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경국 교수의 〈불교 사회철학의 문명 비판에 대한 자유주의적 성찰〉에 대한 반론

1.반론의 장을 열며

박병기 교수
교원대 윤리교육과

어떤 상황이나 사태에 대한 학문적 분석은 그 자체로 객관성과 공정성을 전제로 한다. 특히 그것이 자연현상과 관련된 것일 경우 가설을 세운 후에 이를 실험과 관찰이라는 방법을 통해 검증해 가는 자연과학이 이러한 객관성과 공정성을 보다 명확히 보여 주는 사례가 된다.

물론 쿤(T. Kuhn)의 지적과 같이 자연과학의 발달도 자연과학자 집단이 오랜 시간 진리로 받아들여 온 것에 대한 혁명적인 반론에 제기되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때의 객관성과 공정성이 과연 얼마나 온전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있을 수는 있다.

인간이나 그 인간이 모여 사는 공간인 사회를 대상으로 삼는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에서도 최소한의 논리적 일관성이나 과학적 법칙성이 통용될 수 있기는 하지만, 자연과학에 비해 그 신뢰도가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고 나머지 영역은 상당 부분 자신이 갖고 있는 인간관이나 사회관이라는 일종의 철학적 신념에 의존하게 된다.

그런 이유로 어떤 이론이든지 완전한 진리성을 담보하는 일은 불가능하고 따라서 가능한 범위 안에서 자신의 주장이나 이론을 논쟁의 대상으로 개방하는 일은 인문학자나 사회과학자가 감당해야 하는 당위적 과제에 속할 수밖에 없다.

인류 문명의 현재와 미래에 관련된 수많은 분석과 예측 중에서 근대 이후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을 꼽는다면 단연 자유주의(自由主義, liberalism)일 것이다. 이 이념을 어떻게 정의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역사적 궤적도 다르게 잡을 수 있겠지만, 홉스나 데카르트 이후의 서양 근대 계몽주의자들로부터 본격적으로 제기된 근대 자유주의는 정치는 물론 경제 영역에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그 이후의 역사를 이끄는 추동력으로 작동해 왔다.

자유주의는 정치적으로 자유민주주의로 이어지고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와 결합되면서 이른바 민주자본주의(democratic capitalism)라는 이념으로 통합되어 현재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고 우리 사회라고 해서 결코 예외가 아니다.

이런 상황적 맥락 속에서 하이에크적인 자유주의 경제학을 일관되게 연구해 온 민경국 교수(이하 민경국으로 칭함)의 불교 사회철학과 경제학에 대한 관심은 시대의 대세로까지 평가받는 자유주의와 불교 사이의 적극적인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고무적인 사건이다. 왜곡되어 있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전통인 불교가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오랜 시간 화두(話頭)로 삼아 온 논자에게는 민경국의 적극적인 불교 비판이 그 화두를 타파할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해 줄지 모른다는 기대를 갖게 한다.

이 글은 기본적으로 민경국의 〈불교 사회철학의 문명 비판에 대한 자유주의적 성찰〉(《불교평론》 42호(2010 봄), 110-131쪽)에 대한 직접적인 반론이지만, 그의 주장에 대해 좀 더 정확하고 상세한 접근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그의 다른 저서들도 함께 인용하면서 진행될 것이다.

그중에서도 집중적으로 인용하고자 하는 저서는 《자유주의와 시장경제》(2003)과 《자유주의의 지혜》(2007)이다. 본격적인 반론에 접어들면서 한 가지 사족으로 달고 싶은 것은 우리 학계의 논쟁 문화에 관한 우려이다. 자칫하면 논쟁을 위한 논쟁으로 흐르거나 감정 대립으로 그쳐 논쟁 본래의 의미와 영역에서 일탈하곤 하는 경우가 많고, 특히 사회철학과 관련된 논쟁은 우리 사회의 이른바 극단적인 이념 대립의 장에 휘말리기도 하는데 우리의 이 논쟁은 불교와 자유주의 모두의 사회철학이 성숙하는 장으로 전개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반론의 순서는 먼저 자유주의의 자유 개념에 대한 반론에서 시작해서 사회관에 대한 반론으로 이어진 후에, 자유주의 경제학에서 미래를 예측하는 전가의 보도로 활용하는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의 허구성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그런 후에 타인과의 의존성을 전제로 해서 비로소 온전한 ‘걸림없음[無碍]’이 가능하다는 불교의 자유 개념을 자유주의의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 제안하는 방식으로 전개될 것이다.

논자는 이러한 불교의 대안을 이미 다른 글에서 ‘연기적 독존주의(緣起的 獨尊主義)’라는 개념으로 제안한 바 있고 민경국의 비판이 이 글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같은 맥락에서 자유주의의 자유 개념과 미래 예측이 지니는 허구성과 무모한 낙관주의를 비판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재반론하는 형식을 취하고자 한다.

2.자유주의가 전제하는 ‘자유’와 ‘도덕’의 문제

1) ‘허구적 자유’의 문제

자유주의는 자유를 인간이 지향하고자 하고 또 지향해야 하는 최고의 가치로 전제한다.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추구할 수 있는 가치는 다양하지만 그중 어떤 것도 자유를 넘어설 수 없다는 일종의 당위론적 신념이 바로 자유주의인 것이다. 민경국도 자유주의를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패러다임이고 이 자유주의의 경제학적 의미가 시장경제이다.’라고 정의하고자 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볼 만한 지점은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가 철학적 차원에서 주목하는 자유 개념과는 일정하게 차별화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선 자유주의자들의 자유는 ‘개인의 자유’이다. 그런 점에서 칸트식의 의지의 자유와 유사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자유주의자들이 강조하는 자유는 사회적 자유(social liberty)이다.

사회적 자유는 사상과 취업, 종교 선택과 같이 개인이 사회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자유를 의미한다. 사회 구성원 전체에게 공통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이 사회적 자유인데, 이 자유를 주로 제한하는 것이 정치권력이나 종교권력과 같은 사회적 권력이기 때문에 보다 구체적인 차원으로 옮겨가면 ‘사회적 권력의 부당한 침해로부터의 자유’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자유주의자들의 자유가 이러한 소극적 자유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고 생명권과 재산권을 보호받을 수 있는 기본적인 인권을 포함하는 적극적인 자유의 영역으로 확장되기는 하지만, 이러한 적극적 자유 개념은 소극적 자유의 본질적 속성 즉 다른 개인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과 긴장 관계를 형성하면서 쉽게 확장되거나 적용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일단 자유주의자들의 자유는 개인이 사회적 권력과 같은 외부의 강제로부터 확보할 수 있는 자유라고 규정해도 무방할 것이다.

자유주의 경제학을 대표하는 학자 중의 하나로 평가받는 프리드먼(M. Friedman)도 자유주의자의 자유는 자유사회에서 개인이 직면하는 문제들, 이를테면 자유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와 같은 문제이고 그런 점에서 자유주의자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유를 어떻게 행사할 것인가를 중시한다고 말한다. 개인이 자신의 삶의 영역 안에서 자유를 행사하는 문제는 본질적으로 윤리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사적 영역에 속할 뿐 본격적인 관심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유를 추구하는 존재라는 명제는 별도의 검증이 필요 없는 당위적 명제에 속한다. ‘어느 누가 자신의 자유를 억압받고 싶어 할 것인가?’라는 상식적인 질문으로부터 이미 경험적으로 우리 모두 동의할 수 있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이 자유는 당연히 ‘개인으로서의 인간’을 전제로 해서 성립되고, 그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다른 존재자와 분리되어 있거나 고립되어 있는 존재자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지 않을 경우 자유 자체의 영역이 확보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가 전제로 했던 인간이 바로 이와 같은 고립된 구체적인 존재자로서의 개인이었고, 데카르트가 주목했던 인간도 스스로 사고의 영역 속에서 고립된 채 생각하고 있는 개인이었다. 이와 같은 인간관을 기반으로 삼아 근대 자유주의가 정치와 경제의 영역으로 자신의 모습을 구체화시켜 온 것이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이다.

문제는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가 ‘개인’을 전제로 해서 비로소 성립될 수 있다는 점에서 생겨난다. 자유주의자들에게 개인은 타자와 독립된 실체일 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고립성을 전제로 하여 성립될 수 있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서 온전히 자신의 독립된 영역을 갖고 있는 인간이 개인이고, 그가 외부의 강제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자신의 이익을 확보하고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자유가 자유주의자들이 자유 개념이 지니는 핵심 내용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이 롤스(J. Rawls)의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처럼 자유의 원칙을 가설로 정립하기 위해 요청되는 이론적 전제 속에서 존재할 수는 있지만, 과연 현실 속의 인간이 그런 고립성과 독립성을 온전히 부여받을 수 있을까?

산골 마을에 고립된 채 살아가는 어떤 사람을 상정해 보자. 세상과 완전히 담을 쌓고 그 안에서 자급자족을 하는 경우라면 그에게 자유란 그저 자신의 삶의 방향과 의미를 결정할 수 있는 배경적 요인이거나 그 자체 정도로 머물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그가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로 인해서 자유는 더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없게 된다. 자유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아야 하는 사회에서 부각되는 가치라는 점은 자유주의자들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점이지만, 그 자유주의자들은 바로 그 지점에서 그 사람을 온전히 고립된 존재자로 전제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자유가 문제 될 수 없는 고립된 개인을 전제로 해서 자유를 지상의 가치로 내세우는 내적 모순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자유주의자들도 그 개인들이 자신의 이익과 권리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인간관계를 중시하지만, 그 인간관계는 각 개인의 고립성을 전제로 해서만 비로소 용인될 수 있는 일종의 ‘허구적 관계’일 뿐이다. 이 허구적 관계를 통해서 인간이 자신의 삶을 어느 정도까지 영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철학적 성찰이 요구된다. 인간(人間)이 인간인 이유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늑대의 공동체에서 자라나고 살아가고 있다면 그는 늑대(인간)일 뿐 온전한 의미의 인간이 아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간다는 의미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익사회적인 관계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더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것은 관계 그 자체이다. 부버(M. Buber)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와 그것’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너’의 관계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핵심 요소이다.

그렇게 본다면 자유주의자들의 자유는 ‘허구적 관계’를 전제로 하는 ‘허구적 자유’일 뿐이다. 진정한 의미의 자유는 고립성을 전제로 해서는 성립될 수 없다. 부모로 상징되는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비로소 생명을 부여받은 인간이 동물성을 극복하고 온전한 인간으로 자라나는 과정 자체가 곧 삶의 의미로서의 관계성이며, 성인이 된 이후에도 인간은 타자와의 무조건적인 관계 속에서 비로소 온전한 살아있음의 느낌과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자유는 관계성을 전제로 해서만 성립될 수 있다.

2) 자유주의 경제학에 진정한 도덕이 있는가?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가 고립된 개인을 전제로 하는 허구성을 지니고 있음에 유의하고 나면 그러한 인간관을 바탕으로 하는 도덕이 가능한지를 묻게 된다. 물론 자유주의의 외연(外延)이 넓어서 이때의 자유주의가 어떤 자유주의인지를 어느 정도 한정 지어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자유주의자들이 대체로 공유하고 있는 인간관과 그것에 근거한 도덕의 문제를 살피는 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밀(J.S. Mill)과 같은 계몽주의 시대 자유주의자에게는 정부와 같은 외부의 강제 장치가 동원될 수 있는 유일한 원칙은 한 개인이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는 경우일 뿐이라고 강조하면서 개인 권리의 절대성을 내세우면서도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 윤리설이 마련될 수 있는 또 다른 통로를 확보하고 있었다.

스미스(A. Smith)의 경우에도 자유주의에서 경제학과 윤리학 사이의 괴리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윤리학에 근거한 경제학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인간의 본성에 대한 윤리학적 분석에 토대를 두고 경제현상을 예측하고 미래를 대비하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利己的, selfish) 존재라 하더라도 그 천성(天性, principles)에는 분명히 이와 상반되는 몇 가지가 존재한다. 이 천성으로 인하여 인간은 타인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단지 그것을 바라보는 즐거움밖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타인의 행복을 필요로 한다. 연민(憐憫, pity)과 동정심(同情心, compassion)이 이런 종류의 천성에 속한다. 이것은 타인의 고통을 보거나 생생하게 느낄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들이다.

애덤 스미스의 자유주의 경제학은 그 출발점에 이러한 인간학적 전제를 두고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삼아 자유주의의 윤리 원칙을 이끌어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일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주의의 윤리학적 토대는 자유주의 경제학 자체의 독립과정에서 현저히 무너졌고, 특히 우리 시대의 새로운 자유주의의 흐름이라고 평가받는 신자유주의에 이르면 도덕은 경제로부터 거의 완전하게 소외되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사람답게 먹고사는 일’을 연구 주제로 삼아야 하는 자유주의 경제학의 이러한 파탄은 기본적으로는 경제학의 인간학으로부터의 일탈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자유주의 자체의 이론적 흠결에서 그 뿌리의 일단이 비롯되고 있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밀의 경우에는 철저한 개인주의를 옹호하면서도 ‘인간이 숭고하고 아름다운 숭고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기 안에 있는 개성적인 것을 모두 없애서 일률적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타인의 권리와 이해관계에 의해 주어지는 한계의 범위 안에서 그것을 가꾸고 성장시키기 때문’이라고 강조하면서 인간다움과 개성의 함양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밀의 이러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그의 초점은 여전히 고립된 개인의 범위 안에 머물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립된 개인에게 필요한 도덕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저 그에게는 타인의 권리와 이익을 이유없이 침해하지 않는 정도의 최소도덕(minimal moral)이 문제 될 수 있을 뿐이다. 시민사회 윤리로서의 최소도덕이 시민사회를 지탱하는 내적 장치로서 작동해야 하지만, 그것은 자율적인 준수의 범위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이 상존함으로 인해 도덕을 넘어 법의 영역으로 편입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곧바로 드러낸다. 도덕 문제에 대한 법적 처벌은 도덕의 자율성을 훼손함과 동시에 인간의 고유한 존엄성을 위협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최소화하거나 가능하면 피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그런데 그 이후의 사회는 오히려 도덕 문제에 대한 법적 처벌이 지속적으로 강화되면서도 사회 자체의 도덕 수준은 현저하게 저하되어 경제수준이 높아질수록 치안 문제가 악화되는 일반적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자유주의의 도덕 문제를 고찰하는 과정에서 ‘고립된 개인’의 문제와 함께 고려해야 하는 지점은 자유주의의 시장으로의 전환이다. 민경국의 적절한 지적과 같이 자유주의의 경제학적 의미는 시장경제이고 그런 점에서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를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시장에 대한 도덕적 관점에서의 분석은 곧 자유주의에 대한 도덕적 분석이 된다. 민경국은 자유주의와 자유방임주의를 구별하면서 전자는 국가를 일정 부분 필요로 하는데, 그 국가의 역할로 법과 질서의 유지, 재산권의 규정 및 분쟁 해결, 책임 원칙의 집행, 경쟁 촉진과 통화질서의 확립, 생활 능력이 없는 자에 대한 보호 등을 제시하고 있다.

자유주의와 자유방임주의 사이의 경계가 현실 속에서는 불분명하다는 한계를 지적할 수 있지만, 일단 민경국의 이러한 자유주의 옹호를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자유주의에서 국가는 철저하게 시장을 보호하는 역할 이상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자유주의는 곧 시장을 의미한다는 민경국의 명제도 그 사실을 반증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이 시장은 모든 것들을 양적인 가격으로 환원시키는 일종의 블랙홀을 의미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민경국은 이러한 양적인 가격으로의 전환을 고립된 개인들이 생존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해야만 하는 장에서 그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절묘한 수단이라는 관점에서 지극히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인간 삶의 질적인 차원에 대한 심각한 훼손을 전제해야만 성립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극히 위험한 평가이다.

슈마허(E.F. Schumacher)의 적절한 지적과 같이 시장은 모든 것들을 획일화시켜 양적인 가격으로만 평가하는 이른바 시장가치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고립된 ‘개인주의와 무책임이 제도화된 것’이다. 인간의 삶은 생존과 의미라는 두 차원에 걸쳐 있다. ‘기신론적 사유(起信論的 思惟)’에 따르면 인간의 삶은 생멸(生滅)과 진여(眞如)의 영역 모두에 걸쳐 있고, 우리는 이 두 차원 모두를 경시하지 않으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삶의 의미 문제인 진여를 향한 깨달음의 몸짓을 포기하지 않을 때 비로소 인간이 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영위하다가 때가 되면 사라지는 비참한 운명을 맞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시장은 진여(眞如)의 차원을 철저하게 무시하면서 모든 것을 양적이고 수적인 가격으로 전환시키는 거대한 블랙홀인 것이다.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물질적 요건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교환이 필요하고, 그 교환 과정에서 가격이라는 일종의 소통의 매개체가 쓸모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가격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가의 보도와 같은 매개체라는 명제를 수용할 수 있는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자유주의의 이러한 시장과 시장가격에의 맹목적인 의존이 심화될수록 ‘인간다운 삶을 위한 조건’을 논하는 것을 본래의 목적으로 삼았던 광의의 윤리학으로서의 경제학은 윤리의 영역을 지속적으로 덜어내고 단순한 짐승의 삶과 다를 바 없는 양적인 수준의 생활에 봉사하는 기능적인 학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계몽주의적 전제를 갖고 있었던 밀이 자유주의 경제학에 기대했던 사회철학으로서의 역할은 인간 삶에 속하는 모든 것들을 시장가격으로 환원시키고 그것을 절대화하고자 했던 그 이후의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이상이 되고 만 셈이다. 그는 경제학을 “하나만으로 유리된 학문이 아니라 보다 큰 전체의 일환이고, 그 밖의 모든 부분과 밀접히 관련된 사회철학의 한 부분이다. 따라서 그 고유 영역 내에서의 결론도 일정한 조건이 수반될 때만 정당하다. 그것은 경제학 자체의 범위 안에는 없는 여러 원인들로부터의 간섭이나 반작용의 제약을 받는다는 것이다.”라고 선언하여 자유주의 경제학의 경계선을 분명히 긋고자 했지만 자유주의 자체의 자기 파괴성과 자유주의 경제학의 독선적인 고립화와 거대화로 말미암아 도덕을 상실한 공룡과 같은 결과를 빚고 만 셈이다.

3. 자유주의 경제학은 지속 가능한 패러다임인가?

1) ‘보이지 않는 손’은 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가?

자유주의 경제학은 인간 삶의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면 된다는 미래가 보장된다는 무모한 낙관론을 펼친다. 그 낙관의 정도가 지나쳐서 오히려 그 신뢰성에 의문을 갖게 할 정도이다. 민경국의 낙관론을 함께 살펴보면서 논의를 계속해 보기로 하자.

자유주의 탓이라고 열거한 모든 사회적 문제들은 실제로는 자유주의 탓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주의 원리를 지키지 않는 반자유주의 정책 때문에 생겨났다는 것이 우리가 이 연구를 통해 밝힐 주제이다. 둘째로 자유주의 탓이라고 열거한 문제들은 자유주의가 실현되면 자동으로 해결되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들은 자유주의만이 지혜롭게 해결할 대상이다. 그 어떤 이념도 그들을 지혜롭게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살길은 자유주의라는 것, 이것이 우리가 강조할 세 번째 주제이다. 자유주의는 세계적 추세이기 때문에 자유의 길(road to freedom)은 싫어도 불가피하게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라. 실용적인 선택도 아니다. 그것은 자명한 선택이다. 인류가 가야 할 자명한 길이다. 자유주의만이 살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자유주의 경제학자인 민경국의 낙관론은 거의 자유주의에 대한 신앙에 가까운 수준으로 읽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근거가 없는 비논리적인 낙관론이라고 볼 수는 없다. 민경국은 자신의 낙관을 신뢰할 만한 것으로 믿게 할 수 있을 정도의 상당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 근거를 간략하게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인식론적으로 인간 이성의 한계에 대한 지적에서 시작한다. 인간의 이성은 믿을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이성에 근거한 경제계획은 무모한 것일 수밖에 없고 오히려 거대한 사회에서 유일한 의사소통 수단인 화폐로 계산된 가격이 통용되는 시장에 맡기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이 첫 번째 전제이고, 자유주의만이 인류의 번영을 지속적으로 보장해왔음을 우리가 역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이른바 ‘사실적인’ 논거가 두 번째 전제이다.

민경국의 이러한 논증 방식은 이론적 차원과 사실의 차원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방식으로 현실적인 설득력을 일정 부분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증적으로 역사 속에서 검증할 수 있다는 주장 방식은 그 설득력만큼이나 치명적인 한계를 갖는 방식이기도 하다. 우선 실증적인 검증은 칼 포퍼의 검증 가능성의 원리에 따라 즉각적인 반론이 가능하다는 함정을 갖는다. 다시 말해서 자유주의가 인류의 번영을 지속적으로 보장해 왔다는 민경국의 주장은 단지 한두 가지의 반증만으로도 무너지는 치명적인 결함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자유주의가 인류의 번영을 제대로 담보해 왔는가?

이 질문에서 우리는 먼저 ‘인류의 번영’이라는 개념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 개념은 단순한 사실적 차원의 개념이 아니라 가치론적 차원의 개념이다. 무엇이 번영인가? 국민 1인당 소득이 증가하는 것을 번영의 잣대로 생각하는 단선적인 구도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이 개념 자체가 반성적 검토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그런 의심스러운 개념에 토대를 두고 자유주의가 인류의 번영을 담보해 왔고 앞으로도 보장할 전가의 보도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형적인 선행요건 충족의 오류에 속한다.

자유주의의 또 다른 토대, 즉 인간 이성의 한계에 관련된 논변은 그 자체로는 충분히 의미를 갖는 인식론적 패러다임이다. 계몽주의에 근거한 근대 시민사회와 그 자본주의적 토대를 공격해 온 마르크스주의적 현실사회주의는 공통적으로 인간의 이성에 대한 과도한 믿음에 근거하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인간의 이성을 온전히 믿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고, 특히 윤리학 영역에서는 도덕의 핵심은 이성적인 공정성(justice)에만 두는 관점에 대한 다양한 비판들이 나왔고 최근에는 도덕의 핵심을 자신과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에 두는 배려윤리가 주목받는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고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인간 이성의 한계에 대한 수용이 과연 자유주의의 정당화 근거로 작동할 수 있을까? 민경국은 자유주의와 자유방임주의를 구분하고자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문제를 열린 시장을 전제로 하는 화폐로 계산된 가격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전제하는 점에서 이 둘은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 만약 자유주의가 국가의 역할을 최소한이라도 인정하게 되면 자유주의의 역설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되고, 그 ‘최소한’을 규정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믿을 수 없는 이성’에 근거한 판단에 의존해야 하는 모순에 봉착하게 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자유주의와 자유방임주의는 엄격히 구별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이 문제와 관련지어 민경국도 ‘작은 국가, 최소 국가라는 개념은 상대적 개념이지 절대적 개념은 아니다.’라는 언급을 통해 한 발짝 물러서는 듯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대적인 개념에 의존해서 자의적으로 시장의 영역과 국가의 영역을 나누는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자유주의 경제학의 근본적인 자가당착임을 인식하게 되면 역시 자유주의도 이성의 한계에 대해 지적하면서도 그 한계 속의 이성에 다시 의존하는 이념에 불과하다는 점도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

시장의 절대적인 역할과 권한을 정당화하는 핵심 기제인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an invisible hand)’에 대해서도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 먼저 애덤 스미스가 자신의 《국부론》에서 단 한 번 사용한 개념인 이 보이지 않는 손은 다음과 같은 맥락 속에서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사실 그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공공의 이익을 증진시키려고 의도하지도 않고 그것을 자신이 얼마나 촉진하는지도 모른다. 외국 노동보다 본국 노동의 유지를 선호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고, 노동생산물이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그 노동을 이끈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다. 이 경우 그는 다른 많은 경우에서처럼 보이지 않는 손(an invisible hand)에 이끌려서 그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목적으로 달성하게 된다. 그가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사회에 좋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흔히, 그 자신이 진실로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려고 의도하는 경우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그것을 증진시킨다. 나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업한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사실 상인들 사이에 이러한 허풍은 일반적인 것도 아니며 그런 허풍을 떨지 않게 하는 데는 몇 마디 말이면 충분하다.

이 인용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애덤 스미스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다 보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서 공공의 이익을 증진시키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의미로 이 개념을 사용하고 있을 뿐 ‘보이지 않는 손’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전가의 보도라는 방식으로 과장하고 있지는 않다. 만약 어떤 시장의 독점자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곧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 경우에는 ‘보이지 않는 손’은 작동할 수 없게 된다. 특히 현재와 같이 다국적 투기자본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국가 간 시장의 장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이익을 추구하는 상황 속에서 그런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여 결과적으로는 그 나라나 인류 전체의 이익을 가져올 것이라는 낙관적 기대를 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를 생각해보면 쉽게 동의할 수 있게 된다.

자유주의자들이 개인의 이익에 기반을 두고 모든 것을 양적인 가격으로 환산하는 시장에서 늘 작동하는 것으로 전제하는 보이지 않는 손은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고장 난 기계에 불과하다. 물론 애덤 스미스의 주장에서처럼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도 쉽게 믿을 수 없다는 사실도 분명해 보이지만, 그만큼이나 보이지 않는 손의 작동도 믿을 수 없는 허구적 기대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도 분명하다. 그런데 하물며 그렇게 믿을 수 없는 것에 인류의 미래를 맡기라는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자유주의자들의 인류 미래에 대한 낙관은 그런 점에서 무모한 것일 뿐만 아니라, 자칫 인류를 파멸로 이끌어 가는 요소로 작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낙관이기도 하다.

2) 우리에게 어떤 대안이 있는가?

자유주의 경제학의 무모하고도 치명적인 낙관에 대한 지금까지의 분석을 통해서도 이미 어느 정도 이 이념에 우리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해진 것으로 보인다. 우선 그들이 말하는 인류의 번영이라는 개념 자체가 모호할 뿐만 아니라, 그 번영 개념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과연 자유주의가 전 인류의 번영에 기여했는지에 대해서도 다층적인 반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자유주의의 번영 개념 안에 포함되어 있는 ‘화폐로 환원되는’ 가격화와 양화(量化)는 인간의 고유성으로서의 자유의 본질을 근원적으로 위협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자유주의는 지속 가능하지 않은 자기 파괴적 속성을 내재하고 있는 이념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자유주의의 자기 파괴성은 인간을 ‘이기적이고 고립된 개인’으로 전제하는 인간학적 전제에서 비롯되는 결과이기도 함을 우리는 이미 확인한 바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자유주의는 비록 그 구체적인 뿌리가 주로 서구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이른바 ‘상식’으로 자리 잡고 있는 이념이라는 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과연 그렇다면 이러한 이념의 한계에 대한 지적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느냐는 다른 근원적인 문제와 봉착하게 된다.

러미스(D. Lummis)의 적절한 주목과 같이 자유주의는 이미 ‘발전’과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사고력을 저해하는 사고장해를 불러일으키는 상식 아닌 상식이 되어 있고 단지 몇 가지 비판으로 쉽게 대체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분명해 보이는 상황에서 우리의 비판은 자칫 공허한 외침으로 끝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비판이 힘을 지닐 수 있기 위해서는 자유주의의 새로운 형태인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힘과 파괴력에 맞설 수 있는 조용하면서도 근원적인 힘을 갖춘 대안을 동시에 암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을 고려해 볼 때 다행스러운 사실 하나는 이제 우리도 자유주의의 한계를 단순한 이론적 차원이 아닌 삶의 구체적 국면에서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자유주의는 한 시절 독재의 대안으로 목숨을 걸 만큼 숭고한 이념으로 비치기도 했고, 일정한 영역에서는 그러한 민주화의 원동력으로 작동하기도 했기 때문에 자유주의의 한계에 대한 지적은 자칫 그러한 역사에 대한 부정이나 도전으로 비칠 수도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그 자유주의가 이른바 구제금융(IMF) 사태 이후로 경쟁의 원리를 최고의 삶의 원칙으로 삼고 우리 존재를 가능하게 해주는 관계성까지 거침없이 파괴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는 신자유주의로 전환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자유주의에 대한 순진한 기대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과거의 공동체 사회로 회귀하는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최소한 우리 중 누구도 양반과 평민의 구분을 전제로 해서 성립했던 조선의 유교 공동체로 돌아가고 싶어하지는 않을 것이다. 승가 공동체가 중심이 되어 세속의 정치까지도 일정 부분 지배했던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사회로 돌아가는 일도 가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은 일이라는 점을 고려해 보면 과연 우리에게 어떤 대안이 남아 있는지에 대해 막막해지는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서구에서도 마찬가지여서 그들도 그리스의 폴리스나 중세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대안이 될 수 있다거나 되어야 한다고 쉽게 말하지는 않는다.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사이의 오랜 논쟁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묘책은 나오지 않고 있고 가까운 미래에 마련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자유주의의 출발점이 ‘인간 이성의 한계에 대한 겸손한 받아들임’이라는 민경국의 주장을 일관성 있게 적용한다면, 그 어떤 이념도 우리의 모든 문제를 풀어 줄 수 없고 그 이념의 범위 안에 자유주의나 공동체주의 모두가 포함된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 겸허한 자세를 바탕으로 하여 불교적 사유에 바탕을 둔 대안을 모색해 보고자 할 때 우선 주목하게 되는 개념은 바로 인간의 관계성이다. 인간의 본성으로서의 관계성에 대해서는 이미 부버뿐만 아니라 배려윤리학자들에 의해서 충분히 논의되고 있기 때문에 상당한 정도로 상식 수준의 논의를 전개하는 일이 가능하다.

관계성을 증진할 수 있는 노력은 현재의 자유주의가 노정시키고 있는 핵심 문제가 바로 그 관계성 훼손이라는 점에서 시급한 과제일 수밖에 없고, 이 노력은 다시 두 방향에서 전개될 필요가 있다. 하나는 각 개인의 차원에서 자신의 관계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사회 자체가 그 관계성을 회복할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유도하는 방안이다.

전자는 교육을 바탕으로 삼아 각 개인의 삶 속에서 구현될 수 있을 것이고, 후자는 전자의 반성적 성찰에 근거해서 뜻을 모으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사회적 운동으로 전개될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의 시민운동이 단순한 정치적 투쟁의 장을 넘어서서 보다 근원적인 삶의 차원으로 전개될 필요가 있다는 주장으로 확대해석이 가능한 지점이기도 하다.

여기서 잠시 우리는 민경국의 불교 사회철학에 대한 반론으로 돌아가 그의 주장이 지니고 있는 의미와 한계를 다시 정리해 볼 필요성을 느낀다. 그의 불교 사회철학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인간의 탐욕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이를 바탕으로 탐욕을 제거하거나 억제할 수 있는 사회질서를 만들 수 있다는 지적 자만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석기시대의 대면사회에서나 가능한 윤리를 오늘날과 같이 거대한 익명의 사회에 적용하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결국 그는 오늘 우리의 문제는 자유사회의 진화적 과정에 맡겨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 과정 자체가 문제해결을 발견하는 절차이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맺고 있다.

이러한 불교 사회철학에 대한 비판은 최소한 두 가지 점에서 결정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우선 불교가 인간의 탐욕을 무조건적으로 억제해야 하는 것으로 바라본다는 잘못된 전제가 문제이고, 두 번째는 과연 인간의 연기성(緣起性)에 주목하는 불교윤리가 우리가 살고 있는 거대한 익명사회에서는 적용될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의문에서 비롯되는 문제이다. 불교의 중도(中道)가 인간의 탐욕에 대한 무조건적 억제가 아니라는 사실은 상식에 속하기 때문에 첫 번째 문제점에 대해서는 다만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욕구 충족을 어느 선까지 허용할 것인가와 관련된 사회철학적 논의가 더 필요할 뿐이고, 두 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가 자유주의자들의 ‘허구적 자유’에 관한 논의를 통해서 새로운 관계성의 회복 필요성을 간접적으로 부각시킨 바 있다.

인간은 생멸(生滅)과 진여(眞如)의 세계 모두에 속해서 살아가는 존재자이다. 생멸의 세계에서 자신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한 최소한의 욕구는 필연적인 것이지만, 그 욕구가 끝없이 펼쳐지도록 하는 자유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사회체계는 결국 자신의 체계를 파멸로 몰고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지속가능하지 않은 체계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자신의 욕구를 스스로 어느 선 이상으로는 발휘되지 않도록 하는 삶의 지혜를 마련해 왔고, 그런 지혜들 중의 하나로 우리는 불교, 즉 붓다의 가르침을 떠올리는 것뿐이다.

여기서 문제는 ‘어느 선’이라는 기준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인데,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수적인 체계로 드러나거나 양적인 환원이 가능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생존을 최소한으로 보장받는다는 명제와 함께 그 최소한의 생존마저도 타자와의 의존 속에서만 비로소 온전히 보장받을 수 있다는 상식적인 명제를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생존의 문제를 자연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화폐를 통해 해결할 운명에 처해 있는 대부분의 인간에게는 그러한 자각 자체가 삶의 방향과 질을 다르게 설정할 수 있는 큰 깨달음이 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러한 노력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

거대한 익명의 사회에서 관계성에 대한 자각과 그것에 근거한 윤리는 불필요한가? 소위 최대윤리와 최소윤리 사이의 담론으로 정리될 수 있는 이 논의에 대해서는 먼저 최대윤리와 최소윤리 사이에 명확한 구별이 있을 수 없다는 단순한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을 불필요하게 자극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에티켓 수준의 최소윤리가 시민사회의 윤리에서 꼭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 에티켓이 마음을 동반하지 않은 것으로 끝날 때 우리는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도덕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평가하지 않는다.

법정 스님이 최대의 종교는 불교도 기독교도 아닌 친절이라고 강조했을 때 그 친절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무의미하게 미소를 지어 주는 수준의 친절이 아닐 것임은 분명하다. 사회윤리와 개인윤리 사이의 엄격한 구분은 사회 대립을 이분법적으로 설정하면서 변혁을 추구했던 20세기의 기독교사회 윤리관에 의해서나 가능했던 뒤떨어진 것일 뿐이다. 오히려 사회를 움직이는 핵심 원리는 각 개인의 삶의 지향이나 덕성과 분리되지 않는 최대윤리이고, 자유주의가 말하는 사회의 진화적 과정도 바로 그러한 사회철학과 윤리의 범주로부터 자유로운 것일 수 없다.

결국 우리에게 남는 대안은 그동안 자유주의가 허구적 개인의 자유와 시장 만능주의를 옹호하기 위해서 버려야만 했던 관계성과 정서를 회복하는 사회로의 지향이다. 관계성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기본임과 동시에 인간다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원천이기 때문이고, 정서는 타인과의 공감을 통해 삶의 의미를 직접적으로 느끼게 하는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한 인간에게 요구되는 이러한 관계성과 정서와 분리된 어떤 사회의 영역을 설정하는 일이 익명의 거대한 시민사회 속에서 필요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회가 구성원의 인간다움과 인간으로서의 삶을 위협하는 영역까지 침범할 수 없고 그 사회와 개인의 관계에서 익명성과 대면성을 구별해낼 수 있는 경계선 자체가 불분명하다는 점에서 자유주의가 추구하는 익명의 사회는 또 하나의 허구이거나 지속가능하지 않은 대안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관계성과 정서가 한 개인의 고유성을 위협하거나 그에게 부여된 인권을 침해하는 수준까지 허용하는 기제가 될 수는 없다. 정서적 관계 속에서 정체성과 의미를 발견해 가는 인간다운 삶은 다른 한편으로 그 자신의 고유성, 즉 존귀함을 구현해 가는 과정으로 이어져야 하고 만약 그 관계성이 각 개인 사이의 평등하면서도 연기적인 관계를 전제로 하여 성립하는 것이라면 충분히 보장될 수 있는 실천적인 대안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의 대안은 연기적 독존주의(緣起的 獨尊主義)의 이념 속에서 모색되어야 마땅하다.

4. 자유주의의 ‘걸림 없는 자유’를 기대하며

자유주의와 불교 사이의 만남의 장에서 느끼게 되는 첫 번째 당혹스러움은 자유주의의 ‘자유’에 해당하는 불교의 개념을 설정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이다. 모든 사상들 사이의 만남에서 피할 수 없는 지점이기는 하고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가 모두 동일한 내포와 외연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 당혹스러움은 쉽게 해소되기 어려운 아포리아의 형태로 남아 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이미 우리 사회에서 자유주의와 불교의 만남은 현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그 파장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 정신에 대한 흠모와 조계종단으로 대표되는 현실 불교계에 대한 실망과 비판이라는 상반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상황임을 직시하지 않을 수도 없다.

대표적인 자유주의 정치철학자 중의 하나로 꼽히는 벌린(I. Berlin)은 서양의 고대 그리스에서 ‘폴리스의 정치에 참여할 수 있음’을 의미하던 자유가 근대로 접어들면서 ‘삶의 영역 가운데는 예외적인 상황이 아닌 한 공공의 권위가 침투해서는 안 되는 부면(사생활)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꾸기 시작했다는 역사적 고찰을 통해 서구 자유주의의 핵심을 잘 요약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서구의 근대 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공공의 권위로부터 보호받는 사적 영역(프라이버시)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했다는 것이고, 이러한 정치적 자유주의는 보다 적극적으로 사유재산권을 보장하면서 그 자유로운 매매를 보장할 수 있는 시장자본주의의 형태로 정착했음을 우리는 상식으로 공유하고 있다.

이 자유주의는 그런 점에서 한 개인의 고유한 영역을 인정받는 인권의 영역을 개척했고 시장제일주의를 바탕으로 삼아 양적인 성장을 확산시키면서 이른바 제국주의와 근대화 담론을 앞장서서 퍼트리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했지만, 그 안에 개인들 사이를 임의적으로 구별하여 담을 치게 하고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관계를 이익을 준거로 하는 일종의 계약관계로 환원시키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한 인간에게 온전히 고유한 자유는 존재론적으로 성립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자들의 자유는 원초적으로 ‘허구적 자유’일 수밖에 없었음을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고, 타자의 희생을 전제로 해야만 지속적으로 팽창하는 가운데 보장받을 수 있는 배타적인 사유재산권도 지구공동체의 생태를 무너뜨리는 지속가능하지 않은 형태로 정착했다는 사실도 우리는 함께 살펴보았다.

한 개인의 고유성은 존중받아야 마땅하지만, 그 고유성이 타자와의 연기성 속에서만 형성될 수 있다는 논자의 연기적 독존주의는 불교 사회철학의 핵심 논점을 오늘날의 이념적 수준의 개념으로 전환시킨 것에 불과하다. 한 개인의 삶이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우선적으로 생존을 보장받아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욕구 충족을 위한 최소한의 요건이 당연히 보장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배타적인 추구로서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연기성에 대한 인식에 토대를 두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보장받을 수 있다. 자신의 존재 안에 들어와 있는 연기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서 그 연기성 자체가 부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애덤 스미스의 개념으로 설명한다면 ‘보이지 않는 손’이 된다. 그렇게 보면 애덤 스미스의 자유주의는 연기성에 대한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는 진정한 자유주의라고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신자유주의는 연기성에 대한 자각에서 일탈하여 개인이 마치 온전한 고립성과 이기성 속에서 존재하는 것처럼 전제하는 인식론적 오류는 물론 다국적 자본의 그 ‘자유’가 보여 주는 것과 같이 한 나라를 순식간에 파탄으로 몰아넣고 유유히 자신의 이익만을 챙겨서 떠나가는 자유를 의미하는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자유주의의 자유에 해당할 수 있는 불교의 대응 개념을 떠올릴 필요를 느끼는데, 바로 그것은 걸림없음[無碍]이다.

어떤 것으로도 침해받을 수 없는 자신의 존귀함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그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연기성을 제대로 인식하는 가운데 욕구 충족과 자비행 사이에 걸림이 없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불교가 지향하는 삶의 목표이자 논자 자신의 목표이기도 하다. 이러한 걸림없음이 개인과 개인 사이의 고립을 강화하고 공동체와 개인,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의 존재론적 의미를 지속적으로 약화시키는 자유주의의 자유 개념을 대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지속가능한 자유주의가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틀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주목해 볼 만한 불교철학의 개념은 기신론적 사유(起信論的 思惟)와 화엄(華嚴)이다.

생멸과 진여 사이의 유기적인 관계를 전제로 하는 기신론적 사유는 이미 원효에 의해 우리의 사유 방식으로 정착했고, 화엄의 경우에도 모든 존재자들 사이의 관계를 하나의 그물망으로 설정하는 이론적 틀로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교설로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불교의 성격을 ‘화엄을 바탕으로 하는 선불교’라고 규정하는 일이 가능할 정도로 화엄은 우리 불교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고, 일정한 범위 안에서는 한국인들의 가치관 구조를 결정짓는 한 변수로 작동하고 있기도 하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서구에 뿌리를 두고 있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우리 사회의 이념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우선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정당한 인식이 선행되어야 하겠지만, 더 근원적으로는 자신의 자유 개념을 제대로 정립하는 과업이 앞서야 하고 그 과정에서 불교의 기신론적 사유와 화엄의 정신이 ‘걸림없음’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하여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박병기 
한국교원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서울대 윤리교육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 박사. 불교원전전문학림 삼학원 수료. 현재 국가생명윤리위원회 전문위원, 가산불교문화연구원 전문위원. 저서로 《우리 시대의 문화와 사회윤리》 《동양 도덕교육론의 현대적 해석》 등이 있음.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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