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와 민속의 만남

1. 머리말

가면극이란 연희자들이 각 역할을 나타내는 가면을 쓰고 노는 전통연희의 종목 중 하나이다. 현재 가면극 용어로는 탈춤, 탈놀이, 탈놀음이라는 명칭이 혼용되고 있고, 지역에 따라서 산대놀이(서울, 경기도), 야류(野流, 경상남도 동쪽), 오광대(五廣大, 경상남도 서쪽) 등 여러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탈춤이나 탈놀이, 탈놀음보다는 가면극이 문학과 연극의 용어로 적당하고, 여러 지역의 것을 통칭하기에도 적당하므로, 본고에서는 가면극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1)

한국의 가면극은 크게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과 마을굿놀이 계통 가면극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중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은 조선시대 궁중 나례와 환궁행사에 동원되었던 경중우인들이 연행하던 가면극이다.2) 지역적으로는 서울 근교인 애오개(아현)·사직골·구파발·녹번 등을 가리켰다. 이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 경기도의 양주별산대놀이와 송파산대놀이, 황해도의 봉산탈춤·강령탈춤·은율탈춤, 경상남도의 수영야류·동래야류·통영오광대·고성오광대·가산오광대 등이다.

각종 가면극 채록본을 살펴보면 등장인물 중 승려 역할은 가면극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봉산탈춤에서는 ‘팔먹중과장’이 단독으로 존재하고 있고, 양주별산대놀이와 송파산대놀이의 많은 등장인물들은 자신이 ‘중[僧]’이라고 밝히고 있다. 승려3)가 등장하는 과장을 살펴보면 양주별산대놀이(김지연본)에서는 전체 13과장 중 9개, 송파산대놀이(이병옥본)는 12과장 중 9개, 봉산탈춤(임석재본)은 7과장 중 4개, 강령탈춤(임석재본)은 10과장 중 5개, 은율탈춤(이두현본)은 6과장 중 3개가 등장하는 등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한국 전통 가면극에 나타나는 불교적 등장인물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특히 현재 전승되고 있는 중부 지방 가면극의 상좌와 노장, 팔먹중과장의 연행양상과 그 인물들의 성격과 의미에 대해 살펴보겠다.

2. 가면극에 나타난 불교적 등장인물

양주 별산대 놀이의 상좌

1) 상좌

산대놀이와 해서탈춤에서 상좌는 흰색 장삼에 붉은색 가사를 걸치고 머리에 흰 고깔을 쓰고 등장한다.

상좌는 원래 4명이 등장하여 사방을 향해 축귀의식무(逐鬼儀式舞)를 추며 놀이판과 마을을 정화시킨다.

현재 연행되는 가면극에서 상좌의 등장인물 수를 보면 봉산탈춤에 4명, 강령탈춤과 송파·양주산대놀이에는 2명, 은율탈춤에는 1명이 등장한다.

이는 사방을 정화시키는 4명의 의식무가 점차 2명, 1명으로 축소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양주별산대놀이에서는 첫째 상좌가 등장해서 마당 중앙에서 합장 재배하고 4방위를 향해서 차례로 사방치기춤을 춘다.

이어서 깨끼춤, 거드름춤, 팔뚝잡이춤을 추며 둘째 상좌도 동일하게 진행한다. 봉산탈춤에서는 상좌 4명이 첫 마당에 흰 장삼에 붉은 가사, 흰 고깔을 착용하고 먹중에게 업혀 한 사람씩 등장한다.

봉산탈춤의 4상좌
그리고 영산회상곡(靈山會上曲)4)에 맞추어 두 사람씩 동서로 갈라서서 서로 엇바꾸며 화려한 춤을 춘다.5)

원래 상좌는 사승(師僧)의 대를 이을 여러 제자 가운데서 상위의 승려로, 가면극에서는 노장을 보필하는 승려이다.

전통 가면극에서 노장이 풍자와 희롱의 대상이 되고 먹중이나 옴중이 비속한 승려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데 비해, 상좌는 가면극이 시작됨을 알리면서 탈판을 정화시키는 주체로 등장한다. 근래에는 여자가 배역을 맡아 여승의 승무로 진행되고 있다.

2) 팔먹중

우리나라 가면극에 등장하는 팔먹중은 여덟 명의 먹중[墨僧]이라는 뜻으로, 강령탈춤·봉산탈춤·송파산대놀이·양주별산대놀이·은율탈춤 등에 등장한다. 의식무의 성격이 남아 있는 팔먹중의 등장 부분에서 재담을 늘어놓으며 판을 흥겨운 분위기로 만드는 모습이 가장 큰 특징이다.

봉산탈춤에 등장하는 팔먹중 중 둘째 먹중
이 중 봉산탈춤의 팔먹중은 여덟 명의 등장이 모두 두드러진다. 팔먹중의 탈은 붉은색 바탕에 얼굴 전체에 7개의 커다란 혹이 있다. 특히 머리에 있는 혹은 뿔과 같이 돌출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귀면형(鬼面形)의 느낌을 준다. 복색은 한삼이 달린 화려한 비단 더그레를 착용하며, 손에는 버드나무 생가지를 들고 등장한다. 제2과장 팔먹중춤의 제1경 먹중춤에서는 먹중들이 한 명씩 등장하여 호기 있게 풍류를 과시하며 나중에 여덟 먹중이 함께 신명 나는 춤을 춘다.

봉산탈춤에서 먹중은 자신이 산중에 거주하지만, 스스로 풍류를 좋아하는 인물임을 밝히며 경우에 따라 오입쟁이임을 과시하고 있다. 이처럼 팔먹중은 우리나라 가면극에서 귀면형의 가면에 화려한 복식을 착용하고 빠르고 호방한 춤을 추는 모습으로 등장하여 벽사의식무의 성격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제2과장 팔먹중춤 中 〈제1경〉 먹중춤

첫째 먹중 : [한삼(汗衫)이 달린 붉은 원동6)에 남색 소매를 단 더거리를 입고 큰 방울을 무릎에 달고 버드나무 생가지를 허리 뒤쪽에 꽂고 달음질하여 등장하다 쓰러진다. 얼굴을 두 소매로 가리고 누운 채로 타령곡에 맞추어 발끝부터 움직이는 동작을 시작한다.

겨우 전신이 움직이면 좌우로 삼전삼복(三傳三伏)하고, 네 번 만에 간신히 일어서다가 쓰러지나 끝내 일어서서는 두 팔로 얼굴을 가린 채로 오른편을 살피고 왼편을 살핀다. 턱 앞에 모은 양소매를 머리 위에서 만(卍)사위7)로 휘저으면서 전신을 격렬하게 부르르 떤다. 그리고 비로소 얼굴을 가린 소매를 떼고 괴이한 붉은 가면을 관중에게 처음 보인다. 재비의 타령곡이 한층 더 빨라지면, 팔을 휘저으며 한쪽 다리를 쳐드는가 하면, 한편 소매를 외사위로 휘저으면서 매우 쾌활한 깨끼춤을 추면서 탈판을 휘돈다.]

둘째 먹중 : (달음질하여 등장. 첫목의 면상을 한삼자락으로 탁 치면 첫목은 아무 말 없이 힐끗 뒤돌아다 보고 퇴장한다. 전에는 복숭아 나뭇가지로 쫓았다고 한다. 달음질하여 장내를 한 바퀴 돌고 탈판 가운데에 서서 좌우를 돌아보고) 쉬이이! 아앗쉬! 아앗쉬! (반주 멈춘다) (이하 팔목의 등·퇴장하는 방식은 같다.) 산중에 무력일(無曆日)하여 철 가는 줄을 몰랐더니, 꽃 피어 춘절(春節)이요 잎 돋아 하절(夏節)이라. 오동낙엽(梧桐落葉) 추절(秋節)이요. 저 건너 창송녹죽(蒼松綠竹)에 백설이 펄펄 휘날리니 이 아니 동절(冬節)이냐. 나도 본시 강산오입(江山誤入)쟁이8) 로 산간에 묻혔더니, 풍류(風流)소리에 한 번 놀고 가려던…… 〈백수한산(白首寒山)에 심불로(心不老)……〉 (타령곡에 맞추어 춤을 춘다. 한참을 추다가) 쉬이이. (반주 그친다.) 수인사(修人事) 연후에 대천명(待天命)이요 봉제사(奉祭祀) 연후에 접빈객(接賓客)이라 하였으니 수인사 들어가오. 〈낙양동천 이화정(落陽洞天 梨花亭)……〉(타령곡에 맞추어 한참 출 때, 셋째먹중이 등장하여 면상을 탁 치면 놀라서 퇴장한다.)
(중략)

여덟째 먹중 : (전과 같음) 소리 좇아 내려가니 풍류정이 분명키로 한 번 놀고 가려던…… 〈청산녹수(靑山綠水) 깊은 골……〉 (춤) 쉬이, 수인사 연후에 대천명이요 봉제사 연후에 접빈객이라 하였으니, 수인사 한 마디 들어가오…… 쉬이 아니야아. (춤과 반주 멈추고 다른 먹중들을 부른다.)
먹중들 : 그래애. (먹중 일곱이 일제히 등장하여 새면 앞에 일렬로 차례로 선다.)
여덟째 먹중 : 우리가 본시 먹중으로 이곳에 당도하여 좋은 풍류정을 만났으니 다 같이 뭇동춤을 추는 것이 어떠냐?
먹중들 : 오오냐아. (일제히 대답하고 불림도 다 같이 한다.) 〈낙양동천 이화정……〉(일제히 장단에 맞추어서 뭇동춤을 추면서 장내를 한 바퀴 돌고 퇴장한다.)9)

봉산탈춤의 팔먹중들이 다 같이 춤추는 장면

이와 같이 팔먹중은 원래 놀이판에 등장하여 악귀를 내쫓는 벽사의 춤을 추던 존재였다. 경치 좋은 곳에 풍악이 울리고 한량들이 모여 노는 풍류정(風流亭)을 만나면 춤을 추고 싶은 충동을 그대로 발산하고 구경꾼들에게 자신의 춤 솜씨를 자랑하는 인물로 나타난다.

한편 여덟 명의 먹중들이 한 명씩 차례로 등장했다가 퇴장하는 극적 형식에서 나례(儺禮)의 구나(驅儺)와 일치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먹중들이 놀이판에 등장해 자기보다 먼저 나왔던 먹중의 얼굴을 복숭아나무 가지나 버드나무 가지로 때려서 쫓는 동작을 하면 그 먹중은 쫓겨서 놀이판을 나간다. 여기서 복숭아나무 가지나 버드나무 가지는 벽사의 기능을 가지는 것으로 해석된다.

궁중이나 민간의 나례의 구나 의식에서 흔히 복숭아나무 가지로 악귀를 쫓았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귀면을 쓴 여덟 명의 먹중들이 차례로 등장하여 자기보다 먼저 나왔던 먹중을 복숭아나무 가지나 버드나무 가지로 때려서 내쫓는 극적 형식은 나례에서 귀신을 쫓는 일반적인 구나 형식과 맥락을 함께하고 있다.10)

이에 대해 정형호는 팔부중의 불법 수호신과 방위신 성격이 팔먹중에 반영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11)

팔먹중은 불법을 수호하는 여덟 신장(神將)인 천중(天衆)·용중(龍衆)·야차(夜叉)·건달바(乾흜婆)·아수라(阿修羅)·가루라(迦樓羅)·긴나라(緊那羅)·마후라가(摩?羅迦) 등 팔부중(八部衆)에서 유래한 것으로 상정할 수 있다. 팔부중 중에서 팔관회에 천(天)과 용(龍), 기악에 가루라, 18세기 산대놀이에 야차가 등장한다는 점을 증거로 들며 이들이 우리나라 현존 가면극에 팔먹중으로 수용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팔부중이 가무와 밀접한 관련을 지닌 것은 팔먹중이 승려의 신분이라고 자신을 밝히면서도 놀이를 즐기는 풍류쟁이이자 오입쟁이의 성격을 지닌 인물로 나타나는 것과도 연관이 있다. 봉산탈춤과 강령탈춤 등의 팔먹중 과장에서 여덟 명의 먹중들이 차례로 등장해 거들먹거리는 춤을 추면서 퇴장하는 모습은 벽사의식무적 성격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 본산대놀이 가면극의 팔먹중 과장이 초기의 형태에서는 불교적 색채가 짙으면서도 팔먹중의 각각의 성격이 구분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의 세속화와 기층 집단의 불교 수용 양상이 변화하면서 고승인 노장이 비하되고 불법 보호신 격인 팔부중의 성격이 세속화·비속화되는 양상을 보였을 것으로 유추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팔부중은 팔먹중으로 그 역할과 성격이 약화되어, 조선후기의 가면극에 풍류를 즐기는 한량의 모습으로 신명을 돋우고 역동적인 춤을 추는 인물로 형상화된 것으로 보인다.

3) 노장

승려는 원래 번뇌를 씻고 불도를 닦는 존재이지만, 전통 가면극에서는 비속한 인물로 등장하여 사회 풍자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현재 대부분의 가면극에서 노장은 파계승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양주·송파산대놀이, 봉산·강령·은율탈춤에는 노장이 놀이판에 와서 소무를 유혹한 후에 이를 빼앗으려는 취발이와 격렬하게 대항한다. 이때 노장은 정상적인 승려이기를 포기하고 결국 취발이의 힘에 밀려 소무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한다.

조선시대는 국교가 불교에서 유교로 바뀌면서 가면극에서 파계승적 요소가 짙은 노장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기이다. 이 중에서 만석중 놀이 발생 설화와 관련하여 노장 과장의 생성 배경을 엿볼 수 있다. 유득공의 《경도잡지》에 의하면 조선 나례도감에서 연행한 연극은 산희(山戱)와 야희(野戱)가 있으며, 산희는 인형극이고 야희는 가면극으로 추정된다. 산희에 해당하는 만석중놀이의 유래에 대해 김재철은 《조선연극사》를 통해 다음과 같은 설화를 전한다.

송도 명기에 황진이가 있었으니, 그는 천하의 절색이다. 그는 당시 유명한 중 지족 선사의 마음을 시험하여 보았다. 지족 선사는 30년래 면벽(面壁)으로 거의 생불이 되다시피 했으나, 그동안 절에서 재를 올릴 제 기원자한테서 쌀을 너무 많이 받았기 때문에 만석중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그 만석중 지족 선사는 진이 때문에 일조에 도가 부서지고 말았다. 그래서 미인 앞에 힘이 없고 축원자한테서 많은 쌀을 뺏은 지족 선사를 풍자하기 위하여 만석중놀이가 발생하였다.12)

김재철이 인용한 설화는 조선의 명기(名妓) 황진이가 지족 선사를 유혹하여 파계시켰다는 내용이다. 이와 같이 미녀가 고승을 유혹하여 파계시키는 설화들이 노장 과장 형성의 배경이 되었을 것이라고 보인다.

부분의 전통 가면극에서 노장은 불제자로서 종교적인 근엄함을 지닌 외형적 모습을 지니고 춤을 추며 놀이판에 등장하지만, 곧 젊은 여자인 소무를 탐하고 지키려는 세속적 욕구를 지닌 인물로 변신하면서 신분을 이탈하고 정도에서 벗어난 이중적인 인물로 형상화된다. 이처럼 가면극에서 드러난 노장의 일탈은 조선 후기 승려들의 세속화를 투영하고 있다.

별산대놀이와 해서탈춤에서는 파계승 과장인 노장 과장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노장, 소무, 먹중, 취발이, 신장수, 원숭이가 등장한다. 노장 과장은 노장이 파계하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먹중들이 노장을 놀이판으로 끌고 나와 욕보인다.

먹중 1 : (노장 쪽을 가리키면서) 저 동편을 바라보니 비가 오실랴는지 날이 흐렸구나.
먹중 2 : 날이 흐린 것이 아니다. 내가 자서히 들어가 보니 옹기장사가 옹기짐을 버트려놨더라.
먹중 3 : 내가 이자 자서히 들어가 본즉 숯장수가 숯짐을 버트려 놨드라.
먹중 4 : 내가 이제 자서히 들어가 본즉 날이 흐려서 내명(큰 구렁이)이가 났더라.
먹중 5 : 사실이야 대명이 분명하더라.
먹중 6 : 대명이니 숯짐이니 옹기짐이니 뭐니뭐니 하더니, 그것이 다 그런 게 아니고 뒷절 노(老)시님이 분명하더라.13)

인용문과 같이 먹중들은 노장의 정체를 계속 반복해서 확인한다. 먹중들은 ‘자기들이 자세히 살펴보니 노장이 흐린 날씨, 옹기짐, 숯짐, 대망이로 보인다’고 하다가 결국 그것이 노장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먹중들과 노장 사이의 정체 확인 형식의 극적 전개를 통해 노장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다.

검은 가면과 짙은 회색의 칡베 장삼을 착용한 노장은 어둡고 부정적인 대상물로 비유된다. 계율과 욕망 사이에서 방황하던 노장은 먹중들이 데려온 소무에게 미혹되어 파계를 하며 결국 무너지는데, 소무를 차지하기 위해 승려의 상징인 염주를 소무에게 주는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소무를 차지한 노장은 흥겹게 춤을 추고 신장수를 불러 소무에게 신을 사 준다. 하지만 신장수를 위협해 쫓아 버리고 신 값을 떼어 먹으며, 이때 취발이가 등장해 노장에게서 소무를 빼앗으려고 한다. 노장은 소무를 빼앗으려는 취발이와 싸움을 벌이지만 술 잘 먹고 춤 잘 추고 힘이 장사인 데다 돈도 많은 취발이에게 패해 쫓겨나고 만다. 취발이는 노장을 힘으로 내쫓고 금전으로 소무를 유혹해서 차지한 후 아들을 낳는다.

이처럼 신체적·경제적·성적인 힘을 가진 취발이를 통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근대적 민중의 전형을 엿볼 수 있다. 노장 과장은 노장이 지닌 종교적 관념의 허무함을 비판하고 먹중이나 취발이가 지닌 세속적 사고의 중요성을 내세우고 있다.14)

강령탈춤 제10과장

노장 : (긴 영상장단이 반주되면 엎드린 몸을 서서히 움직이며, 얼굴을 가렸던 부채 위로 사방을 둘러본다.) (소무와 노장은 말을 일체 하지 않고 춤으로만 모든 감정 동작을 표시한다. 노장은 소무를 얼리는 춤을 춘다.)
취발이 : (허리에 큰 방울을 차고, 손에는 잎이 많이 붙은 버들가지를 들었다.) 어캬! 어캬! 어캬! (하며 갑자기 뛰어 들어 오면서 소리친다.)
노장 : (소무를 자기 뒤로 숨긴다.)
(중략)
노장 : (한편 소무를 부채로 가리고, 한편 취발이를 장삼 소매로 후리쳐 때려 내쫓는다.)
취발이 : 이이쿠! (하며 뒤로 물러선다.)
악공들 : 중놈이 사람얼 친다아-
취발이 : 이이쿠! 아이쿠! (하며 노장을 향하여) 야 이 중놈아! 말 듣거라. 중이라넌 것이 절간에 들어 업디어 미투리 짝이나 삼고 불공이나 숭상허고 상좌 뼉이나 한 판이면 그만이지, 이런 사가(私家)에 나려와서 저런 미인얼 다리고 노니 너겉언 쥑일 놈이 어듸 있냐? 이번에 내 들어가서 당장에 내 쫓갔다. (노래조로)
좌두견(左杜鵑) 우두견(右杜鵑) 녹수청산(綠水靑山) 문두견(問杜鵑). (타령장단에 맞추어 춤추며 나가서 손에 든 나무가지로 노장을 탁 친다)
노장 : (얻어맞고 쫓겨나 퇴장한다.)15)

위의 인용문에서와 같이 소무와 함께 있는 노장을 보고 ‘중이면 절간에서 불도에나 힘쓸 일이지 속가에 내려와서 미인을 데리고 노느냐’고 꾸짖는 가면극 속의 취발이는 당시 조선 후기 민중의 비판적인 입장을 대변하며 노장을 희화화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짚어봐야 할 것은 왜 승려들이 수행처인 절을 떠나 속세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는지, 왜 유랑걸식하면서 장사를 하거나 취처(娶妻)하여 가족을 이룰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문제이다.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불교 정책과 승려의 지위에 관한 검토가 필요하다.

조선 정부는 시기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었지만 억불정책으로 일관하였고 속인의 출가, 사찰의 건립, 승려의 신분, 사찰의 경제 기반에 대해 여러 가지로 억압하였다.16) 속인의 출가는 도첩제에 의해 제한되었고 성종 대에 이르러서야 폐지되었다. 또한 태종 대에는 사원의 신축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기존의 사찰도 242개소만을 남기고 모두 폐사시키는 등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사찰의 수는 급격히 감소하였다.

또한 연산군 대에는 선교양종을 폐지하고 도성에서 사찰과 승려를 모두 축출함으로써 산간불교화하였고, 중종 대에는 승과를 폐지함으로써 승단과 승려는 사회적 지위를 완전히 잃게 되었다. 이후 부역승들에게 승인호패를 나누어주는 구제책이 있었고 명종 대에 잠시 도첩제가 부활하였지만, 같은 왕 21년에 다시 폐지된 이후 법적으로 승려가 되는 길은 완전히 막혀 버렸다.

한편 사원의 경제적 기반에 대한 와해 작업도 광범하게 이루어져서, 사원에 소속된 노비와 토지를 환수하여 속공하는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불교는 인적·물적·이념적 기반에 심한 타격을 입었다.17) 이러한 상황에서 다수의 승려들은 절을 떠나 속세를 떠도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형편에 처하게 되었다.

조선 전기에 승려는 크게 세 부류로 나뉘었는데 “먹는 것에 신경 쓰지 않고 무상한 곳에 머물러 승당에서 마음을 닦는 이가 상품이고 법문이나 강설하고 말을 타고 돌아다니는 자가 중품이며, 재를 올리거나 상가를 찾아다니며 옷과 음식을 얻으려는 자는 하품”18)이었다.

이들 가운데 열에 아홉은 속공되어 국가의 잡역에 종사했으며 대체로 하품에 속하는 염불종의 승려들이었고 그 일이 고되고 익숙하지 않았던 탓에 부역에서 도망쳐 유리걸식하기 일쑤였다. 이러한 양상은 비단 하품승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상품이나 중품에 속하는 승려들도 사찰이 폐사되면 어쩔 수 없이 사설암자에 거처하거나 유랑걸식할 수밖에 없었다.19)

조선 전기에 1,658개에 이르던 사찰의 수는 조선 말기에 1,283개로 줄어들었다.20)

이를 통해 폐사한 이후 사찰에 거주하던 중들의 거취를 짐작할 수 있다. 국가의 억불정책 때문에 원래 사찰에 속했던 다수의 승려들이 산중으로부터 내려와 세속화하는 길을 걸었을 뿐만 아니라, 양인 가운데서도 다수가 과중한 부역과 조세의 부담을 피하기 위해 승려로 사칭하고 민간을 떠돌았으며 이들 가운데 일부는 사당패가 되어 생계를 이어갔다.21)

은율탈춤에 등장하는 노장과 소무.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전통 가면극에 등장하는 승려들이 왜 산간의 절을 떠나 유랑하는 모습으로 풍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상품에 속했을 노장, 그를 시봉하던 상좌, 하품에 속했을 옴중과 먹중은 자유의지보다는 국가의 억불정책으로 인한 사사혁파와 인적·물적 기반의 침탈 때문에 하산과 유랑의 길에 나서게 되었다.

이들은 연명을 위해 민간의 불교 수요에 따라 의례를 공급하고 놀이판에 참여하여 가무를 제공하는 한편,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걸식과 매매춘 등의 일탈행위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시 승려들에 대한 민중의 시선은 조선시대의 시정 야담을 모아 엮은 《고금소총(古今笑叢)》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한 사찰의 율법 높은 주지가 여종에게 유혹당하여 파계하는 이야기라든지, 죄를 지어 멀리 귀양 가던 승려가 자신을 압송하던 형리에게 술을 먹이고 도망간 이야기들은 당시 승려들의 도덕적 타락이 심하고 빈번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사회배경 탓에 승려들의 사회적 지위도 낮을 수밖에 없었고 민중들에게도 존경받지 못하며 풍자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가면극 속에서 양주별산대놀이의 취발이가 노장에게 “중놈이 절간에서 ‘천수천원 관자재보살 광대음마 대다라니’나 불르고 있지, 인가에 내려와서 네가 계집 데리고 농탕치니 저거 될 일이야.”라고 힐난하는 대목을 보면 승려를 ‘본색이 수행자이므로 산간에 숨어 수행에만 힘써야 한다.’는 논리로 비판하고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조선사회에서 승려는 국가의 억압 때문에 산간에서 수도생활에 정진하기가 쉽지 않았다. 당시 대다수 승려의 파계는 국가와 지배이데올로기의 강제 때문에 빚어진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원인 제공자인 지배집단은 거꾸로 그들의 파계를 공격하기 일쑤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전통 가면극 속에서 노장의 파계를 비판하는 것은 결국 민중 또한 지배세력인 양반과 같은 모순적 시선으로 승려의 파계를 바라보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만큼 당시 승려의 사회적 신분이 불안정했음을 보여준다.

송파산대놀이에서 노장과 소무들이 함께 춤추는 장면

한편 전통 가면극에서 먹중이나 노장, 완보 등 승려로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이 신명이 과하고, 가무악을 즐길 뿐만 아니라 거기에 능통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정여는 이러한 양상에 대해 원래 사원에 속했던 재승들이 사사혁파 등으로 민간에 내려와 그들의 재주를 살려 승광대 노릇을 하게 되었고, 그들이 민간의 탈놀이에 참여해 연행한 것이 오늘날의 산대놀이가 된 것이라고 언급하였다.22)

이처럼 조선사회의 불교 현실은 전통 가면극에 등장하는 승려들의 모습에 반영되었고 각 인물의 성격도 이러한 바탕 위에서 형성되었다.

노장은 종교적 이상을 추구했던 금욕주의자에서 여색을 탐하는 파계승으로, 먹중과 상좌는 종교적 이상을 거의 포기하고 유희와 생존 본능에 충실한 인물로 형상화되어 놀이판에서 더욱 부각되었다.23)

3. 맺음말

불교는 시대에 따라 큰 변화를 보여 왔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에 의해 큰 시련을 겪었으며, 이에 따라 승려의 양태도 다양화 되었다. 시대 조류는 삼보(三寶)의 하나인 승려에 대해 불도를 닦는 불제자로서의 모습을 약화시켰다. 불교를 수용함에 있어 식자층이 관념적 세계관으로 수용하였다면, 민중은 현실적 세계관으로 받아들였다.

곧 민중은 불교를 해탈이나 열반, 윤회사상에 의한 내세 환상, 자비정신보다는 불교에 민간신앙적 요소를 가미하여 현실 기복적 성격을 더 중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양상은 전통 가면극에서 상좌의 벽사의식무나 주술적 남녀 결합의 모습으로 나타내게 되었다.

한편, 절과 관련을 맺은 비승비속(非僧非俗)의 거사패가 세속적 중의 모습으로 가면극에 수용되기도 하였다. 특히 비속화된 승려를 부정적 인물로 형상화하였는데, 이것은 민중의 시각으로 당시 쇠락해진 불교의 모습을 투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24)

또한 사회가 피폐해지면서 승려라는 신분은 현실적 제약을 벗어나게 해 주는 신분적 도피 수단으로도 이용되기도 하였다. 곧 거사패가 유민(流民)들의 또 다른 삶의 방식이 되면서 그들의 모습이 가면극에 형상화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노장은 성적 욕구가 강하고 놀이정신이 충만한 승려 아닌 승려의 모습으로 그려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가면극에 등장하는 승려는 크게 벽사주재자형(?邪主宰者型), 방위신형, 유랑예인형, 파계승형으로 나누어진다. 벽사주재자형은 상좌와 노장이 사악함을 물리치고 장내 정화 및 마을에 풍요와 안녕을 가져다주는 존재로 등장한다. 4상좌무는 4명의 상좌에 의한 사방무(四方舞)의 성격이며, 노장·소무의 의식무는 1인 사방의식무적 성격을 지닌다. 방위신형은 팔먹중의 집단 등장 부분이다.

불법의 수호신이며 방위신인 팔부중이 오방신장무의 영향을 받아 변용을 일으켜 방위신 격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신명도출의 기능이 부각되고 의식무적 성격의 흔적만이 잔존하고 있다. 파계승형은 소무·취발이와 삼각 갈등을 일으키는 노장이나, 스승을 희롱하는 비속한 먹중 등이 해당된다. 노장을 중심으로 한 파계승은 세속적 욕구를 추구하는 타락한 승려 집단을 묘사하고 있다. 전통 가면극에서는 이러한 파계승을 풍자하며 언어 유희적 대사로 골계미를 나타낸다.

가면극에 나타나는 불교적 등장인물의 이러한 모습은 전승 집단의 성격이나 지역적 특성에 따라 각각 다르게 형상화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노장은 종교적 이상을 추구했던 금욕주의자에서 여색을 탐하는 파계승으로, 먹중과 상좌는 종교적 이상을 거의 포기하고 유희와 생존본능에 충실한 인물로 형상화되어 놀이판에서 더욱 부각되었다.

전통 가면극에 나타난 승려들의 모습은 대부분 풍류를 즐기고 파계를 일삼는 등 퇴폐적인 성격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당시 억불정책에 의해 쇠락할 수밖에 없었던 불교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조선 후기의 현실을 풍자하는 무대이자 솔직한 놀이판이 가면극이었음을 생각해볼 때, 이는 민중들이 바라본 승려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

 

김경나 몽골국립대학교 몽골어과 및 고려대 문화재학과 석사과정 이수. 몽골의 불교의례와 민속에 대해 공부하고 있음. 논문으로 〈몽골 후레 참의 연희양상과 한국 가면극과의 관련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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