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이 아름답다, 그러나.....
기독교인이나 기독교학자들과는 많은 대화를 했지만 불교학자들과는 처음이다. 필자는 기독교인도 아니고 불교인도 아니다. 불교의 교리에 대하여도 아무것도 모른다. 오늘 발표 내용과 관련하여 허우성 교수님으로부터 매우 귀중한 여러 가지 제안을 받았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불교학자들의 비판의 타당성, 자유시장과 지속가능성, 하이에크의 정신이론과 시장의 자유 금융위기이후의 경제학의 반성, 그리고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구분 이들과 자본주의의 관련성 문제. 이 키워드를 포괄 할 수 있는 주제를 생각하다보니 오늘의 주제를 <왜 자유주의인가?>로 정했다.
우선 간단히 몇 가지 개념들을 밝히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 주제에서 말하는 자유주의는 자유시장경제와 동일한 개념이다. 자유시장경제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원칙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적 소유제도(이를 위한 법질서 확립)
-계약의 자유(이를 보장하기 위한 법질서 확립)
-책임원칙(이를 확립하기 위한 법질서 확립) =불법행위법
이 원칙들은 사법(private law)을 구성하는 원칙들이다. 그래서 시장경제는 법학적 의미로 “사법사회(private law society)”라고 말한다. 애덤 스미스 흄 등의 고전적 자유주의가 강조한 원칙들이다.
-인플레로부터 자유로운 통화질서
-열린 시장(시장의 진출입이 자유로운 열린 시장) 경쟁질서 확립
이 두 원칙은 나중에 발전된 원칙이다 이 같은 원칙이 확립될 경우 시장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한다.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는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다.
- 현대적 조건에 비추어 고전적 자유주의를 보완 한 것= 1938년 자유주의자들이 파리에서 개최한 리프만 콜로키움에서 처음으로 사용. 그 후 경쟁질서 확립과 건전한 통화질서 확립. 그리고 그 밖의 중요한 과제를 국가에 부여하고 있다. 1) 1963년 발간한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프리드만은 국가의 과제로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즉 법과 질서유지, 재산권의 정의(definition), 재산권 분쟁해결, 계약의 준수를 확립, 경쟁을 촉진, 통화질서의 확립, 부정적인 외부효과를 제거하기 위한 국가의 활동, 생활능력이 없는 자들에게 대한 국가의 보호 등. 따라서 자유주의를 자유방임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틀린 말. 하이에크는 1960년 『자유의 헌법』에서 법질서확립(법치국가확립)과 그리고 일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생활의 확보 국가활동의 규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국가활동의 질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
신자유주의란 고전적 자유주의에 대비하여 사용한 개념이다. 2) 1963년 발간한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프리드만은 국가의 과제로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즉 법과 질서유지, 재산권의 정의(definition), 재산권 분쟁해결, 계약의 준수를 확립, 경쟁을 촉진, 통화질서의 확립, 부정적인 외부효과를 제거하기 위한 국가의 활동, 생활능력이 없는 자들에게 대한 국가의 보호 등. 따라서 자유주의를 자유방임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틀린 말. 하이에크는 1960년 『자유의 헌법』에서 법질서확립(법치국가확립)과 그리고 일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생활의 확보 국가활동의 규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국가활동의 질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
- 워싱턴 컨센서스 1980년대 후반 개발도상국의 개혁의 가이드= 민영화, 탈규제, 복지정책의 완화, 감세 등, 그동안 간섭주의 정책을 지양, 시장경제를 구성하는 원칙을 회복
- 좌파가 말하는 신자유주의 개념 매우 부정적인 의미= 자유방임, 실업과 빈곤, 공황, 빈익빈 부익부 등 모든 사회악의 주범
- 뉴리버럴리즘(New Liberalism): 이것은 19세기 중반 이후 밀(J.S. Mill)과 그의 제자들, 그린(Th. Green) 홉하우스(L. Hobhouse)등의 평등 지향적 재분배와 복지국가를 지향한 이념
- 자본주의: 자본은 화폐를 통한 계산이 가능한 시장경제의 고유한 개념. 화폐를 통한 계산이 가능한 체제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기반으로 하는 시장경제. 그래서 사유 재산제도가 없는 경제제도는 자본주의도 아니고 시장경제도 아니다. 3) 미제스는 1949년 유명한 저서 『인간행동』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자본 개념은 전적으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체제에서 자기 자신을 위하여 행동하는 개인의 계획과 기록에서만 역할을 하며, 그것은 화폐 단위 경제계산의 확산과 함께 발달했던 것이다”
왜 자유주의인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로크-노직 전통의 자연권 사상이다. 철학자들이 주로 다루어온 사상이다. 다른 하나는 인식론적 관점에서 자유주의를 보는 관점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경제적 번영 또는 경제성장이라는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그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 글에서는 후자의 두 가지 점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이어서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의 타당성을 검토할 것이다.
2. 인간이성의 한계와 자유주의
사회과학이나 사회철학은 일반적으로 인성(人性)의 문제에서 출발한다. 이때 흔히 따지는 것은 인성이 이기적이냐 이타적이냐의 문제이다. 홉스(Th. Hobbes) 전통에서는 인간은 이기적이라고 전제하고 이로부터 사회철학을 전개한다. 공동체주의는 이타심을 전제하여 사회철학을 전개한다. 이런 두 전통의 공통점은 인간이 가진 지식은 완전하다고 전제한다. 지식의 문제는 이미 해결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데까르트로부터 홉스 케인스 하버마스 그리고 롤즈로 이어지는 프랑스계몽주의 전통이다.
그러나 이런 전통과는 달리 인간이성은 구조적 무지를 전제하고 사회철학을 전개한 학파가 있다. 이것이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전통이다. 데이비드 흄-아담 스미스-하이에크의 전통이다. 그들에게는 인간이 이타적이냐 이기적이냐의 문제는 부차적으로 생각했다.
주요한 것은 “지식의 문제”가 인간들의 삶의 근원적인 문제라고 보았다. 잘 못사는 이유도 무지 때문이다. 알기만 하면 우리의 욕구와 희망을, 또는 타인들의 욕구와 희망을 더 잘 충족할 수 있다. 지식의 문제를 출발점으로 하여 자유주의 사회철학을 전개한 현대적 인물이 하이에크이다. 4) 지식의 문제을 핵심적 요소로 파악한 인물은 많다., 예를 들면 포퍼(K. R. Popper)는 아메바에서 아인슈타인에 이르기까지 지식의 성장은 동일하다고 말함으로써 인간과 동물의 유사성을 지식습득과정으로 파악했다. 생물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은 로렌츠(K. Lorenz)는 “삶을 지식 습득과정(Leben als erkenntnisgewinnender Prozeß)”이라고까지 파악할 정도로 생물이나 인간에게 중요한 것을 지식의 문제로 여겼다.
2.1. 감각적 질서이론: 인간이성의 한계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문제는 인간들이 가진 지식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 왜 그들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는가의 문제, 왜 인간들은 완전한 지식을 갖지 못하는가의 문제이다. 하이에크는 21살 때 써 놓고 30년이 지난 1952년에 발간한 그의 유명한 저서 『감각적 질서』에서 그 같은 문제를 다루고 있다. 5) 이 책은 오늘날 신경생물학(Edelmann), 진화심리학(Cosmides/Tooby)의 길을 개척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인간들이 자신들의 외부세계를 어떻게 인지하는가를, 즉 알려는 행동(앎의 행동)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질서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 물리적 질서 : 이것은 어느 한 유기체의 외부세계이다.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사건들은 그에게 자극으로서 작용한다.
- 신경질서 : 이것은 유기체의 외부세계의 자극이 신경섬유에 가해진 충격들의 질서이다. 이것은 외부의 자극을 분류하는 시스템이다. 외부자극의 분류 또는 변별하는 도구이다.
- 현상질서: 이 질서는 감각적 인상들의 질서이다. 이것은 정신질서이다.
(1)정신과 육체의 일원주의
하이에크의 중심된 첫째 명제는 물리적 질서와 그리고 나머지 두 질서사이에는 구조적인 동일성이 없다는 것이다. 물리-화학적 작용을 하는 신경질서와 그리고 정신질서는 구조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독립된 실체가 아니다.
정신질서의 기초는 물리- 화학적 과정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사고는 신경작용의 결과이다. 그럼에도 그가 정신질서라는 개념을 이용하는 것은 사고과정에 관한 설명을 위해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정신과 육체의 실용적 이원주의)
정신이 하는 일은 외부세계에 대한 인지(알려고 하는 행동)이다. 인지란 무엇인가? 우리가 어떤 것을 감각적 자료로서 인지하기 위해서는 이를 다른 감각적 인상과 구분해야 한다. 그래서 인지는 감각적 인상들을 분류하고 그들 사이의 관계들을 형성하는 것이다. 6) 인지를 분류(classification)로 이해하는 것은 칸트의 합성행위(putting together)와 비교된다.
그런데 분류를 위해서는 이미 분류도식이 존재해야 한다. 이런 분류도식은 신경들간의 연결시스템(생리학적 연관들), 간단히 말해서 신경질서이다. 7) 다시 칸트와 비교한다면 범주에 해당된다.
따라서 인지란 외부세계를 이 분류도식에 따른 해석이다. 어떤 외부의 물리적 자극의 정신적 특질(감각적 질)은 분류장치에 의해 결정된다. 분류장치가 바로 정신적 현상을 만들어 내는 기본적인 현상이다. 분류장치는 중추신경내에서 형성되는 생리학적 산물이다.
인지는 외부세계의 객관적 사건의 재생산이 아니라 능동적인 해석이다. 다시 말하면 있는 대로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 각자의 고유한 인지 틀에 따른 해석이다. 인지는 대상들을 분류도식에 따라 관련부분을 간추려낸다는 의미에서 추상적이다.
생리학적 산물로서 분류도구를 하이에크는 형태발달과정과 개체발달과정으로서 진화과정의 산물로 보고 있다. 어떤 면에서 두뇌의 물리적 구조가 공통된 방식으로 진화했고 그래서 인지와 관련하여 인간들 사이에서 강한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개인들이 각자 처한 상이한 환경과 경험들 때문에 정신이 상이한 방향으로 진화했고 따라서 동일한 외부세계라고 해도 상이한 방식으로 분류하고 해석한다. 이것이 인지와 분류도구 그리고 정신의 진화적 성격이다. 더구나 이 같은 분류도구는 경험을 통해서 변화한다. 8) 칸트의 범주 개념은 영구적이고 선험적이다. 그러나 하이에크는 칸트의 이 같은 선험적인 범주의 원천에 대한 설명과 그리고 지속적인 진화를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지식의 진화적 성격과도 동일하다.
(2)정신과 인지의 성격
이상이 인간이 알려고 하는 행동의 특성, 즉 인지의 특성과 관련된 것이다. 인지의 특성에서 우리는 지식의 성격을 설명할 수 있다. 인지와 해석이 동일하고 추상적이라면 다시 말하면 현실을 정확하게 재생산 하는 것이 아니라면, 두뇌는 스스로 현실의 복잡성을 축소한다. 모든 것을 전부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관련된 국면만을 파악한다.
-개인이 가진 지식은 자신의 삶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 지식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선별적이다. 외부세계의 모든 상황 전부가 아니라 오로지 자신에 고유한 상황에 대해서만 알고 있다. 지식이 전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부분적이고 지역적이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지식은 주관적이다. 인지하는 자신과 결부되어 있다. 개인의 지식은 장소적으로나 인적으로 결부되어 있다. 개인의 주관적인 인지역사를 떠나 관찰자의 입장에 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9) 따라서 데카르트의 전통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식에 있어서 객관성을 얻기 위해서는 자기초월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주장은 인간의 인지활동의 특성과 맞지 않는다. 그런 입장을 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지도구는 불완전하다. 그래서 개인들이 가진 지식이 선별적이고 국지적 지식, 지역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런 지식은 오류 가능하다. 개인들은 경험과정 속에서 지식의 오류를 찾아내고 이를 수정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오로지 부분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무지는 무한대이다. 우리는 무엇을 모르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unknown ignorance) 우리의 무지는 무한대이다.
(3)정신의 구조적 무지
지식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암묵적 지식과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명시적 지식으로 구분한다. 어감, 정의감, 법감정 또는 실천적 지식(자전거 타는 재주) 등이 암묵적 지식에 해당된다. 개인들이 삶의 과정 속에서 습득한 지식들이 이런 암묵적 지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암묵적 지식과 명시적 지식의 구분은 정신작용의 초 의식성과 그리고 의식성의 구분에 해당된다.
“의식적인 경험들은 이러한 관점에서 구름 위에 우뚝 솟은 산 정상과 비유할 수 있다. 산 정상은 눈에 보이지만 그러나 ‧‧‧‧‧‧‧ 보이지 않는 하부구조를 전제로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의식성은 목적 지향성은 출발점이 아니라 그것은 초 의식성의 결과이다. 우리가 의식하는 것은 초 의식적 작용이 이미 끝났음을 말한다. 인간행동도 명시적 규칙은 물론 암묵적 초 의식적 규칙에 의해 조종된다.
하이에크의 정신이론과 관련하여 두 가지를 추가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방법론적 이원주의와 과학적 설명의 한계이다.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정신작용은 물리화학적 작용이다. 물리적 자극들을 정신적 특질로 분류하고 번역하는 정신적 과정을 전적으로 물리적 용어로 설명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엄격한 이원주의가 필요하다.
정신이론이 보여주는 또 다른 하나는 인간 정신을 스스로를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것이 인간이성의 구조적 무지를 말해주는 또 다른 요인이다. 하이에크는 수학자 궤델(Gödel)을 원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떠한 분류도구도 분류하고자 하는 대상들이 소유하고 있는 구조보다 더 복잡한 구조이어야 한다......따라서 설명하는 주체의 능력은 자신의 구조보다 덜 복잡한 구조를 가진 대상에 한정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인간정신의 절대적 한계이다. 10) 절대적 한계 이외에도 실용적 한계를 들고 있다. 설명의 대상의 복잡성 때문에 완전한 설명이 가능하지 않은 경우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원리의 설명에 만족해야 한다.
2.2. 시장경제와 지식의 문제
인간들은 모든 것을 전부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가진 지식은 자신의 삶과 관련된 부분적인 지식이다. 그들 각자가 처한 고유한 상황에 관한 지식이다. “현장지식”이라고 볼 수 있다. (지식의 단편성). 그들이 가진 지식은 서로 다르다. 이와 같은 지식들은 사회의 각처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있다. 따라서 이 같은 지식의 존재형태는 지식의 분산(division of knowledge)이다.
인간은 혼자 살수 없다. 타인들과 협력과 분업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개인들은 타인들과 컴뮤니케이션이 이루어져야 한다. 의사소통은 일반적으로 언어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언어는 서로 들을 수 있는 사이에서만이 가능하다. 예를 들면 대면사회(face-to-face society)가 그렇다.
그러나 열린 거대한 사회에서처럼 익명의 사회에서는 서로 들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서로 만지거나 표정을 읽을 수도 없다. 이런 열린 거대한 사회에서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은 무엇인가? 그것은 화폐로 계산된 가격이다. 이 가격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견해 그리고 의도들을 추상화하여 필요한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하이에크는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화폐는 인간의 앎의 한계를 넘어서 따라서 명시적인 것을 넘어서도 상호교환을 확장하는데 불가결하다. 그리고 그것은 기회를 확장하는 것으로 인정될 수 있다.
따라서 화폐와 상품가격은 언어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시장 가격 속에는 각처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 들어 있는 분산되어 있는 지식을 수집하여 간추려서 각처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 가격에 반영되고 가격을 통해서 소통되는 지식은 명시적 지식은 물론 암묵적 지식까지도 전달한다.
- 의사소통 수단으로서 가격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기 위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유재산제도를 비롯하여 시장경제를 구성하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 다시말하면 정부의 자의적인 개입이 존재해서는 않된다. 이런 경우 가격은 자생적으로 형성된다.
- 화폐가 언어와 같이 의사소통으로서 제대로 기능하가 위해서는 통화제도가 건전해야 한다. 자의적인 통화정책은 의사소통을 방해한다.
따라서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화폐와 가격뿐만이 아니라 시장경제를 구성하는 원칙을 구현한 행동규칙이다. 제도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도덕규칙, 종교규칙, 상관행, 전통 등이다. 문화라고 부르는 요소들이다 이런 행동규칙속에는 해서는 안될 행동이 무엇인가에 관한 지식, 행동방식에 관한 지식을 반영. 수 십 세대를 거처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을 반영한 것, 이 같은 문화적인 요소들이 의사소통의 중요한 수단이다.
2.3. 계획경제와 지식의 문제
계획경제가 가능한가? 사회주의 계획경제가 왜 망했는가? 직접 만나지 않고서도 모르는 사람들과 어떻게 의사소통이 가능한가?
예를 들면 소비자들의 원하는 상품의 양과 질 그리고 디자인, 원하는 시점 원하는 장소 등에 관한 지식을 생산자들에게 전달하는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이 지식은 정부가 수집하여 이를 토대로 생산계획을 짜고 그 계획을 생산자들에 전달한다.
정부가 필요한 각처에 분산되어 존재하는 모든 지식을 수집하고 이를 가공하여 경제계획을 세울 수 있는가? 정부가 수집해야 할 지식은 일반적으로 세 가지 유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 통계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지식,
- 통계 수치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명시적 지식
- 말로조차 표현할 수 없는 암묵적 지식
각처에 분산되어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이와 같은 지식을 전부 수집할 수 있는가? 정부사람들은 주민들에게 물어볼 것이다. 주민들은 통계수치로 답하거나 말로 답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가진 암묵적 지식은 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관료들에게 전달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절대적 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가격도 계도 계산할 수 없다, 화폐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가격이 없으면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각 처에 분산되어 존재하는 지식을 수집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정부가 수집하려들지 말고 개인들이 자유로이 사용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합당하다. 자유의 존재이유가 이것이다. 시장경제의 존재이유도 지식의 문제 때문이다. 완전히 아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자유는 불필요하다. 자유주의 시장경제도 불필요하다.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시장경제를 필요에 따라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격규제나 수량규제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규제가 가능한가? 그 같은 규제도 성공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지식의 문제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사회를 합목적으로 만들 수 있는 지적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하이에크의 1988년 저서 『치명적 자만』이 보여주고 있듯이 그것은 지적 자만이고 그 결과는 사회주의 몰락이 보여주는 것처럼, 케인즈주의나 복지국가가 보여주는 것처럼 치명적이다.
요컨대 시장경제는 인간이성의 구조적 무지에 대한 적응의 산물이다. 우리가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것도 인간이성에 대한 겸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대신에 우리는 지식의 발견과 지식의 이용을 촉진하는 사회적 과정, 시장과정에 의존해야 한다.
2.4.세 가지 종류의 질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서구사회를 지배해온 사고도식: 인위적 질서와 자연적 질서의 이분법. 그러나 이분법을 가지고는 자연적 질서도 아니고 인위적 질서도 아닌 제3의 질서, 즉 자생적 질서(spontaneous order)를 파악할 수 없다. 이것은 인간 행동의 결과이지만 그러나 인간계획에 의해만든 것이 아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언어, 도덕, 풍습, 습속, 관습이나 관행, 관습법과 같은 행동규칙, 흔히 말하는 문화는 자생적인 것, 누가 계획해서 만든 것이 아니다. 시장경제도 누가 계획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자생적으로 형성된 것,
시장도덕: 타인의 자유와 재산을 침해하는 행동을 금지하는 행동규칙: 이 같은 행동규칙을 차별 없이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도덕이다. 약속을 어겨서는 않된다. 타인의 재산을 존중해야 한다. 거짓증언해서는 안 된다, 칙임원칙 등과 같은 도덕규칙이다. .
본능적 도덕: 연대와 나누어 먹기: 이 같은 도덕은 소규모 사회의 도덕이다. 이런 본능이 형성되던 시기는 20~100명으로 집단을 구성하여 수렵과 채취를 통해서 살아가던 원시사회이다. 이런 도덕이 현대인의 본능 속에 아직도 뿌리깊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런 도덕을 현대와 같은 거대한 사회에 적용하려는 노력이 사회주의 또는 복지국가 또는 다양한 종류의 간섭주의 정책이다. 그러나 소규모 사회에서나 가능한 도덕을 대규모 사회에 적용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그 결과는 필연적인 실패이다.
구성주의적 합리주의: 인간이성은 외생적으로 주어진 것이고 이를 통해 사회를 조종통제할 수 있다는 능력이 있다는 믿음이다. 이런 능력을 통해서 사회질서는 인위적으로 계획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화적 합리주의: 인간이성은 문화적 진화의 선물이다. 인간이성이 발달했기 때문에 합당한 행동규칙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이다. 행동규칙이 정신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비로소 정신은 사물을 분별하고 해석할 수 있다고 믿는다.
3. 인류문명과 자유주의
오늘날과 같이 거대한 열린사회를 가능하게 한 요인은 무엇인가? 수렵채취시대의 매우 척박한 야만적 삶에서 인류를 문명의 길로 이끌어준 요인, 자유와 번영을 가능하게 한 요인은 무엇인가?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그림-1>를 보자
3.1 언어냐, 시장경제냐?
세계 일인당 소득의 변동을 나타내는 아래의 <그림-1>를 보자. 인류의 원시사회로부터 1700년까지 세계 일인당 소득(세계 전체인구를 가지고 세계의 전체소득을 나눈 것)은 큰 변동이 없었다. 일인당 소득 수준은 겨우 생존할만한 수준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침팬지나 기타 동물들의 생활수준과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인류역사에서 거의 발전이 없었던 것이다. 동물적 삶이었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이 빈곤을 맬서스의 인구 트랩으로
<그림-1>세계 일인당 소득의 변동
이 대목에서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즉, 1700년을 전후하여 소득수준의 차이를 가져다 준 것은 무엇인가의 문제와 그리고 인간과 동물을 구분해주는 것은 무엇인가의 문제이다. 그 대답은 사유재산과 시장경제의 발달이다. 17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장경제의 발달과 세계적인 확산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언어가 하고 도구를 사용하는 그리고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점에서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인류가 1700년까지는 동물적인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보면 그런 구분은 충분하지 않다.
경제학적으로 보면 인간과 다른 동물의 차이는 시장경제의 존재 여부이다. 인간세계야 말로 다른 동물세계가 갖지 못한 시장경제를 가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인류에게 번영을 가져다준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동물과 똑같은 야만적 삶을 극복하고 문명된 삶을 가능하게 한 것이 시장경제라는 것이다
3.2. 경제적 번영이 왜 중요한가?
시장경제가 야기하는 경제적 번영은 폭발적이다. 그 이유는 지식의 문제의 해결에서 찾는다. 새로운 지식의 산출과 테스트 그리고 성공적인 지식의 확산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다. 낮은 조세, 사유 재산 등, 경제자유를 보장하는 제도들이 새로운 . 지식의 발견과 지식의 이용을 촉진시켜주기 때문이다 많은 통계적 연구도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경제주체들의 자유가 필수라는 점을 입증하고 있다.
왜 경제성장이 중요한가? 경제성장의 중요성을 가장 설득력이 있게 말한 인물은 하버드 대학 교수 벤자민 프리드만(B. Friedman)이다. 그는 2005년 저서 성장의 도덕적 귀결에서 역동적이고 성장하는 경제에서만이 다양성에 대한 관용, 사회적 이동성, 공정성에 대한 헌신,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을 촉진시켜 준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곳간이 넉넉해야 예의를 안다’는 동양의 옛말과 일치한다.
정태적인 또는 침체된 경제에서는 사람들은 의기소침에 빠지고 우울해진다. 타인들에 대한 너그러움도 없다. 외국인에 대한 적대감도 늘어난다. 미래에 대한 꿈도 없다. 질투와 질시가 만연한다. 성장하는 경제에서만이 질투와 질시도 완화시킬 수 있다. 그 이유는 성장하는 경제에서 사람들은 과거의 자신의 처지에 비추어 현재를 평가하는데 반하여 정태적인 경제에서는 타인의 소득에 비추어 자신의 처지를 평가하는 심리적 성격 때문이다. 이것은 질투가 생겨났던 시기를 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진화심리학이나 진화인류학에 의하면 인류의 본능이 형성되던 수렵채취시대의 삶은 매우 척박한 시기라는 것이다. 한사람이 많이 가지면 다른 사람이 적게 갖는 제로섬 게임이 적용되는 사회였다. 진화심리학의 개척자인 코스미데스(L. Cosmides) 투비(J. Tooby)가 말하는 것처럼 현대인의 정신 구조에는 석기시대의 정신(stone age mind)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성장이 얼마나 중요한 가는 애덤 스미스가 그의 국부론이 말해주고 있다.
“성장이야말로 사실상 모든 계층에게 진정으로 고무적이고 기쁨을 주는 상황이다. 발전이 없는 정체된 상황에서는 황당하고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상황이다. 후퇴하는 상황은 참담하다.”
경제적 번영을 야기하는 경제적 자유가 얼마나 소중하고 성장 없는 정태적인 경제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반(反) 성장론자들은 인식해야 할 것이다. 자유시장이야말로 경제를 역동적으로 만들고 경제의 성장을 통하여 사람들을 밝게 만들어 준다.
부존자원이 점차 고갈되기 때문에 성장을 멈추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 정부의 개입을 늘려야 한다는 성장의 종말론도 옳지 않다. 자유시장의 가격기구야말로 자원의 고갈 문제를 해결하는 탁월한 해결사이다.
경제적 번영은 무한하다는 것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자유시장에서 성장의 핵심을 이루는 새로운 지식과 혁신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가능성을 억제하고 저성장과 고실업을 야기하는 것이 국가의 간섭이다.
4.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의 허와 실
자유주의는 매우 귀한 이념이다. 지식의 문제를 해결하여 경제적 번영의 길을 열고 문명된 사회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주의는 보편적인 사회발전원리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은 혹독하다. 그 비판점은 대략 다음과 같다. 금융위기의 장본인, 빈익빈 부익부, 자본가의 탐욕과 이기심, 환경오염, 인간소외 문제 등 다채롭다. 12) 예를 들면 이도흠은 “작은것이 아름답다” 불교평론 제30호 2009)에서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은 일반적인 비판을 집약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비판의 결론은 예를 들면 “작은 것이 아름다운 시대”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한다. 13)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더 많은 연봉을 받는 것보다 덜 받고 이를 나누는 삶으로, 육신이 더 즐거운 환락보다 마음이 즐거운 삶으로, 더 크고 좋은 집보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작은 집으로, 더 높은 권력보다 상대방을 모시고 섬기는 삶을, 더 많고 좋은 것을 소비하는 것보다 검소하게 절제하며 자연과 공존하는 미덕을 추구할 때다.”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자세히 뜯어보면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드러난다. 그리고 작은 것이 아름다운 시대로 돌아가자는 주장은 낭만적인 생각이라는 것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4.1 경제적 자유가 불평등을 심화하는가?
경제자유와 시장경제에 대한 비판들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가장 집요한 것은 빈익빈 부익부와 같은 불평등론이다. 불평등의 심화를 막기 위해서 세금을 올리고 정부규제도 늘려 개인의 자유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이 옳은가?
빈익빈 부익부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부의 세습을 의미한다. 자본주의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가난한 집은 대대로 가난하고 부유한 집안은 대대로 부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장경제에 대한 옳은 비판이 아니다. 법으로 보호하는 특권과 고율과세가 없는 자유사회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노력과 교육, 그리고 절약을 통해서 삶의 수준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자본주의가 가장 많이 발전한 미국의 백만장자 가운데 80% 이상이 자수성가한 사람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계층 간의 이동을 어렵게 하는 것이 정부의 간섭이라는 것이다. 특혜, 인허가제도, 또는 대마불사 신화 등, 이런 것은 부자를 항상 부자로, 가난한 자를 항상 가난한 자로 만든다. 따라서 부의 세습을 막기 위한 효과적인 정책은 시장경제원칙의 확립, 즉 경제적 자유를 보장하는 일이다.
빈익빈 부익부의 두 번째 의미는 자본주의가 발달하면 빈부의 격차가 심화된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비판도 옳은 것이 아니다. 자유경쟁에서 그 같은 분배는 등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장경제에는 분배를 심화하는 요인도 있지만 분배를 평등화의 방향으로 이끄는 요인도 작용한다. 전자는 혁신이고 후자는 모방이다. 혁신과 모방과정이 끊임없이 작동한다. 이 같은 과정이 작동할 수 있기 위해서는 경제활동의 자유가 필요하다. 이것은 규제가 많은 나라보다 경제자유가 많은 나라의 소득분배가 더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통계보고서가 또렷이 입증한다.
흥미롭게도 시장과정은 자동차나 컴퓨터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처음에는 부자만 사용하던 사치품을 저소득층도 사용할 수 있는 보편적 재화로 전환하는 탁월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이것도 경제적 자유는 빈부의 격차를 증대한다는 비판의 부당성을 또렷하게 말해준다.
시장경제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시장경제의 분배를 과장하여 비판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러나 분배결과를 시정하는 정책은 분배를 더욱 더 악화시키고 새로운 빈곤층을 야기한다는 것은 유럽국가나 남미의 국가의 경험이 입증한다.
문화적 진화과정에서 일부다처제의 불평등구조는 억제되고 일부일처제의 평등분배구조가 관철되었지만 그러나 소득과 재산의 분배에서는 불평등을 허용했다. 이것이 사회질서의 안정과 평화를 유지한 것이다. 물질적 불평등과 결부된 일부다처제는 참을 수 없었다. 평등주의자들이 물질적 분배까지도 평준화하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야 말았다.
4.2. 금융위기는 시장실패가 아니라 정부실패
최근 금융위기로 인하여 경제적 자유가 도전을 받고 있다. 정말로 금융위기가 시장실패인가? 신자유주의는 실패한 이념인가? 시장경제는 스스로 통제하고 스스로 상이한 행동들을 조정하는 자생적 질서이다. 자생적 질서는 외부의 간섭이 없다고 해도 아니 오히려 외부의 간섭이 없어야 저절로 형성되는 질서이다.
질서가 스스로 형성되기 위해서는 어떤 메커니즘이 필요한가? 언어시스템이든 생물학적 물리학적 시스템이든 사회시스템이든 모든 시스템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하나는 시스템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행동을 조정하는 메커니즘 그리고 그들의 잘못된 행동을 처벌하는 통제메커니즘.
시장경제는 외부의 간섭이 없이도 스스로 행동들이 조정되고 잘못된 행동들을 통제하는 메커니즘이 존재한다. 이런 메커니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가격구조와 행동규칙이다, 이 두 가지는 행동조정에 필요한 지식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 잘못된 지식의 사용을 통제한다. 잘못된 지식의 사용은 가격을 경유하여 손익의 형태로 구현된다. 극단적으로 잘못된 지식을 사용하는 기업은 시장에서 밀려난다. 행동규칙의 위반은 직접적으로 처벌이 야기된다. 그 처벌은 비공식적일 수도 있고 공식적일 수도 있다.
위기는 시장경제가 자생적 질서라는 것을 부정하는 현상이다. 시장의 내적용인에 의해서 야기되는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비롯하여 케인즈주의와 그리고 간섭주의자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시장경제를 구성하는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그렇기 때문에 1930년대 대공황과 최근의 금융위기를 시장실패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착각이다. 간단히 말해서 시장경제를 구성하는 원칙을 위한한 국가의 간섭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금융위기의 원인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시장에 대한 정부의 무리한 개입과 그리고 경기부양을 위한 미국의 연방준비은행(이하 연준)의 방만한 통화정책 때문이다. 연준은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서 돈을 풀었다. 은행들은 늘어난 돈을 소화하기 위해 대출경쟁이 벌어졌다. 그 결과, 주택 대출 금리가 낮아져, 주택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였다. 이것이 주택시장의 과열로 연결되었다.
신경제사가 보여주듯이 1929년 경제침체의 근본적인 원인도 방만한 통화정책이었다. 그리고 경제침체를 대공황으로까지 심화시킨 요인은 보호무역주의를 비롯하여 친 노동정책과 높은 조세부담 그리고 기업의 경제활동에 대한 정부의 간섭이었다.
물론 시장경제가 경기변동이 없는 것이 아니다. 내생적으로 경제침체와 경기상승이 생겨난다. 시장 자체 내에서 지식의 새로운 발견과 그 이용 및 확산과정에서 자동적으로 생겨나는 결과이다. 이것은 병이 아니라 경제발전의 필연적 현상이다. 이런 과정에 정부가 개입할 경우 문제는 심각해진다. 정부는 시장에서 내생저그로 생겨나난 경기변동을 수정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질 수 없다. 지식의 문제 때문이다
4.3. 자본가의 탐욕이 문제인가
모든 인간은 추구하는 방향이 다를 뿐, 이기적이고 탐욕스럽다. 윌슨(O. E. Wilson), 도킨스(R. Dawkins) 등의 사회생물학이 보여주는 것처럼 이기적 유전자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항상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것은 아니다. 연대감, 나누어먹기 등, 가족, 친구, 종교집단 등. 일차집단이나 또는 소규모 잡단에서는 이타심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대규모 사회에서는 이기적 동기가 빈번히 관찰될 수 있다. 문화적 진화과정에서 이 같은 이기적 혹은 탐욕적 행동을 억제하려는 수많은 행동규칙이 형성되었다. 그것이 바로 시장경제를 구성하는 원칙을 보호하기 위한 도덕과 법의 형성이다. 이 같은 행동규칙은 이기심을 발휘해도 “좋은” 테두리를 구성한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기 위한 조건이다. 그는 유명한 『도덕 감정론』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정의의 규칙은 건물을 지탱하는 기둥과 같고 이타심은 건물을 아름답게 꾸미는 장식품과 같다..... 건물을 지탱하는 기둥을 제거하면 건물이 무너지듯이 정의를 제거하면 거대한 인간 사회는 한순간에 산산조각으로 분해되고 말 것이다.”
정의의 규칙이란 시장경제를 구성하는 원칙을 수호하기 위한 행동규칙을 말한다. 신체와 재산 그리고 자유를 침해하는 행동을 억제하는 행동규칙을 정의의 규칙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욕구충족이 다른 사람의 욕구충족을 가져온다는 의미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기 위한 조건이다.
시장경제는 생산수단의 사적소유 제도 하에서 노동 분업이 이루어지는 사회체제이다. 각자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행동한다. 그러나 각자의 행동들은 자기 자신의 욕구충족만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필요도 동시에 만족시켜야 한다. 그럴 경우에 비로소 자신의 욕구도 충족시킬 수 있다.
각자는 행동하면서 동료 시민들에게 봉사한다. 다른 한편으로 각자는 동료시민들로부터 봉사를 받는다. 각자는 자기 자신에게는 수단이자 동시에 목적이다. 그리고 각자는 자기 자신에게는 궁극적인 목적이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이다.
자본주의가 탐욕과 이기심을 조장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것은 넌센스이다. 사회주의 사회의 인간들, 비시장적인 관료시스템, 정치시스템에서 일하는 공무원이나 정치가도 탐욕적이고 이기적이다. 탐욕과 이기심은 물리학의 중력의 법칙에 해당된다. 물리학의 보편적 현상이 중력의 법칙이라고 한다면 탐욕이나 이타심은 체제와 관계없는 인간의 보편적 심성이다. 늘 어디에서나 목격되는 인간의 불변적인 심성이다.
이를 비판할 수 없다. 이를 바꿀 수도 없다. 인류역사에서 이런 심성을 이타심으로 개조하려는 유토피안들의 정치적 시도가 여러 번 있었지만 치명적 결과만을 가져왔을 뿐 번번이 실패하고야 말았다.
일각에서는 이번 위기가 월가의 탐욕 때문에 생겨났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접근법은 옳지 않다. 탐욕을 가지고는 평시와는 전적으로 상이한 금융충격의 발생을 설명할 수 없다. 금융위기를 탐욕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비행기의 추락을 중력(gravity)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터무니없는 것이다.
탐욕 그 자체를 문제시 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탐욕을 위기로까지 몰고 간 이유에 주목해야 한다. 시장에 거침없이 풀린 돈과 정부의 시장개입이 그 이유다. 이 같은 정부정책 대신에 엄격한 통화관리와 개인의 자유와 책임원칙과 같은 시장경제원칙을 확실하게 지켰다면 금융위기는 고사하고 지속가능한 번영이 가능했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사기성 파생상품” 때문에 금융위기가 야기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금융자본주의를 비판한다. 금융자본가의 탐욕적 위험추구를 탓한다. 이런 탓은 합리적인 문제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왜 과도한 위험을 추구했는가의 문제이다. “무모한” 위험추구를 가능하게 한 요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시장경제를 구성하는 중요한 원칙으로서 책임원칙을 위반한 정부의 정책에서 찾고 있다.
사기성이라는 표현도 옳지 못하다. 사기성이라는 말 보다는 금융기관들이 파생상품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했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 위험추구가 아니라 위험예상과 관련되어 있다. 왜 과소평가했는가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정부의 정책 때문이다. 부동산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과 그리고 방만한 통화정책은 의사결정에 필요한 정보를 전달하는 시장경제의 신호기능을 마비시켰다.
그 마비는 위험을 과소평가하는 방향으로 시장참여자들의 의사결정을 체계적으로 왜곡시켰다. 특히 정부는 돈을 풀어 경기가 부양할 때 이를 환호하면서 호경기가 끝없이 지속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비록 경기 침체가 생긴다고 해도 경제학 지식의 발전으로 경제위기와 같은 큰 문제는 충분히 대처할 수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도 했다.
“금융 마피아들은 각종 사기성 파생상품을 만들어 대중의 건전한 자본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고 한다. 그러나 “빨아들인 자본”은 대중의 자본도 아니고 건전한 자본도 아니었다. 정부가 아무 근거도 없는 공급한 돈이다. 이 돈은 건전한 자본이 아니라 매우 불건전한 자본이다. 건전한 자본은 소비대신에 절약한 저축이다.
4.4. 자유무역과 글로벌이 빈곤국을 만드는가?
세계화가 빈곤국을 더 빈곤하게 만들었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통계가 입증한다. 세계인구중 하루 1달러이하로 살아가는 절대 빈곤층이 1970년의 17.2%에서 1998년 6.7%로 하락했다. 하루 2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빈곤층도 같은 기간에 약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41%에서 18.6%). 1980년 월 500달러 이상의 소득을 가진 인구비율이 14%였다. 그러나 2000년에는 55%로 급증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감소한 직접적 이유다. 세계 빈곤인구의 60%를 차지하는 인도와 중국이 개방정책으로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특히 1979년 이후 중국의 시장개혁으로 년 평균 9%의 성장과 함께 1억 이상의 빈곤자를 구출했다. 세계역사상 전례가 없는 성장률과 그리고 빈곤퇴치이다.
세계화가 빈부의 격차를 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무역이 세계의 빈부격차를 야기한다. 예를 들어보자 미국, 캐나다, 일본, 유럽연합 등, 부유한 나라의 보호주의 무역 가운데 가장 나쁜 보호주의를 펼치는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유럽연합으로 알려져 있다. 유럽연합의 보호주의의 결과를 보자
농축산물과 섬유 같은 제품에 대한 보호무역 장벽은 그 어떤 나라보다도 높다. 이런 생산품은 아프리카나 남미 등, 매우 빈곤한 나라에서 생산되는데, 이들 나라의 생산품에 대한 유럽연합의 관세는 지독히 높다. 농산물의 관세는 평균 20%이다. 어떤 농산물의 경우에는 250%도 있다. 예를 들면 닭고기의 경우 46%, 오랜지 쥬스는 34%의 관세를 부과한다. 우유제품은 76~144%의 관세를 부과한다. 이 가난한 나라의 농산물이 유럽연합 시장에 접근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유럽연합의 보호무역주가 아프리카에 미친 처참한 영향에 관한 충격적인 보고서(Pollard/Mingardi/Philippe/ Gabb, 2003 보고서) 유럽연합의 무역규제 때문에 아프리카인들이 매일 6, 600명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매 시간 마다 275명이 죽어가고 있다. 유럽연합이 자유무역을 펼친다면 구출할 수 있는 인명이다. 보호무역주의가 인류의 빈곤을 창출한다는 것, 이것이 유럽연합의 보호무역 정책이 입증해 주고 있다. 유럽 연합 국가구성원들의 소비자들은 가장 값비싸고 열악한 농산물을 먹는 가련한 사람들이다.
브라질 중국 헝가리 인도 멕시코 등 개발도상 국가인데 이들은 세계화추진에 앞장선 나라들이다. 1990년대 이런 개도국의 성장률은 5%의 성장을 이룩했다 선진국 평균 성장률은 2%였다. 이에 반하여 남미, 아프리카, 중동 북한 등, 비 세계화 개도국의 경우에는 마이너스 1%였다. 개방화와 세계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는 수치이다.
자유무역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자유무역을 제로 섬 게임으로 파악한다. 이것이 바로 수렵채취시대의 정신 또는 “석기시대”의 정신이다. 낯선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 민족주의도 석기시대의 산물이다. 기업이나 자본가를 모두 착취로 보는 것도 그 같은 원시인들의 정신이다.
전후 유럽을 키운 것은 자유무역이었다. 분업이 민족구가를 넘어서 범세계적으로 확대시켰고 이로 인한 부의 성장을 가져온 것은 자유무역이었다. <그림-1>. 그토록 빈번하던 전쟁이 지난 60년간 억제되고 유럽의 평화와 그리고 세계평화가 유지된 근본적인 원인도 자유무역이었다. 세계화가 이루어질수록 과거처럼 전쟁위험성은 점차 줄어든다. 칸트(I. Ka의 만국평화론의 기본 바탕이 자유무역이라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4.5. 경제자유가 환경을 파괴하는가?
환경론자들은 경제자유는 환경을 파괴하기 때문에 정부개입을 늘려야 한다고 한다. 성장은 환경파괴의 산물이기 때문에 성장을 줄여야 한다고도 한다. 이 주장이 옳은가? 소득 수준이 높은 미국의 환경이 소득수준이 낮은 중국이나 아프리카의 환경보다 나쁘다고 볼 수 있는가? 환경문제는 가난한 나라에서나 생겨나는 문제이지 부자나라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설명의 여지가 없다.
대부분의 환경문제는 성장에 의해 해결할 수 있는 것이 확실하다. 물론 경제성장으로 처음에는 탄소의 배출 등, 환경문제가 악화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경제성장은 용이하게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한다. 친환경적인 기술개발도 시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시장이야말로 소비자의 선호에 해당되는 친환경 기술이 무엇인지를 발견해주기 때문이다. 정부는 그런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특히 우리가 인식해야 할 것은 환경이 주인이 없을 경우에 문제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생물학자 하딘(G. Hardin)의 유명한 ‘공유의 비극’은 주인이 없을 때 생겨나는 현상이다. 환경오염도 일종의 공유의 비극이다. 그래서 주인을 찾아주는 일이 중요하다. 주인만 찾아지면 환경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수 있다.
환경문제를 도덕에 호소하여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14) 이도흠 “작은 것이 아름답다” (불교평론 제39호 2009년에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 동네 개천의 물이 흐르면서 자연정화를 할 수 있는 폐수의 양이 10갤런이라면 하루에 8갤런을 버리면 2갤런의 비워 둠이 있다. 이 비워 둠 때문에 8갤런의 폐수를 버리더라도 이 개천은 버들치가 뛰노는 맑은 냇물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10갤런을 넘어서는 순간, 이 냇물은 금세 오염되어 악취가 나고 그 물속에 사는 물고기들과 생명체들은 오염에 약한 순서대로 죽어 버린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하천과 같은 주인 없는 것에게 주인을 찾아주는 일이다. 문화적 진화과정도 사유재산제의 적용을 확대하는 일이었다.
4.6. 자유주의와 소외
화폐의 존재를 비판한다. 화폐와 화폐로 계산하는 가격구조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핵심적 요소이다. “돈이.......본격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삶에 스며들어 지배 형식으로 작용하는 것이 자본주의 교환 체계이다.” 라는 주장은 옳은 생각이다. 가격은 노동이나 사물들에 대한 소비자나 생산자들의 가치평가의 산물이다. 15) "이 체제에서 사물과 인간 모두 객관화하면서 본래 가치를 상실하고 물화한다.” 리는 말에서 사물은 본래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사물이 존재하는 것은 인간들이 그에 대하여 평가하기 때문이다. 실증주의 관점이다.
우리의 인지적 틀을 통해서 외부의 자극을 해석한 결과가 우리의 사물이다. 사물 그 자체는 인간들에게 의미가 없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는 사물의 본래의 가치를 상실한다는 말은 옳은 말이 아니다.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화폐와 가격은 거대한 익명의 사회에서 수많은 인간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이다. 그것이 없이는 거대한 사회의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무엇을 어디에 얼마나 투자하고 얼마나 저축하고 소비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화폐와 가격을 철폐하면 모든 경제적 결정은 중단되고 분권적인 자유의 체제가 폭력과 독재와 노예상태의 중앙집권적인 사회주의 체제로 전환된다.
그리고 노동가치론에 따른 가치계산은 거대한 사회에서는 의미가 없다, 그것은 가치계산이 불가능하다.
자본주의라고 해서 사랑과 자비와 같은 도덕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다. 16) 신자유주의에 대하여 사람들은 이렇게 비판도 한다.: “이 체제는 사랑과 자비 같은 추상적인 가치는 물론 인간의 정신과 육체마저 교환가치로 대체하도록 강제한다. 사물과 인간의 본원적인 가치를 화폐가 대신하기에, 자연히 사람들은 사물들로부터, 노동과 생산으로부터, 타인으로부터, 결국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다.”
이 같은 도덕적 욕구를 자본주의 체제에서 얼마든지 충족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를 들면 가족 각종 취미그룹, 종교집단, 그리고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만든 각종 친목 단체나 동업단체 등에서 우리는 사랑과 유대감 그리고 친목을 도모할 수 있다. 오히려 자유주의 사회에서 이 같은 그룹들이 번창한다. 그래서 자유주의는 소외를 야기한다는 것도 옳지 않다.
4.7. 경제적 자유는 독점의 문제를 야기하는가?
자유시장에서 기업의 독점적 요소 때문에 분배가 왜곡된다고 주장한다. 독점이 문제가 되는 것은 독점가가 품질이 나쁜데도 불구하고 높은 가격으로 공급하여 돈을 버는 경우다.
그러나 정부의 보호를 받지 않고 경쟁이 자유로운 경우 그 같은 기업이란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질 좋고 값싸게 공급하려는 새로운 기업이 진입하거나 기존의 경쟁기업이 보다 좋은 공급으로 독점적 행동을 하는 기업은 밀려나기 때문이다. 자유경쟁은 그런 독점을 허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기업규모가 큰 경우를 문제시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기업규모가 크다고 해서 독점적 행위를 하는 것은 아니다. 기업규모가 크다고 해서 독점적 행위로 기업이 큰 것도 아니다 규모가 큰 이유는 고객들에게 그만큼 봉사했다는 증거이지, 분배를 왜곡했다는 증가가 될 수 없다.
5. 맺는 말: 작은 것이 아름답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를 열린 거대한 사회라고 말한다. 이것은 자유와 시장경제와 자유무역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를 말한다. 인류는 폐쇄된 그리고 소규모의 사회, 즉 대면사회에서 오늘날과 같은 익명의 사회로 진화했다.
문제는 이런 익명의 사회가 우리의 본능의 소산도 아니고 우리의 이성에 의해서 계획하여 만든 사회도 아니라는 것이다. 하이에크가 말하듯이 그것은 “자생적 질서”이다. 다시 말하면 문화적 진화의 결과이다.
인류의 역사를 24시간으로 본다면 23시간 26분 동안 수렵채취 사회, 소규모 사회에서 보냈다(D.C.North). 열린사회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겨우 4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수렵채취기간 동안 우리의 본능적인 심리적인 구조, 신체구조 등이 형성되었다. 이것을 현대인이 뿌리 깊이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진화심리학자들은 그 기간을 진화적 적응이 이루어진 환경(EEA)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의 정신의 상당부분은 그 같은 환경에서 형성되었다. 경쟁에 대한 적대적 태도, 질투심, 낯선 사람에 대한 적대감(이로부터 민족주의 형성, 자유무역의 반대), 제로 섬 게임사고, 그룹에 대한 애착심, 책임을 사회로 전가하는 사고 등.
그래서 석기시대의 정신(stone age mind)라고 말한다(Cosmides/Tooby). 작은 것이 아름답게 보는 시각도 이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안빈낙도 사고방식도 이 시기에서 생겨난 것이다. 나누어먹는 것을 좋게 여기고 재분배를 주장하는 것도 본능의 소산이다.
오늘날 거대한 열린사회는 우리가 의도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고 해서 이를 바꾸어 작은 사회로 만드는 것은 정말로 위험하다. 시장경제는 우리가 바꾸어 다른 사회로 교체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 우리가 적응해야 할 사회이다. 그 이유는 지식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자유와 번영을 그리고 가족이나 취미그룹, 기타 조직을 통하여 우리의 본능적 욕구를 충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의 원칙과 시장경제의 원칙을 갖게 된 것을 인류의 업적과 행운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정된 것이 아닌 듯하다.
민경국
현 강원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졸업 . 독일 프라이브르크 대학 경제학부에서 석사 박사학위 취득 . 현재 한국제도경제학회 부회장 . 한국 하이에크소사이어티 회장 역임. 한독 경상학회 부회장 역임 . 주요 저서에 < 자유의 길: 하이에크 자유주의 사상연구>, <자유주의와 시장경제 >, <자유주의의 지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