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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불교계 / 김광식
― 북으로 간 승려들과 불교혁신운동
[43호] 2010년 06월 25일 (금) 김광식 jiher77@hanmail.net

1.들어가는 말

   

김광식
백담사 만해마을 연구실장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17일까지 3년간, 한국에서는 이념 문제로 인해 야기된 동족끼리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은 한국현대사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런 전제하에서 불교도 적지 않은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불교가 겪었던 여러 문제를 정리, 분석하는 학문적 작업은 아직도 그 본질에 접근하지도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마리도 찾지 못하는 상황이다. 따라서 6·25 기간에 겪었던 제반 현실, 영향 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불교계 각 분야에서 일어났던 일, 사건, 변화상 등을 밀도 있게 그려내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

이에 본 고찰에서는 6·25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 남한에서 불교혁신을 위해 활동을 하였던 승려들이 북한으로 갔었고,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북한으로 갔던 승려들이 서울로 내려와서 불교혁신 활동을 하였던 것에 주목하고 그 전후 사정을 정리하려고 한다. 6·25 기간, 서울에서 90여 일간 상주하였던 그들은 남조선불교도연맹(南朝鮮佛敎徒同盟)을 결성하고 불교혁신을 위한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을 전하는 관련 자료의 부족으로 그 전모 및 성격은 파악하기 힘들다. 그렇지만 북한으로 넘어가서 활동하였던 대상 승려, 남조선불교도동맹의 간부 및 강령, 남조선불교도동맹의 산하 조직체에 대한 일단의 사실은 소묘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활동은 해방공간의 불교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1945년 8·15 해방부터 6·25가 발발하기 이전까지 남한에서는 교단개혁 추진, 불교 노선의 방향, 불교혁신 내용 등 다양한 불교혁신론이 활발하게 나타났다. 그 활동에는 교단과 재야 불교혁신론자들의 갈등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구도하에서 진보적인 불교개혁을 주장하였던 급진적인 승려들이 북한으로 갔고, 6·25가 일어나자 북한으로 갔던 승려들이 서울로 내려와서 불교혁신 활동을 하였던 것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해방공간의 불교혁신론, 진보적인 승려가 북한으로 간 이유, 6·25 직후 서울에서의 불교혁신 활동, 불교혁신론의 성격 등으로 관련 내용을 대별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이러한 내용은 일부의 글, 당시의 불교계 신문, 구술 증언 자료집에서 간헐적으로 찾을 수 있지만 전모 및 성격은 지금껏 베일에 싸여 있었다. 이 글에서 그에 대한 모든 것을 밝힐 수는 없지만 추후 이 분야 연구의 징검다리를 놓는다는 차원에서 관련 자료를 참고하여 그 진실의 일단을 들추어내고자 한다.

2.해방공간의 불교혁신론

8·15 해방이 되자, 일제하의 교단 집행부가 퇴진하고 과도적인 교권을 담당한 조선불교혁신준비회가 결성되었다. 혁신준비회는 각지로 특파원을 파견하는 가운데 교단개혁, 불교혁신을 기하기 위해 1945년 9월 22~23일, 서울 조계사에서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승려대회에서는 교단 정비, 교정 기구의 개편, 광복 사업 등 교단이 나아갈 방향과 노선이 결정되었다. 그 이후, 교단 집행부가 새롭게 등장하고, 교단의 주관하에서 다양한 교단개혁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렇게 교단 집행부 중심으로 교단 및 불교의 개혁 활동이 진행되는 가운데, 교단과는 별도로 불교혁신을 기하려는 일단의 단체가 등장하였다. 불교청년당, 혁명불교도동맹, 조선불교혁신회, 불교학생동맹, 불교여성총동맹 등이었다. 혁신단체들은 개별적으로 불교혁신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고, 그에 대한 내용을 불교계 내부에 홍보하였다. 그리고 혁신의 주장을 교단에 제출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불교혁신에 대하여 교단과 혁신단체들이 다양한 의견을 개진하였지만, 점차 시간이 가면서 교단과 혁신단체 간에는 불교혁신에 대한 이질적인 현실 인식이 노정되었다. 그는 교단이 보수적인 입장이었던 반면, 혁신단체는 진보적인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교단과 혁신단체가 주장하였던 이질적인 입장과 혁신론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서로 간에 조화, 타협될 수 없는 색깔, 노선이 완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교단은 만해 한용운 노선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일제 식민지하에서 노정된 제반 모순을 점진적으로 개선하겠다는 입장에 서 있었다. 그에 반해 혁신단체들은 과감한 불교혁신론, 불교대중화의 기치를 내세우면서도 수행하는 비구승단을 교단의 상징으로 내세우려고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교단의 노선은 한용운 노선을 취하면서, 당시 보편화되었던 승려 결혼을 수용하는 입장이었다. 이는 대처승들이 교단, 사찰의 관리 책임을 맡고 있었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혁신단체들은 정식 수도하는 승려를 교단, 승단의 주체로 설정하고 대처승과 신도들은 교도(敎徒)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통일시키려고 하였다. 혁신단체의 이런 주장은 당시 교단 집행부 및 각처 사찰의 주지를 포함한 다수의 승려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이에 따라 교단과 혁신단체 간의 대립은 피할 수 없었다. 나아가서 혁신단체들은 불교가 갖고 있는 사찰 재산을 농민에게 내놓아야 한다는 주장 즉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주장하였다. 당시 정치적인 대세가 토지개혁이 단행될 것으로 판단하고 불교, 사찰이 스스로 그 같은 흐름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교단 집행부는 토지개혁의 당위성을 인정하면서도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입장에 서 있었다.

이렇듯이 교단과 혁신단체 사이에는 타협될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하였다. 이는 각자의  정체성, 생존권이 달려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46년 10월까지는 그래도 교단과 혁신단체 사이에는 대화, 이견 조율이 있었다. 그러나 1946년 11월에 개최된 제2회 중앙교무회를 기점으로 양측의 대립 구도는 또 다른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즉 불교혁신단체는 11월 28일, 선학원에서 모임을 갖고 불교혁신총연맹 결성 준비회를 개최하였다. 마침내 12월 3일, 선학원에서 불교혁신총연맹(佛敎革新總聯盟)이 결성되었다.

이 연맹에는 선리참구원, 불교청년당, 혁명불교도동맹, 불교여성총동맹, 조선불교혁신회, 선우부인회, 재남이북승려회 등 7개 단체가 참여하였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선리참구원, 즉 선학원의 동참이었다. 수좌들의 거점 조직체였던 선학원은 해방 직후 선(禪) 분야의 개혁을 교단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일부 내용만 수용되는 등 교단이 미온적으로 대처하자, 선학원은 불교혁신 단체와 공동 노선을 취했다.

불교혁신총연맹은 교단과의 결별을 분명히 하면서 자신들의 입론을 천명하였다. 즉 연맹은 국토의 분단과 정계의 분열로 인하여 민중들이 도탄에 처할 정도로 민족의 운명을 예측할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불교계는 민족의 위난 타개에 전위대가 되었던 전통을 계승하고, 암울한 민족 현실을 극복하는 것을 역사적 사명으로 인식하여, 그를 실천할 수 있는 대중불교의 실현으로 나아가자고 선언하였다. 이런 기본 방침하에서 총연맹은 다음과 같은 강령과 당면주장 10개조를 내세웠다. 이는 총연맹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 주기에 그 전체를 소개한다.

  강 령
  ― 우리는 현 교단을 혁신하여 대중불교(大衆佛敎) 실현을 기함
  ― 우리는 무아화합(無我和合)의 정신을 체(體)하여 민족통일 완수    를 기함
  ― 우리는 대자평등(大慈平等)의 이념에 즉(卽)하여 균등사회 건설을 기함

  당면주장 10개조
  1. 교도제(敎徒制)를 실현하여 대중불교를 수립하자.
  2. 사유토지(寺有土地)를 개혁하여 교도는 생업(生業)에 근로하자.
  3. 사찰을 정화하여 수행도량을 확립하자.
  4. 사설 포교당을 숙청하여 전법도량을 통일하자
  5. 일제 잔재인 계급독재의 교헌(敎憲)을 배격하자.
  6. 교도는 모든 기관에 있어서 권리와 의무를 균등히 하자.
  7. 매불적(賣佛的)인 법회와 의식을 철폐하자.
  8. 친일파와 교단 반역자를 타도하자.
  9. 교화운동에 전력하여 국가대업에 공헌하자.
  10. 불편부당을 맹지(盟旨)로 하여 민족통일을 기하자.

이러한 내용에서 총연맹의 노선, 지향이 명쾌하게 드러난다. 우선 당시 교단의 배격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교도제(수행승 중심) 실천, 사찰 토지의 개혁, 사찰 정화, 교도의 평등 등에서 보이듯 진보적 불교혁신론을 주장하였다. 나아가서는 민족통일 완수, 균등사회 건설, 국가대업에 공헌, 친일파 타도 등 불교 내적인 범위를 넘어서는 정치적인 성격도 드러냈다.

요컨대 단순 진보에서 한발 더 나아간 급진적인 노선이었다.
총연맹이 이렇듯이 급진적인 노선임을 분명히 하자, 교단 집행부에서는 총연맹의 주장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우선 총연맹의 행보를 당돌, 경망하다고 보고 기존 교단의 비판에 대해서는 어불성설이라고 개진하며, 노선에 대해서는 배후 의심, 이북불교의 모방, 적색 폭력단 등으로 설명하였다.

이렇게 교단과 총연맹의 입장은 극을 달렸다. 이질적, 극단적인 갈등은 1947년 5월, 사부대중 천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된 전국불교도대회에서 정점에 달하였다. 그러나 이 대회에서도 양측의 입장은 조율, 타협되지 않았다. 마침내 총연맹은 교단과 결별, 새로운 교단의 창설에 나섰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총연맹을 계승한 전국불교도총연맹(全國佛敎徒總聯盟)이었고, 그 기반에서 나온 혁신교단이 조선불교총본원(朝鮮佛敎總本院)이었다. 불교혁신을 둘러싼 이 같은 갈등, 대립, 분열은 교단의 분열을 가져왔다. 그런데 불교혁신 단체는 교단을 창립하면서 더욱더 자신들의 색채를 분명히 하였다.

대중불교의 건설은 현실의 요구요 팔백만 신도와 칠천 승려들의 역사적 사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실한 수도승니를 중심으로 하고 광범위한 청신 남녀교도를 토대로 하여 만인이 공명하고 대중이 지지하여 민족이 요구하는 대중불교를 건설하려 한다. 유폐되었던 문호를 개방하고 농단되었던 교권을 시정하여 석가의 정신을 구현하려 한다.

이렇게 혁신단체는 자신들의 입장을 분명하였다. 그리고 이전 혁신총연맹의 노선을 약간 수정한 강령과 당면주장을 내세웠다. 그 전모는 다음과 같다.


      강령
      ― 우리는 대중불교를 실시하여 조선문화 발양을 기함
      ― 우리는 무아화합의 정신을 체하야 민족통일 완수를 기함
      ― 우리는 대자평등의 이념에 즉하야 균등사회 건설을 기함

      당면 주장
      1. 진정한 수도자만이 승니(僧尼)의 권한을 향유케 한다.
      2. 수계 수도를 불긍(不肯)하는 승니는 교도(敎徒)로 전입하여 수도자를 옹호하자.
      3. 교도는 법계에 따라 포교(布敎), 교정(敎政), 사무(寺務)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가지게 하자.
      4. 조선 민족의 생활 원리 될 교학(敎學)의 체계를 확립하자.
      5. 수도 전법도량 이외의 사찰에는 교육 보건 사회사업 등 기관을 부설하자.
      6. 승니 및 교도는 고사조(古祖師)의 성훈(誠訓)에 의하여 근로 생활하면서 수도하자.
      7. 허위무실한 현행 승적과 법계를 개정하자.
      8. 법요 의식을 간소 엄숙히 하자.
      9. 불교대학, 불교중학, 승니(尼僧)학교를 강화하자.
      10. 교단 반역자를 숙청하자.

여기에서 총연맹 당시의 강령, 당면주장보다 혁신 인사들의 의중을 더욱 드러냈다. 그러자 기존 교단은 혁신단체의 행보를 극단의 조치, 무도의한 무애교심, 이북불교화 준비 단계, 대중불교 혁명, 이북불교의 모방 등으로 보았다. 이렇듯이 교단과 혁신단체는 팽팽한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긴장 관계가 견지되는 가운데 하나의 돌발 변수가 있었으니 그는 1947년 6월 25일 미소공동위원회에 제출한 답신서였다. 교단(총무원)과 혁신단체(총본원)는 이 위원회에 함께 참여하였는데, 그 위원회의 6호 성명서(추후 임시정부 수립에 참고하는 이른바 자문에 대한 답신서)에 대한 응답에서 혁신단체는 무상몰수, 무상분배라는 문건을 제출하였다.

교단은 유상몰수, 유상분배라는 의견을 제출하였음은 물론이었다. 그러자 총본원, 혁신단체 내부에서 토지개혁에 대한 답신서의 내용을 놓고 의견 충돌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사태는 혁신단체 내부의 보수파가 반발하면서 자체 내 혼선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자 일부 승려들은 총연맹과 총본원에서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총연맹은 미군정의 보수적인 정치구도에 영향, 위축을 받으면서, 내적으로는 토지개혁 노선에서 야기된 혼미를 겪었다.

 3. 승려가 북한으로 간 이유

해방공간에서 불교혁신 활동을 치열하게 전개하던 혁신단체인 전국불교도총연맹(조선불교총본원)은 1948년 중반에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였다. 그는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에 제출한 토지개혁에 대한 답신서의 내용을 둘러싸고 제기된 연맹 내부의 갈등이었다. 여기에서 노선 혼미를 더욱 부채질한 것은 이른바 김구의 북행에 동참이었다. 1948년 4월 19~26일,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에 참가하였던 것이다.

이 회의는 당시 교착 상태에 빠진 통일과 남북한 동시선거 문제를 남북 당사자 간에 해결하려는 것에서 출발하였다. 그래서 남측에서는 김구, 김규식이 북한으로 올라갔고 북한에서는 김일성과 김두봉이 참가하여 세칭 4김회담(남북협상)도 이루어졌다. 이 회의에는 남북의 56개 정당, 660여 명의 사회단체 대표가 참여하였다. 바로 이 회의에 혁신단체인 불교청년당과 전국불교도총연맹의 대표자도 동참하였던 것이다.

김구의 북행에 동참한 불교계 인사(10여 명?)들은 회의 종료 후, 일부는 그대로 잔류하고, 일부는 월남하였다. 그런데 북한에 잔류한 혁신승려와 남으로 내려왔던 승려 중 일부가 재차 월북하여 동년 6월 29일부터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와 동년 8월 24~25일 해주에서 개최된 남조선 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하였다. 이런 일련의 행적은 남한에 근거를 두고 불교혁신 활동을 강력하게 전개하였던 혁신단체들의 성격을 말하는 기준점으로 활용될 소지가 다분한 것이다.

 지금껏 보수적인 교단에서 의심하였던 노선의 의심을 확인해 주는 것으로 고착되었다. 즉 이북불교 노선, 사회주의자로 낙인 받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교단 집행부는 혁신단체 및 혁신 승려들을 사회주의 노선에 경도되었다고 총공격을 가하였다. 그 결과 불교혁신의 승려들은 좌익으로 고발당하고, 관련 단체는 간판을 내리게 되었다. 이 사정은 이래의 글에서 찾을 수 있다.

 일이 이쯤 되고 볼 때 젊은 층의 혁신 세력은 모두 빨갱이들이라고 몰아붙혀 드디어 관권이 개입하게 되었으며 나중에 가서는 체포령까지 내릴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을 주동하였던 56명의 인물들은 월북을 하게 되었으며 일단 한국불교는 평온을 되찾은 셈이었다.

이런 배경하에서 북한으로 56명 가량의 혁신승려가 6·25 발발 이전에 북한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면 김구의 북행에 동참한 혁신승려는 누구였고, 그 인원은 몇 명이었는가. 이에 대해서는 필자는 정치 방면의 문건 기록에서는 그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를 찾지 못하였다.

단지, 관련 승려들의 증언에서 몇 명이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 몇 명의 혁신 승려에 대한 인적 사항은 불교계 내부의 인사에 증언에 의해서 추정이 가능하다. 우선 당시 선학원에 거주하며 불교혁신 활동을 하면서 불교혁신총연맹에 가담하였던 강석주의 관련 기고문과 회고가 참고된다.

강석주는 1989년에 쓴 글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또 이때는 이승만 씨가 단독정부를 수립하려 했고, 김구 선생 등은 이를 반대하며 남북협상을 하자고 했다. 이때 두 번인가 남북협상이 있었는데 불교인(장상봉, 곽서순, 이부열, 김용담, 김해진) 몇몇이 김구 선생과 함께 평양으로 가는 바람에 혁신총연맹은 완전히 좌익으로 몰리어 활동이 중지되고 말았다. 그래서 사변 이후에는 별다른 활동이나 진전이 없었다.

장상봉, 곽서순, 이부열, 김용담, 김해진 등 5명이라고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의 증언에서는 그에 대한 정보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다. 이는 연령의 증가, 기억의 쇠약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전제에서 강석주의 증언을 들어보자.

이북 출신인 용담 스님은 김구 선생이 사회단체 연석회의 한다고 북으로 갔을 때 따라가서 돌아오지 않았죠. 그때 스님들 몇 분이 동행했던 것으로 기억해요.

스님들이 북쪽에 간 것은 김구 선생이 사회단체 연석회의 한다고 갔을 때 따라갔어요. 갈 때 우리 스님들 몇 사람이 갔지. 그때 가서 나오지 않은 이들이 있고, 왔다가 다시 간 사람들이 있었어. 대개 다 갔어. 혁신운동 한 사람들은 대개 간 셈이야. 가지 않은 사람이 극히 드물지. 안 간 사람은 몇 사람 안 돼. 아주 열렬한 이들은 다 갔어. 처음에는 정치 같은 것 이야기 안 하려고 하였는데 나중에는 토지개혁 문제로 정치색이 드러나게 되고 김구 선생 갈 때 그랬지. 김해진 스님이라고 개운사 스님이 있었는데 가만 보니 그이가 이론에 제일 밝더군. 나중에는 그이가 다 지도하다시피 했어.

이같이 강석주는 당시를 회고하는 증언에서 그 대상 승려를 ‘몇 분’ ‘몇 사람’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숫자가 많았음을 암시하였다. 그리고 그 대상자로 김용담과 김해진을 우선 거론하면서 관련 인물은 장상봉, 곽서순, 이부열 등이었다고 했다. 강석주의 증언 내용은 해방공간, 6·25 직후 불교청년당의 당원이었던 이외윤의 증언에서도 확인된다.

동출 스님: 6·25를 전후하여 불교계에서도 월북한 인물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떠 분들이 가셨나요?

이외윤: 장상봉, 이부열, 곽서순 등 실력도 있고 똑똑한 분인데 여기 있었으면 불교에 도움이 되었을 텐데.

이상과 같은 증언에서 북으로 간 승려로 현재 확인이 된 대상자는 김용담, 김해진, 장상봉, 곽서순, 이부열 등 5명이다. 지금까지 나온 내용을 종합하면 김구의 북행에 동참하여 북으로 올라간 승려는 5명 이상으로 볼 수 있다. 그중에서 장상봉과 김해진은 북행하였다가 남한으로 내려왔다는 기록이 있다.

지난 사월 십구일부터 삼천만 조선민족과 세계의 주목 아래 평양에서 열린 력사적인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남조선의 불교를 대표하여 전국불교도총연맹에서는 장상봉, 불교청년당에서는 김해진 양사가 각각 참가하여 그 임무를 마치고 무사히 돌아왔다.

그렇다면 장상봉과 김해진을 제외한 그 외의 승려는 북한에 계속해서 체류하였는가? 한편, 북한에 갔던 대상자 중에서 2차 대표자회의와 해주회의에 참석하였는지를 말해주는 1차 문건 자료를 필자는 찾지 못하였다. 다만, 해주회의에 참석한 임정달을 1995년에 면담, 취재한 〈불교신문〉 기자였던 조병활의 보도기사에 그 단서가 나온다. 다음에 소개하는 조병활의 기사는 임정달의 증언을 근거로 한 것으로 보여 사료적 가치가 높다.

이 중 전국불교도총연맹 대표자인 개운사의 김해진 스님과 장상봉 스님 등 5명의 스님은 남하하지 않고 북에 잔류하였다. (중략) 연석회의와 함께 불교계 대표들은 48년 8월 21일 해주에서 열린 인민대표자대회에도 7명이 참석했다. 남측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3백 60명이 선출된 이 회의에 불교계 인사로는 김용담, 김해진, 장상봉, 임재영 스님 등이 뽑혔다. 화산 스님은 “민족주의 입장에서 해주대회에 참석했다”며 이 해주대회에서는 북측이 사전 계획에 따라 회의를 진행시키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고 밝혔다.

위의 글에 의하면, 김구의 북행이 종료 후에도 북한에 잔류한 승려는 김해진, 장상봉을 포함하여 5명이라고 하였는데 필자가 추정하건대 추가의 3명은 김용담, 곽서순, 이부열로 보인다. 그리고 해주회의에 참석한 불교계 인사는 7명이었는데, 그 구체적인 대상자의 전모를 즉각적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 회의에 김용담, 김해진, 장상봉, 임재영은 참가한 것은 분명하다고 보인다.

여타 3명은 누구인가. 우선 여성 불교운동자인 우봉운이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북한에 잔류하였던 곽서순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해방공간에서 불교학생동맹위원장을 맡았던 이외윤은 잔여의 추가 1인과 관련해서 그 대상자는 승려이면서 동국대 학생으로, 불교학생동맹의 맹원이었던 김호진이라는 글을 남겼다.

이렇듯 〈녹원〉의 편집을 맡아 한 김호진 씨는 동대 혁신 세력의 책임 역할을 맡아서 했다. 언제인가 황해도 해주에서 조선인민회의를 개최한다고 하여 학생동맹 앞으로 대표 2인이 참석해 달라는 연락이 왔는데 나는 이를 거절하고 김호진 씨 혼자만 참석하였으며, 사변 당시 그는 곽서순이니 이부열 씨 등과 월북하였다가 월남하여 용주사에 있었는데, 대학생이라는 계급에 의해 그는 우익으로 변해 있었다.

이 같은 이외윤의 회고에 의해 그는 김호진이 분명하다. 즉 해주회의에서 혁신승려 7명이 남한을 대표하는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런데 해주회의에 참석하였던 혁신승려들이 계속해서 북한에 잔류하였는지, 혹은 몇 명은 남으로 내려왔는지는 알 수 없는 형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해방공간에서 불교혁신 활동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던 승려들은 불교혁신 단체를 조직하고, 나아가서는 독자적인 교단 구성을 하였다. 그러다가 토지개혁 문제로 내분을 겪었는데, 그때 마침 추진된 김구의 북행에 5명 이상(10여 명?)이 동참하였다. 그런데 그들 중 일부는 김구를 따라서 남하하지 않고, 북한에 잔류하다가 해주회의까지 참석하였다. 혁신승려 7명이 참가한 해주회의에서는 남측을 대표하는 인민대의원으로 혁신승려가 선출되었다.

이런 행보를 보면, 북으로 올라간 혁신 계열의 핵심 승려들은 불교혁신과 함께 진보적인 통일까지 염두에 둔 혁신 인사였음은 분명하였다. 이런 연유로 1948년 8월, 정부 수립 이후에는 남한, 서울에서 존립할 수 없었다. 노선 및 이념이 좌익이라고 보수적인 총무원에 의해 경찰에 고발당함과 동시에 그 물적 기반을 빼앗기면서 간판까지 내리게 되었음이 그를 예증한다. 이런 구도에서 혁신승려들은 생존, 정체성 보존을 위해 북한에 잔류하고, 혹은 재차 북한으로 넘어갔던 것이다.

4. 6·25 직후 서울에서의 불교혁신 활동

6·25 전쟁이 일어나자, 그 이전에 월북하였던 혁신 계열 승려들은 대부분 서울로 왔다. 그들은 그 이전에 고심하고 추진했던 불교혁신을 다시 추진하려고 다각적 활동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서울에 모인 혁신승려들의 일부는 전쟁이 나기 1개월 전에 온 경우도 있고, 서울의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나온 승려와 북한에서 인민군을 따라온 경우도 있었다.

혁신승려들은 불교의 상징 사찰이었던 조계사(당시는 태고사)를 접수하고 총무원을 관장하였다. 이로부터 90여 일 동안 서울의 불교계를 관리하였다. 그러나 총무원을 접수하고 난 다음, 어떻게 활동을 했는지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런데 1950년 6월 30일 서울시 인민위원회의 고시 제3호에 의거하여 단체 등록을 하기 위해 동년 7월 4일에 신고를 필하였던 대상 중에 불교 관련 단체가 있어 주목된다. 그 단체는 남조선불교도연맹(南朝鮮佛敎徒聯盟)이다. 이 신고는 연맹의 위원장이었던 김용담을 대신하여 곽서순이 했다. 이 연맹의 본부는 서울시 중구 충무로 3가 50번지였는데, 연맹은 변화된 현실에서의 불교도들의 중앙 조직체로 보인다. 필자는 이 연맹이 서울시 인민위원회에 제출하였던 관련 문건을 사본으로 입수해 보관하고 있다.

이 연맹의 간부 명단을 먼저 제시한다. 이런 자료를 통하여 연맹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남조선불교도연맹 최고위원 및 부서 명부
  최고위원
  김용담 곽서순 장상봉 김만기 김해진 백운경 이등운 조명기 조복순
  부서위원
  위원장      김용담
  총무위원   곽서순
  선전위원   장상봉
  교화위원   김만기
  세포위원   김해진
  조사위원   백운경
  재정위원   이등운

이 명단에서 북행을 하였고, 해주회의에 참석하였던 김용담, 김해진, 장상봉, 곽서순이 우선 주목된다. 이들은 남한의 불교혁신총연맹의 핵심 승려였다. 그리고 김만기, 백운경, 이등운, 조명기, 조복순 등이 새롭게 추가되었다. 이들 9명이 조선불교도연맹의 핵심 인사라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이 연맹의 성격, 노선을 알 수 있는 강령과 당면주장을 소개한다.

  강령
  ― 우리는 현 교단을 개혁하여 대중불교 실현을 기함
  ― 우리는 무아화합의 정신을 체하여 민족통일 완수를 기함
  ― 우리는 대자평등의 이념에 즉하여 균등사회 건설을 기함
 
  당면주장 10개조
  1. 교도제(敎徒制)를 실현하여 대중불교를 수립하자.
  2. 사유토지(寺有土地)를 개혁하여 교도는 생업(生業)에 근로하자.
  3. 사찰을 정화하여 수행도량을 확립하자.
  4. 사설 포교당을 숙청하여 전법도량을 통일하자
  5. 일제 잔재인 특권독재의 교헌(敎憲)을 배격하자.
  6. 교도는 모든 기관에 있어서 권리와 의무를 균등히 향유하자.
  7. 매불적(賣佛的)인 법회와 의식을 철폐하자.
  8. 친일파와 교단 반역자를 타도하자.
  9. 교화운동에 전력하여 국가대업에 공헌하자.
  10. 화합정신을 맹지(盟旨)로 하여 민족통일을 기하자.

이 같은 강령, 당면주장을 보면 혁신승려들이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서울에서 불교혁신 활동을 하면서 내세운 것과 거의 같다. 즉 불교혁신총연맹의 강령과 당면주장의 일부 문구만 바뀌었을 뿐이다. 이를 보면 혁신 인사들의 지향과 행보를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연맹의 규약의 제4조에는 연맹의 강령을 찬성하는 단체 또는 지방 연맹을 조직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지방 조직을 둘 수 있으며, 동시에 연맹의 하부 단체가 있음을 예증하는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연맹과 동일하게 서울시 인민위원회에 등록을 신고한 조선불교청년당(朝鮮佛敎靑年黨)의 관련 문건이 있는데, 여기에도 강령과 규약이 전한다. 조선불교청년당도 그 소재지를 연맹과 동일한 주소에 두었는데, 중앙위원회 위원장인 김만기의 이름으로 신고를 7월 4일자로 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청년당의 위원과 강령을 소개한다.

  위원
  김해진 김만기 정태일 김길선 김경구 김창호 배은선 임정달 우정상  
  이외윤 임재영
 
  강령
  ― 조선불교의 혁명
  ― 교단내 미신적 요소의 배제
  ― 시대에 적응한 교학 수립
  ― 신앙 자유의 확보
  ― 사찰 토지 소유의 반대
  ― 교단 반역자, 민족반역자 숙청
  ― 조국 완전 자주독립

이 내용에 의하면, 우선 위원 명단에서 김해진과 김만기가 우선 주목된다. 이들은 남조선불교도연맹에서도 최고위원과 부서위원으로 나온 승려이다. 그렇다면 자연 이들이 청년당의 핵심 인물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타 인물들은 해방공간에서 불교청년운동 및 불교혁신운동을 한 대상자로 보인다. 나아가서 강령의 성격도 남조선불교도연맹의 강령과 동질적이라고 하겠다.

이런 점에서 조선불교청년당은 남조선불교도연맹의 예하 조직체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상과 같은 남조선불교도연맹과 조선불교청년당은 서울을 근거지로 하여 90일 동안 무엇을 하였는가. 그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강조하고, 심혈을 기울였던 불교혁신을 위해서 어떤 활동을 하였는가. 그 전모를 알 수 없기에 단언할 수 없지만 90일이라는 짧은 기간이라는 한계로 큰 활동을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서울에 있으면서 그를 지켜본 당사자들의 회고를 참고하자. 우선 불교청년당 당원이었던 이외윤의 증언을 소개한다.

그 양반(김해진―필자 주)이 주도가 되어서 청년들을 모아 일을 했죠. 그때도 얼마 동안 우리 불교운동 한다고 활동했어요. 의용군 간 사람도 있었어요. 가라고 했는데 안 간 사람도 있고.

즉, 남조선불교도연맹과 조선불교청년당의 간부를 했던 김해진이 최일선에서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불교운동 즉 불교혁신 활동을 하였으며, 의용군에 참여한 것도 나왔다. 다음으로는 학생불교동맹의 부위원장을 역임한 김지복의 증언을 소개한다.

나는 정식으로 가입을 한다든지 하지는 않았지만 완장은 붙이고 다녔어요. 1950년 6월 28일, 북한군이 서울에 입성을 했는데 29일날 김해진 씨가 우리를 불러들이더라고요. 우리가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젊으니까 자기들은 나서지 못하고 우리를 앞에 내세우려는 것이었지. 일부 간 사람도 있고 안 간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전에 적음 스님이 역경원을 했던 그 자리를 본부로 정하고 그곳으로 모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각심사에 있었는데 식량을 서울시에서 배급을 받고 있었는데 전쟁이 나자 배급을 받을 수 없었죠. 먹고살기가 어려울 때인데 그 본부에 가니까 식량이 넉넉했죠. 그리고 우리 젊은 사람들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다른 청년단체가 그곳을 넘보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웅거를 했지요. 남불련에 정식으로 가입하라는 말도 없었어요. 경황이 없었지요. 얼마 후 불교단체를 대표해서 의용군으로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

6·25 사변이 난 뒤에 김해진이 불교학생회를 소집해서 세뇌공작을 했습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으니까 김해진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와 있었다고 하더군요. 우리를 모아 놓고 하는 이야기가 얼마 안 있으면 부산까지 점령이 되는데 불교학생들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혁명과업에 동참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본부에서 보고대회를 했는데 김해진 씨가 누구 누구 나와서 보고를 하라고 지명을 하더라고요. 그때 우정상과 이외윤은 증인처럼 앉아 있고 그 밑에 불교학생회 간부 몇 명을 지명을 해서 보고를 하라고 했습니다. 나도 지명을 당했죠. 그런데 얼마 안 있다가 지령이 내려왔는데 의용군으로 가거라 하는 겁니다. 보고대회에 나왔던 이들이 중심이 되어서 의용군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내 나이가 31살인데 의용군에 뽑혔습니다.

이런 김지복의 증언도 앞의 이외윤의 증언과 흡사하다. 다만 그 내용이 보다 상세하다. 이런 회고를 분석하면 연맹과 청년당은 불교혁신 활동보다는 전쟁에 협조하는 것이 우선이었다고 보인다. 전쟁이라는 긴박한 상황에서, 부산까지 진격하려는 북한군의 최우선 방침이 구현되는 그런 현실에서 불교혁신을 추진할 여건이 아니었다. 그래서 사상 교육, 변화된 현실의 인정 및 협조 등을 우선하는 사업이 주류를 이루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당시 조계사에서의 활동을 서술한 아래의 글이 필자의 주목을 끈다.

한편 이들은 서울에 남아 있던 승려와 신도를 대상으로 독보회(獨報會)를 조직하여 매일 밤 태고사 종무소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사상 교양과 불교도의 역할에 대한 토론, 공산주의와 북한을 찬양하는 노래를 가르치는 선전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또한 전쟁 지원 활동과 생산불교를 명분으로 인근 민가에서 재봉틀을 가져와 종무소에 피복공장을 차려 전선으로 보낼 군복을 만들기도 하였다. 특히 태고사 거주승 중에 이러한 활동에 적극 가담을 했던 승려로는 김필제(金必濟― 봉선사 승려) 등이 있었다. 북한군 점령하의 조계사는 종교적 기능은 상실한 채 공산주의에 대한 선전 선동의 장소와 전시 지원 활동만이 있는 상태였다.

이 글에 의하면, 당시 혁신 계열의 승려들은 자신들이 내세운 불교혁신 활동보다는 이 같은 전쟁 협조, 공산주의 선전, 군수지원 활동을 주로 하였음이 분명하다.

5. 불교혁신론의 성격

지금까지 해방공간 불교혁신론의 성격과 흐름을 살피고, 혁신승려 중에서 급진적인 승려들의 일부가 1948년 4월의 김구 북행에 동참하였으나, 그들 중 일부는 북한에 잔류하면서 해주회의에 참석하면서 진보 노선을 걸었는데, 이들이 6·25 전쟁이 발발한 직후 서울에 머물면서 남조선불교도연맹과 조선불교청년당을 결성하여 불교혁신을 지향하였음을 살폈다. 그러나 조계사에서의 90일간에는 불교혁신보다는 전쟁 협조, 전쟁 지원, 사상 교육 등을 위주로 활동하였다.

그렇지만 이 같은 행적을 갖고 있는 승려들의 성격, 그리고 그들이 주장하였던 불교혁신론의 성격, 사상성 등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가 아직 남아 있다. 이는 아주 미묘한 문제이다. 이런 주제와 내용은 별도의 고찰로 분석하는 것이 온당하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그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몇 가지 내용만을 살피려고 한다.

그 내용의 첫 번째는 불교혁신론에 이념이 개입되었는가이다. 여기에서 이념이라 함은 불교 즉 종교의 범위를 넘어선 것으로 요컨대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가 개입되었는가이다. 이 문제는 해방공간 당시부터 첨예한 논란이 되었으며, 혁신론자들이 김구의 북행에 동참한 이후 그리고 6·25를 겪으면서 더욱더 증폭되었다. 이는 단순하게 접근할 수 없는 것이기에 여기에서는 그에 대한 참고 문건을 제시한다.

우선 중도적인 입장이 있다. 해방공간 당시 총무원과 총본원으로 보수, 진보 간의 별도의 조직체를 구성해 있었을 때에도 분열과 대립은 확실한 좌우의 대립이 아니라 노소(老少)의 알륵이라는 견해가 있었다.

실지(實地)에 있어 좌(左)로 지목받고 있는 혁신파의 거개(擧皆) 청년대중도 어느 모로 보든지 열렬한 종교개혁에 뜻을 둔 청년들이요 결코 수시로 좌라고 할 만한 자신이라든가 이론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항상 우(右)로 자처하고 있으며 다만 보수파의 너머나 독재적인 불만을 가지고 좀 더 참신한 시대불교를 건설해 보자는 데에서 지나지 못한다.

즉, 종교개혁에 뜻을 둔 그룹이지, 결코 좌에 경도될 수 없는 부류라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혁신승려들은 이념과는 무관하였다는 이해를 대변하는 강석주와 김어수의 입장을 들어보자.

그때 교육대학 출신 청년들이 불교혁신을 하자고들 선학원에 모여들었어요. 동대 총장 하던 조명기 씨, 정두석 씨 또 여러 젊은이들이 열렬했어요. 불교를 잘해 보자는 뜻을 같이했던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의견도 교환하고 하다가 6·25 사변이 났어요. 다 흩어지고 일부는 이북으로 갔고, 회의 때 우리는 절대 정치에 간섭 안 하고, 불교 잘되도록 하는 데만 노력하자고 늘 그런 방향으로 얘기했어요.

옳게 말하자면 장상봉, 김용담, 곽서순, 김해진이 그때는 확실히 공산당이 아니었으나 그 뒤 6·25 직전 하도 탄압이 심하고 불교계에서는 난신적자(亂臣賊子)로 취급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공산당이 되어 월북한 것이 사실일는지 모르겠다.

불교혁신 계열에 관여하였던 강석주는 기본적으로 정치 배제라는 기본 틀을 갖고 회고에 임하였다. 즉 그는 정치 참여 배제, 불교혁신에 전력하자는 것이 끝까지 지켜졌다고 보기도 하였지만, 토지개혁 문제 이후로는 일부 승려들의 정치색이 드러났다고도 보았다. 그렇지만 강석주는 혁신파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혁신파의 정치색 배제, 순수성을 강조하는 입장이었다.

강석주, 김어수의 입장과는 다른 견해가 있다. 이는 토지개혁에 대한 이질적 노선의 대두, 김구 북행에 동참, 6·25 때 남하하여 남조선불교도연맹을 조직하는 순간순간에 점차 좌익으로 경도되었다는 인식과 유관한 것이다. 그는 혁명불교도동맹의 중앙위원이었던 조명기와 불교청년당 재정부장으로 혁신승려의 활동을 지켜본 안덕암의 증언이다.

조명기 : 아니 꼭 그렇게 볼 것도 아닙니다. 그때 교도제파의 핵심이던 김용담, 장상봉, 곽서순 등이 모두 좌익이었으니까. 한번은 장상봉과 곽서순이 오더니 “우리는 이북에 있다가 왔는데 거기 못 있겠습니다.” 이러는 거에요. 그래 잘 됐다 싶어 같이 일을 같이했지요. 그런데 얼마 후에 보니 그들은 과연 좌익이었어요. 토지개혁이니 뭐니 하는 문제가 날 때마다 펄펄 뛰면서 아주 과격했습니다. 그러니깐 저편에서는 우리 전체를 좌익으로 몰아붙일 만도 했지요. 어쨌든지 그때 몰려서 아주 혼이 났었습니다.

안덕암 : 그리고 장상봉이라든지 곽서순 같은 이들은 이북에 있다가 내려온 사람들이에요. 곽서순은 특히 이북서 인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까지 하던 사람이지요. 처음에는 거기가 싫어서 왔노라고 거짓말을 했지만 나중에 보니 과연 좌익이었어요.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할 때에도 토지개혁을 주장한 거라든지, 노골적으로 찬탁 선동을 한 거라든지, 하여간 일종의 푸락치 비슷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때 총무원 측에서 ‘청장년승려대회’ 쪽을 좌익으로 몰아 버린 것도 다 이들 때문입니다.

이렇게 조명기와 안덕암은 혁신 승려들을 좌익으로 단정하여 이해하였던 것이다. 이는 강석주의 이해와는 판이한 것이었다.

이 같은 전제하에서 필자의 해석은 유보한다. 다만 현재로서는 혁신승려들은 보수와 진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경계에 서 있었다고 본다. 그 경계의 접점을 굳이 언급하면 불교사회주의라고 표현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불교혁신만을 고민하지 않고 민족문제, 통일문제까지 고뇌한 진보적 민족주의자로 본다. 불교혁신론자들의 이런 성격을 분석함에 있어 참고할 수 있는 북한에 갔던 혁신승려들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김용담 : 수좌. 망월사 선원 종주, 선학원, 선리참구원 부이사장. 《선가구감》 번역, 해동역경원 부원장. 불교혁신총연맹 총무, 전국불교도총연맹 위원장, 남조선불교도연맹 최고위원 겸 위원장. 결혼. 한용운 상좌.

  장상봉 : 귀주사. 귀주사 강원, 중앙불전, 귀주사 포교당에서 야학, 구택대학 동양학과 졸. 조선불교 동경학우회 문교부 상무, 〈불교시보〉 함흥지국 통신기자. 불교문화연구원 설립해 문화운동. 혁명불교도동맹 중앙위원, 동국대 강사, 남조선불교도연맹 최고위원 겸 선전위원. 결혼.

  김해진 : 개운사. 혜화전문 졸업, 일본 고야산대학 졸업. 범어통. 불교청년당 위원, 〈불교신보〉 편집 겸 발행인, 동국대 강사,.경기교무원 교학국장. 남조선불교도연맹 최고위원, 조선불교 청년당 위원.

곽서순: 백담사. 일본대학 사학과 졸업. 《금강저》 발행인. 동국대 강사. 인제군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혁명불교도동맹 중앙위원, 불교혁신총연맹 서기. 국화여전 학과장, 총무원 포교분과위원, 건봉사 서울 포교사, 남조선불교도연맹 최고위원 겸 총무위원.

  이부열: 천은사. 중앙불전 졸업, 대정대학 종교학과. 중앙교무원 재무부장, 혁명불교도동맹 중앙위원. 국화여전 학감, 동국대 강사, 결혼.

  김운경: 봉선사. 화계사에서 농업진흥운동과 야학. 흥룡사 주지. 조선민족해방협력당에 협조하여 옥고. 경기 교무원 총무부장. 남조선불교도연맹 최고위원 겸 총무위원, 9·28 수복 시 북한으로 피난.

  임정달: 통도사, 상원사에서 수행. 일본 임제종전문대 유학, 성균관대 철학과 학생. 불교청년당 조직부장 및 선전부장, 전국불교도 대회 참가, 조선불교청년당 위원.

  김호진: 용주사, 혜화전문 중퇴하고 동국대 입학, 불교학생동맹 문화부장. 한독당 입당

북한(평양, 해주)에 갔었던 혁신 승려들의 이력에서 주요한 특징은 이들이 승려 중에서는 상층 지식인에 속한다는 것이다. 당시로서는 현대 불교 교육의 대명사인 중앙불전, 동국대, 일본 유학을 거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다음으로는 불교의 포교의식, 천양의식, 불교대중화에 관심을 갖고 그를 실천하였음이 주목된다. 그리고 남한에서는 혁명불교도동맹과 학생불교동맹 출신이었는데, 이들은 혁신총연맹과 불교도총연맹의 핵심 승려로 활동한 불교혁신의 주역이었다.

위에서 제시된 혁신승려들의 성향은 6·25 직전 월북하였다는 승려 56명의 전모를 함께 분석할 때 보다 선명하게 밝힐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의 사상, 지향을 살필 수 있는 글을 분석하는 입체적, 다면적 접근 작업이 요청된다.

6. 결어

맺는 말은 해방공간의 불교혁신론, 6·25 전쟁기의 불교혁신론으로 나타난 영향, 변화상을 제시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첫째, 불교의 근본, 지향을 논하면서 석가의 사상, 초기불교의 모습을 검토하는 문화적, 학문적 탐구가 나왔다. 다만 불교 내부의 갈등 구도, 이념을 둘러싼 갈등, 6·25 전쟁 등으로 심화 단계까지는 이르지는 못하였다.

둘째, 식민지 불교를 성찰하는 문화, 의식이 대두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승려 결혼 문제였는데, 이 문제는 결과적으로 불교정화로 연결되었다.

셋째, 불교 현대화의 방향과 노선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하였다. 그런데 불교 근대화에 대한 성찰이 없이 바로 현대화로 진입한 것은 일정한 문제점을 내포하였다.

넷째, 불교와 국가, 민족, 사회, 신도 등과의 접점, 관련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심화시켰다.

본 고찰에서 해방공간 불교혁신의 흐름에서부터 6·25 전쟁이 발발하던 무렵까지의 불교혁신론의 개요를 정리하여 보았다. 그러면서 그 초점으로는 전쟁 이전에 북으로 갔던 승려가 누구였으며, 전쟁이 나자 서울로 내려와서 불교혁신 활동을 하였던 승려가 누구였는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이에 대한 관련 내용의 대강은 정리하였지만, 그 혁신승려들의 정체와 성격, 혁신론의 이념과 불교 사상은 접근하지도 못하였는데, 이 점은 필자의 연구 과제로 남겨 둔다. ■

 

김광식
동국대 연구교수, 백담사 만해마을 연구실장. 건국대 사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원, 부천대 초빙교수 역임. 저서로 《한국근대불교사연구》 《한국근대불교의 현실인식》 《근현대불교의 재조명》 《우리가 만난 한용운》 《한국현대불교사연구》 《민족불교의 이상과 현실》 《한국 현대선의 지성사 탐구》 《춘성》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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