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와 민속의 만남

1. 들어가는 말

세시풍속이란 연중 시절에 따라 반복하여 행하여지는 행사와 놀이 또는 의식을 말한다. 오랜 역사와 문화를 지닌 우리는 세계 어느 민족에서도 보기 드문 일 년 사시사철 절기마다 독특한 풍속이 전해오고 있다. 그 가운데에는 함축된 고유 문화와 민족 정서가 담겨 있으며, 특히 명절마다의 놀이와 풍속에서 대동단결과 정서적 순화를 꾀한 조상들의 슬기와 생활의 지혜를 발견한다.

세시풍속은 태음력(太陰曆)을 기준으로 하고 있어, 특히 달의 변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원래 음력은 태양음력을 말한다. 이를테면 순전한 음력이 아니라 계절과 역일(曆日)의 조화를 고려하여 태음력을 가미한 태음력과 태양력의 혼합이다. 따라서 세시풍속은 음력과 양력이 혼합된 태음력을 기준으로 하고 있어 한 해를 기준으로 달마다 배분되어 있는 것이다. 달의 주기성과 변화되는 생산성은 한국의 세시풍속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매 절기마다 상이한 풍습을 만들었다. 이를 세시(歲時)·세사(歲事)·월령(月令)·시령(時令)·절후(節侯) 등으로도 불렀고 근래에는 연중행사라는 말도 쓴다.

우리 선조들은 농경을 중심으로 한 생활이 주였기 때문에 고대 태음력을 모체로 한 세시기의 기강에 따라서 모든 연중행사가 이루어졌다. 의식주의 해결을 위해 계절에 따라, 봄에는 논밭에 씨를 뿌리고 가을이면 열매 맺은 곡식을 거둬들인다. 이와 같은 행사를 반복하는 가운데 풍속이나 관습은 필연적으로 생기게 되는 것이다.

2. 세시풍속의 역사와 종교

한국의 세시풍속 역사는 상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기록된 부여의 영고(迎鼓: 12월)와 관련된 기사가 있다. 즉 “은정월(殷正月) 때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일로 국중(國中)에 크게 모이는데 여러 날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춘다. 이를 영고라 한다. 이때에는 형옥(刑獄)을 중단하고 죄수를 풀어준다.1) 주지하듯이 은정월은 은력(殷曆) 정월을 가리킨다. 하력(夏曆)을 기준으로 하면 겨울 12월이 은정월이다. 부여 ‘영고’를 두고 ‘은정월’이란 단어를 왜 별도로 표기했는가?

이는 부여가 은력을 역법 체계로 사용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을 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부여가 하력의 12월을 새해로 삼는 전통을 지니고 있었음을 은정월로 대체시켜 말한 것일 수도 있다.

결국 부여의 영고(12월), 고구려의 동맹(10월), 동예의 무천(10월), 백제의 천지제사와 사냥, 신라의 신궁제사 등이 추수 감사의 의미를 지닌 한 해의 마무리 세시풍속이라는 종래의 일반적인 해석은 재고되어야 한다. 즉 중국적 세계 질서에 완전히 편입되기 이전에는 독자적인 나름대로의 역법 체계가 존재했을 것이며, 이러한 축제는 한 해의 마무리와 새해의 시작을 축하하기 위한 제사와 놀이로 이어졌다.2)

《삼국사기》의 추석·수리(단오)·유두, 《삼국유사》의 대보름 기록 등은 모두 삼국시대에 이미 세시풍속의 원형들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려 준다. 이러한 전통은 고려시대에 대체로 전승되었으며, 상원의 연등회와 팔관회 같이 불교 행사이면서 동시에 전국적인 세시 행사가 확산되었다.

오늘날의 세시행사로 귀착된 것은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이다. 조선시대 세시풍속의 주기는 농경의 주기와 관련되기 때문에 계절의 분류 역시 농경의 각 주기를 따랐다. 24절기를 기준으로 볼 때 한국의 경우 봄은 양력 2월, 음력으로는 정월부터 시작되었다. 조선시대 세시 행사의 모태가 되는 자료는 조선 후기의 세시기인 《동국세시기》 《열양세시기》 《경도잡지》 등에 잘 반영되어 있다.

이 세시 행사들은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들도 있으나, 대개의 풍속들은 이미 사라졌거나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시대 변화에 따라 세시의 변화도 필연적이므로 오늘날 현대 생활에 알맞게 축소·변형된 것이다.

문화 현상 가운데서 종교는 전파성이 가장 강한 분야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세시풍속에 보이는 특징적인 측면은 불교와 관련된 행사가 왕실 중심으로 연행되었다는 점이다. 태음력 2월 15일(간혹 1월 15일)에 열렸던 연등회, 4월 8일의 석가모니 탄생일, 7월 15일 백중 때 열렸던 우란분재, 그리고 11월 5일(간혹 10월 15일) 개경의 팔관회와 10월 15일 서경에서 열렸던 팔관회가 가장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런 불교 행사는 일반 민(民)의 세시풍속이기보다는 왕실 중심의 것으로 국왕이 주관하거나 참여하는 행사였다. 대표적인 세시 행사중 불교와 관련이 있는 행사만을 계절별로 살펴보기로 한다.

3. 세시풍속과 불교

1) 설날의 법고(法鼓)

설이면 스님들이 법고를 치며 집집을 돌며 염불하며 권선(勸善)한다. 이때 스님들은 떡을 만들어 속가에 주는데 스님이 떡 한 개를 주면 속가에서는 두 개의 떡을 준다. 예로부터 절에서 만든 떡은 마마를 곱게 한다는 속설이 있다. 이 떡을 절 떡[僧餠]이라고 한다.

한편 승려들이 북을 등에 걸머지고 저잣거리에 내려와서 치는 것을 법고(法鼓)라고 한다. 또 모연문(募緣文)을 펴놓고 방울을 울리고 염불을 하면 사람마다 다투어 돈을 던져 준다3)고 하여 이는 화청(和請)이라 불렀다. 스님들이 사찰 운영에 필요한 생활비를 모금하기 위한 한 가지 방안이었을 것이다.

《열양세시기》에 “중들이 제석(除夕)날 밤에 자정이 지나면 인가의 문밖에 와서 ‘재 올릴 쌀을 주시오’ 하고 크게 소리를 지른다. 그러면 수세(守歲)하느라고 모여 앉아 떠들며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이 소리를 듣고 서로 돌아보며 ‘벌써 새해가 다 되었군’ 한다.”4)고 기록하고 있다.

선왕(正祖) 원년에 중들이 서울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한 뒤로는 이 풍속이 없어졌으나 시골에서는 아직도 간혹 이런 일이 남아 있다. 조선조에는 승려들의 도성 출입 금지령으로 서울 장안에서는 승려들이 쫓겨났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동국세시기》 기록의 전반부에는 이 법고 풍습이 성 밖에나 있었다고 했으나, 후반부에는 도성 내에서 상좌중들이 재미(齋米)를 거둔다고 했다.

1920년대 이능화는 도성 안만 왕토(王土)이고 도성 밖은 왕토도 아니고 그 백성도 국왕의 백성이 아니냐고 반문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이 성 밖 추방령은 몇백십 차례나 있었는지 모를 형편인데 지켜지지도 않았으니 가소롭다고 했다5).

절에서는 설 등과 같은 명절이면 부처님께 공양물을 차려놓고 재를 올리는데, 새해맞이 재에 시주하면 그 공덕으로 한 해의 제액초복을 기대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던 것이 정조 대 승려들의 도성 출입 금지령 이후, 일반 마을에서 탁발과 유사한 개념으로 전승되다가 시주승 풍습의 소멸과 함께 근대에는 찾아볼 수 없는 세시풍속이 되었다.

2) 정월 대보름의 어부슴과 적선
어부시(魚鳧施) 또는 어부식(魚鳧食)이라고도 부르는 어부슴 풍속은 정월 대보름에 그해의 액막이를 위해 깨끗한 종이에 밥을 싸서 물에 던져 넣는 것을 말한다. 새해에 운수가 대통하기를 기원하는 가정의 안택(安宅) 행사인 어부슴은 물고기나 오리에게 밥을 베풀어 먹이는 행사이다.

《동국세시기》에 “물의 직성(直星)을 만난 사람은 종이에다 밥을 싸서 밤중에 우물 속에 던져 액을 막는다.6)”고 하였고 《열양세시기》 상원 조에는 “깨끗한 종이에 흰밥을 싸서 물에 던지는 것을 어부시라 한다.”고 하였다.

조선 후기 죽지사(竹枝詞)를 휘갑한 최영년의 《해동죽지(海東竹枝)》에 ‘살어식(撒魚食)’ 행사를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家家粟飯問何爲 집집마다 조밥지으니 무엇하기 위함인가
水直星7)人好捨施 수직성 든 사람 베풀어야 좋다네.
古井無魚猶撒食 옛 우물에 물고기 없어도 오히려 밥 뿌리니
寧開天下放生池 차리리 천하의 방생지 열어 둠이 어떠랴.

정월 보름날에 조밥을 우물 샘에 살포하여 고기더러 먹으라는 ‘어부심’을 노래한 것이다. 당나라 숙종이 천하로 하여금 방생지(放生池)를 파게 하였다. 이 방생 의식은 불교도들 사이에 성행하는 민속의 하나인데, 사람에게 잡혀 죽게 된 생물을 놓아서 살려주는 것으로 살생과 반대되는 것이다.

살생을 금하는 것은 소극적인 선행이고 방생하는 것은 적극적인 선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사찰에서는 불자들이 해마다 일정한 때에 방생을 실현하고자 방생계(放生契)라는 것을 조직하여 방생회(放生會)를 열어 오고 있다. 이 근거는 《금광명경(金光明經)》 4권에 있으며, 행하는 시기는 보통 음력 3월 3일이나 8월 보름이었는데 근래에는 일정한 시기를 정하지 않고 설행한다. 고려 광종(光宗)은 독실한 불교신자였는데 궁중에서 일체 육류 사용을 금하고 식용으로 기르던 동물들을 모두 풀어주게 하는 방생소(放生所)를 설치하기까지 하였다.

어부식 관등놀이에 해당하는 행사가 1930년대에 서울 한강변의 용궁당에서 용궁맞이라는 이름으로 열렸다.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용궁당에 부녀자들이 모여들었다. 무녀들은 소지축원에 여념이 없고, 손자를 동반한 할머니들은 자손의 장수를 빌기 위해 명다리나 명실을 바쳤다. 그리고 작은 배를 타고 용신에게 바치는 공물을 강 속에 던지며 소지(燒紙)를 올렸다. 현재 그 용신당(흑석동 부근)은 없어졌지만 보름이 되면 지금도 한강대교 남쪽 언덕의 큰 나무에는 부녀자들이 명실을 걸고 촛불을 밝히고 있다.

가정의 안녕을 축원하는 민간신앙 의례인 어부슴은 농어촌에서 두루 행하나 특히 어촌과 영동 지역에서 일반화된 액막이 풍속이다. 강원도 속초와 고성 등지에서는 식구의 나이 수대로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한지에 싸고 바다에 넣기도 한다.

화천의 여러 마을에서는 가족의 수대로 밥을 떠서 백지에 싸고 겉에 “조선국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리 ○○○”라고 쓰고 물에 띄운다.

이때 어부슴이 잘 떠내려가면 그해는 운수가 대통하고, 쉽게 가라앉거나 떠내려가지 않으면 불길하다고 여겼다. 이러한 어부슴의 유풍이 화천의 축제인 용화축전 때에 어부식 관등놀이라는 행사로 전승되고 있다. 곧 축전의 전야제에 밥을 싸들고 강가로 나와 밥과 촛불을 띄우면서 소원을 빈다.

이 어부슴은 ‘고시레’풍속과 불교의 ‘방생’이 민간신앙화한 대표적인 예이다. 미물인 물고기나 오리에게 밥을 먹이는 것은 고시레의 유풍이며, 생명존중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방생 정신의 표출이다. 그것은 용궁맞이 때에 강 언덕에서 붕어나 자라를 파는 부인들이 많고 그 물고기를 사서 놓아주기 때문에 방생이라 부르는 예에서도 알 수가 있다. 최근에 방생하는 생물 중에 청 거북이가 우리 재래종 물고기를 없앤다 하여 논란이 있기도 했다.

위의 어부슴과 유사한 풍습으로 정월 대보름날에 그해 신수가 불길한 사람이 액땜을 하기 위해 착한 일을 하는 ‘적선(積善)’이 있다. 다리를 놓거나 다리 대신 가마니나 돌을 넣은 오쟁이 같은 것을 놓음으로써 남을 위해 적선하는 것이다. 이때 놓는 다리를 노디· 노지·노드·노들·노루·노두독·노다리·띄은다리·유둣돌·오쟁이·오장치·오쟁치·오쟁이돌 등으로 부르는데 일종의 징검다리라 할 수 있다. 노두(露頭)나 노두(路頭)라 풀이하기도 한다. 이렇게 다리를 놓는 것을 노드놓기 오쟁이 놓기 오쟁이 액막이라 한다.

선은 제웅을 만들어서 버리는 풍속에서 비롯하였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남녀의 나이가 나후직성(羅?直星)을 당하면 짚으로 인형인 추영(芻靈)을 만드는데 사투리로 이를 처용이라 한다. 머릿속에 동전을 넣고 보름 전날 초저녁에 길에다 버려 액을 없애버린다. 처용의 명칭은 신라 헌강왕 때 동해 용왕 아들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다8).

이러한 풍속은 오늘날에도 전승되었는데, 불교적 적선 의식이 작용하여 남을 위해 착한 일을 함으로써 액을 때우고 그것을 상쇄하려는 풍속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정월 열나흗날 밤이나 보름날 밤에 그해 신수가 나쁜 사람은 남을 위해 적선을 해야 액운을 면할 수 있다고 해서 개천에 다리를 놓거나 유둣돌을 놓았다. 이렇게 하는 것을 월천공덕(越川功德) 또는 월강공덕(越江功德)이라 한다. 또 길이 험하고 비탈길이면 넓혀주고, 가파를 때에는 깎아 평탄하게 만들며 큰 돌이 있으면 치워 놓기도 하니 많은 사람의 편의를 위해서 착한 일을 권장하려는 뜻에서 생긴 습속일 것이다.

이것은 불교의 복전사상(福田思想)의 일환으로 착한 일을 권장하여 복밭을 일구라는 뜻이다. 복전은 《범망경(梵網經)》의 기록에 따르면 ①광로의정(曠路義井) ②건조교량(建造橋梁) ③평치험로(平治險路) ④효양부모(孝養父母) ⑤공경삼보(恭敬三寶) ⑥급사병인(給事病人) ⑦구제빈궁(救濟貧窮) ⑧설무차회(設無遮會) 여덟가지로 복 받을 일을 연초에 하면 그해의 액운을 막을 수 있다는 염원이 세시풍속으로 오늘에까지 연면히 이어지고 있다.

3) 2월 초하루의 부루단지
옛 풍속에 집집이 부루항(扶婁缸)을 두어 새 곡식을 채워서 풍년을 빌고, 제석낭(帝釋囊)에 다는 백반(白飯)을 이바지하여 진동제(陣同祭)를 베풀어서 복록을 빌었다. 이 습속을 읊은 〈제진동(祭陣同)〉이 있다.

扶蔞缸滿祈登퇰 부롯단지 가득채워 풍년들기 빌고
帝釋囊懸祝有娠 제석주머니 매달아 임신하기를 빈다.
年年花餠陣同祭 해마다 꽃떡으로 진동제 지내니
二月春燈降福神9) 이월봄 등잔에 복신이 내린다.

제석(帝釋)은 불교의 제석천(帝釋天)에서 온 것으로 고대 인도에서 최강의 신으로 수미산 꼭대기 도리천을 주재하는 신이다. 4천왕과 32천을 통솔하면서 불법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을 보호하며 아수라의 군대를 정벌한다고 한다. 또 제석천은 불같은 성격을 갖고 있어 일체의 악마를 정복할 수 있다고 하는데, 천계와 지계 역시 그의 수중에 들어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베다 시대의 제석천은 인간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선신으로 여겨졌으며, 동시에 전쟁신, 군신으로서 숭배 대상이었다.

《우파니샤드》 시대가 되면 제석은 아수라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모든 신을 주재하는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는데 불교에 수용되고부터는 범천(梵天)과 함께 호법(護法)의 선신으로 자리를 굳히게 된다. 제석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문헌으로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고기에 이르기를, 옛날 환인[桓因謂帝釋也]의 서자 환웅이 있었는데 항상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세상을 탐내거늘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세 높은 산 중 하나인 태백산을 내려다보니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하였다. 이에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10)

위 인용문대로 일연은 환인이 불교의 제석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왜 불교의 신을 고조선의 조상으로 섬겼는지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 이는 부계 혈통을 하늘에서 구하려는 천신숭배 사상의 흔적일 것이다. 단국신화는 불교의 호법신인 제석이 우리의 국조신화에서 신으로 전승되는 단초를 연 것이다.

《삼국유사》의 제석이 왕의 조부로서 상제 격이었는데 《고려사》에서는 왕 자신으로 그리고 이제는 왕의 자손으로 그 토착화의 양상이 심화되거나 혹은 변형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부계로서의 천신적 성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모계를 필요로 했는데, 이것은 우리 토착신앙에서 그랬을 가능성이 엿보이는 것이다. 불교의 포교적 전략과 함께 외래문화에 대한 한국 토착문화의 유연성을 간파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향이야말로 타 문화를 전용 개작 변형하는 계보적 유형으로 여겨진다.11)

본래 천상의 제석이 지상으로 내려와 여인과 결혼하는 이야기는 신인출현의 전형적인 서사구조이다. 무가의 일종인 〈제석본풀이〉는 제석신의 유래를 노래한 것으로 큰굿의 제석거리나 안택(安宅)과 같은 무의(巫儀)에서 구송되는 서사무가이다.

제석은 우리나라 무속 또는 민속에서 그 신의 개념이 일정하지 않다. 즉 삼불제석(三佛帝釋)과 제석삼불(帝釋三佛)이 혼용되어 포태(胞胎)의 신인 삼신과도 혼동되고 있다. 위에 인용한 〈제진동〉에서 ‘제석주머니를 달아 임신하기를 빈다’는 구절은 그 당시의 기자습속(祈子習俗)을 반영한 것이다.

또한 고사(告祀)·안택 등에서 이 무가가 구송되는 것을 보면 가신(家神)인 성조신(成造神)과도 확실한 구분이 없으며, 제석단지·세존단지·성조단지들의 민간 습속에서 생산의 신인 농신(農神)과도 통용되고 있다. ‘제석단지’는 쌀을 오지단지에 넣어 안방 구석 시렁 위에 얹고 백지로 봉한 형태의 신체(神體)로 조상단지나 시준단지 같은 가택신의 일종이다. 원래 불교와는 거리가 먼 민간의 농경의례에서 온 전승자료인 것이다. 그런데 이능화는 절간의 민속자료로 제석단지와 유사한 사례를 소개하고 있어 흥미롭다.

쌀을 흰 항아리에 담아 루방(樓房)에 안치하고 해마다 가을에 곡식이 익으면 햅쌀을 바꾸어 담고 담겨 있던 구미(舊米)로 백설병(白雪餠)을 만든 다음 소찬(素饌)과 청작(淸酌)으로 신에게 헌공한다. 이때 여무(女巫)가 노래하면서 흠향을 권하는데 이것을 제석거리라 한다. 거리란 가조(歌調)이다. 제석은 주곡신(主穀神)이라고도 하는데 불속에서 나온 말이다. 불사(佛寺)에서는 제석월(除夕月)이면 사중(寺衆)들이 각각 제미(齊米)를 들고 미고(米庫)에 가서 제석신을 위안한다. ‘석제환인위(釋提桓因位)’라는 위패 아래 여러 스님이 삼배를 하고 미고에 쌀을 납고(納庫)시킨다. 원일(元日)로부터 사중(寺中)에 별좌(別座: 齊米를 관장하는 頭僧)가 조석(朝夕)으로 재(齋)를 올릴 때 먼저 석제환인위에 삼배를 행한 뒤에 그 쌀로 밥을 짓는다12).

이를 볼 때 누방에 안치한 항아리는 분명 제석단지일 것이다. 여기서도 제석을 주곡신(主穀神)으로 보는 것이 불속(佛俗)에서 나왔다는 것은 민간의 습속인 제석단지가 사찰 주방신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진도의 제왕맞이에서는 무당이 삼불제석에게 출산이나 아이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고,13) 경남 통영의 무의식(巫儀式) 중에도 제왕맞이와 닮은 제왕풀이가 있다. 아이의 삼칠일이나 백일 혹은 돌을 맞아 무병장수를 기원하면서 지내는 굿을 ‘소굿’이라 하는데 제왕은 여기서도 삼신제석을 가리킨다. 굿상에는 밥과 미역국을 각각 세 그릇씩 준비하는데 삼신에 대한 의례인 것이 분명하다.

2월에 제석님을 모실 때 바가지에 쌀을 담아 부엌의 조왕 옆에 모시는 사례가 흑산도를 위시한 다도해 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둥당기 타령〉으로 불리고 있다14). 그리고 제석을 2월의 내방신으로 간주하는 사례는 가망제석굿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바리공주〉와 함께 우리나라 전역에 전승되는 〈제석본풀이〉는 고대 서사무가의 하나이다. 〈제석본풀이〉는 천신계의 남성신과 지모신인 여성신이 결합하여 새로운 신을 탄생시키는 신화로서 단군·주몽 등의 국조신화와 동궤이다. 그러나 오랜 기간을 전승하면서 불교의 영향을 받아 중과 귀한 집 처녀의 결합으로 서사 내용이 변모되었고, 조선 초에 이르러서는 유교적 윤리관에 따른 합리성의 추구로 딸아기의 부정한 행실과 그 징벌로 내용이 바뀌었다.

4) 4월 초파일의 연등
《유행경(遊行經)》에 의하면 부처님은 2월 8일[印度曆의 춘분에 해당]에 나서 2월 8일에 출가했으며, 2월 8일에 성도(成道)해 2월 8일에 열반에 들었다15)고 하는데, 그럼에도 이후 불교력에서는 음력 2월 8일을 출가일(出家日)로, 2월 15일을 열반일(涅槃日)로, 4월 8일을 불탄일(佛誕日)로, 12월 8일을 성도일(成道日)로 상정한 채 불타의 탄생과 출가·성도·열반일 등을 불교의 4대 명절로 지정, 각각 불탄일·출가일·성도일·열반일 등에 따른 의례를 시행하고 있다.

한편 대한불교 조계종의 경우 여기에 우란분일(盂蘭盆日)을 합해 불교의 5대 명절을 말하고 있기도 한다16). 여기에서는 부처님이 탄생하신 불탄일, 곧 초파일에 행하는 연등에 한하여 불교력에 따른 세시 의례에 대해 살펴보겠다.

음력 4월 8일(2009년은 양력 5월 2일에 해당)은 석가모니 탄생일이라고 전해지며 욕불일(浴佛日)이라 부르기도 하고, 민간에서는 흔히 초파일(初八日)이라고 한다. 중국과 일본 모두 4월 8일을 탄생일로 기념하지만, 일본은 음력이 아닌 양력 4월 8일로 고쳐 기념하고 있다. 초파일에는 절을 찾아가 재를 올리고 연등(燃燈)하는 풍속이 있다. 이날은 불자(佛子)이건 아니건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이 함께 즐겨 온 민속명절로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다. 이날은 연등 행사와 관등(觀燈)놀이를 중심으로 하는 갖가지 행사가 벌어진다. 중국에서도 이날 연등 행사가 이루어지나, 우리나라처럼 성행하지는 않으며, 일본에서는 연등 행사 대신 불전(佛前)에 꽃을 올리는 ‘하나마쓰리’로 대신한다.

불교적 성격을 띤 국가행사인 연등회는 551년(진흥왕 12)에 팔관회(八關會)의 개설과 함께 국가적 행사로 열리게 되었고 특히 고려 때 성행하였다. 이는 불교문화권에서 성행하던 불교의례의 하나이다. 불교에서는 불전에 등(燈)을 밝히는 등공양(燈供養)이 차공양(茶供養), 과공양(果供養), 미공양(米供養)과 함께 4대 공양이라 일컫는 헌공의례(獻供儀禮)이다17). 그것은 불전에 등을 밝혀서 자신의 마음을 밝고 맑고 바르게 하여 불덕(佛德)을 찬양하고, 대자대비(大慈大悲)한 부처님께 귀의하여 구제를 받으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것이 민속놀이로 변하면서 신도들이 등을 이용하여 기복(祈福)하는 풍속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등의 명칭에 수복등(壽福燈)이니 칠성등(七星燈)이니 만세등(萬歲燈)이니 태평등(太平燈)이니 하는 것이 생겼고, 그 외 복을 비는 각종 문구를 쓴 종이를 등에 붙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민속적 연등 행사와 불교적 연등 행사가 습합되어 오늘의 4월 8일, 곧 초파일의 연등축제로 이어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초파일은 석가탄신일을 기념하는 날이지만, 이날의 중요 행사로 지혜와 광명을 밝힌다는 신앙적 의미가 부각되어 연등 행사를 중요하게 여겼다.

한편 초파일 의식 가운데 ‘탑(塔)돌이’라는 것이 있다. 본래는 불탄일이나 큰 재가 있을 때 사찰에서 승려가 염주를 들고 탑을 돌면서 부처의 공덕을 노래하면, 신도들이 그 뒤를 등을 밝혀 들고 따라 돌면서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불교 의식이었다. 불교가 대중화되면서 민속놀이로 변천된 것이 탑돌이다. 그래서 법악기(法樂器, 聖四物)만 등장하던 것이 삼현육각(三絃六角)이 연주되고 포념(布念) 같은 민요풍 노래도 부르게 된 것이다.

이는 개인에게는 가정의 안녕과 행복을 비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초파일 법당에 찾아가서 부처님 앞에 사흘 동안 계속 가족의 건강과 복을 빌면 영험이 있다는 불교민속은 지금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조선 후기 유만공(柳晩恭)이 사·농·공·상의 서울권 중심의 세시풍속을 200여 수 써서 《세시풍요(歲時風謠)》라 이름하여 남겨 놓고 있다. 그중 〈사월 팔일〉이라는 시를 소개한다.

四月八日 부처님 목욕시키는 날
(稱浴佛日) (부처 목욕시키는 날이라고 한다)

初八燃燈似上元 초파일 연등놀이는 정월 대보름과 같으니
如來生日舊風存 부처님 생일은 옛 풍속이 남아 있다.
往看浴佛游何寺 부처 목욕하는 것을 보러 어느 절로 놀러갈까.
不是新興卽奉恩 신흥사가 아니면 곧 봉은사 일러라.

본래 불가(佛家)의 명절이었지만 불교가 일반화되면서 민가의 명절로 바뀌었다. 초파일을 ‘욕불일(浴佛日)’이라고도 하는데 이날은 절을 찾아가 재를 올리고 여러 가지 등불을 켜서 석가탄신을 앙축하여 술과 다과를 준비하여 먹고 즐겼다.

욕불일에 관불회(灌佛會)를 여는데 이 행사를 욕불회(浴佛會)·불생회(佛生會)·용화회(龍華會)·석존탄강회(釋尊誕降會)라고도 한다. 이 의식을 집행할 때는 탄생불을 불단에 모셔 놓고 그 불상에 물을 쏟으면서 부처님 오신 날을 축하하는 의식을 행한다. 《보요경(普曜經)》에 의하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용왕이 공중에서 향수를 솟아나게 하여 그 신체를 세욕(洗浴)시켰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관불회 때에는 탄생불상에다 감로차(甘露茶)를 붓는 의식을 집행하게 된다18).

5) 우란분재와 백중
음력 7월 15일에 봉행되는 우란분재(盂蘭盆霽)는 동북아시아 불교권의 대표적 불교의례 행사이다. 중국 양 무제(梁 武帝) 대동(大同) 4년(538) 동태사(東泰寺)에서 이 제의가 행해진 기록이 있으므로, 우란분재는 1,500년에 가까운 설행(設行) 역사를 지니고 있다.

우란분재에 관련된 지금까지의 연구는 크게 세 가지 방향에서 진행되어 왔다. 첫째는 우란분재의 기원과 《불설우란분경(佛說盂蘭盆經)》 《목련경(目連經)》등의 우란분재 관련 경전을 주목하는 연구다. 둘째, 우란분재에 담긴 사상성을 천착하는 연구이며 셋째, 우란분재와 관련된 민속과 제반 문화 현상에 대한 연구이다. 한국의 백중놀이·중국의 ‘목련회(目蓮會)’·일본의 ‘오봉(お盆)’ 등은 우란분재와 불가분의 관련성이 있다. 본고에서는 셋째 연구 분야 중 백중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7월 15일을 우리말로 ‘백중’이라 하는데 한자로는 ‘百種’ ‘百中’ ‘百衆’ 등으로 쓰기도 하고 ‘망혼일(亡魂日)’ ‘중원(中元)’으로 불리기도 한다. 백중의 어원은 확실치 않으나 백과(百果)를 가리키는 것 같다고 하였는데19), 7월이 되어 ‘호미씻이’를 하고 나면 발뒤꿈치가 하얗게 되므로 백종(百踵)이라기도 하고, 백 가지 씨앗 종자를 갖추었다 하여 백종(百種)이라고 했다는 등의 민간 어원이 있다. 그러나 신라 가배절 풍속이 7월 15일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보아 보름 민속의 한 형태로 짐작된다.
고려가요 〈동동(動動)〉 7월령 노래 내용에 백종(百種)날이 나온다.

七月人 보로매 아으 百種排 퍛야 두고
니믈 퍝쾬 願을 비톯노이다
아으 動動다리

특히, 절에서는 우란분회를 열어 재를 올리고 불공을 드리는 큰 명절(5대 명절의 하나)로 여겨왔다. 우란분(盂蘭盆)은 도현(倒懸) 즉 ‘거꾸로 매달리다’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avalambana에 어원을 둔 ullambana의 한자역어(漢字譯語)이다. 처음에 오람바나(烏藍婆拏)로 표기하다가 나중에 ‘오람(烏藍)’을 ‘우란(盂蘭)’으로, ‘바나(婆拏)’는 그 뜻이 ‘분(盆)’이므로 음훈(音訓)을 빌려 우란분회라 했다.

자손이 끊겨 공경을 받지 못하는 죽은 자의 혼은 저승에서도 나쁜 곳에 떨어져 거꾸로 매달리는 고통을 받는데, 이들 혼에 음식을 바쳐 고통에서 구원한다는 예로부터의 민간신앙이 불교와 습합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승려들이 여름 수행(夏安居)을 마치는 날인 7월 15일 ‘자자(自恣)’의 날에 열리는 공양회(供養會)와도 결부된 듯하다.

불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자기가 지은 죄를 고백하고 참회하는 행사가 있다. 여름 안거의 마지막 날 행해지는 자자(自恣)가 바로 그것이다. 자자는 여름 안거가 끝나는 날(음력 7월 15일) 안거를 함께한 스님들이 모여서 서로 견(見)·문(聞)·의(疑) 3사를 가지고 그동안 지은 죄를 고백하고 참회하거나, 자신에게 범계가 있다면 무엇이든지 지적해 달라고 동료 스님에게 청하는 의식이다.

자자의 이런 공덕은 우란분절로 승화되어 우리에게 효 사상을 심어주고 있다. 부처님의 10대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목련존자가 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7월 15일 안거에서 해제하는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려 법회를 성대하게 열어왔다.

《우란분경》은 중국에서 편찬된 경전으로 알려져 있지만 여기에서 유래된 우란분법회는 동아시아 불교국가에서 매우 중요한 종교 행사의 하나다.

불교가 융성했던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절에서 열리는 우란분회에 일반인까지 참여하여 갖가지 음식을 부처님께 공양하고 조상의 영전에 올려 부모의 은혜를 기렸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숭유억불책의 영향으로 차츰 불가(佛家)의 불교 의식으로만 남게 되었다. 《대승본생심지관도경(大乘本生心地觀道經)》에 네 가지 큰 은혜로 부모의 은혜, 중생의 은혜, 나라의 은혜, 삼보의 은혜를 들고 있다. 그중 부모의 은혜를 제일 먼저 꼽고 있는 것이다.

음력 7월 15일의 백중은 1년을 주기로 볼 때 시기적으로 절반쯤에 위치하고, 농사 진행 과정으로 볼 때는 세 벌 논매기가 끝난 때이므로 농부들로서는 한숨 돌릴 수 있는 때가 되는 것이다. 이날을 중원(中元)이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뿐만 아니라 1년을 반절할 때, 한 해 후반의 시작이기도 한 중요한 시기이다. 그러므로 상원과 대응되는 반복적 행사들이 거행된다. 올벼 차례(茶禮)로 보리 수확 감사와 함께 가을 추수의 농작을 예축하는 행사들이 집중되어 있고 추석의 가을제(祭)로 넘어가는 마지막 하제일(夏祭日)이다20).

백중 때의 농경제의는 파종과 수확의 중간 지점에서, 마지막 논매기를 마치고 한시름 놓은 상태에서 아무런 재해 없이 우순풍조(雨順風調)하여 풍농이 되기를 바라는 농경민의 염원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두레놀이의 대표적인 것으로 백중날 농사가 잘된 집 머슴을 두레장원이라고 하여 황소 등에 태우고 농악을 울리며 마을을 돌고, 주인집에서 술과 음식을 내어 마시며 즐기는 머슴놀이다. 백중놀이 또는 호미씻이라고 하는 이 두레놀이형은 강원도를 경계로 이남 지방에 집중적으로 행하여졌다. 원성 지방 백중놀이, 철원 지방 머슴날놀이, 동해안 지방 영동놀이, 춘천 지방 호미씻이 등이 이에 속한다.

머슴들의 놀이는 단순히 먹고 마시고 노는 데에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다. 뜨거운 하절기의 고된 농사일에 지친 몸을 하루쯤 먹고 노는 것으로 심신의 고달픔을 위안받게 된다. 그리하여 새로운 활력소를 얻어 농경 작업에 더욱 효과적으로 매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는 데에 더 큰 의의를 찾아야 할 것이다21).

백중에는 민간에서 망혼제(亡魂祭)를 지내고, 절에서는 스님들이 석 달 동안의 하안거(夏安居)를 끝내는 날이기도 하다. 즉 우란분재와 백중은 조상 영혼의 천도, 참회와 중생제도, 나아가서 일꾼들이 즐기는 농촌축제의 날이 된다. 농민들에게는 일 년에 두 차례 거대한 농민 축제가 존재한다. 겨울철 농한기인 정월 대보름과 여름철 농한기인 7월 백중이 그것이다. 그러나 대보름과 달리 7월 백중은 두레의 소멸과 더불어 거의 잊혀가는 풍습이 되었으며, 밀양 백중놀이 등에 그 잔재가 남아 있다.

민속은 지속성과 사회성 그리고 변화성이 특성인데 세시풍속도 시대의 변화에 맞춰가는 것이다. 다행스럽게 최근 사찰에서(봉은사·석왕사) 선망부모와 모든 무주고혼의 원한을 풀어 극락왕생케 할 뿐 아니라, 고통받는 생명이 질곡으로부터 해방돼 죽은 자와 산 자가 일심으로 만나는 현대적 의미로 계승된 행사를 마련하고 있다.

1986년에는 수해 참사자 및 수몰 장병들에 대한 천도재가 사찰 단위로 열리고 노동민속을 외국인 노동자로 영역을 확대해 노동해방의 참의미를 되새기는 행사로, 지구촌 한가족 축제로 계승하고 있다. 나아가 효자효부 시상을 통해 효행심 고취라는 교육적 효과도 거두고 있다.

6) 동지불공과 동지팥죽
동지(冬至)는 일 년 중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길다. 하지(夏至)부터 짧아진 해가 동지를 기점으로 하여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데, 이를 옛 사람들은 태양이 재생되는 것으로 여겼다. 동지는 시작·재생·부활의 종교적 상징성을 띄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민간신앙과 습속을 수용하여 불공의례가 행해진다. 동짓날 절에 가서 공양물로 팥죽을 올리고 새해의 발원을 다짐하는 의례를 한다. 동지불공(冬至佛供)은 그 성격상 액(厄)을 소멸하고 새해의 길운(吉運)을 추구하는 기원적 요소가 강하다.

동지는 입춘(立春)으로부터 일 년 24절기의 스물두 번째 절후다. 죽음과 재생이라는 종교적 모티브를 지녔기 때문에 많은 민족의 신앙적 습속을 이루고 있다.

중국의 《역경(易經)》에서도 태양의 시작을 동지로 보았으며, 주(周)나라에서는 11월을 정월로 삼고 동지를 설로 정하였다. 지금도 민간에서는 동지를 ‘작은 설’이라는 의미로 아세(亞歲)라 하여 어느 집이나 팥죽을 쑤어 먹으며 경사스러운 날로 여겨 속절(俗節)로 삼고 있다.

신라와 고려에서는 동지를 전후하여 팔관회를 지냈는데, 이를 중동팔관회(仲冬八關會)라고 한다. 불교는 24절기의 하나인 동지를 불공의례로 수용하면서 민간신앙의 요소로 흡수하게 되었다. 불공으로 올린 팥죽은 의례에 의하여 성화(聖化)되고 염력(念力)이 깃들었다고 이해되기 때문에 그것을 절에서 먹을 뿐만 아니라 불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얻어가 가족과 이웃에게 나누어 먹이면서 새해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다.

불공의례는 헌공(獻供)·정례(頂禮)·참회(懺悔)·발원(發願)·회향(回向)·시식(施食)의 순으로 진행되는데, 특히 동지불공에서는 지난해의 잘못을 참회하고 새해의 희망을 발원하는 송구영신의 의미가 강조된다. 따라서 불공의례로 성화된 동지팥죽을 함께 나누어 먹으며, 지난해의 액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의미로 몸에 착용했던 헌 옷가지를 불태우는 소대의식(燒臺儀式)도 행한다. 신도들은 동지불공에 참여하여 기도정근을 하면서 새해의 삶을 신앙심으로 다짐하는 것이다.

동짓날에 쑤는 붉은 팥죽의 유래는 《형초세시기》에 나온다. 공공씨가 재주 없는 아들이 동짓날에 죽어 역귀가 되었다. 그 아들이 생전에 팥을 몹시 두려워했으므로 동짓날에 팥죽을 쑤어 역질 귀신을 쫓는 것이다22)라고 했다. 이러한 풍속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으로 여겨지나 그 시기는 알 수 없다.

민간에서의 동짓날 팥죽은 조상께 제사 지내고 방·마루·광·헛간·우물·장독대에 한 그릇씩 놓는다. 또 들고 다니며 대문이나 벽에 뿌리면 귀신을 쫓고 재앙을 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고대인들은 붉은색이 주술적인 위력을 지닌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태양·불·피 같은 붉은색을 생명과 힘의 표식으로 삼았고 이를 숭상한 것이다. 동지 외에 삼복에도 끓이며 이사하거나 새집을 지었을 때도 팥죽을 쑤어서 잡귀를 쫓아내고 무사를 기원했다. 전염병이 창궐할 때에도 팥죽을 쑤어 길에 뿌려 병마를 쫓았으며 초상집에 팥죽을 쑤어가 잡귀를 범접하지 못하게도 하였다.

4. 나오는 말

한국 세시풍속 형성에는 자연적 요인과 농경 문화적 요인 그리고 종교적 요인이 결정적 작용을 했다. 농경적 신앙은 순수한 민간신앙으로서 필요에 의해서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돼 온 것이다.

비나 기우제에 관한 기록이 〈위지 동이전〉의 부여 조에 “옛 부여 풍속에 가물어서 물이 고르지 못하고 5곡이 익지 않으면 문득 허물을 왕에게 돌리고 마땅히 바꿔야 한다고 하고, 혹은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했다. 그 밖에 실록에 기우제에 관한 기록들이 전하고 있다.

왕은 우사(雨師, rain maker), 종교적 사제자로서 제정일치성을 보여주고 있다. 부여의 영고는 정월에, 고구려의 동맹과 예의 무천은 10월에, 한은 5월과 10월의 농공시필기에 국중대회를 했다. 정초와 봄의 파종 후의 풍년 기원이며, 10월의 추수에 대한 감사제로서의 농경의례인 동시에 대표적인 민간신앙으로서의 세시풍속 행사였다.

불교적인 세시풍속 행사로 정월의 법고와 적선, 2월 초하루의 부루단지, 4월 초파일의 연등, 7월의 우란분재와 백중, 12월의 동지불공과 동지팥죽 등을 계절별로 살펴보았다. 이러한 각종 행사는 불교의례와 함께 민간 습속으로 습합되어 현재에도 생활화된 의례인 것이다.

이러한 의례는 지역·시대에 따라 특정 지역의 풍속이나 시대적 의식과 함께 습합·수용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불교국가였던 신라나 고려시대에는 왕실 중심의 불교의례적 특성을 강하게 보이고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점차 민속적 속성을 보이는 의식이 반영되기도 하였다.
불교는 우리 민속이나 세시풍속 형성에 직간접적인 수수 관계뿐만 아니라 국민의 정신생활에 미친 영향이 매우 크다고 본다. ■

오출세 /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박사. 현재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저서로는 《한국서사문학과 통과의례》 《한국민간신앙과 문학연구》 《한국불교민속문학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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