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근 지음 《윤회와 반윤회》(충북대, 2008)

《윤회와 반윤회》
정세근 지음 (충북대, 2008)

정세근 교수의 《윤회와 반윤회》는 개설서의 성격과 연구서의 성격이 겹쳐진 저술이다. 이 책은 모두 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에서 5장까지는 개설서의 성격을 나타내는 부분이고, 6장이 이 책의 핵심부분이다. 여기서는 국내학계에서 벌어진 윤회와 무아에 관한 논쟁을 소개하고 자신의 견해를 개진하고 있다.

 7장에서는 6장에서 제기되지 않은 문제를 다시 해석하고, ‘한국불교계에 고함’이라는 소제목으로 이 책에서 논증하고자 했던 내용을 기초로 해서 한국불교의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이 책의 핵심은 6장에 있다고 하였지만, 그 이전의 도입 부분에서도 눈여겨볼 대목이 적지 않다. 2장에서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梵我一如)를 소개하면서 동학의 ‘인내천’과 비교하는 대목은 매우 흥미롭다. “범(梵)과 아(我)는 모두 궁극적인 것으로 결국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말로는 ‘그것은 곧 너이다’라는 진술로, 문맥상으로는 ‘절대자는 곧 그대’라는 것이며, 의미상으로는 ‘신은 곧 자아’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우리에게 생소하지 않다. 동학(東學)에서 말하는 ‘사람 곧 하늘’(人乃天)이라는 사상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이때 ‘하늘’은 ‘한울’ 또는 ‘한울님’으로 상당히 인격신적인 것이지만 그 또한 인간에 편재해 있다는 점에서 엄격한 초월성과는 거리가 멀다.”(119쪽)

또한 2장에서 《베다》와 기독교의 창조설을 비교한 부분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대목이다. “유대기독교적 창조설이 인간과 신의 형태나 본성의 유사함을 강조하는 신인동형설(神人同形說, anthropomorphism)이라면 나의 정의에 따르면, 《베다》는 신의 각 부분이 인간이 되었으며, 그 인간에게 주어지는 은총이나 구속은 특정부류에게 제한된다는 의미에서 부분배태설(部分胚胎說, embriopar-ticularism)이다.

부분배태설은 누구는 은혜를 받을 수 있지만 누구는 그렇지 못하다는 배타적 은총주의이며, 발생학적 차이에서 신분적 차별을 도출해내는 한정적 특수주의이다. 이러한 차이는 유대기독교가 신 앞에서의 평등주의로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반면, 베다적 힌두교는 신의 신체적 차이에 비유함으로써 불평등주의를 고착화시키기 쉬움을 보여준다.”(116쪽)

그리고 저자(정세근)가 한국불교를 보는 관점도 폭이 넓고, 일반적 이해와는 다른 점이 있다. “살아 있는 종교로서의 불교는 인도를 떠나 스리랑카, 티베트, 미얀마 그리고 아시아로 와야 했다. 그렇게 달마는 동쪽으로 갔다. 그 밖에는 남쪽 섬과 북쪽 산에만 불교왕국이 유령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

게다가 미얀마, 월남, 중국 등은 공산혁명 이후 불교도들이 탄압받았고 그 결과 전통으로서의 불교의 모습은 결코 과거와 같지 않다. 대만이나 일본이 전통을 지키고는 있지만 대만은 도교의 영향으로, 일본은 신도의 영향으로 불교의 진정성을 지키기가 어려웠다. 대만에는 도교사원이 불교사원보다 훨씬 많으며, 일본의 ‘신불습합론(神佛襲合論)’은 불교를 신도에 종속시켰다. 오직 한국만큼은 유교의 불교탄압으로 말미암아 불교가 출세간적이 됨으로써 오히려 그 순수성이 잘 보존되고 있는 곳이다. 앞으로 그리스도교의 영향이 얼마나 거세질지가 큰 변수이긴 하지만, 남한에서만큼은 불교가 그 자체로 이단으로 취급받지 않는다.”(206쪽)

현대 인도의 3대 인물로 간디, 네루, 암베드카르를 들 수 있는데, 5장에서 간디와 암베드카르를 비교한 내용도 음미할 만한 대목이다. “민족통일이 우선인가, 아니면 강대국으로부터의 자립이 먼저인가? 민족통일을 우리 힘으로 하고 싶지만 강대국이 꼭 끼고, 강대국으로부터 자립하자니 민족통일이 되어야 하고, 이렇게 문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착종되어 온 것이 우리 학생운동의 현실이었다. 이런 구도로 인도를 바라보자. 간디는 국제 모순을 무엇보다도 우선시했다.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암베드카르는 국내 모순을 철저히 인식했다. 달리트(불가촉천민)의 해방 없는 인도의 독립은 힌두교에 의한 억압을 고착화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암베드카르는 간디와 사사건건 부딪히게 되는 것이다.”(262-263쪽)

6장 ‘무아와 윤회 논쟁’에서 국내 학자들의 윤회와 무아에 관한 관점을 소개하고 저자의 견해를 펼친다. 먼저, 윤호진 교수가 무아(無我)이론과 윤회(輪廻)이론이 서로 충돌하는 점이 있다는 문제 제기를 하였고, 그 뒤를 이어서 정승석 교수는 무아이론과 윤회이론이 서로 부딪치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김진 교수는 무아이론과 윤회이론의 충돌을 해결하기 위해서 칸트의 요청이론을 받아들일 것을 제시하였다. 비유를 들면, 어떤 사람이 두 사람의 견해가 충돌한다고 주장을 하자, 다른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충돌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상의 내용에서 보면 충돌하지 않는다고 하고 있고, 또 다른 사람은 이 견해의 충돌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믿을 수 있는 제3자의 견해에 근거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형국이다. 이러한 논의 전개 과정에 대해 6장에서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 그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윤호진 교수는 ‘무아이론’과 ‘윤회이론’은 불교라는 큰 건축물을 세우고 있는 두 개의 큰 기둥인데, 무아이론과 윤회이론이 서로 양립할 수 없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무아이론의 입장에서는 윤회의 주체를 인정할 수 없고, 또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는 것은 고정 불변적인 자아와 실체적인 자아를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이는 결국 무아이론을 포기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약 윤회의 주체가 되는 실체적인 자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누가 윤회할 것이며, 누가 과보를 받을 것이며, 또한 누가 열반을 성취할 것인지 문제가 된다. 이 두 이론은 양립하지 않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느 하나를 버릴 수도 없다. 유일한 해결책은 이 두 이론을 모두 살려야 하는 것인데, 이것은 초기불교에서 후기불교에 이르기까지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초기불교 경전인 아함에는 여러 가지 해결책이 제시되었다. 그것은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푸드갈라(Pudgala) 이론이다. 이는 5온과 같은 것도 아니면서 다른 것도 아닌 것이다. 이것이 윤회의 주체가 된다. 둘째, 식(識, vijn~켥na) 이론이다. 이는 항상 머무는 존재이며 변하지 않는 존재로서 한 생(生)에서 다른 생(生)으로 윤회하는 영혼 또는 자아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셋째, 상속(相續, sa컴tati) 이론이다. 이는 어떤 물질적 존재나 정신적 존재도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고, 흐르는 개울물처럼 한순간도 동일하지 않으면서도 계속 이어진다는 것이다.

무아와 윤회가 양립할 수 있는지의 문제에 대해 정승석 교수는 무아와 윤회는 충돌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그것을 ‘무아윤회’라고 부른다. 윤회는 자아가 없어도 성립되는 것인데, 범부는 자아를 만들어 내어서 자아에 집착하고 고통을 감수하고 있으므로, 범부가 집착하는 자아를 부정해서 윤회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또 범부가 이해하는 방식이나 언어로 무아의 진실을 전하는 것이 윤회설이므로, 이 점에서 윤회설과 무아설은 그 취지에서 같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윤회의 주체로서, 해탈의 주체로서 알라야식을 거론하는데, 이는 윤호진 교수가 주장하지 않은 내용이다.

김진 교수는 무아와 윤회가 서로 충돌하는 것을 칸트의 요청이론에 의해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무아설’은 《우파니샤드》의 ‘브라흐만’과 ‘아트만’을 부정하는 것이고, ‘윤회설’에서는 도덕적 수행의 결과가 다음 생(生)에도 계속 이어지는 것을 내용으로 하기 때문에 전생(前生)의 ‘나’와 다음 생(生)의 ‘나’ 사이에 인격의 통일성이 요구된다. 김진 교수는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칸트의 요청이론을 빌려와서 ‘윤회의 주체’로서 ‘자아’를 요청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한자경 교수는 김진 교수의 주장에 대해 비판한다. 그 비판의 요점은 두 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는 ‘무아윤회’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 생(生)의 영속성이나 윤회의 영속성은 자기동일적인 실제로서 ‘자아’를 전제함이 없이 연기적 인과연속성에 의해서도 성립된다는 것이다. 이는 단지 불교만의 통찰이 아니고 오늘날 자아정체성의 논의에서도 흔히 말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오늘의 내 몸이 어제의 내 몸과 인과(因果)의 관계에 있다면, 비록 40년 전의 내 몸과 오늘 내 몸 사이에 동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할지라도 과거의 몸과 오늘의 내 몸은 같은 몸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 경우, 반드시 자기동일적인 몸이 있어야 현재의 몸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하나는 칸트의 ‘요청이론’을 불교 사상에다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칸트는 인간의 영혼이 불멸이라는 점과 신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에 이것들을 요청한 것이다. 그런데 불교 사상에 요청이론을 적용하면, 석가모니도 ‘윤회하는 주체’와 ‘열반’을 요청했다고 해석되고, 이는 석가모니도 이 두 가지를 몰랐다는 것이 된다. 이러한 해석은 깨달은 사람을 인정하는 불교의 특성을 무시하는 것이 될 것이다.

저자(정세근)는 이처럼 무아와 윤회 문제에 관한 여러 학자의 견해를 소개하고 나서 자신의 주장을 편다. 저자는 연기설(緣起說)에 주목해서 윤호진 교수의 문제 제기에 대답하고자 한다. 그것은 모든 사물의 존재방식은 서로 의존하고 있는 것, 곧 연기(緣起)하고 있는 것이므로 윤회하는 현상도 연기의 하나이고, 또한 사물이 서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사물의 존재 방식도 무아(無我)라는 것이다. 따라서 연기설에 입각하면, 무아와 윤회의 대립은 해소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윤회와 반윤회》에서는 “윤회는 연기의 힌두적 상상력에 불과하다. 윤회가 신화적이라면 연기는 철학적이며, 윤회가 종교적이라면 연기는 논리적이다. 연기는 윤회를 설명하며, 포용하며, 흡수한다. 연기 앞에 윤회가 설 자리는 없다.”(280쪽)라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이 책의 내용의 참신성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윤호진은 《무아윤회문제의 연구》(103쪽)에서 연기설로 무아와 윤회의 양립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이미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후학으로서 선행 연구인 윤호진의 《무아윤회문제의 연구》의 주장에 왜 따르지 않는지 충분히 그 근거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윤회와 반윤회》에서는 각주를 통해서 《무아윤회문제의 연구》를 참고했음을 밝히고 있을 뿐이지, 《무아윤회 문제의 연구》에서 연기설에 입각해서 무아와 윤회의 충돌을 해결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이 어떤 점에서 문제가 되는지 제대로 입증하고 있지 못하다.

《윤회와 반윤회》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어떤 문헌적 근거가 있는 것인지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고, 또 문헌적 근거가 부족하다면 불교 사상의 보편적인 내용에서 추론할 때 자신의 주장이 더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라는 것을 설명할 필요가 있는데, 이 책에서는 그 점이 부족하다(어느 정도 설명을 하고는 있지만 그것이 체계적이라고 할 수 없다).

이 점에서 《윤회와 반윤회》에서 주장하는 내용에 참신성은 있다고 할 것이나, 그 참신성을 체계적으로 풀어내지 못한 아쉬운 측면이 있다. ■

  

이병욱
고려대, 중앙승가대 강사. 1995년 〈천태지의철학사상논구〉로 고려대 철학과 대학원 박사. 저서로 《천태사상》 《고려시대의 불교사상》 《에세이 불교철학》 《인도철학사》 《한국불교사상의 전개》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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