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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유가행파 수행도의 양상들*/슈미트하우젠
해외논단 : 번역 김성철 icchantika@hanmail.net
[42호] 2010년 03월 18일 (목) 람버트 슈미트하우젠 전 함부르크대학 교수

* 이 글은 슈미트하우젠 교수가 2005년 12월 8일 일본 류코쿠(龍谷) 대학에서 행한 강연 원고를 번역한 것이다.

1. 들어가는 말

이미 조나단 실크(2000)가 고(故) 나가오 가진(長尾雅人) 교수 기념논문집에 기고한 논문을 통해 명백히 하고 있듯이 요가차라(yog켥c켥ra)라는 말은 초기 경전 이후 여러 불교학파 문헌에서, 일반적인 의미로 자주 요긴(yogin)이라는 개념과 나란히 등장한다.

따라서 요가차라란 일반적으로 말하면, 간단히 그의 행동 혹은 생활방식(켥c켥ra)에서 정신적, 특히 명상적이고 정신집중적인 실천(yoga)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대부분은 비구)이 될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특히 교리 해설적인(doxographic) 문맥에서 요가차라라는 말은 ‘비즈납티마트라(vij켘-aptim켥tra) 이론’―‘유식(consciousness only)’ 혹은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어떤 말로 번역해도 상관없지만―이라는 의미에서 유식학파(Vij켘켥v-켥da)로 알려진 어떤 특정한 입장을 신봉하는 사람들에 대해 사용하게 되었다. 사실 적어도 이 학파의 초기 단계에서는 요가의 실천 혹은 그것에 관한 숙고가 중심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이미 그 학파의 기본 문헌의 명칭 《유가사지론(Yog켥c켥rabh궝mi-굴켥stra, 정신적 수행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단계에 관한 권위 있는 텍스트)》으로부터도 명백하다. 이 대작 텍스트는 특정한 승단 혹은 그룹에서 유래하는, 혹은 (구전이거나 혹은 이미 문자화되어) 전승되어 온 교설이나 고찰, 해설을 편집한 것인데, 어느 정도 체계적인 정리와 개작조차 엿보인다.

이 텍스트의 편집은 아마 기원후 4세기경, 몇 단계에 걸쳐서 이루어졌다고 생각되지만, 원래 이런 종류의 텍스트의 성립 연대는 불확실함으로 가득 차 있다. 어쨌든 《유가사지론》은 이른바 유가행파의 가장 오래된 자료를 담고 있다고 간주된다. 이들 자료는 결코 동질적이지 않다. 때때로 다른 견해 혹은 접근, 그리하여 다른 발전 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두 부분을 구별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많든 적든 오랜 전통의 입장, 곧 ‘제자들의 탈것(혹은 길, 굳r켥vakay켥na(성문승))’의 태도를 공유하는 부분이고, 다른 한편은 명확히 ‘큰 탈것(혹은 길, Mah켥y-켥na)’ 곧 대승을 표명하는 부분이다.

이 강연에서 나는 세 가지를 다룰 것이다.

①첫째, 〈성문지(굴r켥vakabh궝mi)〉에서 기술되고 체계화된 수행의 중심적인 양상의 윤곽을 그려보고자 한다. 〈성문지(聲聞旨)〉는 명백히 《유가사지론》에서 꽤 초기에 속하는 장이고, 그 이름이 보여 주듯이 전통적인 성문승의 관점에 합치한다.

②둘째, 이 수행 형태를 《유가사지론》의 후반부인 〈섭결택분(Vini굴-cayasa컫graha컹i, 해명의 집성)〉 중에 대승 지향적인 두 단락과 대비시켜 보고자 한다.

③셋째, 수행에 관한 이들 기술이 어떻게 해서 유가행파에 특유한 수행 ―‘유식’이라는 사고방식을 중심에 두고, 그것을 산출했을지도 모르는 실천―으로 변모했는가를 간결하게 보여 주고자 한다.

2. 〈성문지〉의 수행

〈성문지〉에서 수행의 해설은 꽤 복잡하고, 다양하고 전통적인 패턴 및 개념과 함께 새롭게 보이는 것도 사용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두 가지 수행 타입의 구별이다. 곧 세간(laukika)도와 출세간(lokottara)도이다. 출세간도만이 열반 곧 재생과 고통으로부터 최종적인 해탈로 이끈다. 한편, 세간도는 더 높은 존재 영역(과 그곳에서의 재생)에 일시적인 상승을 이끌 뿐이다.

1) 세간도

세간도의 원리는 요가행자가 일련의 깊은 정신집중 단계로 점차 향상하는 것이다. 높은 정신집중 단계에 도달하는 방법은 상대적으로 낮은 단계의 ‘거침(aud켥rikat켥)’과 높은 단계의 ‘탁월성, 온화한 성질(굴켥ntat켥)’에 대해 깊이 명상하는 것이다. 그 결과, 요가행자는 낮은 단계에 대한 집착에서 자신을 해방하고, 그 결과 사후 더 높은 정신집중 단계에 각각 대응하는 천계에 재생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요가행자는 일상 세계―감각적 쾌락의 영역(k켥madh켥tu)―의 고통과 악하고 유해한 사고가 모두 소멸한 제1정려(dhy켥na)의 탁월성에 대해 명상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 명상에 의해, 제1정려의 정신집중 단계에 도달한다. 그는 사후에 욕계가 아니라 제1정려에 대응하는 천계에 재생하게 된다. 그러나 다시 세 개의 정려(제2, 제3, 제4정려) 단계에 상승을 계속하는 것도 가능하다. 거기서는 불안정한 사고, 기쁨의 감정,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신체적 쾌감조차 점차 모두 제거한다. 제4정려 단계는 완전한 평정(upek콴켥)과 주의집중(sm콘ti)의 경지다.

제4정려 이상에는 다시 네 단계가 존재한다. 그것들은 다른 타입이어서 아마도 기원을 달리할 것이다. 이들 단계에서는 식별적이고 개념적인 의식(sa컫j켘켥)이 서서히 제거된다. 최초로 요가행자는 공간 혹은 에테르(켥k켥굴a)의 무한성의 영역으로 상승한다.

곧 다양한 물질 요소가 모두 모습을 감추고, 요가행자는 무한하고 공허한 공간 곧 에테르만을 의식하는 것이다. 다음 단계는 식(vij켘켥na)의 무한성의 영역이다. 식이라는 개념은 복잡해서 번역하기 어렵다. 많은 경우 그것은 지각이나 인식의 작용 혹은 과정을 가리키지만, 때로는 단순한 지각 능력, 인식 능력 또는 직관을 가리킨다.

또 그와 같은 자격으로 식은 살아 있는 중생을 구성하고, 그것에 의해 생체는 사체와 구별되는 것이다. 때로는 식은 지·수·화·풍·허공과 나란히 제6의 원소로 거론된다. 이것은 거친 원소와 공간의 무한성의 영역을 넘어선 식의 무한성의 영역의 경우에도 들어맞는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오랜 바라문교의 체계인 상캬와 비교하고 싶어진다. 그들에 따르면 (계란 모양을 하고 있는) 세계는 그 바깥이 훨씬 미세한 물질로 이루어진 복수의 층으로 덮여있다. 곧 여러 원소, 공간/에테르,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신적 물질이 미세하게 빛나는 것이다.

요가의 정신집중에 들어 있는 요가행자가 거친 물질적 세계를 정신적으로 초월하여 보다 미세한 원소, 공간/에테르, 그리고 식의 영역으로 차례로 상승해 가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다시 상승할 경우, 이른바 식의 가장 미세한 우주적 외피를 돌파하고, 이윽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영역(켥ki켘cany켥yatana)에 들어간다. 그러나 새삼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고 개념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이 사실은 명확히 의식하고 있다.

요가행자는 다시 일보 전진할 수 있다. 이 최후의 일보는 이미 그의 의식 내용의 감소에 의해서가 아니라, 개념적 의식 그 자체의 감소로 특징지워진다. 이 단계는 개념적 의식 그 자체가 이른바 의식도 비의식도 없는 영역(naivasa컫j켘켥n켥sa컫j켘켥yatana)으로 희미하게 소멸해 가는 것이다. 이 단계조차도 정신집중 안에서 그 영역에 도달한 요가행자가 재생하는 우주적 영역과 대응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 영역은 세간적 존재(곧 윤회) 중에서 가장 높은 영역이고, 그러므로 ‘생성하는 [세계의] 정점(bhav켥gra)으로 불리고 있다.

이 과정의 자연스런 경과는 명백히 개념적 의식의 완전한 ‘소거’다. 실제로 경전에는 그 ‘[명백히 개념적인] 의식도 비의식도 없는’ 단계 뒤에 자주 의식과 느낌의 소멸(sa컫j켘켥-vedayita-nirodha)이라는 새로운 단계가 뒤따른다. 이 단계는 원래, 이미 해탈한 사람이 죽음에 이르러 도달하는 최종적인 해탈의 경지를 예견하는 신비적 체험이었다. 이 경험을 통해 의식도 비의식도 없는 단계라는 최고의 단계를 포함해서, 세간적 존재의 모든 존재 방식이 궁극적으로는 무가치한 것이라는 사실이 최종적으로 밝혀지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맞다면 제1정려에서 (혹은 다른 실천에서) 시작하여 의식과 느낌의 소멸의 달성으로 끝나는 일련의 정신집중의 여러 단계는 본래, 최종적인 해탈로 향하는 길 혹은 적어도 그와 같은 길의 개념 또는 이론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최종적인 열반을 예견하는 경험이 명료한 의식 없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쉽게 알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초기불교 전통의 지배적 경향은, 최종적인 해탈은 통찰(praj켘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 이와 같은 해탈의 길 개념을 거부한 것이다.

이 경향은 정신집중을 통해 의식과 느낌의 소멸의 경지에 도달하는 가능성을 거부하지 않았지만, 이 달성의 구제적(soteric) 작용은 부정했다. 때로는 열반과 유사한 것으로 특징지워졌지만, 이윽고 열반을 예견하는 신비적 경험으로는 이해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것은 의식도 비의식도 없는 영역이라는 최고 단계를 포함해서 모든 세간적 존재의 무가치성을 경험적으로 명백히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세간적 존재의 여러 단계가 순서대로 무가치한 것이라고 경험되어, 다음에 오는 더 높은 단계를 경험함으로써 정신적으로 초월해 간다는 원리에 기초한 수행도는 비상비비상처에서 끝나고, 더 이상 이것을 넘어서 열반으로 이끌 수는 없다. 그것은 결국 최종적인 해탈도가 아니라 단순한 세간도인 것이다. 이와 같은 수행도의 재평가는 〈성문지〉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다른 전통에도 발견되고 그 기원 또한 매우 오래되었다.

2) 출세간도

〈성문지〉의 출세간도도 또한 본질적으로는 오랜 경전의 개념이 변화한 것이지만, 이 경우 변화는 다른 평가가 아니라 오히려 체계적인 재건축이다.

경전에는 자주 (이미 1.〈성문지〉의 수행에서 언급한 것에 더해) 다시 두 가지의 해탈도에 관한 기술이 나타난다. 그 최초의 것에 의하면, 첫 번째는 4정려(dhy켥na)에 들어서, 제4정려에서 4성제(켥rya-saty켥ni), 다시 말하면 고제, 집제, 멸제, 도제를 명확히 통찰함으로써 해탈이 획득된다. 두 번째는 일반적으로 우리 자신이나 인격을 구성하거나 우리에게 속하는 모든 요소들, 곧 신체(r궝pa), 느낌(vedan켥), 개념적 의식(sa컫j켘켥), 감정적이고 의지적인 충동(sa컫sk켥ra), 그리고 지각(vij켘켥na)이 영원하지 않고, 불만족스럽고, 자기 자신 혹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이라는 것을 통찰한 결과가 해탈이다.

두 번째 기술에서는 이러한 타입의 통찰이 수행자가 제4정려에 든 이후에만 획득하는 것이라고는 서술되지 않는다. 심지어 그와 같은 통찰은 명료한 의식(sa컫j켘켥)을 동반한 모든 정신집중 단계에서 획득된다고 명백히 말하는 경전도 있다. 〈성문지〉에서는 이상과 같은 해탈을 위한 통찰과 그것을 실현하는 조건들에 관한 다른 기술이 대체로 단일한 패턴으로 통합되어 있다.

한편으로는 해탈을 위한 통찰은 4성제에 대한 명확하고 직접적인 직관이라고 이해되고 있지만, 그 발현은 제4정려에 도달하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동시에 무상, 고, 무아는 고제의 양상으로 이해되게 되고, 따라서 4성제의 패턴 안에 통합되는 것이다. 이들 세 양상에 더해 [실체적 자아의] 공(굴궝nya)이 네 번째 양상으로 더해져 있다. 여기까지 〈성문지〉는 설일체유부의 아비달마에서 알려진 것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다시 〈성문지〉에는 그 독자적인 공헌인 10개의 양상이 존재하고 있다. 그것들은 아래와 같이 네 양상 아래에 배분되어 있다. 먼저, 조건 지워진 것은 모두 영원하지 않다(anitya). 그것들은 다음과 같은 것에 지배되고 있기 때문이다.

①변화와 쇠퇴(vipari컹켥ma)
②소멸(vin켥굴a), 그리고
③분리(viyoga)이고,

이 세 양상은 다시

④가까이 있다(sannihita). 곧 언제라도 그것들이 나타난다고 예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⑤사물의 본질(법성, dharmat켥)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적어도 세간적이고 조건 지워진 것은 모두 불만족스럽다(du칡kha). 왜냐하면 그것들은

⑥혐오되고, 바람직하지 않거나(ani콴쿡a, 예를 들어 아픈 느낌), 혹은
⑦속박·구속이거나(samyojana-bandhana 예를 들어, 감각적 쾌락), 혹은 적어도
⑧[궁극적인] 안온은 아니기(ayogak콴ema) 때문이다.

다시 조건 지워진 것은 모두 공(굴궝nya)이다. 왜냐하면

⑨인식 과정 혹은 재생의 주체로서 어떠한 실체적 자아도 관찰되지 않기 때문이다(anupalambha).

또 그것들은 자아가 아니다(an켥tman). 왜냐하면

⑩여러 조건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자립적인 것이 아니기(asvatantra) 때문이다.

출세간도를 다루는 〈성문지〉의 최초의 아주 긴 기술에서 요가행자는 대단히 주의 깊게 이상의 열 가지 양상을 명상할 것이 권장된다. 변화와 쇠퇴의 양상에 대해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 그것은 또한 외면적으로는 견고해 보이는 물질조차도 찰나적이라는 것을 추리하는 기초로 사용된다.

또 요가행자는 눈에 보이는 것의 관찰에만 한정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 관찰을 통해 얻은 이해를 지각할 수 없는 것, 곧 세계의 보다 높은 영역과 거기에 재생하는 것까지 유추를 통해 확대해야 한다(494,20―495,13). 마찬가지로 그는 무상, 고, 공, 무아가 끝이 없고, 윤회적 세간적 존재를 본질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특징짓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495,21―496,9). 이와 같이 그는 마음을 세간으로부터 돌려서 열반에 향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아직 주저하고 열반에 대해 위축되어 있다. 그의 명상 행위가 자주 자아 관념에 의해 중단되기 때문이다(497,3―9). 그의 마음은 ‘내가 고통을 고통으로 보는 자이다. 내가 고통의 원인을 원인으로 보는 자이다’ 등으로 생각하면서, 여전히 영원한 주체를 상상한다(497,9―16).

이 요가행자는 명상의 대상을 밖으로부터 돌려서 대신 명상하는 마음 자체를 명상의 대상으로 함으로써 대항해야 한다(497,17―498,2). 다시 말하면, 요가행자의 마음이 직전의 마음을 되돌아보면서, 명상하는 마음 자체도 영원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며, 늘 새로운 순간에 불과한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도 무상하고, 고이고, 공이고 조건 지워진 것이고, 따라서 자아가 아닌 것이다(498,2―16). 이와 같은 명상을 충분히 길게 실천하면, 자아 관념이 소멸하고 마음은 이윽고 열반에 대해 위축되는 일이 없게 된다.

그 후 요가행자는 깊은 적정(굴amatha)의 상태에 도달한다. 대단히 깊기 때문에, 마치 그의 마음은 이윽고 모든 대상을 갖지 않은 것처럼 완전히 기능을 정지하여 소멸해 버린 것처럼 생각된다(499,17―500,3). 〈성문지〉는 어떤 사람들이 이 상태를 현관(abhisamaya) 곧 해탈을 야기하는 진실의 직접 경험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라고 서술한다(500, 4-5).

실제로는 해탈 경험은 이 깊은 적정 단계 직후에 일어나는 4성제에 대한 명확한 통찰(ni굴caya-j켘켥na)이라는 형태로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 통찰은 개념화되지 않고(nirvikalpa), 직접지각(pratyak콴a-j켘켥na)이라고 규정된다(500,13-17).

그것은 지각할 수 있는 것뿐 아니라 통상 지각할 수 없는 것, 예를 들어 세계의 보다 높은 영역에 관해서도 4성제를 직접 지각하는 것이다(500,16―17: satye콴u ……pratyak콴aparok-콴e콴u). 이 통찰이 출세간 상태의 최초의 마음이다.

그것은 완전히 그리고 한 번에 영원히 일군의 최초의 정신적 더러움(번뇌), 곧 잘못된 견해나 의심 및 그것들의 잠재적인 원인(습기)을 파괴한다(500,11 u.17―19). 그러나 그것은 아직 완전한 해탈은 아니다. 정서적인 더러움(번뇌)을 제거하기 위해 출세간적인 통찰의 실천을 반복할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만약 초기 단계에서 세간도를 실천했다면 그것은 단축될 수 있다.).

3) 예비적 수행

〈성문지〉의 상당한 부분이 어떤 의미에서 세간도 혹은 출세간도에 대한 준비로 이해할 수 있는 수행의 기술에 할애되어 있다. 이들 수행도 본질적으로는 경전에 근거해 있고, 다른 자료에서도 거의 완벽하고 유사한 체계적인 틀로 이미 짜여 있다(198,12-199,1; 411,15 참조).

이 틀에 따르면, 다른 실천 방법은 각각 다른 타입의 인간에게 적용된다. 만약 입문자가 육체적 쾌락(r켥ga)을 바라는 경향이 강하다면 그는 불쾌한 것, 곧 혐오스러운 몸의 다양한 부분, 특히 인간의 장기나 (혈액, 고름, 침 등과 같은) 체액 혹은 썩어 가는 사체의 각 단계를 명상하는 부정(a굴ubha)관을 실천해야 한다. 만약 증오(dve콴a)의 경향이 강하다면 적절한 실천은 적을 포함한 모든 중생에 대한 자애의 마음(maitr콒)을 기르는 것이다.

지적 혼란(moha)이 주요한 문제인 사람은 연기(prat콒tyasamutp켥da)를 명상의 대상으로 선택해야 한다. 사고가 안정되지 않는(vitarka) 경향이 있는 사람은 주의집중된 호흡법(켥n켥p켥nasm콘ti)을 실천할 것이 권장된다. 마지막으로 거만한 경향이 있는 입문자는 육체를 여섯 요소 곧 지 ·수·화·풍·공간/에테르·식으로 분석하는 것(dh켥tuprabheda)을 실천해야 한다.

〈성문지〉는 이들 수행하고 있는 초보자를 스승이 어떻게 가르쳐서, 서서히 완성으로 이끌까 하는 것에 대해 대단히 상세하고 생생한 지시를 담고 있다. 나는 여기에서 〈성문지〉에 따라서 이들 수행이 실행되는 형식, 곧 시각화(visualization)와 상상(imagination)과 숙고(reflective contemplation)만을 개설하는 것에 한정해야 한다. 이 형식은 다른 학파(예를 들어 상좌부)에서 실천되었다고 말하는 수행의 형식과 어느 정도 닮았지만 독특한 특징도 갖고 있다. 그 형식은 다섯 수행 모두에 유효하다고 명언되고 있는 일반적 용어로 기술되고 있지만(197,7―10) 그것이 가장 잘 적용되는 것은 부정관이고, 그 상세한 설명 가운데 이 형식이 가장 명백히 적용되어 있다.

어떤 준비(무엇보다 강한 동기부여를 의도한 준비) 후에, 초보자는 명상의 주요한 대상의 상(nimitta, 相)을 취해야(ud-grah) 한다. 상이란 ‘특징’을 의미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초학자가 자신의 명상 대상의 독특한 양상 혹은 전형적인 나타남을 어떻게 해서든 내면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정관의 경우 부패하는 각 단계에 있는 시체를 관찰하는 것이 가능한 시체 보관소에서 그것을 실천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림, 혹은 나무나 돌이나 흙으로 만든 조각을 이용하여 그와 같은 사체의 상을 취할 수 있다(416, 4―8: 373, 6―8). 다른 명상의 경우는 그것에 관한 권위 있는 텍스트의 기술이나 사색에 바탕을 둔 자기 자신의 상상으로부터도 상을 취할 수 있다(429, 10―11: 431, 7―8).

상을 취했다면 초학자(이후 단순히 요가행자(yogi)라 부른다)는 명상에 적절한 조용한 장소에 이동해야 한다(416,8―12). 거기서 그는 먼저 산만하지 않은 상태(avik콴epa)에 들어가 외적 인상, 지엽적인 생각 혹은 불건전한 감정에 의해 주의가 흩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396,1―9: 416,12―417,6). 잠시 그 상태에 머문 후(419,14―19), 요가행자는 명상의 대상―부패하고 있는 사체―의 상을 심적 이미지의 형태로 재현해야 한다(396,10―12: 419,19―22).

그러나 처음에는 의도적으로 마음에 그린 이 이미지는 아직 명료하고 선명하지 않고, 개선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복수의 다른 방법이 있는 듯하다.

〈성문지〉의 한 문장에서는 요가행자가 바로 이 목적을 위해 준비 단계에서 이미 취한, 시각화한 빛의 심적 이미지(켥loka-nimitta)를 삽입하도록 권장한다(421,18―422,9: 416,2―4). 시각화한 이 빛의 영향 아래, 주요한 명상 대상― 부패해 가는 사체 ―의 심적 이미지가 밝게 빛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문장에 따르면, 주요한 명상 대상의 심적 이미지의 개선은 마치 화가가 모델을 모사할 때, 처음에는 불완전한 실패작을 지우고 모사가 완전하게 될 때까지 몇 번이라도 시도하는 것처럼, 몇 번이라도 지우고는 다시 시각화하는 것에 의해 달성된다고 한다(194,14―19). 다시 말하면, 최종적으로는 명상의 대상을 완전히 시각화하는 것에 성공하는 것이다(194,10―14).

그런데 이 시각화의 실천의 목적이 무엇일까?

부정관의 경우, 그 실천은 시각적인 상상 과정으로 이어진다. 곧 요가행자는 시각화된 사체의 이미지의 수를 의도적으로 증가시켜 결국은 전 세계를 사체로 가득 채우는 것이다(420,1―9). 다음으로 이 상상은 심적 명상 곧 숙고의 기초를 형성한다. 곧 요가행자는 시작이 없는 윤회, 생과 사의 연쇄 과정에서, 그가 통과한 셀 수 없을 정도의 생존 사이에 자신의 신체가 변형된 사체의 수가 자신이 시각적으로 마음에 그린 무서울 정도의 사체 수보다도 훨씬 많다는 사실에 직면한다(420,9―21).

그리하여 이것은 생사의 연쇄가 끝나지 않는 한, 미래에도 계속된다(420,21―421,1). 이 명상에 의해, 요가행자는 해탈을 향해 노력하고자 하는 동기를 강화한다.

시각화된 이미지에 숙고가 뒤따르는 것은 자애(maitr콒)의 실천에 관해서도 기술된다. 이 경우 요가행자는 시각적으로 마음에 그린 친구, 적, 중립자의 이미지로 전 세계를 채운다(427,7―12). 이 경우 뒤따르는 숙고는 셀 수 없는 전생의 과정에서 지금의 적이 예전에는 친구였거나, 지금의 친구가 적이었거나 했기 때문에, 모든 중생은 궁극적으로는 동등하고, 증오 대신 자애로써 대할 만하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428, 8―20).

직전에 언급한 여러 예나 그 외의 경우에도 명상 대상 특징(nimitta)의 심적 재현 곧 시각화가, 이 재현을 증대시키는 상상의 출발점이고, 그와 같은 상상은 이어서 어느 정도 명백히 숙고의 기초가 된다. 부정관의 문맥에서는 숙고는 해탈을 위한 동기부여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자애의 경우, 숙고는 증오나 적의를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그것이 무엇을 상상하든 이 수행의 전통적인 목적이다. 부정관의 경우도 〈성문지〉는 숙고가 전통적인 목적, 곧 감각적 욕망를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는 문장을 포함하고 있다(376,14―377,7).

그러나 이들 수행의 또 하나의 중요한 기능은 요가행자의 정신집중 능력을 훈련하는 것이다. 이 능력은 세간도든 출세간도든 거기에 들어가기 위한 또 하나의 전제조건이다(432, 8―437,15). 이것은 이 두 가지의 길도 반드시 그 숙고의 기초로서 시각화와 상상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실제로, 비록 출세간도의 끝부분에서 비슷한 구조가 나타나긴 하지만, 〈성문지〉의 각 부분에서 그와 같이 생각할 근거는 거의 없다.(앞의 1), 2)항을 보라).

그러나 〈성문지〉의 다른, 보다 이론적이고 체계적인 부분에서는 그것이 자명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처럼 보인다(193,4―202,2). 거기서는 명상의 정신집중에서 산출된 적절한 심적 이미지(pratibimba)에 의한 명상 방법은 부정관과 같은 예비적 수행의 대상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그 방법은 세간도나 출세간도의 대상에까지 명백히 확대되어 있다. 곧 낮은 단계의 거침과 높은 단계의 탁월성, 그리고 4성제에 대해서이다(194,3―6; 196,19―197,12; 199,2―7 참조).

〈성문지〉의 이 부분에는 심적 이미지(nimitta)의 재현과 소거의 교체도, 숙고 활동(vikalpa)을 동반하는 심적 이미지(pratibimba)와 동반하지 않는 심적 이미지의 교체라는 변형된 술어로 등장한다. 곧 전자는 관찰(vipa굴yan켥)의 대상이고, 후자는 적정(굴amatha)의 대상이다.

적정의 단계에서 대상은 버려지지 않지만, 실제로 관찰되는 것도 없다(193,6―195,12). 그러나 가장 흥미 깊은 점은 다음과 같은 기술이다. 관찰의 과정은 단순히 마치 대상 그 자체가 직접 지각되는 것과 같은 극히 명료하고 선명한 대상의 재현으로 이끄는 것만은 아니다(194,10―17). 오히려 관찰의 과정은 심적 이미지를 초월한 무분별(nirvikalpa)의 직접 지각 곧 통찰(pratyk콴a컫 j켘켥nadar굴anam)에 도달하여, 각각의 대상 그 자체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생각은 다른 몇몇 문장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출세간도와 관련해서만 적용되고 있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이 길은 4성제를 무분별(nirvikalpa), 직접 지각(pratyak콴a-j켘켥na)하는데서 정점에 달하는 것이다.

3. 〈섭결택분〉에서 출세간도의 대승적 기술

명상의 정신집중에서 발생하는(반드시 시각적 이미지로 한정되지는 않지만) 심적 모상의 전혀 다른 사용법이 《유가사지론》 〈섭결택분〉의 두 단락(〈섭결택분 보살지〉)에서 나타난다.

이 부분은 《유가사지론》 〈본지분〉보다 나중에 편집된 것이고, 그것이 포함하는 자료의 대부분은 〈성문지〉에 나타나는 것보다 후대의 것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심적 모상을 사용하는 〈섭결택분〉의 단락은 〈성문지〉보다 훨씬 간략하고, 출세간도에 관해서는 준비적 수행과 명확히 구별하지 않고 있다. 또 그들 단락은 대승불교의 관점에서 쓰여 있고, 〈섭결택분 보살지〉의 일부를 구성하는 주요한 단락이다. 이 점은 이들 여러 단락의 존재론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성문지〉에서는 물질적인 현상뿐 아니라 심리적 현상도 무상이긴 하지만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이제 검토하려고 하는 〈섭결택분〉의 단락에서는 다양한 현현을 가진 세계는 일종의 표면적 실재다(696b15―16). 대상의 현현(nimitta)은 분별(vikalpa)에 포함되는 세간적인 마음 작용의 대상이다.

분별이라는 개념은 분산과 부적절성의 요소를 함의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무차별한 진실(tathat켥)의 경험인 바른 인식(samyagj켘켥na)과 명확히 대비되는 것에 의해 확인된다. 대상의 현현은 [다른] 대상의 현현과 세간적인 마음의 활동(vikalpa)으로부터도 일어난다고 설명되고 있다. 마치 분별이 [다른] 분별과 대상의 현현으로부터도 일어나는 것과 같다(696b27―c1).

유감스럽게도, 텍스트는 어떻게 해서 정확히 이것을 이해해야 할 것인가를 다시 설명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대상의 현현은 객관적으로 존재하지만 역시 부적절한 구상에 의해 조건지워져 있다는 의미로 이해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대상의 현현은 궁극적으로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일종의 환영이라고 보인다. 다른 한편 진실(tathat켥)은 일체법의, 곧 다양한 현현 전체의 무본질성 혹은 비실재성으로 특징지워진다. 이 균일한 진실이 경험될 때, 모든 다양한 현현은 이미 소멸해 버린 것이다(701c4―5/ Tib. 'i 15b8-16a1[bsal로 읽음]; 701b24―26/ Tib. 'i 15b4―5 참조).

그것은 누군가가 꿈속에서 급류에 휩쓸려, 당장 익사할 듯 하는 것을 경험할 때와 같다. 그는 살아나려고 힘써 노력하는데, 바로 그 노력 때문에 그는 꿈에서 깨고, 급류는 완전히 소멸하는 것이다(701c5―9/Tib. 'i: 16a1―3).

이 경험이 〈성문지〉에서 상정되어 있던 해탈적 통찰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명확하다. 오히려 거기서는 이 통찰의 직전에 있다고 설명된 경험, 곧 마치 마음이 이미 대상을 갖지 않는 것처럼, 마음조차 소멸해 버린 것처럼 보이는 깊은 적정의 상태와 일치한다. 〈성문지〉는 이 적정의 상태를 진실한 통찰(abhisamaya)이라고 생각한다는 이유에서 어떤 사람들을 비판하고 있다.

 지금 검토하고 있는 〈섭결택분〉의 여러 단락은 바로 이와 동일한 것을 하고 있다. 그들에게 결정적인 통찰이란 무차별한 진실(tathat켥)의 무분별한 직접 경험이다(696a7―9; 706c9―14/ Tib. 'i: 15a5―b1). 〈성문지〉에 고유한 해탈적 통찰인 4제의 통찰은 이 무차별한 진실의 무분별한 직접 경험 뒤에 일어나는 개념적 분석에 지나지 않는다(701b9―16/ Tib. 'i: 15a5-b1; 696a11―17 참조). 이와 같이 〈섭결택분〉의 여러 문장은 〈성문지〉와 같은 일련의 경험을 상정하지만, 그 두 단계에 대한 평가는 반대다.

이제 〈섭결택분〉의 여러 단락에 따라, 어떻게 요가행자가 진실의 통찰을 획득할까 하는 문제로 옮기자. 이 준비적 단계와 관련하여 〈섭결택분〉은 명상의 정신집중에서 산출된 심적 모상을 언급한다. 요가행자는 의도적으로 명상의 정신집중에서 현현의 주요 범주의 심적 모상을 산출하고, 그것에 의해 일상적 현현을 대체하거나 대신해야 한다(701b23/ Tib. 'i: 15b2―3). 굳게 뿌리박혀 저항하는 일상적 현현과는 달리 의도적으로 산출한 심적 모상은 마음대로 지울 수 있다.

그리하여 이것이 바로 요가행자가 하려는 것이다(701b23 그리고 c15―17/ Tib. 'i: 15b3―4 그리고 16a5―7). 그 과정은 작은 쐐기를 사용해서 큰 쐐기를 뽑아내면 이번에는 그 작은 쐐기를 쉽게 뽑아낼 수 있는 것에 비유된다(669a8―10/ Tib. Zi: 236b1―3). 이와 같이 요가행자가 일상적 경험 대신에 사용한 심적 모상을 지울 때 어떤 현현도 소멸하고 모든 현현에서 벗어난 진실 그 자체가 나타나는 것이다.

아마 이 수행은 일정한 훈련을 필요로 한다고 추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신집중이 충분이 깊은 경우에만, 그리고 〈성문지〉(701c15―23 참조)에서와 마찬가지로 심적 모상이 일상적 현현과 같은 정도로 선명하게 될 때까지 완성된 경우에 처음으로 일상적 현현의 재등장을 배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텍스트의 기본적 차이는 명백하다.

 〈성문지〉에서 목적은 충분히 적절하고 선명한 심적 모상 혹은 이미지를 산출하는 것(그리하여 최종적으로는 각 대상 그 자체의 초일상적 지각)이고, 심적 모상을 지우는 것은 그것을 재현하는 과정을 개선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섭결택분〉에서 주목적은 심적 모상의 제거고, 그 제거가 원래의 일상적 현현의 직접적인 재침입을 막기 위해 충분할 만큼 강력한 상태를 달성하는 것이다.

4. 《해심밀경》 제8장의 출세간도

이 강연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해심밀경(Sa컫dhinirmocanas궝tra)》 제8장의 출세간도 더 정확하게는, 출세간적 통찰(곧 통찰의 길, dar굴anam켥rga)과 그것으로 직접 이끄는 단계를 논할 것이다. 《해심밀경》은 전체가 〈섭결택분 보살지〉에 포함되어 있다. 《해심밀경》 제8장이 이 강연에서 이때까지 논한 〈섭결택분〉의 여러 단락보다 연대적으로 빠른지 늦은지를 결정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사상사적 관점에서 말하면, 《해심밀경》의 입장은 명백히 진전한 것이다.

《해심밀경》 제8장이 〈성문지〉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은 결코 의심할 수 없다. 《해심밀경》은 〈성문지〉의 주요한 용어를 정의하지 않고 이용하고 있고, 따라서 《해심밀경》은 〈성문지〉의 중요한 용어를 이미 잘 알려진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 〈성문지〉와 마찬가지로 《해심밀경》은 분별(vikalpa)을 동반한 심적 이미지(곧 모상, pratibimba)와 분별을 동반하지 않은 심적 이미지를 구별한다.

전자는 관찰(vipa굴yan켥)의 대상이고 후자는 적정(굴amatha)의 대상이다(8.2). 그러나 결정적인 점에서 《해심밀경》에서 이들 용어의 용법은 〈성문지〉의 용법과 다르다. 곧 적정은 관찰의 단계에서 재현되고, 숙고된 심적 이미지를 제거하는 단계라고 간주되지 않는다. 오히려 바로 그 관찰 행위 자체를 숙고하는 것이라고 간주되고 있다(8.3; 8.5; 8.6)

앞서 지적한 것처럼 〈성문지〉도 관찰의 직전 순간에 대한 숙고를 언급한다. 〈성문지〉에서 그 숙고는 관찰하고 있는 마음 그 자체조차 순간의 연속에 지나지 않고, 그러므로 무상하다는 사실을 요가행자에게 알아차리게 하는 목적으로 실천되었다. 그러나 《해심밀경》에서 이 숙고는 다른 목적을 갖는다.

곧 《해심밀경》에서 숙고는 심적 이미지의 본질을 명백히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심적 이미지의 본질에 관한 그 견해를 명백히 하기 위해, 《해심밀경》은 정신집중에서 관찰된 심적 이미지 곧 모상이 각 순간의 마음과 다른가 그렇지 않은가를 명확히 묻고 있다. 답은 양자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의식에 다름 아닌 것, 즉 단순한 표상(vij켘aptim켥trat켥)(8.7)이다.

이것은 사실상 이미 〈성문지〉(199,17―18)에 인용되어 있는(정전에 속하지 않은 non-canonical) 경전에서 주장되었다. 거기서는 명상의 정신집중에서 경험되는 심적 이미지 곧 모상은 인식일 뿐이고(j켘켥nam켥tra), 지각일 뿐이며(dar굴anam켥tra), 상기일 뿐이라고(pratism콘ta- /pratism콘-tim켥tra) 서술되었다. 《해심밀경》은 이 견해를 공유하고 있지만, 이후 유가행파 사상의 중요한 용어가 되는 ‘vij켘aptim켥tra’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해심밀경》은 명상의 정신집중에서 경험된 심적 이미지 곧 모상에 그치지 않고, 다시 일상적 지각의 대상에까지 그 분석을 확대한다. 다시 말하면, 일상적 지식의 대상인, 가시적인 것의 심적 이미지도 마음과 다르지 않고 표상일 뿐이라는 것이다(8.8).

다음 문단에서(8.9) 《해심밀경》은 출세간도라는 결정적인 단계를 앞의 서술된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으로 옮긴다. 관찰(vipa굴yan켥) 행위는 심적 이미지 곧 모상에 집중한다. 적정(굴amatha)의 국면은 직전의 관찰행위에 집중한다. 이 과정은 이윽고 관찰과 적정이 통합된(yugananddh, 止觀雙運) 심적 상태에 도달한다. 이 단계에서 요가행자는 명상 중에 경험된 심적 이미지는 의식일 뿐이라는 것 곧, 단순한 표상(vij켘aptim켥tra)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후 요가행자는 의식일 뿐인 바로 이것이 진실(tathat켥) 곧 일상적 의식의 대상을 포함한 모든 경험 대상의 진정한 본질이라는 것을 깨닫는다(8.20.2.3 참조).

이와 같이 《해심밀경》에서 명상의 정신집중에서 (의심할 바 없이 의도적으로) 재현된 이미지는 모델로 기능한다. 마치 〈섭결택분〉의 경우와 같이 정신집중에서 재현된 이미지는 일상적 현현을 대체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 이미지가 모델로서 기능하는 것은 그들이 용이하게 제거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용이하게 통찰되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더 쉽게 유식일 뿐이라고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심밀경》이 명상의 정신집중 경험에서 출발하여 모든 경험대상이 마음일 뿐이라고 표명한 최초의 텍스트는 아니다. 《반주삼매경(Pratyutpanna-buddha-sa컫mukh켥vasthita-sam켥dhi-s궝tra, 현재 제불을 직접 만나는 삼매에 관한 경전)》이 《해심밀경》보다 훨씬 오래되었다.

 이 경전에는 무엇보다 비록 아미타불이 멀리 떨어진 극락(Sukh켥vat콒)에 머물고 있어도 명상자는 아미타불을 직접 만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도록 아미타불 명상의 정신집중이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텍스트는 실제로 붓다를 만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명상자에게 아미타불로서 현현하는 것은 다만 그 자신의 마음일 뿐이다(cittam eva: 3O, 게송 1). 그리하여 그와 같은 것이 모든 일상적 현현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결국 전 세계는 마음일 뿐이다(cittam켥-tra: 3L).

여기까지는 《반주삼매경》의 주장의 구조가 《해심밀경》의 그것과 일치한다. 그러나 《반주삼매경》은 경험된 대상을 마음으로 환원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다른 텍스트에 따르면) 손가락 끝이 그 자체를 만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이 마음 자체를 자각할 수 없다는 이유로, 마음 자체도 환영일 뿐이라고 덧붙이고 있다(3M; 3O, 게송 2d와 3ab). 이 주장은 명확히 《해심밀경》에 의해 논박되고 있다. 확실히 마음(곧 한 찰나의 마음)은 자기 자신을 향해 작용할 수 없다. 오히려 마음은 단순히 그것이 나타나는 그러한 방식으로 곧 특정한 심적 이미지의 형태로 나타나는 방식으로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해심밀경》 8.8).

확실히 《해심밀경》은 단순히 객관적인 사물을 심적 이미지로 환원하는 것을 의도하는데 그칠 뿐, 마음 그 자체에 의문을 드러내고 있지 않다. 이 점에서는 《해심밀경》은 앞서 논한 〈섭결택분〉의 여러 단락, 그리고 아마도 후대의 대부분의 유가행파 저작들과 다른 것으로 보이며, 적어도 출세간도의 국면과 대응하는 기술에 대해서는 그렇다.

다음으로 오래된 유가행파의 텍스트인 《대승장엄경론(Mah켥y켥nas궝tr켥la컫k켥ra)》에서 대상은 마음일 뿐(cittam켥tra)이라는 깨달음은, 마음 또한 [궁극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cittasya n켥stitvam upaiti)는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그때 비로소 진정한 실재(dharmadh켥tu)가 스스로 현현한다. 《해심밀경》의 입장을 더 정교한 방식으로 재구성한 것이 세친의 《삼십송(Tri컫굴ika)》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더 깊은 논의는 이 논문의 범위를 벗어난다.■


람버트 슈미트하우젠(Lambert Schmithausen)
전 함부르크 대학 교수. 1939년 독일 출생. 쾰른대학에서 하커(P. Hacker) 교수로부터 인도학과 아랍어, 티베트어와 고전한문을 배웠다. 석사를 마친 후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서 박사학위 취득. 1966년 뮌스터대학에서 전임강사, 조교수를 역임하고, 1973년 이래 함부르크대학 인도학연구소에서 불교학담당 정교수로 활동. 대표적 저서로 《Der Nirvana-Abschnitt in der Viniscayasamgrahani der Yogacarabhumih》(1969), 《Alayavijnana》(1987), 《The Problem of the Sentience of Plants in Early Buddhism》(1991) 등이 있다.

김성철/
금강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HK교수. 1968년 부산 출생.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인도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 취득. 일본 류코쿠 대학 불교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고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전남대, 동국대 강사 역임. 논문으로 〈초기 유가행파의 무분별지 연구〉 〈瑜伽行派修行道における利他行の問題〉 〈초기 유가행파의 ‘여래장’ 개념 해석〉 등이 있고 역서로 《붓다의 심리학》(공역) 《공입문》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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