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공 동국대 경주캠퍼스 선학과 초빙교수

인생의 비극은 비교로부터 시작한다고 야납은 사석에서 종종 말하곤 했다.

지금 야납은 보고 듣는 경계의 세계를 32년 전 이 땅을 떠나던 그 시절과 순간순간으로 비교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곤 나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곤 한다. 감당치 못할 무게로 압박해 오는 변화를 무심히 보냈던 세월의 탓으로 치부하기에는 외국 생활 32년이란 시간은 야납 스스로를 괴롭힐 수 있는 너무나도 긴 long vacation이었다. 중간에 잠깐 다녀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흘려보낸 세월만으로도 야납은 겉과 속이 다른 한국인이라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야납의 고국에서 겪는 갖가지가 남다르게 여겨질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야납은 셰익스피어의 무대에서처럼 비극의 히어로가 되어 이 땅에 서고 싶은 맘은 없다. 단지 나도 모르게 서서히 그렇게 되어가는 듯하여 때때로 몸서리를 치곤 한다.

귀국 이후 한 달여간을 버스로 부산과 경주를 오갔다. 차창 밖의 세계는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눈에 익은 풍경들이 무심히도 보내던 세월의 벽을 극복하기 위해서 만으로도, 지쳐 있던 야납의 두 눈을 잠시도 쉬지 못하게 했다. 한국의 산들은 마치 대해에 넘실대는 파도같이 너울거린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능선이 각양각색으로 참 아름답다. 때가 되면 산천 나들이를 하던 옛 선비의 마음으로 가만히 앉아서 즐길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조그만 가슴으로는 감당키 어려운 감회에 빠져드는 것을 야납은 또 지나간 세월의 벽 탓으로 그 허물을 물었다. 감상에 젖어 있는 야납의 뇌리를 흔들어 놓으며 먹구름처럼 떠오르는 영상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것이 풍부 속의 빈곤이었음을 알아차리기에 충분히 선명하였다. 조그마한 배(버스)를 타고 파도를 넘나들던 야납의 눈에 이곳저곳에서 떠돌아다니는 부물이 보였기 때문이다. 청정해역에 어울리지 않는 이물질 같은 존재다.

쉬지 못하던 두 눈으로 들어온 이물질이 내 몸속을 헤집고 다니니 불편하고 거북하며 급기야는 아픔으로 다가오는 그런 느낌이다. 영원히 동화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내 몸의 한 일부가 되어 나를 밀쳐내고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유별나게 하얗게 화장한 얼굴 탓에 노리끼리한 목 언저리가 도리어 두드러져 보이는 요즘 젊은 한국 여인들의 묘한 몰골처럼, 보고 있자니 저절로 고개가 돌아가고 안 보자니 내 누이동생 같은 여인들이라 안타깝다.

범어사 내원에서 경주 동국대학까지 버스로 오가는 길에 눈으로 들어오는 사원이나 사원 안내 간판이 부지기수로 보인다. 이 사회가 필요로 하니 그렇게들 생겨났을 것이다. 야납이 이 땅을 떠나기 전 산중에서 수행할 때도 마을에 포교당이나 개인 사찰이 있었다. 그러나 요즈음같이 우후죽순처럼 이곳저곳에서 지어졌거나 짓고 있는 현실은 누가 봐도 이상 징후다. 그것도 대형화한 사원이 한두 곳이 아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신축 사원뿐만 아니라 기존의 산중 적당한 수행처나 토굴 같은 곳도 대형화 내지는 최신형으로 탈바꿈 하였다고 한다.

예전엔 산중의 사원에 들어서면 산세와 더불어 탁 트인 공간이 주는 시원함과 안정된 가람의 배치 거기에 무엇보다도 수행승들의 해맑은 모습이 곁들여져 산중 사원이 지닐 수 있었던 청량감이 잘 어울렸다. 그것만으로도 산중을 찾는 불자들에게 위안이 될 수 있었고 그들이 찾는 답이 거기엔 있었다.

이젠 산중에 들어서면 무질서하게 들어서 있는 건물과 갖가지의 조형물, 그리고 시장바닥을 방불케 하는 현수막으로 꽉 차 있어 답답하고 번잡스럽다 못해 짜증이 나려 한다. 괴물처럼 거대한 건물이나 조형물이 눈앞을 가려 산천과 조화를 이루어 자연미가 물씬 풍겨야 할 곳이 문화 결핍의 집단수용소 같은 모습을 이루고 있다. 승속을 막론하고 문화생활의 변화에 따라 한 사람이 차지하는 삶의 공간도 더불어 확대될 수밖에 없었을 테다.

그런데 그곳에서 수행해야 할 승려는 점점 줄어든단다. 과소비 체제로 재단장된 산중의 사원이 우리 시대까지는 어찌어찌하여 유지될지 모른다. 괴물처럼 거대해진 사원을 이젠 유지하기 위해서만으로도 수행은 뒷전이고 사람을 끌어들이기 위해 너 나 할 것 없이 총매진해야 할 것이니까.

그것도 잠시, 그 거대한 체구는 기어이 공동화될 것임을 모르고 있진 않을 테다. 수행을 않으니 교화력은 점점 떨어질 것이고, 먹고 살기위해서는 기복으로 나아갈 테며, 기복의 세대가 지나가면 자연히 경제적 이유만으로도 불교는 이 사회에서 도태의 길로 전락하게 될 예정된 기로로 접어들기 마련 아닌가. 하나를 얻기 위하여 산중은 지키고 키워야 할 고귀하고 아름답던 많은 것을 내어주고만 듯하여 안타깝기 그지없다.

산중이 공동화되는 까닭이 어찌 이 이유에서만일까. 부산 경주를 오가며 확인된 신축 사원만 하더라도 부지기수다. 승려 수는 줄어든다는데 어찌하여 사원은 더 많이 생긴단 말인가. 삼사십 년 전 승려 수가 더 많았던 때도 기존 사원으로써 충분한 수행과 학업 내지는 부족하지 않은 의식주 생활을 영위하였다. 혹자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고리타분한 소리를 하느냐’라고 하겠지만, 그렇다!

정말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정신을 못 차리고 사원 확장공사네 신축이네 하며 온 나라의 사원들이 벌집 쑤셔놓은 듯 어수선하단 말인가. 경제대란이라는 어려운 때 불사를 한다는 비판적 의미가 아니다. 사원을 증·신축하는 의미가 어디에 있는가를 묻고 있다. 사회의 부름에 의해 절을 짓는다고 하겠지만 거기엔 승려 스스로가 어느 누구로부터도 간섭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다.

그러니 대부분의 절엔 스님들이 모여 살지 않는다. 한 절에 한 승려가 살고 있는 현실이다. 문제는 홀로 살면서도 충분한 수행이 되어 신도님들의 교화에 차질이 없느냐는 것이다. 더더욱 신축 사원의 주지가 아직도 모여 살며 서로 탁마 수행해야 하고 한참 공부해야 할 젊은 세대라는 데는 우리 종단의 미래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승가는 집단 수행을 근본으로 하며 총림이라 하여 승려가 수행함에 스스로의 부족함을 도반들의 경책으로 다스려 나가는 체제하에서 원만히 출가 목적을 이룰 수 있다. 여기서 한둘의 특수 상황 즉 홀로 용맹정진하여 지혜의 완성을 이룰 수 있는 수행자를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일승 일사의 문제뿐만 아니라 사원 개체 수의 증가에 의한 피할 수 없는 부조리 또한 간과할 수 없다. 너 나 할 것 없이 서로 절을 지어대니 살아남기 위해 신도 끌어들이기 경쟁이 이곳저곳에서 과열현상을 빚고 있다. 크고 작은 절에서 시민선원 내지는 대학(?)을 개설하여 경쟁적으로 학생(신도)을 끌어 들이기 위해 광고 또는 조직을 통해 신도를 동원하는 경우 등 다양한 방법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러한 불교 포교에는 자격증, 수료증 또는 인가의 남발로 인해 불교 포교의 순수성은 사라져 버린 느낌이다. 그 이면에는 경제적 수익이 깔려 있다는 것이 이유일 테다. 한때 우리는 한국 교회의 그러한 과열현상을 비아냥거린 적이 있다. 우리의 현주소가 그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고려 불교의 쇠퇴가 그러하듯 오늘의 우리 교단의 몰락은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부른 결과로서 훗날 만인에게 기억될 것이다.

야납이 무엇보다도 놀랐던 것은 승려들 스스로의 언행에 있어서다. 경제 부흥과 함께 유행병처럼 일어난 불사에 의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많은 스님들이 언행 중 ‘얼마짜리 불사’ ‘얼마짜리 식사’ ‘얼마짜리 차’ 타는 차, 마시는 차 할 것 없이 모든 것에 얼마짜리가 붙어 다닌다. 이 시대에 계율상의 문제로 돈을 논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님을 모르는 이 없을 테다. 스님들의 의식을 문제시하는 것이다.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이 금전에 있다는 것이 야납으로 하여금 못 견디게 한다. 그 액수 또한 가히 촌사람 간덩이 떨어지기에 충분한 거금이다. 서로가 절을 짓고 주지를 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는 까닭을 애써 찾으려 하지 않아도 야수가 이빨을 드러내듯 스스로가 드러내고 있는 실정이다.

승려의 의식을 하루아침에 어떻게 하자는 것은 아니나 제도적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은 제도적 장치에 의해서 부조리가 일어날 수 있는 사항을 더 이상 방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야납의 생각이다. 한 지역 내에 몇 개의 사원이 들어선다든지 법랍이 일천한 스님의 개인 사찰 운영, 각종 인가 내지는 자격증 남발 등 문제의 소지가 있는 부분을 제도적 통제 속에 두어 우리 승단 내부부터 정화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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