을 한 개인의 사적인 것에서 벗어나 가족사, 민족사의 차원으로 고양시켜 보여 주고 있다.

〈엄마의 말뚝 1〉은 남편을 잃은 엄마가 어린 오누이를 데리고 상경해서 소위 말뚝으로 상징되는 자리를 잡아 가는 치열한 과정을 그린다. 그리고 두 번째 이야기는 6·25 전쟁으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와 내레이터의 비극적인 기억이 드러나는 소설이고, 〈엄마의 말뚝 3〉은 화장되어 강물에 뿌려지기를 바랐던 엄마의 소망과는 달리 공원묘지에 매장되는 과정을 그린다. 그러니까 한국전쟁과 관련되는 부분은 〈엄마의 말뚝 2〉인데 불교를 모티프로 하고 있지 않다.

박완서의 〈부처님 근처〉는 무늬만은 불교소설이다. 이 소설의 서두에 ‘나’와 어머니는 고찰인 ‘ㅂ사’를 간다.

그중 제일 큰, 초등학교 교실을 두 개쯤 터 놓은 듯한 장판방 앞에는 고무신이 수없이 많이 늘어놓여 있고 신도들의 염불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왔다.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지일체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득지혜안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도일체중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득선방편……”
생소하지 않은 염불 소리여서 반가웠다. 생소하기는커녕 잘하면 따라 할 수도 있으리만큼 귀에 익은 소리다.
부우연 이른 아침, 나는 영락없이 아랫방에서 들리는 어머니의 염불 소리에 선잠이 깨게 마련이었다. 아이들 시간밥 짓기에도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나는 남편이 그 소리에 깨면 어쩌나 조마조마하면서도 그 소리가 싫지는 않았었다. 어쩌면 나는 그 소리로 나의 하루를 안심스러워 하려 들었는지도 모른다.                                             
—박완서, 〈부처님 근처〉 중에서

이 부분은 현재 시점에서의 사찰 방문과 과거의 기억 속에서 어머니의 불심을 회상하는 부분이다. 이 뒤로도 어머니와 사찰, 그리고 노스님의 법문, 보살님(신도)들의 절집에서의 생활을 그리고 있고, 아버지와 오빠의 ‘한국전쟁 공간’에서의 참혹하고 욕된 삶을 그리고 있다. 그 하나의 에피소드가 아래의 인용문이다.

6·25가 터지고 한동안 오빠는 꽤나 신이 나 보였다. 오빠는 그전부터 좌익운동에 가담하여 심심찮게 말썽을 일으켜오던 터라 신날 만도 했을 테고, 그런 오빠 때문에 적잖이 속을 썩이던 아버지도 때가 때이니만큼 내버려두려는 눈치였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인가 오빠는 바깥출입을 뚝 끊고 안방에 누워 담배만 온종일 뻐끔뻐끔 피우고, 수염이 무성하게 자라도 깎을 체도 안 했다. 누가 찾아와도 없다고 따돌리지는 않고 만나긴 만나는데 뭔가 상대방을 몹시 불쾌하게 해서 보내는 것 같았다.

우리는 날로 심해지는 폭격에서보다 오빠의 이런 태도에서 더 위급한 폭발물 같은 위험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 날 늘 찾아오던 오빠의 ‘동무’가 총잡이를 앞세우고 찾아왔다. 마당에 마주 선 채 웅얼웅얼 대화가 오고 갔다. 조용한, 거의 졸립도록 권태로운 말의 주고받음이었다. 별안간 오빠가 “못 해.” 하고 악을 썼다. 상대방이 “못 해? 죽인대도,?” “죽어도 싫다니까.” 목숨은 어처구니없이 조급하게 흥정된 모양이다. 총잡이가 정말 총을 쐈다. 한 방도 아닌 여러 방을, 가슴과 목과 얼굴과 이마에.
—박완서, 〈부처님 근처〉 중에서

위의 인용문은 오빠의 죽음을 그린 소설의 한 부분이다. 어처구니없이 죽음을 맞는 오빠의 모습이다. 류보선의 지적대로 박완서는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의 진정한 싸움을 포기한 자들이다. 친밀성, 안정성, 세속적인 의미의 행복 등은 어떤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이다. 만약 자신 삶의 목표에 걸림돌이 된다면 그들은 언제든지 자신들만의 고유한 가치라든가 자기만의 진리 등의 질적인 가치들을 밀어낼 준비가 되어 있다. 즉 그들은 양적인 가치에 의해 양적인 가치를 위해 그들의 질적인 가치를 포기하는 데 아무런 주저도 보이지 않는 존재들”인가.

그들은 “세계의 논리를 자기화하면 할수록 그들의 영혼은 점점 더 비어 가지만, 그들은 괘념치 않는가.” 하는 문제는 본격적으로 박완서 소설의 인물 성격 연구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져 할 문제이지만, 하나 아쉬운 점은 기왕 불교적인 소재와 모티프를 끌어와 불교가 지니고 있는 제반 요소를 차용하여 소설 미학을 성취하지 못한 것인데, 이는 박완서가 엄정한 리얼리스트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초(超)리얼적인 불교의 세계를 모르기 때문일까?

3.한국전쟁 소재 불교소설의 새 지평

분단문학의 대표적인 작가 김원일은 《노을》 《늘 푸른 소나무》 〈어둠의 혼〉 《불의 제전》 등 주목받는 작품을 써 왔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불교소설은 〈바라암(波羅庵)〉이 유일하다. 이 소설 또한 소설 전체에 깔리는 시간적 배경이 한국전쟁이라기보다는, 부분부분 스토리의 전개상 필요한 부분들이 한국전쟁 공간 속에 전개되고 있다. 

김원일 소설집 발문을 쓴 하응백은 소설 〈바라암〉을 해설하는 부분에서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한편 김원일의 초기작 중 〈어둠의 혼〉과 함께 소설적 완성도가 높은 〈바라암〉은 어떨까. 서정성이 강한 이 작품은 떠남의 드라마다. 혼혈아인 지수의 어머니 점례는 법담 스님에게 강보에 싸인 지수를 남겨두고 떠난 후 생사 불명이다. 점례와 젊은 시절 몸을 섞기도 했던 나루터 강 사공은 젊은 시절 만주 등지를 떠돌았다. 지수 역시 강 사공의 딸 봉녀를 임신시켜 놓고 바깥세상으로 떠난다.
떠남은 전염성의 괴질이어서, 지수는 머물 수가 없다. 미지의 세상이 그를 강하게 유혹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우리 아버지나 지수 스님이나 남정네들은 왜 그렇게 젊은 한 시절을 떠돌기만 좋아할까. 처음부터 못박고 한 군데 눌러 살지 못하고, 뻔한 고생 사서 하는 그 역마살이 뭐가 좋기에 그렇게 훨훨 떠돌아다니고파 할까.”(《김원일 중단편전집 2》 P88).

떠나간 지수는 돌아오지 않는다. 봉녀가 낳아 법담 스님에게 맡긴 지수의 아이도 다리품을 팔 나이가 되면 아버지를 찾아 떠나지 않을까. 이 떠남의 대물림은 김원일 문학의 핵심 모티브이다.
 
위의 인용문을 읽어보면, 소설 〈바라암〉이 어떤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 설정된 시대는 한국전쟁 기간이 주 시간대이다. 그리고 주 무대는 ‘바라암’이다. 소설의 한 부분을 보자.

열아홉 해 전이었다. 초파일을 넘긴 지 달포, 신록의 눈부심이 산천을 환하게 살려 올릴 절기였다. 잠자리를 찾아드는 산새들 지저귐 속에 뜰에 핀 모란 향기가 은은한 어스름녁, 바라암으로 한 여자가 찾아들었다. 스물두엇 된 여자는 이제 두 돌 됨직한 사내아이를 업고 있었다.

보통이 하나 들고 암자로 찾아온 그녀는 눈물에 젖은 얼굴로 요사채를 서성거렸다. 낮 예불을 마치고 나와 석간수에 손을 씻던 법담 스님이 그 여자를 알아보았다. 〈점례로구나. 니가 다시 바라암으로 찾어왔구나.〉 〈시님. 이 몹쓸 여식을 꾸짖어주시유. 이렇게 추한 꼴로 다시 시님을 찾게 되었이유. 시님, 자비로, 바다 같은 은혜로 지를 용서해 주시유.〉 점례가 법담 스님 앞에 무릎 꿇고 흐느꼈다. 점례는 더 말을 잊지 못했다. 그녀 등에 업힌 아기도 울음을 터뜨렸다. 법담 스님은 점례의 화장내 은근한 사바세계 역겨움에 눈을 감았다.

육이오 전쟁 와중에 부모 형제 잃은 고아로 성주산 바라암에 얹혀 지내기 십몇 년, 삼 년 전 가을이었다. 한창 꽃피는 나이를 맞자 점례는 홀연히 암자를 떠났다.

위의 인용문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법담 스님’ ‘점례’ 그리고 점례가 데리고 온 아이는 ‘지수’이다. 그리고 나루터 ‘강 사공’과 그의 딸 ‘봉녀’ 등이 주요인물이다. 이들을 통해서 역사적인 사건이 인간들에게 어떤 폭력으로 작용하는가를 보여 주면서, 이 소설은 위의 하응백 해설처럼 ‘떠남의 대물림’을 보여 주는 소설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소설에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 소설의 불교적 메시지이다. 그것을 소설에서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하나, 철새가 산야와 바다를 건너듯, 낙엽이 몸 붙였던 가지를 떠나듯, 어디로 정처 없이 떠나고 싶은 허무(p.70, 법담 스님이 지수를 보고).

둘, “지수야 하던 빗자락질 계속 허거라. 각(覺)에 이르는 질은 오직 정성이고 참음에 있느니라. 빗자락질만 아니고 한 포기 풀을 볼 때라도 잡념을 내몰고 생각을 모을 때 불지(佛地)에 이르는 질의 열림을 볼 것이니……”(p.71, 법담 스님이 지수를 보고).

셋, 욕(慾)은 그 원인부터 제어함에 있고, 때를 놓쳐 욕이 육신을 휘감는다면 계를 닦으며 인고함에 있지만(p.72, 법담 스님 생각).

넷, 번뇌가 이 강물에 풀려 흐르다 바다에 이르면 거기는 물 같고 바람 같은, 보이거나 잡이지 않는 또 다른 미지의 광활한 세계가 있을까(p.80, 지수의 상념).

다섯, “계를 못 지키고 열반경에 들지 못한 파계를 용서해 주시유. 은젠가 이 악념의 때를 벗구 다시 법문에 귀의할 터인께 그날까지 지를 잠시 버려주시유.”(p.89, 지수가 노스님께 드리는 말).

여섯, 집중삼매의 오랜 고행을 거쳐, 나고 죽음을 초탈한 상태에서 오직 지계(持戒)로 청정하신 고암 선사. 한 포기 풀을 가리키며, 이 연약한 생명 속에 부처가 있다고 설법한 그 참 가르침이 새롭게 귓속을 닦아낸다(p.89, 법담 스님의 상념).

일곱, 산천은 태어남에서 죽을 때까지 그 자리에 머물러 떠나지 않는데, 찰나를 사는 인간사는 왜 이리 이별이 많은가(p.89, 법담 스님의 상념).

여덟, “알었다. 너의 마음을. 인제 음식을 먹어라. 사흘 낮밤을 허하게 지맴은 오직 심신만 약허게 헐 따름이다. 각에 이르려 식음을 전폐함은 기특헌 일이나 세속의 번뇌로 음식을 멀리험은 어리석은 짓이다. 떠나거라. 선(禪)에 이름이 속세에 멀리함에만 있는 것이 아니구 속세에 거함으로써도 깨달음이 있을진대, 떠나 그 속에서 이루어 돌아오거라.”(법담 스님이지수에게 한 말).

아홉, 태어나기 전이 무엇이며, 죽은 뒤 무엇이 될 것임을 어찌 알랴.(p.91, 법담 스님의 상념).

열, 떠나는 자에 대한 원망도, 측은한 정도 모두 속세에서 맺은 연이고, 한 포기 풀이 박토에서 말라. 죽음이나 한 인간이 있던 자리를 비우게 됨 역시 같을진대(p.91, 법담 스님의 상념).

이렇게 정리해 보면 알 수 있듯이 불교적인 메시지는 법담 스님과 지수 스님에게서 나오고 있다. 등장하는 스님의 상념이나 대화의 묘사에서 불교 교리가 나타나는 게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인간과 삶의 문제에 적극적인 대응 자세와 체험을 통하여, 그 본질을 관념 혹은 지식화하지 않고 실제화하여 불교문학의 새 지평을 열기 위해서는 시보다는 소설 장르가 실질적이고 적합하다. 소설은 서사 구조가 삶의 실제 공간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시대와 역사를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문학 양식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존재양식에 의한 문학적 해명보다는 관계양식에 의해서 인간과 삶을 해명하기 때문에 적합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불교소설은 신문학 이후에 국문학의 제재나 소재 전통만을 계승해 왔을 뿐 뚜렷한 성격을 형성해 오지는 못했다. 이광수, 박종화 등에 의하여 신화나 설화를 재구성하는 인물 중심의 불교소설이나 배경 중심의 공간소설이 그 주류를 이루어 현대소설로서의 새 지평을 보류한 채 한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는 문학으로서의 기능을 다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다분한 불교의 진리를 윤리적 측면에서 수용했거나 아니면 단순한 소재적 국면에서 수용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필자는 한국전쟁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불교적 제재를 공간적으로 혹은 등장인물이 스님이 나오는 이른바 ‘한국전쟁 불교소설’ 몇 편을 일별하였지만 흡족할 수 없었다. 주제에 합당한 우리 소설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 한국소설은 다양성이 부족한 것만은 사실이다. 당시의 큰 물줄기로 흘러가는 시대적인 모티프가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불교문학의 새로운 시대를 연다는 확신과 신념을 가진 작가들이 역사 혹은 시대적인 상상력으로 불교의 본체와 접목시켜 창작해야 한다는 점이다. 불교문학은 현세적이고 합리주의적인 문학관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는 우리 문학, 특히 우리 소설의 한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믿어 의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상구보리(相求菩提)의 미학과 하화중생(下化衆生)의 현실성 인식이 변증법적으로 화해한다면, 한국전쟁 소설을 불교적 인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의미 있음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 우리 민족의 분단 현실에서 동질성 회복을 위한 민족 통합 원리를 불교문학에서 모색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

유한근
시인, 문학평론가. 현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교수. 〈중앙일보〉 신춘문예(동시), 〈동아일보〉 신춘문예(문학평론)로 등단. 시집 《사랑은 흔들리는 행복입니다》 등과, 평론집 《문학의 모방과 모반》 《현대불교문학의 이해》 명상언어집 《별과 사막》 동화집 《무지개는 내 친구》 등 다수의 저서가 있음. 만해불교문학상, 한국문학평론가협회상 등 수상

ⓒ 불교평론(http://www.budreview.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댓글달기는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
전체댓글수(0)  
전체기사의견(0)
불교평론 소개독자투고불편신고구독신청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
[135-887]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512-9번지 MG타워빌딩 3층 | Tel 02-739-5781 | Fax 02-739-5782 | 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사성
Copyright 2007 불교평론. All rights reserved. mail to budreview@hanmail.net
불교평론을 통해 제공되는 모든 콘텐츠(기사 및 사진)는 무단 사용, 복사, 배포시 저작권법에 저해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