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 이병욱 고려대 강사

1. 서론

한국 근대불교의 사상은 3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유형은 사회참여를 지향하는 불교사상으로서 한용운(1879~1944)이 대표적 인물이다. 한용운은 자신의 불교관을 4가지로 정리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불교는 ‘평등의 가르침’이고 ‘서로 구제하는 가르침’이라고 본 점이다.

한용운은 이 관점을 더욱 발전시켜서 독립운동, 농민운동, 여성운동에 적용한다.

둘째 유형은 첫째 유형처럼 적극적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불교계의 개혁 또는 변화에 앞장을 선 불교사상이다. 여기에 속하는 대표적 인물이 박한영과 백용성이다.

박한영(1870~1948)은 불교교육과 포교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려고 노력하였고, 백용성(1864~1940)은 대각교 운동을 추진해서 불교계의 개혁을 추구하였다. 셋째 유형은 전통을 계승하는 불교사상으로서 방한암이 대표적 인물이다.

방한암(1876~1951)은 승려라면 선(禪), 염불, 간경, 의식(儀式)을 공부할 필요가 있고 가람(伽藍: 사찰)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방한암은 도의국사를 조계종의 종조로 정하고 보조국사 지눌과 태고보우의 위상도 나름대로 인정해주고 있다. 이러한 방한암의 견해는 불교계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통을 제대로 계승해서 불교의 명맥을 온전히 이어가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대불교 사상의 3가지 유형 가운데 1945년 이후 해방공간 속에서 사회참여를 지향하는 흐름은 사라지게 되었고(1980년대 민중불교운동으로 다시 나타났다), 둘째 유형은 1950년대와 60년대 대처와 비구승의 분쟁을 통해서 그 힘이 상당히 소진되었으며(1980년대 이후 다시 복원되고 있다), 셋째 유형이 조계종의 주류 흐름이 되었다. 그러나 이 전통을 강조하는 흐름도 동남아불교의 위빠사나 수행에 도전장을 받고 있는 형편이다.1)

현재 조계종의 입장에서 간화선(看話禪)이 대표적 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조계종 교육원에서 주최한 10차 간화선 세미나(2009년 9월)에 논평자로 참여한 적이 있다. 이 일을 계기로 해서 간화선의 세계화와 대중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또한 이러한 작업은 이 시대에서 요구하는 ‘전통의 현대화’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필자는 이 시대의 수행 방법으로 간화선이 대표적이라는 것에 대해 동의하는 쪽은 아니다. 다양한 수행 방법이 있고, 이 다양한 수행 방법을 통해서 한국 불교문화가 풍요롭게 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간화선이 현대화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변화해야 할지에 초점을 맞추어서 서술하고자 한다.

2. 한국 선사상(간화선)의 전개 과정

현재 조계종에서 말하는 ‘간화선’은 조사선을 포함한 것이다.

순수하게 간화선이라고 한다면 대혜종고에 의해서 무자화두 참구법이 제기된 시점부터 간화선이라고 할 것이고(대혜종고가 아니고 그의 스승 원오극근에 의해서 간화선이 제기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 이전의 선사상(홍주종 계열)은 조사선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조사선’도 광의의 간화선에 포함시킨다.

조계종 교육원에서 편찬한 《간화선》에 따르면, 간화선은 부처님과 역대 조사께서 이르신 한마디 말이나 순간적으로 보이신 짧은 행위 끝에 백억 가지 법문을 뛰어넘어 바로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법이다. 이것은 캄캄한 방에 불이 켜지면 한순간에 모든 것을 ‘확’ 밝히는 이치와 같다. 간화선은 이와 같이 단박에 뛰어넘어 바로 여래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간화선이란 화두(話頭: 公案)를 간(看)해서 본래 성품 자리를 바로 보는 선법이다. 이는 본래 성품을 보고 깨닫는 것이고, 이처럼 성품을 보고 깨닫는다고 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한다.2)

또 화두에는 1,700가지가 있다고 하지만, 이는 송나라 시대에 작성된 선종의 역사서인 《전등록》에 1,701명의 조사가 소개되어 있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선종에서 제시된 화두는 대략 500여 개가 된다. 이 가운데 대혜종고는 조주 스님의 무(無)자 화두를 가장 강조하였다.

이는 어느 스님이 조주 스님에게 묻기를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하자, 조주 스님이 말하기를 “없다.”고 하였다는 내용이다. 이 화두는 부처님이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하였는데 어찌해서 조주 스님은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하였는지 의심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화두를 하루 24시간 동안 참구하여, 좌선할 때와 일상생활을 할 때도 삼매가 유지되는 동정일여(動靜一如), 꿈속에서도 화두를 참구하는 단계인 몽중일여(夢中一如), 꿈도 없는 숙면 속에서도 화두가 참구되는 단계인 오매일여(寤寐一如)의 단계를 거쳐서 깨달음을 얻게 된다.3)

그러면 한국에서 선사상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한국에서는 신라 말에 선종이 들어왔고, 그것이 고려 초에 9산선문으로 정리되었다. 고려 무신정권기에 보조국사 지눌이 선사상을 크게 일으켰고, 고려 말에 3대선사, 곧 나옹혜근, 백운경한, 태고보우가 활약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불교교단이 억압을 받았지만, 임진왜란 때 승군으로 참여한 뒤에는 불교교단은 왕실로부터 제한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조선조 불교는 서산대사 청허휴정과 부휴선수의 양대 계보로 전개되고, 조선조 후기에는 3가지 문(門)이 성립되었다. 그것은 간화선을 의미하는 ‘경절문’, 교학(敎學) 공부를 의미하는 ‘원돈문’, 염불수행과 주력(呪力)수행을 포함하는 ‘염불문’이다. 이 내용에 대해 자세히 알아본다.

한국 간화선의 특징은 독자적으로 주장되는 경우는 적고, 다른 수행론과 결합된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우선,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의 선사상은 단박에 진리를 깨닫고 남아 있는 번뇌를 점차로 녹여나간다는 돈오점수(頓悟漸修)와 간화선이 결합된 것이다.

지눌의 ‘돈오점수’는 그 이전의 선배 선사상가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순지(順之, ?-858-?)도 ‘돈오점수’를 말하고 있는데, 그는 9산선문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초기 선종의 역사서인 《조당집》에 한국 승려 가운데 가장 많은 내용이 소개되어 있는 인물이다. 이자현(李資賢, 1061~1125)도 《능엄경》을 강조하고 있는데, 《능엄경》에서 “이치로는 돈오(頓悟)이어서 깨달음에 의지해서 녹여나가는 것이지만, 현상[事]에서는 단박에 없애는 것이 아니고 점차로 제거해 나간다.”는 표현이 있으므로 이도 ‘돈오점수’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눌도 앞선 사상가(순지, 이자현)의 돈오점수 주장에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론된다(지눌은 규봉종밀의 돈오점수를 따른다고 그의 저술에서 주장한다.). 지눌은 이러한 돈오점수의 흐름 속에서 대혜종고(大慧宗톓, 1089~1163)의 간화선을 접목하고자 고민하였다.

나옹혜근(懶翁慧勤, 1320~1376)은 간화선을 제시하였고, 이 간화선은 출가와 재가, 남성과 여성의 구분을 넘어서 있다고 하였다. 나옹은 한편으로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을 위해서 염불수행을 제시하였고, 염불수행을 간화선의 맥락에서 바라보고자 하였다. 또한 나옹은 깨달음을 완성하는 단계를 10단계로 나누어서 제시하였는데, 이것을 ‘공부십절목(工夫十節目)’이라고 부른다.4)

백운경한(白雲景閑, 1299~1375)은 무심선, 조사선, 화두선을 주장하고, 이 세 가지 수행법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백운경한의 선사상에서 중심점은 무심선(無心禪)이다. 이 ‘무심선’은 의식(意識)을 벗어나고 범부의 길이나 성인(聖人)의 길을 벗어나서 무위(無爲)와 무심(無心)으로 면밀하게 양성하여 자연히 도(道)와 합하는 것이다. 그리고 백운경한이 주장하는 조사선(祖師禪)은 선문답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조사선과 화두선을 하나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백운경한은 구분하였다.

화두선(話頭禪)은 간화선으로 화두를 들어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5)

그리고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는 간화선을 강조하였지만, 방편으로 염불수행을 제시하였다. 이 점에서 태고보우는 순전히 간화선만을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조 불교는 청허휴정(淸虛休靜, 1520~1604)에 의해서 대표된다고 할 수 있는데, 청허휴정도 간화선을 주장하였지만, 동시에 경전 공부, 염불수행, 주력(呪力)수행도 권하고 있다.6) 그리고 조선조 후기에 들어서서는 3문 수행으로 체계화된다. 이는 석팔관(釋捌關)의 《삼문직지(三門直指)》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경절문(徑截門)은 간화선을 지칭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지눌의 《간화결의론》 등이 소개되어 있고, 원돈문(圓頓門)은 교학 공부를 의미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지눌의 《원돈성불론》과 의상의 《법계도》가 소개되어 있으며, 염불문(念佛門)은 염불수행과 주력수행을 뜻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10종류의 염불(지눌의 이름을 가탁한 《염불요문(念佛要門)》의 내용과 같음)과 4종류의 염불과 ‘신묘장구대다라니’가 소개되어 있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 체계화된 수행법에도 간화선이 존재하지만, 그러나 교학 공부와 염불수행과 주력수행을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한국불교의 전통에서는 간화선 한 가지만을 강조한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간화선과 다른 수행 방법을 아울러서 제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간화선만을 강조하는 것은 적어도 한국불교의 전통을 제대로 계승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전통의 현대화를 추구할 때, 현재의 입장에서 과거의 불교사상을 볼 것이 아니고, 과거의 불교사상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어떻게 현대에 계승할 것인지 고민하는 자세가 요청된다고 하겠다.

3. 간화선의 세계화와 대중화를 모색하는 길

여기서는 간화선의 현대화를 모색하기 위해서 다음의 3가지 항목을 검토하고자 한다.

우선, 교학체계가 정비되어야 한다. 간화선을 말하는 데 무슨 교학(敎學)이냐고 반론이 있을 수도 있지만, ‘교학’과 선사상(간화선)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선사상(간화선)은 ‘교학’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교학의 틀이 잡혀야 선사상(간화선)도 일어난다.

둘째, 간화선과 경쟁 관계에 있는 수행법의 장점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다른 수행법의 장점을 깎아내릴 것이 아니고 그 장점을 간화선 수행에 도입할 필요가 있다. 눈 밝은 스승의 지도를 받는다면, 간화선의 체계 안에서 다른 수행법의 장점을 수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셋째, 불교의 수행법이 아니고 ‘제3의 수행법’이라고 할지라도 그 수행법에 불교(간화선)에 없는 장점이 있다면 그 장점을 수용할지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 내용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본다.

1) 교학체계의 정비
간화선 수행이 현재보다 더 영향력과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교학의 체계가 정립되어야 한다.

《유마경》에서 유마거사의 침묵 설법이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앞에서 여러 보살이 언어를 통해서 불이(不二)의 경지(법문)에 대해 말한 것이 필요하였듯이, 선종의 침묵도 교학의 이론에 근거할 때 그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다른 예를 들면, 한국이 IT 분야에서 선진국이라고 평가받지만, IT 분야의 소프트웨어 면에서는 많이 부족하다고 한다. 이것을 보강하기 위해서 철학과 역사학을 포함한 인문학의 발전이 필요하듯이, 간화선 수행을 위해서는 밑바탕이 되는 교학체계가 수립되어야 하고, 또한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교학의 틀이 요청된다.

나아가 인도 불교사상, 중국 불교사상, 한국 불교사상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가 있을 때, 그리고 왜 불교를 공부하고, 현대사회에서 불교가 왜 필요한지, 다른 종교와 철학과 비교할 때 불교의 특징이 무엇인지 분명히 이해될 때, 수행자는 불교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다.

이럴 때 수행이 더욱 의미를 갖는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수행(깨달음)만을 강조하면, 세속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또 다른 방편으로서 견성(見性)을 추구할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하면, 실제로 추구하는 것은 세속적 성공이지만 이것을 이루기 어렵기 때문에 또 다른 대안으로서 불교의 깨달음에 접근한다는 말이다.

또한 필자는 중국의 당나라 시대에 선종이 유행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교종(화엄종)의 발전을 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종(화엄종)에서 많은 이론적 논의가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논의의 참된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선수행이 부각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종 쪽에서 말은 많았지만, 그 말의 정확한 의미를 잘 모르기 때문에 선수행이 득세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무조건 수행이 우선이고, 교학은 필요 없다고 한다면, 선(禪)에 대한 이해도 동시에 떨어질 것이다. 다른 예를 들자면, 기초가 되는 자연과학의 발전 없이 응용 분야의 발전도 기대할 수 없고, 또한 응용 분야가 발전한다고 해도 결국 기초 분야의 발전이 없기 때문에 응용 분야의 발전도 발목을 잡히는 것처럼, 교학체계의 정립 없이는 간화선의 발전도 없을 것이다.

나는 언젠가 김성동이 쓴 소설 《만다라》를 읽으면서 교학(敎學)과 간화선 수행이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소설의 내용은 주인공이 화두를 받고 열심히 화두를 참구하였지만 그 화두를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 화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주둥이가 큰 병이 있었는데 그곳에 작은 ‘새’를 두고 길렀다. 세월이 흘러 ‘새’가 자라서 주둥이를 통해서는 이 ‘새’가 빠져나갈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스승이 제자에게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것은 병을 깨지 말고 ‘새’를 꺼내라는 것이었다.”

《만다라》에서는 주인공을 낙담하게 만든 화두이지만, 위 화두에 교학적 배경이 감추어져 있다. 위 화두에서는 두 가지 양립할 수 없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새’를 꺼내기 위해서는 병을 깨뜨려야 하고, 아니면 ‘새’를 병 속에 그냥 두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나열한 것이다. 그런데 병을 깨뜨리지 말고 ‘새’를 꺼내라는 것은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두 가지 길을 가지 말라는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은 새를 그냥 두거나 아니면 병을 깨고 꺼내는 것인데, 이 두 가지를 하지 말라는 것이므로 이는 사람보고 꼼짝하지 말라는 소리와 매한가지다. 그러니까 이 화두는 도저히 풀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절망할 필요는 없다. 이는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중도의 또 다른 표현이다. ‘비유비무’의 중도는 안다고 생각하면서 위 화두를 풀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교학적인 이해도 부족한 사람이다. ‘비유비무’의 중도는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라는 말이지만, 이 말이 추구하는 것은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을 두 가지로 한정해 놓고 이 두 가지가 모두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문장이 아무리 복잡하다 하더라도 결국 문장은 긍정이나 부정으로 끝나게 되어 있다. 긍정은 유(有)에 속하고 부정은 무(無)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긍정’과 ‘부정’을 모두 넘어서라는 것이 바로 ‘비유비무’의 중도에서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병 속에 있는 ‘새’를 꺼내라는 화두는 바로 이 ‘비유비무’의 중도를 좀 더 실감나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부연 설명을 하면, 병 속에 ‘새’를 그냥 두는 것은 ‘긍정’에 속하고, 병을 깨뜨려서 ‘새’를 꺼내는 것은 ‘부정’에 속하는 것이다. 이를 수학에 비유하면, ‘비유비무’의 중도는 공리나 원리에 해당한다면, 병 속에 있는 ‘새’를 꺼내라는 화두는 응용문제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만다라》를 읽고 교학적인 체계 없이 선사상을 접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이 될 수 있는지 비로소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이런 상상을 해본다. 《만다라》의 주인공이 병 속에 있는 ‘새’를 꺼내라는 화두를 풀지 못하고 낙담한 다음에 환속하는 것이 아니라 교학 공부에 열심히 매진하고, 어느 날 그 화두가 ‘비유비무’의 중도의 또 다른 표현임을 알게 되고, 교학 공부 속에 또 다른 깊이가 있고, 간화선을 포함한 선종과 교종은 그 이치에서 서로 연결점이 있음을 알게 된다고 내 나름대로 또 다른 소설을 써본다.

아울러 간화선을 포함한 선종의 언어 표현 방식은 객관적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노무현 대통령의 어법과 비슷해서 그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는 공감을 얻을 수 있지만, 그 내용이 활자화될 때는 문제가 될 수 있다. 언젠가 어느 신종교 단체에서 신문광고를 통해 위산영우(펨山靈祐, 771~853)와 앙산혜적(仰山慧寂, 803~887)의 대화를 소개한 적이 있었다.

위산이 앙산에게 물었다. “《열반경》의 40권 가운데 얼마만큼이 부처님의 말씀이고, 얼마만큼이 마귀의 말인가?” 앙산이 말하였다. “모두가 마귀의 말입니다.” 그러자 위산은 말하였다. “이후로는 누구도 그대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다.”7)

어느 신종교 단체에서 신문광고를 통해 위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불교의 가르침에 근거해 보아도 불교의 가르침은 마귀의 가르침이 분명하다고 주장하였다. 위산과 앙산은 5가7종의 하나인 위앙종을 세운 인물로서 불교의 선종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인물들이 불교의 가르침을 마귀의 가르침이라고 하였으니 불교는 마귀의 가르침이라고 판단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위 광고 내용을 읽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하지만 동시에 선종의 언어에 분명히 문제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 예라고 생각했다. 선종의 언어는 객관적인 정보를 주는 것이 아닌데, 그것을 객관적 정보로 읽겠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원래 선종의 언어는 교종을 통해 불교의 이해를 깊이 있게 한 사람을 상대로 전개될 때 효과가 있는 것이다. 위 대화의 취지는 공(空)사상을 다른 각도에서 표현한 것이다. ‘공’은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불교의 가르침에 대해 어떻게 대할 것인지 문제가 된다. 불교의 가르침이 아무리 숭고한 것이라 할지라도 집착하면 안 된다는 것이 불교의 ‘공’사상이다.

이러한 정신에 근거해서 위산과 앙산의 선문답에서는 《열반경》 40권의 내용이 모두 마귀의 가르침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은 교학적 배경이 없이 위 대화를 읽는다면 어떻게 될까? 여기서도 다시 한 번 선종은 교학(敎學)에 의존하여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선종에서 깨달음을 얻은 기연(機緣)은 구체적이고 특수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어서 그것을 보편적 원리로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점에서도 선종은 ‘교학’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 점을 임제(臨濟, ?~867)선사가 깨달음을 얻은 기연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임제가 황벽(黃檗, ?~856년경)의 밑에서 공부를 하였다. 임제가 3년 동안 성실하게 도를 닦은 것에 주목한 어떤 수좌(首座)가 황벽에게 도에 대해 물어보라고 권한다. 임제는 무엇을 물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대답하니, 그 수좌는 불법(佛法)의 분명한 큰 뜻이 무엇인지 묻도록 하였다.

임제가 곧장 황벽에게 가서 물어보았는데 묻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황벽은 몽둥이로 임제를 때렸다. 임제가 하릴없이 다시 돌아오는데 그 수좌가 다시 황벽에게 물어볼 것을 종용하였고, 황벽은 임제를 또 몽둥이로 때렸고, 다시 임제는 황벽에게 또 물어보았지만 황벽은 몽둥이로 임제를 다시 때렸다.

그러자 임제는 황벽을 떠나서 대우(大愚) 화상에게로 간다. 임제는 대우 화상에게 위의 얘기를 전하면서 자신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였다. 대우 화상은 “황벽이 노파심으로 그대를 위해서 애를 썼는데 여기에 와서 허물이 있느니 없느니 하고 묻고 있는가?”라고 말하였다. 이에 임제는 크게 깨닫고 “황벽의 불법이 별 게 아니구나.”라고 하였다.

그러자 대우 화상은 임제를 나무라며 무슨 도리를 보았는지 다그치자 임제는 대우 화상의 옆구리를 3번 쥐어박았다.8)

위의 내용을 음미해 보자. 임제가 성실히 수행을 하고 있지만 아직 2%가 부족해서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그 절을 담당하던 수좌가 임제에게 황벽 선사를 만나서 도(道)에 대해 물어볼 것을 권해주었다. 일반적으로 상상해 보면, 큰스님인 황벽이 아주 친절하고 자세하게 도에 대해 말씀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몽둥이로 한 대 때리고, 그것도 한 번이 아니고 3회에 걸쳐 때렸다.

임제가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임제는 묻고 싶지도 않았고 물으래서 물어본 것뿐이요, 당연히 물을 내용을 물었는데 친절하게 가르쳐주어도 만족하지 못할 터인데 오히려 매를 받았으니 너무도 억울한 것은 당연한 게 아니겠는가.

이처럼 억울한 생각에 사로잡혀 임제는 대우 화상에게 가면서 아마도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그것만을 생각했을 것이고, 대우 화상에게서 그 의심을 풀은 셈이 되었다. 대우 화상이 ‘노파심’이라고 말한 것은 임제가 이미 도에 대해 안목을 얻을 때가 되었는데도 얻지 못하자 이에 충격요법을 사용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도를 깨달을 시절이 되었다면 누군가 툭 건드리기만 하면 그것을 기연으로 해서 안목이 열리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황벽이 임제를 위해 3번이나 도(道)의 안목을 얻으라고 분위기를 조성해주었으니 이는 바로 황벽의 노파심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유의할 점이 있다. 이는 철저히 예외적 상황이라는 것이다. 임제라는 성실한 수행자에게 국한된 그 당시 상황이었지, 이를 보편적으로 적용해서는 곤란하다. 이 점에서 선종의 특수성이 있다. 만약 이를 보편적 이치로 받아들여 제자를 지도할 때 몽둥이로 때리는 것을 능사로 삼는다면, 이는 황벽의 의중을 모르는 것이다.

더구나 현대는 민주주의 시대이고 인권을 강조하는 분위기이므로 위의 일화는 예외적으로 해석해야 타당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임제가 깨달음을 얻은 내용을 보편적 원리로 이해해서 제자를 가르칠 때 몽둥이를 든다면 현대사회에 어울리는 스승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불교의 최고 어른이 몽둥이를 들고 제자를 때리면서 지도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진다면, 최악의 경우에는 폭력을 미화한다는 오해를 받을 가능성도 있다.

2) 다른 수행 방법의 장점 포용
간화선의 세계화와 대중화를 위해서는 다른 수행 방법의 장점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위빠사나 수행법 가운데 한국에서 널리 알려진 마하시 위빠사나를 살펴보고자 한다.

마하시 위빠사나의 특징은 3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마하시 위빠사나는 4념처 가운데 좌선할 때 호흡에 따라 생기는 복부의 움직임을 마음챙김의 대상으로 삼는다. 둘째, 마하시 위빠사나는 좌선과 행선(行禪)에 동일한 비중을 둔다. 셋째, 마하시 위빠사나는 매일매일의 수행 상태를 지도법사에게 정확하게 보고하고, 수행이 제대로 진행되는지 점검받는다.9)

위의 내용 가운데 첫째 사항에 대해 마하시 사야도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명상수련을 시작하기 위해서 먼저 가부좌로 앉는다. 가부좌는 반가부좌든 결가부좌든 자신에게 편안한 대로 자세를 취하면 된다. 그리고 바닥에 앉아서 명상하는 것이 불편하면 다른 자세를 취해도 좋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자세가 아니고 어떤 자세를 취하든 그것을 주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다음에는 당신의 마음을 배(단전)에 두도록 한다. 그러면 당신은 배가 나오고 들어가는 움직임을 알게 될 것이다. 만약 처음에 이 움직임을 분명하게 느끼지 못하면 양손을 배에 올려놓아서 배가 나오고 들어가는 움직임을 느껴야 한다. 잠시 후에 숨을 들이 쉬면서 배가 나오고 숨을 내쉬면서 들어가는 움직임이 분명해진다. 배가 불러올 때는 ‘나옴’을 관찰하고, 그리고 배가 줄어들 때는 ‘들어감’을 관찰하라. 이렇게 해서 모든 움직임에 대해서 관찰을 해야 한다.

이러한 수련에서 당신은 배가 나오고 줄어드는 움직임을 관찰하는 실제적인 방법을 배우게 된다. 당신은 배의 형태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단지 배가 나오고 들어가는 움직임에 의해서 일어나는 육체적 감각을 의식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므로 배의 형태에 마음을 두지 않고 관찰하는 수련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

당신은 아직 주의력과 집중력이 약한 초보자이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움직임과 사라지는 움직임에 마음을 유지하는 게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어려움에 관해서 당신은 이렇게 생각할 경우가 있을 것이다. ‘나는 도무지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서 계속 마음을 유지하는 방법을 모르겠다.’ 그러면 이것은 배우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서 넘어가라. 그리고 배가 나오고 들어가는 움직임은 항상 현재이다. 그러므로 조금 전에 배의 움직임을 지나쳐 버린 것에 대해 후회할 필요는 없다.

배가 나오고 들어가는 움직임을 완전히 깨어있는 상태에서 주시하면서 이 수련을 계속해 나가면 된다. 결코 입으로 나옴, 들어감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용어나 명칭으로 나옴, 들어감을 생각해서도 안 된다. 단지 배가 나오고 들어가는 신체적 과정을 지켜보기만 하라. 그리고 배의 움직임을 더 뚜렷이 하기 위하여 숨을 길게 쉬거나 급한 숨을 쉬는 것을 피하라. 왜냐하면, 이 방법은 얼마 가지 않아 피로를 일으켜서 오히려 명상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평상시의 숨을 자연스럽게 쉬는 과정에서 생기는 배의 움직임에 완전히 깨어 있으라.

그러면 수련하는 동안에 다른 생각이 일어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경우 다른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단지 일어나는 생각에 대해 주의 깊게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만약 당신이 어떤 것을 상상한다면, 그 상상하는 것을 가만히 주시하기만 하면 된다.

만약 당신이 어떤 것을 꾸준히 생각한다면, 그 ‘생각함’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게으르지 말고 주의를 기울여서 계속 나아가라. 만약 당신이 이렇게 전념하는 동안에 침을 삼키고 싶으면 ‘삼키고 싶음’을 주시하고, 삼키는 행위를 하는 동안에는 ‘삼킴’을 주시하며, 침을 뱉고 싶으면 ‘뱉고 싶음’을 주시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 배가 나오고 들어가는 움직임을 관찰하는 수련을 해야 한다.

명상을 하다가 몸이나 팔과 다리에 피곤함 또는 뻣뻣함을 느끼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만약 이러한 느낌이 일어나면 느낌이 일어나는 신체의 부위에 의식을 집중해서 ‘피곤함’ 또는 ‘뻣뻣함’을 계속 주시하는 명상을 해야 한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느리게도 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 이러한 느낌은 점차 희미해지면서 마침내 모두 사라질 것이다. 만약에 이러한 느낌 가운데 어느 하나가 더욱 심해져서 육체적 피로감이나 관절의 뻣뻣함을 참을 수 없게 되면, 그때는 자세를 바꾸어라. 그렇지만 당신이 자세를 바꾸기 전에 ‘바꾸고 싶음’에 대해서 주시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자세를 취하자마자 다시 배의 움직임에 대해 명상을 계속해야 한다. 이러한 수련은 ‘가려움’ ‘고통’에도 적용되고, 그리고 명상 중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에도 적용된다.

졸릴 때는 ‘졸림’을 주시하고, 잠이 올 때는 ‘잠이 옴’을 주시하라. 명상할 때 충분한 집중을 얻은 뒤에 당신은 졸음과 잠을 이겨낼 수 있으며, 그 결과 신선한 결과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배가 나오고 들어가는 움직임에 주시하는 수련을 해야 한다. 만약 당신이 졸린 느낌을 극복할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잠을 자야겠다고 할 경우에도 명상은 잠드는 그 순간까지도 진행되어야 한다.

잠자는 상태는 잠재의식의 연속이다. 이는 다시 태어날 때 의식의 처음 상태와 비슷하고, 또한 죽음을 맞이할 때 의식의 마지막 상태와 비슷하다. 이 상태에서는 의식이 희미하기 때문에 대상에 대해 깨어 있을 수 없다. 만약 당신이 엄격한 명상수련을 하는 동안이라면 수련하는 시간은 잠에서 깨어나는 그 순간에서 잠들 때까지이다.

다시 말하면, 당신은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배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기본 수련을 해야 하고, 또한 여러 가지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 끊임없이 주의 깊은 관찰을 해야 한다. 여기에 휴식은 있을 수 없다. 명상의 어떤 단계에 다다랐을 때 명상하는 시간을 늘렸음에도 졸음을 느끼지 않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시간 가는 것을 잊어버리고 명상을 계속할 수 있다.10)

위의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마하시 위빠사나 수행법이 매우 구체적이고 상세한 수행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수행론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에 비해, 한국의 간화선 수행에서는 이러한 자세한 설명을 찾아볼 수 없거나, 있다 해도 상당히 형식적인 설명에 치우친다.

간화선 수행의 설명은 실전에 활용할 수 있을 만큼 구체적이고 실용적이지 못하다. 필자는 이 대목에서 간화선 수행이 위빠사나 수행법에 도전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한국의 간화선에서도 간화선 수행 가운데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할지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가르칠 필요가 있다.

3) 제3의 수행법에서도 배운다
‘제3의 수행법’이라고 불리는 수행법에 대해서도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제1의 수행법은 불교의 수행법이고, 제2의 수행법은 힌두교,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유교 등의 수행법이며, 제3의 수행법은 그 전통이나 전승이 확실하지 않고 주로 20세기에 창안된 수행법을 말하는 것이다. 이 제3의 수행법에 대해 반대하는 주장도 있지만, 불교의 정신에 입각해서 보다 유연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초기불교에서 부처님은 자신의 가르침을 뗏목에 비유하여 집착하지 말 것을 말하였고, 대승불교에서도 공(空)을 말하고 있으며, 선종에서 임제 선사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고 말하였듯이, ‘불교’라는 이름에 구애되는 것은 불교의 정신, 선(禪)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다.

제3의 수행법이 수행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 호소력이 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 장점을 불교 수행법으로 소화하고 흡수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조선조 불교에서는 유교, 도교, 불교의 3교 조화를 추구하였고, 한국 종교학의 아버지라고 평가받는 이능화(1869~1943)는 《백교회통》에서 세계의 종교를 불교를 중심으로 해서 회통하려고 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편을 가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불교 발전을 위해서도 온당한 일이 못 된다. 종교의 정체성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에 있고, 불교도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제3의 수행법이라고 하는 것이 깨달음의 상품화라는 비판을 받고 있고, 그 구체적 예로서 단월드(전 단학선원)에 대한 연구도 있다. 현재 ‘단월드’는 상법(商法)의 적용을 받는 주식회사이고, 그 아래에 많은 계열사와 협력사를 두고 있다. 그 가운데 관심을 끄는 것은 기업컨설팅 회사 ‘유답’이다. 이 회사의 주목적은 기업이 최대한 효율적이고 생산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해당 기업의 인적자원을 ‘단월드’의 여러 의식 훈련 프로그램을 통해서 교육시키는 것이다.

이는 서구에서 ‘영적 훈련’이 기업과 경영의 세계에서 거대 사업으로 자리 잡은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여러 뉴에이지 그룹에서는 여러 종교 전통에서 발견되는 심신수련법과 현대적 심리요법을 접목해서 다양한 의식계발 프로그램을 개발하였고, 이를 기업에 적합한 훈련 프로그램으로 재정비하여 제공하고 있다.

한편 단월드의 경제적 기초를 마련한 것은 수련센터이다. 단월드는 2008년 현재 국내에 300여 개의 단센터와 2,000여 개 직장 동우회를 두고 있으며 해외에 200여 개(미국에만 170개)의 단센터가 있다. 국내의 경우에는 일반회원을 위한 과정과 평생회원을 위한 과정으로 구분되고, ‘단무도’와 ‘뇌호흡’ 등은 단월드의 고객들에게 통합 프로그램이 아닌 ‘단품’으로 제공되기도 한다.

국내에서 단월드의 상업주의 태도에 대해 많은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에 대해 단월드 쪽에서는 이 프로그램에는 그 비용에 상응하는 가치 혹은 그 이상의 가치가 있기 때문에 수련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만약 저렴하게 배우게 되면 사람들은 그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대로 수련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 수련비를 지불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대신 특정 단센터에서 풀타임으로 봉사하면서 수련을 마칠 수 있다고 반론한다.11)

‘단월드’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는 시간이 지나면 더 분명해지겠지만, 제3의 수행법에 속하는 것에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수행법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동사섭(同事攝)이다. 동사섭은 용타(龍陀) 스님이 개발하여 보급하고 있는 집단 상담 프로그램이다.

동사섭은 엔카운터링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일본에 엔카운터링을 보급한 이토 히로시의 영향을 받은 강요한 선생(전남 중고등학교 교장)이 1971년부터 전남 지역의 학교 선생님에게 엔카운터링을 소개하였고, 용타 스님이 이를 불교적 관점과 한국적 관점에서 수용해서 발전시킨 것이다. 동사섭은 1980년 전남 강진군의 무위사에서 17명의 수련생을 대상으로 시작되었고, 1992년부터는 수련 장소로 원불교 수양도량인 삼동원을 사용하고 있다.

동사섭은 행복을 목적으로 삼고 있고, 이를 위해서 삶의 5대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정체성의 원리, 대원의 원리, 수심의 원리, 화합의 원리, 작선의 원리다. 이 5가지는 이상적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필요한 5가지 요소[五要]라고 하고, 이 가운데 수심의 원리, 화합의 원리, 작선의 원리는 3요(三要)라고 불린다.

그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자. 정체성(正體性)의 원리는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분명한 가치관을 세우는 것이다. 대원(大願)의 원리는 여러 공동체의 화합을 기원하는 커다란 마음을 내는 것이다. 수심(修心)의 원리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탁 트인 마음을 닦는 것이다. 화합(和合)의 원리는 자신과 다른 사람이 화목하게 어울려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사는 것이다. 작선(作善)의 원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 수심의 원리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수심의 원리에 옴나 명상, 비아 또는 무아 명상, 독배 명상, 나지사 명상, 느낌 쓰기, 지족 명상, 건강바라밀, 행동 명상이 있다.12) ‘옴나 명상’은 개념 이전에 머무는 명상이다. 의식이 개념 이전에 머무르려면 감정이나 생각을 섞지 않고 있는 그대로 감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대상은 보일 뿐이고 보는 것은 아니고, 들릴 뿐이고 듣지 않고, 의식될 뿐 적극적 의식 작업을 하지 않고 다만 깨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깨어 있음’으로 요구나 감정의 흐름을 초월할 수 있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부동(不動)의 경지를 얻을 수 있다.

동사섭에서는 산책을 하며 생각과 감정을 섞지 않고 감각되는 대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훈련을 한다. 예를 들면, 새소리가 들릴 때 ‘참 소리가 아름답다’ ‘저 소리를 들으니 고향 생각이 난다’ 등 생각과 감정을 일으키지 않고 청각으로 소리를 듣는 것에 집중하는 훈련을 한다. 이는 선종의 견성 체험과 비슷한 것이다. 선종에서도 소리에 현혹되지 않고 소리를 듣는 그 성품에 사무치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옴나 명상’은 이러한 내용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비아(非我) 또는 무아(無我) 명상’은 나의 정체를 파헤쳐서 ‘나’가 실재하지 않는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동사섭 수련 과정에서는 “당신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진정한 당신입니까?”라는 질문을 계속 던져서 ‘나’라는 개념이 허무한 것임을 밝혀 나간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 ‘나’는 환경도 몸도 마음도 마음의 주체도 아니라는 점이 드러나고, 결국 ‘나’라고 말할 것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는 불교의 무아(無我)를 오늘날의 관점에서 다시 조명한 것으로 보인다.

‘독배 명상’은 독이 든 약사발을 앞에 두고 독배를 마시는 즉시 고통이 없이 죽는다고 할 때 지금 당장 그 독배를 마시고 죽을 수 있는지 명상하는 것이다. 독배 명상은 삶을 마감하는 절박한 상황을 설정해 놓고 자신을 움직이는 다양한 욕구의 정체와 내용을 관찰하게 한 후에 그 욕구를 초월해서 마음을 서서히 비워 나가는 수행법이다. 이는 죽음에 대해서 다시 성찰할 기회를 주고, 이를 통해서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새로운 각오를 부여해 줄 수행법이다. 죽음에 대한 명확한 견해가 서지 않는다면 삶에 대한 견해도 서기 어렵다.

‘나지사 명상’은 대화의 어미에 해당하는 어구 ‘~구나, ~겠지, ~감사’의 마지막 세 글자를 합쳐서 만든 말이다. 이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마음이 일어날 때 거기에 휩쓸려가지 않기 위해 제시된 방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너는 추남이다.”라고 말할 때 속이 타서 화를 내지 말고 ‘저 사람이 나를 추남이라고 하는구나. 나를 추남이라고 말할 만한 사연이 있겠지. 그래도 욕을 하지 않고 추남이라고 말한 것만도 감사하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동사섭 수련 과정에서는 이 명상을 100차례 이상 실시할 것을 권한다. 만약 이런 마음 자세로 일상생활에 임할 수 있다면 당사자는 스트레스를 적게 받고 살 것이다. 혹시 다른 사람들이 무골호인(無骨好人)으로 오인할 가능성이 있겠지만 말이다.

‘느낌 쓰기’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작은 느낌에 주목하여 이를 기록하는 것이다. 이러한 미세한 감정에 눈을 뜨면 감정의 퇴화가 예방되고 심층심리 영역이 정화되며, 한(恨)과 생리적 경직도가 풀리고 부정적 감정의 작용이 예방되며, 인간에 대한 경외감과 신비감이 깊어지고 혼에 관심을 기울이는 인격이 길러지며, 의식의 영원성을 감지하는 효과가 있다고 동사섭에서는 주장한다. 이를 통해서 섬세한 감정이 풍부해지면, 조그마한 것에도 감사하고 만족하고 즐거워할 줄 아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는 남의 엄청난 고통도 나 몰라라 하는 사람을 상대로 하는 수행법으로 판단된다.

‘지족 명상’은 존재하는 것 자체가 이미 만족스럽고 충분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명상법이다. ‘건강바라밀’은 마음 수련을 보조하는 방편이면서 또 다른 차원에서 마음을 수련하는 과정으로서 몸의 건강을 도모하는 것이다. ‘행동 명상’은 복잡하게 따지지 않고 일단 행동으로 저질러버리는 명상이다. 이는 화가 나면 화를 내고 슬플 때는 울어버리고, 기쁠 때는 마음껏 소리쳐 기뻐하는 것이다. 그러할 때 마음속에 쌓인 탁한 기운이 풀어진다. 이는 자신에게 솔직하라는 말로 해석된다. 동사섭 수련 과정에는 여러 가지 행동 명상이 있다.   

이상의 내용을 검토해 볼 때, 동사섭 수행은 불교의 수행법을 현대적으로 접근한 것이고, 일상생활의 영역에도 수행의 지침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불교사상에서는 아직 주목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일상생활의 영역에서 적용될 수 있는 수행법은 불교 쪽에서도 수용하든지, 아니면 동사섭이 최소한 불교와 적대적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호적인 관계에 있는 수행법이라고 인정해 주는 게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4. 결론

이 글에서는 간화선의 세계화와 대중화라는 문제의식에 기초해서 2장에서는 한국 선사상(간화선)의 전개 과정에 대해 알아보고, 3장에서는 구체적으로 간화선이 어떻게 변화해야 할지에 대해 검토해 보았다. 이제 그 내용을 정리하고, 필자가 생각하는 대안을 간단하게 제시하고자 한다.

우선, 한국불교의 선(禪)사상의 전통을 감안할 때 간화선 하나만을 독자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보조국사 지눌에서 시작해서 고려 말의 3대선사 나옹혜근, 백운경한, 태고보우도 간화선 하나만을 수행법으로 제시하지 않았고, 조선조의 서산 대사로 알려진 청허휴정도 간화선 하나만이 수행법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으며, 조선조 후기에는 간화선을 의미하는 ‘경절문’, 교학 공부를 의미하는 ‘원돈문’, 염불수행과 주력(呪力)공부를 포함하는 ‘염불문’의 3문 수행이 체계화되었다. 따라서 간화선 수행도 여러 수행법 가운데 한 가지로서 자리매김하는 것이 한국불교의 전통에도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간화선 수행을 어떻게 현대화할 것인가? 우선 교학체계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 간화선을 포함한 선종의 사상은 교종의 사상에 의지하고 있다. 교종이 세력을 떨치고 있을 때 선종의 수행도 의미가 있는 것이지, 교종이 세력을 잃으면 자연히 선종도 힘을 쓰지 못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 점에 착안해서 현대사회에 부합하는 교학체계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그다음으로, 다른 수행 방법의 장점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 널리 유행하고 있는 마하시 위빠사나를 예로 들어 검토해 보면, 마하시 위빠사나는 상당히 구체적이고 상세한 수행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마하시 위빠사나에는 초심자도 노력하면 따라 할 수 있도록 섬세한 배려가 깃들어 있다. 이런 정신을 간화선에도 적용해서 초심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상세한 수행 내용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그다음으로 제3의 수행법이라고 불리는 것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3의 수행법 가운데 부정적인 평가가 있는 것도 있지만, 긍정적인 모습을 나타내는 것도 있다. 동사섭은 불교와 친연성이 있는 수행법으로 판단되며, 또한 불교 수행에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줄 수 있는 대안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 동사섭에서 제시하고 있는 부분을 간화선 수행 안에 수용하든지 아니면 최소한 불교와 적대적 관계에 있지 않다고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동사섭이 불교 바깥에 있는 수행법이지만 불교 수행을 보충하는 측면이 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도 하나의 방책이다.  

이러한 내용을 감안해서 필자는 간화선에 초점을 맞추어서 다음과 같은 가설적(假說的)인 수행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기초 학력이 부족한 재가신도를 교육한다고 가정할 때, 불교에 관한 간단한 입문 과정을 마치고, 초급 과정에는 염불수행과 주력(다라니)수행을 하고, 중급 과정에서 수식관을 닦고(마하시 위빠사나의 장점을 이 단계에서 수용할 수 있다), 고급 과정에서 간화선을 닦는 단계를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리고 수행자가 거친 번뇌가 없어지는 것에 맞추어서 교학 내용도 아울러 가르친다. 여기에 덧붙여 동사섭의 수행 원리를 교육할 필요가 있다. 동사섭이 불교 안에 포섭되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불교사상과 긍정적 관계에 있는 수행 방법으로 인정할 필요는 있고, 선지식의 가풍(家風)에 따라 불교 수행의 방편의 하나로서 동사섭을 도입하는 것도 가능하리라고 본다.

그래서 다양성을 용인할 수 있는 간화선의 큰 틀을 제시하고, 세세한 내용은 선지식의 가풍에 맡겨둘 수 있다고 생각한다. 21세기 한국 불교문화에서는 간화선의 기본 골격은 유지하되, 선지식의 가풍에 따라 여러 가지 수행체계가 가능하도록 열린 풍토가 되기를 희망한다. ■

 

이병욱
고려대 대학원 철학과 박사(1995년). 박사학위논문: 〈천태지의철학사상논구〉. 저서로 《천태사상연구》 《고려시대의 불교사상》 《에세이 불교철학》 《인도철학사》 《천태사상》이 있음. 현재 고려대, 중앙승가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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