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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 부는 불교 열풍 / 김동윤
―행복과 치유의 가치 재조명
[42호] 2010년 03월 18일 (목) 김동윤 aixprce@naver.com

현대 문명의 대안으로 떠오른 불교의 세계관

   

김동윤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불문학 교수

오늘날 유럽, 특히 프랑스에는 불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그 주된 이유는 기후 변화와 환경 파괴에 따른 대안적 삶과 대안적 문명의 패러다임을 찾자는 열망과 깊은 관련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오늘날 기후 변화와 환경 파괴는 인류 문명 자체를 위협하는 가장 중차대한 문제이다. 얼마 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개최된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회의’에 각국 정상들이 대거 참석하는 등 오늘날 가장 큰 이슈로 부상하였다. 물론 ‘교토의정서’를 대체할 만한 구체적인 합의를 이끌어 내지는 못했지만, 기후변화와 환경문제가 전 세계적 이슈임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 가운데 유럽의 지성인들이 문제의 심각성과 대안적 문명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프랑스 석학 에드가 모랭은 새로운 문명의 정치학을 제안하고 있는데, 그 핵심 철학은 매우 정신적이고 영성적인 것으로서 불교적인 세계관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단지 일부 정치가나 지식인들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일반 사람들마저도 서구 근대 산업 문명과 대량 소비사회의 패러다임이 획기적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불교(bouddhisme)는 유럽과 프랑스에서 대안적 삶과 문명으로서 새롭게 그 가치를 재조명을 받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오늘의 현대사회와 문명의 위기 상황은 과잉 소유와 착취의 문명의 결과로서 불교와 부처님의 말씀이 오늘날 설득력을 얻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TV 등 각종 미디어에서 불교의 정신적 지도자와 철학자 과학자들이 만나 토론하는 것은 일반화되어 있다. 최근 방영된 불교 관련 프로그램 하나를 소개한다면, 2009년 12월 20일 프랑스 주요 TV인 FR2에서 불교와 생태환경(ecology)에 관련된 특집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연말 황금시간대에 방영한 바 있다(한국에서도 이러한 기회를 마련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이 대담에 현대 프랑스 불교의 정신적인 스승 라마 도르제와 미국항공우주센터(NASA)에서 일한 바 있는 세계적인 우주과학자 위베르 리이브(Hubert Reeves)가 초청되었다. 유럽 불교 지도자인 라마 도르제는 부처님의 말씀이 인류 사회에 큰 희망을 던져 준다고 역설하면서 부처님의 말씀이야말로 미래 인류가 떠받들어야 할 지혜의 보고라고 하였다. 부처님의 말씀과 불교적 세계관만이 현재 인류 문명의 도전에 가장 적합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삶이 점점 더 팍팍해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럽인들에게 가장 귀중한 가치는 행복과 삶의 질이다. 행복은 물질적 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내면적 성찰과 자기완성을 통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일부이긴 하지만 엘리트 계층을 중심으로 크게 확산되고 있는 경향 가운데 하나가 바로 명상(meditation)이다.

서구인들은 ‘젠(zen)’의 색채가 짙은 명상이 내면을 깊게 하고 자아를 성숙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는 것으로 믿고 있다. 이들은 명상을 통해 삶을 온전히 살아내고 내면을 고양하고 환경에 대한 경각심을 더해 간다. 미국식 시장 제일주의나 과잉생산과 대량소비로 병든 현대문명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속도와 번뇌를 내려놓고 늘 마음을 살피고 고요하게 하는 일이다. 마음의 고요와 평화를 얻는 유일한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과 지혜, 그리고 참선(參禪, zen)과 같은 불교적 명상의 방식이다.

불교적 명상과 참선은 정신적 삶을 갈구하는 사람들이 종파를 넘어서 심지어 가톨릭 사제들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행하는 적극적인 삶의 실천과 수행법이다. 종교적 자유가 보장되고 문화가 매우 개방적인 나라인 프랑스는 천 년 이상의 정신문화와 기독교 전통을 자랑한다. 프랑스는 역사적으로 정신적 종교적 가치를 지고로 삼는 고품격의 문화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미국에서 종교적 영성이 상업화, 비즈니스화되고 있다면, 프랑스에서는 영성(특히 불교적 영성) 그 자체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대단하다(이들이 한국 템플스테이에 큰 관심을 갖는 이유도 이러한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유럽 사회에서 이른바 ‘문명의 충돌’(새뮤얼 헌팅턴)과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하는 무슬림과 달리, 참선(Zen), 요가, 불교 사원 등은 고급스럽고 평화로운 이미지를 떠올리며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

불교와 영적 세계의 지도자들이 미국보다는 프랑스를 선호하는 주요한 이유는 프랑스가 종교적 정신적 전통이 깊은 나라이며 최근 들어 더욱 불교를 선호하는 사회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 불교 지도자나 연구자가 프랑스에 귀화하거나 강연 서적 등을 통해 매우 널리 소개된 것도 한몫하고 있다.

 예컨대 파리 시는 달라이 라마를 명예시민으로 대접하는 등 열렬히 환영하고 곳곳에 컨퍼런스와 같은 학술 종교 행사를 개최한 바 있다. 이 외에도 프랑스는 티베트 선승들이 가장 선호하는 나라로서 각광받고 있으며 불교 명상 관련 서적 출간도 봇물을 이루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베트남 선승 틱낫한 스님에게 보르도에 수행처를 제공하여 ‘자두마을’을 조성하여 전 세계적인 불교 수행의 메카로 자리 잡았다.(와인의 메카 보르도에 있는 ‘자두마을’은 전 세계의 종교인들이 방문하고 싶은―‘명성 브랜드’ 가치가 높은― 명소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동아시아 선불교의 경우, 일찍이 일본 불교의 정신적 지도자들이 이미 유럽과 프랑스에 오래전부터 초청되었다. 유럽 대륙과 프랑스에서는 젠(Zen) 연구가 큰 호응을 얻고 있으며 스즈키 같은 학자들의 연구서가 인문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일본의 선승이나 젠 연구가들, 티베트의 정신적 스승 린포체 등이 프랑스에 알려짐으로써 티베트와 일본불교가 동양불교를 대표하게 되었다.(이런 점에서 한국불교는 거의 유일하게 동아시아에서 선불교 전통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므로, 유럽과 프랑스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본다.)

일본 불교는 프랑스와 유럽인들의 일본문화(자포니즘)에 대한 열광에 힘입어 더욱더 깊게 파고들었다. 그 밖에 인도의 영성지도자 크리슈나무르티, 라즈니쉬 등 이른바 ‘사모’ 단체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영성 관련 서적들이 매우 잘 팔리고 있다. TV 신문을 비롯한 각종 미디어에서 불교 명상 관련 프로그램이 제공되고 있다. 일례로 〈붓다의 지혜〉라는 주간 불교 TV 프로그램은 25만 명 이상의 시청자를 확보하고 있으며 이것은 점점 증가하는 추세이다.1)

그렇다면 가톨릭의 나라 프랑스에서 왜 갑자기 불교 열풍인가? 전 교육부장관이자 유럽의 대표적인 철학자인 뤽 페리는 프랑스의 탈종교화―세속화가 가속되면서 정신적인 공동화 현상이 일어났고, 사람들이 정신적인 공허함을 메우기 위해 영성적인 가치를 추구하려는 경향이 뚜렷해지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문화 대국 프랑스에서는 문화 자체가 종교와 정신적 가치와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종교적 영성 전통이 강한 유럽 가톨릭 국가들이 세속화되면서 기존의 권위적인 종교를 대체할 영성을 불교와 부처님의 수행법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서유럽 각 계층의 엘리트 및 교양인들은 단순히 불교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적극적인 자세로 불교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좋은 예로 달라이 라마의 제자 마티외 리카르(Mathieu Ricard)가 있다. 마티외 리카르는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파리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세포 유전학을 연구하던 과학자로서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는 등 매우 촉망받는 엘리트 가운데 하나였다.(그의 지도교수 프랑수아 자콥은 노벨상 수상자로서 이미 리카르의 연구 업적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는 과학 연구에 회의를 느끼고 달라이 라마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앞날이 보장된 자신의 연구를 과감히 접는다. 현재 그는 달라이 라마의 통역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리카르의 불교에 대한 열정은 유럽 저명한 정치철학자이자 부친인 장 프랑수아 르벨(Jean Fran겼ois Revel)과의 대담 《승려와 철학자》에 잘 나타나 있으며 이 대담은 유럽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프랑스에서 세계적인 과학자가 티베트 불교의 승복을 입고 달라이 라마를 수행하며 불교를 설파하는 모습과 리카르와 같은 저명인사의 잇단 개종은 불교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는 데 크게 공헌하고 있다.

치유와 행복, 고급 정신문화로서의 불교

그렇다면 서구인들은 왜 아시아의 불교에 관심을 갖는 것일까? 그들의 정신세계에는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그 배경은 수백년 이상 진행되어 온 서구 근대 산업사회와 물질문명의 폐해와 관련이 깊다. 서구 기계문명은 현대인들에게 물질적 풍요와 편리함을 제공함과 동시에 메마른 삶과 공허감을 야기하였고 실존적 불안감을 가중시켰다.

지나친 물질 추구는 내면세계를 황폐하게 만들었으며 삶에서 의미를 빼앗아가 버렸다. 이로 인해 정신과 심리의 공황 상태가 야기되었고, 수면장애로 인한 약물 복용이 급증하고 있으며, 마약 등 각종 범죄도 범람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병리현상은 사회복지와 공공건강 재정에 큰 부담이 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물질적인 풍요는 무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을 무자비한 경쟁의 구도로 몰고 가면서 매우 척박하게 만들고 있다.

첨단 기술과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주장과는 달리 오히려 강도 높은 노동 스트레스로 인해 더욱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는 상황이다. 이미 20세기 대표적 서구 지성인 한나 아렌트는 명저 《현대인의 조건》에서 삶의 질과 조건인 ‘라 비타 악티바(la Vita Activa)’가 매우 열악해지고 있다고 말하였고, 《에로스와 문명》의 저자 마르쿠제는 서구문명 자체가 가혹한 노동에 기반하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아렌트의 진단을 더욱 공고히 뒷받침하고 있다.

정신분석학 창시자 프로이트는 그것을 ‘문명의 불안’으로 규정하고 그것의 증상을 갖가지 심리적 요법으로 ‘치료’하려고 하였다. 우리의 관점에서 보건대 문명의 실존적 불안의 문제는 정신과 마음의 문제인데 서구인들은 그것을 심리학이나 의학의 대상으로 삼고 증상만을 치료하는 차원에서 접근하려는 것이다. 현대 의학이나 심리학은 주로 대증요법에 치중된 것으로서 근원적인 처방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국면이다.

따라서 마약 범죄 정신분열 등 사회 전반의 병리현상은 줄어들지 않고 더욱 심화되고 있다. 현대인들은 점점 더 빠르고 공격적이 되고 있으며 ‘남보다 더 많이(the more and more)’와 같은 탐욕과 ‘무한’ 경쟁심을 내재화하고 있다. 무한 경쟁의 슬로건과 탐욕은 인간의 마음을 더 황폐하게 만들 뿐이다. 이런 가운데 행복과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중요한 트렌드로 자리 잡는 현상을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 행복과 마음의 평화, 명상 그리고 웰빙에 관한 강연과 책이 넘쳐나는 현상은 물질문명으로부터 찌들고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현대인들이 경쟁의 낙오에서 오는 두려움과 삶의 공허함을 보상받고자 하는 심리적 현상일 것이다(한국에서도 위로와 배려, 심리치료 서적이 인기를 얻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바로 이런 문명사적 맥락과 사회적 분위기에서 불교와 명상, 부처님의 말씀에 대해 서구인들이 많은 관심을 갖게 된다.

서구 문화의 거울에 비친 불교

그렇다면 서양에서 불교는 어떻게 수용되어 왔는가, 그리고 하필이면 21세기에 들어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서양인들이 큰 관심을 갖는가? 역사적으로 유럽의 많은 사상가, 작가들(상당수의 기독교인들 포함)이 불교와 부처님의 가르침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처음부터 서구인들이 불교를 따뜻하게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2007년 6월 《르몽드 종교》 특집호는 불교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명한 바 있다. 불교가 서구에 점점 더 알려짐에 따라 처음의 이국적 정서와 새 종교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이 반대와 비판으로 바뀌었고, 급기야 우상숭배 또는 염세주의의 일종이라는 불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많았다.

서구에서 탄탄하게 뿌리를 내리려면 무엇보다 학문적인 토대 정립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수용 초기에 불교는 거의 학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단지 아시아나 일본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나 일부 사람들만의 아시아적 취향으로 인식되었다. 가톨릭 종교가 뿌리 깊은 서구 사회에서, 처음부터 불교가 정식으로 인정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흥미로운 변화가 일어난 것은 프랑스 공교육에서 불교를 도덕적 가치로 주목했다는 점이다. 대혁명으로 절대왕정을 무너뜨린 프랑스 공화정부는 권위적인 가톨릭 종교를 약화시키기 위해 절대적인 유일신이 ‘부재하는’ 종교인―그들이 보기에― 불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현대 서구 공교육의 기틀을 마련한 쥘 페리(Jules Ferry)는 종교 없는 공화국의 학교를 구현하기 위해 불교를 학교 도덕 수업에 도입하기로 결정하였다. 쥘 페리는 절대적인 유일신으로부터 속죄를 통해 구원을 얻는 기존의 종교와 달리, 불교는 2,500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엄격한 규율과 치열한 수행 정진으로 이어 왔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바로 이러한 ‘비종교’적인 불교의 수행 정신이 공화국 시민들이 배워야 할 미덕이라고 보았다.

유럽 공교육의 창시자인 쥘 페리가 치열한 정진과 자기완성의 수행, 깨달음의 불교가 신의 구원과 은총을 기반으로 하는 가톨릭이라는 권위의 종교에 의존하지 않고, 자율적인 건전한 시민 양성과 민주주의 교육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게다가 고흐나 고갱과 같은 서구 근대미술의 거장들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종교의 핵심인 신성의 보편적 정신적 차원을 구현하였다고 본 것도 불교의 긍정적 이미지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50년대 일본과 티베트의 불교 지도자들이 프랑스 유럽에 소개되기 시작하면서 탁월한 불교의 지혜를 본격적으로 전파하였다. 달라이 라마 등 영적 스승들을 통해 불교의 핵심 개념과 단어 그리고 철학이 서구인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서구문화의 일부가 되기도 하였다. 예컨대 자비(compassion), 카르마(karma), 참선(zen), 명상(meditation)과 같은 개념은 이제 서구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수용된 언어가 되었다.

비록 오늘날 불교가 서구인들(특히 프랑스 독일)에게 호감도가 가장 높은 종교로서 수용되고 있으나 유럽의 불교는 나름대로 한계를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선 ①고통의 나눔과 자비를 본질로 하는 불교가 서구 사회에서 주로 웰빙과 자기계발의 한 수단으로 각광받고 있다는 점이다.

불평등이 심화되는 현대 사회에서 불행하고 소외된 계층에 대한 고통과 자비심을 갖기보다는 개인의 사회적 성공을 위한 자기계발에 도움을 주는 이른바 ‘코칭(coaching)’의 효과적인 도구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②서구에서 영적 지도자를 의미하는 ‘사부’나 ‘구루(Guru)’의 개념은 집단의 우두머리라는 폐쇄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이러한 지도자의 모습은 부처님의 본래진면목과 자비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폐쇄된 집단의 이미지나 상업자본주의 비즈니스의 한 수단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크다.

치열한 수행 정신보다는 강연이나 서적 출판을 통해 그 들의 모습이 상업적 이미지를 갖게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불교 정신을 왜곡 훼손하는 일이다. ③서구 사회에 수용된 불교가 일본이나 티베트로 표상되는 아시아의 모습을 축소하여 이상화하고 아시아적 비전과 가치를 유일한 지고의 가치로 포장하는 환상을 낳을 위험을 안고 있다. (《르몽드 종교》 불교 특집호에 따르면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국주의 시대에 불교 승려들이 전쟁 비용을 마련하는 등 일본 군국주의를 통한 아시아적 ‘패권’을 정당화한 예를 상기할 수있다.)2)

그리고 일본이나 티베트의 불교가 언제나 자국 내에서 안정되게 자리 잡았던 것은 아니다. 불교가 파벌화되고 권력을 둘러싼 계파 간의 갈등이 심했던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군국주의와 같이 극우 이데올로기에 봉사한 적도 있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르몽드 종교》74쪽).

서구 사회에 수용된 불교가 이와 같은 동양적 이미지와 한계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1세기 들어서 서양인들의 불교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근본적인 이유는 불교와 부처님의 가르침이 본질적으로 보편적인 인류애와 자비(compassion)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미래가 매우 불확실하고 암울해지고 있는 시점에서 서구인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현대 물질문명의 한계와 폐해를 근본적으로 살펴보기 시작하였다.

서구 근대 이후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고 세상의 주인이 된 양 행세하였으나 그 결과는 수많은 전쟁과 갈등을 낳았고, 환경 재앙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점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 특히 급격한 기후변화와 환경파괴가 지구의 자정 능력 수준을 벗어나고 있는 점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인간을 제외한 나머지 동식물 등을 하나의 사물로 바라보고 그것을 정복 착취하려던 과학 기계문명의 부정적인 결과이다. 현대 물질문명이 인간에게 보다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제공한 것은 사실이나, 그 편리함 자체가 자연환경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서구의 지성인들은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대안 문명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대안적 삶이란 근대 서구가 과학과 기계에 의존한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반성하고 그것과 결별하는 것이다.

데카르트 합리주의와 과학 실증주의의 명암

서구 근대의 역사는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가 이제 인간은 과학으로 세계를 지배하고 주인이 되었다고 주장한 바에 기초하여 과학적 실증적 기계론적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 데카르트 이후 과학기술의 발달은 눈부셨고 뉴턴 등 과학자들의 발견과 이론은 전통적인 기독교의 권위를 차츰 무너뜨리기 시작하였다. 18세기 계몽주의와 산업혁명은 이른바 서구 합리주의와 산업사회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민주 시민사회와 종교의 약화, 절대왕정의 몰락 등 긍정적인 측면을 낳은 실증과학적 인식론과 합리주의 철학은 많은 부정적인 요소들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자연의 지배자로서의 ‘인간의 등극’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에 의한 자연의 지배’가 가능한 것은 무엇보다도 기하학과 수학에 기초하여, 자연 동식물 사물 등을 포함한 모든 것을 계산하고 분할할 수 있다는 인식론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연과 모든 생명체를 인간이 지배하고 이용할 수 있다는 지극히 공리주의적 세계관인 것이다. 우주 자연에 인간을 정점으로 하는 위계화가 이뤄지고 인간은 지배자의 위치에 놓인다는 생각은 서구에서 오랫동안 뿌리 깊게 인식되었다. 비록 이것이 인본주의와 근대 문명의 기반이 되었다 하더라도 이러한 인식과 비전이 얼마나 자연환경과 인간 문명 자체를 위태롭게 했는지 21세기 들어서야 서구인들은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교조적인 의미에서 과학 실증주의의 패러다임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 하나하나가 홀로 온전하고 고귀하다는 불교의 가르침과 정반대되는 매우 메마르고 직선적이며 추상적인 세계관이다.(물론 과학 실증주의가 과학기술의 발달을 촉진시켜 인류 문명에 기여하고 삶을 안락하고 편리하게 만들었다는 긍정적인 면은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다만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도그마와 이데올로기화된 과학 중심주의 과학 실증주의의 패러다임이 내장하고 있는 ‘세계관(Weltanschauung, a comprehensive world view)’을 깊이 성찰하고자 하는 것이다.) 서구의 근대적 문명관은 수학과 과학에 바탕을 둔 합리주의 철학을 발달시켰으며 이것은 산업혁명과 다른 문명을 열등한 것으로 보고 그것을 지배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하였다.

지배의 도구는 지식의 권력화였다. 동양의 지혜와 달리, 서구에서 지식이 하나의 자연을 지배하는 힘으로 작용하였다. 지식을 힘으로 파악하는 것은 지식의 과잉생산과 축적으로 방향을 제시하였다. 서구인들의 주된 관심의 대상은 실증과학적 지식을 좀 더 축적하고 확장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지혜와 마음은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다.

지식은 탐욕의 대상이었고, 그것은 인간에 의한 자연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낳았고 궁극적으로 개인들 간의 과도한 경쟁을 부추기고 환경 파괴로 이어졌다. 21세기 인류는 이에 대해 비싼 대가를 치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급격한 기후변화와 환경파괴를 바라보는 인류는 현대 서구문명과 삶의 방식의 대안으로서 불교와 부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부처님과 선지식들은 에고와 탐욕이 불행과 고통의 뿌리이고 마음의 평화와 평상심을 위해 축적이나 탐욕과 정반대되는 비움과 상생의 자비의 철학을 가르쳤다. 비움과 상생은 삶과 정신을 맑게 하는 기본적인 삶의 태도이다. 이것은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 사상을 낳고 동식물이나 곤충 등 미물들도 인간과 동일한 중요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모든 삼라만상 위계의 정점에 서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신과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과 대비되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서구의 지성인들은 많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물론 이러한 논의들은 기독교가 서구 문화에 끼친 긍정적인 영향과 문화 자체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사랑과 정의, 나눔의 종교로서 기독교 전통은 그 자체가 귀중한 인류 문화의 자산임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선과 악의 이분법이나 인간이 정점에 서는 자연의 위계질서를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변화하므로 선과 악은 상대적이며 인간도 동식물과 마찬가지고 인연과 연기법에 따를 뿐이다. 이것은 자연의 순리를 그대로 따르는 삶의 태도인 것이다.

서구에서는 신은 죽었다고 외친 다음, 신이 죽고 그다음으로 인간과 자연이 사라질 위험에 처해 있다고 본다.(물론 브뤼노 라투르와 같은 철학자는 생태학이 너무 정치화되어 환경과 자연을 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3)

결국 20세기는 전대미문의 환경 파괴에 직면해 있고, 지금까지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 생존에 가장 적정했던 기후와 온도 등 지구환경이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지구환경과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으며 이들은 지구를 하나의 정원이나 살아 있는 생명체로 보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바로 불교적 우주관, 생태관에 다름 아니다.

서구 근대 철학에서 데카르트가 자연을 단순히 대상화하는 인식론과 달리, 자연과 지구를 유기체와 같은 생명으로 보고 신성한 마음으로 대하자는 것이다. 불교적 세계관은 우주 삼라만상은 인드라망으로 이뤄져 있으며 모든 생명체는 유기적인 인연으로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어 어느 것 하나라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인간만 중요하다는 독단적인 생각과 매우 다른 생명존중 사상이다.

이러한 자연과 세계, 우주와 삶에 대한 깊은 명상과 성찰이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생태적 사고는 근본적으로 정신적이고 윤리적인 가치를 추구한다. 정신적 윤리적 가치는 ‘내가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불교적이고 실존적인 물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궁극적으로 왜 사는가 하는 문제이다. 앞서 말했듯이 모든 인간은 행복을 간절히 원한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대로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다.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서 인간은 행복에 이를 수 있다.

여기서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보상하는 구원의 메시지가 아니라 부단히 타인을 생각하고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고 자비심을 느끼는 것이 바로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서양어로 자비심은 ‘compassion’으로 번역되는데, 이 어휘는 ‘함께 같이’를 의미하는 ‘cum’이란 라틴어 어원과, 고통을 의미하는 ‘passion’이 합쳐진 말이다. 서양어 역시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이 자비심인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함께하는 것은 자연스레 나와 자아를 들여다보고 성찰하는 일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자아, 나’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는 일이다. 근대적 서구인들은 바로 이 부분에서 실패했다고 본다. ‘더 많이(the more)’의 삶의 태도와 세계관으로 말미암아 삶의 가치가 상실되고 지구가 파괴된다는 것이다. 독일 사회학자 하버마스가 말했듯이 서구 근대 프로젝트는 여전히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앞서 말했듯이, 고독과 정신적인 공허감에 시달리고 있는 서구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마음의 평화와 행복이다. 그들은 고급 저택과 승용차, 기름진 음식과 마약 도박 섹스 등 물질적 안락과 말초적 쾌락을 극단까지 추구한 후 그런 것들이 결코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엘리트 계층과 교양 있는 중산층을 중심으로 불교에서 귀중한 가치를 발견하고 부처님의 말씀에서 자신들의 고통과 불안을 해소하고 잃어버린 행복을 되찾고자 노력하고 있다. 마음의 평화와 행복은 결코 외부나 물질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살피는 과정에서 한 송이 꽃처럼 피어나는 것이다. 이제 모든 지식을 탐욕스럽게 습득하는 것에서 머리를 비우고 평상심으로 마음을 고요하게 갖는 것이 행복의 원천이다.

 버트런드 러셀이 말하는 대로 행복은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에고(ego)를 버리고 마음을 비우는 데서 비롯된다. 17세기 《팡세》의 저자이자 수학자 파스칼은 인간의 본질은 권태이며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락이나 재미를 추구한다고 하였다. 인간의 불행은 자신의 거처에 가만히 앉아 내면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인간의 실존을 권태라고 본다면 인간은 끊임없이 놀이와 위락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놀이와 위락은 인간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지 못하고 실존의 불안과 권태를 연장할 뿐이다.

최근 미국, 서유럽 등에서 커다란 반향을 얻고 있는 케임브리지 출신의 명상가 에크하르트 톨레(Eckhardt Tolle) 역시 그러한 인간 실존과 물질문명의 폐해를 절실히 깨닫고 명상의 길을 택한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에크하르트는 최근 베스트셀러인 《당신의 삶을 깨워라》4)에서 부처님의 염화시중과 마하가섭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부처님이 꽃을 명상하고 말없는 부드러운 미소를 제자들에게 보낼 때 가섭이 즉시 깨닫고 화답한 일화는 불교의 참선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이미 한국의 선불교인 간화선은 바로 이러한 부처님의 염화시중의 미소를 참선 수행의 핵심으로 삼은 바 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는 한 송이 연꽃을 들어 많은 대중 앞에 보이셨는데 그 대중 가운데 오직 마하가섭 존자만이 빙그레 미소지었다. 부처님께서 연꽃을 들어 마음을 보이시자 가섭 존자가 그 마음을 바로 깨닫고 미소로 화답해 드린 것이다.
“꽃을 드시자 빙그레 웃네.”
이른바 염화미소가 바로 그것이다.
선(禪)은 염화미소의 뜻깊은 기연으로 탄생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이 염화미소의 기연 밖에도 두 번 더 이심전심의 방법으로 가섭 존자에게 마음을 전하였으니 이것을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 한다.

―《간화선》(조계종 출판사, 2005), 28-29쪽

서구에서 가장 선호되는 명상 저술가 가운데 한 사람인 에크하르트는 이러한 염화미소와 삼처전심이 자신의 명상 철학의 밑거름이 되고 있음을 적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지금 여기 이 순간’의 중요성과 항상 깨어 있음의 명상을 강조하고 있다. 미래라는 환상을 버리고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온전히 깨어 있음에 집중하는 순간, 두려움과 공포는 사라지고 행복이 찾아드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지금 바로 이순간의 삶을 유보하고 미래의 신기루를 쫓아다니게 만든다. 미래 중심적인 문명 자체가 실존의 불안을 잉태하고 부채질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과 삶의 환희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사람 가운데 달라이 라마의 제자 마티외 리카르는 물론, 에드가 모랭, 지오노와 같은 사상가나 작가의 글에 불교적 세계관이 깊이 스며 있음을 알 수 있다. 불교는 지금 여기 이 순간의 온전히 있음을 깨닫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지식을 버릴 것을 가르친다.

인도 출신의 명상가 크리슈나무르티는 ‘앎과 지식으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함으로써 지식의 축적이 인간에게 행복을 주기는커녕 과거에 집착하게 만든다고 하였다. 오히려 배운 것을 버림으로써 마음의 고요함을 얻을 수 있다. 텅 빈 충만만이 진정한 기쁨과 삶의 환희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지금까지 삶이 소유에 있었다면 대안적 삶은 있음 그 자체를 중시한다. 존재와 있음을 중시하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무소유와 텅 빈 충만의 마음과 다름없다.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고 마음을 비우는 명상법 가운데 참선(zen) 수행법이 크게 각광받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선의 실천은 느림과 멈춤, 비움의 마음챙김 수행법이다. 이것은 신의 구원에 의미하는 유일신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불교만의 독특한 것으로서 철저한 자기 수행을 통해서만 선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 멈춤과 비움을 통해 인간은 번뇌로부터 벗어나고 언어와 관념의 감옥으로부터 해방된다. 이것은 단순한 침묵과 다르다. 인간은 침묵하면서도 무엇인가에 더 집착할 수 있다.

선 수행에 매료되는 이유는 모든 집착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욕망의 원천인 에고를 벗어버릴 수 있다는 점이다. 욕망의 덩어리인 에고, 자아, 나를 버리는 지름길은 부처의 맑은 마음을 갖는 것과 다름 아니다. 맑은 마음은 바로 서양인들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마음의 청정지대이다. 바로 이러한 한국 불교의 수행법과 마음챙김이 서구인들에게 가슴에 와 닿는 것이다.

맺는 말

20세기에 가장 박해를 많이 받은 종교는 불교와 기독교이다. 지난 세기 구소련과 중국의 공산화 냉전 구도는 전통 종교를 무참히 박해하였다. ‘종교는 아편’이라는 마르크시즘적 무신론을 앞세운 구소련과 중국, 동유럽, 아시아의 공산주의 정권들은 전 세계적으로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아무 관련 없는 깨달음과 불법 수행의 종교를 금지하고 탄압하였다.

1960년대 중국에서 일어난 문화혁명은 지식인뿐만 아니라 불교의 전통을 가혹하게 탄압한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로 인해 아시아에서 불교는 급격히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20세기 초 불교 인구는 기독교, 이슬람의 신도 수와 비슷했으나 현재는 3억 5천만 명에서 4억 명 정도로 추정된다. 국가와 지역별로 대승불교, 상좌불교, 티베트불교 등 다양한 불교 형태가 존재한다.

이 중 대승불교와 상좌부불교 인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나 이슬람교 유대교와 달리 불교 신도 수를 측정한다는 것은 쉽지 않는 일이다. 서구와 이슬람에서는 크리스천, 무슬림, 유대교 가운데 하나만 선택하게 되어 있으나, 동아시아에서는 유교와 불교를 동시에 믿는 경우가 많으며, 일본은 신도와 불교의 구분이 거의 없는 상태이다. 따라서 불교의 경우 신도 수를 헤아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21세기 들어서 서구가 불교의 정신과 가치를 재발견하는 이유는 서구 문명이 봉착한 근본적인 딜레마와 서구인들의 삶의 본질적인 문제, 즉 삶의 의미,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실존적인 질문으로부터 비롯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그들에게 가장 적절한 답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서구는 여전히 아시아적 색채와 뉘앙스가 강한 동양 불교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전통적인 가치와 접합시키고 현대인의 실존적 불안과 문제를 모두 혼합하는 새로운 불교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것을 ‘새로운 법륜(New Vehicle, 프 Nouveau vehicule)’이라고 통칭한다.

상업자본주의 대량소비 사회에서 일상은 아수라의 세계로서 중생은 탐욕과 시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 필요에 의해 건전하게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를 위해 소비하는 ‘쇼퍼홀릭(과도한 쇼핑)’의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고 환상만 커져서 욕망의 갈증은 점점 더 커 갈 뿐이다. 디지털, 인터넷, 첨단 IT 기술의 눈부신 발달은 현대인들의 미망과 환상을 키워만 간다. 이른바 드림과 판타지의 시대에 영상물의 범람은 인간 욕망이 걷잡을 수 없는 단계에 와 있음을 알리는 징표이다.

서구 근대 문명은 삶의 의미와 행복보다는 물질적 풍요와 안락을 제공하였다. 이제 각국 정부도 단순한 물질적 성장 중심에서 삶의 질과 행복을 더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정권 시절 경제자문을 지낸 레이야드는 《행복의 경제학》에서 불교적 삶의 태도야 말로 21세기 인류가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이란 점을 강조한 것이 중요한 예이다. 5)

이제 분망한 마음을 멈추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때이다. 너무 많이 소유하고 너무 빨리 달리지 않았는가. 그러한 삶의 속도 자체가 불행과 질병을 낳는다. 빠름보다는 느림, 미래의 환상보다는 지금 이 순간의 기쁨, 에고의 집착보다는 관조와 평정의 태도가 절실하다. 부처님은 늘 마음챙김과 느린 호흡 명상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음은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

물론 에고의 집착을 버리고 ‘지금 여기 이 순간’의 온전히 깨어 있음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휴식과 달리 일상에서 치열한 용맹정진의 수행을 요구한다. 굳이 산속 도량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세속에서 부처님 말씀을 새기고 집착을 버리면서 마음을 비우는 일이 바로 기본적인 수행 자세이다. 오늘날 서구인들은 한국불교에서 바로 이러한 치열한 정진과 수행의 태도를 원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한국불교는 아직도 수행의 정신이 ‘펄펄’ 살아 숨 쉬고 있다. “한국 불교는 조사선 가풍의 간화선 수행이 펄펄 살아 숨 쉬고 있는 불교로 이는 다른 불교권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참으로 희유한 점이다.”(《간화선》, 조계종 출판부, 45쪽)

그러나 서구인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불교 수행법을 만들기 위해 지나치게 아시아적 색채가 짙은 기존의 불교(티베트나 일본불교)와 다른 새로운 불교 형태를 갈구하고 있다. 이제 한국불교와 서구인들이 만나야 할 시점이다. 그 이유는 수행 정신이 여전히 ‘펄펄’ 살아 있는 한국 불교가 마음의 병으로부터 오는 각종 질병을 예방 치유하며, 고통과 스트레스를 덜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구 사회가 직면한 삶과 실존적 문제를 근본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김동윤 /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불문학 교수. 고려대 졸업, 프랑스 프로방스대 문학박사. 현재 한국영상문화학회 회장, EU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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