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귀남 불교포럼 실행위원장

내 자신을 사랑하기 참 어렵다. 몸과 마음이 지칠 때는 더욱 그렇다. 머리는 복잡해지고 기운은 마른 강바닥처럼 새버려 의식이 툭툭 터져나간다.

망상의 그루터기에 걸린 것인지, 길을 가다가 넘어져 발목을 다쳤다. 부목 석고 기브스를 하고 3주 동안 안정을 하라는 처방을 받았다. 그 다음 주에 함양 녹색대학에 갈 약속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전화를 했다.
“우째 촐랑거리다가 발을 다 다쳤소!”

허병섭 샘이 나무람인지 위로인지 알 수 없는 신선한 말씀을 날렸다. 내 웃음보가 터졌다. 촐랑거리다! 내 삶의 탁류를 헤치고 심연의 기억이 유리알 같은 물결로 자꾸 촐랑거렸다. 아무 분별없이 유쾌할 수 있는 말의 촉각에 내 마음은 생기가 돋아났다.

녹색대학은 생태문화공간을 만들어보겠다고 2003년 식목일에 문을 열었다. 참여하는 선생님은 ‘샘’이고 학생은 ‘물’이라고 부르는 폼부터 예사롭지 않지만, 낡은 시골 학교에 터 잡고 있는 모습은 야단스러운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허술한 후원의 탱자나무 가시덤불 아래 썩을 준비를 하고 있는 탱자 몇 알을 주웠다. 후각을 자극하는 순간, 어릴 때 테, 테, 씹어뱉은 미각이 입안에서 사르르 구른다. 단장하지 않은 야생화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내 걸음을 멈췄다.

이렇게 길어 올린 기억은 의식적 기억과 다르며, 망각의 저편에서 억지로 이끌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잊고 있던 과거를 어쩜 영영 잃어버렸을지도 모르는데, 온몸을 전율시키는 감각이 흔들어 깨운 과거는 생생하게 현재의 나를 떠받쳐준다. 나도 모르게 내 기억의 순수감각을 되찾은 충만감을 맛본다.

초고속으로 내달리는 생존경쟁에서 생채기 난다. 얇아진 표피를 뚫고, 잠자고 있던 무의식의 마그마가 분출한다. 일상에서 지워졌던 잃어버린 순수감각이 간헐천(間歇川)처럼 흐른다. 날려버린 시간이 비로소 내 존재로 돌아온다.

내 안에 존재하는 시간에 대해 몇 가지 상상을 해 본다. 종교적 상상. 인간은 죽어야 하는 운명적 존재이기에 ‘불멸과 영생’의 시간을 꿈꾸리라. 누가 구멍 없는 피리소리 캄캄하게 들었다 하는가. 들었다고, 또는 들을 수 있다고 주장하더라도, 내 육신을 그 구멍에 밀어넣지 않고서야 말할 수 없으리.

그러고 보니, 오랫동안 머리를 굴리며 줄기차게 뭔가 주장을 해왔군. 문득, 이 멍청한 시간을 돌려 공간 이동을 할 수 있는 ‘타임머신’ 같은 마술 빗자루를 거머쥔다면, 누구나 길들어진 일상의 매트릭스에서 탈출을 시도하겠지.
생각지도 않은 공룡발자국 화석지를 만났다. 그곳은 고성의 연화산 옥천사로 올라가는 옥천계곡이었다. 공룡발자국 화석에 내 발을 올려놓고도 수억 년의 바람에 풍화하지 않은 그 비밀은 알 수 없었다. 상상할 수 있는 밑천 감각이 없었던 탓이었나. 스쳐 지나는 짧은 시간 때문이었나.

길을 따라 더 올라가서 의상대사가 창건한 옥천사가 나온다. 가람은 좁은 계곡을 끼고 오밀조밀하면서도 넉넉하게 자연의 품에 안긴 듯하다. 그 한 자락을 차지한 옥천각에는 무시로 샘솟는 옥천이 수정처럼 영롱하다. 쫓기는 시간이 스며들 수 없는 샘, 이 투명한 물빛을 짜릿한 오감으로 맞이하는 순간에, 적적(寂寂)한 원시 시간은 잘 지어진 가람이 견딘 세월보다 성성(惺惺)하다.

나를 송두리째 잡아채는 순수감각의 희열을 되씹어 하나하나 복기(復碁)하는 상상.

다시, 순수감각으로 퍼 올린 시간을 명상한다. 하염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한 지점에서 큰 할머니, 작은 할머니와 함께 곰삭은 누런 콩잎김치를 먹는다. 웃음을 섞어가며 콤콤한 미각을 즐기는 식탁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의식적ㆍ지적 기억보다도 더 또렷하다. 콩잎김치의 일미(一味).

맛을 기억하는 감동처럼, 회상의 이미지가 현재의 실재 감각에서 촉발될 때, 그것은 일시적인 것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마네의 명화 <피리 부는 소년>을 볼 때마다 고향 대청마루 방문 위에 걸린 흑백사진틀이 떠오른다. 가족들 사진과 함께 걸려 있었던 복사본 속 소년을 오랫동안 나는 죽었다고 한 오빠라고 생각했다.

훗날 처음으로 마네가 그린 명화의 주인공임을 알아버린 순간, 오빠의 아우라가 상실되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 사진이 왜 거기 걸렸는지 의심하지 않았다. 내 무의식 속으로 스며들어간 감각의 퍼즐이 온전한 의미로 맞춰지지 않을 뿐, 소년은 늘 우리 집안 어른들의 흑백사진 속에 있다.

거기 그저 있는 그것만으로도 나를 오롯하게 인식하는 충만감이 넘치게 하고, 사방은 크기가 없이 둥그렇게 응축된 우주 같이 아늑해진다. 

그런데 대문 밖은 질주한다. 멈출 수 없다. 사방팔방으로 길들이 그물망을 이뤄 도시인들의 생각까지 빠짐없이 거머잡을 듯 촘촘하게 시간을 짰다. 잘 쓰고 있는 것 같은 일상의 감각은 무감각해진 자동흐름이 되어 주류 세상에 휩쓸려간다. 이것은 일종은 인생의 덫인데, 용케 한계를 잊은 듯이 잘 돌아간다.

물질의 풍요를 따라 환락(歡樂)하는 일상의 자동흐름, 연민도 동정심도 메말라가는 밝지도 않은 문명(文明) 속 모순 앞에서 늘 목마른 이, 어떻게 감당하나. 바깥세상으로 향하던 존재의 이유를 내 안에서 성찰한다. 내 스스로 말미암은 이유도 모르고 자유(自由)는 형체도 없이 가벼워서 안착하지 못한다. 위선으로 덮어버리거나 변명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치면서, 아직 존재의 의미를 찾지 못한 목숨 끝까지, 나를 치유하지 않고는 나는 늘 슬프다.

소외의 두려움인지, 자기모순의 충돌인지, 내 한계가 무엇인지, 또 그것이 어디로부터 어디까지 왔는지. 내 자유를 스스로 믿지 못하여, 질투와 불안과 괴로움 속에서 인생을 잃어갈 때, 간헐적이나마 순수감각을 회복하는 한 순간, 오묘한 충만 속에 나는 비로소 나로 있게 된다.

내 삶의 의미는 순수감각의 편린을 놓치지 않고 ‘지금 여기에’ 투입하여, 무감각의 시간을 읽어내는 작업에서 찾아지리. 순수감각은 비정한 시간의 탁류 속에 휩쓸려가는 모순, 고통, 슬픔을 씻어주는 인정과 기쁨의 원천이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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