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성 경희대학교 철학과 교수

불교는 한반도에 들어와서 무엇을 했을까?

인도는 흔히 부처님과 간디의 땅이라고 불린다. 이 두 사람은 지혜와 자비 그리고 비폭력을 세상에 가르쳤다. 하지만 부처님과 간디를 낳은 인도에서도 무지와 폭력의 역사가 있다. 부처님은 갖가지 생명들이 무지와 폭력으로 고통을 당하는 것을 목격했고, 자비심으로 출가하여 깨달아서 가르침을 폈다.

오늘날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배우고, 불교에 대해 논문도 쓰고, 불교라는 이름으로 갖가지 행위를 한다. 그래서 불교 문화, 불교학, 불교 문학, 불교 미술, 불교문화재, 조계종과 같은 말도 생겨났다. 그런데 불교와 관련된 다양한 활동은 특정 개인이나 특정 기관의 생존이라는 목적을 넘어서서 무엇을 하자는 것일까? 불교가 4세기경에 한반도에 들어온 이래 한국인은 좀 더 지혜롭고 좀 더 착해졌을까?

장아함의 《소연경》에 따르면, 중생은 출신 성분과 관계없이 흔히 십악(十惡)을 범한다. 십악에는 살생, 훔치기, 음란, 기망(欺妄), 양설, 악구(惡口), 기어(綺語), 간탐(컟貪), 질투, 사견(邪見)이 속해 있다. 기망은 속이는 일이고, 양설은 양쪽에 다니면서 이간질하는 일이고, 악구는 악성 댓글과 같은 것이고, 기어는 진실 없이 교묘하게 표현된 말이고, 간탐은 인색하고 탐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생이 십악을 범하는 것은 참선을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석가의 제자 석종(釋種)은 별종이 아니라, 역사를 내려오다가 망각된 선(禪)의 전통―출가 수도하고 명상을 즐긴 브라만종의 정신―을 회복하고 계승하려고 했던 사람들이다.

십악을 종종 범한다는 점에서 고대 인도인이나 현대 한국의 시민·중생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선정이나 명상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예전 인도 사람보다 오히려 오늘날의 한국 사람은 더욱 사나워졌을 가능성이 높다. 정보화 사회에서 시청각 자극은 더욱 강해지고 교묘해지고, 자극에 노출된 시간은 훨씬 더 길어졌기 때문이다. 출가 수도와 선정의 마지막 목표는 물론 열반이다.

열반과 자비의 불가능성

부처님의 제자 사리불(舍利佛)은 열반을 “탐욕이 영원히 없어지고, 분노가 영원히 없어지고, 어리석음이 영원히 없어진 상태(貪慾永盡 瞋癡永盡 愚癡永盡 是名涅槃)”라고 규정한 다음,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팔정도를 실천해야 한다고 했다(잡아함 《염부차경》).

여기서 말하는 탐욕은 성욕, 소유욕, 권력욕, 명예욕 일체를 포괄하는 것이고, 분노는 몸, 입, 생각으로 행하는 일체의 혐오감, 미움, 증오심, 공격성을 포함한다. 그런데 탐욕과 분노의 원인을 완전히 알아서 그것들을 다 없앤 사람이 우리 사회에 몇 사람이나 될까? 그래서 열반은 일반 시민·중생에게도, 대다수의 불자에게도 아주 높은 이상(理想)이다.

불교가 종종 가르치는 무량의 자비심이나 무한한 마음 같은 것 역시 고상한 윤리적·종교적 목표이지만 하나의 이상이다. 《숫타니파타》에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을 목숨 바쳐 구하듯, 이와 같이 모든 생명[有情]을 위하여 자애로운, 한량없는 마음을 닦게 하여지이다.”라는 게송이 있다(149). 그런데 시민·중생 보살님 가운데 다른 인간이나 인간 아닌 다른 생명을 하나뿐인 아들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가 자신을 포함한 시민·중생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삼독심을 영원히 없애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감소시키는 것밖에 없다. 즉 분노나 폭력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줄이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 사회는 정치, 경제, 종교, 교육, 법률 등을 통해서 폭력을 감소하기 위해서 노력해 왔으므로, 불교만이 폭력을 감소하려고 했다고 할 수도 없다.

자연 상태에 있는 개인 간의 폭력을 극복하기 위해 괴물 같은 국가를 세우려고 했던 토마스 홉스의 사상에서부터, 국가와 법률이 낳는 구조적 제도적 폭력에 대항하는 투쟁에 이르기까지 모두 폭력을 줄이려는 노력의 일부였다. 자크 데리다와 같은 프랑스 철학자는 폭력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고, 우리에게 남은 것은 폭력의 경제학밖에 없다고 했다.

불교학자들은 열반, 해탈, 자성청정심 그리고 무량한 자비심에 대하여 열심히 연구한다. 하지만 그것들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고 논하는 것은 현실에 적합하지도 않고 실효성도 없다. 우리의 불교 연구는 고원한 이상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시민·중생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 중생제도라는 말이 현실성을 얻는다. 시민·중생이라는 말도 중생이라는 단어에 현실성과 구체성을 부여하기 위함이다. 제도해야 할 중생이 있다면 열반과 십악행 사이에 있는 시민이나 국민이 아닐까.

돈오돈수와 돈오점수 간의 논쟁이 시민·중생에게 아주 비현실적인 것으로 들리는 이유는 그것이 그들과 별로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말하는 깨달음을 성취한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 숫자는 그 담론에 참여하는 사람 수보다 더 적을 것이다.

탐진치가 영원히 없어진 상태가 열반이라면 그것은 오늘날의 시민·중생에게 불가능한 이상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열반의 존재를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열반 없이는 부처님도 불교도 없어질 것이고, 인간이 행하는 갖가지 행위를 가늠할 수 있는 표준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열반이라는 불가능성은 변혁의 가능성을 향하여 우리를 개방시켜 준다.

이와 같은 이상의 불가능성은 변혁의 가능성을 보여주지만 이상은 아주 높은 곳에 존재한다는 점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열반에서는 멀고 십악에는 가까운 시민·중생, 국민·중생의 폭력성(국가폭력까지 포함하여) 같은 것을 염두에 두고 불교를 연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한낱 발 부리조차 보지 못하는 중생으로 전락하고 만다. 불교학이나 불교문학 전공자들 그리고 출가 수행자들이 혹시 개인의 생존을 도모하면서도 중생을 구제하려고 할 때, 반드시 다음과 같이 자문해야 한다.

“불교는 한반도에 들어와서 중생의 십악을 어느 정도 감소시켰을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불교는 무슨 소용이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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