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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불교의 겉과 속 / 김호성
해외 불교 견문기
[41호] 2009년 12월 01일 (화) 김호성 karuna33@freechal.com

   
왼쪽끝이 불광사를 개창한 성운 대사
성운(星雲) 노스님의 자비

7월 14일에서 19일 사이 대만을 다녀왔습니다. 고구마같이 생긴 섬을 일주하였습니다. 타이베이에서 중대선사를 거쳐서 불광산사로, 불광산사에서 화련의 자제공덕회로, 그러고는 기차로 타이베이로 돌아왔습니다.

“선생님은 어떤 것이 제일 좋으셨어요?”
김진영 박사의 질문입니다.

“성운(星雲, 1927~ ) 노스님을 뵙게 된 것이지.”

사실, 노스님을 뵈올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노스님의 자비 덕분이었습니다. 불광산사에서 1박 2일 동안 불광산 초창기 멤버 중의 한 분인 자용(慈容) 비구니 스님, 주지이신 심배(心培) 스님들을 뵙고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또 한국인인 혜호(慧豪)스님을 통해서도 좋은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 도량의 제일 큰 어른이시고 오늘의 불광산사를 일구어낸 성운 노스님을 뵙는 일은 애당초 기획된 것이 아니었고 우리 쪽에서도 감히 청할 수 없었던 것 같고, 그쪽에서도 여든셋의 노스님에게 손님맞이를 하라고 할 형편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지요. 당연히 자용 스님이나 심배 주지스님이 손수 나서서 노스님을 대신해야 했던 것입니다.

하산하는 길에, 잠시 절 밑의 기념품 가게를 들렀습니다. 버스에서 내리는데 이내 ‘다시 버스에 타라’는 이야기가 들렸습니다. ‘성운 노스님께서 만나고 싶어 하신다’는 전갈이 전해진 것입니다.

“보고 싶다고 찾았는데 이미 떠났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매우 섭섭했다.”
노스님은 그렇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그때 마침 혜호 스님이 저희를 끝까지 안내해 주시느라 함께 계셨기에 전화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모두 감사한 일입니다. 스님을 뵙는 자리에서 저는 스님의 왼쪽, 오른쪽에는 원장(혜원) 스님이 앉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스님을 곁에서 자세히 뵈올 수 있었습니다.

체구가 크시고, 얼굴은 언제나 웃는 미소상(微笑像)이십니다. 그래서 포대화상 같기도 하였습니다. 그전에 《감산스님 자서전》에서 읽었던, 감산(?山) 스님이 이렇게 큰 체구였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노스님께서 제시해 주신 하나의 모토가 ‘환희심을 주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라는 말씀이시지요. 부드럽게, 웃으시는 모습이지만 그 내면에서는 단단한 용기, 강력한 의지와 추진력도 배어 나왔습니다.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전형이 아닌가 합니다.

노스님이 저희를 찾아주신 사건은 매우 상징적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것이 노스님의 힘이자, 대만 불교의 오늘을 일구어낸 힘이 아닌가 합니다.

부처님은 중생을 섬긴다. 부처님은 중생을 찾아간다. 부처님은 중생에게 봉사한다.

이 상징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이 그렇다고 한다면, 그 제자인 스님은 당연하겠지요, 또 그 제자인 재가신자는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절에 찾아온 사람들 앞에서, 늘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스님, 늘 봉사자의 마음으로 스스로를 낮추고 상대를 높여주는 스님들…….

이런 모습 속에서 중생들은 감동을 합니다. 감동이 있는 불교! 이런 감동을 맛본 사람들은 다시 또 가게 되고, 모이게 되고, 보시를 하게 되고…….

참으로 아쉬운 것은, 아쉽게 생각되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수많은 스님 불자들이 대만을 가서 보고 느끼고 옵니다. 찬탄합니다. 박수 칩니다. 그러나 그뿐입니다. 진지하게, 대만불국토를 이루어낸 원천적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그다지 정밀하게 체크하지는 않은 것 같다는 것입니다. 본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힘은 바로 떠나간 사람들을, 산문을 이미 내려간 중생들을 찾아서 만나고자 하는 성운 노스님의 마음, 성운 노스님의 자비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불교는 중생을 섬긴다. 불교는 중생을 찾아간다. 불교는 중생에게 봉사한다.

이런 마음과 자세로 우리 불교 역시 새롭게 태어나기를 기원해 봅니다. 우리 모두가 새로운 불자로 거듭 나기를 축원해 보았습니다.

비전 제시의 힘

대만 불교에서 이번에 저희가 가본 곳은 중대선사(中台禪寺), 불광산사(佛光山寺), 자제공덕회(慈濟功德會)입니다. 이들과 함께 흔히 4대 문파로 일컬어지는 법고산사(法鼓山寺)는 못 가보았습니다. 다음 기회를 기다리기로 하였습니다.

이들 4대 사찰은 사실상 하나의 종파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 자체가 모두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그 자체의 교육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그 외형이나 그들이 하는 사업의 규모입니다. 예를 들어서 불광산사에서 행하는 《불광대장경》 편찬 사업이라든지, 자제공덕회에서 행하는 구조 활동의 규모나 복지사업의 왕성함들을 보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입니다. 이들 조직은 전 세계적으로 많은 분원이나 조직체를 두고 있습니다.

이 점은 우리보다 전 세계적인 비전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지도 모릅니다. 조계종의 해외 사찰 수와 한번 비교가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이들의 외형적인 불사 자체에 우리의 눈을 고정시켜 버릴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작으로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이면에 있는 점을 보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주었던 것일까요?

그중에 하나는 지도자들의 비전 제시가 아닌가 합니다. 비전을 제시하고, 그 방향으로 대중을 몰고 가는 교육능력입니다.

불광산사는 캐치프레이즈가 ‘인간불교’입니다. 인간불교라는 구호 아래에, 불교를 새롭게 해석하고 새롭게 조직합니다. 중국 근대의 태허(太虛, 1889~1947) 스님의 인간불교도 있었지만, 그러한 영향을 받으면서도 성운대사는 그 나름의 인간불교를 새롭게 만들어 내면서 사람들을 이끌어갑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불교로 불사의 범위를 정하고 사람들을 교육해 갑니다.

자제공덕회는 아예 하나의 소의경전이 정해져 있습니다. 《무량의경(無量義經)》입니다.

고요히 생각하면서 부지런히 도를 행하고 자비로서 인간 세상을 제도한다(靜思勤行道, 慈濟人間路).

이 《무량의경》의 말씀으로부터 절 이름이나 법당 이름은 정사정사(靜思精舍), 정사당(靜舍堂)이라 하고, 회 이름이나 대학 이름, 병원 이름에는 모두 자제(慈濟)라는 말이 들어갑니다.

불광산사의 성운대사는 모든 종파의 불교를 다 함께 펼친다는 ‘팔종겸홍(八宗兼弘)’의 입장에서 회통(會通)불교를 지향하지만, 자제공덕회는 《무량의경》을 중심으로 합니다.

이런 내용적인 차이가 있지만 성운대사나 자제공덕회를 설립한 비구니 증엄(證嚴, 1937~ )법사는 모두 이러한 불교관을 설파하고 교육합니다. 증엄법사는 《무량의경》 자체를 강의하는 책을 짓고 있었습니다.
즉 우리가 배울 것은 사판승이 불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먼저 그들은 고도의 역량을 갖춘 수행승이자 이판승입니다. 그러한 힘으로 불사의 방향성을 깊이 제시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을 이끌고 가르쳤습니다.

혹시 우리에게 불사는 사판승이 하고, 불사를 하는 데에는 사판적인 접근법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사판적 접근이나 방법론이 아니라 이판적인 역량 갖추기, 이판적인 비전의 제시라는 점입니다. 그렇게 될 때, 불사의 현장에서는 이판과 사판이 둘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공부와 수행입니다. 다시, 공부로부터 시작합시다!

삼복(三福)의 실천

정토사상을 말하는 경전인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보면, 세 가지 복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극락정토에 가고자 하는 수행자는 삼복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첫째는 세복(世福)인데, 세간의 윤리도덕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계복(戒福)인데, 불교에서 정해놓은 계율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행복(行福)인데, 대승불교의 보살도를 잘 닦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전에 이 말씀을 처음 접하면서, 저는 많은 감동을 느꼈습니다. 무엇보다도 ‘세복을 닦아야 한다’는 말씀에서입니다. 우리 대승불교의 강점이 뭐냐 하면, 차원 높은 이야기를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 강점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동시에 그러한 점 때문에 가장 기본적인 이야기를 무시하거나 놓칠 수가 있습니다. 이는 약점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세간’의 이야기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세간의 윤리도덕을 지키는 것을 가장 낮추어서 봅니다. 중국에서 교판(敎判)을 할 때, 화엄종의 현수법장(賢首法藏)이나 종밀(宗密) 같은 분은 가장 낮은 단계에 소승인천교를 설정합니다. 인천교(人天敎)라는 것은, 그 가르침을 잘 실천하면 다시 사람이 되거나 하늘에 태어날 수 있는 정도의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소승인천교로부터 실천해서 제일 높은 단계의 원교(圓敎, 화엄)의 가르침까지 다 올라갈 수 있다고 보면 큰 문제는 없을 수 있으나, 실제로는 그들의 교판에서 5번째 마지막에 자리하고 있는 화엄만이 존중되기 십상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화엄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있는 것, 세상에서 행해지는 모든 것이 다 화엄일 수 있다는 점 역시 망각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정토신앙의 경전인 《관무량수경》에서는 세복부터 닦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깊은 감동을 받았는데, 대만의 불교를 보면서 ‘이분들은 세복부터 잘 닦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인간불교를 모토로 내세우는 불광산사나 자제(慈濟, 자비로써 구제하는 것)를 내세우는 자제공덕회나 공히 인간사회 안에 불교를 위치지우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입니다.

그들은 공히 불교텔레비전 방송국을 운영하고 있고, 불광산사에서는 《인간복보(人間福報)》라고 하는 일간신문도 발행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불광산사에서 2년마다 한 번씩 ‘친족회(親族會)’라는 모임을 한다는 것입니다. 불광산사로 출가하신 우리나라의 혜호(慧豪) 스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이 모임은 불광산사에 출가한 스님들의 부모님을 초청해서 부모님들께 안심을 드리는 회합이라고 합니다.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효선쌍미(孝善雙美)가 생각났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불교가 ‘효도 컴플렉스’를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효선쌍미의 행 역시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민영규 선생님 글에서 읽었습니다만, 일연(一然) 스님께서는 어머니를 오래도록 모셨다고 합니다. 그것도 진존숙(陳尊宿)이라는 중국 스님의 가풍을 본받아서 그러하였노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세복을 놓치지 않는 대만불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봅니다.

또 한 가지는 남녀평등이라는 지금 세상의 시대정신을 절에서 먼저 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여성상위라 할 정도로 대만불교에서는 비구니 스님의 수나 활약이 눈에 띕니다. 불광산사에는 비구 비구니 다 있지만, 비구니 스님이라고 해서 전혀 차별을 받지 않습니다.

‘비구니에 대한 차별을 규정하는 팔경계법(八敬戒法)은 그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 해석한다고 혜호 스님은 말씀하시더군요. 세간의 가치를 존중하는 것, 그러한 세복에서 대만불교 발전의 힘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은 계복입니다. 이는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계율의 문제에 초점을 두고서 말씀드리면, 일본의 불교는 가히 ‘계율이 없는 불교’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그 반대로 대만의 불교는 철저한 계율의 불교입니다. 지계(持戒) 바라밀을 가장 잘 지키는 불교입니다. 그럼 우리나라 불교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일본보다는 낫다고 할까요? 대만에 비하면 계율이 많이 흔들리고 있는 불교라고 말할까요?

실제로 불광산사 혜호 스님께, 왜 한국에서 출가하지 않고 불광산사에서 출가하였느냐고 여쭈어 보았을 때 그 이유의 하나로 계율을 들었습니다. 혜호 스님은 우리나라 모 종단의 총무원장 스님의 아들입니다. (마치 일본 중세 가마쿠라 시대에 진언율종을 창시한 에이존 스님이 고후쿠지(興福寺)의 학승을 아버지로 해서 태어난 것이 생각났습니다.) 1994년인가, 1998년인가 조계사에서 일어난, 무협지의 한 장면 같은 사건을 보면서 한국불교로부터 마음이 떠났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점점 더 범연하게 되어가지만 일반인들이 느끼는 감도(感度)로서 계율을 지키느냐 아니냐 하는 하나의 리트머스 시험지는 바로 채식 여부입니다. 가장 일상적인 문제이면서 가장 눈에 띄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경우에는 재가불자들이 채식을 못 지키니까 스님들에게 그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지 못하는 면이 있고, 동시에 스님들이 채식을 못 지킨다면 그것을 재가자들에게 지키라고 힘주어서 요구하지 못하는 면이 있는 것같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채식을 철저하게 지키는 스님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 역시 재가자들에게 채식을 철저하게 지키라고 요구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대만의 경우에는 다르게 보입니다. 스님들이 철저하게 지키고 나서 재가자들에게도 철저하게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자제공덕회에서 그런 모습을 보았습니다.

또 하나 계복의 실천과 관련하여 인상적인 것은 자제공덕회의 십계(十戒)입니다. 정사정사(靜思精舍)에 갔을 때, 건물 밖에 십계를 적은 판을 내걸어놓았더군요. 십계라고 하지만, 사미 사미니 스님들이 받는 십계가 아닙니다. 오계까지는 우리의 오계와 같습니다. 그런데 6계부터 10계까지가 다릅니다.

여섯째, 담배를 피우지 말며, 독을 마시지 말고, 삔랑을 씹지 말라.
(삔랑은 삔랑수 나무의 열매를 씹는 것인데, 혈액순환을 빨리 해주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일종의 각성제라고 보이는데요. 시내에서는 ‘코니카필름’ 마크 처름 형광등을 색색으로 내걸어 놓고, 특히 이쁜 여자들이 핫팬츠 차림으로 팔고 있습니다.)

일곱째, 도박을 하지 말며 투기를 하지 말라.

여덟째, 부모에게 효도하며 말씨나 얼굴을 부드럽게 해서 대하라.

아홉째, 교통법규를 잘 지켜라.

열째, 정치적인 데모에 참여하지 말라.

‘교통법규를 잘 지키라’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세복이라 볼 수 있는데, 다시 계율로 삼아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담배나 독, 삔랑 같은 것은 사실상 불음주계에 다 들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남방(태국 등)의 스님들이 담배를 많이 피우는데, 원래 계율에 없었다는 입장에서 그러합니다만,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불음주를 제정한 취지를 살피면, ‘술’만이 아니라 정신을 혼미케 하고 중독성이 있는 것은 일체 마시거나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재가자들에게도 ‘담배 피우지 말라’고 요구하지 못하는데(하긴 불음주조차 강하게 요구하지 않는 터에 담배까지겠습니까), 자제공덕회의 회주 증엄 스님은 그것까지 강하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 요구에 부담을 느낀다면 자제공덕회에 가입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자제공덕회가 잘되는 것을 보면 그 멤버들은 모두 잘 지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사회 전체적으로 우리보다 대만이 매우 계율 잘 지키는 사회라고 보입니다(천수이벤 총통 당시 윤락업소를 다 정리했는데, 어기는 사람이 없다 합니다.).

셋째 대만 불교는 행복(行福)을 잘 행하는 불교입니다. 행복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보살행을 잘 행하는 것을 뜻합니다. 보살행은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로운 행이라 정의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이타행 쪽에 무게가 있겠지요. 이런 이타행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사회복지나 교육사업이 아닐까 합니다. 중대선사나 불광산사의 경우에는 교육사업에 힘을 쏟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불광산사는 현재 대학이 다섯 군데입니다. 미국의 서래대학(西來大學, West University) 외에 대만에 네 개의 대학이 더 있다 합니다.

대단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대만에 있는 대학들의 규모는 잘 모르겠지만……. 당연히 이들 대학에서는 수많은 일반 학생들이 공부를 하면서 부처님을 가까이 접근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복지 쪽으로 생각하면, 불광사의 경우에도 적지 않게 행하고 있지만(실제로 불광산사의 이념은 “긴급한 재난은 구제하지만 가난은 구제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아무래도 무게중심은 복지보다는 교육에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자제공덕회보다는 덜합니다.

지금까지 불교에서는 사회구제를 종지로 내세운 종파는 없었다. 이제 우리 자제종(慈濟宗)이 그 제일대(第一代)가 될 것이다.

이렇게 자제종은 불교사상사를 새롭게 평가·교판(敎判)하면서, 자기 역할을 명백히 규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수(隋)나라의 삼계교(三階敎)에서 유사한 전례를 인정할 수 있다고 봅니다만, 자제공덕회의 사명의식에 토를 달고 싶지는 않습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약 200군데에 자제공덕회의 지부가 있거나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합니다. 북한에도 들어가 있고요. 사천성이라든가 지진 등의 재해가 있는 곳에는 자제공덕회가 가장 먼저 들어간다고 합니다. 길이 끊어지고 여진이 우려되는 상황에서도, 물과 음식을 짊어지고 걸어서라도 간다는 것입니다. 증엄 스님의 이념은 인종, 종교, 정치, 이념 등을 초월해서 어려운 사람들은 돕는다는 것입니다. 자비로써 제도한다는 것이지요.

10여 년 전 대만 중부지방에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에도 학교 51개를 새로 지어서 기증했다 합니다. 다만 그 학교 건물의 스타일만 자제의 브랜드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인애(人愛)를 상징하는 ‘人’자 지붕을 하고 있습니다.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같이 쓰레기를 주어서, 분리수거를 해서 빈병들을 팔아서 자제공덕회의 기금으로 보내준다 합니다. 병원이 있는데, 이 병원과 의과대학의 수준이 대만 최고라는 것입니다.

애당초 이렇게 자제에 눈을 돌리게 된 데에는 포교를 시작한 화련(花蓮)이라는 고장에 풍토병이 많았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래서 먼저 의료봉사를 시작했다는 것이지요. 미숫가루를 만들고, 양초를 만들어 팔아서 기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합니다. 이 두 공장은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정사정사에서 말입니다.

이렇게 대만 불교는 보살행의 실천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줍니다. 그런 것은 절 안에서부터 느낄 수 있습니다. 스님들이 모두 다 일을 합니다. “나는 수행을 한다”는 스님이 얼마나 있을까 할 정도로 일 그 자체를 수행으로 삼는가 봅니다. 찾아오는 재가자를 위한 봉사, 봉사에 회향될 기금 마련을 위한 노동에 스님들이 직접 몸을 낮추어 일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감동하게 되고, 스스로 동참하려는 마음을 내게 됩니다.

이렇게 세복, 계복, 행복을 행하고 있는 불교가 어찌 쇠하겠습니까. 그것도 불과 50년 만에 이렇게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 이전의 전통이 없어서, 새롭게 백지상태에서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성운 대사나 증엄 법사 같은 스님들이 화가(畵家)로 나서서 말입니다. 기독교 신도는 고산족의 원주민 마을에서나 잠깐 볼 수 있는 정도라 하니, 그 역시 불교가 이렇게 잘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러한 삼복의 실천은 우리 불교가 배워야 할 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대만불교를 보면서 우리 불교의 오늘 현주소를 냉정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호성
동국대 인도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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