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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보다 사유의 깊이가 문제 / 김형효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33호] 2007년 12월 10일 (월)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마르크스가 <포이에르 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지금까지 세상을 해석해 왔었지만, 이제 세상을 변혁시키는 것이 문제’라고 일갈했다. 그 말이 남긴 파고는 엄청나서, 실천우위의 행동을 펼치기 위해 그 동안 세계가 안달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한국도 그 점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이른바 지식인의 현실참여 등과 같은 명제가 저 사회주의적 선언과 무관하지 않다.

거기다가 한국적 주자학의 도덕주의 정치참여의 형해가 아직도 잔존하여 마르크시즘과 주자학적 도덕주의가 합친 현실참여의 더 높은 목소리가 현대 한국사의 강력한 율동을 이루어 왔었다. 현대 한국사회는 사유를 멀리 하고, 목적론적 행동의 목소리만 커서, 도처에 시끄럽고 거친 행동의 고함소리가 난무하고 있다. 그들 고함소리의 주장은 다 사회정의의 수립과 민주주의의 확립, 그리고 민족통일의 성취라는 내용으로 모아지고 있는 듯하다.

나는 한국사회가 대체적으로 행동은 넘쳐나는데, 사유가 깊지 못하다고 여긴다. 사유는 행동주의의 강령 앞에서 핏기 없는 관념의 사치처럼 여겨지는 것 같다. 나라에 복잡하고 긴급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는데, 언제 한가하게 앉아서 관념의 유희인 사유에 시간을 보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행동의 강도가 약하면 언론이 주목하지 않고, 언론으로부터 외면당하면 주의주장의 효과와 의미가 무색해진다고 여겨 모두 언론을 타기 위해 행동의 강도를 더 올린다. 한국인들은 행동하기 위하여 태어났고, 행동으로 세상을 변혁시키려 열광하는 것 같다. 한국인들의 열광주의는 세상에서 가장 강렬한 것 같다.

정치적 열광주의, 종교적 열광주의의, 사회적 열광주의 등이 한국인의 사회상을 관통하고 있다. 열광주의의 뿌리는 격정적 마음이다. 격정적 열광주의는 사람의 마음이 단순하고 생각이 단세포적이면 더욱 더 거기에 몰입하는 경향을 갖는다. 격정적 행동주의는 사람들에게 깊이 사유할 시간도 주지 않고, 또 그런 것을 싫어한다.

나는 보았다. 사유가 단순하고 깊은 사색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떤 주의주장의 사도(使徒)가 되었을 때에, 저들이 얼마나 무서운 추상적 정신의 노예가 되는지를……. 추상적 정신이란 신념이 단순하게 흑백논리화 하여 만사를 적과 우군으로 이분화하는 사고방식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사회에 적과 우군으로 찢어진 다양한 세력들이 그렇게 많이 활동한다. 흑백논리로 먹고사는 추상의 정신들은 원한과 해코지를 심리적 에너지로 여긴다. 원한의 표출과 공격적 해코지가 그토록 우리 사회를 음성적으로 휩쓸고 있다. 우리는 사유가 행동이전의 단계고, 행동이 사유의 결론을 실천으로 옮긴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행동은 그 사람의 사유 수준만큼 그냥 표시된다. 한사람의 행동은 사유의 질이 그대로 에누리없이 드러난 것을 일컫는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위에서 말한 것은 큰 착각이다. 진리가 온전히 해석되었다 하여도, 그 해석된 진리를 이해한 사람들의 수준은 천차만별이다.

따라서 단순 무식하게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은 단순 무식하게 행동한다. 정의와 민주주의의 사도라고 자부하는 사람도 그 사유의 수준만큼 즉각 행동할 뿐이다. 사유는 행동의 뿌리에 해당하고 행동은 그 사유의 잎과 같다. 뿌리가 신통찮으면, 잎이 병든다. 이 말은 깊은 사유에서 저절로 움트는 행동이 아니면, 모든 행동은 다 공해를 불러온다는 것이다.

 나라에 시끄럽고 어수선한 행동이 판을 친다는 것은 나라를 지탱해 나가는 사유가 깊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깊은 연못처럼 깊은 사유를 담고 있는 마음은 격정적이지도 않고, 흑백논리로 공격적이지도 않고, 정의를 빙자해서 예리한 칼날을 조자룡 헌 칼 쓰듯이 휘둘러 대지도 않는다. 유치한 사유 앞에서 정의는 단지 초등학생의 단순심리처럼 불의의 공격이 곧 정의라고 여기는 단순성과 같다.

그러나 초등학생은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으면, 그것을 주어야 한다는 단순 생각으로 길에 돌진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한다. 한 가지만 생각한 것이 사고를 불러온다.

세상은 결코 단순치 않다. 그래서 깊은 지혜가 필요하고 깊은 사유에서 서로 상반된 것을 다 관조하는 정신이 요구된다. 세상은 일직선으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에, 상반된 것들을 아울러 사유하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정신심리학자 융이 단선적 사유의 정상을 완전성(perfection)이라 불렀고, 양면적 사유의 균형을 온전성(integrity)이라 칭하였다.

이것은 그가 인간 무의식의 본질을 대립적 흐름(enanatiodromy)이라 명명했던 발상과 상통한다. 무의식적으로 보면 깊이 있는 사유인은 단가적 완전성을 추구하지 않고, 대립적 흐름의 양면성을 다 보는 균형으로서의 온전성의 인간을 말한다. 불교는 사유의 완전성보다 온전성을 더 귀하게 여긴다. 불교는 단가적 심판의 종교가 아니고 택일의 논리로 무장하지 않는다.

불교는 열광적 행동을 불러일으키지도 않고 조용히 명상하면서, 약과 독이 공존하는 세상사 일반이 모든 이에게 약과 복락의 이익이 되게끔 깊이 사유한다. 정의는 단선적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정의에 중독된 어리석은 고집을 동반하고, 민주투쟁은 세상에 화창한 날씨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독재의 병과 싸우는 민주라는 이름 밑에 숨어 있는 독선적 아집이란 병을 새로 낳고, 통일의 열광은 통일만 앞당기려 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낭만주의에 현혹되어 있다가 쓴맛을 당하는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다. 현실 역사의 낭만주의가 늘 허망한 배신으로 끝난 과거사의 교훈을 가볍게 생각해서 안 되겠다.

깊은 사유는 세상을 정사(正邪)로 확연히 이원론적으로 나누기보다, 정(正)이 돌변하여 사(邪)로 기승을 피우게 하는 연기(緣起)의 구조를 진단하려 한다. 본디 정사(正邪)는 서로 다른 것으로 독립해서 각각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의 작용에 따라 그것이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약과 독으로 갈라지게 하는 것은 연기의 구조가 그렇게 한 것이다. 좋은 구조는 독을 약으로, 나쁜 구조는 약을 독으로 변질시킨다. 구조의 진단은 흥분하여 들뜬 마음에서가 아니라, 고요히 진정된 사려 깊은 사유에서 나온다.

지금 한국사회는 너무 열이 높다. 열이 높으면 의학적으로 수술도 못한다. 우리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지혜는 격정적 열광의식에서 나오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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