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기 한국교원대 교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변화의 과정에 있다. 우리 눈앞에서 그 변화의 속도를 자랑하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나무들처럼 들키지 않고 일정한 시간을 지낸 후에야 그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들도 있다. 시간과 공간을 점유해야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그 공간과 시간의 점유 방식과 과정에서 각 존재자의 특성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지만, 그러한 특성이 변화한다는 공성(空性) 자체에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다는 것이 석가모니 붓다의 핵심 가르침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소위 21세기에 접어든 이후 우리 사회는 그 변화의 방향과 속도를 둘러싸고 원색적인 논란의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좌파와 우파라는 고전적인 개념을 왜곡한 ‘좌빨’이라든지 ‘수구 꼴통’이라는 말들이 유행한 지 오래고, 우파적 성격이 강한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는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말로 상징되는 원한 섞인 보수파들의 반격으로 인해 좌파 또는 진보주의자들이 어쩔 줄 몰라 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한 판단 자체는 각자의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또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이 보장되어야 마땅하겠지만, 그럼에도 서로에 대한 왜곡이 심각해서 각자의 입에서 나오는 정보들을 신뢰하기 어렵기 때문에 판단을 내리는 일 자체가 조심스럽다.

소위 좌우 사이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쟁점들 중의 하나로 교육문제도 포함되어 있다. 아니 그냥 포함된 정도가 아니라 어쩌면 가장 민감하면서도 핵심적인 쟁점이 되고 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어떤 방식으로든지 교육과 관련을 맺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수적인 광범위함과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지속되어 온 교육의 역사성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짧은 시간 안에 끌어모을 수 있는 단골 주제로 교육이 늘 등장할 수밖에 없고, 현재의 이명박 정권을 비롯한 노무현, 김대중 정권 등도 예외가 아니다. 누구나 ‘교육대통령’으로 인정받겠다는 공약을 내세웠고 하나같이 실패한 교육대통령이 되고 말았거나 될 예정이다.

왜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일까? 어느 누구도 실패하려고 정책을 세우지는 않을 테고, 그 정책을 수행하는 장관들도 어느 정도는 검증된 사람들인데 왜 이렇게 실패와 그에 따른 경질이 반복되고 있는 것일까? 김영삼이나 김대중 정권에서는 교육학 전공자들이 교육을 망치고 있다는 세간의 비판을 받아들여 철학자를 교육부 장관으로 등용하기도 했고, 이명박 정권에서는 주로 경제학 전공자들이 우리 교육을 좌지우지하고 있지만 그들의 정책이 성공하고 있다는 증거는커녕 뻔히 보이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형편이다. 그렇다고 교육학자들이 우리 교육을 제대로 살려낼 것이라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뒤엉킨 교육문제에서 우리가 그 실마리를 찾기 어려운 이유를 한 마디로 말할 능력이 내게도 없지만, 그럼에도 중등학교 교사 경력과 함께 초등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교육대학교 교수 경력에 중등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대학에 재직 중이라는 이유 때문인지 가끔씩 해결책을 묻는 사람들을 만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꺼내는 말은 교육문제에서 성급한 해결책은 곤란하다는 밋밋한 당위 명제이다. 교육문제야말로 우리 사회의 여러 구조적 문제들과 각 개인의 독특한 문제 상황이 엉켜 생긴 것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 건드리면 더 심하게 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의 핵심 골자이다.

그렇다고 해서 교육문제를 지금처럼 방치할 수도 없고 근원적인 해결책이라는 것도 관점에 따라 다르게 설정될 수 있다는 문제도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에 논의가 종결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우리는 교육의 본질적 목적이 무엇인가와 같은 교육철학적 문제들을 지속적으로 상정한다는 전제 위에서 교사가 학생들과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는 여건을 개선시키고 그들의 문제의식이 지속적으로 살아 있도록 도와주는 지원책을 모색하면서 기다리는 정도의 잠정적인 대안에 도달할 수 있을 뿐이다.

 이를 위해 학급당 인원수를 최소한 20명 이내로 제한하는 교육개혁과 교사들이 스스로의 교육역량을 증진시켜 나갈 수 있는 자율적인 연수 기회를 제공하는 정도의 일을 소리 없이 해내며 인내력을 갖고 기다려야 한다.

승가 공동체의 교육문제라고 해서 그 본질이 다를 수는 없다. 우리 시대 스님의 위상이 더는 떨어질 수 없는 상황으로 몰리고 있고, 그렇게 된 이유 중의 하나로 교육문제가 도사리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그 변화와 혁신을 모색하는 일은 우리 불교의 미래를 위해 필수적인 과제에 속한다.

다행히도 새로 부임한 조계종 교육원장 스님의 승가교육 혁신을 위한 의지가 남다르고, 그분이 이미 해인사 강원교육의 변화를 주도해 본 실천적 경험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기대를 갖게 한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에서 쉽게 떨쳐지지 않는 우려를 어쩔 수 없는 것은 교육문제가 지니고 있는 그 복잡성과 복합성 때문이다.

승가교육은 수행과 포교의 능력을 동시에 지닌 스님을 그 교육목표로 설정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계율이 몸에 배고 경전 공부를 생활화하면서도 그것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깨침을 향한 열망을 지속적으로 구현해낼 수 있는 능력과 성향을 갖춘 이 시대의 스님으로 길러내는 것이 목표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삼학(三學)의 전통을 몸에 익히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하고, 그에 더해 민주자본주의로 상징되는 현대사회의 구조적 특성을 분석해 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외전(外典) 공부나 영어 공부 등이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승가교육의 혁신이 전통의 전승과 대립 관계에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학점 따기와 형식적인 학위 논문 쓰기의 과정으로 전락해버린 현대의 공부 체제가 지니는 한계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이 전제되지 않은 외전 공부와 일반 대학 과정화는 위험 요소를 더 많이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모든 교육이 전통의 적극적인 비판과 수용의 전제 위에서만 비로소 온전한 혁신이 가능하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새기는 지혜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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