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소유의 에코소피

임헌영
1932년 해남에서 태어난 본명이 박재철인 이 “태고의 정적 속에서 산신령처럼 무료히 지내고 싶네.”라고 노래하며, “홀로 사는 일에 이골이 나서 이런 외떨어진 산중에서 홀로 지낼 때가 가장 홀가분하다. 내 삶이 가장 충만할 때가 바로 이런 격리된 환경에서다.”라는 법정은 “선승이며, 자연주의 사상가이고 실천가”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근엄하게 소개했지만 정작 법정 자신은 “석가모니와 같은 환경이었다면 적어도 우리 같은 사람은 출가를 하지 않았을 거”라며 인간미 풍기는 속내를 아래와 같이 털어놓는다.

“나답게 살기 위해서, 내 식대로 살기 위해서 집을 떠났노라고. 세상이 무상해서라거나 불교의 진리에 매혹되어서라거나 혹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라고는 말할 수 없다. 덧없는 게 어디 세상뿐인가. 출세간의 일도 덧없기야 마찬가지지. 그리고 불교의 진리가 무엇인지 조차 출가 전의 나는 알지 못했었다. 중생구제 운운은 현재 한국 불교도의 처지로서는 당치 않은 표현이다.”

스님이 되지 않았으면 목수가 됐을지도 모른다는 이 매력적인 노승은 선승만의 면모가 아닌 문학인으로서의 진솔성을 엿볼 수 있는 이런 요인 때문에 그의 대중적인 호소력엔 힘이 실리고 이런 문학 심포지엄의 화두에 오르게 만든다. 사실 그는 산속에 머물면서도 국내외의 온갖 명승지와 뛰어난 예술작품을 섭렵하는가 하면 속세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추악한 번뇌에도 참견하는 근면가이기도 하다.

국수와 빵, 표고버섯과 양배추, 맨 간장, 김치를 주식으로 삼았던 “내 식성은 촌놈에다 토종이라 마요네즈나 토마토케첩 같은 것은 비위가 상해 전혀 먹을 수가 없다. 먹는 음식으로써 그 사람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는데, 우리 같은 사람은 아무래도 보수적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이 노승. 지금은 해발 800미터의 강원도 고랭지에 머물며 〈중노릇하면서 빚만 많이 졌다〉든가, 〈중노릇이 어렵다〉고 호소하는 이 선사를 화두에 올린 까닭은 그의 방대한 저작에 나타난 생태사상을 살펴보기 위해서이다.

산문집 13권, 기행집 1권에다 경전 번역서 4권(필자가 읽은 것만)에 나타난 법정 선사의 생태사상은 그 글에 못지않게 ‘무소유’의 삶 자체라 하겠다. 소로가 고작 2년여의 월든 체재로 일약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것에 비하면 그 20배가 넘는 세월을 마하비라의 자이나 교도를 연상케 할 정도의 안빈낙도(安貧樂道)를 누린 이 선사야말로 생태사상의 활불이래도 그리 호들갑은 아닐 터이다.

법정에 따르면 “지금 환경위기 시계는 9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아사히글라스(일본의 유리 제조업체) 재단에서는 세계 각국의 환경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토대로 매년 환경위기 시간을 발표합니다. 환경위기 시계에서 6시부터 9시 사이는 ‘상당히 불안한’ 시간이고, 9시부터 12시는 ‘매우 불안한’ 시간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런 매우 불안한 시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올해 환경위기 시계가 가리킨 9시15분은 사상 최악이라고 합니다. 지구 환경파멸의 시간은 12시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2시간 45분 전입니다.” 라고 한다. 9시 15분을 구체적인 연대기로 표현하면 1980년대 초로, 이 시기를 전후해서 지구는 자정 능력을 상실했다는 게 법정의 주장이다. 지구 생태계의 이상적인 건강은 “자연이 낳은 이자”만으로 생존하는 것인데, 인간은 자연이 생산해 내는 것보다 20퍼센트나 더 많은 자원을 소비하게 되어버려 “원금까지 빼앗아 쓰고 있는 현실”이기에 “지금 지구가 신음”하고 있다는 게 법정의 진단이다.

토머스 로버트 맬서스나 존 스튜어트 밀에서 그 기원을 찾는 에코소피(Ecosophy)는 1962년 레이철 카슨의 《침묵의 봄》 출간으로 전환기를 맞은 후 초기 환경오염에 대한 비판과 표층생태론(Shallow ecology)을 거쳐 심층생태운동(Deep ecology movement)으로 확대 심화되면서 단순한 환경생태 문제가 아닌 인문. 사회과학의 통합 학문적인 지평으로 확산되어 정당정치로까지 승화되어 나타난다.

서양사상사에서는 에코소피가 이처럼 순차적으로 나타났지만 E. F.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미얀마 여행을 바탕 삼아 불교 경제학적인 접근을 시도하면서 동양적인 생태사상의 원형을 제시하는데, 여기에 따르면 문명사적인 진보의 시계(視界)는 흐릿해지는 대신 “인간의 얼굴을 한 기술”이 부각된다. 종교의 우열을 가리기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럴 필요도 없지만 승려로서의 법정은 《리그베다》의 “하나의 진리를 가지고 현자들은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종교적인 경계를 허문다.

법정 생태사상의 핵심어인 ‘무소유’가 발표된 것은 1971년으로 서양의 에코소피가 형성된 1973년 무렵이었는데, 서양의 생태론 연구처럼 단계를 거치지 않은 채 통합적인 개념에 이르도록 작용한 것은 불교 경전의 영향으로 볼 수밖에 없다. “지구환경의 위기도 따지고 보면 인간들의 끝없는 탐욕에 원인”이라는 근원적인 접근은 당연히 ‘무소유’ 철학으로 연계되는데, 이 순환 논리는 바로 불교적인 관점으로는 지극히 상식적이건만 여기에 강조점을 찍어 한 시대의 정신운동으로 격상시킨 공로는 역시 법정의 몫이다.

‘무소유 사상’은 법정의 전매특허처럼 굳어진 그의 생태계 사상만이 아닌 모든 사상의 결정체로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所由史)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무소유〉)는 데서 출발한다. 

법정에게 소유란 재산이나 자식 등 형상을 지닌 것에 대한 탐욕만이 아니라 인간의 고정관념(정신 상태)까지 포함한다. “묵은 것을 버리지 않고는 새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미 알려진 것들에서 자유로워져야 새로운 것을 찾아낼 수 있다. 나 자신만이 내 인생을 만들어가는 것이지 그 누구도 내 인생을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나는 보다 더 단순하고 소박하게, 그리고 없는 듯이 살고 싶다.”는 말은 빈 마음, 무심(無心)의 경지를 다루고 있다.

정신적인 소유욕, 자신이 지닌 선입견을 버리지 못한 채 낡은 정보와 지식의 편견에 사로잡혀 진리를 보지 못하는 예가 우리 주변에는 얼마나 많은가. 아니 그 편견이 빚은 그릇된 신념이 불러오는 사회적인 부조리 또한 얼마나 심각한가를 고려하면 무소유의 정신적인 측면을 그동안 너무 소홀히 다룬 느낌이다.

물질과 정신 모두가 텅 비기를 주장하는 무소유사상은 이상적인 에코소피의 세계이자 불교적인 인과응보에서의 탈피와 일치하는 경지를 뜻한다.
 
인간은 생태계적인 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들 인간의 행위가 곧 우리 환경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고, 그 행위는 결과로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이런 현상이 인과법칙이요, 우주의 조화다.

‘생태계적 순환’이란 물질적 소유만이 아니라 가족. 친지 등 사회적인 구성요인은 물론이고 그런 욕망을 부추기는 정신까지를 포함하기에 여기에 따라서 인과응보는 결정된다는 뜻에서 불교적 교리와 무소유는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법정이 즐겨 인용하는 간디의 “이 세상은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는 풍요롭지만, 우리의 탐욕을 위해서는 궁핍한 곳이다.”는 말은 무소유 사상의 원리를 꿰뚫는 촌철살인이다.

2. 생명사상의 의미―제비꽃은 제비꽃다워야

무소유의 정신을 확산시키기 위한 법정의 생태사상은 ‘생명’ 소중히 여기기에서 그 실천의 첫걸음을 시작한다. 생명사상은 그에게 (1)개성적인 존재 가치와, (2)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생명 유지의 오묘한 세계, (3)불교적인 연기설(緣起說)에 얽혀서 공생하는 존재, (4)다른 생명을 결코 죽여서는 안 되는 것으로 발전 전개된다.

꽃한테 왜 철 따라 피느냐고 따지면 과학적으로는 기온과 햇볕과 토양과 수분의 영향이라 하겠지만 “생명의 신비요, 자연현상”인 우주의 섭리가 아니고서는 그 해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법정의 해명인데, 이를 비과학적이라고 따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꽃이 피어나는 것은 생명의 신비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특성과 잠재력이 꽃으로 피어남으로써 그 빛깔과 향기와 모양이 둘레를 환하게 비춘다. 그 꽃은 자신이 지닌 특성대로 피어나야 한다. 만약 모란이 장미꽃을 닮으려고 하거나 매화가 벚꽃을 흉내 내려고 한다면, 그것은 모란과 매화의 비극일 뿐 아니라 둘레에 꼴불견이 되고 말 것이다.
 
이 말에는 생명에 대한 절대가치는 그 존재가 지닌 개성적인 특성을 지녀야만 한다는 점이 강조되어 있다. 달리 표현하면 “제비꽃은 제비꽃답게 피면 그만이지, 제비꽃이 핌으로써 봄의 들녘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하는 점은 제비꽃으로선 알 바가 아니라는 게 법정의 생명의 유일성으로 이건 그 존귀함을 나타낸다. 그래서 모든 꽃들이 저마다 그 꽃답게 피어날 때 그 꽃밭은 장엄한 교향악의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 지극한 자연의 순리로 나타난다.

그럼 자연의 순리란 무엇일까. 그는 단순한 흙과 나무와 물이 아닌 억지나 속임수 같은 게 용납이 될 수 없는 본래 갖추어진 그대로의 진실로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고 한다. 우주 삼라만상이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생명체(무생물도 생명체로 인식)끼리는 불교적인 연기설에 따라 얽혀있는데, 이를 법정선사는 〈유마경(維摩經)〉에 나오는 “중생이 앓으면 나도 앓는다.”는 상징어로 표현한다.

이웃이 앓기 때문에 나도 앓는다는 공생관계에서 함께 나누는 윤리는 세상을 존속시키는 연기(緣起)로 생태사상의 근간을 이룬다.“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는 《무문자설경(無問自說經)》이나, “연기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보고, 진리를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중아함(中阿含), “연기를 보는 자는 법(진리)을 보는 사람이고, 참으로 법을 보는 이는 나(如來)를 보는 사람이다”(《요본생사경(了本生死經)》)는 구절을 인용한 것은 다 생명의 존재 양식을 설파했기 때문이다.

연기설은 불교사상의 근본이자 법정의 무소유 사상의 핵이기도 하다. 그래서 생명이 아무리 독자적인 개체로 존재해도 라즈니쉬의 말처럼 “한 방울 물을 잘못 엎지를 때/ 우주 전체가 목마를 것이다/ 한 송이 꽃을 꺾는다면/ 그것은 우주의 한 부분을 꺾는 일/ 한 송이의 꽃을 피운다면/ 그것은 수만 개의 별을 반짝이게 함이어라/ 아, 이 세상 모든 것은 이처럼/ 서로서로 밀접한 관계로 이루어졌느니.”라는 상상적 공동체가 형성되며, 여기서 “인연으로 얽힌 생명이기에 살생을 금해야 한다”는 불살생의 원칙에 닿는다.

“이것이 있으니까 저것이 있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다.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도 소멸한다.”는 불교의 기본 사상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상호 의존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으로, 틱낫한 스님의 표현에 따르면 “그대가 시인이라면 종이 안에 떠다니는 구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구름이 없으면 비도 없을 것이고, 비가 없으면 나무들은 자라지 못한다. 나무가 없으면 종이를 만들 수 없다. 그러므로 구름은 종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로 형상화된다.

그런데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는 다 자기 분수에 따라 제자리에서 ‘우주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유독 사람만이 그 질서에서 이탈하여 화평을 파괴한다는 것이 법정의 통회(痛悔)며, 그 이유인 ‘소유욕’을 억제하려는 게 무소유의 생명사상이다. 더구나 인간들은 생존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즐기고자 죽이기도 하는데, “사냥이나 낚시가 바로 그것”이며, 이 밖에도 “여가를 이용한 놀이와 오락”들이 죽음을 즐기게 한다는 게 이 선사의 진단이다.

이처럼 무소유 사상에 이르지 못한 인간은 무자비해져 소유욕의 충족을 위하여 우주의 섭리를 거슬리며 그런 가운데서 에코소피의 파괴 현상은 늘어난다고 법정은 진단하면서 아래와 같이 논파한다.

“미국 소의 광우병이 어디서 왔습니까? 초식동물인 소에게 같은 소의 뼈와 내장을 사료로 먹이기 때문에 소가 미쳐 버린 것입니다. (……) 만일 사람에게도 사람의 시체를 먹게 한다면 미쳐 버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법정은 다시 불살생의 원칙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한쪽이 약하다고 해서 죽여야 한다는 법은 없다. 가령 입장을 바꾸어, 사람보다 훨씬 교활하고 힘센 짐승이 그의 식욕을 채우기 위해, 혹은 그의 손버릇 때문에 우리들의 귀여운 자녀들을 앗아간다고 생각해 보라. 우리는 얼마나 원통하고 분할 것인가.

목숨은 어떤 수단이 될 수 없다면서 그는 생명 그 자체가 온전한 목적이며 하나밖에 없는 절대가치라고 강조한다. 여기에는 다른 동물이 아닌 인간 그 자체에 의한 인간의 죽음(희생)도 포함되는 정도가 아니라 가장 큰 죄악으로 치부된다. 어떤 명분으로도 생명에 대한 약탈과 박해는 죄악이라는 사상이 법정의 기본 사상인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인간의 사상과 행동의 자유권 억압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살려고 하는 “생명을 해치거나 괴롭히는 일은 악덕 중에서도 으뜸가는 악덕”이며, 여기서 생명이란 “생물을 포함한 모든 존재”를 뜻하며 온갖 삼라만상과 생물과 무생물이 서로 의지해 끝없이 주고받으면서 우주적인 질서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3. 자연―국토와 농업 문제

모든 존재는 선하든 악하든 그 자체가 자연의 일부라는 사상은 에코소피의 소중한 이론적 결실이지만 아시아문화권에서는 상식처럼 굳어진 진부한 논리이기도 하다. 생태론이란 좁은 의미로는 자연을, 넓은 의미로는 사회와 정치 전반을 다루는 것으로 분리 접근하는 자세는 편의상으로는 좋겠지만 진정한 에코소피의 사상으로 본다면 너무나 당연한 하나의 과제를 둘로 나누는 번잡함으로 비췬다.

법정에게 자연이란 인체 그 자체의 확대이자 우주의 질서를 알려주는 삶의 교사에 다름 아니라는 아시아적인 지혜에 닿아 있다. “대지는 모든 중생들의 뿌리다.”라는 말이나,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우리 각자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내적 현상의 그림자다.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이 세상의 상태”라는 말은 서양과는 다른 자연관의 일단이다. 물론 서양에도 이런 자연관이 없는 건 아니라면서 다시 선사는 아래와 같은 삽화를 소개한다.
 
백인 추장(미국의 대통령)이 자기들에게 땅을 팔라고 하는 말에, “어떻게 우리가 공기를 사고팔 수 있단 말인가. 대지의 따뜻함을 어떻게 사고판단 말인가. 우리로선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다. 부드러운 공기와 재잘거리는 시냇물을 우리가 어떻게 소유할 수 있으며, 또한 소유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우리로부터 사들이겠단 말인가.”라고 항변한 시애틀 추장의 그 유명한 연설문을 비롯하여, 여러 부족의 추장들이 문명사회에 던진 대지와 인간의 관계를 역설한 글들로 엮여 있다.

자신의 육체를 팔 수 없듯이 대지를 팔 수 없다는 인간과 자연의 일체감은 가장 낡은 상식이면서도 가장 진보적인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는 에코소피의 자연관일 것이다. 그래서 “자연은 부처나 예수, 모하메드나 간디보다도 더 위대한 스승이다. 왜냐하면 그들도 자연의 제자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신앙의 차원을 넘어선 우주의 경전에 가깝다.

“자연과 인간은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로 회복되어야 한다.”거나, “자연은 우리 인간에게 영원한 모성(母性)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교사다.”란 말이 주는 교훈성은 진부하지만 거듭 강조할 수밖에 없는 에코소피의 기본인데 여기서 법정은 다시 인과율을 강조한다.
 
인간의 생활은 생태계적인 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 인간의 행위가 곧 자연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고, 그 행위는 다시 결과로써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이런 현상이 인과(因果)의 법칙이고 우주질서다.
법정의 글에서 인용 빈도수가 가장 높은 건 불경 외에 인디언의 명언들인데 그중 가장 빛나는 건 자연과 인간의 일체화 내지 교감을 그린 대목이다. 체로키 족 추장 ‘구르는 천둥’의 충고는 경청할 만한 명언이다.

 “지구는 살아 있는 하나의 생명체다. 지구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의 의지를 가진, 보다 높은 차원의 인격체다. 따라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할 때가 있고 병들 때가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소중하게 여기듯이 지구도 마찬가지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지구에 상처를 주는 것은 곧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며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가하는 것은 곧 지구에게 상처를 가하는 일이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서 이 추장은 아래와 같이 경고한다.
 
인간이 한 장소를 더럽히면 그 더러움은 전체로 퍼진다. 마치 암세포가 온몸으로 번지는 것과 같다. 대지는 지금 병들어 있다. 인간들이 대지를 너무 잘못 대했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많은 문제가 일어날 것이다. 가까운 장애에 큰 자연재해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런 현상은 대지가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다. 이 대지 위에 세워진 많은 것들은 대지에 속한 것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신체에 침투한 병균처럼 대지에게는 참을 수 없는 이물질들이다. 당신들은 아직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머지않아 대지는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시도로 크게 몸을 뒤흔들 것이다.

이와 같은 지구 전체에 대한 에코소피적인 우려는 이 작가로 하여금 구체적인 우리 국토와 농업 문제로 그 화두를 옮겨간다. 국토란 정복의 대상이 아닌 보호의 주체임은 이미 공감하는 개념으로 이렇게 정리한다.

국토란 무엇인가. 그냥 있는 땅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걸친 삶의 터전이다.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이 아득한 그 옛적부터 삶을 이루어 온 땅, 우리의 육친과 친구와 사랑하는 사람들의 피와 살이 녹아든 땅, 수많은 영혼들이 쉬고 있는 성스러운 대지다. 그러니 국토가 더럽혀져 있다는 것은 우리 조상의 넋을 짓밟고 있다는 뜻이 된다. 우리의 현상은 곧 우리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어 법정은 ‘자연보호’ 운운하면서 도리어 국토를 파괴하는 한국적 현실에 대하여 준열한 비판을 가하는데 그건 대개 지난 시기의 독재정권에 대한 비판과 그 맥을 함께 한다. 본래 있는 그대로를 놔두는 게 최선책인데 보호한답시고 결과적으로 파괴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그의 직격탄은 바로 한반도 대운하를 겨냥한다. 
우리 민족의 생존은 당연한 일 같지만 하나의 기적이자 축복으로 보면서 이 작가는 그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살아 있는 굽이굽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산야를 거론한다. “이런 강을 직선으로 만들고 깊은 웅덩이를 파서 물을 흐르지 못하도록 채워 놓고 강변에 콘크리트 제방을 쌓아 놓으면 그것은 살아 있는 강이 아니다.”는 생태학적인 상상력은 미래에 닥칠 “커다란 재앙”으로 연결시킨다.

자연조건에서 법정이 역점을 둔 쟁점은 농업 문제이다.

“농민의 수는 35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7퍼센트밖에 안 됩니다. 그나마 이들 대부분이 60세 전후의 사람들입니다. 농촌에서 아이 우는 소리가 사라진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아이 우는 소리가 사라졌다는 것은 미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 추세라면 우리의 농업 인구는 10년 안에 인구통계에서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농업 문제를 농민에게만 맡길 수 없는 당의성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이런 주장 뒤에는 농촌에서 자행되고 있는 효율과 경제성만을 따진 제초제와 화학비료 등 각종 약품의 남용으로 토양이 황폐화해가는 현상을 비판하고 있다.

이쯤 하면 웬만한 독자들은 FTA를 떠올릴 것이다. 생태론적 상상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대 기치를 들 이 문제에 대하여 법정은 당연히 강력 반대론을 펼친다. “겉으로는 그럴듯한 자유무역 같지만 사실은 철저하게 미국 기업과 투자자들을 위한 협정”이라고 보는 그는 “정치경제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강자의 보호주의”라고 풀이하면서 한국 농업의 미래를 염려한다.

법정의 생태적 자연사상은 인간과 대지의 일원론적인 상상력부터 국토와 농업 문제라는 구체성까지를 두루 아우르고 있다. 

 4. 결론―에코소피의 외연으로서의 사회적 쟁점

에코소피적 상상력의 외연은 사회학적인 쟁점에 닿는다. 환경생태 보호를 위한 가장 근사치의 정강(政綱)은 녹색당에서 찾을 수 있다는 주장이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개발논리에 입각한 생태계 붕괴의 주범이라는 논리는 이미 에코소피의 상식으로 굳어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생태계 최대의 적은 전쟁인지라 평화사상이야말로 가장 친에코소피적이며 이런 점에서 에코소피는 진보적 가치관에 입각할 수밖에 없다.

법정도 이 논리에서 예외가 아니다. “우리 시대를 이렇듯 답답하고 걸쩍지근하고 심란하게 만든 사람들은 과연 누구인가. 더 물을 것도 없이 그 책임은 전적으로 나랏일을 맡아 다스리는 계층에 속한다. 나라의 이익과 백성들의 행복과 즐거움에 끊임없이 상처를 입히고 있는 것은 나라를 잘못 다스린 데서 오는 폐해이기 때문이다.”면서 그는 아름다운 생태계를 파괴하여 우리 시대를 추악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전쟁과 정치권력의 횡포, 가진 자와 없는 자의 격차, 불의의 폭력이 정의를 짓밟는 작태, 전도된 가치의식, 분배의 불균형, 상호 불신 풍조 등을 열거한다.대체 이런 현상이 에코소피 사상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그 해답을 법정은 이 땅의 언어와 풍속과 흙과 자연과 정다운 이웃들, 그리고 자유와 평등과 질서를 지키고 가꿀 사명은 동시대인 모두에게 주어진 사명으로 “그것은 헌법이나 무슨 조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 땅에 태어나면서부터 받은 천부(天賦)의 권리요 의무”라고 명시한다. 덧붙이면 자연 파괴를 자행하는 세력에 대한 방어의 의무가 동시대인 모두에게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취지라 하겠다.

여기서 법정이 결론적으로 내세울 논리는 예상대로 불교적인 연기설에 입각한 공동체 의식이다.
“우리는 이 시대와 장소에서 함께 살고 있는 형제들이다. 같은 나무에 열린 열매들이다. 우리가 동시대를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인연의 농도가 짙어서이다. 그중에도 같은 지역에 살게 된 것은 불교적인 표현을 빌린다면 몇 생의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좋으나 궂으나 공동운명체의 멍에를 함께 메고 있다.”

이를 구호화하면 “서로 손을 잡자, 억만의 이웃이여!/ 이 포옹을 온 세상에 퍼뜨리자!”로 변형된다.
법정은 선동가일까. 천만에. 그는 역시 선승의 자세로 돌아가서 차분하게 선(禪)의 자세를 취한 채 정치와 과학이 못하는 일을 종교는 담당해야 한다고 결론 맺는다. ■

 

임헌영
문학평론가, 중앙대 국문과 겸임교수. 중앙대 국문과 대학원 졸업. 196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저서로 《민족의 상황과 문학사상》 《한국현대문학사상사》 《변혁운동과 문학》 《문학과 이데올로기》 《분단시대의 문학》 《문학의 시대는 갔는가》 《창조와 변혁》 《우리 시대의 소설 읽기》 외 다수. 현대불교문학상 수상. 현재 민족문제연구소장, 세계한인작가연합 공동대표, 계간 《서시》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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