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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육비구 할복(六比丘 割腹)사건 / 박부영
세미나 중계
[33호] 2007년 12월 10일 (월) 박부영 불교신문 기자

1. 글을 시작하며

1945년 해방 후 한국 사회는 식민 잔재 청산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분야의 개혁이 좌절되거나 사회모순이 심화되는 결과를 빚었다. 불교정화운동은 불교 내적으로는 종교개혁이었지만 운동의 전개 과정에서는 식민지 시대의 법과 제도와의 갈등으로 나타났다.1)

종단 권력을 장악한 대처승들은 불교 내부의 식민 잔재였다. 이들은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식민시대의 사찰령에 따라 일제시대부터 종권과 지방 사찰을 장악하고 있었다. 반면 정화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일제 강점기 시대에 출가해 참선에만 몰두한 수좌들로 숫자가 적고 사회 경험이 일천한, 주로 나이가 젊은 청년층이었다.2) 이들은 그 중에서도 파격과 장부의 기개를 중시하는 임제종 계통이었다. 임제종 선풍은 19세기 말부터 경허 스님에 의해 되살아나 일제시대에도 널리 풍미했다.

 간화선 중심의 임제 선풍을 진작시키는 움직임은 1947년 10월부터 시작된 봉암사결사에서 시작돼 그 영향이 선승들에게 널리 퍼져 있었다.

불교정화운동은 처음에는 체재 순응적이고 요구사항도 온건했다. 이들은 비구승들이 마음 놓고 수도할 수 있는 18개 사찰을 배당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 사찰들은 현재는 기도처로 유명하지만 당시만 해도 접근이 어려운 오지에 위치했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가 거부당하면서 상황은 비구승이 현실에 안주해 살거나 모자라는 힘을 외부에서 충전하는 길밖에 없었다.

힘의 우위에서 절대적으로 열세에 놓였던 비구승들이 한국 사회에서 유일하게 식민 잔재 청산에 성공하고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데는 명분에서의 우위와 이승만 정권의 지원이 컸다. 비구승들은 명분은 있었지만 식민지 시대의 법과 제도가 해방 후에도 온존되는 바람에 절차적 정당성을 갖추는 데 실패했다. 부족한 절차적 정당성을 대신해 주던 권력이 4.19 이후 사라지면서 정화운동은 심각한 위기를 맞는다.

그 결정적 위기가 1960년 11월 24일 대법원 판결이었다. 대법원은 비구승들의 종권 장악을 합법적으로 뒷받침했던 1955년 8월 12일 승려대회를 탄생시킨 비구·대처 합의가 절차상 잘못됐다며 비구 측의 정화운동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를 받아들이거나 전면 거부하는 선택의 기로에 선 비구들은 명분을 내걸고 목숨을 거는 극약처방을 동원해 상황을 역전시켰다. 그 사건이 1960년 11월 24일 일어난 ‘대법원 6비구 할복 사건’이다.

이 글은 정화운동 막바지에 일어난 6비구 할복 사건의 전개과정을 살펴보고 사건이 정화운동에 끼친 영향을 알아 본다.

2. 불교정화운동의 성격과 전개과정

불교정화운동은 외형적으로는 1954년부터 시작돼 1962년 4월 11일 통합종단 출범으로 막을 내린다. 내용은 총독부에 의한 한국불교의 일본화에 대한 반발과 청정비구승단의 수도도량 보장으로 그 운동은 일제시대부터 시작됐다는 것이 최근 연구 동향이다.3)

일제시대부터 1954년 정화운동 초기까지 비구승들의 주장은 동일했다. 사찰에서의 대처승 축출과 비구승들을 위한 수도처 보장 두 가지였다. 비구들이 일제시대처럼 해방 후에도 온건한 요구조건을 내건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해방 후 비구승 수는 많아야 600명을 넘지 않았다. 반면 대처승은 7000명에 달했다.4) 그 가족과 권속을 합치면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비구승들로서는 사찰을 모두 맡을 수도 없었다. 이를 강제할 힘도 비구승들에게는 없었다. 당시 대처승들은 총무원 및 주요 본·말사를 모두 장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국회의원을 6명이나 배출할 정도로 사회에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힘의 열세를 만회한 것은 당시 정권의 적극적 지원이었다. 1954년 5월 20일의 ‘교단과 사찰은 독신비구승이 담당하여 운영을 하고 대처승은 사찰 밖으로 나가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는 교단집행부인 대처승들과 불교정화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수좌인 비구승들에게 적지 않은 반응을 야기시켰다.(조계종 교육원, 2000, 196쪽)

이 대통령은 이후 8차례의 유시를 통해 측면 지원했다. 권력의 힘을 입은 비구 측은 1955년 8월 12~13일 승려대회를 통해 대한불교조계종을 출범시켰다. 이 승려대회는 정부 중재로 비구 대처 양측 5인씩이 참여하는 사찰정화대책위원회의 합의에 따라 이뤄졌다. 1955년 7월 13일 문교부에서 제1차 사찰정화대책위원회가 개최된 이래 많은 논란 끝에 8월11일 제5차 사찰정화대책위원회에서 표결에 따라 전국승려대회 개최가 확정되고 승려대회에서 종회의원과 중앙간부 선출, 종헌 수정안이 통과되면서 이승만 대통령 유시에 의해 촉발된 정화는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5)

비구 측은 그러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대처 측의 완강한 거부로 인해 절차적 정당성을 갖추는 데 미흡했다. 비구 측은 종단 중앙과 일부 사찰을 강제로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는 불안한 지배였다. 물리력이 아니라 법적으로 인정받는 문제가 남았다. 사법부는 대통령의 통제로부터 일정 정도 벗어나 있었으며, 명분보다 절차를 중시 여겼다. 1955년 승려대회 이후 양측 소송은 80여 건이 넘었다.(교육원, 2000, 207 쪽)

3. 할복사건 전개과정

1) 배경
대법원에 들어가 6명의 비구들이 할복한 이른바 ‘대법원 6비구 할복 사건’은 1960년 11월 24일 오후 3시경 서울 서소문 대법원장실에서 발생했다. 대법원에 들어간 스님들은 정화의 정당성과 이유를 설명하고 미리 준비해간 칼로 복부를 찔렀으며 소식을 듣고 달려온 400여 명의 스님, 재가자들이 대법원에 들어가 소동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인해 300여 명의 스님들이 구속되고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일었다.6)

할복이라는 극단적 사건이 발생한 배경은 4.19 이후 달라진 정세와 관련이 있다. 1955년 8월 승려대회를 통해 종권을 장악하고 지방 사찰을 하나씩 접수해 가던 비구 측은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면서 다시 대처 측의 반격에 직면한다. 대처 측은 이승만대통령의 유시는 불법이고 그 불법에 의한 정화운동은 정당하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대처 측은 1960년 6월 9일 청련사에서 모임을 갖고 비구 측 종단을 ‘관제불교 단체’로 규정하였으며, 정화운동 이전으로 사태를 환원시키고 종권을 수복할 것을 주장하였다. 태고종 측은 당시 “태고사(현 조계사-편집자 주)를 강점하고 종단의 주도권을 탈취하도록 작용하고 도와주었던 절대 배경이었던 이승만 정권이 무너짐으로써 정통 태고문 종단으로서는 제2의 해방을 맞이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고 주장했다.(《묵담대종사 문집》, 1999)

소송과 함께 조계사 등 전국의 사찰들을 대처 측이 다시 점거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해인사·통도사·화엄사 등 주요 사찰이 다시 대처승 손에 들어가는 등 일진일퇴의 공방이 시작됐다. 전국에서 대처 측의 사찰 재탈환이 일어났다.7) 이는 변화된 정치 현실을 이용하여 종권 장악의 돌파구를 마련, 대처하려는 의도였다.(교육원, 2000, 209쪽)

비구 측은 종단의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 효봉 스님)를 구성하는 등 상황 변화를 막기 위해 다각도의 대책을 모색하며 강온 양면 전술을 택했다. 비구 측에서는 현 상황을 유지해서 정화가 종결되기를 원하고 대처측은 빼앗긴 절과 종단을 되찾기 위해 소송과 절 뺏기를 전국적으로 벌이는 가운데 양측의 운명을 가를 중요한 소송이 기다리고 있었다.

1955년 8월 12일 승려대회를 결의한 전날인 8월 11일 체신청에서의 결의가 무효라는 대처 측이 제기한 소송이 그것이다. 55년 10월 ‘불교조계종’ 종정 국성우스님이 조계종 종정 효봉 스님, 총무원장 청담스님, 낙산사 주지 원허스님, 봉은사 주지 금오스님, 통도사 월하스님 등 5인을 대상으로 제기한 이 소송에서 대처 측은 1955년 8월 11일 체신청 3층 회의실에서 비구 측 5인 대처 측 5인이 참가해 문교부 중재로 열린 ‘사찰정화대책위원회’의 결의가 무효라고 주장했다.

사찰정화대책위원회는 이승만 유시로 유리해진 입장에 서 있던 비구 측이 상황을 주도해 가자 문교부가 처음으로 개입해 양측의 원활한 합의를 이끌기 위해 조직한 기구다. 60년 당시 비구 측이 주도하던 조계종은 이 기구를 통해 비구·대처 양측 합의에 따라 출범했다.

대처 측은 대처 측의 대표 5명이 대의기관인 종회에서 추천해 파견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대표성이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대표성 없는 사람들이 모여 승려대회를 개최하고 그 승려대회에서 종회를 구성하고 종회에서 종헌을 통과시켜 그것에 근거해서 종정을 추대하고 총무원장을 선출한 절차가 잘못되었다는 것이었다.(월주스님 강연, <한국불교 정화운동의 당위성>, 2002)

1956년 6월 15일 1심 재판부인 서울지방법원은 대처 측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에 비구 측은 고등법원에 항소를 했다. 1957년 서울고법은 비구 측의 승소를 판결했다. 쟁점은 대처 측 대표자 5인의 자격 유무였다. 비구 측은 대처 측이 피고로 위원 전원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소송이 무효라고 주장했다. 1심에서 이야기한 절차상 문제가 아니라 대표성 문제로 끌고 간 것이다.

이에 고법에서는 “피고 등의 당사자 적격에 관하여 대책위원회는 동위원회 전원을 상대로 하기 때문에 위원회는 합의체를 이루고 그 결의는 그 단체의 의사의 발표”라며 “전 위원을 피고로 하지 아니한 위법이 있어 판결할 것 없이 각하 한다.”고 판결했다.(1957년 서울지방고등법원 민사 4부 판결문)

고법 판결이 난 지 3년을 끌며 결정을 못 내리던 사건은 4.19 이후 곧 재개됐다. 당시 비구 측에서는 정상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정화운동의 물줄기를 대법원의 최종판결에서 확정받기를 기대했다. 그러는 한편 판결이 급변하는 정치현실로 인해 영향 받을 것도 대비했다.(교육원, 2000, 209쪽)

지방에서 잇따른 대처 측의 사찰 습격으로 비구 측의 위기감은 커졌다. 비구 측에 힘을 실어 주던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 뒤 공권력은 비구 측을 일방적으로 편들지 않았다. 사법부도 4.19 이후 대처 측으로 돌아섰다.8) 비구 측에서는 4.19 이후 사법부와 행정부가 대처 측에 유리하게 돌아섰으며 이는 민주당 장면 정권이 대처승과 가깝기 때문에 빚어졌다고 여겼다.9) 비구 측은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2) 할복 사건 전말(顚末)
대법원 판결이 불리하게 전개되고 상황이 대처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는 당시 정국을 전환시키기 위한 자구책으로 비구 측은 승려대회를 소집했다. 대법원 판결을 1주일가량 앞둔 1960년 11월 17일 전국승려예비대회를 개최하고 19일 전국에서 올라온 800여 명의 승려가 결집한 가운데 제2차 전국승려대회가 조계사에서 열렸다.10) 이 대회는 11월24일 예정된 대법원 판결 이전에 정화의 타당성을 구현하고, 불법대의를 수호하겠다는 의지를 과시하기 위한 대회였다.(교육원, 2000, 209쪽)

 11월21일엔 조계사에서 비구 측의 입장을 지지하는 전국신도비상대책대회가 열렸고, 비구 측 스님들의 단식 농성이 시작됐다. 결의문 채택이 잇따르고 젊은 비구들 중심의 순교단 조직,11) 단식, 혈서 등 극단의 방법들이 나왔다. 당시 대한불교(현 불교신문)도 판결이 있는 날 당일 특보(特報)를 제작해 적극적인 홍보에 나섰는데 ‘한국불교 주도권이 넘어가면 순교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승려대회 결의문을 비롯해 순교단 조직 등 ‘순교(殉敎)’라는 단어로 도배했다. 그만큼 대법 판결을 앞둔 당시 상황은 급박했다.

이에 앞서 21일에는 예정에 없던 혈서를 작성하며 분위기가 더 고조됐다. 대법원 판결이 비구 측에 유리하지 않다는 정보가 입수됐다.12) 대법원 판결 소식이 미리 전해지자 상황은 급격하게 전개된다. 판결을 하루 앞둔 23일에는 조계사에 있던 승려들 전원이 단식에 돌입했다. 조계사에서 철야정진하던 500여 대중은 비구 측에 불리한 판결이 나오면 모두 순교할 것을 결의했다.

청담스님은 이날 오후 할복을 주도한 몇몇 스님들을 이끌고 미리 대법원을 방문, 재판장인 고재호 대법관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스님들은 정화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패소된다면 그 자리에서 순교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고재호 대법관은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로 이들을 돌려보냈다.13)

그런 가운데 청담·행원스님 등 승려대회를 주도한 스님들은 비밀리에 순교단을 모집했다. 순교단은 젊은 스님들을 대상으로 희망자를 모집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월탄스님 증언). 한쪽에서는 가입을 독려하기 위해 원담스님(현 수덕사 방장) 등이 정화의 당위성과 순교의 필요성에 대한 교육도 실시했다. 오후 다섯 시경 순교를 6명의 비구가 정화 회관 내 지대방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청담 스님은 불교정화의 당위성을 역설하며 순교를 강조했다. 이들에게는 길이 30센티미터 정도 되는 일본도 한 자루씩 쥐어졌다. 순교단을 조직한 사람은 청담스님이고 이들을 현장에 인솔하고 지휘하는 역할은 숭산스님이 맡았다.14)

24일 판결이 있던 날 대법원 주변은 양측의 스님과 지지자들이 몰려들어 장외시위가 열렸다. 경찰은 대법원 주변에 바리케이트를 쳐 접근을 막았다. 숭산스님의 인솔에 따라 순교단은 대법원까지 들어갔다. 인솔했던 숭산스님도 들어가지 못한 상태에서 최종 결행한 사람은 6명이었다.

 6명은 모두 젊은 스님들이었다. 성각스님(性覺〔후일 聲準〕, 속명 文炳述, 양주 자재암, 당시 29세), 월탄스님(月誕, 속명 柳贊秀, 해인사, 당시 24세), 진정스님(眞靜, 속명 權태현, 여주 구곡사, 당시 25세), 도명스님 (道明, 속명 李成燮, 구례 화엄사, 당시 33세), 도헌스님(道憲 속명 金吉洙, 화엄사, ? ), 성우스님(性愚, 속명 鄭鎭三, 양주 자재암, 당시 35세).

대법원은 청담스님이 미리 입수한 대로 비구 측에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 판결은 1955년 승려대회를 가능케 했던 결의를 도출해낸 정화대책위원 중 대처 측 대표를 피고로 삼지 않았다 해도 문제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고법은 문제가 된다 해서 소송을 기각했는데 대법은 그 반대 해석을 했다.

사실 이 판결은 당사자 적격 여부에 관한 내용으로 본안인 55년 승려대회의 적법성 여부는 심사하지 않았다.15) 이 소식을 전해들은 6명의 비구들은 이날 오후 3시경 2층 대법원장실로 향했다. 경찰이 출입을 막았지만 이들은 미리 준비한 작업복 차림으로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다.

 이들을 맞이한 사람은 대법원장의 비서였다.16) 당시 대법원장은 공석이고 배정현 대법관이 직무대행을 수행 중이었다. 이 사건의 재판장은 고재호 대법관이었다. 비서의 안내에 따라 대법원장 직무실에 들어섰지만 비서는 대법원장이 자리에 없다고 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비구임을 소개하고 ‘불교를 위하여 순교하기 위해 왔다는 말을 대법원장에게 전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일제히 복부를 갈랐다.

월탄스님 등 비구들은 “불법에 대처승은 없는데 재판에서 세상법으로 그것이 인정받지 못하였기에 그를 호소하러 왔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이를 본 비서실장은 당황하여 원장 면회를 주선하겠다며 기다려 달라고 했다. 얼마 뒤 서대문 경찰서장이 십수 명의 경관을 대동하고 출동해 복부에 박힌 칼을 빼고 무차별로 구타했다. 그 과정에서 스님들은 실신하고 들것에 실려 나갔다.

밖에서는 순교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400여 명의 비구 비구니들이 일제히 대법원 건물로 들어갔다. 이들은 조계사에서 단식하다가 소식을 전해 듣고 일제히 대법원이 있던 서소문으로 향했다. 판사들이 도망을 가는 등 대법원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경찰은 기마대를 동원해 무차별적으로 구타하고 서울 시내 각 경찰서로 분산 수용했다. 이 과정에서 비구 353명이 연행되고 24명이 구속됐다. 사법사상 전대미문의 사건이 벌어졌다. 언론들은 일제히 ‘대법원 난입사건’으로 규정하며 대대적으로 보도했다.17) 연행된 사람은 대부분 다음날이나 며칠 뒤 석방됐다.

6명의 비구승들을 비롯해 구속된 24명은 이듬해 2월 7일 집행유예 선고를 받고 모두 석방됐다. 이들에게는 ‘특수건조물 침입죄’와 ‘특수공무집행 방해죄’가 적용됐지만 정화를 위하는 순수한 애종심의 발로였다는 점에서 법원은 가볍게 처리했다. 초기에 이들을 폭도로 내몰던 분위기와 달리 비구 측의 열정에 여론이 돌아선 점이 크게 작용했다. 실제로 언론들은 이후 난입사건의 전말을 상세히 보도하면서도 비판적이지 않았다.

4. 할복 사건 의미와 평가

6비구 할복 사건에 대한 평가는 쉽지 않다. 이 사건과 이후 정화 과정 사이의 인과 관계가 뚜렷하지 않고18) 참가자 대부분이 그 뒤 환속해 할복을 단행한 주체들이 이후 종단에서 한 역할을 규명하는 것도 힘들다. 하지만 이 같은 한계 속에서도 몇 가지 평가는 가능하다.

첫째 6비구 할복 사건은 당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점이다. 정화 주체인 비구 측은 절차적 정당성이 부족했다. 문제가 된 1955년 7월 사찰정화대책위원회 회의 과정이나 결과, 그리고 8월 11일 회의 및 8월 12일 승려대회 등은 절차와 과정에서 무리가 많았다. 이승만 대통령의 비호와 관료들의 일방적 편들기가 아니라면 회의조차 성립되기 힘든 상황이었다.

 1심 재판부는 이 점을 지적해 55년 8월 11일 회의가 절차상 잘못됐다고 판결했다. 비구 측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항소심에서는 1심에서 논란이 됐던 절차상 문제가 아니라 당사자 적격이라는 본안과는 다른 문제를 제기했다. 대법원은 바로 이 점을 지적했다. 조계종 출범의 근간을 이루는 55년 1차 승려대회는 결국 법적으로 인정받기 힘든 점이 있었다. 하지만 불가피한 면도 있다.

적대적인 인사들이 각각 5명씩 모이는 회의체에서 7명 이상이 참석해야 성원되는 회의 성립 조건은 성사되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상대방에 대한 회유나 포섭이 아니면 사실상 불가능한 의결 구조였다. 이는 비구 측의 잘못이나 한계가 아니라 식민지 시대 법과 제도가 온전하고 권력 엘리트 들이 그대로 지배하는 사회 전반적인 모순에 따른 것이다.

해방 후에도 사찰령이 온존했고 종단과 본 말사 주지는 이 사찰령에 따라 임명됐다. 식민지 시대 제도가 사회 전반적인 부분에서 그대로 온존하는 상황에서 일부 근본주의적인 성향을 지닌 수좌들이 명분만을 내걸고 체제 개혁을 단행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를 어느 정도 가능케 한 것은 권위주의적 정권의 일방적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4.19 이후 법적인 정당성 여부가 정화운동의 운명을 좌우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사법부 상층부를 형성한 법조 엘리트들은 모두 일제시대 판·검사나 변호사 출신이었다.19) 적어도 불교 개혁이라는 입장에서 4.19 이후 사회 상황은 일제시대로 후퇴한 것과 다름없었다. 비구 측에 남은 마지막 길은 ‘순교’밖에 없었던 것이다.

둘째 역설적이지만 할복 사건은 정화를 다시 불교 내부 문제로 환원시켰다. 불교정화운동은 처음에는 내부 개혁 내지 재정비로 출발했다. 그 내용도 사찰 18곳 할당 정도였다. 소박한 요구조차 거절당하면서 정화 운동으로까지 확산됐다. 이 과정에서 권력의 개입이 일어났다.

할복 사건은 이승만 시대의 행정권력을 대신해 중재자로 나선 사법부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행위였다. 단식 혈서 순교 할복이라는 극단적 방법이 제기된 것은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다. 사법부가 종단의 명운을 좌우할 정도로 깊숙이 관여한 그 시점에서 사법부가 어떤 판결을 내리든 받아들일 수 없다는 극단적 대응이 사회문제화된 정화를 불교 내부 문제로 환원시키는 역설을 불러왔다.

사법부에 대한 심각한 도전인 대법원장실에서의 할복 사건을 중죄로 다스리지 않고 불교정화를 위한 순수한 애종심에서 비롯됐다며 관대하게 처분한 것 자체가 정화를 불교 내부 문제로 인식했다는 증거다. 여론도 법적인 절차나 과정보다 불교정화라는 명분에 더 관심을 두면서 비구 측에 호의적으로 돌아섰다.20)

셋째는 비구승 중심의 통합종단을 결성하는 데 기여했다. 6비구 할복 사건 이후 6개월 만에 5.16 쿠데타가 발생했다. 군부는 이승만 대통령이 8차례의 유시를 통해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무리 짓지 못했던 정화를 단 6개월 만에 마무리 지어 통합종단을 출범시켰다. 이들은 특히 비구 측이 일방적으로 패하던 소송을 모두 취하토록 해 비구 측을 결정적으로 지원했다. 대처 측은 이 조치로 인해 급격하게 힘을 잃고 정화도 마무리 됐다.21)

그러면 이들을 순교라는 극단적 행동을 하게 한 요인은 무엇인가.

첫째, 비구승들의 절박한 처지다. 비구승들은 대처승에 의해 설움을 받으면서 공부하고 수행해야 했다. 대처승들은 일제시대부터 주어진 특권을 갖고 공부를 하고 처자 권속을 거느리며 사찰 토지를 배경으로 국회의원 장관직에까지 진출했지만 비구승들은 마땅한 사찰조차 없이 끼니를 걱정하는 지경이었다. 정화운동을 통해 종단을 결성하고 지방 사찰을 차지한 비구승들은 다시 옛날로 돌아가야 한다는 절박감에 빠져 있었다.
둘째,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뿌리 깊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절대적으로 지원한 행정부와 달리 사법부는 대처 측에 유리한 판결을 많이 내렸다. 특히 지방에서는 대처 측이 유지였기 때문에 일제시대부터 법관생활을 한 이들과 사회 경제적 배경이 동일한 반면 비구승들은 사회적 배경이 전혀 없었다.

셋째, 죽음을 개의치 않는 수좌 가풍의 영향이 컸다.22) 6비구 할복 이전에 이미 56년 대처 측이 법원에서 승소해 강제로 조계사로 난입했을 때 이를 항의해 지효스님이 할복하고 구산스님은 혈서로 장문의 격문을 썼다. 수좌들은 대체로 죽음에 대해 일반인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 할과 방으로 깨우침을 내리는 임제선풍은 선가에서도 가장 과단성이 있다.  선사들의 법문이 주로 생사불이의 가르침이 많은 점도 수좌들의 의식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넷째, 젊은 수좌들의 애종심과 순수성이다. 이들은 대부분 성격이 곧고 원칙주의자들이었다. 이들 중 사건을 주도한 성각스님과 진정스님은 후일 감찰원에서 중책을 맡아 종단의 기강을 확립하는 데 기여를 한다. 성각스님과 월탄스님은 정화가 마무리된 뒤 동산스님이 강진 백련사에 개설한 결사체에 참가해 정진에 몰두한다. 할복에 참가하는 동기도 “정화를 완수하기 위한 사명감에서 목숨을 내던졌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목소리다. 

다섯째, 청담스님의 강력한 카리스마다. 관련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청담스님은 정화 과정에서 일관되게 강경한 모습을 보였고 스님의 그 같은 자세가 정화운동을 추동한 면이 많았다.23) 청담스님은 할복할 칼과 위장복까지 준비하는 등 당시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기획하고 실행했다. 사건 전날에는 6명의 스님들을 불러 당위성을 강조하고 이들이 흔들리지 않도록 조치했다. 이는 청담스님이 정화운동을 처음부터 주도해 일관되게 상황을 주도해온 데서 비롯됐다. 즉 젊은 승려들이 청담스님을 믿고 의지해 따랐던 것이다.

5. 결론을 대신해서

불교정화운동은 왜색 불교를 청산하고 한국불교의 고유한 청정성을 되찾기 위한 불교 내부 개혁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개혁은 기득권 세력의 저항이 따르듯 불교정화운동도 종단을 장악하고 있던 대처승들의 거부와 저항에 직면해 좌초될 뻔했다. 한국 사회가 해방 후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식민지 시대 유산을 그대로 이어받은 상황에서 불교계의 젊은 비구들만이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나섰다. 정화 주체세력은 내부의 권력뿐만 아니라 식민 시대 법과 제도의 저항에도 맞서야 했다.

비구 측은 명분에서는 우위를 점했지만 이를 현실적으로 강제할 합법적 수단을 갖지 못하고 오직 이승만 유시에만 의지했다.24) 유일하게 합법성을 부여하던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면서 법적 정당성은 사법부를 통해 부여받아야 했다. 명분 외에 절차적 정당성을 갖지 못한 비구 측은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비구 측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절차적 정당성이 아니라 명분을 전면에 내세우는 길밖에 없었다. 1960년 11월 19일부터 23일까지의 조계사는 이 명분이 총집결된 장이었다. 그 정점이 24일 6비구 대법원 할복 사건이다. 여러 가지 비판이 많지만 권력을 지닌 집행부에 의해 온건하고 합법적인 개혁이 근본적으로 차단된 데다 오랜 싸움으로 서로간의 감정이 극한에 달한 상황에서 합법성을 획득하지 못한 집단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폭력적이고 극단적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한국의 비구승들은 할과 방 등 과격한 방식으로 수행을 지도하는 임제종 가풍이 몸에 뱄다. 정화운동 과정에서 몇 차례 선배들의 목숨을 거는 행동이 벌어졌다. 이들은 또 재산이나 보호해야 할 권속도 없어 죽음에 대해 일반인보다 훨씬 자유로운 입장이었다.

극단적 방식을 통한 명분 내세우기는 처음에는 비판을 받았지만 곧 여론의 지지를 얻어 결과적으로 정화운동의 정당성을 인정받게 했다. 할복 사건 반년 뒤에 벌어진 5.16 쿠데타로 집권한 젊은 군부들에게도 비구들의 순교 감행은 호의를 주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젊은 군인들 역시 부패 일소라는 명분만을 갖고 목숨을 걸고 기득권 세력에 저항했다는 점에서 대법원 할복 사건을 벌인 6비구와 닮았다. 이는 쿠데타 이후 군부의 일방적 지원 아래 1년도 안 돼 비구 측의 주도로 통합종단이 구성된 데서도 볼 수 있다.

목숨을 건 할복은 정작 종단 내부에서는 환영받지 못했다. 이는 그 뒤 계속된 종단 내 분규 때문이었다. 할복 당시 6비구를 이끈 사람은 성각 스님이었다. 동참자 중 진정스님, 성우스님이 성각스님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 성각스님은 이후 여러 젊은 스님들과 함께 ‘제대로 된 중노릇’을 하기 위해 동산스님을 모시고 결사에 참여한다. 이후 종단 감찰원에 몸담아 종단 기강 확립에 기여한다.

스님은 1967년 1월 ‘정화정신의 계승과 종단 발전을 주도할 소장 승려’를 중심으로 정풍운동에 나서고  정화 동지들과 함께 영축회를 결성해 내부 정화운동을 계속 이어간다. 월탄스님도 성각스님과 함께 동산스님을 모시고 결사에 참여한 뒤 승려 교육을 위해 만든 종비생으로 입학해 선사로서 종단 지도자로 존경 받는다. 6비구 중 두 스님만이 끝까지 승려로 남았고 나머지 4명은 환속했다.

마곡사에서 일연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던 진정스님은 성각스님과 함께 감찰원에서 종단의 기강을 바로잡는데 기여하다가 퇴속했다. 현수스님 상좌인 화엄사 도헌스님은 환속한 뒤 20여 년 전 사망했다. 동헌스님을 은사로 화엄사에서 출가한 도명스님 역시 환속한 뒤 사업을 하다 미국으로 이민 갔다. 윤고암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성각스님 사형인 성우스님도 70년대 환속했다. 

6비구 할복 사건은 종단 정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당사자들은 범죄자라는 고통을 받아야 했다. 반대편의 스님들은 이를 악용하기도 했다. 많은 스님들이 환속한 이유도 종단의 홀대가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정화 6비구 할복 사건에 대한 몰이해와 무시는 곧 정화정신의 실종과 맞물려 있다. 정화 주체세력이 종단에서 배척되는 과정은 종단 내 정화정신의 퇴색과 함께 한다. 정화 6비구들의 정신과 행적을 기리고 이를 포상하는 것은 실종된 정화의지를 다시 찾는 첫 걸음이 될 것으로 본다. ■

 

박부영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 졸업. 현재 〈불교신문〉 편집국 부장. 저서로 《불교풍속고금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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