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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사원경제와 한국불교의 과제 / 이병희
[43호] 2010년 06월 25일 (금) 이병희 kalsan@knue.ac.kr

1.서언 

   

이병희 교수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고려 시기는 우리 역사에서 불교가 크게 번성하고, 사원의 위상이 가장 높은 때이다. 사원은 종교와 사상의 측면에서 큰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재화의 생산, 분배, 소비에서도 중요한 주체의 하나였다. 사원은 활발한 경제활동을 통해 얻은 재화를 건물의 수선비, 승려의 생활비, 법회의 비용, 사회구제 활동비 등에 지출하였다. 불교와 관련한 예술 작품의 조영도 경제 기반이 뒷받침되어서 가능한 것이었다.

고려 시기 사원의 활발한 사회경제 활동은 당시 세속의 국가와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나아가 사회경제의 이념적 측면에서도 큰 영향을 주었다. 불교 가치가 국가의 운영에 영향을 주었고, 민인(民人)의 사회경제 생활 이념에도 영향을 끼쳤다.

고려 시기 사원의 경제활동은 우리의 소중한 자산이다. 활발했던 사원경제의 경험은 현재의 우리 불교가 추구할 경제 운영의 방향 설정에도 상당한 시사를 준다. 물론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그대로 적용되거나 반복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풍부한 역사 경험을 소중한 자산으로 삼아 음미하면 미래의 방향 설정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2. 사원의 경제활동

1) 토지의 경영

고려 시기 사원은 대토지를 지배하였다. 사원은 식리(殖利) 활동이나 상업활동을 통해서도 많은 수입을 확보하였지만 토지로부터의 수입이 가장 안정적이었다. 사원은 농지를 경영하면서 상당한 재정 수입을 꾀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축적한 부는 상업, 식리 활동의 바탕이 되었다. 고려 시기 사원의 경우 기부금이나 헌금이 제도화되지 않았으며, 일정한 권역의 민인을 신도로 확보해 단월(檀越)로 삼지도 않았다. 이것이 사원이 토지의 경영, 식리 활동, 상업활동에 적극성을 갖는 소이이다.

사원의 토지는 여러 계통으로 마련하는 것이었지만 가중 중요한 것은 국가로부터 분급받는 것이었다. 국가는 태조 대 개경에 조영(造營)한 여러 사원이라든지 이후에 조영된 현화사·흥왕사 등 중요 사원에 토지를 지급하였다. 이렇게 받은 토지는 경작자로부터 소출의 10분의 1을 거두어들이는 수조지였다.

사원은 개간이나 매입, 신자의 시납 등 스스로의 노력으로 토지를 확보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간장사는 버려진 공한지를 개간해 얻은 7, 8결의 토지를 이승휴로부터 시납 받았다. 공민왕 대에 임천(林川)의 보광사에도 원명국사의 속가 형제가 토지 100경을 시납하였다. 그렇지만 사적인 노력으로 확보한 토지는 원칙상 국가에 조세를 부담해야 했다. 고려 후기에는 사원이 탈점과 겸병을 통해 토지를 확대하는 것이 보이며, 몽골과의 전란 후 주인 없는 토지를 사패전으로 받아 개간하는 일이 많았다. 사패전의 경우는 소유권과 수조권을 동시에 가지는 것이었다.

사원이 지배하는 토지의 규모는 상당하였다. 성종 대 금강산의 장안사는 1,050결의 토지를 보유하였으며, 현종 대 현화사의 경우 1,240결이 확인되며, 공민왕 대 운암사는 2,240결의 토지를 받았다. 고종 대 수선사는 240여 결을 지배한 것이 확인된다. 규모가 큰 사원의 경우 대략 500결~1000결 정도의 토지는 보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토지에서의 수입은 고려 말의 과전법 규정을 적용한다면 1~2천 석 정도 되었을 것이다. 사원이 지배하고 있던 토지는 고려 말 대략 10만 결 정도로 추산되어 전국 토지의 8분의 1에 달하는 엄청난 것이었다.

사원의 토지는 고려 말 전제개혁으로 조정되었으며 조선 건국 후 대대적으로 감축되었다. 태종 대와 세종 대에 걸친 조치로 세종 이후는 40개 내외의 사원이 1만 결 이내의 토지를 분급받았다. 고려 시기에 비해 10분의 1 정도의 수준이었다.

토지로부터 수입을 확보하기 위해 사원은 관리인으로 지장(知莊)을 파견하였다. 사원은 또한 농우와 종자를 소유하고 이것을 농민에게 대여해 영농의 편의를 도모해 주기도 하였다. 사원의 토지는 주로 일반 농민이 경작하였으며 부분적으로 노비가 경작하기도 하였지만 승려가 경작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사원이 지배하고 있는 토지는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으며, 한 곳에 집중되어 있지 않고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었다. 그것은 사원이 독립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막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성종 대 장안사 토지는 전라도·양광도·서해도의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었으며, 고종 대 수선사 토지 240여 결도 전라도의 여러 군현(郡縣)에 소규모로 나뉘어 분산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장생표가 세워진 사원은 특수한 경우였다. 장생표가 세워지면 그 경내의 토지와 민인에 대해서 배타적·독점적 지배가 가능하였기에 분산된 경우와는 크게 달랐다. 이렇게 장생표가 세워진 고려의 사원은 매우 드물었다. 장생표는 국가의 허락이 있어야 세울 수 있었다. 통도사의 경우 12개의 장생표가 세워진 것이 확인된다.

사원은 또한 주변의 산림(山林)을 지배하는 수가 많았다. 산림에서는 땔나무를 확보할 수 있었고, 숯·재목·솔방울·도토리와 과일·버섯·산나물·칡을 얻을 수 있었다. 산림은 원래 주변의 모든 민인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것이기에 사원이 배타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사원이 산곡(山谷) 간에 세워진 경우, 인접한 산림을 거의 독점적으로 활용하였을 것은 쉽게 추측이 간다.

사원에는 다수의 노비를 보유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이러한 노비는 사원 내에서 땔나무를 하거나 청소하는 일을 주로 담당하였다. 부분적으로 사원의 토지를 경작하는 수도 있었지만 그것이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다. 사령(使令)과 지사(指使)가 사원노비의 핵심적인 임무로 언급되었다. 사원노비가 진 부담은 다른 공사노비의 그것보다 가벼운 것으로 언급되어, 사원노비가 다른 노비보다 처지가 양호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원의 노비는 태종 6년에 크게 감축되었으며, 세종 원년에 모두 혁파되었다. 승려 개인의 노비인 법손노비는 세종 3년에 혁파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시기에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사원이 노비를 보유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승려들은 땔나무를 하거나 청소를 하는 등 허드렛일을 손수 해야만 했다.

2) 식리(殖利) 활동의 전개

고려 시기 사원은 활발한 식리 활동을 전개하였다. 식리 활동을 통한 수입은 사원의 재정 수입의 중요한 원천이었다. 식리 활동을 위해 쓰이는 자산은 여러 방식으로 마련되었다. 국가로부터 사여되는 곡물이나 포(布)는 중요한 원천이었다. 국가와 국왕은 중요 기능을 수행하는 사원에 대해 일정한 재물을 사여해 줌으로써 식리 활동을 가능케 하였다. 국초 정종(定宗) 대에 7만 석에 달하는 상당한 곡물을 사원에 지급하여 식리 활동을 가능케 하였다. 이때 금강산의 장안사는 특별 대우를 받아 2천 석을 받았으므로 다른 사원은 대개 1천 석 정도 받은 것으로 보이며, 개경을 중심으로 중요 사원 대략 70개 정도가 곡식을 받은 것으로 사료된다.

명종 대 용문사에 700석, 용암사에 2,000석, 용수사에 1,000석이 사여되어 식리 활동을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공민왕 대 운암사에는 15,293필의 포가 사여되었다. 고종 대 최우의 아들 만종과 만전은 경상도에서 축적한 쌀 50여만 석을 사용해 식리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밖에도 사원이 식리 활동의 자산을 소지한 것은 다수 확인된다. 신자들이 시납한 곡식이나 포 기타 재물을 기반으로 식리 활동을 전개하는 것은 허다하였다. 그리고 사원이 토지 경영이나 상업활동을 통해 확보한 재원도 식리 활동의 기초가 되었다.

식리 활동을 통해 사원이 확보하는 수입은 상당하였다. 수선사의 경우 식리곡이 1만 석을 상회하였는네, 이것을 모두 식리 활동에 동원하고 법정 이자율 3분의 1을 적용하면, 3천 석 이상을 수입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봄철에 빌려 주고 가을철에 이자와 함께 본전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이자율은 매우 높은 편이었다.

식리 활동에는 다량의 곡물과 포가 사용되었는데, 이러한 식리 활동은 일반 세속인의 그것과 큰 차이가 있었다. 세속인의 경우 이자의 확보가 주된 목적이었지만 사원의 식리 활동은 그렇지 않았다. 대개의 식리 활동은 ‘보(寶)’라는 명목으로 일컬어졌다. 경보(經寶)나 종보(鍾寶), 기일보(忌日寶), 팔관보(八關寶), 광학보(廣學寶) 등 불사와 관련한 지출을 목적으로 운영하였다. 이자를 납부하는 이는 불사(佛事)에 동참한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세속인의 식리 활동보다 사원의 경우가 이자를 회수하는 비율이 크게 높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자를 납부한다는 것은 상당한 재화가 사원에 들어가는 의미를 지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백성으로서는 식리 활동의 도움을 받아 춘궁기에 굶주림을 면할 수 있었다. 백성은 사원의 식리 자산을 받아 식량이나 종자로 사용함으로써 재생산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사원의 식리 활동은 사회 전반에 걸쳐 물화의 이동과 교류가 활기를 띠게 하는 의미를 갖기도 하였다.

당시의 고승인 진각국사 혜심은 식리 활동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말사 11개를 통해 식리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국식(國式)’에 의거해 운영하겠다고 강조하였다. 당시 고리대를 통해 부자가 이식(利息)을 원본의 배 혹은 2분의 1로 징수하여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진다고 비판하고서 규정에 의거한 식리 활동을 전개하겠다고 하였다.

이식을 가볍게 하고 이자를 납부하는 자가 스스로 곡물을 측정토록 하겠다고 표방하였다. 국식을 벗어난 고율로 운영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성행하던 일반적인 고리대에 비해 헐하게 수취하겠지만 식리 활동 자체를 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다. 당시 승려는 이러한 식리 활동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으로 보거나 죄악시하지 않고 적극 참여하였다.

고려 후기 국가 경제의 어려움 속에서 사원에 대한 지원이 줄어들면서 사원의 식리 활동은 여러 문제를 야기하였다. 규정의 이자율보다 높은 이자를 받으면서 운영되는가 하면 강제적으로 대여하고 이자를 받아내는 경우도 있었다.

한편 보가 표방한 ‘존본취식(存本取息)’은 경제활동의 중요한 이념을 제공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국가나 세속인의 경우에도 이러한 존본취식의 이념에 의거해 자산을 운영하였기 때문에 보의 운영은 기금제라는 재정 운영 방식이 확산되는 데 기여하였다.

3) 상업활동 참여와 상업활동의 공간 제공

고려 시기 사원은 활발한 상업활동을 전개하였다. 불교 교설은 상업활동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었다. 고려 시기 사원과 상인이 밀착 관계를 맺은 것도 사원이 상업에 활발하게 참여한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

사원은 다량의 물품 구매자임과 동시에 판매자였다. 사원 건축 시의 자재, 불구(佛具) 제작을 위한 재료, 불교 행사에 필요한 물품, 승려들의 용품 등의 일부를 구매에 의해 조달하였다. 그리고 사원이 소유한 잉여물품과 가공품을 판매하였다. 나아가 적극적으로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상품 판매에 참여하였다. 사원이 교역하는 물품으로 미곡·차·마늘·파 등의 농산물, 직물이나 기와 등의 수공업 생산물, 봉밀이나 소금 등이 확인된다.

외방에 있는 사원이 개경에서 물품을 처분하거나 구매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금강산 장안사의 시사(市肆)가 개경에 있었다는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다. 장안사는 개경에 소재한 상점에서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였으며, 잉여물품을 처분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 시기 사원은 국제교역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사원에서 소요되는 물품 가운데는 국내에서 조달하기 어려운 것이 있었다. 단청의 원료나 불교 경전은 하나의 예였다. 선원사의 경우 비로전 단청을 위해 원에서 원료를 사들였으며, 보법사는 대장경을 중국의 강절(江浙)에서 구입하였다.

사원은 상업활동의 중심 장소로서 기능하기도 하였다. 고려 시기 사원에서 불교 행사가 활발하게 설행되었기 때문에, 사원은 다수 사람이 모이는 곳이었다. 보광사의 경우 낙성회가 50일간 열렸는데, 그때 참여한 이들이 골짜기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국청사에서 불교 행사가 진행되는 3일 동안 개경 내의 귀한 사람, 천한 사람 할 것 없이 서로 다투어 왕래하며 법을 듣고 인연을 맺고자 하는 이가 담장과 같았다. 공민왕 대 연복사의 문수회에는 승려 3백 명이 범패를 하였으며, 8천 명이 함께 참여하였다.

회암사의 공사가 종료한 뒤 문수회를 베풀어 낙성하였을 때 다수가 참석해 포, 비단과 떡을 시주하였다. 안양사 탑을 보수하고 난 뒤 낙성회를 열었을 때 보시하는 대중이 무려 3천이었다. 이렇게 몰려든 민인 상호 간에 교역이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사원의 상업활동은 종종 강제성을 동반하고 이루어져 문제가 되었다. 이른바 억매억매(抑買抑賣)라는 것이 그것이다. 가는 포와 비단 등의 물건을 강제로 사들이는 것과 솔방울·인삼·봉밀·미두를 강제로 구매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사원이 활발하게 상업활동에 참여하고 있었음을 전제로 해서 의천은 화폐를 주조해 사용하자는 이른바 주전론을 주장할 수 있었다. 의천에 따르면 주조화폐는 운반의 수고를 덜 수 있는 점, 쌀의 거래에서 있을 수 있는 협잡을 막을 수 있는 점, 녹봉을 쌀로만 지급하는 데서 오는 폐단을 막을 수 있는 점, 내구성이 우수해 저장에 유리한 점 등 4가지의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3. 불교계의 사회구제 활동

사원은 농지 경영이나 식리 활동·상업활동을 통해 재정 수입을 꾀하는 반면에, 사회에 대해서 상당한 책임감을 가지고 각종 구제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불교계의 세속사회를 위한 베풂은 일차적으로 빈민에 대한 구제 활동으로 나타났다. 승려들이 직접 나서서 빈민을 구제하는가 하면 사원이 빈민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장소로 기능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사원에서 설행되는 불교 행사가 빈민에 대한 구제 활동을 겸하는 수도 적지 않았다. 사원에서 빈민구제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었기에 국가에서는 유사시에 빈민구제의 소임을 사원에 일임하기도 하였다.

현화사 각관승통은 널리 중생을 구제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으며, 이러한 베풂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존숭하였다. 원응국사 학일은 보시에 힘써 일체의 물건을 아끼지 않고 베풀었다. 혜소국사는 광제사 문 앞에 솥을 걸어두고 먹을거리를 만들어 굶주린 사람에게 제공하였다. 백련결사를 조직한 원묘국사 요세도 빈민을 위한 보시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사원에서는 또한 불교 행사를 계기로 빈민구제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공민왕 대 연복사에서 노국공주의 기일을 맞아 법회를 베풀었는데, 이때 수원 지방에 기근이 들어 그곳의 유민들이 이 법회의 소식을 듣고 연복사에 몰려들었으며, 신돈(辛旽)이 여분의 포를 유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불교 행사가 이처럼 빈민구제의 의미를 지니기도 하였다.

그리고 사원에서는 여행자에게 편의를 제공하였다. 그 시기 여행자의 이동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하천과 늪, 산을 경유해야 했으며, 민가가 없는 곳을 한참 동안 가야 하는 경우도 흔하였다. 이러한 곳을 경유할 때 여행자는 호랑이 등의 맹수와 맞닥뜨리는 수도 있었고, 재물을 노리는 강도를 만나는 수도 있었다. 행려는 재물만을 약탈당하는 것이 아니라 귀중한 목숨을 잃는 수도 많았다. 이에 따라 교통로에 설치되어 여행자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사원이 매우 많았다.

개국사, 천수사, 혜음사, 도산사 등은 그러한 기능을 수행한 대표적인 사원이었다. 개경 인근에 세워진 개국사와 천수사는 개경에 오가는 여행자에게 편의를 제공하였다. 혜음사는 남경과 개경 사이의 혜음령에 세워진 사원이었다. 호랑이와 도적으로 인해 해마다 수백 명씩 사망하는 자리에 조성된 혜음사에서는 죽을 마련해 행인에게 베풀었으며 여행의 안전성을 높여 주었다.

금강산의 도산사 역시 금강산을 찾는 이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창건한 것이다. 금강산은 고려 후기 원의 사신과 사방의 신도가 천리를 멀다 하지 않고 소·말에 싣고 등과 머리에 이고서 불승(佛僧)을 공양하러 오는 이가 끝없이 이어지는 곳이었다. 그런데 산의 서북에 있는 고개는 험준하며 후미지고 거처하는 민이 없기 때문에 풍우를 만나도 노숙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세워진 도산사에서는 휴식처를 마련하고 먹을거리를 제공하였다.

일반 사원도 이러한 숙박 시설 기능을 담당했지만 ‘원(院)’이라 불리는 사원은 이러한 기능을 거의 전적으로 수행하였다. 봉선홍경사의 서쪽에 부설된 광연통화원은 80칸이었는데, 이 원에서는 곡식을 쌓아 놓고 가축의 꼴을 마련해 행인에게 제공하였다.

오산원에서는 겨울철 3개월 동안 왕래하는 행려와 승속의 남녀·노소·유약자 모두에게 먹을거리를 베풀었으며,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가축에게도 그 혜택이 미치게 하였다. 원에서는 음식이나 잠자리를 제공하였으며, 소와 말에게는 꼴을 제공하였다. 사원은 이처럼 이동의 편리성과 안전성을 확보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몫을 담당하였다. 사원에서는 행인뿐만 아니라 유리하는 백성들을 위해 먹을거리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살생을 금지하거나 방생하는 등 자연에 대한 베풂의 실천은 다른 종교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다. 칠장사의 혜소국사는 죽음의 위기에 놓인 비둘기 332마리를 재물로 얻어서 방생하였다. 혜소국사는 또한 속리산 아래 하천에서 물고기를 잡는 5인에게 다가가 재물을 주고 물고기를 구해서 방생하였다.

지칭이라는 승려는 거처하는 사원의 남쪽 바다에서 어부들이 그물을 가지고 밤낮으로 고기를 잡고 있었던 것을 금지토록 하였다. 장생표가 세워지는 경우 그 경내에서는 살생을 금지하였고, 짐승의 사냥이 금지되었다. 이러한 방생이라든지 살생 금지는 자연에 대한 보시 활동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승려는 환자의 치료에도 앞장섰다. 승려 가운데는 의술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승려가 허다하였다. 질병 치료에 탁월한 능력을 소지한 승려로 원응국사 학일이 있는데, 그는 사람의 질병이 있으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치료해 주었다. 그리고 의승(醫僧) 복산은 임질을 앓고 있는 여성을 치료하였다. 조간이 악성 종기로 인해 어깨와 목을 거의 구별할 수 없었는데, 이를 치료한 것은 승려였다. 묘원(妙圓)이라는 의승이 날카로운 칼로 째고서 썩은 뼈를 깎아 내고 약을 발라 줌으로써 조간의 병을 낫게 하였다.

불교계의 이러한 보시 활동에 영향을 받아 속인 가운데에도 보시행을 적극 실천하는 이들이 많았다. 불교를 깊이 공부하거나 불교적인 가치를 추구하며 거사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  가운데 이러한 보시의 실천에 앞장선 이들이 보인다.

윤언민이라는 인물은 《금강반야경》을 즐겨 읽고 견성(見性)과 관공(觀空)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그는 또 의술을 공부하여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을 일로 삼았다. 문장 기예에 정통하고 선승을 봉양한 채홍철은 집의 북쪽에 활인당(活人堂)을 창건하여 약을 베풀었다. 삼경거사(三敬居士) 배덕표는 병으로 벼슬하지 않고 김해의 주촌(酒村)에 퇴거해 살면서 홍인원(弘仁院)을 지어 이곳에서 향약을 채굴하여 조제한 후 질병이 있는 향리 사람을 치료하였으며, 또한 재물을 쌓아 놓고 흉년이 들면 즉시 진휼(賑恤)하였다. 조운흘은 승려와 방외우가 될 정도로 불교에 깊이 빠져든 인물로서 광주(廣州) 고원강촌에 퇴거하고서 판교원과 사평원을 조영하고서 자칭 원주(院主)라 하였다. 조은흘이 조영한 원에서는 다른 원과 마찬가지로 여행자에게 편의를 제공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불교계만이 아니라 속인 가운데도 이러한 보시 활동을 적극 전개한 이들이 많았기에 고려 사회 전체 분위기가 보시를 강조하는 성격을 띠었다고 생각한다. 이점은 조선의 사회 분위기와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라고 하겠다.

불교는 사회 운영의 이념이라는 측면에서도 이처럼 사회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고려 시기 국가의 경영에도 불교가 깊은 영향을 주었다. 예컨대 국가 차원에서 운영된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빈민과 환자를 위해 국가가 운영하는 기관의 이름이 대비원인 것이다. ‘대비’라는 용어는 주지하듯이 불교에서 온 것인데, 이러한 불교 용어를 차용해 국가기관의 이름을 지은 것이다. 고려 시기 국가의 형벌이 관대했던 것은 불교의 영향 때문이라는 조선 시기 역사서의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4. 고려조 사원경제 비판론

고려 후기 성리학을 수용한 유학자들은 사원의 경제활동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우선 주지와 관련한 문제 제기가 있었다. 고려 시기 주지의 일차적 임무는 강학 활동과 참선 지도였으며, 각종 불교 행사를 주관하고 사원을 보수·중수하는 책임도 지고 있었다. 주지는 수입을 확대하고 지출의 내역을 결정하는 핵심적인 구실을 하였다. 주지가 사원을 보수하지 않고, 승려나 부처를 제대로 받들지 않으며, 사원의 재물을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거나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는 지적이 많았다. 뇌물로 사용하기 위한 개인 재산의 확대에 열을 올린다는 지적이 있었고, 주색을 위한 비용으로 사원의 재정을 지출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불교가 생산을 소홀히 한다는 지적도 늘 따라다니는 비판이었다. 불교는 원래 생산보다는 분배에 대한 관심이 컸다. 이자를 받는 식리 행위나, 물건을 상호 교환하는 상업활동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었다. 반면에 생산, 특히 농업 생산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다. 그것은 농업 생산에 종사할 때 살생이 따르기 때문이었다. 고려 시기 승려의 노동이 부분적으로 확인되지만 승려의 경작 활동이 활발하지 않았던 것은 이 점과 관련이 있다.

고려 말 조선 초 불교 비판론자들은 승려에 대해 농사를 짓지 않으면서 배불리 먹고, 옷감을 짜지 않으면서도 따뜻하고 가벼운 고급 옷을 입는다고 비판하였다. 농경과 직조에 종사하지 않는 승려들에 대한 비판이다. 물화의 교류와 분배보다 생산을 강조하는 이념이 이 시기에 크게 확산되는 것과 짝하는 것이다.

불교가 사치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사원의 건축물을 화려하게 조성하고 불상이나 사경에 귀한 금속을 사용한다고 비판하였다. 단청을 위한 비용의 지출과, 금은이나 고급 비단의 사용은 상당한 부담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불교 행사를 화려하게 설행함으로써 그 지출이 크다는 지적도 있었다. 정도전은 불교 행사 시에 여러 종류의 공양으로 음식과 반찬이 낭자하며, 채백을 찢어 당번(幢幡)을 장식하였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불교 행사의 비용으로 평민 열 집의 재산이 하루아침에 소비되어 버린다고 비판하였다. 불교 행사의 비용 대부분을 민인이 부담하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이다.

승려들의 적극적인 연화(권선, 동량) 활동도 문제가 되었다. 연화란 특정한 불사(佛事)를 위해 적극적으로 시주를 받으러 다니는 것을 뜻한다. 사원을 새로이 세우거나 중수할 때, 불탑을 세울 때, 대장경 등의 불경을 인출할 때 연화 활동이 있었다. 이러한 연화는 민인이 불사에 동참한다는 의미를 갖지만, 이것이 지나쳐 백성들에게 강제로 재물을 거두어들이는 것은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국왕의 수결을 받은 연화문을 지참하고서 수령이나 관인에게 반강제적으로 재물을 시납하게 하는 일도 종종 있었는데 이것도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연화에의 참여는 어디까지나 자발성을 전제로 해야 하는 것이었지만 강제성을 동반해 마치 조세를 거두듯 하는 것은 곤란한 일이었다.

고려 말 이래 사원의 재정적 어려움 때문에 이러한 강제성을 띤 연화가 매우 성행하였고 그에 따른 문제 제기가 이어졌으며 여러 차례 금령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민인의 도움을 받아 불사를 완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으나 사회의 비판을 받는 지경에 이르는 것은 문제라 할 수 있겠다.

조선 초 불교 비판론이 유학자들의 호응을 받으면서 현실 사회에서 실천될 수 있었던 것은 ‘위민(爲民)’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사원에서 소비될 재물을 백성에게 돌려줌으로써 백성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는 것은 상당한 명분이 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의 불교에 대한 신앙이 절대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에 대한 억압이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리고 큰 시각에서 보면 불교의 위축은 세속 영역의 확대와 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교(政敎)의 밀착에서 분리의 과정이기도 하였다. 고려 시기에는 세속정치와 불교가 매우 밀착되었다. 정치권력의 도움을 받아 사원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불교는 정치권력을 위해 여러 가지 도움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불교를 정치와 분리시켜 불교에 대한 지원을 줄이고, 나아가 억제 조치를 취하게 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토지 지급의 축소, 노비의 몰수, 국가적 불교 행사의 감축, 부녀자의 상사(上寺) 금지, 승려의 사회적 위상의 격하 등으로 표현되었다.

고려 시기 사원의 사회경제적 위상은 국가가 제도적으로 뒷받침해 준 데서 가능하였다. 국가는 승려에게 역을 면제시켰으며, 승과에 합격한 승려에게는 관인에 준하는 대우를 하였다. 그리고 사원에 토지를 분급하였으며, 다량의 재화를 제공해 식리 활동의 자산을 삼게 하였다. 식리 활동의 이자율 3분의 1을 인정해 줌으로써 고율의 수취가 가능할 수 있게 하였다.

종교가 국가권력의 도움을 받아 경제를 운영하는 것이 세속 영역의 확대 속에서 축소되는 것은 동서양 모두에서 확인되는 일이다. 국가권력이나 정치권력의 도움을 받지 않고, 불교계 스스로 자구 노력에 의해 사원을 유지해 가는 것이 절실하게 되었다.

5. 결어

고려 시기 사원의 경제활동이나 불교계의 사회구제 활동에 관한 풍부한 경험은 현대의 불교계 운영에 많은 시사를 준다. 현대의 종교 기관의 경제 운영은 사회의 기대치에 상응해 한층 모범적일 필요가 있다. 종교와 종교인이 존경받으려면 재정 운영에서 합리성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고려 시기 사원의 재정 운영 관련 각종 문건이 있었지만, 기록이 충실하고 그 내용이 사회적으로 공개되지는 않았다.

이제는 사회 전체가 투명함을 요구하고 있다. 기업이나 국가는 물론이고 사적 모임의 경우에도 투명성을 요구하고 있다. 종교기관도 이에 미치지 못하면 사회적으로 고운 시선을 받지 못한다. 사회 수준에 맞추어 재정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하겠다. 수입의 내역과 지출의 내역을 문서로 정확하게 기록하고 이를 공개할 때 투명성이 확보되는 것이다.

그리고 재정 운영에서 출가자가 거리를 두는 것을 한번 고려해 봄 직하다. 고려 말 주지가 자주 문제 된 것을 생각하면, 속인에게 재정을 맡기고 일정한 기준에 따라 출가자가 지출하는 방식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되면 출가자가 불필요하게 재정 문제로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종교인 본래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원에서 일거에 시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우선적으로 규모가 큰 사원에서 한번 시도해 봄 직하다. 사원의 재정 운영을 속인에게 맡기자는 어느 승려의 주장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기업과 달리 사원의 재정 수입과 지출에 대해서는 종교적인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기업은 이윤 추구를 위해 만들어지고 운영하는 것이어서 경제논리에 충실하면 소기의 목적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는 자신의 교설(敎說)에서 재정과 관련한 논리를 찾아야 한다. 수입을 확보하는 방법이나 절차, 규모에 대해서 불교 경전의 설명이 뒤따라야 하며, 지출의 방향이나 방법, 규모도 불교 경전에 의거해야 한다. 경전에 따른 올바른 수입과 올바른 사용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이 있어야 할 것이다.

사원으로서는 수입의 안정화가 매우 중요하였다. 고려 시기에는 사원이 신도로부터 제도적·정기적인 시주를 확보하는 방법을 마련하고 있지 않았기에 토지의 확보와 경영이 중요하였으며 식리 활동도 매우 긴요하였다. 신도의 조직을 통해 그들의 도움을 받아 경제 운영을 하는 것은 불교 교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안정적이고 규칙적인 재시(財施)를 제도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는 신도를 조직하고 관리하며, 이들의 재정 도움을 어떤 방식으로 확보할 것인가를 마련하는 일이다. 불규칙한 수입, 비제도적인 수입을 지양하고 정례적이고 제도적인 방법으로 신도의 재정 지원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흔히 생태 문제에 관해 불교가 기여하는 바가 많다고 한다. 현대사회에서 환경 파괴의 문제, 환경 보존의 과제는 누구나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 고려 시기 사원은 지덕(地德)을 비보(裨補)한다는 개념에 의거해 사원을 건립하였다. 지덕이 약한 곳은 보충하고 지세가 강한 곳은 누른다는 것이다. 기존의 자연을 전제로 하고서 그것을 보완한다는 의미로 사원을 건립하였다. 지세를 무시하거나 파괴하고 사원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그것을 존중한 위에서 사원을 세운다는 것이다. 이 점은 지금에도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현대는 불교 가치의 사회적 실천에 큰 관심을 가질 때라고 본다. 고려 시기 사원이 세속사회에 경제 이념상 큰 영향을 준 것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보시(베풂)를 강조한 것을 일차적으로 들 수 있겠다. 사원 스스로 활발한 보시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이것을 본받은 세속 귀족도 보시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보시가 고려 문화의 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존본취식이라는 것도 중요한 경제활동의 한 유형을 제시한 것이다. 특정 용도를 위해 재원을 마련하고 그 이자를 가지고 특정 용도에 지출하는 것이다. 고려 시기 불교계가 사회경제 이념적으로 당시 세속사회에 끼친 영향을 반추함으로써, 현대사회에서 불교 가치가 이념적으로 기여할 방향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21세기 현대사회 전반의 수준 향상에 상응해 종교에 대한 사회의 기대치도 매우 높아 가고 있다. 종교의 경제도 종교인만의 것이 아니라, 속인이 관심을 갖는 대상이다. 사회의 수준에 걸맞은 재정 운영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면 신도의 수도 줄고 사회의 신임을 받지 못하며 사회적 영향력이 감소하게 된다. 불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던 때의 경험을 반추하면서 현대사회에서 불교가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수행할 역할과 지향할 방향을 올바르게 설정하는 것이 절실하다. ■

 

이병희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서울대 사범대학 역사학과 졸업. 서울대 인문대 국사학과 석사 및 박사. 목포대 사학과 전임강사, 조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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