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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사회철학의 문명 비판에 대한 자유주의적 성찰* / 민경국
[42호] 2010년 03월 18일 (목) 민경국 kkmin@kangwon.ac.kr

1. 문제의 제기

   

민경국
강원대 경제학과 교수

현대의 인류는 실업과 빈곤, 환경 파괴, 범죄 증가와 도덕과 가치관의 혼란 등 다양한 병폐에 시달리고 있다. 여러 방면에서 이런 병폐의 원인과 그 처방을 제시하고 있다. 주목을 끄는 것은 현대문명에 대한 불교 사회철학의 진단과 해법이다.

불교 사상의 담론의 장으로서 유명한 계간지 《불교평론》은 현대문명에 대한 불교 사회철학의 입장이 명료하고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특히 지난 40호(2009년 9월호)의 이도흠 교수의 〈문명사적 전환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모색〉, 박병기 교수의 〈연기적 독존주의와 열린 공동체〉, 그리고 38호(2009년 3월호)에 게재된 박경준 교수의 〈돈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과 역사적 전개〉가 돋보인다. 그들에 의하면 환경위기, 경제위기 그리고 과학의 위기 등, 인류는 매우 위험한 거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그 같은 위기는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을 만큼 심각하다.

불교 사회철학자들의 이 같은 진단과 관련하여 필자의 흥미를 끄는 것은 두 가지 문제이다. 첫째로 그들은 문명사적 위기의 원인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그리고 둘째로 그들은 위기 극복을 위해 어떤 패러다임을 제시하는가의 문제이다. 그들의 답변은 매우 분명하고 간단하다. 그 원인을 인간의 탐욕에서 찾고 있다. 특히 흥미롭게도 탐욕을 조장하고 확대재생산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을 신자유주의 또는 자본주의 문화라고 믿고 있다. 이 패러다임이 지구촌을 완전히 말아먹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위기를 극복하고 인류의 행복과 번영을 약속하는 대안적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것은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슈마허(E. F. Schumacher; 1911~1977)의 사회철학에 의존하고 있다. 1973년 그의 유명한 저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가 불교 사회철학의 필수적 교본인 것처럼 보인다.

필자가 이 글에서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로 현대문명의 위기의 주범을 인간의 탐욕과 그리고 이를 무제한 조장하는 자유주의라는 진단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둘째로 위기 극복을 위한 불교의 사회철학적 해법도 옳지 못하다는 점이다. 인류의 번영의 해법은 불교철학이 강력히 거부하고 있는 바로 그 자유주의 이념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따라서 우선 제2장에서 왜 자유주의가 중요한가의 문제를 다룰 것이다. 여기에서 자유주의는 인간 이성의 구조적 무지(無知)에 대한 적응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인류를 번영의 길로 이끌어온 이념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제3장에서는 불교 사회철학자들의 문명 비판과 대안을 설명할 것이다.

 그리고 제4장에서는 제2장에서 다룬 자유주의 이념을 기초로 하여 그들의 문명 비판과 대안을 비판적으로 분석할 것이다. 마지막 제5장에서는 결론적으로 불교 사회철학의 정신은 ‘석기시대 정신(stone age mind)’이라는 것을, 따라서 그것은 열린 거대한 사회에서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말할 것이다.

2. 왜 자유주의가 중요한가?

왜 개인의 자유가 중요한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로크―노직 전통의 자연권 사상이다. 철학자들이 주로 다루어온 사상이다. 다른 하나는 인식론적 시각에서 자유주의를 보는 관점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경제적 번영 또는 경제성장이라는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그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 글에서는 후자의 두 가지 점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우선 자유주의란 무엇인가의 문제부터 보자.

1) 자유주의란 무엇인가?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패러다임이다. 자유주의의 경제학적 의미는 시장경제이다. 시장경제와 자유주의는 그래서 동일한 의미로 보아도 무방하다. 개인의 자유 개념이 그렇듯이, 시장경제도 법적 제도적 도덕적 틀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의 도덕적 법적 틀을 전제한다. 이 틀은 시장경제를 구성하는 원칙에서 도출한다. 이 원칙은 다음과 같다.

―사적 소유의 원칙
―계약 자유의 원칙
―책임 원칙
―열린 시장(시장의 진출입이 자유로운 열린 시장)의 원칙
―건전한 통화정책

우리가 주지해야 할 것은 자유주의는 자유방임주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자유주의에서 국가의 과제는 법과 질서의 유지, 재산권의 규정, 재산권 분쟁 해결, 계약의 준수 확립, 책임 원칙을 집행하는 과제, 경쟁 촉진, 통화 질서의 확립, 생활 능력이 없는 자에 대한 국가의 보호 등 다양하다. 이 같은 법적 제도적 틀이 확립되었을 경우에 시장경제는 모든 시장 참여자들에게 유익한 봉사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애덤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한다.

현대문명에 대한 건설적인 비판의 기초는 현실의 사회에서 시장경제 원칙이 어떻게 실현되어 있는가를 검토하는 일이다. 그 원칙의 미실현 결과는 빈곤 문제를 비롯하여 실업 또는 환경문제 등으로 다양한 문제이다.

우리는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것은 현대적 조건에 비추어 고전적 자유주의를 보완한 자유주의이다. 1980년대 후반 개발도상국 개혁의 가이드와 관련된 워싱턴 콘센서스에서도 신자유주의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민영화, 탈규제, 복지정책의 완화, 감세 등 탈규제를 말한다. 시장경제를 확립하자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화폐를 통한 계산이 가능한 체제로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기반으로 하는 시장경제이다 자본주의는 자유주의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이 글에서는 신자유주의와 자유주의 그리고 자본주의를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할 것이다. 이제는 왜 자유주의가 중요한가의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2) 인간 이성의 한계와 자유주의

전통적으로 사회철학은 이기적이냐 이타적이냐와 관련된 인성(人性)의 문제에서 출발한다. 홉스(Th. Hobbes) 전통에서는 인간은 이기적이라고 전제하고 이로부터 사회철학을 전개한다. 공동체주의는 이타심을 전제하여 사회철학을 전개한다. 이런 두 전통의 공통점은 지식의 문제는 이미 해결된 것이라고 전제한다는 점이다. 하이에크는 그의 유명한 1973년 저서 《법, 입법 그리고 자유》의 제1권 《규칙과 질서》에서 이런 전제를 ‘구성주의적 합리주의(constructivistic rationalism)’라고 비판한다.

하이에크의 자유주의 사회철학은 인간 이성은 구조적으로 무지하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인간 이성은 외생적으로 주어져 있고 이를 통해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인간 이성은 사회적 과정을 통해 비로소 형성되고 변동한다는 것이다. ‘진화적 합리주의(evolutionary rationalism)’이다. 이성은 문화적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하이에크는 인간 이성이 구조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가 필요하고 법과 도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시장의 존재 이유, 자유주의의 존재 이유도 그 같은 인식론으로 설명하고 있다. 모든 것을 아는 전지전능한 사람이 존재하는 세계에서는 자유도 불필요하고 법과 도덕 규칙도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간 이성의 한계라는 사실에 의해 시장경제의 중요성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국가기관에서 일하는 정치가든 관료든 또는 학자나 자본가나 노동자나 가릴 것 없이 모든 인간은 제한된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가진 지식은 자신의 삶과 관련된 한 줌도 안 되는 아주 작은 부분적인 지식이다.

다른 한편, 구조적으로 무지한 인간은 혼자 살 수도 없다. 타인들과 협력과 분업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개인들은 타인들을 알아야 한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의사소통이 필요하다. 그 수단이 언어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언어는 대면사회에서처럼 서로 들을 수 있는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열린 거대한 사회에서는 서로 들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서로 만지거나 표정을 읽을 수도 없다.

이런 사회에서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은 무엇인가? 그것은 화폐로 계산된 가격이다. 이 가격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견해 그리고 의도들을 추상화하여 필요한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흥미로운 것은 가격은 인간 정신에 의해서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지식까지도 수집하고 가공하여 필요한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한다는 점이다.

가격은 인간의 인지능력의 범위를 넘어서까지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아는 사람들끼리의 분업과 교환을 넘어서 익명의 사람들 사이에서도 분업과 교환을 가능하게 한다. 가격이 없었으면 오늘날처럼 분업과 교환이 국제적으로까지 확대하지 못했을 것이다. 의사소통 수단으로서 가격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기 위해서는 사유재산제도를 비롯하여 시장경제를 구성하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 다시 말하면 정부의 자의적인 개입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화폐가격뿐만이 아니라 시장경제를 구성하는 원칙을 구현한 행동 규칙이다. 이에 속하는 것이 도덕규칙, 상 관행, 전통, 법규칙 등이다. 이런 행동 규칙들 속에는 해서는 안 될 행동이 무엇인가에 관한 지식을 반영한다. 수십 세대, 수백 세대를 거처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을 반영한 것인데, 이 같은 문화적인 요소들이 의사소통의 중요한 수단이다.

시장경제가 지식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탁월하다는 것은 계획경제를 보면 또렷이 드러난다. 계획경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계획을 담당하는 정치가나 관료들이 각처에 분산되어 존재하는 지식들을 전부 수집 가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느 누구든 구조적인 무지를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다. 계획경제에는 인간 능력 범위의 저편에 있는 지식을 전달하는 메커니즘이 없기 때문이다.

지식의 문제는 전면적인 계획경제뿐만이 아니다 가격 규제나 수량 규제 등을 통하여 시장경제를 필요에 따라 규제하는 경우에도 지식의 문제는 마찬가지이다. 규제에 필요한 지식을 전부 수집하여 이를 가공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 입증하는 것이 케인스주의와 복지국가의 몰락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사회를 합리적으로 만들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하이에크의 1988년 저서 《치명적 자만》이 보여주듯이 그것은 지적 자만이고 그 결과는 치명적이다.

3) 경제사회적 번영과 자유주의

자유주의가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이 번영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수렵채취시대의 매우 척박한 야만적 삶에서 인류를 문명의 길로 이끌어준 요인, 자유와 번영을 가능하게 한 요인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것인데, 세계 일인당 소득의 변동을 나타내는 아래의 〈그림-1〉을 보자.

인류의 원시사회로부터 1800년대까지 세계 일인당 소득(세계 전체 인구로 세계의 전체 소득을 나눈 것)은 큰 변동이 없었다. 일인당 소득 수준은 겨우 생존할 만한 수준이었다. 침팬지나 기타 동물들의 생활수준과 차이도 거의 없었다.

1800년대 이후를 보자. 세계 일인당 소득은 급진적으로 증가하여 오늘날에는 8,000달러에 육박하고 있다. 이때부터 인류 역사상 새로운 변동이 발생한 것이다. 동물적인 삶, 즉 생존 수준을 극복하여 삶의 여유를 가질 만큼 소득이 증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즉, 1800년대를 전후하여 소득수준의 차이를 가져다준 것은 무엇인가의 문제와 그리고 인간과 동물을 구분해 주는 것은 무엇인가의 문제이다. 그 대답은 사유재산과 시장경제의 발달이다.

18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장경제의 발달과 세계적 확산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흥미롭게도 1800년대 이전의 빈곤의 원인을 맬서스의 인구트랩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빈곤이 인구 증가 때문이 아니라 ‘제도의 실패’로 야기된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와 도구를 사용하는 그리고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점에서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것도 옳지 않다. 경제학적으로 보면 인간과 다른 동물의 차이는 시장경제의 존재 여부이다. 인간세계야말로 다른 동물세계가 갖지 못한 시장경제를 가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인류에게 번영을 가져다준 것이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 이외에도 경제적 자유와 번영의 관계를 말해 주는 사례는 대단히 많다. 필자의 2007년 저서 《자유주의의 지혜》 제3장 ‘번영의 문제와 자유주의 지혜’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왜 경제성장이 중요한가? 자유주의가 성장을 중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중요성을 가장 설득력 있게 말한 인물은 하버드대학 교수 벤자민 프리드만(B. Friedman)이다. 그는 2005년 유명한 저서 《성장의 도덕적 귀결》에서 역동적이고 성장하는 경제에서만 다양성에 대한 관용, 사회적 이동성, 공정성에 대한 헌신,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을 촉진시켜 준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곳간이 넉넉해야 예의를 안다.”는 동양의 옛말과 일치한다. 먹을 것이 없는 경우, 민주주의도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태적인 또는 침체된 경제에서는 사람들은 의기소침에 빠지고 우울해진다. 타인들에 대한 너그러움도 없다. 외국인에 대한 적대감도 늘어난다. 미래에 대한 꿈도 없다. 질투와 질시가 만연한다. 성장하는 경제에서만이 질투와 질시도 완화시킬 수 있다. 그 이유는 성장하는 경제에서 사람들은 과거의 자신의 처지에 비추어 현재를 평가하는 데 반하여 정태적인 경제에서는 타인의 소득에 비추어 자신의 처지를 평가하는 심리적 성격 때문이다.

3. 불교 사회철학의 문명 비판과 슈마허의 불교경제학

불교철학자들이 현대문명과 자유주의를 어떻게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서 어떤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는가? 3명의 불교철학자의 입장을 설명할 것이다. 돈과 관련된 박경준 교수, 공동체주의와 관련한 박병기 교수 그리고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문명 비판을 제시한 이도흠 교수.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현대문명을 왜곡하고 위기의 상황으로 이끈 것은 탐욕을 조장하고 촉진한 자본주의라는 점, 그리고 이를 대신할 패러다임은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사회질서 원칙이라는 점이다. 세 학자들의 논점을 설명하고자 한다. 다음 장에서는 그들의 논점을 비판할 것이다.

1) 현대문명에 대한 불교 사회철학자들의 논점

①박병기 교수의 논점부터 시작하자.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공동체보다는 자유에 더 큰 관심을 갖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주의는 이기적이고 원자적인 인간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지속 가능한 사회질서의 기초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무제한의 이기심을 허용하는 자유지상주의 대신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현대문명과 자유주의를 혹독하게 비판했던 공동체주의와 그리고 자유주의를 통합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 그는 자리(自利)와 이타심을 동일시하는 패러다임을 찾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이 같은 패러다임이 불교라는 것이다. “불교의 기본 윤리는 ……자리와 이타를 동일시하는 자비의 윤리”라고 한다. 이것은 전통, 정체성 그리고 연대감, 우정과 같은 공동체 가치를 중시하면서도 개인의 자유와 이기심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온건한’ 공동체주의와 흡사하다.

아무리 보아도 박 교수가 지향하는 불교적 원칙은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슈마허 원칙의 실현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공동체 가치를 함양하고 탐욕을 억제하기 위해서 박 교수는 도덕 교육을 중시한다. 재분배 정책이나 규제 등, 제도화도 필요하다. 뒤에 가서 설명하겠지만 그 같은 제도화는 개인 자유의 침해이다.

②박경준 교수는 돈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불교에서 부지런히 능력껏 재물을 버는 것은 용납된다. 이자놀이도 허용된다. 그러나 재물에 대한 탐욕은 금물이다. 박 교수는 이를 바탕으로 하여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인간의 끝없는 이기적 욕망에 뿌리를 내린 것이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이런 자본주의에 대하여 긴장해야 한다고 한다. 오늘의 지구적 경제위기도 탐욕에 근거한 자본가의 몸집 부풀리기 때문에 생겨난 거품이라고 말한다.

박경준 교수의 불교철학적 관점은 사실상 시장경제에 대한 엄격한 규제를 정당화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에 의하면 불교적 이상은 자유와 평등의 기반 위에서 가능하고 자비와 보시를 중시하기 때문에 국가적 차원에서 분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조세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가 국가 간섭을 정당화하는 최고 절정은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슈마허 원칙의 언급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정치적 법적으로 실현하려면 시장경제에 대한 엄격한 규제가 원칙이다. 박경준 교수가 자유주의를 극복하고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불교의 정치철학적 이상을 퇴니스(F. T켞nnies)의 공동사회(Gemeinschaft)의 실현이라고 생각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③이도흠 교수의 논점은 매우 광범위하다. 그리고 체계적이다. 그는 현대문명을 세 가지 차원에서 비판하고 있다. 전 지구적 차원의 환경위기, 신자유주의의 위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과학 운동의 입장에서 본 과학의 위기.

이 교수는 환경위기의 예로서 온난화 문제와 열대우림의 파괴, 멸종위기 그리고 그 밖에도 크고 작은 환경오염 문제들을 들고 있다. 흥미롭게도 환경위기를 확대재생산하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라는 것이다. 부르주아적 탐욕의 결과가 환경위기라는 것이다. 환경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에서부터 해체해야 하고 자연과 타자와 공존이 가능한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참으로 위험하다. 모든 것을 공유재산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원시시대의 자연환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처럼 보인다.

이 교수의 급진성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로 대공황이 야기되었고 나라들 간의 빈부격차가 증가했다고 한다. 신자유주의로 인하여 실업과 빈곤이 증가되었다고도 한다. 그는 공동체주의가가 주장하듯이 신자유주의는 공동체를 파괴했고 “서로 보듬고 기쁨을 함께하고 슬픔을 나누는 ……의리와 공동체 정신”도 파괴했다고 주장한다. 경제성장의 결실은 부자만 차지할 뿐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하게 만든 것이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이 같은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그는 인간의 탐욕을 억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인간의 탐욕은 인간 해방의 장애물이다. 과학기술에 대한 비판도 매우 강력하다. 인간을 소외시키는 컴퓨터공학, 인간의 노동을 박탈하는 과학기술, 생태계를 파괴할 유전자조작 식품 등.

이 교수는 결론적으로 모든 사회 시스템을 엔트로피가 제로 상태인 순환 시스템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사회를 정태적인 상태, 제로성장의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슈마허의 원칙을 강조하고 있다. 개인적 차원에서 개인들이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해야 한다고 한다. 국가 차원에서는 법과 제도를 통해 그 원칙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중에 보겠지만 이런 체제에서는 개인의 자유는 소멸되고 개인들은 국가기관에 예속된다.

세 명의 불교 사회철학자들의 입장의 설명과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것은 불교 사회철학의 핵심적 요소, 즉 토마스 쿤(Th. Kuhn)의 말을 빌리면 패러다임의 ‘핵(core)’에 해당되는 요소이다. 그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인간의 탐욕이다. 다른 하나는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실천적 개념이다. 그래서 그들의 패러다임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슈마허의 사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2) 슈마허와 불교의 사회철학

슈마허가 어떤 사상의 소유자였는지 알 수 있으려면 그의 삶의 여정을 개관할 필요가 있다. 1911년 독일에서 태어난 그는 슘페터(J. A. Schumpeter)로부터 영향을 받아 경제학자가 되었다. 1930년대에 영국에서 유학하는 동안 케인스와 마르크스를 발견하고는 이에 심취했다. 기독교적 유산을 거부하고 사회주의 혁명가가 되었다. 당시 서구에 풍미하던 중공업의 국유화 운동과 복지국가 건설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영국의 사회주의자 토니(R. H. Tawney)로부터 그리고 복지국가 설계자였던 비버리지(W. Beveridge)로부터도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인생을 바꾼 것은 1955년 미얀마(당시에는 버마)의 방문이었다. 거기에서 행복하고 소박한 미얀마 사람들의 불교적 삶의 모습에 감탄했다. 불교로 개종했다. 작은 것이 아름답게 보였던 것이다. 이 같은 생각에서 오늘날 불교적 교본이 된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제목의 책을 쓴 것이다.

큰 도시와 큰 기업은 경제를 비인간적으로 만들고 재생 불가능한 자원을 고갈시키고 인간을 물질주의로 만든다고 쓰고 있다. 작은 인간에 맞는 작은 기술이 아름답다고도 한다. 가장 중요한 내용은 제4장 불교경제학이다. 외국무역은 불교경제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멀리에 있는 자원을 끌어다가 욕구를 충족하는 것은 성공이 아니라 실패라는 것이다. 불교는 소비사회도 노동절약적인 기술도 거부한다. 재생산이 불가능한 자원의 이용, 대규모 다국적기업도 거부한다.

그의 책은 환경주의는 물론 공동체주의 그리고 지속 가능한 성장의 옹호론, 중소기업론에 매우 큰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불교적 사회철학은 케인스, 마르크스 그리고 토니, 비버리지 등의 사회주의 사상을 불교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사상의 궁극적 목적이다. 그가 토니를 인용하여 선언하고 있듯이 “이기주의, 탐욕을 조장하지 않는 제도적 환경”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은 선언은 불교의 사회철학의 핵심적 요소인 인간의 탐욕의 억제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따라서 한국의 불교 사회철학자들이 그 책을 교본으로 여기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4. 불교 사회철학의 문명비판의 허와 실

불교 사회철학의 핵심적 요체는 인간의 탐욕과 그리고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실천적 개념이다. 이 두 가지 개념을 가지고 현대문명과 자유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두 가지 문제이다. 첫째로 불교의 사회철학 자체의 오류이다. 두 번째로 이를 바탕으로 한 자유주의 비판이다. 이 두 가지를 나누어 설명할 것이다.

1) 불교 사회철학의 세 가지 치명적 오류

불교의 사회철학은 구조적으로 세 가지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하나는 탐욕을 취급하는 방법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두 번째로 인식론적 국면에서 그리고 세 번째는 윤리적 측면에서의 오류이다.

(1) 인간의 탐욕이 문제인가?

세 명의 불교 사회철학자들은 인간의 탐욕을 비판한다. 이것이 환경위기, 경제위기 등을 야기한다고 주장한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실천적 원칙은 탐욕 억제를 위한 정치적 개념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불교의 사회철학이 인간의 탐욕을 다루는 방법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물론 인간의 탐욕 또는 이기심이 무제한적이면 그것은 문제인 것은 사실이다. 자유주의에서도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자유주의는 탐욕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는가? 자유주의와 시장경제에는 내부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장치가 세 가지가 들어 있다.

시장경제를 구성하는 원칙을 보자. 이것은 재산권 규칙, 계약과 관련된 규칙 그리고 책임 규칙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규칙들은 시장 참여자들이 해서는 안 될 행동을 금지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장경제의 바탕에 두껍게 깔려 있는 행동 규칙들은 노스(D. North)에서 볼 수 있듯이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위반할 경우 사회의 강력한 비난이 뒤따르는 비공식 규칙과 위반하면 국가의 제재가 따르는 공식 규칙의 구분이다.

따라서 이기심과 탐욕을 통제하는 첫 번째가 비공식 규칙이다. 두 번째 통제 메커니즘이 민법 형법과 같은 공식 규칙이다. 무제한적 이기심을 억제하는 마지막 세 번째 통제는 이 같은 행동 규칙의 틀 내에서 이루어지는 경쟁을 통해서이다. 예를 들면 나쁜 상품을 비싼 값으로 파는 기업은 시장에서 도태된다. 왜냐하면 좋은 상품을 값싸게 공급하여 이윤을 추구하려는 경쟁 기업이 당장 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철학이 분명히 거부겠지만 경쟁이야말로 인간의 탐욕을 가장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메커니즘이다. 이 세 가지가 이기심과 탐욕을 통제하는 자유주의 원리이다.

요컨대 시장을 구성하는 원칙만을 제대로 지킨다면 이기심과 탐욕은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개인들의 이기심과 탐욕은 사회 전체에 이익을 가져다준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불교철학자들은 탐욕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다. 인간이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리고 탐욕이나 이타심은 체제와 관계없이 늘 어디에서나 목격되는 인간의 불변적인 심성이다. 그것은 물리학의 중력(gravity)의 법칙에 해당된다.

탐욕은 인간 본성을 구성하는 고칠 수 없는 요소라는 것을 보여준 것, 이것이 윌슨(O. E. Wilson), 도킨스(R. Dawkins) 등의 사회생물학의 공로이다. 따라서 건설적인 담론은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을 사실로 인정하고 이것이 생산적인 방향으로 작용하기 위해서 필요한 게임 규칙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사회철학은 이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다. 탐욕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병폐의 원인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도흠 교수와 박경준 교수에서 볼 수 있듯이 금융위기의 원인을 탐욕에서 찾고 있는 것도 틀렸다. 금융위기를 탐욕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비행기의 추락을 중력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터무니없다. 탐욕 그 자체를 문제시할 것이 아니다. 탐욕을 위기로까지 몰고 간 이유에 주목해야 한다. 시장에 거침없이 풀린 돈과 정부의 시장 개입이 그 이유다.

(2) 불교의 사회철학의 치명적 자만

불교의 사회철학의 또 하나의 핵심은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실천적 원칙이다. 이를 제도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큰 도시, 큰 기업을, 넓게 말해서 모든 사회구조를 인위적으로 계획하여 통제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한가? 지식의 문제를 고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불교 사회철학의 치명적 오류이다.

그 같은 통제를 위해서는 모든 개인들의 정신을 통제해야 한다. 왜냐 하면 사회현상은 인간의 정신에서 산출되는 행동들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인간들의 정신을 통제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인간 정신의 작동을 완전히 알아야 한다.

그러나 하이에크가 유명한 저서 《감각적 질서》에서 또렷이 보여주고 있듯이 이것은 불가능하다. 인간 정신은 초의식적인 규칙에 의해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초의식적인 것은 의식할 수 없는 요소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완전히 알 수 없다. 하물며 수백만의 정신, 수억의 정신들의 상호작용을 완전히 알고 정부가 통제한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 불교 사회철학자들은 이 같은 지식의 문제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인위적으로 계획하여 탐욕을 제거하거나 억제할 수 있는 사회질서를 만들 수 있다는 지적 자만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같은 자만은 사회주의의 몰락에서 보는 것처럼 치명적이다. 하이에크의 유명한 만년의 저서 《치명적 자만》은 매우 시사적이다.

우리가 지식의 문제를 고려한다면 개인들이 마음껏 자신들의 정신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도록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불교의 사회철학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불교의 사회철학은 ‘하고 싶음(will)’과 ‘할 수 있음(can)’을 구분하지 못하고 전자는 후자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3) 윤리적 국면의 오류와 불교의 사회철학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불교의 사회철학의 실천적 원칙은 거대한 열린 사회를 전제한 원칙이 아니다. 작은 마을이나 작은 도시를 전제한다. 이 같은 사회는 서로 얼굴을 아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특징으로 한다. 이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난 마을을 떠나는 일이 드물다. 이 같은 사회에서는 큰 기업도 필요 없다. 대형 백화점도 필요 없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소규모 사회에서는 이도흠 교수가 말하듯이 “서로 보듬고 기쁨을 함께하고 슬픔을 나누는” 공동체 정신이 지배한다. 그리고 박병기 교수가 말하듯이 자리와 이타가 하나가 되는 사회이다.

이 같은 연대와 유대감을 기반으로 형성된 사회질서의 전형적인 것이 원시부족사회라는 것은 인류학자가 또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당시 호모 사피엔스들은 소규모의 그룹을 지어 수렵과 채취를 하면서 삶을 영위했다. 부족국가를 형성하여 정착하던 살던 시기도 그 같은 도덕이 지배했을 터이다.

문화적 진화는 그 같은 원시부족사회를 극복하고 오늘날과 같이 거대한 익명의 사회를 탄생시켰다. 이 같은 사회는 시장경제와 광범위한 개인적 자유를 가진 사회이다. 열린 거대한 도덕은 특정의 행동을 금지하는 추상적인 행동 규칙이다. 이것은 약속 이행, 재산의 존중, 개인적 책임과 같은 도덕이다. 이것은 연대나 유대와 같은 공동체 도덕과는 성격상 전적으로 상이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사회의 규모에 따라 사회의 기초가 되는 도덕도 다르다는 점이다. 연대감이나 이타심 도덕 같은 소규모 사회의 공동체 도덕을 거대한 열린사회에 적용할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이도흠, 박병기, 박병준 등 불교의 사회철학자들은 이와 같은 윤리적 국면을 간과하고 있다. 작은 것들을 안내하고 지배하는 도덕을 거대한 사회에 적용하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2) 불교 사회철학의 자유주의 비판의 허와 실

이상을 종합하면 자유주의야말로 인간의 탐욕, 지식의 문제 그리고 윤리적 국면을 아주 합리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불교 사회철학은 자유주의를 집요하게 비판하고 있다. 다양한 측면에서 비판하고 있다. 지면 관계로 세 가지만 간결하게 논의하고자 한다. 자본주의가 환경오염의 주범이라는 주장, 국가간 불평등과 빈곤을 야기하는 주범이라는 주장, 그리고 자본주의는 빈익빈 부익부를 야기한다는 주장.

(1) 자유주의가 환경위기를 야기하는가?

이도흠 교수는 환경위기를 말하고 있다. 예로서 온난화 문제와 열대우림의 파괴, 멸종 위기 그리고 그 밖에도 크고 작은 환경오염 등이다. 흥미롭게도 환경위기를 확대재생산하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라는 것이다. 부르주아적 탐욕의 결과가 환경위기라는 것이다.

지구온난화가 정말로 문제인가? 그것은 탐욕을 조장하는 자유주의 탓인가? 이 문제를 위해서는 긴 말이 필요하다. 지면 관계로 간단히 짚고 간다면, 온난화는 문제가 아니라 추위와 더위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정상적인 자연현상이다. 비록 온난화가 문제가 된다고 해도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원칙의 실현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다. 창의성을 발휘하여 해결책들을 찾아서 이들을 테스트하고 학습할 자유가 필요하다. 그래서 온난화의 문제든 환경문제든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주의이다.

이도흠 교수는 성장의 한계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시장경제 아래에서는 성장에 한계가 없다는 것도 역사가 입증해 준다. 예를 들면 19세기 조명용 연료는 고래기름이었다. 수요 증가로 고래가 고갈될 위기가 닥칠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기우였다. 고래기름 값이 오르자 대체에너지가 등장했는데 이것이 등유이다.

1950년대에는 석유의 종말론이 기승을 부렸다. 조만간 석유가 고갈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것도 기우이다. 석유의 이용이 증가하면 값이 오르고 이에 따라 그 이용을 줄인다. 대체에너지의 개발을 위한 노력이 증가한다. 성장 한계 예측은 억측일 뿐이다. 시장경제에서는 자동적으로 자원이 절약되거나 대체에너지가 개발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자유의 보장이다. 그래서 자유주의에서 성장은 무한하다.

(2) 자유무역과 글로벌이 빈곤국을 만드는가?

이도흠 교수가 주장하듯이 세계화가 빈곤국을 더 빈곤하게 만들었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통계가 입증한다. 세계 인구 중 하루 1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절대 빈곤층이 1970년의 17.2%에서 1998년 6.7%로 하락했다. 하루 2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빈곤층도 같은 기간에 약 절반으로 줄어들었다(41%에서 18.6%). 1980년 월 500달러 이상의 소득을 가진 인구 비율이 14%였다. 그러나 2000년에는 55%로 급증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감소한 직접적 이유다. 세계 빈곤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인도와 중국이 개방정책으로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특히 1979년 이후 중국의 시장개혁으로 연평균 9%의 성장과 함께 1억 이상의 빈곤자를 구출했다. 세계 역사상 전례가 없는 성장률과 그리고 빈곤 퇴치이다.

세계화가 빈부의 격차를 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무역이 세계의 빈부 격차를 야기한다. 예를 들어 보자. 미국, 캐나다, 일본, 유럽연합 등 부유한 나라의 보호주의 무역 가운데 가장 나쁜 보호주의를 펼치는 나라는 유럽연합으로 알려져 있다. 유럽연합의 농산물 보호 관세로 직접 타격을 받는 것은 아프리카인들이다. 중요한 어떤 보고서에 의하면 아프리카에는 매일 6,600명이 죽어가고 있는데 유럽연합이 자유무역을 펼친다면 대폭적으로 그들을 구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호무역주의가 인류의 빈곤을 창출한다는 것, 이것을 유럽연합의 보호무역 정책이 입증해 주고 있다.

(3) 자본주의는 빈익빈 부익부를 야기하는가?

불교의 사회철학은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빈익빈 부익부를 야기한다고 비판한다, 그런가? 빈익빈 부익부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부의 세습을 의미한다. 자본주의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가난한 집은 대대로 가난하고 부유한 집안은 대대로 부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장경제에 대한 옳은 비판이 아니다. 법으로 보호하는 특권과 고율과세가 없는 자유사회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노력과 교육, 그리고 절약을 통해서 삶의 수준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자본주의가 가장 많이 발전한 미국의 백만장자 가운데 80% 이상이 자수성가한 사람들이다.

빈익빈 부익부의 두 번째 의미는 자본주의가 발달하면 빈부의 격차가 심화된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비판도 옳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시장경제에는 분배를 심화하는 요인도 있지만 분배를 평등화의 방향으로 이끄는 요인도 작용한다. 전자는 혁신이고 후자는 모방이다. 혁신과 모방 과정이 끊임없이 작동한다.

분배 결과를 시정하는 정책은 분배를 더욱 더 악화시키고 새로운 빈곤층을 야기한다는 것은 유럽 국가나 남미 국가의 경험이 또렷하게 입증한다.

5. 작은 것이 아름답다. 그러나……

불교 사회철학의 가치들은 욕구의 다양화에서 문명의 핵심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 특성의 순수성에서 그것을 보고 있다. 이상주의적 가치일 뿐이다. 이 가치가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소규모 사회이다. 작은 것을 아름답다고 보는 것은 인류가 장구한 기간 동안 살아온 원시사회에서 습득한 정신이다. 진화심리학자 코스미데스(L. Cosmides)와 투비(J. Tooby)는 이를 ‘석기시대의 정신(stone age mind)”이라고 말한다.

불교가 이런 도덕적 가치를 설교하고 불교철학자들이 이런 가치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반대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 같은 이상주의의 도덕적 가치를 열린 대규모 사회에 강제로 적용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 방글라데시의 소액 대출을 자율적으로 업으로 하는 그라민뱅크를 반대할 이유가 없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자유로이 사람들이 불교적 도덕 가치를 택하는 것은 반대할 이유가 없다. 자유사회에서는 그래서 도덕적 행동을 선택할 자유가 허용되어 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처럼 강제로 미소금융을 추진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선택하도록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 이런 자유 자본주의에서 가난한 사람도 부자가 될 수 있다. 경쟁력 있는 일자리가 창출될 수 있고 빈곤도 지속적으로 해소될 수 있다. 고된 노동을 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기술 발전도 가능하고, 일하고 남는 인간의 에너지를 교육에 쏟을 수 있다.

이도흠 교수가 지적하듯이 기술 발전이 부작용을 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기술 발전을 반대할 이유가 될 수 없다. 자유사회의 강점은 문제가 발생하면 언제나 해법을 발견하고 테스트하고 학습하는 과정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자유사회의 진화적 과정에 맡겨야 한다. 이 과정이 문제 해결을 발견하는 절차이기 때문이다. ■


민병국 / 강원대 경제학과 교수. 서울대 문리과대학 졸업, 독일 프라이브르크 대학교 경제학 석사 및 박사. 한국하이에크학회 회장 역임. 한국제도경제학회 부회장겸 편집위원장. 주요 저서로 《하이에크 자유의 길 : 하이에크 자유주의 사상연구》 《자유주의의 지혜》 《자유주의의 시장경제》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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