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 만해사상 실천선양회 Home
불교평론 소개 l 지난호 보기
 
 인기키워드 : 사색과 성찰, 청규, ,
> 뉴스 > 칼럼 > 사색과 성찰
     
자연과의 평화협정 / 안성두
안성두 서울대 철학과 교수
[42호] 2010년 03월 18일 (목) 안성두 서울대 철학과 교수

며칠 전 통영을 가서 그곳의 너무나 아름다웠던 갯벌과 다도해의 해안이 이미 오래전에 매립되어 볼품없는 아파트와 고층상가로 변해 있는 것을 보았다.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아쉬움은 그것이 없어졌을 때 더욱 강렬해진다고 했던가? 그곳에 사는 주민들의 아쉬움을 마음에 새기며 나의 상념은 현 정부에 의해 불도저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소위 4대강 사업에 대한 근심과 착잡함으로 이어졌다.

전문가와 관련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고 이를 다시 공론에 붙여 충분히 시간을 갖고 추진해도 부족한 판에 무엇에 쫓기듯이 사업을 추진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의 무모함에 고개를 절로 젓게 된다. 그들에게 있어 자연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인위적으로 조작이 가능한 대상으로 아무리 훼손해도 얼마 지나지 않으면 멀쩡하게 복원되는 요술방망이와 같은 그런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런 발상이나 추진책을 생각해 낼 수가 없을 것이다. 입만 열면 친환경 그린정책을 구두선처럼 떠들지만 그것은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가야 할 장(場)으로서의 자연의 보호가 목적이 아닌 산업정책 측면에서의 발상일 뿐이며, 이는 또 다른 파괴의 명분과 씨앗이 될 따름이다.

사실 매일매일 지구상에서 무수한 원시림이 벌목되고, 수천 종의 생명체가 소멸해 가고, 그 결과 생태계가 심각히 위협받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인간이 자연의 구제자 역할을 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조차 세상 물정 모르는 천진난만한 생각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무차별적인 생태계의 파괴에 대해 인간이 이룩해 온 정신적, 문화적 가치관이 어떤 제동 역할을 할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도 마음 한구석에는 남아 있다. 막스 베버의 의미에서 종교적 관념이 일정 분량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한다면, 아시아의 정신문화에서 커다란 역할을 해 왔던 불교가 자연에 대한 관념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도 전혀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근래 한국사회의 급진적 환경운동의 실천에서 불교 승려를 비롯한 불교 지식인들이 보여주는 실천적이고 참여적 태도는 다른 사회적 이슈들에 대한 불교 일반의 태도에 비해 매우 고무적이기 때문이다.

슈미트하우젠 교수는 불교에서의 자연에 대한 태도를 크게 세 가지로 대분하고 있다. 하나는 열반을 추구하는 승려에게 자연은 일상적 고통을 관찰하는 장(場)으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다. 자연도 만들어진 것인 한에 있어 이러한 무상함과 고통스러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으며, 따라서 세간적 사물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정신적 평가는 자연에 대해서도 타당할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자연을 보존하려는 태도는 승려의 일차적인 관심사는 아니었을 것이다. 두 번째는 대승경전에 보이는 도시적 삶에 대한 찬양의 입장이다. 중생들의 삶의 조건의 향상과 보다 나은 재생의 형태를 획득하려는 데 관심을 가진 대승불교도에게 깊은 산림에서의 생활이나 황무지에서의 생활은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자연에 대한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다. 정토계 경전과 반야경에서 설법의 장소가 주로 도시라는 사실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연에 대한 은자적인 입장이다. 초기불교 이래 황무지에서의 은둔적인 삶을 찬미하는 태도가 불교에는 있다. 그러한 삶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곳이 비록 온갖 종류의 위험에 가득 차 있지만 정신적 발전을 위한 최고의 수단인 명상에 적합한 환경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은둔하는 승려의 생활이란 완전히 자연에 순응하는 삶이다.

그는 식물과 야생동물 등 모든 생명체와 평화롭게 공존해 가는 법을 배운다. 그러한 평화공존이 가능한 이유는 자심(慈心, maitr콒)에 있다. Maitr콒가 친구(mitra)에서 파생된 명사라는 것을 고려할 때, 자심을 갖는다는 것은 생태계와 친밀한 관계를 가지는 것, 곧 평화협정을 맺는다는 것을 함축한다.

평화협정이란 “네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도 베풀지 마라.”라는 황금률에 의거해 살생의 의사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고, 또 완전한 육식의 포기를 통해 내면의 공격성을 근절한다면, 상대편의 맹수도 그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 의거한 상호 신뢰이다.

어떤 생물학자가 말했듯이 식물은 가장 완전한 생명체일 수도 있겠지만, 성적 욕망에 휩쓸리고 살기 위해 잡아먹어야만 하는 동물들의 삶을 정신적 면에서 이상화시키기는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고 간섭하지 않는 것이 여기서 권장되었다.

이렇듯 불교가 가진 간섭하지 않고 내맡기는 태도는 노자적 의미에서 무위적이며 하이데거적 의미에서 ‘내맡김(Gelassenheit)’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자연을 생태학적 측면에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오늘날 가장 요청되는 태도일 것이다.

이런 불교의 은자가 보여주는 자연과의 ‘평화협정’적 태도는 불교의 비살생의 이상과 함께 불교 생태학적 윤리의 근거가 된다고 보인다. 왜냐하면 모든 생명체를 살아가고 행복할 자격을 가진 생명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때 진정 인간중심적인 파괴 행위로부터 벗어나 다른 생명들과 더불어 사는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이런 잠재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기에 불교계가 생태 문제에 관한 한 가장 적극적인 발언과 참여를 하는 것이리라. 올해는 지방선거가 있지 않은가. 이를 불교도들의 깨어 있음을 보여줄 절호의 기회로 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부디 모든 불교도들이 보다 깊은 동체 의식을 갖고 4대강 문제가 가진 심각성을 인식하면서 MB 정권의 무모함에 공동 대처하기를 마음에서 기원한다.■ 

ⓒ 불교평론(http://www.budreview.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댓글달기는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
전체댓글수(0)  
전체기사의견(0)
불교평론 소개독자투고불편신고구독신청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
[135-887]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512-9번지 MG타워빌딩 3층 | Tel 02-739-5781 | Fax 02-739-5782 | 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사성
Copyright 2007 불교평론. All rights reserved. mail to budreview@hanmail.net
불교평론을 통해 제공되는 모든 콘텐츠(기사 및 사진)는 무단 사용, 복사, 배포시 저작권법에 저해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