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제 신라대 사학과 교수

올 한해는 기상이변으로 사계가 실종된 것으로 보인다. 다가올 대선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한다. 이념과 정책은 사라지고, 과거 검증만이 난무한다. 그까짓 검증이야 얼마든지 가능한 차원일 것인데, 시시비비를 가릴 언론은 대부분 스스로의 정치적 계산에 따라 진상을 왜곡시킬 뿐이다. 그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니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여도 정상적인 모럴에서 한참 멀어진 사람이 대중의 인기를 얻는 걸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대중의 욕망이나, 신자유주의의 거센 파고에 내몰린 이들의 박탈감 등이 잘못 투사된 결과라고 해석하지만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세상사가 합리적으로만 돌아가는 건 아니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고 관망하기도 쉽지 않다. 다가올 가까운 미래가 그리 낙관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가까운 은행에 가서 대출 좀 상의해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해 대출 문턱이 높아져 곤혹스러움을 맛볼 수 있는, 그런 세상에 우리 모두가 살고 있다. 먼지 티끌 하나에 세계가 담겨 있다는 화엄의 도리를 관념 속에서 느끼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일상에서 느끼는 세상인 것이다.

이런 세속의 어지러운 모습만큼 세간의 저편에 자리 잡은 종교도 마찬가지 행태를 보여주고 있다. 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보수기독교는 좌파 정권의 종식과 장로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들자고 소리 높여 외치고 있다. 7, 80년대 민주화운동시기에 그들은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외치며 현실의 모순에 침묵하였다. 그들의 침묵은 종교적 신념이 아니라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지지이자, 다수 신자들로 하여금 민주화운동에 대한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담긴 것이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지자 이들은 수구적 정치세력과 유착하여 노골적인 정치 참여를 하면서 기득권 집단의 위치에 올라서 있다. 보수교회의 볼썽사나운 수구적 정치노선은 자기 이해를 반영한 것이고 스스로 권력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불교의 경우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불교계는 80년대까지 정권의 통제 아래 눈치만 보거나 기생하던 입장에서 90년대 민주화 이후 갑작스럽게 그 위상이 높아졌다. 대선만 되면 거의 모든 후보가 조계종의 총무원을 방문하거나 특정한 행사에 참석한다. 달라진 위상을 즐기고 싶은 것인지 몰라도 그저 덕담 수준의 대화 이외에 뉴스가 될 만한 내용은 전혀 없다.

불교가 바라보는 정치관이나 현실 인식은 고사하고, 정치 지도자로서 갖추어야 인품에 대한 그 흔한‘교시’조차 없다. 그저 정치가는 뉴스가 되고 불교계 표밭을 다지면 좋고, 승려들은 유력 정치가의 방문으로 자신의 위상이 높아지는 걸로 만족하는 게 아닌가 한다.

이런 수준이면 다행이다. 근래에는 수구적 기독교처럼 불교계도 정치에 가담한다. 불교 뉴라이트의 결성, 한나라당 검증 위원회 참여 등이 좋은 사례이다. 그 당의 유력 후보는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하겠다고 발언하여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다. 더욱이 그의 부인에게 법명을 주었느니, 받지 않았느니 논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겉으로는 항의하면서 속으로는 교묘하게 유착하는 현실이다.

불교도 한때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적이 있지만, 지금은 기독교보다 훨씬 보수화되었고 제대로 된 현실인식을 갖고 활동하는 승려도 없는 실정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겉으로 드러난 현상을 본다면 교단을 운영하는 사판승의 현실인식이 빈곤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교단에서 이미 권력이 된 그들은 세속의 욕망, 기득권을 교단 내에서만이 아니라 세간으로 무한 확장하고 싶은 게 아닐까? 스스로의 정치적 능력에 따라 출세한다면 공화국의 이념 그대로 그것은 그것대로 좋다. 하지만 교단의 권력을 이용한다면 그건 자신의 능력도 아니고 승려의 본분에도 어긋난다. 사부대중이 그러한 사판승에게 불교를 함부로 이용하고 이름을 팔도록 허용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교야말로 사회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거나 아니면 아예 없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불교는 근본적으로 출세간주의, 공사상, 깨달음만을 추구하는 신비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현실세계에 대한 관심은 크지 않다. 아니 오히려 무관심하거나 아예 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대승불교를 예로 들어 불교가 그렇지 않다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체중생의 구원과 무한의 자비심을 내세우는 대승의 슬로건이 현실세계에서 구현되기는 어렵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대승불교의 구원은 출세간, 즉 종교적 틀의 범주를 벗어난 적이 별로 없다. 오히려 극락왕생이라는 내세에의 구원만을 표방하면서 불교는 국가권력과 유착하였고, 그들의 후원 아래에서 안주하였던 것이다.

유학이나 근대 사회과학의 불교 비판은 그러한 불교의 본질적인 한계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다. 어쩌면 세계 어느 곳이든‘참여불교’가 그렇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것도 불교가 현실사회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기본적인 세계관이 부재한 탓이 아닐까? 사판승의 권력욕이나 추태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바라보는 무심한 태도나 산중에서 자신의 청정만을 지키는 것은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사상의 문제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렇지만 종교의 세계관이 본래 절대불변의 것은 아니며, 원형으로만 회귀하고자 하는 속성도 결코 본질이 아니다. 불교의 세계관이 갖는 한계도 문제지만, 어쩌면 불교를 어떤 고정된 틀로 바라보는 불교인의 시각이나 인식이 더 문제라고 생각된다. 불교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이 자기의 내면만이 아니라 자기와 타자를 둘러싼 세계로까지 확장된, 불교사상의 재해석을 현대사회는 요구하는 것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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