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회 열린논단 2010년 3월 18일

 

가) 한국인의 열광주의 심리현상과 진정제로서의 불교

한국인의 종교적 열광성은 사유의 논리성을 지운 상태에서의 감정적 맹목적 신앙에 기인=
기독교의 광란적 신앙형태 . 이것은 한국인의 감정적 단순성(낭만성)과 논리적 사유의 무지와 흑백적 선명성과 순수성에 대한 열광과 유관함. 이런 감정적 단순성과 논리에 대한 무지가 가져오는 열광의식이 한국적 쏠림현상을 초래함.

 

 한국인의 열광적 쏠림현상은 한국인의 집단적 무의식으로서의 巫敎的 신바람(神明) 현상과 직결되는 것으로 보임.

한국인의 신바람 기질=

魏志東夷傳에 기록된 동이인은 가舞飮酒를 유달리 좋아한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음-지금도 도처에 있는 술집과 노래방-한국인의 정치사회적 대모의 과격성은 이 신바람 현상과 연관이 있는 듯.

한국인의 열광의식은 격정적. 신바람이 광란과 격정으로 치닫는 경우가 대부분. 이 광란과 격정이 때로는 엄청난 에너지의 고양을 폭발시키기도 함=천주교의 순교행위/가열찬 독립운동과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잘 살아보세 의 운동/월드컵의 응원열기(어떤 불상사도 발생하지 않았음)/기독교의 전교활동과 목사의 열렬한 설교와 신도들의 맞장구/악쓰는 Tv드라마

신바람 현상의 급격한 감정고양 상승과 감정수축 하강현상=몽골제국의 팽창과 수축현상/냄비기질 격정적인 신바람 현상은 가브리엘 마르셀이 경고한 ‘추상의 정신’과 유관함. 추상의 정신은 과격한 단순판단에 의한 이데올로기의 극성, 지금도 한국사회에 좌우의 이데올로기/민주화이데올로기(민주산악회/민주구두병원)=이분법적 사고방식의 극성(흑백적 사고방식)=기독교의 ‘우리크리스찬’ 의식

불교문화=

1)격정적이고 격앙된 감정의 진정제로서의 역할. 냄비기질의 흥분을 가라앉히는 역할을 수행=불교의 호흡법과 참선법

2)이분법적 도식과 적대감정의 극복방안=선명성 대신에 이중적 애매성을 논리로 하는 실상적 존재의 상호 얽힘을 존재 즉 연기의 법을 생활로 함. 존재 즉 연기의 법은 원효대사가 강조한 同異論의 사유를 단가적인 同一論의 사유를 대신하는 사상과 다르지 않음. 기독교의 동일론에 대한 불교의 동이론의 사유를 매우 강조할 필요가 있음.

 

나)서양의 지능적 논리에 대하여 불교의 본능적 논리

흔히 불교는 논리적 사유를 초탈한 사유라고 말함. 그러나 논리를 초탈한 사유는 철학적으로 불가능. 논리를 초탈한 것이라고 해서 논리가 없는 것이 아님. 서양의 논리가 개념적이고 원자론적이며 지능적인 일직선의 사유임에 반하여 불교의 논리는 반개념적이고 卍자처럼 쌍방의 얽힘을 동시에 바라보는 야생적 사유를 기본으로 하고 있음.

야생적 사유는 인류학적 용어로서 레비스트로쓰가 말한 신석기시대 인간의 기본적 사유에 해당. 즉 대대법적 사유로서 인류가 모든 것을 대칭적 관계로서 보았던 사고방식을 일컬음. 이 대대법적 사유는 융이 말한 대극적 사유(Enantiodronie) 즉 음양적 사유와 같음. 이것은 서양의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단가적 사유인 원자론적 진리의 의미와 전혀 그 방향성이 다름. 인류 역사의 진행은 지능의 논리로 흘러 왔음. 즉 본능이 지워지고 지능이 승승장구하는 그런 방향으로 추진되어 왔음.

 

지성은 모든 점에서 소유의 향상을 꾀하는 방향과 같음. 인류사는 곧 지능사나 소유사라고 봐도 과언이 아님. 사유사라는 것은 물질적 경제적 소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정신적 지배를 말하는 도덕주의적 역사의식도 포함됨. 사회를 지배하고 정돈하기 위한 도덕적 노력도 정신적 소유를 상징하는 것임. 그런 점에서 신학과 유학의 도덕주의적 사고방식은 일종의 정신적 소유를 의미함. 인류사는 경제와 도덕의 두 측면에서 소유의 발전을 기약하는 진행으로 추진되어 왔음.

불교의 사유논리는 이 지성의 진행방향과는 정반대로 역추진한 상태의 논리를 지니고 있음. 석가모니가 살던 시대는 다신론에서 일신론으로 지향하던 그런 문명사를 대변함. 다신론에서 일신론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은 소유의 철학에서 필연적.

다시 말하면 일신론은 다신론보다 더 정신적 지배주의의 철학에서 볼 때 더 유효한 소유론을 전개할 수 있었음. 그러나 불교는 이런 역사의 추진현상과 달리 오히려 신석기시대로 거슬려 올라가는 측면을 지니고 있음. 레비-스트로스는 야생인들은 모든 것이 뒤엉켜 있는 애매한 동이론의 관점에서 세상을 읽었음. 원효대사가 말한 同異論은 同一論을 배제하고 세상을 얽힘장식처럼 읽어야 한다는 사고방식과 같음.

불교의 卍자가 바로 저 읽힘장식의 무늬와 다르지 않음. 모든 존재는 원자론적인 自生이 아니고 서로 얽혀 있는 緣生이라는 것 자체가 바로 신석기 시대의 사고방식과 다르지 않고 지능의 논리와 다른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음. 지능의 사고논리와 다르다고 해서 논리가 없다고 봐서는 안됨. 선가의 반논리적 언어는 지눙의 사유방식을 부정하고 해체하기 위함이지 무논리성을 지향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

지능의 논리는 개별적 존재를 단가적으로 먼저 사유하고 이어서 그 개별적 존재자들을 모아서 다시 상호 연결부위를 추후적으로 생각함. 그러나 본능의 논리는 다양한 것들을 동시적으로 연계시켜 입체적으로 구성하는 논리임. 제비는 집을 짓기 위하여 흙과 지푸라기와 자기의 침을 원융하게 두루두루하게 연결시켜 나가는 구조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

흙을 지푸라기와 별도로 따로 떼어서 보지 않고, 자기의 입 속의 침과 다른 별개의 존재자로 읽지 않음. 제비가 보는 흙은 이미 지푸라기와 침이 포함되어 있음. 이런 사고방식을 해체철학자 데리다와 하이데거는 差延(différance/Unter-Schied)이라고 불렀음. 야생적 사유는 곧 차연적 사유이고 이 차연적 사유는 緣起的 사유의 다른 이름임.

인류학적으로 야생적 사유는 하이데거에 의하여 본질적 사유로 명명됨. 하이데거가 말한 본질은 어떤 물체의 본질적 본성을 말하는 것이 아님. 하이데거는 본질적 사유를 존재론적 사유라 보고 이 때의 본질은 물질의 객관적 본성인 Essenz가 아니고 Wesen이라고 명명.

하이데거는 이 Wesen은 <존재하다>의 동사인 <sein>의 과거분사인 <gewesen>과 상관적이라고 지적. 즉 Wesen으로서의 본질은 sein 동사의 과거분사인 gewesen의 의미와 유관한 것으로 현재완료형으로 존재해 왔었던 것으로 여겨짐. 아득한 옛날부터 우리의 존재에 늘 있어왔던 본성과 다르지 않음.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류사가 존재망각의 역사가 되어서 본질망각 즉 본성망각이 되어 왔다는 것과 다르지 않음. 즉 지능의 역사는 바로 본성의 은폐를 기도한 역사와 같다는 것.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야생적 사유와 하이데거가 언명한 존재론적 사유(본질적 사유)는 같은 것을 다르게 언급한 사상. 우리는 야생적 사유=존재론적 사유=음양적 사유=본능적 사유=본성적 사유라고 봐야 함. 우리는 본능을 너무 평가절하하는 사고방식에 습관화되었음.

본능은 충동적인 것이 아님. 본능은 자연적 생존의 지혜로서 정확하게 자기의 영역을 고수함. 본능은 너무 질서정연해서 인간의 소유적 욕심인 충동처럼 반질서가 아님. 동식물에게 각각 생존의 무기가 다양해서 특이한 차이를 이루고 있음. 동식물의 본능은 다 전문화되어 있음.

그러나 특이하게 인간의 본능은 어떤 주어진 전문성이 없이 막연함. 인간은 동물적 본능이 없이 거의 무본능적. 이런 사고방식을 우리가 본성이라고 부른다면, 그 본성은 空이고 無임. 空은 무한한 자유의 가능성을 말함. 불교가 말하는 불성은 곧 무한한 자유의 상징인 空의 본질을 뜻함. 趙州대선사가 개에게 불성이 있느냐 는 물음에 양가적으로 <있다/없다>라고 진술한데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고 보여짐. 본능의 차원에서 개에게도 불성(충직성)이 있으나, 무한한 자유의 空의 차원에서 개에게 불성이 없음.

 

서양적인 神의 개념에는 신은 절대자이고 불변자로서 자기동일성을 함의하고 있음. 神은 佛과 달리 자기동일성의 실체로서 자기 확신에 가득차 있음. 신은 자기 것으로 온통 가득차 있기에 신은 자기 것을 제외하고 다른 것을 수용하지 않음. 기독교의 신이 이래서 자기 것만 알고 다른 것을 이단으로 배격함. 그러나 佛은 전혀 자기 것이 없음. 佛은 空이고 無이므로 자기 고집이 없음. 佛은 자기동일성을 강요하지 않고, 다양하게 얽혀있는 色세계의 존재방식을 가능케 하는 許與의 원천.

지능의 논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일률, 모순률, 배중률 , 자기충족률(라이브니츠)로 대변되는 단일성과 선명성의 진리라면, 본능의 논리는 모든 것이 애매모호성의 현상으로 얽혀 있음. 선명성의 진리는 칼날처럼 쪼개져 있지만, 애매모호성의 진리는 선/악과 진/위가 차이가 나 있지만, 동시에 동거해 있는 差延의 道와 다르지 않음.

 

善惡과 眞僞와 同異가 不一而不二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애매모호성은 프랑스의 현상학자인 메를로-뽕띠의 철학사상과 서로 만남.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칼처럼 쪼개지고 갈라져 있는 것이 아니고, 서로 원융하여 왕래하면서 오가는 현상으로 보는 것은 모든 색 세계가 空의 살(la chair)로 여기는 사고방식과 같음. 살이라는 용어는 역시 메를로-뽕띠가 사용한 말인데, 일체가 살처럼 서로 공감한다는 것을 말함. 의상대사가 ‘法性圓融無二相’이라는 法性偈의 어구도 이 살의 현상을 가리키는 것과 다르지 않겠음.

불교는 지능의 철학을 멀리하고 본능의 철학을 가까이 함. 선명한 지능의 논리와 달리, 애매모호한 본능의 논리를 기본으로 하고 있음. 지능의 논리는 단세포적이고 개념적이지만, 본능의 논리는 모든 것의 읽힘장식을 동시에 보는 기호의 논리임.

노자가 도덕경 2장에서 밝힌 것도 長/短과 高/低와 有/無와 前/後를 상징하는 기호의 논리임. 기호의 논리는 개념의 논리와 달라서 독립적이지 않고 철두철미 상관적이고 일의적인 개념과 달라서 이중적임. 석가모니가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문득 새벽의 샛별을 보고 깨달았다고 하는 일화도 빤/짝 빤/짝하는 별빛의 상관성을 인식했다는 것이 아닌가?

개념은 고유한 의미를 띠고 있으나, 기호는 그런 고유성이 없음. 기호는 타자의 타자에 불과함. 실상은 모든 것이 애매모호하게 얽혀 있는 존재양식이므로 판단이 진리의 장소가 아니고, 사실의 正見이 진리의 이름임. 그러므로 서산대사의 가르침처럼 不用求眞이 철학의 진정한 면모임. 明鏡止水와 같은 마음으로 실상을 관조하는 태도가 필요함.

현대 서양의 철학 사상은 이천년동안 서양을 지배해 온 택일적 논리주의와 형이상학적 절대주의를 인간의 망상으로 생각하고 그 신화적 망상을 해체하려는 사유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서양에서 일어난 해체주의가 오래된 동양의 불교와 노장적 사유와 대단히 유사한 대목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 유럽에서는 한국에서 아직도 맹위를 떨치고 있는 기독교의 신앙제일주의는 대단히 유치하고 숙고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의 기독교도 유치하고 맹신적인 신앙 제일주의를 벗어나서 보다 고급스런 사유의 차원으로 옮아가야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한국 정신문화의 향상은 기대하기 어렵다. 지금은 단세포적 개체사상, 택일적 도덕주의, 신화적 절대자의 사고를 불식해야한다.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선언이 오늘날 한국에서처럼 긴급동의로 다가오는 곳은 없다 하겠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