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법 서울대 미학과 교수

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새로운 생활에도 조금씩 적응하고 있습니다. 지난 번 편지를 받고 바로 연락하지 않은 것은 스님이 느끼는 어려움에 대해 무심해서가 아니라 그보다는 스스로 문제를 더 생각해보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긍정의 힘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긍정적이지만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겐 그것은 견딜 수 없는 순진함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세상의 모순을 누구보다 예리하게 통찰했던 마르크스가 종교를 아편이라고 말한 것도 그 때문일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긍정의 힘 못지않게 부정의 힘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다른 종교인들과 달리 부정의 힘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부정의 긍정적인 힘을 인정하자는 것이지요. 부정은 불교식으로 말하면 ‘분별’인데, 나는 부처님의 말씀이 분별을 완전히 부정했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부정이 없는 긍정은 맹목이며 그런 맹목적 순진함을 가졌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미망에 빠져들었는지 여러 번 보았습니다. 그리고 말할 필요도 없지만 실제 자기 자신은 긍정적이지도 못할 뿐 아니라 그 누구보다 부정적이고 영악한 인간들이 사람들을 이용하기 위해 이 긍정성을 선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자신의 부정성을 감출 수 있고 사람들을 더 잘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어느 곳보다 종교계에 이런 사람들이 널리 깔려 있는데, 그것은 바로 종교가 주장하는 긍정성이 이러한 약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질에 있어서의 긍정과 부정, 본질에 있어서의 선과 악을 분명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영악한 자들의 부정성과 사태의 부정성을 보는 자들의 부정성이 구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혼란에서 빠져나올 수도 없고 종교의 진정한 긍정성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분별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분명히 분별해야 합니다. 정신의 발전에 있어서 사태의 부정성을 직관할 수 있는 분별은 필요불가결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에서 분별을 부정적이라고 보았던 까닭은 그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분별은 본질적인 부정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별은 우리에게 취해야 할 바와 버려야 할 바를 알려주지만, 그 자체가 우리를 행동으로 이끌지 못합니다. 그래서 대개 분별은 분별 자체에만 머물게 되고 그러다보면 분별은 점차 부정적인 것으로 변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타인 또는 사태의 잘못을 분별하는 것이 나의 올바른 행동을 위한 지침이 되어야 하지만, 분별이 사태의 외적인 면에 고착되다보면 분별은 분별을 위한 분별로 변질되어 결국 부정적인 것이 되어서 그 자체에서 긍정적인 힘을 살려낼 수 없게 됩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일정 정도 왜곡이나 오해를 불러왔음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어쩔 수 없이 긍정성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실성은 말이 아니라 실천 속에 담보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 힘을 잃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더 힘써야 하는 것은 이 분별을 긍정적인 것으로 전환시키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분별이 아니라 의지이며, 의지는 부정적인 것보다 긍정적인 곳에서 더 잘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달라이라마가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일견 화를 내는 것이 우리를 지켜주고 힘을 주는 것 같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고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힘을 주는 것은 자비라는 말씀은 이 점을 깊이 체득한 사람의 말씀인 것 같습니다. 긍정적인 힘을 기르기 위해 달라이라마가 지적한 것처럼 자비심을 기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겠고, 더 철저하게 분별을 관철시켜 분별 스스로 분별의 한계를 자각하게 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잘못되고 부당한 이 세계를 도대체 어떻게 용서하란 말인가.” 정말 어렵고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적당히 얼버무리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으로 너의 잘못도 용서하고 나의 잘못도 용서하면서 어설프게 일체의 분별을 다 부정해버리는 그런 식의 용서가 아니라, 철저하게 사태를 자각하면서 더 이상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그런 용서를 해야만 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그러기 위해 우리는 먼저 자기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분별은 자아의 상을 한정시킨다는 또 다른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태의 부정성을 보는 분별의 힘은 자연히 자신에게도 적용되어 자신이 용납할 수 있는 긍정적인 부분만 자아로서 정립하고 그 외의 것들을 무의식 속에 은폐시켜 버립니다. 분별의 시선은 일견 타인의 잘못에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더 심각하게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차단하고 자아를 선한 자로서 강화시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자신에 대한 분별을 먼저 버려야 하며 더 깊이 자신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게으르면 게으른 대로, 못나면 못난 대로, 수행을 잘하지 못한다고 생각되면 또 그런대로 그냥 그대로 사랑해주고 위로해주고 매일매일 용기도 주고 그러다 보면 조금씩 조금씩 더 깊은 내면으로 접근하게 되리라 생각되는데, 스님 생각은 어떤지.

때로 너무 척박한 환경은 이런 노력조차 해 볼 수 없을 만큼 우리를 고갈시켜 버리기 때문에 나의 말이 무리한 요구일 수도 있겠지요. 나 역시 이곳에 온 뒤에야 아주 오래전에 마음에 맺혀 있었던 것이 저절로 해소되는 것을 느꼈으니까요. 수행을 위해 좀 더 부드럽고 호의적인 환경이 필요한 것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비록 스님이 가지고 있는 예민한 정신 때문에 현재 괴롭고 힘들더라도 순진하게 맹목적인 사람들이나 순진함을 가장하는 영악한 자들보다 본질적으로 더 긍정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변함이 없으며, 그리고 그 부정성이 진정한 발전의 도상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에, 또한 무엇보다 모든 것이 인과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에 스님의 수행이 결국 성취되리라 생각합니다.

병을 잘 이겨내면 더 건강해지고 어려운 시기를 잘 지내면 더 잘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다행스러운 것은 그래도 바르고 순수한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이지요. 그러니 조금만 더 참고 견디길 바랍니다.
건강히 잘 지내기를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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