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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힘 / 김우남
김우남 소설가
[42호] 2010년 03월 18일 (목) 김우남 소설가

영화 〈위대한 침묵〉을 보았다. 이 영화는 가톨릭교 중에서도 엄격하기로 유명한 프랑스 카르투지오 수도원의 일상을 다룬 다큐멘터리이다.

세 시간 남짓, 화면 속에는 침묵만 흐르고 있다. 묵상하고 기도하고 공부하는 수도사들은 말이 없다. 책장을 넘기고 가위질을 하고 물을 받는 소리마저 너무 크게 들린다. 움직일 때마다 나무 바닥이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릴 정도다.

언어가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보이고 조용할수록 더 잘 들리는 소리는 자연 속에 있었다. 화면 가득 눈이 내릴 때 사르락사르락 눈이 내지르는 소리를 나는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아침이 오고 어둠이 내리는 소리는 먼 데서 오는 손님처럼 아련했다.

수도원 내부를 비추는 한 줄기 빛, 그 빛을 따라 부유하는 먼지 알갱이들조차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가끔 야외로 나간 수도사들이 따스한 햇볕을 쬐며 나누는 몇 마디 인사말, 눈밭에서 미끄럼을 타며 내는 웃음소리는 그들이 행하고 있는 침묵의 연장이었다.

〈위대한 침묵〉은 162분 동안 소리가 끊어진 자리에 우리가 그저 앉아 있기를 권한다. 아니, 강요한다. “30분만이라도 이 영화를 집중해서 보면 뭔가 느끼고 얻을 것이다.”라고 쓴 오프닝 멘트는 관객들에게 보내는 경고장 같았다.

아마 30분도 지루해서 못 견딜걸. 어디 얼마나 견디나 볼까? 그렇게 내기를 거는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시간을 내서 영화관을 찾고 돈을 지불하고 영화표를 끊어서 한 자리를 차지한, 스스로 침묵을 선택해서 들어온 관객들조차 3시간 가까운 침묵을 견디지 못했다.

여기저기서 괜히 킁킁 내뱉는 헛기침 소리, 옆 사람 혹은 휴대폰으로 속닥이는 이야기 소리, 종이봉지에서 팝콘을 꺼내고 와작와작 씹는 소리, 수시로 가방을 여닫는 소리…… 주변의 온갖 소음들이 오롯이 즐기고자 했던 나의 침묵의 시간을 방해하고 있었다. 결국 두 시간을 채우지 못하고 일어서는 관객들이 제법 눈에 많이 띄었다. 그들 대부분이 나이 지긋한 이들인 걸 보자 소음 그 자체를 즐기고 살아가는 듯한 요즘의 젊은이들은 〈위대한 침묵〉을 보고 무엇을 느낄지, 얼마 동안 침묵할 수 있을지 그게 궁금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소음의 한가운데 놓여 있다. 버스를 타면 기사의 취향에 따라 틀어 놓은 라디오 프로그램을 하릴없이 들어 줘야 한다. 지하철 역내 천장에 매달린 텔레비전에서는 새로운 광고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지하철이 달리는 동안에는 정거장을 알려주는 안내멘트뿐 아니라 별의별 잡상인 목소리와 구걸 행각이 뒤섞인다.

끊임없이 휴대폰은 울려대고 남의 시시콜콜한 대화 내용이 저절로 귓속에 들어와 박힌다. 젊은이들은 손바닥 안에서 게임을 하고 음악을 듣는다. 나이 든 사람들조차 휴대폰으로 일일드라마를 즐긴다.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쏟아지는 괴성과 욕지거리, 폭력 앞에서 무방비 상태인 우리. 나아가 그것들에 전염되고 중독되어 ‘막장’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게 된 우리. 옛 조상들은 땅속 미물들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수십 마일 밖에서 내는 소리와 진동을 감지할 수 있었다던데 우리에게 그 능력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각종 소음에 둘러싸여서 본래의 소리,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요즘은 주파수를 잘못 읽은 철새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서 죽는 일이 빈번히 발생하고, 휴대폰과 오디오의 전파방해로 인해 비행기가 항로를 이탈하기도 한다.

어느 출판사에 갔을 때의 일이다. 원고를 교정하느라고 몇 시간 동안 사무실에 앉아 있었는데 캐비닛 위에 놓여 있는 라디오에서 쉴 새 없이 소리가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누군가 어느 방송에 주파수를 맞춰 놓고 끄는 걸 잊어버린 줄 알았다.

그러나 며칠을 계속해서 고만한 톤의 고만한 내용이 마치 영화의 배경음악처럼 깔리고 있었다. 아무도 라디오를 끄려고 하지 않았고 누구도 거기서 소리가 나고 있다는 걸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 9·11 테러나 쓰나미 해일 정도의 크기가 아니면 듣지도 느끼지도 못하게 된 우리의 무딘 감각. 나중에는 라디오를 켜 놓은 사람과 그것을 인지 못하는 우리가 똑같이 무서워졌다.

인간의 귀는 들릴까 말까 한 5만분의 1Pa(파스칼)부터 고통을 느끼게 되는 20Pa까지 다양한 음압(音壓)의 소리를 식별해 낼 수 있다. 인간이 가려낼 수 있는 소리의 종류 또한 백만 가지에 이른다고 한다. 그런데 귀는 눈꺼풀 같은 게 없어서 원치 않는 소리를 차단해 주는 기능이 없다.

그래서 음악처럼 기분 좋은 소리도, 소음처럼 듣기 싫은 소리도 여과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한 연구에 따르면, 공항 근처에서 5년 정도 산 사람은 심장 박동과 호흡에 변화가 오고 면역 체계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어린이들이 소음에 노출될 경우 언어 습득 능력이 저하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어느 수준 이상의 소음이 일정 시간 지속되면 평범한 사람들이 폭력적으로 변해서 공격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영화 〈위대한 침묵〉은 큰절에서 기도하고 참선하며 생활하는 스님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치 묵언수행을 하는 외국 스님들을 찍은 다큐멘터리 같았다. 시간 맞춰 종을 치는 수도사의 모습은 예불 시간을 알리는 사물들, 그중에서도 범종을 두드리는 스님의 모습과 오버랩되었다.

촛불 아래서 찬송하는 합창과 아리아는 산사의 아침을 깨우는 스님들의 독경소리처럼 장중하고 경건했다.아이러니컬하게도 〈위대한 침묵〉이 세간의 관심을 불러 모은 것은 수행 장소가 절간이 아닌 수도원이고, 수행자들이 스님이 아닌 수도사들이기 때문이란다. 절대자에게 매달리고 의지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기독교적 논리가 깨어지는 순간이다. 자각과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가 무엇이던가. 인식의 전환, 발상의 변혁 논리가 여기에도 적용되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위대한 침묵〉에는 종교와 종교의 경계선이 없다. 잘못된 것을 바로 보고 본래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시선만 있을 뿐이다. 그러자 아름다운 것, 본질적인 것은 통한다는 진리가 생각났다.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찬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비우고 소음에 가려서 듣지 못했던 본연의 소리를 듣는 것. 이것이 곧 내려놓기와 버리기, 비움의 미학, 공(空) 사상 아니던가. 침묵은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힘이다. 바깥으로 향했던 시선들을 안으로 모으는 시간이다. 곧 자기 성찰의 시간이다. 침묵은 종교적 편 가르기를 떠나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가끔씩 실천해야 할 일이다.

단기간에 5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위대한 침묵〉의 나비효과가 우리 사회에 떠도는 온갖 소음들을 잠재우길 애써 기대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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