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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비불설’ 논쟁을 보는 시각 / 박은정
박은정 달라이 라마 한국어 통역 담당
[42호] 2010년 03월 18일 (목) 박은정 달라이 라마 한국어 통역 담당

인류사에서 다양한 종교가 발생했고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과연 종교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서 우리는 인간 삶과의 깊은 관계성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종교의 존재 이유에 초점을 맞춰 본다면 어쩌면 종교를 더욱 쉽게 정의 내릴 수 있른지도 모른다.

우리 삶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 뭇 사람들에게 현재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물어보자. 돈, 건강, 성공 등 여러 가지 다양한 대답이 나오겠지만 그것은 한마디로 행복이란 말로 요약된다. 비록 다양한 형태와 모습을 하고 있지만 우리 모두의 삶의 의미와 이유는 행복에 있다. 이러한 근거로써 종교는 우리의 행복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종교 각각의 행복에 대한 방법 제시와 보장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종교에서 희망을 찾는 것이다.

종교가 밝히는 행복은 크게 나눠 보면 세 가지이다. 첫째는 지금 바로 이 삶에서의 행복이다. 두 번째는 이 삶뿐만 아니라 이 삶 이후의 삶에 대한 행복이다. 세 번째는 여기서 더 나아가 궁극 즉 영원한 행복이다. 그리하여 종교는 여기에 대한 나름의 답,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불교 역시 종교 가운데 하나이고 세 가지 행복과 그에 대한 방법론을 얘기하고 있다. 물론 세 가지 행복은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지만 아무튼 이생과 내생의 행복을 위한 방법으로 종교는 선한 삶을 살도록 가르친다. 이것은 비단 불교만의 가르침은 아니다. 선한 삶으로의 교훈은 철학을 가지고 있는 주요 종교 공통의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만이 말하는 행복은 실질적으로 궁극적인 행복, 바로 해탈에 있으며 이는 불교도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궁극적인 행복이 해탈이라면 이러한 해탈 추구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바로 나 자신의 해탈을 추구하느냐 다수의 해탈을 추구하느냐의 문제 말이다. 여기에서 소위 말하는 대승과 소승의 갈림길이 생긴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생명과 감정을 가지고 있는 내가 그렇게 행복하기를 바라듯 나와 똑같은 감정을 가진 다른 이들도 행복하길 바라는 것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나 자신의 행복 추구와 더불어 사랑하는 이들의 행복을 추구하려 한다면 어떠한가? 이런 이들은 반드시 존재한다. 이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사랑하는 이들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인 이들을 충족시켜줄 가르침은 없는가, 다시 말해 사랑하는 이들의 해탈을 실현하는 가르침은 어디에 있는가? 종교가 우리의 행복에 대안을 제시할 때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다면 불교 어디에서 이런 희망을 찾을 수 있는가? 이런 행복에 대한 방법을 불교 어디에서 제시하고 있는가?

대승은 중생에 대한 대자대비(大慈大悲)로 중생의 궁극적 행복인 중생 해탈을 책임지기 위한 방법으로서 성불을 지향한다고 한다. 대승이 비록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사회 전반 아니 일체중생의 행복을 생각하고 기여하는 좋은 가르침이니 그저 좀 좋게 보아 주자는 얘기가 아니다.

삼대아승지겁(三大阿僧祗劫)이란 어마어마한 도저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 장구한 세월을 수행한 결과로서 붓다의 사십 년 전법륜(轉法輪)이 고작이라면 이런 인과(因果)의 형평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부처와 성문·연각 아라한이 다름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출연으로 그와 같이 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가르침은 없었는가? 대승은 부처를 초월적인 존재로 만들었다고 비판받는다.

한편으로 일체중생의 모든 근기를 알아 대기설법(對機說法)을 하셨다는 부처님이 일체중생을 해탈케 하고자 당신처럼 성불을 원하는 근기를 위한 법은 정작 설하지 않았다면 부처는 그것만으로 결함이 있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대승은 초기 불교의 사상에서 발전된 형태라고 한다. 한술 더 떠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보다 더 수승한 법을 설하는 이가 출연했으니 급기야 부처님보다 더 뛰어난 존재가 있음을 인정해야 되는 셈이다. 아무튼 대승이 비불설일 때 이러 저러한 수많은 의문들이 여전히 남는 것이 사실이다.


불법(佛法)은 크게 나누면 교법(敎法)과 증법(證法)이다. 이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라도 살아 있지 않다면 불법이 제대로 존속된다고 보기 어렵다. 교법이 사상과 철학을 의미한다면 증법은 바로 깨달음을 의미한다. 불법에 이 두 가지 법이 있으나 자연히 증법으로 무게가 실린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법통과 계보를 따지게 되는 것이다. 아무튼 종국에는 깨달음으로 검증되지 않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대승은 불설(佛說)이 아니며 후대에 편찬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직 학계의 통념이다. 이러한 사실을 밝혀낸 수고를 한 이들은 학자들이며 그것은 철저히 사증(史?)을 바탕으로 한다. 대승이 모두 창작이고 조작이며 한 마디로 거짓이라면 천 년이 넘는 역사 속에 대승의 진리는 수많은 성취자와 수행자의 깨달음으로부터 어떤 검증을 받아 왔는가? 세속의 집을 떠나 아니 삼계(三界)라는 윤회의 집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거짓된 것이라면 진절머리를 내던 이들이 도대체 깨달음을 통해 대승이 진짜가 아니고 가짜라고 양심선언을 할 수 없었단 말인가.

한편으로 제한된 역사적 자료만으로 또 심오하고 방대한 정신세계와 진리는 어디까지 얼마만큼 증명될 수 있는 것인가. 깨달음의 세계나 정신세계를 일반적으로 증명하지 못한다고 해서 모두 조작된 것이라 한다면 이는 불교를 한다 하면서 우리가 여전히 눈에 보이는 것만을 인정하려 하는 유물론적인 사고에 젖어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의문은 필자만이 가지고 있는 것일까?

대승이 비불설일 때 결과적으로 우리 불교 전통은 긴 세월 동안 기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닌 대승을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대착각하고 그 길을 걸었던 어리석은 자들을 대량 배출한 셈이 된다. 또한 그들은 참으로 어리석어 그 존재 가치까지 평가절하된다. 설사 그것이 우리나라 불교도가 역사를 통틀어 가장 존경해 마지않는다는 원효 스님이라도 말이다.

결론적으로 과거에 수행 성취한 스승들의 깨달음을 통한 가르침은 묵살되고 우리는 자료로써 판단하고 인정하는 꼴이 되었다. 나아가 대승법을 수행하고 있지도 않은 보살행을 한 스승들은 이 뻔한 진실을 몰랐으니 한편으로 그들의 오류가 안타깝지만 뒤늦게나마 우리라도 이 진실을 알게 된 것을 다행으로 결론짓는다. 어찌 보면 이러한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다. 갑자기 깨달음의 종교의 현주소가 어디인지 혼란스러워진다.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수행자들이 참구하고 또 참구하여 이타(利他)를 이루는 것이야말로 실로 가치 있는 것이며 진정으로 자신을 위하는 길임을 역설(力說)하며 그 길을 걸었고 또 걷고 있다. 이러한 자리이타(自利利他)의 길을 달라이 라마는 현명한 이기주의라고 표현했다. 대승이 비불설이라면 이러한 자리이타의 중생구제가 진정한 행복 구현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방법 제시를 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부처는 물론이고 불교는 반쪽짜리 종교가 된다.

대승은 자격을 갖춘 이들, 근기가 되는 이들에게만 설해졌던 비공개적 가르침이었고 때가 되어 후에 용수가 공개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나 용수보살이 용궁에서 대승경전을 모셔왔다는 말을 비웃는 학자라면 일반 범부의 직접 지각으로 인지되지 않는 지옥이나 천상의 세계 역시 비웃음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아니 부처님의 교법을 증득한 증법의 중심에 있는 앞선 스승들의 모든 이야기를 비웃어야 할 것이다.

《아비달마구사론》의 저자 세친 스님(世親, 바수반두)과 그의 친형인 무착 스님(無着, 아상가)과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세친은 제2의 부처라고 일컬어질 만큼 그 학식과 수행이 대단하였고 인도 전역에 그 이름을 떨쳤다. 친형인 무착 보살이 대승법을 수행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형이 대승경전을 읽는 소리가 들리면 귀를 막았고 대승을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비방하였다.

후에 깨달음을 통해 자신의 과오를 알게 되었고 깊이 참회하여 대승을 비방한 자신의 혀를 자르려 했다는 일화가 있다. 참다운 가치와 원대한 꿈을 가슴에 품고 살아왔고 또한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우리가 혹 세친과 같은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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